매년 10월 9일에는 각종 웹페이지와 TV 방송사의 로고들이 한글로 변신한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애민 정신, 훈민정음의 과학성과 독창성, 그리고 오늘날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한글의 위상까지, 10월이 되면 우리는 한글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한글날은 우리에게 익숙한 문자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날이다. 특히 2026년은 훈민정음 반포 580돌이면서 한글날 제정 100돌, 그리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문자 훈맹정음 반포 100돌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한글은 단지 ‘우수한 문자’에 머물지 않는다. 세종의 한글 창제 이후,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사용되고 변화하며 그 가치를 증명해 왔다. 2011년 방영된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는 한글과 관련된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강채윤(장혁 분)과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서준영 분)의 대화이다. 강채윤은 “백성들은 글자를 만들어도 아무도 배우지 못할뿐더러 관심도 없을 거다. 백성들이 천 자가 넘는 글자를 어떻게 배우겠냐”라며 광평대군을 비꼰다. 이에 광평대군은 “스물여덟 자다”라고 답했다. 강채윤은 잘못 들은 듯 “천스물여덟 자요?”라고 되묻는다. 하지만 광평대군은 “아니, 그냥 스물여덟 자다”라고 힘주어 대답한다. 이때 강채윤의 놀란 표정을 배경으로 소이(신세경 분)가 “반나절이면 배울 수 있다”라고 못을 박는다. 한글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담을 수 있어 스물여덟 자로 십만 가지 백만 가지의 글자를 만들 수 있다는 이들의 대화는 그 어떤 학술적인 설명보다 한글의 우수함을 잘 대변해 준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한글은 누군가의 생각을 표현하게 하고,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게 하며, 자신의 삶을 기록하게 하고, 서로의 마음과 경험을 나누게 하였다. 한글은 우리말을 더욱 쉽게 기록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함으로써 지식과 정보의 전달 범위를 넓혔다. 의학과 농업, 군사와 행정에 관한 지식도 한글로 옮겨졌고, 유교적 윤리와 생활의 지침을 설명하는 책도 한글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동의보감>에 한글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의보감>은 의관 허준(許浚, 1539~1615) 등이 선조의 명으로 중국과 조선의 의서를 집대성하여 1610년(광해군 2)에 편찬하고, 1613년(광해군 5)에 간행한 의서이다. <동의보감>은 내과의 질병을 다룬 ‘내경편(內景篇)’, 외과의 질병을 다룬 ‘외형편(外形篇)’, 내과와 외과를 제외한 여러 가지 병증을 다룬 ‘잡병편(雜病篇)’, 약물에 관한 지식을 다룬 ‘탕액편(湯液篇)’, 침과 뜸을 통해서 병을 고치는 방법이 상세히 설명된 ‘침구편(鍼灸篇)’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인 누구나 알고 있는 책이지만, 내용은 잘 모르는 이 책의 ‘탕액편’에 한글이 등장한다.
[사진 1]은 탕액편 곡부(穀部) 중 한 면이다. 탕액편에는 640여 개의 약재 이름이 수부(水部)·토부(土部)·곡부(穀部)·인부(人部)·금부(禽部)·수부(獸部) 등 여러 부로 나뉘어 나열되어 있다. 먼저 약재의 이름을 한자로 쓰고, 그 아래에 한글로 당시 조선에서 사용되었던 용어를 적은 뒤 약재의 성질·맛·약효 등을 기재하였다. 사진에서 보듯이 ‘豆黃(두황)’은 ‘콩(콩가루)’, ‘大豆黃卷(대두황권)’은 ‘콩기룸(콩기름)’, ‘赤小豆(적소두)’는 ‘불근(붉은 팥)’, ‘葉(엽)’은 ‘닙(팥잎)’, ‘花(화)’는 ‘(팥꽃)’이라 이름하였다.
당시에는 약이 부족한 지역이 많았고, 일반 백성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를 실제로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익숙한 이름으로 약재를 분류하고 효능을 함께 적어, 현실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글이 반포된 지 160여 년이 지난 후 국가사업으로 간행된 <동의보감>의 한글 표기는 전문적인 의학 지식이 일반 백성에게 확산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점에서 세종의 한글 창제의 목적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19세기에 들어서면 <동의보감>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이 책([사진 2])은 애초 전체를 언해(諺解: 한문을 한글로 풀이함)할 목적이었으나 ‘내경편’만 별도로 번역되었고, 왕실의 의녀 등을 위해 언해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발 술을 마시지 말라
<어제계주윤음(御製戒酒綸音)>([사진 3])은 영조가 1757년(영조 33) 11월에 내린 윤음(綸音: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에 한글 토를 달고, 윤음 전문을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영조는 술을 경계하는 내용의 이 윤음을 목판으로 간행하게 하고, 전국으로 배포하였다. 이 윤음에 앞서 영조는 1731년(영조 7) 계주문(戒酒文)에서 술의 폐해를 언급하며, 술이 없을 수 없으니, 술을 많이 빚는 것에 대해서만 금령을 내리겠다고 밝혔다. 1757년 10월에도 서울의 부로(父老: 어르신)를 불러 술을 경계하라는 윤음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가도록 금주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영조는 새로운 윤음을 내리며, 관원들이 술을 삼가지 않는 것이나 백성들이 금주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자신의 불성실 때문이라고 자책하였다. 영조는 금주령의 법률을 고쳐 관리들이 금주령을 어기면 10년 금고, 유생이 어기면 10년 동안 과거 응시 정지, 서민과 천인은 10년 동안 종으로 삼되 술을 빚은 자나 마신 자 모두에게 같은 처벌을 적용하게 하였다. 영조는 이 윤음에서 관료들의 솔선수범을 강조하며, 그들이 술을 경계하여 백성의 모범이 되기를 권하였다.
그렇다면 영조의 금주령은 성공하였을까? 5년 후인 1762년(영조 38) 9월 12일 영조는 <어제경민음(御製警民音)>([사진 4])이라는 또 다른 윤음을 내린다. 그 윤음의 내용은 역시 술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이 해에 금주(禁酒)를 강화했으나 역관들이 모여 술을 마신 일이 발각되었다. 이에 권극(權極)은 술을 마시는 것을 철저하게 막기 위해 금주령을 어긴 사람을 적발하는 대로 효시하자고 주장하였다. 영조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고, 금주령을 어긴 경우 효시한다는 내용을 담아서 이 윤음을 내리게 되었다.
도저히 지켜지지 않는 금주령에 답답했던 영조가 술을 마시면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엄포로 백성들에게 금주를 호소한 것이다. 심지어 영조는 금주를 위하여 국가 제사에서조차 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윤음은 한자본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한글로 작성해 반포하였다. 이는 국가의 정책을 모든 백성이 쉽게 이해함으로써 법을 어기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영조의 금주령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임금이 백성에게 생각을 전하고자 할 때 ‘한글’이라는 문자를 이용하였다는 점에서 당시 한글의 보편성과 효용성을 확인할 수 있다.
온라인 특별전, ‘한글, 사람과 삶을 잇는 문자’
한글과 관련된 옛 문헌을 궁금해하는 분들을 위해서 조그만 온라인 전시 하나를 소개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마련한 온라인 특별전 ‘한글, 사람과 삶을 잇는 문자’ (jsg.aks.ac.kr/ejsg)에서는 말하는 한글을 ‘문자의 탄생’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글, 만들고 연구하다’에서 출발하여 ‘삶의 본보기를 가르치다’, ‘백성의 삶을 돌보다’, ‘관료의 현장 경험을 전달하다’, ‘여성의 일상과 규범을 기록하다’, ‘왕실 의례를 행하다’, ‘문학으로 자연과 삶을 노래하다’까지 모두 7개의 주제로 이어진다. 이를 따라가다 보면 한글이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한 문자에서 벗어나 사회 곳곳으로 스며들고,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기록하고 변화시키는 도구로 자리 잡아가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한글은 책 속에만 존재했던 문자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지식을 전하고, 누군가의 삶을 돌보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 온 문자였다. 한글날, 우리가 기념해야 할 것은 단지 580년 전 만들어진 문자만이 아닐 것이다.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 누구나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했던 ‘사람을 향한 문자’의 정신, 바로 그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