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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경기 용인 샘말초(교장 김혜경)는 24일학부모회 주관으로크리스마스 선물 나눔 행사를 가졌다. 행사는 나눔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이웃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실천하는 샘말초 학생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루어졌다. 추운 날씨에 등교하는 학생들을 산타와 루돌프가 등교 맞이 행사로 응원하였으며 크리스마스 및 연말을 기념하는 트리 장식을 1층 중앙현관에 꾸며 산타와 사진을 찍었다. 각 반에 산타가 방문하여 학생들에게 격려의 말과 함께 학용품을 나누어 주었다. 연말을 맞이한 학생들 모두에게 따뜻하고 풍성한 시간이 되었다. 나00 샘말초 학부모회 부회장은“크리스마스 나눔 행사에 대한 기획, 회의, 구매, 포장 등 준비하면서 보람을 많이 느꼈고 이번 행사에 학부모회 모두가 함께 참여해 주셔서 감사했다. 크리스마스 정신과 나눔의 가치를 알아가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또 일년을 마무리하는 연말에 학생들에게 한해동안 수고했다는 의미로 기억되고 학생들의 따뜻한 하루로 추억이 된다면 보람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00 2학년 학생은 “산타할아버지와 인사도 나누고 산타할아버지에게 받는 학용품 선물도 감사했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라고 말하며 미소 지었다. 김혜경 교장은 “추운 등굣길에 학부모회원님들의 따뜻한 격려와 응원으로 아이들에게 행복한 크리스마스 이브가 된 것 같다. 나눔의 가치를 알고 지역사회와 도움을 주고받는 성숙한 민주 시민 의식을 키우는 기회가 되길 바라며 바른 인성의 실천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라고 말하였다.
한국교총 세대별(2030·3040) 위원회(이하 교총 위원회)가 연말을 맞아 소외된 이웃을 위해 봉사활동을 펼쳤다. 강주호 교총 회장을 비롯한 교총 위원회 운영진 15명은 21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전국천사무료급식소 서울종로점에서 어르신들의 식사 배식에 나섰다. 전국천사무료급식소는 독거노인과 소외된 이웃을 위해 1992년부터 무료 급식을 제공하며, 전국에 26곳을 운영 중이다. 이날 봉사활동에 참여한 교총 교사회 운영진은 음식 배식과 식판 운반, 잔반 처리 등에 손을 보탰다. 2030 청년위원회 운영진으로 활동 중인 장경호 교사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것 못지않은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3040 위원회 소속인 이승리 교사도 “이번 활동을 계기로 앞으로 봉사활동을 많이 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봉사활동을 마친 후 교총은 전국천사무료급식소에 후원금도 전달했다.
대학교·대학원 졸업생 취업률이 조사 대상 변경 등의 이유로 70%를 처음으로 넘어섰다. 하지만 매년 하락 추세인 교대는 처음으로 50%대로 떨어졌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은 전국 고등교육기관의 2022년 8월·2023년 2월 졸업자 64만6062명을 대상으로 2023년 12월 31일 기준 취업 현황을 분석한 ‘2023년 고등교육기관 졸업자 취업통계조사’ 결과를26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2022년 8월과 2023년 2월 고등교육기관 졸업자 중 취업자는 38만9668명으로 취업 대상자 55만4281명의 70.3%다. 전년의 69.6%과 비교하면 0.7%포인트(P) 높다. 해당 조사에서 취업률 70% 돌파는 처음이지만 이전과 조사 대상이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번 조사부터 방송통신대학, 사이버대학, 원격대학, 기술대학, 전공대학, 사내대학. 전문대학원, 특수대학원, 대학원대학까지 대상이 확대됐다. 학교 유형별 취업률은 대학원이 82.4%로 가장 높고, 전문대학 72.4%, 일반대학 64.6%, 교육대학 59.5% 순이다. 일반대, 전문대, 교대 취업률은 전년보다 소폭 하락했다. 특히 교대 취업률이 50%대에 들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0년 전만 해도 교대 취업률은 80%대를 상회했으나 학령인구 감소 등의 이유로 2018년 60%대로 급감한 이후 매년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계열별 취업률은 의약계열이 82.1%로 가장 높고, 공학계열은 71.9%로 평균 취업률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다. 교육계열(69.5%), 사회계열(69.4%), 예체능계열(67.2%), 자연계열(66.5%), 인문계열(61.5%)은 모두 평균 취업률을 밑돌았다. 지역별로 보면 수도권 소재 학교가 72.2%로 비수도권의 68.5%보다 3.7%P 높다. 이는 전년 지역별 격차(2.7%P) 대비 1%P 증가한 수치다. 성별로는 남성 72.4%, 여성 68.5%로 3.9%P 격차다. 성별 간 차이는 전년(3.0%P) 대비 0.9%P 벌어졌다. 건강보험 직장가입자를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대학 졸업자의 월 평균소득은 309만1000원으로 전년 대비 24만4000원 늘었다. 전문대 졸업자는 257만7000원으로 9만2000원 증가했다. 대학원 졸업자는 509만6000원이다. 기업유형별 취업 비중은 중소기업이 41.8%로 가장 높았고, 비영리법인(17.2%),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12.2%), 중견기업(10.8%), 대기업(10.2%), 기타(4.3%), 공공기관 및 공기업(3.5%) 순이다. 대기업 취업자 비율은 전년 대비 2.2%P 감소했다. 교육부는 이번 취업통계조사 결과를 교육부(https://www.moe.go.kr)와 한국교육개발원(https://kess.kedi.re.kr) 누리집 및 국가통계포털(https://kosis.kr)에 탑재해 국민들이 손쉽게 자료를 활용하도록 할 계획이다.
경기도 연천군은 화산지대였다. 그래서 현무암을 어느 곳에서든 쉽게 볼 수 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돌을 처음 보았을 때는 너무 신기했다. 우리나라 전체에서 제주도 이외에 이렇게 흔하게 현무암을 볼 수 있는 곳이 어디에 또 있을까? 전곡리 구석기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한탄강과 임진강 주변으로는 선사시대의 사람들이 정착해서 삶의 터전을 이루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부족을 이루고 또 자연스럽게 권력자가 나타났을 것이다. 그들이 무덤인 고인돌(지석묘)이 연천군 곳곳에서 발견된다. 또한 용암, 화산지대가 만들어낸 거대한 바위의 형상은 장관을 이룬다. 임진강과 한탄강을 타고 흐르던 용암은 굳어서 거대한 절벽을 형성했다. 자연이 빚어낸 최고의 절경이다. ○ 좌상바위경기 연천군 전곡읍 신답리 307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영화 ‘은교’에서 이적요 시인이 했던 말이다. 그는 시인 로스께의 말을 인용하며 “늙는다는 것은 이제까지 입어 본 적이 없는 납으로 만든 옷을 입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늙어가는 것이다. 늙어가는 것은 ‘상실의 벌’ 일지도 모른다. ‘벌’은 슬픈 것도 아픈 것도 아니다. 그냥 감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일일 뿐이다. 그렇다. 늙어가는 것은 그냥 벌일 뿐이다. 슬퍼하거나 분노할 필요도 없다. 어느 순간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슬퍼질 때가 있었다. 늙어 가는 것, 어쩌면 그 나이에 어울리는 행동과 옷차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가 하나씩 더해진다. 그래서 납으로 된 옷을 입는다고 표현했을 것이라 생각해 보았다. 영원할 줄 알았던 스물다섯의 나이는 어느덧 25년 전의 시간이 되어 버렸다. 잠시 눈 감았다 다시 뜨니 25년이 지나가 버린 느낌이다. 삶은 크고 작은 파도가 되어 우리에게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든다. 파도를 헤치는 법을 알고 싶은데 녹록치 않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 배웠던 방법도,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알게 되었던 방법도 잘 통하지 않는다. 젊었을 때는 나이가 들면 저절로 사는 방법을 터득할 것이라 믿었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에게 부딪치는 크고 작은 파도는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한다. 하나의 파도를 넘으면 이내 더 큰 파도가 나를 덮친다. 고려시대 국사인 지눌은 “땅에서 넘어진 자(人因地而倒者), 땅을 딛고 일어나라(因地而起)”고말했다. 수 백 년전의 진리는 현재, 아니 앞으로의 미래에도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할 터이다. 넘어진 곳을 그대로 딛어야만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일어서야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낼 수 있다. 그래야 또 걸을 수 있다. 넘어졌다 일어서 본 사람만이 넘어진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넘어져 봐야 나에게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다. 파도가 덮치건 넘어지건 어찌어찌라도 버티며 사는 게 인생이다. 한 곳에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크나큰 바위는 늙어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희석시켜 준다. 같은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는 것이 그토록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좌상바위는 재인폭포에서 6~7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자동차로 약 15분이면 닿을 수 있다. 좌상바위 주변 한탄강은 수심이 얕고 물살이 빨라 견지낚시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주차장에서 200m를 도보로 이동하면 좌상바위를 마주하게 된다. 실제로 걸을 때에는 조금은 멀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통행로가 잘 가꾸어져 있고 평탄하기 때문에 접근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이 곳에 닿으면 탁 트인 한탄강이 보인다. 약 10여분 걷고 나서 마주한 좌상바위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웅장했다. 바위가 아니라 산에 가까울 정도로 규모가 크다. 바위라는 명칭 때문에 자칫 조그만 바위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이름만 바위이지 훨씬 거대하다. 절벽을 만들며 우뚝 서서 한탄강을 여유롭게 내려다보고 있는 좌상바위의 위엄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좌상바위의 아래는 한탄강의 세찬 물살이 굉음을 내며 휘감고 흐르고 있다. 물속에 들어가서 낚시를 하기에는 조금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탄강의 바닥은 대부분 울퉁불퉁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어느 곳이 깊은지 얕은지 가늠하기 어렵다. 한 발짝만 잘못 내딛어도 깊은 웅덩이가 있을 수 있다. 어릴 적 여름 휴가철이면 사망사고가 많이 났었던 기억이 난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 어느 선생님께서 여름방학을 앞두고는 한탄강에서는 특히 조심해서 물놀이를 해야 한다는 당부를 들으며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좌상바위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신답리 한탄강 주변에 위치하는 약 60m 높이의 불뚝 솟아있는 바위로 중생대 백악기 말에 화산활동으로 분출한 용암이 굳으면서 형성된 현무암 바위산이다. 좌상바위의 재질은 제주도의 현무암과 다르게 응회암질 퇴적 현무암으로 다양한크기의 화산자갈이 포함되어 있어 화구나 화도 부근에 용암이 퇴적되면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두산백과 두피디아). 좌상바위는 오랜 기간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왔다. 신선이 노닐던 바위라고 하여 선봉 바위, 풀무 모양을 하였다 하여 또는 그 곳에서 풀무질을 하였다 하여 풀무산, 스님이 앉아 있는 모양이라 하여 좌살바위, 한국전쟁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하여 자살바위 등등.그러나 어떤 이름보다도 현재 좌상바위가 위치하고 있는 청산면 일원에서 가장 많이 불려지고 있는 것은 ‘좌상바위’이다(연천문화원). ○ 아우라지 베개용암경기 포천시 창수면 신흥리 산209-1 오랜 세월 변함없이 같은 곳을 지키고 있는 무언가는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준다. 그래, 어쩌면 그 곳은 우리가 반드시 찾아가야 할 자리인지도 모른다. 어릴 적 거의 매일 친구들과 함께 했던 오징어 게임도 지금은 드라마의 소재가 되는 신기한 퍼포먼스가 되었다. 컴퓨터, 모바일 게임에만 익숙한 MZ세대 세대에게 예전의 놀이 들은 낯설고 신기할 뿐이다. 당시 우리에게 유행했던 취미활동은 우표수집이었다. 오래될수록 가치를 인정해 주었고 희귀할수록 더 가치가 올라간다. 기념우표가 발행되는 날이면 우체국 앞에 새벽부터 줄을 서며 기다렸다. 심지어 텐트를 치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겨우 얻게 된 우표를 보며 뿌듯한 기분을 느꼈고 친구들에게도 자랑할 수 있었다. 필자는 서울에서의 중고교 시절에도 전곡읍의 친구들과 손편지를 주고 받았다. 손편지라는 말도 최근에야 생긴 말이다. 편지는 당연히 손으로만 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버튼 몇 번으로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밤새 마음을 꾹꾹 눌러쓴 서툰 글씨체의 편지는 낭만이 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 집 우편함에 얌전히 꽂혀있는 친구의 답장은 마치 선물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아우라지 베개용암은 재인폭포에서 전곡 방향으로 나오는 길에 있으며 포천시와 연천군에 함께 걸쳐 있다. 베개 모양처럼 누웠다고 해서 아우라지 베개용암이라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영평천과 한탄강이 만나는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데, 안내소에 주차를 한 후 약 10여분간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 아우라지 베개용암이 있는 한탄강의 건너편에 전망대가 있으며 망원경으로도 관찰이 가능하다. 전망대 인근에는 낚시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어민들이 조그마한 배와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모습도 보인다. 주변에 차량 이동이 거의 없어 너무나 조용하고 한적했다. 아우라지 베개용암에서 시작되는 한탄강 주상절리길은 또 다른 묘미를 준다. 한탄강 주상절리길은 총 27.9㎞로 포천과의 경계인 영평천으로부터 한탄강이 임진강과 만나는 도감포까지 4개의 구간으로 나누어진다. 영평천길(푸르내길)은 5.5㎞로 포천시와의 경계인 청산면 백의리 영평천에서 영평천이 한탄강을 만나는 아우라지까지이다. 아우라지에서 한탄강 하류 쪽으로 고탄교까지 ‘땅에 미소길’은 8.3㎞이며 다음 하류 쪽으로 고탄교에서 은대리성까지는 ‘선사 유적길’로 총 8.2㎞, 마지막으로 한탄강이 임진강을 만나는 도감포까지는 5.9㎞이다. 연천 쪽 한탄강을 둘러싼 총 길이 27.9㎞의 한탄강 주상절리길에서는 주상절리의 절경과 더불어 선사 유적부터 삼국시대 그리고 근현대 역사 유적과 현대를 살아가는 지역주민의 삶을 고스란히 느껴볼 수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한탄강지질공원). ○ 양원리 지석묘(고인돌) 양원리 지석묘는 파주에서 연천으로 들어오는 경계에 위치해 있다. 필자는 전곡읍을 갈 때 항상 의정부 – 동두천- 전곡을 지나는 자동차 전용 국도를 이용한다. 구리-포천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의정부의 민락IC로 빠져나오면 이 도로와 바로 연결된다. 국도 3호선 우회도로이다. 얼마 전까지 동두천까지만 도로가 이어졌는데 최근에는 전곡까지 개통되었다. 이 도로는 언제나 한적해서 좋다. 그리고 곡선 코스 없이 거의 일자로 달릴 수 있다.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동두천 인근에서 남면이라고 씌여진 표지판을 보고 빠져나오면 어릴 적 잠시 살았던 은현면 봉암리가 나온다. 필자는 봉암리에서 전곡으로 가는 외진 도로를 항상 이용한다. 길가의 편의점에서 커피도 마시고 잠시 쉬면서 살며시 상념에도 잠겨본다. 은현면에서 전곡읍으로 가는 길 의 도중, 한탄강 유원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양원리 지석묘의 표지가 우측으로 보인다. 도로에서 약 50M도 채 안 될 정도로 가깝다. 간판을 따라 우회전을 하면 조그만 마을 입구와 공장이 보이는데 그 앞 공터에 양원리 지석묘가 한가로이 자리하고 있다. 양원리 지석묘, 즉고인돌은 나름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건물이나 인공 구조물도 거의 없고 야트막한 평지에 잔디밭, 주변에는 소나무로 보이는 큰 나무들이 적절한 배경을 이루면서 서 있다. 여러 그루의 큰 나무들 사이에 자리 잡아서인지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 통현리 지석묘(고인돌) 현대인의 특성을 ‘건너뛰기’ 로 표현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유튜브나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진득하게 보지 않고 대부분이 요약본을 보거나 스킵, 즉 건너뛰기를 계속하면서 본다는 의미이다. 사실 필자도 어느새 건너뛰기가 습관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여행은 건너뛰기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곱씹으며 그 지역을 눈과 귀에 담고 마음을 기록한다. 내면의 의식을 구체화하는 과정이 기록이다. 전국의 자연인,즉인적이 없는 산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을 다룬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인기다. 메인 방송국의 프로그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높은 시청률을 보인다. 어쩌면 우리, 특히 중년의 남자들은 자연인을 꿈꾸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또는 내가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로망’을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 잠시 대리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 복잡한 일상의 도시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은 욕구는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만큼 현대인은 삶과 생활에 지치고 피곤하다. 고인돌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이다. 통현리 일대는 연천 지역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 고인돌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이 일대에는 8기의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중 제자리에 있는 것이 4기이고 나머지는 주변 지역으로 이동된 상태이다. 주민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현재 고인돌이 위치한 주변으로 적어도 수십 기가 더 분포하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연천문화원). 통현리 지석묘(고인돌)는 3번 국도 전곡읍에서 연천읍 방향으로 약 10여분 가다 오른쪽으로 통현2리 고인돌 표지판을 보고 우회전하면 된다. 이 마을 동쪽 끝자락의 낮은 구릉지에 위치한다. 주변에는 민가와 비닐하우스 등이 있고 밭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통현리 지석묘는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비닐하우스와 공장 사이에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지석묘를 지탱하기 위해 쇠기둥이 3개 박혀있다. 어울리지 않는 흉물스럽기까지한 모습이었으나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통현리 지석묘의 주변에는 야트막한 산과 경작지가 푸른색으로 펼쳐져 있다. 평온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특별한 볼거리도 아니고 역사적 의미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방치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양원리 고인돌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보존이 안 되어 있다. 하긴 4만 여 기(基)나 되는 고인돌을 어찌 유적으로 잘 보존할 수 있을까? 연천 고인돌 공원은 통현리 고인돌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연천읍 통현리 199-2 외)군 지정 문화재이다. 연천군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을 옮겨와 2003년 11월부터 2004년 6월에 걸쳐 복원하여 고인돌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연천 고인돌 공원은 총 16기의 고인돌을 모두 모아 둔 장소이다. 다양한 모양의 고인돌을 볼 수 있었다. 연천 고인돌 공원 바로 옆에는 아파트 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다소 어울리지 않은 모습이다. 그전에 보았던 고인돌은 모두 시골 조그만 마을의 한 구석에 있었다. 연천 고인돌 공원은 아파트 단지 바로 옆 근린공원의 느낌이다. 현대 문명의 상징인 아파트와 오래전 유적인 고인돌의 만남, 어쩌면 현재와 과거를 함께 묶어둔 아이러니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 학곡리 고인돌/적석총 임진강 가에 자리잡고 있는 학곡리는 예부터 학이 많이 날아들어 학곡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파주 적성면에서 임진강 비룡대교를 넘어 우회전하여 약 10분 자동차로 이동하면 우측에 학곡리 마을이 보인다. 임진강을 지척에 접하고 있으며 평탄한 지형의 자그마한 마을이다. 시골 마을의 정취가 아름다운 학곡리 마을은 이곳의 옛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유적을 품고 있는데, 하나는 고인돌이고, 다른 하나는 돌을 쌓아 만든 적석총이다. 마을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학곡리 고인돌은 두 개의 고임돌 위에 넓은 덮개돌이 올려져 있는 탁자형인데,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현무암 재질의 덮개돌 위에 차분하게 빗물이 적당히 고여 있어 또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학곡리 적석총은 마을을 조금 벗어나 임진강 가의 구릉지대에 만들어져 있는데, 강가에서 구하기 쉬운 둥글둥글한 강돌을 쌓아 올려 만들었기에 돌무지무덤이라고도 불린다. 학곡리 적석총은 학곡리 돌마돌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m정도 떨어진 임진강변의 자연제방 위에 위치하고 있다. 강 쪽의 구릉 말단부에 일정한 크기의 강돌을 보강하여 적석부의 붕괴와 유수로 인한 침식을 막고 자연구릉에 기대어 돌을 쌓았다. ○ 삼곶리 돌무지무덤/임진강 댑싸리 공원경기 연천군 중면 삼곶리 422 삼곶리 돌무지무덤(적석총)은 다른 고인돌과는 조금 멀리 떨어진 연천군 중면에 위치해 있다. 1994년 유적건조물로 지정되었다. 삼곶리 돌무지무덤은 댑싸리 공원 내에 있다. 댑싸리 공원을 관람하면서 함께 보면 좋을 듯하다. ‘삼곶리 돌무지무덤’은 원삼국 시대 늦은 시기의 집단 무덤으로 임진강 유역에서 처음 발굴 조사된 돌무지무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무덤은 고구려 적석총과 다르게 분구 위의 돌층이 두텁지 않기 때문에 즙석묘, 즙석총, 즙석식적석묘 등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었지만, 최근 학계에서는 ‘적석분구묘’로 부르기도 한다. 연천 삼곶리 돌무지무덤은 중면 삼곶리, 충적지대에 있다. 1994년 경기도의 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땅을 평평하게 정리한 다음 그 위에 한두 겹의 자갈돌을 깔아 무덤터를 마련하였다. 동, 서 2개의 무덤은 덧붙여 지어진 쌍분으로 평면형태가 표주박형에 가깝다. 무덤 북쪽에는 제단 시설로 생각되는 무덤지역이 있다. 덧널(곽) 안에서는 사람의 뼈조각, 쇠로 만든 화살촉, 구슬들이 나왔고 그 주변에서 토기조각과 숫돌들이 발견되었다. 전체적인 무덤의 양식이나 유물로 보면, 백제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위키백과). 현재 안내판에는 연천 삼곶리 돌무지 무덤은 백제의 무덤이라고 나와 있다. 그리고 임진강변에는 약 7km간격으로 백제의 돌무지 무덤이 분포하고 있으며, 주거 유적과 함께 이 일대에 대한 삼국시대 백제 초기의 지배 양상을 보여준다고 하여 돌무지 무덤이 백제의 유적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설명하고는 있다. 8월의 댑싸리 공원은 초록으로 물들어 있다. 댑싸리는 쌍떡잎식물이며 명아주과의 한해살이풀이며 코키아라고도 일컫는다. 계절에 따라 그 색깔이 변한다고 한다. 임진강 댑싸리 공원은 연천 삼곶리 돌무지무덤 바로 앞 약 3만㎡ 규모로 댑싸리 2만여 그루를 심어 공원으로 조성한 곳이다. 동글동글하고 자그마한 아이같은 모습의 댑싸리는 8월 말부터 불긋불긋해지고 9월 초 무렵이면 분홍색등 여러 가지 형형색색으로 가을의 들판을 물들인다. 9~10월경이면 단풍이 절정에 이른 형형색색의 댑싸리를 볼 수 있다.
교육부는 2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제10차 사회관계장관회의를 개최하고 ‘조손가족 아동의 안정적 양육·성장 지원방안’, ‘국가책임 입양체계 개편 방안’, ‘제1차 전통문화산업 진흥 기본계획’, ‘신종감염병 대유행 대비 중장기계획 2024년 주요성과 및 향후 계획’을 상정했다고 밝혔다. ‘조손가족 아동의 안정적 양육·성장 지원방안’은 소외될 수 있는 조손가족을 조기에 발굴하고, 조손가족 아동의 안정적인 양육·성장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마련됐다. 정부는 조손가족 맞춤형 지원을 위해 학생에게 학교장 추천으로 방과후 학교 자유수강권을 지원하고, 가족센터와 청소년상담복지센터를 연계해 상담을 제공하는 등 학업과 심리·정서 지원을 강화하기로 했다. 조부모를 돌보고 있는 가족돌봄청(소)년 등이 이용 가능한 일상돌봄·긴급돌봄 서비스 운영 지역도 확대한다. 주거 안정을 위해서는 고령자복지주택 공급을 연 1000호에서 3000호로 늘리고, 한부모가족복지시설에 조손가족이 입소 가능하도록 개선하는 등 주거시설 입주 기회를 확대한다. 양육 부담 완화를 위해 아동양육비 지원단가도 인상(2024년 월 21만 원→ 2025년 월 23만 원)한다. 정보 접근에 어려움을 겪는 조손가족에게 선제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안내하기 위해 사회보장급여(기초연금 등)를 신청하는 조손가족의 정보를 본인 동의하에 가족센터로 연계하고, 전국 가족센터 중심 지역사회협의체를 통해 ‘지역 내 취약·위기 조손가족 집중 발굴 기간’을 운영(2025년 3~4월)할 예정이다. 또한 인터넷을 활용한 정책정보 파악에 어려움을 느끼는 조부모를 위해 ‘손자녀 돌봄‧양육 지원정책 안내서’를 제작해 주민센터 등을 통해 내년 하반기쯤 배포하고, 손자녀를 대상으로는 내년 상반기까지 청소년정책 홍보채널을 통해 정책 홍보를 강화하기로 했다. ‘가족상담전화(1577-4206)’를 통해서도 조손가족 정책정보를 제공한다. 조손가족에 대한 사회적 수요, 변동 요인을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현행 ‘한부모가족실태조사’의 부가조사에 ‘조손가족 실태조사’를 추가해 2027년부터 3년 주기로 시행하고,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와도 연계해 만 9세 이상 가족돌봄청(소)년의 현황을 파악(2025년~)하는 등 관련 실태조사도 정기적으로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인공지능 디지털교과서(AIDT)를 교육자료로 전환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야당 주도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해 본회의 상정을 앞두고 있다. 이와 관련해 검정까지 통과한 상황에서 AIDT를 개발한 발행사‧출판사들은 해당 입법이 헌법이 금지한 소급 입법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행정소송과 민사소송, 헌법 소원까지 제기한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시·도교육청마다 도입 여부 입장까지 갈리면서 당장 검정 교과서를 선정해야 하는 일선 학교는 어찌해야 할 지 혼란스럽다는 반응이다. 이에 한국교총은 “여야의 정치 대결과 합의 없는 입법 추진으로 지리한 법적 분쟁과 공방이 불가피하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혈세, 행정력 낭비 또한 예견된다”며 “학교 현장 혼란 최소화, AIDT 대한 불신과 부작용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지혜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많은 문제가 예상되는 만큼 여야는 국회 본회의에 앞서 정부와 함께 대안을 갖고 진정성 있는 논의와 조속한 해법 마련에 나서 줄 것을 요청한다”면서 “2025년에는 검정 통과한 AIDT를 당초 계획대로 도입하지 말고, 시도교육청과 학교가 자율적으로 사용해 효과‧부작용 검증 후 정책 보완‧개선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미 AIDT 개발 및 교과서 검정, 교사 연수, 인프라 구축, 각 학교 별 교과서 채택 등 적용을 앞둔 상황에서 갑자기 교육자료로 전환된다면 국가 정책 신뢰 상실은 물론 막대한 매몰 비용 발생, 학교 현장 혼란 등이 따른다. 하지만 AIDT 교과서의 교육적 효과에 대한 신뢰‧공감 부족, 교사 연수 내용 미흡, 디지털 기기 관리 등 교사 업무 부담, 개인정보 노출 보안 문제 등 준비와 보완이 더 필요하다는 의견도 많다. 이와 관련해 교총은 교사의 기기 관리 및 행정업무 부담 완전 해소, 학급당 학생수 감축 등 교실 환경 구축, 도입 속도 조절, 활용 여부 관련 교사 자율권 보장 등 현장 안착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교총은 “검증 이후 AIDT의 도입 범위, 수준을 결정해도 늦지 않다”며 “검증 과정에는 교사, 학생, 학부모, 전문가가 참여해 다양한 교육적 효과와 부작용을 함께 분석해야 정책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교육 현장의 정책 수용성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교총이 젊은 교사 이탈 방지와 우수 인재 유치를 위해 줄기차게 요구해 온 저연차 교사 정근수당 인상이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22일 인사혁신처는 내년부터 정근수당 기준 연수를 근무 연수 1년 미만 10%를 신설하고, 2년 미만을 5%에서 10%로, 3년 미만을 10%에서 20%로, 4년 미만의 경우 15%에서 20%로 인상하는 2025년 공무원 보수규정 및 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이에 교총은 24일 입장을 내고 “젊은 교사들이 떠나가는 교단에 희망이 있을 수 없다”며 “교총이 요구한 정근수당 인상을 전격 수용한 데 대해 환영한다”고 밝혔다. 교총은 “최근 3년간 물가 상승률 대비 교원 보수 인상률이 삭감 수준(-7.2%)임에도 불구하고 내년도 보수 이상률이 3%에 그쳐 젊은 교사들이 또 한번 좌절했어야 했다”며 “이런 상황에서 “젊은 교사들이 떠나가는 교단에 희망이 있을 수 없다”며 “교총이 요구한 정근수당 인상을 전격 수용한 데 대해 환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교총은 갈수록 열악해지는 교원 처우를 회복하는데는 많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물가 상승률을 고려한 교원 보수 10% 이상 인상, 24년째 동결된 교직수당 인상 등 처우 개선에 적극 나서줄 것을 정부에 주문했다. 실제로 교총이 지난 8월 3일부터 27일까지 20~30대 교사 4,603명을 대상으로 ‘월급만족도 설문조사’를 한 결과, 86%가 ‘월급 때문에 이직을 고민한 적 있다’고 응답했다. 교총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동안 정부, 국회, 시도교육청을 대상으로 ▲교원 보수 10% 이상 인상 ▲저연차 교사 정근수당 획기적 인상 ▲교직수당 40만원으로 인상 ▲교감(원감) 중요직무급 수당 신설 ▲교원연구비 7만5천원으로 균등 상향 지급 ▲올해 인상에서 제외됐던 보건‧영양‧상담‧사서교사 수당 인상 등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지난 3월과 7월, 10월 교원 제수당 인상 요구서를 교육부, 인사혁신처 등에 전달한 바 있으며, 9월에는 세종교총, 교총 2030청년위원회, 보건교사회, 전국영양교사회, 한국사서교사협의회와 세종 인사혁신처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직접 제수당 인상 요구서를 전달했다. 아울러 10월부터 교원 처우 개선(기본급 10% 인상, 교직수당 및 제수당 인상) 촉구 등 7개 과제를 내걸고 전국 교원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대통령실 등에 요구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경기도 연천에는 망국의 한이 서려있는 장소가 있다. 경순왕릉과 기황후릉 터다. 경순왕이 통일신라의 마지막왕이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의 릉이 경주가 아닌 이곳 연천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소하다. 경순왕릉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듯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국가 또한 어느 순간 그 역사를 다하게 된다. 삼국시대의 마지막 패자였던 통일신라 역시 예외는 될 수 없다. 천년의 영광을 누렸던 통일신라는 경순왕때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짧은 오르막길을 지나면 외롭게 자리한 경순왕릉을 만난다. 오르막길 주변에는 철책선이 2m이상 높이로 쳐져 있으며 지뢰가 있다는 표식이 보인다. 경순왕릉 주변의 숲은 군사지역이라 출입이 통제되며 바로 앞이 민통선이다. 삼엄한 경계가 느껴질 정도였다. 경순왕은 통일신라의 56대 임금이다. 신라의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경주시 밖에 위치해 있다. 왕릉이라 하기에는 규모가 작은데 거기에도 사연이 있다. 현재의 왕릉은 1747년에 경순왕의 후손들이 왕릉 주변에서 묘지석을 발견하면서 새로 정비한 것이다. 재정비 당시 왕에 대한 예우를 갖추어 조성한 것이 아니라 사대부 묘의 격식을 따라 꾸몄다. 경순왕의 시호는 '공손하게 따른(敬順)' 왕이라는 의미이다. 고려 태조 왕건보다 35년을 더 살았던 경순왕은 서기 978년 개경에서 죽었다. 신라의 왕인 경순왕릉이 왜 연천 지역에 있는지가 궁금했다.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전해온다. 경순왕이 죽자 패망한 국가의 왕이 겪었을 굴종의 삶을 본 신라의 유민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들은 곡을 하며 남쪽으로 가는 경순왕의 상여를 따라붙었다. 장례 행렬이 임진강을 건너기 위해 바로 이곳 연천의 고랑포에 이르렀을 때 그 인원수는 수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고려 왕족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장례 행렬 인원이 혹시 폭동이라도 일으킬까 두려웠고 이를 막기 위해 ‘왕족의 시신은 도성 밖 100리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규정을 내세워 이곳 연천에서 멈추게 하였다고 전해온다. 숭의전지(崇義殿址) 숭의전지는 조선시대에 전 왕조인 고려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원래는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앙암사 절이 있었던 곳으로 1397년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전소되었던 것을 1971년부터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정비하였다. 길가의 주차장에 차를 대면 바로 어수정(御水井)이라는 약수터가 보인다. 임금(태조 왕건)이 와서 물을 먹었다는 의미의 어수정이다. 잠시 왕이 된 듯한 착각을 하며 시원한 물로 목을 축였다. 어수정에서 약 100m정도 길을 따라 올라가며 임진강 가에 조용히 자리한 숭의전을 볼 수 있다. 숭의전 바로 앞 임진강변 벼랑 바로 위에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다. 수령은 약 500년, 높이는 20m, 둘레는 4.7m이다. 1452년(문종 2년)에 고려 왕씨 후손이 심었다고 전한다. 전(傳) 기황후릉 터 2013년 MBC에서 방영되었던 ‘기황후’라는 드라마를 본 기억이 있다. 당시 기황후에 대하여는 특별한 관심이 없는 터라 눈여겨 시청하지는 않았다. 이 기황후의 능 터가 연천에 있다. 하지만 전(傳), 즉 전해온다는 의미의 한자가 붙은 것처럼 이 곳이 기황후 릉이 있었다는 사실은 명확하지는 않다. 기황후는 행주 기(奇) 씨이며 고려 출신 공녀로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혜종의 황후이다. 기황후는 원이라는 대제국을 무려 37년간 지배하였다. 기황후는 출생과 사망 시기가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 출신의 환관 고용보의 추천으로 궁녀가 되었다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다. 혜종은 기씨를 총애하여 황후로 삼고자 하였으니 조정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가 후에 황태자를 낳자 제 2황후로 책봉하였다. 기황후는 혜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아들을 황태자에 오르게 하고 군사권도 장악하여 승승장구하게 된다. 이처럼 기황후가 원나라에서 권세를 휘두르게 되자 고려에 남아있던 기 씨의 친족들도 공민왕에 의해 모두 숙청되었다. 이에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하고자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공격하였으나 최영 장군에게 대패한다. 이후 원나라에서는 기황후를 위시한 황태자파와 반대파 사이에 정쟁이 벌어지고 결국 반대파를 숙청했다.황후가 죽자 기황후가 정후가 되었으나 황태자의 황위 계승을 둘러싼 정쟁으로 원의 국력은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기황후릉 터를 가기 위해서는 연천군 상리를 가야 한다. 상리 입구에는 모처럼 보게 되는 장승이 있었다. 어릴 적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장승의 모습조차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유물이 되어 버렸다. 기황후릉 터가 있는 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꼬불꼬불하고 좁은 차도를 아슬아슬하게 거쳐야 한다. 팻말 앞 차 한 대가 간신히 멈출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차를 돌려서 나오기 힘들 정도이다. 팻말에서 좌측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기황후릉 터가 보인다. 사실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야트막한 산의 한 부분일 뿐이다. 전 기황후릉 터는 2013년 11월 25일 연천향토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부터 『동국여지지』 등의 기록에 ‘기황후는 죽기 전 고국에서 장례를 치르기를 원하여 이곳 연천현에 장사하였다’라고 전한다. 현재, 릉의 형태는 알 수 없다. 다만, 기록과 더불어 이곳 능선 아래쪽에 기와 파편이 다수 보이고 릉의 석물로 보이는 석수 2점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곳 능선에 남향하여 릉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이곳에서 발견된 석수(석양)들은 현재 연천군 문화원 정원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연천 읍내에 있는 연천군 문화원을 직접 찾아가 보았다. 앞마당에 석양이 소박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연천군 문화원에 전시해 둔 것으로 보아 전 기황후 릉 터는 결정적인 스모킹 건은 없지만 어느 정도 그 신빙성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연천 고랑포구 역사공원 호로고루 성에서 372번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고랑포구가 나온다. 고랑포구 역사공원은 1930년대 고랑포구를 생생하게 재연하고 있다. 내부 시설이 잘 구축되어 있으며 연천 지역의 여러 명소들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어 학생 등 단체관람 시 교육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고랑포구 역사공원은 경순왕릉과도 인접해 있어 호로고루성, 경순왕릉, 고랑포구 역사공원을 함께 방문하기를 추천한다. 그리고 주변에는 임진강 황포돛배 나루터가 있다. 한 시간 간격으로 출항하는데 40분간 운행하며 임진강 주변의 주상절리 등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민물인데도 배 위에 있는 나에게 갈매기들이 모여들어 신기했다. 고랑포구 역사공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이는 것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말의 동상이다. 레클리스(ReckIess)라는 군마라고 한다. 여기서 레클리스는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라는 뜻이다. 레클리스 군마는 계급이 하사로 미군에 공식적으로 등재된 한국전쟁에서 탄약 등 물자와 부상병을 실어 나르는 등의 활약을 펼쳐 무공훈장까지 받았다고 한다. 레클리스에 대하여 호기심이 생겨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레클리스의 원래 이름은 ‘아침 해’였다. 연천군은 특히 산악이 많아 차량으로 무반동 소총과 탄약 보급이 어려웠다. 군인 등 인력만으로는 효율성이 많이 떨어졌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침 해'는 첫 번째 임무에 투입된다. 당시 레클리스는 수십 kg의 탄약을 짊어지고 오솔길과 45도 각도의 급경사 산비탈을 해병대원들과 함께 386번이나 왕복했다. 왼쪽 눈과 옆구리에 큰 상처를 입었지만 새벽부터 황혼까지 아군의 탄약 공급을 도왔다. 연천 고랑포구 역사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고즈넉하다. 인적이 뜸한 길목을 굽이굽이 지나치면 연천 경순왕릉으로 들어서는 초입의 오른쪽에 공원이 있다. 공원이 위치한 장남면 일대는 예전에 황해도 땅이었다고 한다. 분단 이후 파주에 편입됐다가 다시 연천군에 속하는 질곡의 과정을 거쳤다. 공원 뒤편 야산을 넘으면 남방한계선과 이어지는 삼엄한 지역이다. 철조망에 ‘지뢰’ ‘출입 금지’ 이정표가 빼곡하다. 사진은 보안상 게재하지 못한다. 연천 고랑포구 역사공원에서 나오자마자 1.21 무장공비 침투로 간판이 보였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그리고 영화로 접했던 사건이라 관심이 있어 들어가 보려고 하였으나 민통선 구역이라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직접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관련 홈페이지에는 신분증을 제시하면 입장할 수 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1.21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영화 ‘실미도’에 나오는 특수부대가 창설된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다. 고랑포에서 서남쪽으로 3.5km지점에 위치한 무장공비 침투로는 1968년 1월 17일 23시 북한군 제124군 소속 김신조 외 30명이 남방한계선을 넘어 침투한 곳이다. 속칭 ‘김신조 루트’라 일컫는다. 얼어붙은 고랑포를 건너 파평산, 파주 법원리의 삼봉산을 지나 서울 세검정으로 침투한 사건인데 당시 남북한의 적대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앞으로의 남북 관계는 어떠한 국면으로 전개될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현지 문화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임진강 뱃길을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무렵이라고 한다. 임진강 뱃길의 종점이었던 고랑포는 경기 북부 지역 포구의 중심이었고 고랑포의 상업적 위상은 개항기를 거치면서 보다 커졌다고 한다.
경기도 연천군(漣川郡)은 서남쪽으로 파주시, 북쪽으로는 철원, 동쪽으로는 포천시, 남쪽으로는 동두천시와 맞닿아 있다. 위도상으로 북한의 개성보다 더 북쪽에 위치해 있다. 한탄강이 전곡읍을 가로 질러 흐르며 북한에서 내려오는 임진강과 도감포에서 합수한다. 연천군의 면적은 676.31㎢로 경기도에서는 5번 째로 크며 서울의 약 1.2배에 해당한다. 2개의 읍과 8개의 면, 98개의 리로 이루어져 있다. 2023년 7월 기준으로 연천군의 인구는 약 4만1000명이다. 경기도 전체 시, 군 가운데 인구 수가 가장 적다. 그리고 2017년에서 2021년 사이를 기준으로 연천군의 인구 감소폭은 약 6%로 나타났다. 연천군은 지리적으로도 산지가 많은 경기 이북의 지형적 특성상 인구수가 적고 한적하다. 무더운 여름 휴가철이나 되어야 한탄강 유원지, 동막골 유원지 등에 그나마 사람들이 잠시 놀러 온다. 억측일지 모르겠지만 발전되는 도시라기보다 더디거나 퇴보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필자로서는 안타까울 따름이다. DMZ 지역은 전쟁과 평화가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지역이다. 참으로 무더웠던 지난 여름, 오랜 벗과 함께 한 연천군(漣川郡)의 DMZ 지역을 방문한 후의 여정과 감상을 그려보았다. 경기도 연천군의 명소에 대한 소개를 곁들여 본다. 태풍전망대(연천군 중면 횡산리) 아침부터 무더운 날씨다. 8월의 뜨거운 태양은 온 사물을 녹여버릴 듯 무서운 기세로 며칠 연이어 기승을 부린다. 70여 년 전 연천의 날씨도 이렇게 무더웠을까? 전쟁은 하루아침에 평화로운 모든 일상을 앗아가 버린다. 6.25 전쟁 또한 예외는 아니다. 비록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이지만 비슷한 상상은 해볼 수 있다. 벌써 휴전이 된 지 70년, 정전이 아닌 휴전, 현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은 6.25 전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어린 시절 주로 전방 지대에서 생활한 터라 전쟁, 군대, 안보라는 단어가 낯설지는 않다. 내가 살았던 터전이 대부분 부대 인근, 군사 도시이기 때문이다. 연천도 그렇다. 난 아버지가 군인이셨기 때문에 부대 내 관사에서 생활했다. 그래서 군부대의 모습을 어린 시절부터 항상 접하면서 살았었다. 부대 연병장에서 공놀이를 하였고 일요일이나 방학 때면 군 장병 아저씨들과 함께 놀곤 하였다. 그들의 생활을 가까이서 함께 한 것이다. 군부대의 모습이 나에겐 너무나 익숙했다. DMZ는 분단의 모습을 대변하는 중요한 장소이다. 연천군은 6.25 전쟁 당시 수많은 격전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3번 국도는 서울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목이다. 따라서 연천지역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많은 전투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연천지역 곳곳에는 6.25 전쟁 당시 나라를 위하여 전사했던 장병들을 위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태풍전망대를 가기 위해서는 군 초소에서 신분증을 맡기고 신원확인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DMZ 남방한계선을 따라 위치한다. 우리나라가 정전이 아닌 휴전 상황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언제나 긴장감이 감돈다. 고요하고 적막하다. 그리고 무섭다. 임진강평화습지원/연강갤러리(연천군 중면 횡산리 224/ 중면 군중로 885) ‘연강(漣江)’이란 연천군 지역을 흐르는 임진강의 별칭이다. 임진강 평화습지원은 두루미 먹이인 율무를 재배하는 단지가 잘 조성되어 있다. 임진강평화습지원은 태풍전망대와 마찬가지로 민통선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군(軍) 검문소에서 신분 확인을 받아야 출입이 가능하다. 한 번 확인이 되면 태풍전망대와 함께 모두 관람이 가능하다. 횡산리는 민간인 통제 구역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임진강평화습지원은 7개의 테마로 꾸며져 있다. 각각의 테마로 이어지는 통로마다 나무데크가 있어 이동이 편하다. 곳곳에는 임진강 유역에서 볼 수 있는 희귀한 식물들이 많으며 평화로운 임진강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가을이 되면 형형색색의 꽃들로 가득하다. 한 폭의 그림과 같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왕래가 적어 잘 보존되어 있다. 연강갤러리는 원래 안보전시관이었다. 2016년 안보전시관 건물을 갤러리로 변경하고, 민통선 내 최초의 예술공간으로 연천의 생태와 문화 예술이 만나는 복합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DMZ와 마주한 최북단인 이곳은 긴장이 몰려오지만 실제 현장에 있다 보면 더 없이 평화롭다. 조용한 시골 분위기와 임진강의 수려한 풍광, 예술적 감성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전쟁과 예술, 묘한 어울림이다. 군남홍수조절지 두루미테마파크(연천군 군남면 선곡리 614-5) 두루미는 '학(鶴)'이라고도 한다. 넓은 의미로는 두루미목 두루미과 조류의 총칭이며 좁은 의미로는 그냥 두루미를 의미한다. 옛날부터 몸통과 꼬리의 흰 색깔과 날개와 목 부분의 검은색, 그리고 머리 부분의 붉은 부분의 조화가 절묘하고, 수명이 굉장히 길어 십장생 중 하나로 꼽혔으며, 날아다니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좋아했었다. 민간 신앙에서는 신령한 새로서 ‘신선이 타고 날아다니는 새’로 흔히 알려져 있다. 연천군에서는 두루미(천연기념물 제202호)와 재두루미(천연기념물 제203호)가 주로 확인된다. 매년 연천에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이 되면 번식을 위해 러시아, 중국 등지로 이동한다. 군남홍수조절지로 향하는 임진강가 도로에는 임진강 두루미 생태 관찰지가 있다. 꽤 넒은 공간에서 편안하게 임진강의 두루미를 관찰할 수 있는 나무 데크가 있다. 탁 트인 시야로 임진강을 볼 수 있다. 아마 겨울이면 이곳에서 수많은 두루미의 장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군남홍수조절지와 두루미 테마파크는 함께 붙여서 명명한다. 같은 주차장을 사용하며 바로 옆에 함께 자리한다. 휴전선에서 불과 6km 떨어진 접경 지역에 위치한 군남홍수조절지는 댐 유역의 97%가 북한 땅으로, 임진강 본류의 홍수 조절 능력 확보 및 북측 황강댐에 의한 불규칙한 물 흐름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 이 지역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겨울 철새인 두루미(천연기념물), 재두루미(천연기념물), 흑두루미(천연기념물)가 매년 겨울 최대 200마리 이상 월동하는 대표적인 곳으로, 남북한 접경 지역이라는 지리적 여건과 임진강 자연환경이 만들어 낸 특수성으로 인해 수달, 고라니, 두루미, 어름치 등 각종 동식물이 서식하는 천혜의 자연 생태지역이다(대한민국 구석구석). 군남홍수조절지는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면 이동 없이 바로 관측이 가능하다. 우측 전망대로 잠시 걸어 올라가면 군남홍수조절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장마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수량이 많다. 거대한 모습에 잠시 놀랐다. 댐을 이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았던 경험이 없어서일까? 모처럼 본 거대한 건축물이 웅장해 보였다. 길이가 658미터, 높이 26미터로 2012년부터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관광공사에서 만든 DMZ 평화의 길(https://www.durunubi.kr) 중 11코스 ~ 14코스가 경기도 연천군 내의 코스이다. 해당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예약, 참가비 입금, 방문QR을 받은 후 해당 코스를 방문하면 된다. 이번 겨울방학을 통해 학생들의 방문이 많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어본다.
4, 5, 6세기는 삼국의 나라들이 제각기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이다. 삼국의 전성기는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최대 영토를 획득한 시대를 말한다. 백제는 375년 근초고왕, 고구려는 476년 장수왕, 신라는 576년 진흥왕 시절이다. 연천 지역의 은대리성, 호로고루성, 당포성은 모두 고구려의 남하정책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6세기 중엽 고구려가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이후 임진강 유역으로 후퇴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한탄강변에 있었던 성들은 신라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후 전략적 가치의 상실로 인하여 폐성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도 연천군 지역에는 옛 삼국시대 성터가 여러 개 남아 있다. 한강유역과 더불어 이 지역은 옛부터 한반도의 군사적, 지리적 요충지이다. 한국전쟁 뿐 아니라 옛 삼국시대에도 이 지역을 차지하고자 많은 피를 흘렸던 곳이다. 한탄강와 임진강을 기점으로 적을 방어하기 용이한 지역에성터가 자리잡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은대리성, 당포성, 호로고루 성이다. 일시적으로 백제, 신라에 내어 주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고구려 소유의 성으로 추정된다. 연천군에 이러한 삼국시대의 성터가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있지 않았다. 역사에 관심이 많고 또, 이 지역에 자주 다녔던 필자조차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갈색 표지판(문화재 임을 알리는 표지판 색)을 조금만 유심히 쳐다보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차츰 보이기 시작한다. 이 기사를 읽는 독자들이 경기도 연천군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은대리성은 전곡읍 내에 있으며 당포성과 호로고루성은 전곡읍에서 약 30분 거리 이내에 위치해 있다. 전곡읍내에 사는 주민조차 은대리성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을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되었다.은대리성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연천군보건의료원 주차장을 지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즉, 도로밖으로 노출이 되지 않고 보건의료원 내부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기에 그 접근성은 매우 제한적이다. 은대리성(차탄천)/물거미 서식지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577 은대리성은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에 있는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2006년 1월 2일 사적 469호로 지정되었다. 한탄강 북쪽 기슭, 장진천의 합류 지점에 형성된 삼각형의 하안단구 위에 축조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약 1005m이고 동서 400m, 남북 130m이다. 성 내부의 면적은 약 7000평 정도인데 일부는 경작지로 이용되고 나머지 부분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은대리성을 가기 위해서는 전곡읍 내 연천군 보건의료원 내부를 지나쳐야 한다. 그곳에 주차하면 바로 은대리성을 마주할 수 있다. 한탄강과 차탄천이 만나는 삼각형 지형의 언덕 위에 옛 고구려의 작은 성인 은대리성이 자리한다. 은대리성은 1995년 연천군 문화원에서 발간한 ‘향토사료집’에 의해 그 존재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과 토지박물관 등에서 이곳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였고 2003년 단국대 매장문화재 연구소에 의해 정식으로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다. 성의 평면은 삼각형으로 3면이 막다른 벼랑이다. 동쪽만 평지로 이어져 수비하기에는 좋은 요새지만 만약 성이 적군에게 점령당한다면 고립되어 싸우다 죽던지, 아니면 벼랑에 몸을 던져야 한다. 무조건 성을 사수하고 만약 성이 함락되면 성과 함께 최후를 맞으라는 왕이 주는 무언의 명령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현재 은대리성은 성벽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흡사 토성과도 같은 모습이다. 차탄천과 한탄강이 만나는 지점이 굽어 보이는 높은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파주, 연천 방면에서 오는 적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적들이 어느 방향으로 침범을 하던 쉽게 관측이 가능하고 방어에 용이하다. 5, 6세기경 고구려, 백제, 신라의 병사들은 이 절벽을 끝없이 오르고 또 막아내길 반복했을 것이다. 그들은 죽어가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새하얗게 성을 뒤덮은 듯한 개망초는 그 당시 홀로 죽어간 병사들의 영혼이라도 깃든 것일까? 수많은 나비들이 그들의 영혼을 달래듯 쉴 틈 없이 날아다닌다. 가끔 들려오는 구슬픈 소쩍새의 울음소리와 차탄천의 물소리만이 정적을 깨곤 한다. 띄엄띄엄 서 있는 소나무들의 모습이 외롭게만 느껴진다. 전쟁의 상흔은 평화로운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구불구불 굽이쳐 흐르는 한탄강의 줄기는 아픈 상처를 피하여 나아가듯 흐르고 있다. 물거미 서식지는 세계적 희귀종인 물거미(argyroneta aquatica)의 국내 서식지로 천연기념물 제412호이다. 전곡읍 은대리의 차탄천변 습지 일대에 위치한다. 주변은 현재 대부분이 논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외의 지역은 군사 훈련장이 있다. 은대리성과 함께 연천군 은대리에 속해 있다. 은대리성과 매우 가깝다. 물거미는 공기 방울을 만들어 물속에서 거의 모든 생애를 보내는 독특한 생활사를 가진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동물이다. 물거미는 전 세계에 1속 1종만이 존재한다. 북반구 유럽에 주로 분포하고, 아시아권에서는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중국, 일본, 한국 등지에 분포하는데, 국내에서는 1950년대 중반에 보고된 이후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아 멸종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95년 전곡읍 은대리 일대의 군 주둔 지역에서 물거미의 서식이 확인되었다. 2007년 개체 수 조사에 의하면 이 서식지 내에 약 4만여 마리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연천문화원). 당포성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778 당포성은 임진강 하류에서 중상류로 올라가는 수상 교통의 요지인 당개나루(당포나루)에 자리하고 있다. 육상 교통상으로도 양주 일대에서 최단 거리로 임진강을 건너 북상할 수 있는 지점이다. 당포성은 2006년 1월 2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 면적은 35,174㎡이다. 당포나루로 흘러 들어오는 당개 샛강과 임진강 본류 사이에 형성된 높이 약 13m의 삼각형 절벽 위 대지의 동쪽 입구를 가로막아 쌓은 성곽이다. 1994년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의 지표조사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고 2003년 이후 2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하여 성의 구조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 동쪽 성벽은 길이가 50m, 잔존높이가 약 6m이며 동벽에서 성의 서쪽 끝까지의 길이는 약 200m에 달한다. 당포성의 배후에 있는 마전현(현재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 인근)은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기 때문에 양주분지 일대에서 최단거리로 북상하는 적을 방어하는 데에 꼭 있어야 할 성이었다. 또한 북진 시에도 강의 북안에 교두보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신라의 점령기에도 꾸준히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에서는 대부분 신라계인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석축이 있는 부분의 퇴적토와 성돌 사이에서 삼국시대 기와 조각을 포함하여 고려와 조선시대의 기와 조각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성 내부에서는 고구려 토기조각과 고구려 기와 조각들이 다수 출토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당포성은 ‘별을 보기 좋은 곳’으로 오늘날 연천 9경 중의 하나로도 지정되어 있다. ‘당포성 별빛 축제’라는 이름으로 2022년부터 매년 9~10월에 당포성에서는 별을 관찰할 수 있는 축제가 열린다. ‘별’이라는 낭만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당포성 또한 이 지역을 차지하고자 하는 삼국의 치열했던 전투의 장소이다. 한탄강이 굽어 보이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삼면에서 다가오는 적들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방어할 수도 있다. 성의 서쪽은 주상절리로 이루어진 천애의 절벽이다. 적들은 절대 이곳으로 오를 수 없지만 자칫 성을 점령당했을 때에는 여느 다른 성들과 마찬가지로 꼼짝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당포성을 본 느낌으로는 당포성이 군사적 요충지임에는 동의하지만 적으로부터 성을 지키기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장소라고는 말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침입하는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전열을 정비할 수 있고 보급도 가능하나 성을 지키는 병사들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오직 등 뒤에 절벽을 두고 적들과 싸워야 한다는 부담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포성은 삼화교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 캠핑장도 몇 군데 자리하고 있다. 동쪽 성벽은 아직 돌을 쌓은 모습이 남아 있지만 그 외 부분은 흔적이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앞서 말했듯이 당포성은 별을 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당포성 입구에는 별과 달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명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호로고루 성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1258 호로고루 성은 최근 4~5년 전 무렵부터 연천군의 주요 관광지가 되었다고 현지 주민에게 들었다. 9월이면 호로고루 성 앞 벌판에 ‘해바라기 축제’가 열려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특히 유튜버나 사진작가들은 호로고루 성 주변의 아름다운 일몰을 화면에 담으려 수없이 모여든다고 한다. 호로고루성 주변에는 임시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고 당포성이나 은대리성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넓은 벌판과 탁 트인 시야가 인상적이었다. 가을바람에 하늘하늘 춤추는 코스모스는 세련된 댄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서로 각자가 움직이는 듯하지만 멀리서 보면 비슷한 모습으로 함께 춤을 춘다. 조화롭다. 이처럼, 약속되고 계획된 시간보다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삶의 시간들이 훨씬 여유롭다. 길쭉하게 뻗어 하늘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서 있는 호로고루성의 해바라기는 연천의 코스모스와는 또 다른 묘미를 느끼게 해준다. ‘통일바라기’라 명명한 호로고루의 해바라기는 가을 저녁을 물들이는 붉은 노을과 어울리며 한 폭의 진한 톤의 유화를 만들어낸다. 그동안 이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건 말건 상관없이 자신들 나름대로 아름다운 장관을 매일 만들어낼 뿐이다. 호로고루 성 초입에는 거대한 광개토대왕릉비 모형이 자리하고 있다. 예전 중국에 가서 본 실제 광개토대왕릉비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보낸 광개토대왕의 기상과 호기로운 모습이 연상되었다. 호로고루의 어원에 대해서는 ''이 부근의 지형이 표주박, 조롱박과 같이 생겼다"하여 호로고루라고 불린다는 설과 "고을"을 뜻하는 ''홀(호로)''와 ''성''을 뜻하는''구루''가 합쳐져 ''호로고루''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호로고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효종 7년(1656)에 편찬된 『동국여지도』이며 이 책에는 호로고루가 삼국시대의 유적임이 명시되어 있다. 1991년부터 2003년 사이 호로고루 성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조사 및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의 형태는 북동쪽에서 남서 방향으로 흐르는 임진강에 접한 현무암 천연절벽의 수직 단애 위에 있는 삼각형의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성의 가장자리를 따라 재었을 때 약 400여m이고, 그중 남벽은 161.9m, 북벽은 146m이며, 동벽은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이 93m이고 성내부는 전체적으로 해발 22m, 성벽 최정상부는 30m 정도이다. 성벽 중 가장 높은 동벽 정상부와 서쪽 끝부분에는 장대(將臺)가 설치되었으며, 성으로 진입하는 문지는 동벽 남쪽을 제외하고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위키백과). 앞서 밝혔듯이 은대리성, 당포성, 호로고루 성은 모두 30분~ 40분 이내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전곡 읍내에서 은대리성과 물거미 서식지 등을 돌아본 후 당포성을 거쳐 호로고루 성으로 이동할 것을 추천한다. 호로구루성 인근에는 경순왕릉과 고랑포구역사공원이 있다. 또 그 인근에는 황포돛배나루터가 있어 돛배를 타고 임진적벽을 관람할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 조금 일찍 서둘러 나가면,하루동안에 모두 관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간이 빠듯하다면 아예 당포성과 호로고루 성 주변만 여유있게 관광하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재인폭포는 연천군 전곡읍에서 연천방향으로 약 11km정도에 자리하고 있다. 통현리 고인돌을 끼고 우회전 하면 재인폭포 방면이다. 사실30~40년 전만해도 연천에 볼거리라고는 재인폭포가 유일했다고도 말할 만큼이 재인폭포는 연천군의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 기억의 재인폭포는 주변에 아무런 시설물이 없이 자연 그대로의 재인폭포였다. 재인폭포 방면으로 가다보면 중간쯤에 '종자와 시인 박물관' 표지판이 보인다. (http://www.fspmlove.co.kr) '종자와 시인 박물관'은 '농부는 흙에 씨를 뿌리고 시인은 사람의 가슴에 씨를 뿌리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기치로 1984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희귀본 씨앗 및 다양한 종자 표본들과 고서, 사전 그리고 옛날 교과서 및 전국 문인들의 저서들을 지속적으로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관리, 보존, 전시하고 심층적으로 연구하여학술 및 교육자료로 활용, 제공하고 나아가 다양한 교육, 체험 프로그램으로 개발하고 운영하여 생활 문화예술 발전과 활성화에 공헌하고자 한다'라고 홈페이지에 자세히 안내되어 있다. 박물관도 2개의 파트로 구분되어져 있는데 한쪽은 다양한 씨앗을 전시했고 다른 한쪽은 옛날 서적, 레코드판, 타자기 등 문인과 관련된 자료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1990년 중반, 대학을 졸업한 해의 봄, 발령을 앞두고 홀가분한 마음과 허전함을 함께 안은 채 여행을 떠났다. 무작정 떠나는 것만으로도 삶의 짐이 반은 접힌다. 펼치면 새로운 인생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혼자의 여행은 나와의 끊임없는 ‘대화의 시간’이다. 난 나에게 계속 물었다. 옳게 살았는지, 또는 열심히 살았는지, 대학을 졸업 후 너는 무엇을 목표로 살 것인지 등, 나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묻고 스스로 대답하며 걸었다. 특히 이곳(전곡)에서는 그런 물음과 대답이 훨씬 편하고 담담하게 이루어진다. 3월, 촉촉이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길가에 핀 들꽃과 삶에 대하여 차분히 대화를 나누었다. 전곡을 떠난 지 십 년이 훌쩍 지나서야 다시 만난 동창들과 읍내에서 맥주 한잔을 나누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만난 어색함은 술 한잔과 더불어 이내 사라졌다.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 함께 했던 추억을 이야기하며 그때의 시간으로 돌아가 함께 놀고 있었다. 삶에 조금은 지쳐 있을 때였다. 그리웠던 옛 친구들과의 만남은 신선한 에너지를 준다. 허름한 숙소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재인폭포를 가려고 길을 나섰다. 전곡에서 재인폭포까지는 걸어가기에 만만치 않은 거리이다(약 11km). 하지만 난 여행에서 걷는 것을 좋아한다. 당시부터 선호했던 방법이다. 그냥 걸었다. 필자는 지금도 어지간한 곳은 걸어서 여행한다. 재인폭포는 전곡에서 적당히 먼 곳에 있어 마음먹고 걷기에는 딱 좋은 곳이다. 사실 재인폭포 자체를 가고 싶었다기보다는 그냥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봄의 향기도 느낄 심산이었다. 때마침 부슬부슬 봄비가 내렸다. 적당히 내리는 봄비는 마른 마음을 적셔 부드럽게 해 준다. 그리고 뾰족했던 마음속의 무언가를 무디고 뭉툭하게 만들어 준다.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뒤에서 승용차의 경적 소리가 들렸다. 당시만 해도 승용차는 흔하지 않았다. 친구 W였다. 어제 함께 시간을 보낸 친구이다. W가 차를 끌고 나를 찾아 따라온 것이었다. 내가 머물렀던 숙소 앞의 자전거 수리점에 갔더니 아침에 내가 자전거를 빌리지 못하고 그냥 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재인폭포에 갈 것이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W의 차를 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재인폭포로 향하였다. 당시 재인폭포는 지금처럼 인공 구조물이 전혀 없었다. 나무 데크(deck)는 고사하고 계단 몇 개만 덩그러니 있어서, 등산하듯 재인폭포 앞으로 힘겹게 다가가야 했다. W와 초등학교 이후 각자가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등학교 시절과 달리, 우리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군대 이야기, 대학 이야기, 여자친구 이야기 등 평범한 젊은이들이 그 나이에 겪었을 여러 이야기를 재인폭포 앞에서 신나게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재인폭포는 이런 추억이 스며있는 곳이다. ‘슬픈 광대의 사랑 노래’라는 전설을 담고 청록색에 가까운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광대가 한 가닥 줄에 의지하여 자신을 보여주듯, 살기 위한 몸부림을 포기한 듯 폭포 저 아래로 푸른 물을 끝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현재 재인폭포에는 관광객을 위한 많은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전망대와 출렁다리, 그리고 나무 데크(deck)로 된 길과 주차장, 편의점 등이 재인폭포를 둘러싸고 있다. 사람들이 편리하게 관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왠지 재인폭포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행여 그렇지 못할 것만 같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재인폭포 입구의 도로에는 옛 표지석 위로 현대식 표지판이 올려져 있다. 전국자연보호중앙회가 1986년에 창립된 것으로 추정해 보면, 옛 표지석은 1980년 후반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조금만 이동하면 바로 재인폭포를 볼 수 있다. 전망대와 출렁다리에서 내려다보면 재인폭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예전에 비해 변치 않은 것은 재인폭포밖에 없다. 재인폭포 외의 주변 경관이 너무나 많이 변해버렸다. 재인폭포 주변에는 장마로 흙탕물이 된 한탄강이 어김없이 흐르고 있다. 저 멀리 한탄강댐이 웅장하게 한탄강 물을 머금고 있다. 거대한 절벽과 그 절벽 사이로 웅장한 소리와 함께 무서울 정도로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는 한탄강 물이 유유히 흐른다. 한탄강은 언제 보아도 슬픈 느낌이다. 전에 가보았던 남쪽 지방의 강들은 밝은 느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유독 한탄강은 무섭고 슬픈 느낌이다. 큰 절벽과 거대하고 검은색을 띤 바위들 사이로 흘러서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재인폭포는 한탄강 주변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곳으로 오래전부터 명승지로 알려져 있다. 재인폭포는 북쪽에 있는 지장봉에서 흘러 내려온 작은 하천이 높이 약 18m에 달하는 현무암 주상절리(柱狀節理) 절벽으로 쏟아지는 것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또한, 재인폭포 주변에는 천연기념물 ‘어름치(잉어목 모래무지과의 민물고기)’와 멸종위기종인 ‘분홍장구채(여러해살이풀의 하나)’ 등의 서식지로도 알려져 있으며 폭포의 이름과 관련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도 함께 전해오고 있다. 첫 번째 전설은 문헌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옛날에 한 재인(才人)이 있었는데 하루는 마을 사람과 이 폭포 아래에서 즐겁게 놀던 중에 재인이 ‘이 절벽 양쪽에 외줄을 걸고 내가 능히 지나갈 수 있다!’라고 호언장담하자, 마을 사람은 재인의 재주를 믿지 못하고 자기 아내를 내기에 걸었다. 재인이 줄을 타고 반쯤 지나가자 다급해진 마을 사람은 줄을 끊어버려 재인은 폭포 아래로 떨어져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한다. 두 번째 설화를 살펴보면, 옛날 재인폭포 인근 마을에 금실(琴瑟) 좋기로 소문난 광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줄을 타는 재인이었던 남편과 아름다운 아내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광대의 아내에게 흑심을 품은 원님의 계략이었다. 줄을 타던 남편은 원님이 줄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폭포 아래로 떨어져 그만 숨을 거두었다. 원님의 수청을 들게 된 아내는 원님의 코를 물어버리고 자결하게 된다. 그 후로 사람들은 이 마을은 ‘코문이’가 산 마을이라 하여 ‘코문리’라 부르게 되었고, 현재 재인폭포가 있는 마을인 ‘고문리(古文里)’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고 전한다. 이처럼 재인폭포는 아름다운 풍광과 더불어 광대 재인과 관련된 아름답고도 슬픈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종자와 시인 박물관'과 '재인폭포'를 함께 여행할 것을 권한다. 그리고 전곡-연천간 큰 도로로 다시 나와서 우회전, 연천방향으로 5분 정도만 가면 동막골 유원지가 나오고, 다시 조금만 더 가면 연천읍에 이른다. 연천군 통현리 인근에는 지석묘(고인돌)가 있으며 고인돌공원도 인접해 위치한다. 가까운 거리 안에 관람할 명소들이 널려있다. 이어서 추천 명소를 계속 소개할 예정이다. 연천군에는 생각보다 많은 관광명소들이 있다. 인근의 강원도 철원까지 포함해서 2~3일 정도 일정으로 여행을 할 것을 권장한다. 사진: choon
경북 비안초(교장 이임남)가 교육부가 주최한 2024년 행복한 함께학교 우수사례 공모에서 전국 30개 우수학교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비안초는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상을 수상하며 따뜻한 교육 문화를 만들어가는 모범적인 사례로 인정받았다. 함께학교는 학생, 교원, 학부모 등 모든 국민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교육정책을 논의하고, 현장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소통의 장으로, 이번 공모는 플랫폼에 접수된 미담 사례를 바탕으로 내·외부 전문가들의 공정한 심사를 거쳐 진행되었다. 비안초는 ‘모두가 행복한 따뜻한 비안초등학교’라는 제목으로 제출된 사례를 통해 학부모, 학생, 교직원이 협력하여 만들어낸 따뜻한 학교 문화를 소개했다. 농촌 지역이라는 특성을 살려 학부모들이 학교 설명회와 체험 수업, ‘모두의 그래피티’ 행사 등 다양한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학생들은 자발성과 창의성을 발휘해 교육장기 육상대회와 탄소중립 숏폼 공모전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또한, 교직원들은 상호 존중과 배려를 바탕으로 협력하며 모두가 행복한 학교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임남 교장은 "비안초가 함께학교 우수사례로 선정된 것은 학생, 학부모, 교직원 모두가 협력하여 만들어낸 결과이며, 학교의 따뜻한 문화와 상호 존중의 전통이 인정받아 매우 기쁘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이어 "앞으로도 이러한 문화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며, 학생들이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비안초의 이번 수상은 농촌 지역 학교에서 교육공동체가 협력하여 만들어낸 성공적인 사례로, 앞으로도 지역사회와 연계하여 따뜻하고 창의적인 교육 문화를 선도할 것으로 기대된다.
인간은 땅속에 지뢰를 묻어놓고 무서워 벌벌 떨며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은 전혀 두려움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뢰밭을 점령해 버렸다. 「소이산」을 두고 누군가가 했던 말이다.소이산(所伊山)은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四要里)에 위치하는 해발 362m의 낮은 산이다. 노동당사(勞動黨舍) 바로 앞에 있다. 철원(鐵原)은 우리말로 ‘쇠둘레’라 하며 해방 당시부터 6.25전쟁 때까지 북한 땅이었다. 접경지대의 주민들이 늘 그러하듯이 자신들의 이념에 대하여 동조와 선택을 강요받았고 그 결과물로 수많은 생명이 죄없이 죽어갔다. 수많은 희생을 대가로 지켜낸 슬픔의 땅, 바로 이곳 철원이며 그 중심에 소이산이 60여 년을 무덤덤하게 자리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야 오랜 금단(禁斷)의 시간을 풀고 우리에게 그 속살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소이산을 방문한 것은 겨울답지 않게 따스했던 1월의 어느 맑은 날이었다. 철원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는 중에 연천 인근에 살고 있는 친구 P를 길잡이 삼아 방문하였다. 친구는 특전사 공수부대 출신이고 필자의 부친은 베트남전 참전용사로 국가유공자이다. 지금은 국립서울현충원에 계시다. 나름 우리는 요즘 말로 국뽕(?)에 가득 차 있었다. 즉, 우리나라의 안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 세대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철원의 흙 한 더미,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그냥 허투루 보일 리가 없다. 비장한 표정으로 철원과 소이산 인근을 야심 차게 둘러보게 되었다. 양주군이나 파주 인근에서 출발하는 경우 전곡읍-연천읍을 지나 대광리역, 신탄리역의 경원선과 나란히 이어지는 3번 국도를 이용하면 된다. 차량의 통행이 적은 편이라 주말에도 막힘없이 이용할 수 있다. 백마고지역 부근에 오면 좌측에 정춘근 시인(詩人)의 시집(詩集) 제목인 「지뢰꽃 마을, 대마리」 의 배경이 된 철원읍 대마리(大馬里)가 보인다. 대마사거리에서 87번 국도를 이용, 우측으로 조금 더 가다 보면 제2땅굴과 철원평화전망대를 방문할 수 있는 표지판이 보인다. 물론 예약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월정리역과 함께 안보 관광 코스로 묶어서 이용할 수 있다. 노동당사는 해방 이후 이 지역을 관할하던 곳이다. 많은 수의 사람이 이곳에서 고문과 학살을 당했던 장소이다. 국가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가 촬영되었다. 현재는 보수공사 중이라 커다란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다. 2024년 11월에 공사가 완료될 예정이다. 노동당사 앞의 ‘철원 역사문화공원’에는 옛 철원의 모습들이 세밀하게 재연되어 있다. 필자가 2008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곳 노동당사 앞은 자그마한 주차장만 있고 건물은 잘 보존되어 있었다. 지금은 시설물들이 여기저기 설치되어 노동당사가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다른 건물 속에 그냥 묻혀있는 느낌이다. 그 당시 ‘철원 역사문화공원’이 있던 자리는 그냥 논밭이나 빈 벌판이었다. 지역 문화 유산에 대한 개발이 필요한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하다. 많은 사람이 방문하도록 개발하여 해당 문화유산을 최대한 알리며 지역의 발전을 함께 도모할 것인지, 아니면 보존에 더 신경을 써야 할지에 대한 고민과 타협이 필요할 것 같다. 노동당사 인근 바닥에는 정춘근의 ‘6시에서 12시 사이’라는 시(詩)가 보였다. 한반도는 지금 몇 시인가? 남한의 모든 총과 대포는 12시 방향으로 맞추어져 있고 북한은 6시로 고정되어 있다. 철원 출신인 정춘근 시인(詩人)의 대표작은 ‘지뢰꽃’이라는 시(詩)였다. 인간이 서로에 대한 살상을 위해 만든 지뢰를 꽃으로 비유하다니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묘한 슬픔이 느껴졌다. 지천으로 흔한 지뢰를 지긋이 밟고 제 이념에 맞는 얼굴로 피고 지는 이름 없는 꽃 ...(중략) 정춘근, ‘지뢰꽃’ 中 –실천시집선 『지뢰꽃』 2023. 지뢰의 뇌관을 통해 이 소이산의 흙에 씨앗들이 뿌리를 내리고 널찍한 담벼락이 아닌 가시철망에 꽃을 피운다고 말한다. 지뢰가 많은 것을 그냥 예쁜 꽃들이 핀 모습으로 비유한 줄만 알았는데 훨씬 더 큰 아픔과 비극을 표현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시시각각 이념의 선택이라는 카드를 집어야만 했던 그 당시 철원 주민의 삶은 어땠을까? 물론 선택의 결과는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담보로 했을 터이다. 공원의 가장 안쪽으로 가면 철원역이 있다. 그곳에서 소이산을 오르는 모노레일을 탈 수 있다. 날씨가 춥고 눈이 내려 걷기가 힘든 까닭에 모노레일을 타고 소이산 정상으로 올랐다. 군데군데 새집을 인공적으로 지어 둔 것이 보였다. 나름 생태 보전에 신경을 쓴 모습이다. 모노레일을 만들어 새들이 쉴 보금자리를 빼앗은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여겨졌다.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은 3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지뢰지대를 오른쪽에 두고 왼편으로 소이산 자락을 끼는 1.3km의 ‘지뢰꽃길’이 있다. 그 이름만큼이나 이념 또한 함께한다. 전쟁과 평화, 삶과 죽음, 이념의 양 갈래가 지뢰와 꽃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두 개의 단어를 합성하여 그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이 ‘지뢰꽃길’은 두 번째 길인 ‘생태숲길’로 이어지고 마지막 구간은 소이산 정상으로 향하는 ‘봉수대 오름길’이 자리하고 있다. 모노레일에서 내리면 미군 막사를 지나 소이산 정상인 ‘평화마루공원’에 이른다. 주변에 벙커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제아무리 평화의 길이 어쩌고 한들 전쟁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다. 당장이라도 천지가 흔들리고 굉음이 난무하는 공중 포격이 시작될 듯하다.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소이산이 개방되기 시작한 것은 2008년의 일이다. 약 4년 동안 계속된 철원군의 노력으로 60년간 금단의 땅으로 머물렀던 소이산이 일반인들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야트막한 산의 정상이지만 높은 산 못지않게 전망이 너무 좋다. 드넓은 철원평야가 나지막하게 자리해서인지 몰라도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하나도 없다. 안내판에 의하면, 멀리 북녘의 오리산과 평강고원, 백마고지, 아이스크림 고지가 희미하게 보인다. 철의 삼각지대가 한눈에 보이는 이곳은 누가 봐도 지리적 요충지이다. 우측의 남쪽으로 노동당사 건물과 철원 읍내가 보인다. 이렇게 소이산은 반백 년 동안 소중하게 간직했던 모습을 이제야 우리에게 힘겹게 건네주었다. 소이산에서 바라본 철원평야는 여느 지상에서는 보기 힘든 너른 대지의 모습이다. 볼록볼록 튀어나온 듯한 이름 모를 고지들은 전쟁의 상흔 때문인지 몰라도 검붉은색이 감도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수없이 죽어간 넋들이 모여서 뭉쳐진 것처럼, 고지 위쪽에는 커다란 먹구름이 유유히 떠다닌다. 억겁의 시간 동안 용암이 빚은 대지, 그 위에 어려있는 슬픈 역사의 흔적들…… 안보 체험은 이미 나이 지긋한 노인들의 프로그램이라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필자가 다녀본 연천, 철원의 관광지에는 학생들은 거의 없으며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았다. 실제로 안보 관광을 해야 할 사람은 젊고 어린 우리의 후손들이다. 필자의 초임 교사 시절이던 1990년대만 하더라도 철원, 연천 지역의 여러 전적지나 전망대, 땅굴 등으로 현장 체험학습을 심심치 않게 간 기억이 난다. 하지만 최근에는 공예, 목공, 역사 체험이나 아니면 아예 놀이공원 등으로 체험학습을 자주 가는 편이다. 안보 체험은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이념적이라는 비판을 받기 십상이다. 오히려 젊은 학부모들한테 시대에 어긋나는 행사나 한다고 민원 세례나 받을 것이다. 전쟁이 무엇인지, 왜 호국영령이 그렇게 젊은 나이에 그렇게 죽어갔는지 이곳에 와서 직접 눈으로 보며 한 번이라도 생각을 해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PC게임으로 총을 쏘는 아이들은 자칫 자신이 총에 맞더라도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난다는 착각을 하지는 않을까? 그리고 우리나라가 아직 분단된 국가이고 언제 또 전쟁이 발생할지 모르는 급박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3년, 아니 그 이상의 많은 시간 동안 전쟁과 대립의 역사를 견뎌왔고 그 대가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했으며, 지금도 70년이 넘는 동안 여전히 분단 되어 있는 조국의 모습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들어야 믿지 않을까? 하루 동안의 짧은 여정은 아쉬움을 남긴다. 경기 이북 지역이라 그런지 해가 빨리 져버린다. 철원을 자주 오는 편은 아니지만 올 때마다 그 아쉬움을 뒤로했던 기억이 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철원도, 나 자신도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다. 일반적인 관광명소는 눈으로 보거나 일정 시간 그 속에서 머물면 어느 정도 이해되고 기억에도 남게 된다. 하지만 철원지역은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단순히 걸음을 옮기고 사진을 찍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는 해결할 수 없는 ‘울림’이 있다. 그 울림을 우리 자식들과 후손들에게 안겨주어야 할 것이다. 자칫하면 철원의 중요한 안보 유적들이 한낱 인터넷 유튜브에서 소개하는 갈만한 곳, 맛집 정도만으로 그 가치가 훼손될지 우려된다. 출발할 때의 비장했던 마음가짐과 달리 오늘의 철원 여행도 근심과 염려만 한 줌 안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연천을 가로지르는 경원선(京元線)은 서울-원산(元山)을 잇는 철도로 길이 223.7㎞이며 1914년 9월 16일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오늘날에는 국토 분단으로 용산역~백마고지역 사이의 94.4㎞만 운행되고 있다. 용산에서 출발하여 서울 북부지역 – 의정부 – 동두천 - 소요산을 지나 연천군의 첫 역인 초성리역에 진입한다. 이후 한탄강, 전곡, 연천, 신망리, 대광리, 신탄리, 백마고지역까지가 경원선의 연천 구간이다. 경원선이 지나가는 간이역을 따라 연천 여행을 해보았다. 연천군의 주요 지역들을 지나는 역들이다. 전곡역, 연천역은 2023년 신축된 현대식 역사가 오래되고 낡은 간이역 건물을 대신하고 있다. 전곡읍까지만 주로 갔었던 터라 이전에는 소요산역에서 전철을 내려 버스로 갈아탔다. 소요산역에서 전곡이나 연천까지 가는 기차는 그 간격이 너무 길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승객이 거의 없다. 덜컹거리는 열차를 타고 산야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시간이 기억난다. 8월의 어느 날, 연천에서 군 생활을 했던 40년 지기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서울에 살다가 강원도 원주로 이사를 간 이후 1년에 한 번을 보기도 빠듯하다. 모처럼 시간을 내어 함께 여행을 떠났다. 이 친구와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예전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그냥 억지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야기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추억을 재생시킨다. 난 이 친구를 ‘흑백영화의 낡은 필름’이라고 표현한다. 참 소중한 녀석이다. 어느덧 우리는 사춘기 시절의 어린아이로 변해있다. 너무나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렇게 경원선을 따라 연천을 여행했다. 첫 번째청산역(옛 초성리역) / 한탄강역 용산에서 출발한 경원선은 초성리를 지나 연천과 신탄리를 거쳐 대광리역, 백마고지역으로 이르게 된다. 물론 종착역은 북한의 원산이다. 청산역(초성리역)은 현재 폐역이다. 청산역(초성리역) 주변의 마을인 초성리는 오래된 옛 모습을 여전히 담고 있다. 시간이 멈추어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한눈에 보아도 3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아니 훨씬 더 오래전 느낌의 간판들이 많이 걸려있다. 또, 주변의 학담마을은 지금은 사라져 버린 오래전 모습들이 잘 간직되어 있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 학담마을의 고즈넉한 풍경들은 옛 추억을 자연스럽게 소환한다. 초성리 바로 인근에는 ‘열두개울’이라는 유원지가 있다. 연천군의 남단, 초입에 자리 잡은 ‘열두개울’은 서울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어 여름철에 많은 인파가 몰린다. 이곳에 다리가 놓이기 전, 열두 개의 개천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계곡이 크지는 않지만, 물이 깊지 않아 어린이들이 물놀이하기에 안전하다. 닭백숙이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대학 시절만 하더라도 기차를 타고 한탄강역을 지나 전곡역에 도착했었다. 한탄강역은 한탄강 유원지 바로 옆에 있다. 승용차가 드물었을 당시 한탄강 유원지에 오려면 경원선을 타고 이 한탄강역에서 하차해야 했다. 연천행 시외버스도 한탄강 유원지에 잠시 정차한 후에 전곡까지 운행했었던 기억이 난다. 한탄대교를 건너자마자 한탄강역에 기차는 잠시 머문다. 별도의 건물이 없고 기차가 정차하고 승객들이 승하차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었으나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두 번째전곡역 경원선은 초성리역-한탄강역-전곡역-연천역-신탄리역으로 이어져 백마고지역에서 멈춘다. 조그마한 각각의 역마다 그들만의 소중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 중, 전곡역은 1912년 7월 25일 경원선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으며 1945년 광복과 남북분단 당시 소련군이 들어와 있던 38선 이북 지역의 최남단 역사(驛舍)이다(나무위키). 전곡역은 전곡의 중심이 되던 곳이다. 전곡 버스터미널보다 훨씬 많은 승객이 이용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곡역은 전곡초등학교와도 멀지 않아 학교 공부가 끝나면 역사(驛舍) 인근에서 철길을 뛰어다니며 위험하게 놀았다. 전곡역 앞에는 군용 트럭이 주차된 조그만 공터가 있었다. 휴가가 끝나고 자대로 복귀하는 장병들의 얼굴이 그리 밝아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그때 본 군인(아저씨)들은 나처럼 어린 초등학생에게는 덩치가 크고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동두천중앙역에서 신탄리 방향 열차를 타면 전곡역에 갈 수 있다. 캄캄한 서울의 지하철에서 벗어나 탁 트인 주변 경관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야트막한 언덕 사이로 군데군데 큰 산이 있고 자그만 개천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창밖의 풍경을 보며 상념에 빠져있노라면 어느새 한탄강역이 보인다. 한탄강역은 무인(無人)으로 운행되는 오래된 역이다. 한탄대교와 북위 38도선 표지판을 보며 한탄강역을 지나면 얼마 가지 않아 전곡역에 바로 도착할 수 있다. 전곡역 앞의 M 식당은 전곡에서는 매우 유명한 중화요리 음식점이다. 필자가 초등학교 때 어머니께서 데리고 가셨던 곳이다. 모처럼 전곡 읍내의 시장에 나오신 어머니께서 학교에 오셔서 나와 동생을 데리고 이 음식점에서 자장면을 사주셨다. 이때 먹은 자장면은 내 평생 어떤 자장면보다 맛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자장면이 아직도 기억난다. 당시 자장면 가격은 400원이었다. 2000년대 초반 어떤 그룹(가수)이 불렀던 노래, 「어머님께」에 등장하는 자장면에 대한 가사가 가슴을 저민다. ‘어머니’와 ‘자장면’을 연결해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기가 막히게 감정을 자극하는 문장으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품게 해 주었던 노래였다. 현재는 당시 주인의 며느리께서 식당을 경영하고 계신다. 전곡을 갈 때면 항상 그곳에서 식사했다. 아직도 음식이 유난히 맛있다. 특히 쫄깃한 탕수육이 정말 참맛이다. 전곡초등학교는 전곡역 인근,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 필자는 1980년 늦가을 서울에서 이곳 전곡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한 학년에 5~6개 정도의 학급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전곡읍은 연천군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동시에, 가장 큰 읍이다. 아무래도 동두천, 의정부, 서울과 가까운 곳이다 보니 군인 가족뿐 아니라 다수의 인구가 살고 있었을 것이다. 전곡읍은 군사 도시이다. 군부대와 군인을 대상으로 하여 마을의 경제활동, 사회활동 등이 대부분 이루어진다. 학교의 운동회 때에도 군 장병들이 와서 천막도 쳐주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해 주었다. 그리고 각종 음식점, 상점, 숙박업소 등의 고객 대부분이 군부대의 군인 또는 군인 가족들이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위수지역(衛戍地域)은 한탄강 유원지 부근이었다. 따라서 외출, 외박을 나온 군 장병들은 전곡읍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전곡 읍내에서 모든 걸 해결해야만 했다. 아마 이 무렵이 경제적으로 가장 번화하였을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2023년 7월 현재 연천군의 인구는 4만1000여 명이며 이 중 전곡읍의 인구는 1만8000여 명이다. 1980년 당시 연천군의 인구는 6만7000여 명이었다. 1980년을 기점으로 연천군의 인구는 차츰 줄어든다. 전곡초등학교에 처음 전학 갔을 때, 군인 가족이라는 이유로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이 무척이나 반겨주었다. 난 서울에서는 학급에서 친구들에게 주목받은 적이 없다. 공부가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운동을 잘한 것도 아니었다. 담임 선생님과 같은 반 친구들조차 내가 그 학급에 있었다는 것도 잘 모를 정도로 내향적이었다. 전곡초등학교에 와서 처음으로 타인으로부터의 관심을 받는 경험을 했다. 군인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을지 모르지만 담임 선생님께서도 나를 살갑게 대해주셨고 친구들도 나와 함께 놀려고 다가오곤 하였다. 난 조금씩 바뀌어 갔다. 학교생활이 재미있었고 자신감도 차츰 생겨났다. 학급 임원을 하면서 여러 가지 학급 일에 영향을 미치곤 했다. 공부도 잘되었다. 성적도 많이 오르고 우등상장을 받아 부모님도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그 무렵에 학생이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알겠지만, 우리 반에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소설의 ‘엄석대’와 같은 학생도 있었다. 그 친구는 부하(?)를 몇 명씩 거느리고 다녔고 가방과 신발주머니는 그 친구들이 대신 들고 다녔다. 반항하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부하들을 시켜서 때리는 것을 몇 번 목격하였다. 그들이 보기 싫었고 증오했다. 어른이 되어 우연히 본 그 소설에서 그 기억이 데자뷰(Dejavu) 되었다. 당시 많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전곡초등학교 뒤편, 차탄천 쪽에는 현무암과 이름 모를 나무가 무성하고 외진 장소가 있었다. 학교와는 별도의 출입문 없이 운동장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무가 크고 울창하고 현무암이 어두운색을 띠고 있어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은 무서웠다. 어느 날이었다. 우리 반 친구가 다른 반의 학생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야외학습장에서 정체 모를 귀신을 본 이야기였다. 어느 학교건 ‘학교 괴담’ 하나쯤은 있을 터이다. 아마 전곡초등학교에는 그 이야기가 ‘학교 괴담’으로 전해 내려올 것이다. 손발이 없고 검은 옷차림과 검은 모자를 쓴 중년의 아저씨가 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그 아저씨의 손이 있던 자리에 지팡이가 둥둥 떠 있고 검은색 안경을 쓰고 있는데 얼굴의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발도 없는데 천천히 걷다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멀리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가를 반복한다고 말했다. 1980년대 초반 전곡초등학교를 다닌 친구들은 아마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치열한 전쟁으로 많은 억울한 희생자들이 죽어간 자리가 아니었을까? 물론 어린아이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지만 한 편으로는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하여 숭고하게 희생한 호국영령의 넋이 이곳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 당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너무나 무서웠다. 지금 전곡초등학교 학생들도 그 이야기를 알고 있을까? 학교 주변에 주차하고 전곡초등학교에 잠시 들어가 보았다. 10여 년 전에 혼자 이곳에 들어와 벤치에 앉았던 생각이 났다. 운동장 끝에서 학교 전체를 살펴보니 40년 전 전곡초등학교의 모습이 한눈에 그려졌다. 본관 건물은 1층짜리 낮은 건물이었고 본관 뒤편 후관은 3~4층 정도 되는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운동장 건너편은 콘크리트로 만든 스탠드가 계단식으로 길쭉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연천군 내 초등학교 대항 축구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우리는 운동장의 계단에 앉아서 전곡초등학교 선수들을 응원했다. 그때의 환호성과 축구 선수들의 뛰는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40년, 정확히는 44년째이다. 내가 이곳에서 학교에 다니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공을 차면서 놀던 때가, 난 어느 순간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어째서 44년 전의 일을 이토록 정확하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냥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스틸사진처럼 그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우리 뇌는 가장 안 좋은 기억과 가장 좋았던 기억을 제일 오랫동안 저장한다는 말을 들었다. 정말 전곡초등학교에서의 그 시간은 내 머릿속에 너무나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것일까? 세 번째연천역 연천역 앞의 도로는 확장되어 어지간한 대도시의 그것과 비슷한 최신식 형태를 갖췄다. 역을 중앙에 두고 대로가 펼쳐지며 좌우로도 큰 도로가 있는 모양새다. 예전보다 큰 도로와 건물이 많이 생겼다. 하지만 주말 오후인데도 왕래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군 장병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연천역이라 하면, 연천군을 대표하는 역인데도 불구하고 주변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연천군에 인구가 많이 유입되도록 여러 가지 정책을 펴는 모양이나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여하튼 연천역 앞에는 예나 지금이나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연천역 바로 옆에는 연천역 급수탑이 있다. 웅장하다. 연천역 급수탑은 길게 뻗은 원통형으로 생겨 마치 등대나 굴뚝같다. 23m의 높이를 자랑하는 급수탑 내부, 출입구 반대편에 계기 조작판이 자리 잡고 있으며 급수관 3개와 기계장치가 보존되어 있다. 연천역 급수탑은 경원선을 운행하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의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14년에 만들어졌으며 2003년 국가등록 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상자형과 원통형 2기가 남아있다. 상자형 급수탑은 콘크리트조로 기단, 벽체부, 지붕부 3단으로 입면을 형성하였으며, 아치형 출입구를 두었고, 외관에 줄눈을 그려 벽돌로 쌓은 것처럼 꾸몄다. 원통형 급수탑에는 급수관 3개와 기계장치가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고, 탑 외부에는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어 당시의 참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밤이면 급수탑 벽면에 예쁜 조명이 켜진다. 1950년대 디젤기관차가 등장하여 제 기능을 다하고 사라졌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증기기관차 관련 철도 시설물로 가치가 높다고 한다. 연천역 등 모든 경원선 기차역에는 차탄천이 함께 흐른다. 철로를 따라 흐르는 차탄천은 색다른 묘미를 준다. 경원선과 차탄천은 마치 평행선처럼 긴 세월을 함께 머금고 달린다. 연천역 바로 인근에는 여름철 유명한 관광지인 동막계곡 즉, 동막골 유원지가 있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동막골 유원지는 연천을 대표하는 유원지이다. 특히 여름철이면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연천향교와 연천 현충탑을 볼 수 있다. 연천향교는 1398년(태조 7년)에 처음 설립한 향교로 본래 읍내리에 있었으나, 1658년(효종 9년)에 한 번 이전되었다. 연천향교 바로 아래쪽 명륜(明倫) 교육관에 잠시 주차하고 홍살문(紅箭門)을 지나니 연천향교가 있었다. 현재는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해 외관만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 농로를 따라가면 차탄천 개울 바로 앞에서 현충탑 입구가 보인다. 곳곳에 대전차방어 진지가 보인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으나 연천지역 곳곳에서 볼 수 있어 어느덧 익숙해져 버렸다. 전차의 이동을 지연시키고자 거대한 콘크리트로 만든 군사시설이다. 연천 현충탑은 국가보훈처(現 국가보훈부)지정 현충 시설로서 육군 제17연대가 1950년 12월 17일부터 1951년 3월 15일까지 연천지구 전투에서 이룩한 장병의 공훈을 높이 찬양하고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산화한 장병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묵념을 올렸다. 누군가는 지금의 평화를 ‘피를 먹고 얻어지는 평화’라는 말로 표현했다. 어쩌면 6월 25일을 매년 기리는 일이 없어져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벌써 70년 전의 일이다. 세대가 2번이나 바뀌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들에게는 역사책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평화를 누리면서 살 수 있는지를. 연천 곳곳에 자리 잡은 현충탑과 전적비, 위령비는 왜 지금의 우리가 평화롭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이 담겨 있다. 그리팅맨(Greeting man)을 보러 가는 길에는 두루미 마을 간판이 보인다. 연천은 콩과 율무, 그리고 두루미 등으로 유명하다. 연천을 다니다 보면 콩으로 만든 여러 가지 요리 즉, 두부 요리나 콩국수 등을 파는 음식점이 자주 보인다. 율무 또한 연천군의 농특산물이다. 매년 10월이면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율무 축제가 개최된다. 몇 해 전, KBS ‘동네 한 바퀴’라는 프로그램에서 어떤 주민이 두루미에게 율무를 먹이로 주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연천군 중면 횡산리 일대 ‘임진강 두루미류 도래지’는 국제적으로 희귀한 조류인 두루미와 재두루미 1500여 마리가 매년 겨울 월동하는 곳이다. 두루미들은 임진강과 주변 여울, 농경지에서 먹이를 구하고 휴식을 취하며 겨울을 난다. 이 일대 두루미들은 특이하게 산기슭에 심어있는 '율무' 낙곡(落穀)을 먹어 '율무 두루미'라고 불린다. 그리팅맨은 옥녀봉 정상에서 북쪽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었다. 존중, 배려, 그리고 통일을 바라는 마음이 함께 저며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벙커 건물은 그리팅맨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좁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5분 정도만 올라가면 그리팅맨이 바로 시야에 들어온다. 안내판을 읽어보았다. 연천 9경 중 하나인 그리팅맨(Greeting man)은 유영호 작가가 만든 조각상이다. 2016년 4월에 설치하였다. 조각상은 15도 각도로 고개와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은 서로에 대한 배려, 존중, 평화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 옥녀봉은 해발 205m로 연천군 거의 모든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네 번째신망리역/대광리역/신탄리역 경원선의 간이역을 방문했던 날은 오전에는 더웠다가 오후가 되자 갑자기 흐려지면서 비가 내렸다. 여름내 폭염이 지나간 자리를 말끔하게 청소라도 하듯이 차분히 비가 내렸다. 어둡고 탁한 연천의 하늘은 분단의 아픔을 노래하듯이 간이역 주변을 무채색 수채화로 물들였다. ‘간이역(簡易驛)’은 레트로(Retro) 감성 최고의 아이템이다. 일단 간이역은 대부분 오래된 건물이다. 특히 폐 간이역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간이역 주변의 모습들 또한 간이역과 마찬가지로 오래전 풍경을 간직하고 있을 때가 많다. 간이역에 가면 지금은 사라진 그 무언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겨난다. 경원선의 간이역도 마찬가지이다. 역 주변에는 오래된 상점의 낡은 간판과 지금은 사라진 표지판 등이 아직 철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오래된 것은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오래된 것, 낡은 것이 새롭게 생겨난 것들보다 훨씬 소중해 보이고 눈길이 자꾸 머문다. 경원선 간이역은 이미 폐역이 되었다. 2023년 하반기 새로운 청사(廳舍)가 개통되었기 때문이다. 낡은 폐역 옆에 근사하게 지어진 신(新)청사는 옛날과 오늘날의 모습을 대표하듯이 나란히 서 있다. 폐역이 철거되지 않고 계속 남아 예전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신망리역 부근은 건축 기자재들이 많이 쌓여 있었다. 간이역이 버려진 듯하여 안타까우면서도 세월의 무상함이 함께 느껴졌다. 경원선이 원산까지 이어지는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이미 지나버린 70년을 거슬러 올라 경원선 증기기관차가 마음껏 달리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신망리역 주변에는 ‘평화누리길’과 ‘평화누리 자전거길’이 지나간다. 신망리역 주변의 대표적인 콘텐츠는 바로 다방 거리이다. 지금은 온갖 외국기업 카페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지만 필자의 젊은 시절만 해도 친구와 편하게 차 한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은 다방과 빵집밖에 없었다. 다방이라는 이름이 자칫 부정적인 이미지일 수도 있으나 사실이 그랬다. 특히 연천군은 군부대가 많아 다방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메리카노가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역시 우리에겐 설탕과 커피 프림이 적당히 들어간 다방 커피가 최고다. 오늘은 식후에 달콤한 자판기 커피로 옛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대광리역은 1912년에 영업을 시작한 기차역으로 연천의 경원선 기차역 중 가장 오래된 역이다. 지난 2019년에 전철화 사업으로 인해 운행이 중단되었다. 역 앞에는 큰 군용물품 상점이 자리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필자도 옛 시절을 생각하며 상점에 들어가 구경을 해보았다. 대광리역 주변에는 드문드문 오래된 가게 간판과 현대식 간판들이 상존한다. 그리고 바로 인근에 군부대가 있다. 그래도 대광리역 주변은 생각보다 사람의 왕래가 꽤 있었다. 신탄리역은 2012년 백마고지역이 신설되기 전까지 지난 60년간 경원선의 최북단 종착역이었다. 여느 경원선 역과 마찬가지로 차탄천이 바로 옆에 흐르고 있다. 과거, 고대산의 풍부한 임산자원을 목재와 숯으로 가공해 생계를 유지했던 마을이기에 이름도 신탄(新炭)리가 되었다고 한다. 신탄리는 1945년 광복과 동시에 북한에 귀속되었다가 1951년 수복된 지역이다. 대광리역에 비하여 주변에 음식점, 상점 등이 많은 편이고 고대산과 연계하여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노력이 군데군데 보였다. 주변에는 고대산이 있다. 고대산의 정상에 오르면 북한 땅을 볼 수 있어 실향민들이 찾는 곳이다. 신탄리는 ‘통일을 고대하는 마을’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고대산에는 큰 규모의 자연휴양림이 있다. 신탄리역은 연천군에 있는 경원선 역 중, 백마고지 다음으로 북단에 있다. 북한과는 매우 가깝다는 이야기다. 다른 역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분단의 아픔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신탄리역 철길을 따라 북쪽으로 걸어 보았다. 이 철로를 따라가면 경원선의 끝인 원산까지 갈 수 있다. 단순히 원산을 향한다는 것보다는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통일의 길이 아련하게 보이는 느낌이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문구가 보였다. 오래되어 부식된 표지판이 세월의 흔적과 분단의 상처를 그대로 보여준다. 신탄리역에서 자동차를 이용하여 이 표지판 바로 옆까지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철로를 따라 걸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듯하다. 신탄리 역사(驛舍)에서 그리 멀지 않다. 신탄리역에서 북쪽으로 철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경원선 폐(廢)터널을 만나게 된다. 이 터널은 북한의 원산까지 연결된 경원선 철로의 일부였지만, 1945년 해방 이후 철길이 끊어지면서 버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폐 터널의 입구에는 바닥에서 위로 솟아오른 형태를 한 역고드름이 있다. 지금은 여름철이라 고드름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조금 더 살펴보았다. 이 폐터널은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탄약 창고로 사용됐는데 미군이 이 터널을 폭격했고, 그 폭격으로 인해 터널 위쪽에 생긴 틈과 함께 자연현상이 우연히 맞물리면서 역고드름이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역고드름 터널 입구에는 연천 급수탑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모양의 총탄 흔적이 있다. 하지만 급수탑에서 본 것보다 훨씬 컸다. 아마 비행기에서 쏜 총탄으로 보였다. 거의 성인의 주먹 크기 정도의 탄환 자국이 수십 개가 넘게 눈에 들어온다. 역고드름 또한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상흔이다. 연천군 관광 지도에는 ‘연천 역고드름’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곳은 연천의 가장 끝이다.몇 걸음만 더 가면 강원도 철원 땅이다. 신탄리에 오면 꼭 들러주길 바란다. 경원선은 연천군을 세로로 가로지른다. 경원선의 여러 역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관광하면 빠지는 곳 없이 자세히 둘러볼 수 있다. 경원선 열차를 타고 원산까지 멈춤 없이 한 번에 갈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올해 처음 도입된 학교폭력 전담조사관 제도와 관련한 설문조사에서 교원들이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부, 푸른나무재단, 이화여대 학폭예방연구소는 23일 서울 광명 테이크호텔에서 ‘2024년 학폭제로센터 성과 공유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서 8월 28일부터 9월 6일까지 교원 789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학폭 전담조사관 도입의 효과와 관련된 설문조사 결과가 공개됐다. 도입 효과에 대해 응답자들은 ‘책임교사 업무 및 심리적 부담 경감’(42.7%)을, 다음으로 ‘사안처리의 공정성·객관성 제고’(24.4%)를 꼽았다. 이어 20.6%는 ‘사안조사 과정의 악성 민원 감소’를, 6.3%는 ‘학폭의 높아진 경각심’으로 답했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사안 처리의 공정성과 객관성이 높아지고 교원의 학력 사안조사 및 보고서 작성, 악성 민원 대응 업무가 줄어들었다는 학교 현장의 의견과 함께 학폭 전담조사관 제도에 대한 긍정 인식이 확인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도교육청, 경찰청 등 관계자 총 100여 명이 모여 학폭제로센터 운영 성과를 나누는 시간도 진행됐다. 이어 ‘학폭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 제정 기념 20주년 토론회도 열렸다. 토론회에서는 학교폭력예방법 제정 이후 그동안의 노력과 향후 정책 방향(이덕난 국회 입법조사처 연구관), 제4차 학폭 기본계획 및 학폭 근절 종합대책의 성과와 보완 사항(박주형 경인교대 교수) 등 발표 및 토론이 이뤄졌다. 오석환 교육부 차관은 “안전하고 정의로운 학교를 만들어 가는데 학폭제로센터가 각 지역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속해서 지원하겠다”라고 말했다. 학폭제로센터는 2023년 나온 ‘학폭 근절 종합대책’에 따라 학폭 발생 시 사안조사, 피해학생 회복, 피·가해학생 관계 개선, 피해학생 법률서비스 등을 통합 지원하기 위해 마련됐다. 센터는 8개 교육청의 시범운영 이후 올해 3월 전국에 전면 도입돼 현재 전국 시·도교육(지원)청 단위에 총 176개가 설치됐다. 2248명의 학폭 전담조사관, 1220명의 피해학생 전담지원단, 2513명의 피·가해학생 관계회복지원단, 525명의 피해학생 법률지원단이 사안조사와 피해학생 맞춤형 회복 등을 지원하고 있다.
한국교총 제40대 회장단이 11일 출범했다. 회장단은 ‘학교의 주체는 선생님, 선생님을 지켜야 학교가 삽니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아동복지법 및 아동학대처벌법, 교원지위법 개정 ▲학교폭력예방법 개정(학교폭력 범위 ‘교육활동 중’으로 제한) ▲‘교권보호119’ 가동·출동 ▲보수·수당 현실화 ▲행정업무 완전 분리 등을 공약했다. 본지는 강주호 회장과 함께 교총을 이끌어 갈 부회장 5인을 인터뷰했다. Q1. 당선 소감 Q2. 선거 과정에서 접한 현장의 목소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 Q3. 학교 현장에서 말하는 가장 시급한 현안과 해결 방안 Q4. 앞으로 계획과 포부 Q5. 교총 회원과 교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 순으로 질문했다. ◆김성종 수석부회장(충남 위례초 교장) A1. "출마를 결심하고 학교 선생님들께 말씀드렸더니 모두가 한국교총에 가입하고 응원해 줬습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러분들이 많은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이러한 마음과 정성이 헛되지 않게 수석 부회장으로서 선생님들에게 힘이 돼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힘을 모아주셨던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A2. "투표 마지막 날인 12월 10일, 인천 특수교사 49재 추모재에 다녀왔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특수 선생님의 절박한 호소를 듣고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교실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까지 교사에게 떠맡겨지는 현실이 안타까웠고, 현장의 선생님들을 위해 교총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A3. "가장 중요한 것은 선생님들이 수업과 생활지도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학교마다 교무행정사가 배치되고 업무전담팀도 꾸려보고 했지만, 여전히 선생님들은 바쁘고 힘듭니다. 해답은 교사 정원을 충분히 늘리는 것입니다. 교사 업무를 가장 잘 지원할 수 있는 사람은 교사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A4. "수석부회장이라는 직책을 활용해 학교 현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계신 선생님의 지킴이가 되려고 합니다. 선생님이 힘들 때 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우리 회원들이 ‘내 곁에는 든든한 교총이 있다’는 걸 피부로 느끼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A5. "한국교총이 선생님을 지킬 수 있는 힘의 크기는 회원 수에 비례합니다. 변호사회, 의사회 등 전문직을 표방하는 단체는 100% 조직 가입을 통해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 부당함에 당당히 맞섭니다. 새로운 회장단이 출범한 만큼 공약을 실천하고 점검하면서 한국교총의 이미지를 새롭게 바꿔 나갈 것입니다." ◆ 김선 부회장(경기 둔전초 교사) A1. "현장의 어려움을 대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선거를 위해 공약을 점검하고 회원님들을 찾아다니며 말씀나눴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퇴근도 못한 채 평가와 업무에 몰두하시는 선생님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 순간들을 잊지 않고 교권 확립과 교원복지 향상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A2. "교총 선거 자체를 모르는 분이 많고 관심도 저조했던 점입니다. 교총이 그동안 선생님을 위해 노력했던 일을 알리고 현장에서 함께하는 교총이 돼야 한다는 목소리를 많이 접했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A3. "현장 갈등입니다. 교육을 위해 하나가 돼야 하는 교육공동체가 관리자 대 교사, 정규직 대 비정규직, 행정실과의 업무 갈등 등으로 구성원 모두가 아파하고 있습니다. 과중한 업무와 악성 민원으로 인한 내적 분열을 최대한 막아낼 것입니다. 우리끼리 다툴 게 아니라 교육 활동을 방해하는 업무들은 과감히 이관시켜야겠다, 다짐했습니다. 또 CCTV 관리와 같이 교사의 업무가 아닌 업무 분장의 모호함을 해결해야 합니다. 행정실과의 갈등을 해결하고 업체와 경찰을 통한 전문적인 시스템 관리가 필요합니다. ‘과연 이게 교사가 해야 할 일인가?’ 10여 년 전 학교폭력 업무 담당자로서 느꼈던 회의감을 지금, 이 순간에도 느끼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제40대 회장단의 가장 큰 공약이 행정업무 분리인 만큼 임기 동안 교사의 본질적인 업무에 충실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A4. "회장단에서 제시한 공약과 함께 선생님들의 전문성 신장과 그에 걸맞은 대우, 보수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능력 있는 선생님들의 ‘N잡’ 고민을 해결하고, 신규 선생님들의 교직 이탈을 막기 위해 물가 상승률을 반영한 수당 및 강의료 인상을 반드시 추진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정서적 소진으로 인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상담 지원 및 연구년제 확대를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A5. "조금만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의 모습을 지켜낸 것은 선배 선생님들과 교총 직원들의 사명감과 유대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에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함께해 주시고 목소리를 모아주세요. 실망하게 하지 않도록 더욱더 열심히 앞장서서 일하겠습니다." ◆ 왕한열 부회장(대구 학남고 교장) A1. "믿고 지지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당선은 개인의 성취라기보다는 현장의 목소리와 열망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마음으로 힘을 보태주신 많은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앞으로 이 자리가 책임감 있는 행동과 봉사로서 보답해야 하는 자리임을 항상 명심하겠습니다. 교총이 현장의 진정한 대변자로서 교원의 권익을 높이고, 교육 현장을 혁신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A2. "한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더 나은 교육을 제공하고 싶지만, 제도적 환경이 열악하다’고 말씀하셨던 일입니다. 열정과 헌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토로하며, 교육 여건 개선의 절박함을 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깊은 울림을 줬고, 교육은 교사의 노력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제도적·환경적 지원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했습니다. 순자가 말한 ‘적선성공(積善成功)’처럼, 작은 변화와 노력을 꾸준히 쌓아가며 선생님 한 분 한 분의 고충을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해 나가겠습니다." A3. "학교 현장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교사의 과중한 행정업무와 교권의 약화라고 생각합니다. 행정업무와 생활지도 부담으로 인해 선생님들이 본연의 교육 활동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교원업무 정상화를 위한 제도 개선과 함께, 교사들이 수업과 학생 지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 체계를 강화할 것입니다. 또한, 교권 보호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강화해 교사가 안심하고 교육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습니다. 이를 위해 정부와 국회, 교육청과 긴밀히 협력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A4. "앞으로 교총이 교육계의 신뢰받는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교원의 권익 보호와 교육 환경 개선은 물론, 학생들이 미래를 준비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적 지원을 추진할 것입니다. 또한, 현장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선생님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교총이 진정으로 교원을 위한 조직이라는 신뢰를 쌓아가겠습니다. 저도 교총이 교육 현장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교사와 학생 모두가 행복한 교육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데 앞장서는 조직이 되도록 헌신하겠습니다." A5. "교총 회원과 교원 여러분, 여러분의 헌신과 열정이야말로 교육 현장을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현장에서 느끼는 어려움과 목소리를 더 자주 경청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겠습니다. 함께 작은 변화를 쌓아가며 더 나은 교육 환경과 미래를 만들어가길 희망합니다. 여러분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김진영 부회장(서울 경복비즈니스고 교사) A1. "당선된 사실이 기쁘고, 감사하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교육 현실 앞에 어깨가 무겁습니다." A2. "생활안전교육부장을 맡다 보니 학생 지도에 관한 말씀을 많이 듣습니다. 악성 민원과 과중한 업무에 시달려서 더 이상 출근이 즐겁지 않고 지속적으로 우울함을 느낀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누구보다 교직과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있는 분이라는 걸 잘 알기에 마음이 더욱 아팠습니다. 강주호 회장님이 강조하는 ‘선생님을 지켜야 학교가 산다’라는 말 속에 담긴 절실함을 더욱 느꼈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선생님들께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는 교총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A3. "정당한 교육 활동에 대한 보호라고 생각합니다. 정당한 지도를 아동학대라고 하는 상황에서는 학생을 적극적으로 지도하는 교사일수록 더욱 어려움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총의 노력으로 학교 안전사고 교원 면책권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부분은 매우 고무적인 결과입니다. 모호한 아동복지법 및 아동학대 처벌법을 개정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법 개정이 될 때까지 국회를 찾아가고 또 찾아가 노력하고자 합니다. 또한 ‘교권보호119’ 등을 통해 현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계신 선생님들을 지원하겠습니다." A4. "제1 교원단체로서 교총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부회장의 역할을 다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현장 선생님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겠습니다. 또한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다가 교원 간 업무 갈등으로 이어지는 현실을 개선했으면 합니다. 비본질적인 업무를 폐지하고 행정업무를 분리해 각자 본연의 업무를 담당하며 하나 되는 학교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A5. "어려운 시기에 학교 현장에서 교육을 위해 애써 주시는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강주호 회장이 이끄는 교총을 통해 대한민국 교육의 미래가 더욱 밝아질 수 있도록 많은 지지와 격려 부탁드립니다." ◆ 심창용 부회장(인천 경인교대 교수) A1. "어려운 시기에 부회장에 당선됐습니다. 기쁨보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더 강하게 다가옵니다. 회장님을 포함한 회장단 모두가 같은 심정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해야 할 일, 피하지 않고 즐기겠습니다." A2. "교권 보호에 대한 강한 요구와 교총의 생존, 두 가지가 기억에 남습니다. 교권이 약화하면서 학교 현장에서 선생님들께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이에 대한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교총의 회원 수 감소와 고령화에 대한 우려는 교총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젊은 선생님들께서 기꺼이 함께 할 수 있는 교총이 되기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귀에 생생합니다." A3. "가장 시급한 현안은 부당한 사유로 수업권이 침해되거나 부당한 민원으로 인한 민형사상의 처벌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교육부와 국회 교육위원회 등에 의견을 전달하고 반영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강구할 것입니다." A4. "교원 회복을 위한 노력과 더불어 옆반 선생님 같은 교총, 섬기고 봉사하는 교총으로의 변화를 견인하는 데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전국의 교육대학 등 교원 양성기관들과 MOU 체결 등을 통해 긴밀한 협력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예비 교사들에게 교총의 위상과 역할을 알리며, 지역 교총과 함께 예비 교사의 임용고사 준비를 돕는 등의 활동을 강화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회원 수 증가로 나타날 것입니다." A5. "회장단에 합류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픔과 서러움이 없도록 교직 환경을 변화시키는 데 일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졸업생인 현직 선생님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지금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예비 교사들이 흔들림 없이 교직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선생님들이 안전하게 교육하고 자랑스럽게 일할 수 있는 교육 현장을 만들어가도록 같이 노력하겠습니다."
정부가 과학·수학·정보·융합교육의 종합적 발전을 위해 인공지능(AI) 디지털교과서 활용 등을 통한 수업 혁신, 학생 탐구활동과 교원 연구활동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 저변 확대, 문화 확산에도 나선다. 교육부는 20일 제5차 과학교육 종합계획, 제4차 수학교육 종합계획, 제2차 정보교육 종합계획, 제3차 융합교육(STEAM) 종합계획’을 동시에 발표했다. 우선 수업 혁신 차원에서 AIDT를 활용한 실험·탐구 등 학생 활동을 강화하고, 학생 스스로 지식을 이해·재발견·재생산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수업 모델을 개발·보급한다. ‘지능형 과학실’ 고도화, ‘1학생 1탐구’, ‘알지오매스·키즈’ 등 수학 탐구활동 강화, ‘수학탐구학교’ 도입, ‘(가칭)정보수업 개선 지원단’ 등 계획도 추진된다. 특히 수학탐구학교는 학생이 수학 개념·원리·법칙을 탐구하며 수학적 사고력을 함양할 수 있도록 개념 기반의 탐구학습·평가 등을 강화할 수 있도록 운영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25학년도부터 2년 간 국립부설 지능형 수학교실 운영학교를 시범 적용한 뒤 2028년까지 시·도 지능형 수학교실 운영학교를 적용하고 2027학년도부터 일반학교 대상 확산을 추진한다는 것이 교육부의 계획이다.] 디지털 기초소양과 컴퓨팅 사고력 함양을 위한 방안은 놀이(초등)·실습·문제해결 활동 중심의 수업 모델 개발, ‘(가칭)정보수업 개선 지원단’을 통한 문제해결형(프로젝트형) 수업 등 정보 수업의 우수 사례 공유·확산, 학교자율시간(초·중)에 운영할 수 있는 융합교육 프로그램 등 개발·보급 등이다. 학생과 교원의 맞춤형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과학·수학 사제동행팀’, ‘융합교육 학생 동아리’, 융합교육 전문교사 인증제 등이 운영될 전망이다. 저변 확대와 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대학·연구기관·평생교육기관 등과 연계해 ‘시민 과학 프로그램’(가족 단위 참여 가능) 운영, 교육청별 ‘디지털 문제해결센터’ 운영, ‘(가칭)학교를 위한 AI 사용 안내서(가이드)’ 개발·보급 등 방안이 추진될 예정이다. 정부는 급격한 과학기술 발달 및 환경 변화에 대비해 과학·수학·정보·융합 교육을 진흥하고, 융합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과학·수학·정보 교육 진흥법’에 따라 이번 종합계획을 마련했다. 계획 수립을 위해 올해3월부터 교사·교수·기업체 인사로 구성된 연구·자문단(총 75명)과 현장 교사로만 구성된 현장자문단(총 37명)을 운영했다. 학회, 교육청, 교사 등 각계각층의 의견도 수렴한 후 ‘과학·수학·정보 교육융합위원회’의 심의를 거쳤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과학·수학·정보·융합 교육은 더 좋은 미래를 열어가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며 “과학·수학·정보·융합 교육 종합계획을 차질 없이 추진해 학생 주도적 맞춤형 학습을 실현하고 평등한 학습 기회를 제공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국내 최대 교원단체인 한국교총의 새로운 회장단이 3년 임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선출된 강주호 회장은 역대 교총 회장 중 최연소이자 최초의 30대로 교육계의 신선한 충격을 줬다. 아마도 어려운 교육 현장과 밀접하게 소통하며, 신선한 바람을 불러오길 기대하는 교총 회원들의 열망이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현재 교육 현실은 녹록지 않다. 올해 ‘교권5법’이 시행됐지만, 교원들은 그 효과를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무분별한 민원과 과도한 행정업무로 인해 현장 교원들은 하루하루 지쳐가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인천 초등 특수교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교원 처우도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다. 각종 수당은 매년 제자리걸음이고, 민간기업과의 보수 격차도 더욱 벌어지고 있다. 실제 20~30대 교사 93%가 월급에 불만족하고 있다. 이 같은 이유로 지난해 퇴직한 10년 차 미만 초·중·고 교사가 576명이었으며, 교대 자퇴생도 500여 명에 달했다. 여기에 정부 수장의 공백으로 인해 그동안 추진됐던 각종 교육개혁 정책도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어려운 현실을 맞이한 신임 교총 회장의 어깨가 무거울 것이다. 다행히 강 회장은 당선과 동시에 현장과의 소통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더 이상 교사가 학교를 떠나지 않도록 직접 전국을 두 발로 뛰어다니며 문제 해결에 앞장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제40대 한국교총 회장단은 선거 기간 동안 현장을 위한 공약을 내세웠다. 30대 리더의 행보에 많은 관심이 쏠리는 만큼 공약 이행을 통해 더 이상 학교를 떠나는 교사가 없는 교육 환경을 완성하길바란다.
2024년이 저물어간다. 대통령 탄핵정국 속에 올해 교육계를 돌아보면 역시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교육계 안팎으로 논란된 굵직한 사안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교실 내 몰래 녹음 아동학대 증거 인정 파기 대법원판결, 유명 웹툰 작가의 몰래 녹음으로 특수교사 유죄판결, 교권5법 본격 시행과 실효성 논란, 학교폭력조사관제 시행, 서이초 교사 순직 인정 및 서울 영양교사, 인천 특수교사 사망 사건, 제22대 총선, 학생인권보장특별법안 발의 논란, 강원 현장체험학습 중 학생 사망사건 관련 인솔 교사 업무상과실치사 소송건, 늘봄정책, 유보통합과 인공지능 디지털교과서(AIDT) 관련 논란, 교원평가 폐지 및 개편 방안 발표, 학부모들이 아파트 통학버스 교내 진입 거절 교장 고소 사건, 딥페이크 범죄 심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서울·부산교육감 당선 무효형 등이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사안은 너무나 많다. 좋은 일도 있었지만, 눈물과 한숨 짓게 한 일이 더 많았다. 묵은 한 해를 보내며 희망찬 새해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무엇보다 나라의 안정과 발전을 기원한다. 둘째, 교육 가족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바란다. 셋째, 교권과 학생 인권이 조화를 이루는 행복한 배움터가 되길 소망한다. 특히 체험 학습 활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안전사고가 오롯이 모두 교사의 민·형사상 책임이 부과되지 않도록 개정 학교안전법이 잘 안착해야 한다. 넷째, 정책의 수립과 추진에 있어 현장 적합을 우선 살피는 등 속도 조절과 방향성을 가져주길 바란다. 끝으로 국난 극복의 중심에 늘 교육자가 있었다는 점을 새겨야 한다. 새해도 정국의 회오리가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육자가 꿋꿋이 학교를 지키고 교육을 이어나가 나라를 지킬 것임을 믿는다.
학생과 학부모는 담임 선생님이 누가 될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새 학년을 맞이한다. 전년도 학생에게 정보를 얻기도 하고, 학부모 사이의 소문으로 가늠하기도 한다. 젊은 선생님을 원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노련한 교사를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 단순한 선호나 취향을 넘어서 학생들에게 정말 꼭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교사는 어떤 특성을 갖고 있어야 할까. 학생 중심 수업 고민 계속해야 먼저 학생 중심 접근을 기준으로 볼 때 자신의 전공에만 국한돼선 안 된다. 학생을 교육한다는 건, 교사가 배우고 싶고 가르치고 싶은 것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학생 수요를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의 장점과 재능을 살려 그에 적합한 교육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 가지 전문분야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중심 교육을 펼칠 수 있도록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실력을 쌓아야 한다. 둘째, 수업의 유기적이고 유연한 흐름을 지향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엔 잘 조직된 수업 계획을 바탕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만약 수업 중 돌발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원래의 수업 목적이 흔들리지 않았다. 학생이 수업 내용에 불안을 느끼거나 거부감을 느끼면 그 학생의 문제행동을 교정하는데 집중하거나 덮어두고 지나갔다. 하지만 돌발적인 상황에 대처하며 그러한 상황까지 수업의 한 장면으로 끌어들여 창의적인 수업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람직한 모습이다. 계획된 수업을 수정해서라도 한 명의 학생도 포기하지 않고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수업을 이끌어야 한다. 셋째, 수업 내용의 즐거움과 역동성을 추구해야 한다. 학생이 즐거움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학습 주제를 찾아 다양한 자료와 수업 방식으로 역동적인 수업을 지향해야 한다. 일회적이고 교사 지시적인 수업이 아니라 학생 의견을 적극 반영하면 학생이 몰입할 수 있는 수업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넷째, 학생과의 친밀한 관계 유지다. 무엇보다 자유롭고 수평적인 분위기 속에서 교사와 학생과의 친밀감 형성을 중시해야 한다. 교사와 학생은 명령과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때론 엄마 같고 때론 친구 같은 편안하고 믿을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 학생과의 관계에서 무엇보다 솔직하고 진솔한 관계를 중시하며, 학생들의 피드백에도 열린 자세로 응해야 한다. 자기 계발 교육 접목도 중요해 다섯째, 끊임없는 자기 계발이 필요하다. 늘 배우는 자세로 새로운 문물에 개방적이며, 새로운 교육법, 교수 학습 매체, 문화예술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탐구하는 자세로 배우며 학생 교육에 적용해야 한다. 교육에 미래가 없다고 아우성이지만, 알파 세대에 걸맞은 새로운 교육을 실천하면 이러한 위기 또한 극복하리라 본다. 구태의연한 교육이 아닌, 새 시대를 주도하는 교육을 실천해 학생과 학부모, 교사가 모두 만족하는 희망찬 미래를 만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