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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옥잠화 향기에 취하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에서 임명희는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연은 아니다. 식민지 조선의 신여성인 임명희는 주연들을 연결해주는 조연급이다. 예를 들어 결혼 직전 이상현에게 사랑을 고백하거나, 서희를 찾아가 이상현과 기화(봉순이) 사이에서 태어난 딸 양현에 대한 양육권을 달라고 하다가 거절당하는 역할 등이다. 그런데도 작가가 편애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좋게 묘사하는 인물 중 하나다. 소설에서 서희, 유인실과 함께 작가가 빼어난 미인으로 묘사한 여성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역관이어서 신분은 중인 출신이었지만, 임명희는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똑똑한 여성이었다. 혼기에 이르렀을 때 임명희는 청혼 아닌 청혼을 하면서 이상현을 떠보지만, 마음이 없음을 알고 친일파 집안의 장남 조용하와 결혼한다. 일본으로부터 작위와 은사금까지 받은 집안이었다. 원래 조용하의 동생 조찬하가 임명희를 마음에 두었는데 형 조용하가 이를 알고 선수를 친 것이었다. 하지만 조용하는 임명희와 결혼하고도 성악가와 바람을 피운다. 그러면서 임명희와 동생 찬하의 관계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임명희를 모욕하고 학대한다. 견디다 못한 명희는 이혼을 선언하고 남해안 통영에 내려가 지낸다. 그리고 암에 걸린 조용하가 자살한 후,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아 서울에서 유치원을 경영하며 지낸다.

 

이 정도 역할인데도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 임명희에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음을 여러 대목에서 드러낸다. 막판에 임명희가 지리산 조직에 거금 5,000원을 희사하는 것도 작가의 임명희에 대한 애정을 반영한 것 아닌가 싶다. 임명희를 옥잠화에 비유하는 대목도 작가의 호감을 반영한 것 같다. 해당 대목은 명희가 서울에 올라와 모란 유치원을 운영할 때 나온다. 일본 유학 선배 강선혜가 찾아와서 오십을 앞둔 두 중년 여인이 수다를 떨고 있는데, 집 뒤뜰에 옥잠화가 피어 있었다.

 

맛나게 점심을 먹은 강선혜는 식상하다고 하며 치마끈을 풀고 누울 자리를 찾는다. 명희는 옥색 누비 베갯잇의 베개를 벽장에서 꺼내주었다. …(중략)…

“조선 옷에 양말이 될 말이냐? 기본은 지켜야지. 한데 이게 무슨 냄새지? 아까부터 나는데.”

“냄새라니요?”

“향수는 아닌 것 같고.”

“아아, 옥잠화예요.”

“옥잠화라니.”

“뒤뜰에 피었어요. 지금이 한창이라 향기가 짙어요.”

“어디.”

강선혜는 일어나서 뒤뜰 쪽으로 다가가 내다본다. 하얀 옥잠화가 꽃대를 따라 맺어가며 시작 부분에서는 활짝 꽃이 피어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꽤 여러 포기 옥잠화는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순백이라는 말은 아마도 옥잠화를 두고 표현했을 거야. 저런 흰빛은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눈도 저 빛은 아니야. 어떤 꽃도 저 같은 흰빛으론 피지 않아. 백합 따위는 옥잠화에 비하면 지저분하지.”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에 취한 듯, 선혜는 침이 마르게 옥잠화를 찬송하다가 풀어진 치마끈을 여미고 다리를 쭉 뻗는다.

“옛날의 임명희가 저 옥잠화 같았지.”

 

이처럼 작가는 임명희에 옥잠화 같은 ‘순백’의 이미지와 좋은 향기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임명희를 통해 식민지 시대 ‘여성의 삶’을 엿볼 수 있지만, 재력가 집안 여성이라는 점에서 제한적이다. 그런데도 편애에 가깝게 임명희에 대해 애정을 숨기지 않는 것은 어떤 의도에서였을까.

 

작가가 임명희에게 꽃 이미지를 부여한 것은 옥잠화만이 아니다. 임명희가 산장에서 남편 조용하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당했을 때도 방 창문 너머로 목련이 보이고, 나중에 명희가 자살을 기도했다가 살아났을 때는 매화가 등장하고 있다. 옥잠화·목련·매화 모두 작가가 명희에게 어떤 고결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주려고 선택한 것들인 것 같다.

 

순백의 꽃을 피우는 꽃, 옥잠화

옥잠화는 여름에 공원이나 화단에서 비비추와 비슷한데 순백의 꽃을 피우는 꽃이다. 소설 <토지>에 나오듯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흰빛이다. 중국이 원산지인 화단 꽃으로, 옥잠화라는 이름은 길게 나온 꽃 모양이 옥비녀 같다고 붙인 것이다.

 

옥잠화는 꽃이 해가 지는 오후에 피었다가 아침에 오므라드는 야행성 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보는 것은 시든 모습일 수밖에 없다. 어쩌다 밤에 옥잠화꽃을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싱그러운 모습으로 꽃 핀 것을 볼 수 있다. 옥잠화는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밤에 피는 꽃답게 향기도 매우 좋다.

 

 

옥잠화와 비슷하게 생긴 꽃으로 비비추가 있다. 공원이나 화단에 작은 나팔처럼 생긴 연보라색 꽃송이가 꽃대에 줄줄이 핀 꽃이 비비추다. 꽃줄기를 따라 옆을 향해 피는 것이 비비추의 특징이다. 비비추는 원래 산이나 강가에서 자라는 식물이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화단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으니 원예종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야생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비비추라는 이름은 봄에 새로 난 잎이 ‘비비’ 꼬여 있는 취 종류라는 뜻에서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비비취’에서 비비추로 바뀐 것 같다는 것이다. 비비추와 옥잠화는 잎 모양으로도 구분할 수 있는데, 비비추 잎은 길고 뾰족한 편이고 옥잠화 잎은 둥근 편이다. 잎 색깔도 옥잠화는 연두색이고 비비추는 진한 녹색인 점도 다르다.

 

비비추·옥잠화를 포함한 비비추 집안 속명이 ‘호스타(Hosta)’다. 그래서 개량한 비비추 종류를 뭉뚱그려 그냥 호스타라고 부르기도 한다. 호스타 식물은 원래 한국·중국·일본에만 분포하는 동아시아 특산식물이다. 그런데 미국과 유럽 등 서양에서 비비추속 식물의 판매가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선호도가 높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3,200여 종의 다양한 원예품종을 개발해 가꾸고 있을 것이다.

 

비비추 종류 중에서 꽃들이 꽃줄기 끝에 모여 달리는 것이 있는데, 이건 일월비비추다. 높은 산의 습한 곳에서 볼 수 있다. 잎이 넓은 달걀모양이고, 가장자리는 물결치는 모양이며, 잎자루 밑부분에 자주색 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꽃이 나선형으로 피는 비비추 종류도 있다. 원래 흑산도에서 자라는 꽃이라 이름이 흑산도비비추다. 잎은 두껍고 반들거리는 것이 특징이다.

 

광릉 국립수목원에 가면 비비추 전문 전시원이 따로 있다. 다양한 비비추 종류와 품종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국립수목원에 가면 한번 들러서 다양한 비비추 종류들을 보며, 박경리가 사랑한 인물 임명희를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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