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아이가 전도한 황규성은 요즘 아이답지 않게 말수가 적고, 남자아이답지 않게 조용조용했다. 외모 또한 껑충 큰 키에 하얀 살이 얇게 붙어서 어쩐지 우수에 찬 아이로 보였다. 길게 물으면 짧게 대답하고, 활짝 웃으며 물으면 짧은 미소가 잠깐 얼굴에 스칠 뿐이었다. 하도 답답하여 얼굴 표정과 손짓 발짓을 크게 하고 다소 야단스럽게 무얼 물으면 그저 고개를 까딱일 뿐, 한창 개구쟁이로 뛰어놀 어린이답지 않게 감정 표현이 너무도 절제되어 있었다. ‘필시 원인이 있으렷다.’ 신년 첫 주일 예배가 끝난 뒤 김태평 선생은 아이들을 보내면서 규성이에게 뒷정리를 시켜 교회에 잠깐 남도록 하였다. 김 선생은 규성이를 눈이 푸짐히 쌓인 교회 뒤뜰로 데리고 갔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올라앉은 눈이 칼바람에 날려 예서제서 하얀 낙엽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김 선생은 뜰에 앉아서 눈 위로 솟아있는 가늘게 바짝 마른 잡초의 끝머리를 잡아 하나둘씩 뽑았다. “규성이 아빠 연세는 어떻게 되시지?” “마흔 여덟이세요.” “사람의 겨울은 머리카락에서부터 온다지? 그러시면 흰 머리카락도 슬슬 나타나고 있겠네?” “조금요.” “네가 뽑아드리니?” 규성이는 고개만 까딱했다. “뽑는 사람은 신바람
덕담(德談)의 계절이 되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사람들은 덕담을 나눈다. 올 한 해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덕담’에 담아서 서로 전하기 때문이다. 원래 덕담은 설날 세배 풍속으로, 세배 자리에서 어른이 아랫사람에게 새해의 기원(祈願)으로 주시던 좋은 말씀을 일컫는다. 그러고 보면 세뱃돈이라는 것도 세배 덕담이 변해서 그리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선의(善意)의 기원이 담긴 말들을 그냥 ‘덕담’의 범주에 넣는다. 심지어는 ‘악담(惡談)’의 반대 개념 정도로도 쓰이는 말이 되기도 했다. 얼핏 들으면 악담인데 듣고 보면 덕담의 효과를 내는 말 중에 “그 놈, 제 애비보다 낫다”라는 것이 있다. 겉으로 들으면 ‘나 못 났다’는 지적인데, 돌려서 생각하면 ‘내 자식 잘 났다’는 칭찬으로 들리기 때문이란다. 부모 된 자의 자식 사랑 본능을 잘 반영하는 경우라 하겠다. 또 어떤 사람은 덕담 내용이 확고히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덕담의 시제를 미래형으로 하지 않고 과거형으로 말하기도 한다. “너 공부 열심히 했으니 네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라고 말하는 방식이 바로 그렇다. 말하는 이의 확신감이 느껴져 좋고, 상대로 하여금 ‘나를 이렇게
2008년의 새 아침은 어김없이 희망에 찬 꿈을 잉태하고 밝아왔다. 세상이 어지럽고 시끄러워도 자연은 자신이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으며, 시간은 엄숙하게 자신의 본분을 다하면서 지나간다. 시간의 흐름과 자연은 하루도 쉬지 않고 자신의 본분을 다하면서 늘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다. 겨울을 지나 봄이 오고 또 그 봄날은 가지만 봄날이 다시 올 것이라는 희망의 끈이 있기에 힘들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다시 매진할 수 있는 것이다. 새해에는 한국교육에도 부푼 꿈과 희망으로 가득하기를 기대해보면서 평소 생각하는 한국교육에 대한 작은 소망을 몇 가지로 정리해본다. 첫째, 새해에는 ‘머리’보다 ‘손’을 쓰는 교육에 중점을 두었으면 한다. 물론 머리를 안 쓰고 손만 쓰기는 불가능하다. 체험적 깨달음보다 논리적 이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역기능에 주목하기 위해서 ‘머리’보다 ‘손’을 강조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논리와 사상이라고 할지라도 실천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관념의 파편으로 머무를 수 있다. 손발이 움직이고 가슴으로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머리로 정리되는 지식이야말로 그 지식을 창조한 개인은 물론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