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육에 관한 일이라면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없다. 주위 사람들 혹은 언론보도 등으로부터 얻은 간접경험을 추가하여 모두가 자칭 교육전문가로 군림한다. 제반 교육문제에 대해서 서슴없이 칼을 들이대고 자신들의 상식과 잣대로 교육을 비판하고 평가를 내린다. 깊이 연구하고 생각해본 적도 없으면서 교육이 무너진다는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당면한 문제들을 스스로가 세운 기준에 의거해서 예리하게 분석하고 명쾌하게 판단하며 때로는 그럴듯한 처방까지도 내려준다. 사회 어느 분야보다도 교육은 그 특성상 성과나 실적을 가늠하기 어렵다. 교육의 궁극적 결과물은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전체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각종 교육기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은 최종 산출물이 될 수 없다. 사회 각 분야로 흩어져 학창시절에 배우고 익힌 실력을 바탕으로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국민 모두가 교육의 결과이다. 학교 시설물이나 그 속에 있는 교사, 학생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핵심과 본질은 놔둔 채 건물을 얼마나 짓고 기자재를 어떻게 개선하고 어떠한 행사를 몇 번 실시했다는 등의 가시적·외형적·단편적 실적이 점수화, 계량화되어
강화산성 안파루(남문). 강화동종. 강화역사관에 있으며 강화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안내해주었다.서울을 지키는 천연 요새 섬을 찾아가는 여정은 이제 강화도로 향합니다.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 큰 섬으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모두 축소되어 있다고 할 만큼 유적지가 많은 곳입니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참성단을 비롯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군도 있고 팔만대장경판도 여기서 만들어졌습니다.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다른 어느 곳보다 외침을 많이 받았으며 특히, 외세의 개방 압력에 제일 먼저 노출된 곳이었습니다. 유사시에는 도읍지인 개성과 한양을 대신하는 피난처로 활용되었고요. 서울을 지키기 위한 천연 요새였던 이곳에는 섬 구석구석 군사시설로 꽉 차 있었습니다. 강화도로 떠나는 여행은 이렇게 강화도에 있는 관방시설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외규장각, 되찾아야 할 기록 고려 고종 때입니다. 몽골의 침입에 맞서 항쟁하던 고려는 드디어 개성을 떠나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합니다. 서기 1232년의 일입니다. 도읍을 옮겼으니 성을 쌓고 궁궐을 지어야 하겠죠? 그 흔적이 강화산성과 고려궁터에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강화도는 39년간 항몽의 근
“히틀러는 독일군의 진격을 재촉했고 영국군과 프랑스군 34만여 명은 덩케르크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달랐다. 히틀러는 1940년 5월 24일 돌연 독일군의 파죽지세 진격을 중지시켰고 그로 인해 시간을 번 영·불군은 아슬아슬하게 덩케르크에서 철수할 수 있었다. 히틀러가 진격을 중지시키지 않았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전황은 어떻게 달랐을까? 제2차 세계대전 초반전은 ‘당나귀전쟁’이라 비판받지만 영국과 프랑스도 개전 초에 독일군의 북유럽으로의 진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등 실책을 범했다. 독일은 폴란드를 전격적으로 점령한 데 이어 덴마크 전역과 노르웨이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했다(1940. 4~6). 영국과 프랑스는 군대를 투입해 노르웨이를 지원했으나 독일 공군에 압도당해 철수했다. 독일은 1940년 5월에 네덜란드를 5일 만에, 벨기에를 2주 만에 장악했다. 그리고 난공불락의 마지노선을 뚫은 후 파리를 장악한(6월 15일) 독일은 6월 22일에 프랑스의 3/5를 장악했다. 소련 또한 라트비아 3국에 이어 핀란드를 침공하는 등 이른바 ‘대조국전쟁’에 나섰다. 최고의 전략가임을 자랑한 히틀러는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