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좌우하는 이야기 본능 인간에게는 식욕, 성욕, 수면욕 같은 기본적인 욕구뿐 아니라 온갖 대상에 대한 욕망이 있을 터인데, 그 중에는 이야기를 향한 본능도 있다. 이야기는 우리 삶 도처에 스며 있으니, 이를테면 이야기와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스포츠 경기에서도 사람들은 ‘한 편의 드라마’를 기대한다. 사람들은 경기를 관람하면서도 이야기 본능을 충족할 수 있을 때 더욱 만족을 느낀다. 우리는 마치 기승전결을 갖춘 완결된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게임을 지켜보면서, 경기의 흐름이 반전과 역전으로 긴장감 넘치는 전개를 보여줄 때 더욱 열광한다. 또한 스포츠 경기와 관련한 인물과 사건 등 끊임없이 주변 이야기와 뒷이야기를 즐긴다. 우리 속에 내재한 이야기 본능이 비단 즐거움 때문이라고만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이야기를 추구하는 열망은 상처 받은 마음의 치유에 관여하기도 하고 삶과 죽음을 좌우하기도 한다. 고아나 입양아처럼 부모가 누구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등등 자신의 서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정체성 혼란 때문에 고통을 받으며, 개중에는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괴로움은 삶의 첫 단추인 자신의 출생담을 제대로 구성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자
망명 • 이민자녀, 학교 입학한 후 영어 접해 망명자들의 자녀들은 물론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상당수의 이민자 자녀의 경우에도 공교육기관에 입학한 후에야 본격적으로 영어를 습득하기 시작한다. 가 인용한 미국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5세 이상 미국 국민 중 거의 20%가 영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1990년 인구조사 당시는 13.8%에 불과하던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 제2외국어로서의 영어)학습인구의 급격한 증가는 라틴계 이민자 인구 급증과 관련이 크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 내 5세 이상자 중 약 3500만 명이 집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800만 명이 이상이 중국어 또는 기타 아시아 언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일례로, 캘리포니아 주(州)의 경우, 영어학습인구가 42.6%에 달한다. 이런 상황 때문에 미국 교육계에서는 ESL 학습자들의 학습권 및 언어권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공립학교에서 ESL 특별반을 운영하는 것 외에도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뿐 아니라 모국어로도 수업을 제공해 ESL 학습자들의 학습권 및 언어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지나치게 개별
인기회복의 비결은 무엇보다 학력향상 유봉여중의 인기회복 비결은 무엇보다 학력향상에 있다. 영어 • 수학과목 수준별 이동수업, 다양한 특기 • 적성 방과후 학교 그리고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반딧불이 학교까지 유봉여중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유봉여중은 춘천에서 최상위권의 성적을 올리고 있다. 수준별 이동수업이나 방과후 학교 등은 이미 다른 학교에서도 널리 실시하고 있는 프로그램이지만 유봉여중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학교보다 한발 앞서 이러한 제도를 도입해 노하우를 쌓고 계속 새로운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8월부터는 학원식 단과반도 시범운영하고 있다. 하위권학생을 배려한 수준별 이동수업 한 학년당 6학급인 유봉여중은 영어 • 수학과목을 4개의 수준, 8개 학급으로 편성해 수준별 이동수업을 하고 있다. 수준별 수업을 떠올리면 최상위 성적자 중심의 수업을 연상하기 쉽지만 유봉여중에서는 하위 성적자의 학력 향상을 위해 많은 배려를 하고 있다. 15~17명으로 다른 반보다 인원을 적게 배치하고 수업도 가장 베테랑 교사가 맡는다. 노련한 강사가 더 적은 인원을 대상으로 수업하다보니 집중도도 높아지고 자연스럽게 학력이 향상되는
일반 회사에서는 생경(生硬)한 학교 풍속도 영원한 손님 집단 45만 교육자 중에서 나를 포함해 교장, 교감, 교사, 행정실장 등 모든 학교 관계자들의 상당수가 몸담고 있는 직장을 진정한 ‘자기 학교’로 여기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잠시 와서 머물다가 가는 곳일 뿐이다. 길면 4년, 1년이 지나면 3년 남았다 여기고 3년이 되면 마음조차 이미 떠나버린다. 손님으로 왔으니까 아이들과의 만남도 고작 1년 동거(同居)일 뿐 교실도 앉은 자리도 1년용으로 치부하게 마련이다,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내 것이 아니니까 소중할 리 없다. 곳곳에 정 • 부 책임자의 이름은 써 붙였지만 소유권을 가진 건 하나도 없다. 굳이 주객(主客)을 따진다면 6년을 공부하게 되는 학생들이 주인이고, 교사는 손님이 아닐까 싶다. 소년시절의 꿈과 추억이 어린 배움의 요람이라 해 저들은 모교(母校)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은 학교 수도꼭지에서 줄줄 물이 흘러내려도 그것을 잠그는 사람이 없고 벌건 대낮에도 불이 켜져 있는 화장실의 스위치에 손 한 번 대는 사람도 없으며 운동장에 휴지가 떨어져 있어도 스스로 줍는 어린이를 찾아보기가 어렵다면 학교야말로 주인이 없는
책의 아우라 작가가 혹은 시인이 되려면 자기 이름이 달린 책이 있어야 한다. 책을 내는 일은 등단 못지않게 마음 설레는 일이다. 그런데 이제 등단을 했거나 아직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경우는 언제 책을 낼 수 있을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그렇게 아득하기만 하지 않다는 점을 미리 알면 여러분이 글을 쓰는 데에 추진력이 붙을 것이다. 쓴 작품을 모은 것이 책이라는 정도로 마음 편하게 눌러 두고, 책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어떤 책이든지 그 책 나름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들으면, 어디서 저런 걸 다 알았을까 의문을 가지고, 그 출처를 묻게 된다. 그럴 때 책에 나오는 이야기란 대답을 들으면 반론을 제기하기 어렵다. 책, 교과서, 경전을 포함하는 고전, 그런 책들은 일단 내용을 믿고 들어간다. 이는 책을 쓴 사람에 대한 믿음과 상통한다. 이는 독자들의 신뢰가 쌓인 결과이기도 하다. 책을 쓴 사람을 저자라고 한다. 저자(著者)의 著는 ‘기록하다’, ‘쓰다’ 라는 기본 뜻 외에 ‘두드러지다’, ‘나타내다’ 등의 부가적 의미가 있다. 글을 쓴 사람이 곧 두드러진 사람이라는 존경의 염이 담겨 있다. 서양의 경우도 이와 흡사
우리가 잘 아는 우화 중에 ‘토끼와 거북이’가 있다. 말 그대로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경주를 벌였는데 발 빠른 토끼가 한참을 앞서 나가다가 거북이의 그림자도 안 보일 정도로 앞지르게 되자 한 숨 쉬어가려고 낮잠을 잔다. 느린 거북이는 죽을힘을 다해 기어가도 토끼를 쫓아갈 수 없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경주에 임한다. 그래서 그 결과는? 토끼는 꾀를 부리는 나태함으로 자기 발등을 스스로 찍게 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성실한 거북이에게 지고 만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우화이고 동화이다. 현실에서는 느리고 둔한 거북이가 영리하고 부지런한 토끼를 이기는 경우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드물다고 해서 그런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각박한 현실 세계에서도 아주 가끔씩 눈물겨운 인간 승리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그런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위로를 받으며 희미한 가능성과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주어진 삶을 열심히 꾸려가려고 노력하게 된다.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도 마찬가지다. 냉정하고 회의적인 시각으로 비정한 경쟁 사회를 그려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용기와 진심이 승리한다는 훈훈한 이야기를 통해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삶에 지친 관객들에게 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