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에서 전 세계가 공감한 ‘해고’ 사태
9월 24일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영화 <어쩔수가없다>는 국내 개봉 이전부터 전 세계 영화제의 러브콜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먼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이자 칸국제영화제·베를린국제영화제와 함께 3대 영화제로 꼽히는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8.27~9.6)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돼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됐다. 박찬욱 감독이 20년 전 원작소설(<액스>,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 저)을 읽고 영화로 만들 기획을 했다. 이번에 완성한 <어쩔수가없다>가 아쉽게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2005년 <친절한 금자씨> 이후 베니스를 꼭 20년 만에 다시 찾은 박찬욱 감독은 “내가 만든 어떤 영화보다 관객 반응이 좋아서 이미 큰 상을 받은 기분”이라고 담담한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9월 4일부터 14일까지 열린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는 주목할 만한 화제작을 소개하는 부문인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에 초청됐고, 9월 26일부터 10월 13일까지 열리는 제63회 뉴욕영화제의 메인 슬레이트(Main Slate)에 초청됐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이 초청됐던 가장 주요한 부문이다. 9월 17일부터 26일까지 개최된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개막작으로 선정돼 올해로 서른 돌을 맞은 부산국제영화제의 시작을 알렸다.
도대체 어떤 영화였길래 전 세계 영화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걸까? 외신의 평에서 공감대를 확인해 보자. BBC는 ‘황홀하게 재미있는 한국의 걸작은 올해의 ‘기생충’’이라는 제목의 리뷰에서 “경제적 불안을 다룬 ‘암울하면서도 웃긴’ 이 코미디 영화는 세계적으로 큰 히트작이 될 수 있다”라고 전망했다. 영화 전문 매체 <스크린데일리>는 “이 영화는 극도로 재미있지만, 동시에 장기 실업자들의 절망과 기업 세계의 불필요한 잔혹성에 대한 가슴 아픈 탐구이기도 하다. 인공지능(AI)이 점점 더 노동시장의 큰 부분을 잠식해 감에 따라 우리 모두가 ‘만수’(주인공, 이병헌)가 될 수 있다”라고 평했다.
그렇다. 외신은 <어쩔수가없다>에서 만수가 갑자기 처한 상황으로부터 세계 각국의 다양한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하고 불편하며 불안한 ‘해고’ 사태라는 접점에 깊은 공감을 드러낸 것이다. <어쩔수가없다>는 ‘다 이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삶에 만족하던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 만수가 회사로부터 돌연 해고 통보를 받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회사도 입장은 있다. “미안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온실 속 화초 같은 삶을 살아온 아름다운 아내 ‘미리’(손예진)와 두 아이, 반려견을 위해 만수는 3개월 안에 재취업하겠다고 다짐하지만, 1년 넘게 마트에서 일하며 면접장을 전전하고, 급기야 어렵게 장만한 집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무작정 제지 회사 ‘문제지’를 찾아가 필사적으로 이력서를 내밀지만, 반장 ‘선출’(박희순) 앞에서 굴욕만 당한다. 이 자리는 누구도 아닌 자신의 자리라고 확신한 만수는 면접자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재취업에 성공하겠다는 무서운 계획을 세우게 되고 결국 실행에 옮긴다. 나지막이 “어쩔 수가 없다”라는 말을 내뱉으며.
박찬욱 감독은 베니스영화제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영화감독도 영화 한 편의 작업이 끝나면 잠재적 실직 상태에 들어가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런 경험을 했던 사람이다. 내가 20년 동안 이 영화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스토리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면 어느 시기에, 어떤 나라 사람에게 이야기했던 시의적절한 이야기라는 공통된 반응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라고 설명해 전 세계적인 해고 사태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데뷔작·후속작 실패 딛고 ‘칸느박’이 되기까지…
지금처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박찬욱 감독의 시작은 여느 감독과 다르지 않았다. 1963년생인 박 감독은 서강대 철학과 졸업 후 1988년 <깜동>(감독 유영식)의 연출부 막내로 충무로에 발을 들였다. 곽재용 감독의 <비 오는 날의 수채화>(1989) 각본을 공동 집필하며 작가로서의 면모도 선보였다. 직접 시나리오를 쓴 첫 영화 <달은 해가 꾸는 꿈>(1992)은 인기 가수 이승철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해 감독으로 데뷔했지만, 흥행은 실패했다. 이후 각종 신문·방송 등에서 영화 정보를 전하고 영화평을 쓰면서 생계를 유지하며 두 번째 영화 <삼인조>(1997)를 찍었지만, 역시나 흥행에 실패했다. 김민종·이경영·정선경 등 당시 톱스타급 배우를 내세웠지만, 평론계의 반응마저 싸늘했다.
절치부심의 시간을 3년 더 보내고 나서 찍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가 관객 583만 명이라는 기록을 달성하고,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 부분에까지 초청받으며 대중성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드디어 성공했다. 박찬욱 감독은 최근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영화를 만들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것인가’가 기준이다. 당대 흥행이나 좋은 평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의 목표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이 찾아보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이미 25년간 사랑받았으니 단기 목표는 달성된 것 같아 흐뭇하다”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이후 이른바 ‘복수 3부작’의 첫 작품으로 각인된 하드보일드 영화 <복수는 나의 것>(2002)으로 박찬욱 감독 특유의 색채를 선보였다는 평을 받은 그는, <올드보이>(2003)로 제57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한국 감독 최초로 심사위원 대상을 받으며 국제적인 명성까지 거머쥐었다. <올드보이>는 대종상 같은 국내 영화상과 시체스영화제 등의 해외 영화제를 휩쓸었다. 복수 3부작의 마지막 영화이며 “너나 잘하세요”라는 명대사를 남긴 <친절한 금자씨>(2005)로는 제62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젊은사자상’과 ‘베스트 이노베이티드상’을 받았다.
가히 박찬욱 감독 전성시대라 부를만했다. 이후 박찬욱 감독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뱀파이어물로 각색한 영화 <박쥐>로 2009년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올드보이> 이후 불과 6년 만에 칸을 찾은 그에게 ‘칸느박’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이유다. 별명이 허명이 아님을 입증하듯 <헤어질 결심>(2022)으로 박 감독은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감독으로서는 점점 더 작가주의 색채를 드러낸 박 감독은 본업인 연출 외에 제작에도 힘을 쏟았는데,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2013), 오승욱 감독의 <무뢰한>(2015) 등의 제작에 참여했다. 신인 배우 김태리를 과감히 기용해 제69회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영화 <아가씨>(2016)는 연출을 하며 동시에 제작에도 참여했다.
박찬욱 감독이 말하는 좋은 영화란?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20년이 지나고 봐도 촌스럽지 않다. 미장센에 공을 들이는 건 익히 알려졌다. <아가씨>를 찍을 때는 한국 배우들의 일본어 연기를 위해 현장에 5명의 일본인을 성별과 세대를 구분해 참석하게 했다는 일화는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박찬욱 감독의 집요함을 증명한다. 세월이 흘러도 그의 영화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영화 미학은 무엇일까? 베니스영화제 기자회견에서 박찬욱 감독이 한 말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에서 제가 추구하는 건 아름다움이 아니라 정확성입니다. 스토리와 캐릭터들의 감정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늘 고민하죠. 중요한 건 정확성과 철저함인데요. 어떤 것이든 정확하기 위해 철저히 노력하는 데 성공하면 결과적으로 아름다워지고 우아해진다고 믿어요. 설사 추하고 더럽고 역겨운 피사체라고 하더라도 이런 노력이 더해지면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이미지가 얻어집니다.”
누구에게나 인생 영화가 한 편쯤 있다. 오랫동안 기억되는 영화에는 뭔가 공통점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많은 사람의 감정을 건드린다는 점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이런 지점에서 전 세계인에게 소구하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 그리고 한국을 넘어 아시아·북남미·유럽이라는 각각 문화권의 특별하고 구체적인 삶의 형태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이해되고, 나아가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전 지구인이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공감할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사진 제공=CJ E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