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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매월 1일 조회시간에 아이들에게 꼭 해주는 전달사항이 있다. 그건 바로 월중행사이다. 그 달에 있는 행사를 아이들에게 미리 알려줌으로써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를 심어주자는 의도에서이다. 일년 12개월 중요하지 않는 달은 하나도 없다. 무엇보다 3학년 담임에게 있어 7월은 어느 달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기말고사 채점 및 성적처리, 방학준비, 수시원서작성 등의 해야 할 많은 업무들이 산재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7월 중순부터 시작되는 수시 모집에 따른 아이들과의 진학상담이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진학자료집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인터넷 입시 사이트를 탐색하지만 막연하기만 하다. 현재 나와 있는 1, 2학년 성적을 토대로 하여 대학과 학과를 선정해야 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내신성적, 논술, 심층면접 및 구술 이 모두를 충족시켜주는 학생은 거의 없다. 그래서 맞춤식 상담을 할 수밖에 없다. 수시 모집 2차에 비해 선발인원이 적은 수시 1차에 합격하기란 여간 힘들지가 않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수시 모집 1차에 큰 기대를 거는 이유가 있다. 우선 수시 1차는 고등학교 1, 2학년 학생부 성적이 중요한 반면 수시 2차는 3학년 성적과 최저학력기준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7월 초(7. 5~7. 9)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쉴 틈도 없이 수시 원서(7월 13일부터)를 작성해야 한다. 요즘 고 3은 기말고사와 수시 모집 전형을 준비하기 위해 이중고를 겪고 있으며 게다가 밤늦게까지 하는 자율학습으로 지쳐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그런지 수업 시간에 조는 아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그런 아이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러보고 싶지만 왠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건 아이들에게 대한 나의 무관심이 아니라 배려로 해석하고 싶다.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얼까? 잠깐의 휴식이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도 않고 오직 대학 입시에만 매달리면 아이들의 건강은 어떠하겠는가? 망중한(忙中閑)의 마음으로 현명하게 자신을 대처해 갈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할 때이다. 자신의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대학에 들어간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고 3병이 온 걸까? 그 안타까움에 부모님들이 위로를 해보지만 오히려 짜증을 낸다. 고 3수험생들이여! ‘바쁠수록 돌아가라’라는 말이 있듯 가끔은 하늘 한 번 쳐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 보라. 그리고 최고보다 최선을 다하는 마음 자세를 갖기를 바란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충북에서 교육전문직 진출 여성 교사들의 비율이 해마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일 도교육청에 따르면 올해 공개 전형 시험을 통해 선발한 유치원과 초.중등 교육 전문직 24명 가운데 12명이 여성 교사로 비율이 41%에 이르렀다. 유아교육은 2명 모두 여성으로 선발됐으며 초등도 선발 인원 10명 가운데 절반인 5명이 여성이었다. 지난해도 교육 전문직 선발 인원 32명 가운데 40%인 13명을 여성 교원이 차지했다.
경기도내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생 10명중 6명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일 도(道) 교육청에 따르면 지난해 도내 실업계 고교 졸업생 3만5천642명 가운데 곧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든 졸업생은 29.1%인 1만361명에 불과한 반면 대학에 진학한 졸업생은 64.7%인 2만3천57명에 달했다. 도내 실업계 고교 졸업생들의 이같은 대학 진학률은 17.5%를 기록했던 지난 1995년이후 10년만에 47.2% 포인트 높아진 것이다. 그러나 취업률은 1995년 74.1%에서 2000년 49.4%, 지난해 29.1%로 낮아지는 등 매년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도 교육청은 실업계 고교 졸업생들의 대학 진학률이 갈수록 높아지는 것이 대학졸업자를 우대하는 사회분위기, 실업계 고교생들을 위한 대학의 특별 입학전형 확대, 실업교육에 대한 경시 풍조 등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도 교육청 관계자는 "실업계 고교 졸업생들이 대학진학만을 선호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며 "도 교육청은 앞으로 실업계 고교 졸업생의 취업률과 대학진학률이 50대 50이 될 수 있도록 실업교육 활성화 대책을 만들어 시행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 멈춰선 시계, 자그마한 강아지, 잎새를 떨구어 버린 겨울나무, 그리고 백합화 한 송이이다. 욕심을 더 부려 본다면 웃고 있는 아이들과 아끼는 시집이다. 나는 어른이면서도 다 자란 아이들(어른)에게는 관심조차 없다. 내가 어른이라는 사실도 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 집에는 세 개의 시계가 제각각 이다. 안방에 걸린 시계는 뻐꾸기시계인데 1년 가까이 잠을 자고 있지만 아무도 깨울 생각이 없다. 쫓기듯 달리는 일상을 뒤로하고 퇴근 후에 그 시계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서 여간 좋은 게 아니다. 때로는 쉬고 있는 그 녀석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일어나 달리지 않아도 되는 그 ‘자유에의 몽상’을 그 녀석을 통해서 나마 대신 누리고 싶음이리라. 거실에 걸린 시계는 5분 정도 빨리 달리는 부지런한 녀석이다. 약속 시간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남편을 참 많이도 닮았다. 그러고 보니 거실의 째각이는 우리 집에서 가장 부지런하다. 소리도 요란하고 쉴 줄도 모르는 것이 영락 남편의 부지런한 성깔과 꼭 빼 닮았다. 눈뜨는 아침부터 잠드는 늦는 시각까지 회사 일이 인생의 전부인 냥, 기뻐하고 고뇌하며 촌음을 다투는 그의 성실함과 잘 어울리는 시계이다. 연애 시절, 5분 늦게 나갔다가 가 버린 남편을 몇 시간 동안 기다리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약이 오르지만 약속 시간에 정확한 그를 탓할 생각은 없다. 거실의 째깍이는 나를 서두르게 하는 기술을 간직하고 있다. 부엌에서 보는 시계는 영광에서 근무할 때 연공 상으로 받은 것인데 우리 집에서 가장 정확한 시계이다. 남편의 출근 시간, 딸아이의 등교시간에 맞추어 식사시간을 조절하는 데 이용되므로 가장 신뢰받는 시계인 셈이다. 거실의 시계를 보면서 한 발 앞서 가는 부지런함을 일깨우고, 부엌의 정확한 시계를 통해서는 신뢰받는 인간의 면모를 생각해 본다. 안식을 누리는 안방의 시계를 바라보며 물러섬의 아름다움과 재충전으로 날아오르는 꿈을 꾸어 보기도 한다. 우리 집엔 작년 여름부터 사다 기른 퍼그 한 마리가 어느 사이에 8kg이 넘었다. 3년 동안 길렀던 ‘토실이’를 잊기 위해 1년의 기다림 끝에 사들인 애완견이다. 대인 시장에 나갔다가 발견한 퍼그 삼형제를 보고 30분 동안 만지작거리다가 안고 온 개이다. 늘어진 얼굴에 납작한 코, 매끄럽고 부드러운 예쁜 털을 가진 이티! 생김새가 하도 귀엽고 우스꽝스러워서 영화 속의 이티를 닮아 붙여 준 이름이다. 어렸을 때부터 강아지를 업고 포대기를 두른 채 소꿉놀이를 할 만큼, 나는 개를 좋아했다. 이른 시각에 일어나 집안일에 바쁘지만 이티에게 공들이는 시간도 여간 만만한 게 아니다. 욕실에 들어가 대소변을 가릴 줄 앎으로 키우는데 큰 애로는 없지만 털갈이의 뒤치다꺼리를 해 주어야 하므로 청소를 자주 해야 한다. 하루 종일 혼자서 집을 보다가 돌아오는 가족들을 반기는 이티의 사랑스러움은 피곤함을 가시게 하고도 남으니 그 녀석에게 공들이는 시간은 당연한 게 아닐까? 어쩌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을 못 이루거나 글이 풀리지 않을 때에도 이티는 좋은 친구가 되어 준다. 모두 곤한 잠에 든 시각, 말 친구가 필요할 때 이티를 깨우면 까만 눈을 굴리며 빤히 쳐다보는 그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이다. 음식 까탈을 부리지 않고 뭐든지 잘 먹어서 소탈하여 예쁘고, 장난 끼도 많고 애교도 여간 아니어서 즐겁게 하니 개를 길러 보지 않았거나, 본시부터 개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일일 것이다. 이티의 매력은 또 있다. 예뻐한다고 해서 주인을 업신여기지 않으니 아랫사람이나, 자식들이 본받을 일이요, 주어진 먹이를 한 톨도 버림이 없으니 음식 귀한 줄을 모르고 낭비하여 버리는 사람들이 생각해 볼 바이다.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는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련만 감사함을 아는 소치이리라. 또한 아무데서나 뒷일을 보지 않으니 술 한 잔 걸치고 급한 김에 아무데서나 실례를 범하는 양반들은 그 깔끔함을 배울 일이다. 거짓을 모르니 더 더욱 사랑스럽고 말이 많지 않아도 뜻이 통하니 친구 중에 최상인 것이다. 개만도 못한 인간이 되지 않으려거든 개를 구박하지는 말일이다. 나는 잎새를 다 떨구어 버린 겨울나무를 무척 좋아한다. 이른 봄에 파릇한 새 눈을 틔워 올리는 작은 생명이 대견해 보이고, 초여름의 대지를 연초록 물감으로 붓질하는 푸르른 나무들의 싱그러움도 희망이 있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늦가을에 제 할 일을 다 했다며 붉어진 얼굴로 석양에 물들어 단풍든 가을 나무도 가슴을 적시게 하는 데는 그만이다. 하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데는 빈 가지로 서 있는 겨울나무가 단연 으뜸이다. 홀로 서서 빈 하늘이 부르는 노래를 감상하며 지나온 계절을 반추하듯, 자람을 멈춘 채 내면의 자기 모습에 취해 한층 깊어진 얼굴로 세상과 화해하는 그 편안함이 부러워서이다. 봄, 여름, 가을 내내 힘들게 일해 온 뿌리를 쉬게 하고 다 자라 더 이상 보듬을 필요가 없는 이파리를 훌훌 띄워 보낸 그 여유가 부러운 것이다. 겨울나무처럼 내게 걸쳐진 옷자락을 훌훌 다 벗어버리고 홀가분하게 서서 빈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을까? 그 언제쯤……. 지난 스승의 날에 받은 선물 중에 가장 설레게 했던 것은 백합꽃 몇 송이였다. 아이들에게 선물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전달이 덜 됐는지 백합꽃이 배달되어 온 것이다. 퇴근 시간 무렵인데다가 꽂을 데조차 마땅하지 않아 집으로 가져 왔는데, 그 향기가 어찌나 좋은지 꽃만 홀로 두고 잠자는 게 미안해서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꽃향기를 맡으며 쓴 시이다. 백합꽃을 보며 네가 내게 오기 위해 나도 너처럼 그렇게 보낸 시간들이 순결한 때가 있었을까? 여섯 장 꽃잎 속에 나도 너처럼 그렇게 알알이 맺혔으니 고결한 향을 내뿜을 날이 이 밤, 자정이 넘은 시각에 내 생에 남아 있을까? 너를 홀로 세워 두지 못함이란다. 단 하루만이라도 순결한 향기를 지닐 수 있다면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단 한번만이라도 기쁨임을 노래하는 너는 고결한 숨소리를 낼 수만 있다면 아무런 말이 없이도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에 감사할 일이다. 고결하고 아름다운 것을! 서 있음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으리라. 홀로 피어서도 어느 한 순간 나도 너처럼 외롭지 아니함을. 꽃일 수만 있다면. (1998.5.15 01:50) 나는 웃고 있는 아이들의 미소를 좋아한다. 우리 반에는 해맑은 얼굴에 왜소한 몸집을 가진 남자아이가 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발달의 정도가 더디어서 공부하는 일에는 서투르지만, 마음씨가 곱고 맑아서 생수 같은 아이이다. 공부를 잘 하고 똑똑한 아이들의 꾀부림과 영특함 대신에 정직함, 순수함으로 따뜻한 웃음으로, 나를 위로해 주는 아이이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마음 상하게 하는 일은 할 줄 모르는, 백합 같은 아이라고나 할까? 인간은 본래 착하기보다는 악한 존재라는 성악설이 그 아이에게는 적용되지 않으니, 그런 아이와 날마다 만나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선생인지 모른다. 나는 칼릴 지브란의 시집을 무척 좋아한다. 스무 살 안팎에 읽었던 ‘부러진 날개’와 ‘예언자’를 만나면서부터이다. 빌려주었다가 잃어버리게 되면 가장 섭섭해지는 책이기도 하다. 그의 글 속에 들어가 앉으면 빈 하늘과 만날 수 있고 백합꽃의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도 있으며, 겨울나무처럼 홀가분해져서 수도승이 되는 것이다. 그가 속삭이는 고독함 속에는 해맑은 웃음이 햇살처럼 퍼지기도 하고 사물을 끝없이 사랑하는 고운 눈매를 지닌 동심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그가 부르는 노래 속에서 멈춰선 시계의 한가로움까지 보태어 시간 여행을 떠나 중세의 삼나무 숲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멀리 시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다시 어른이 되어 버린다. 내가 어른이라는 사실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 곁에는 어른들보다는 아이들이 더 많으니 내가 어려지는 데는 보탬이 되지 않을까? 아이들 속에서 그들처럼 살아 있음의 감동에 펄펄 뛰고 싶다. 겨울나무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멈춰 선 시계가 되는 날까지. 한 송이 백합꽃의 향기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 이티처럼 까탈 부리지 않으며 살고 싶다. 그리하여 들여다보면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시집 속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울 수 있었으면 한다. (‘98. 전남문학 가을호 수록) .
우리 교육은 국가의 독점에서 위기가 비롯됐다며 교육의 자유와 자율, 책무성을 강조하는 교육운동단체가 탄생했다. 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이하 교육연합)은 1일 오후 4시 서울 명지빌딩에서 창립식을 갖고 김정수 교사(구미여고 교사), 배호순 교수(서울여대), 조전혁 교수(인천대), 이남정 교장(인천명신여고) 등 4명을 공동대표로 선임했다. 창립 직후 열린 총회에서는 정범모 한림대 석좌교수, 김진홍 두레교회 목사,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김진성 명지대 겸임교수, 김선호 전 경희대교육대학원장 등을 상임고문으로 추대했다. 교육연합은 ▲자유주의교사연대 ▲자유주의학부모연대 ▲자유주의연구자포럼 ▲자유주의교육원로포럼 등의 4개 조직으로 구성되며 운영위원회(위원장 이명희 공주대 교수)를 통해 조율된다고 밝혔다. 조전혁 공동대표는 “교육연합이 뉴라이트의 대표적인 교육운동기구로 뜻을 같이하는 시민들과 아울러 우리 교육을 변화시키고 우리 아이들에게 보다 나은 교육환경과 내용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창립기념세미나에서 이명희 교수는 “자유주의란 근본적으로 학생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하는 교육”이라면서 “그러나 자신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책임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전제했다. 그는 이를 위해 “학교의 자율성, 책무성이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재학 교사는 교육부의 교육독점, 전교조의 각성, 역사교육 왜곡 시정을 요구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날 행사에는 윤종건 교총회장, 박효종 바른사회를위한시민회의 공동대표, 이석연 시민과함께하는변호사들 공동대표 등 각계 인사가 참여했다.
개인의 선호에 따라 복지 예산을 활용할 수 맞춤형복지제도가 지역별 혜택 범위와 시행 시기는 차이가 있지만 대개 이달부터 시행된다. 생명·상해보험과 의료비 보장 보험은 필수로 가입하고 도서구입 등 13개 항목은 자율 선택할 수 있다. 환자도 의료비 보장 보험가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다른 보험과 구별된다. 이 제도는 중앙인사위원회 등 9개 정부부처에서 지난 2004년부터 시행하고 있고 교육공무원의 경우는 올해 첫 도입됐다. 농협과 계약을 체결한 교육부 본부는 이달 시스템 개통과 더불어 전면 시행된다. 기관별 계약이 원칙이나 소규모 학교가 많은 충북은 도교육청이 한 단위가 돼 보험사와 계약을 추진하고 있다. ◆얼마나 쓸 수 있나=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복지 항목을 선택할 수 있다. 교육부 공무원의 경우 경력과 부양가족수에 따라 최저 300에서 900포인트까지 예산이 배정된다. 1포인트는 1000원 상당으로 30만원에서 90만원까지 예산이 차별 배정되는 것. 20년 경력에 4명의 부양가족을 거느린 A전문직의 경우 750포인트를 배정받는다. A씨의 경우 기본(300포인트)+근속(20년 근속=200포인트)+가족(배우자 100+그 외 가족 3명x50=150) 포인트가 합쳐져 750포인트다. 이 포인트를 복지카드를 활용해 사용하고 매월 1회 영수증을 제출하면 한 달 뒤 현금으로 돌려받는다. ◆복지 항목=필수항목과 자율항목으로 나뉜다. 전 직원이 의무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필수항목으로 생명·상해보험이 있다. 본인의 질병 및 재해사망, 등급별 재해 장애를 보장하는 목적. 최저 5000만원에서 2억 원까지 보상범위를 선택할 수 있다. 농협과 단체 계약한 교육부의 경우, 남자는 연령을 불문하고 5만 9680원의 보험료(59.68포인트)가 책정된다. 단체구매로 보험료가 저렴한 편. 의료비 보장보험도 필수항목. 입원 1회당 1천만원 한도로 환자나 이미 질병을 앓은 자도 보험가입이 가능하다. 본인은 총 입원 진료비의 20%만 부담하고, 보신이나 미용 등 질병치료와 직접 관계가 없는 진료비는 제외된다. 자동차손해배상, 공무상 재해보상 등 타 제도에 의한 보상과 이중보상은 금지된다. 교육부 본부의 경우 남자보험료는 2만 5570원 여자는 4만 2330원. 위의 두 보험은 소멸성으로 계약 기간이 끝나면 다시 갱신해야 한다. 필수기본항목을 선택한 후 남은 포인트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율항목이 있다. 본인 및 가족의 진료비와 종합건강진단, 건강시설 이용, 본인 학원수강, 자율연수비, 도서구입비, 콘도·리조트 이용료, 레포츠 관련 비용, 여행비용, 공연 관람, 보육시설 이용, 자녀의 유치원 교육비, 부모 부양비(주거 요양 여가시설 등 노인복지시설 이용료 및 어버이난 기념품 구입비) ◆기간제 교원은 제외=국가공무원법(제52조 공무원 후생에 관한 사항)과 공무원후생복지에관한 규정이 법적 근거. 2007년까지 전 부처로 확대된다. 기간제 교원이나 국외 파견 공무원, 병역휴직, 행방불명휴직, 법정의무수행, 해외유학휴직, 고용휴직, 교육부장관이 지정하는 기관에서의 연수휴직, 해외 배우자 동반 휴직, 노동조합 전임자 휴직자 등은 대상에서 제외된다. 휴직자 중 질병휴직, 육아휴직, 가사휴직자는 일반 적용 대상자와 동일한 복지포인트를 부여받는다.
시도별로 들쭉날쭉한 혜택으로 논란인 맞춤형복지제도와 관련 교육부는 “지역별 편차 없이 시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최근 밝혔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도교육청들은 여전히 ‘예산 확보 어려움’을 호소해 교육부의 지침대로 시행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교직경력이나 부양가족 수 등에 따라 1년간 개인별로 30만원~90만원까지 복지예산을 쓸 수 있는 맞춤형 복지제도가 예산 사정에 따라 시도별로 수십만 원까지 편차가 발생함에 따라 교육부가 대책 마련에 나섰다. 교육부 관계자에 따르면 정부 지침대로 100% 예산을 확보했거나 추진 중인 곳인 서울, 강원, 경북 등이다.(본지 6월 20·27일자 보도) 이화복 교육부 교직단체지원과장은 “복지 예산이 교육부 지침대로 시행될 수 있도록 시도교육청에 협조를 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선 지난달 9일 교육부는 “해당 시도교육청에서는 복지 예산이 지침대로 시행될 수 있도록 소요되는 예산은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 확보해 달라”는 공문을 내려 보냈다. 교육부의 독려에 따라 시도교육청들은 당초 계획보다 예산을 늘려 잡고 있으나 교육부가 제시하는 기준과는 거리가 멀다. 광주광역시의 경우 1인당 평균 6만원의 복지예산을 편성했으나 30만원 정도로 상향 조정할 계획이다. 기응서 부교육감은 “다른 시도와의 형평성을 고려해 30만원 정도의 예산을 책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선 시행하고 예산은 12월 정리추경 때 확보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충북도교육청의 경우 최저 15만원에서 45만원으로 1인당 평균 32만의 예산을 책정해 이달부터 시행에 들어갈 계획이다. 충북도청 관계자는 “1인당 32만원은 교육부 평균치인 64만 8000원보다 낮은 액수라 부담스럽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일반직 지방공무원들은 예산이 책정되지 않아 시행조차 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경기도교육청은 1인당 평균 27만원을 상정해 도교육위원회를 통과했지만 지난달 중순 도의회 예결특위 계수조정소위에서 20만원으로 하향 조정됐다. 교육여건이 어려운 데 교원복지가 우선될 수 없다 게 삭감 이유라고 관계자는 전했다. 시도교육청 관계자들은 “중앙정부에서 특별교부금을 내려주지 않는 이상 내년에도 지역별 편차는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편 교총은 최근 논평을 통해 “지난해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개정과 세수 부족으로 지방교육예산이 대폭 부족한 상황에서 중앙정부가 일체의 예산 지원도 하지 않고 국가직인 교원의 복지를 지방에 떠맡긴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조속히 예산을 확보해, 균형 있게 복지제도를 시행하라”고 촉구했다.
고교 평준화 해제와 고교등급제ㆍ본고사ㆍ기여입학제를 금지하는 '3불 정책'의 폐지 등을 추구하는 뉴라이트 교육단체가 1일 공식 출범했다. 자유주의 교육운동연합(교육연합)은 이날 오후 서울 명지빌딩에서 2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식을 열어 구미여고 김정수 교사(교사 대표)와 인천대 조전혁 교수(일반학계 대표), 서울여대 배호순 교수(교육학계 대표), 인천명신여고 이남정 교장(교육원로 대표) 등 4명을 공동대표로 선임했다. 정범모 한림대 석좌교수와 김진홍 두레교회 목사,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김진성 명지대 겸임교수, 김선호 전 경희대 교육대학원장 등은 상임고문으로 추대됐다. 교육연합은 창립 취지문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정부의 교육통제를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획일적 교육을 강요하는 교육평준화체제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 수정ㆍ보완ㆍ폐지하는 '자유주의 교육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학교교육을 통해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살려나갈 수 있도록 '공교육 정상화운동'을 벌이는 한편 교육의 국민자치제 실현을 위해 학교교육을 수요자 입장에서 바라보고 평가하는 '수요자 중심 교육운동'도 전개하기로 했다. 교육연합은 자유주의 교사연대와 자유주의 학부모연대, 자유주의 연구자포럼, 자유주의교육원로 포럼 등 4개 조직으로 구성됐다. 교육연합 관계자는 "정부는 교육개혁의 목표와 방향을 상실하고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평등주의적 교육정책을 남발해 개개인의 능력과 자유를 무시하고 획일적인 교육을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앞으로 정부에 고교 평준화 및 3불 정책 개선을 요구하는 한편 자유주의 이념 및 가치 전파, 새 교재 및 혁신적 학습방법 개발 등에 나설 계획이다. 창립식이 끝난 뒤 열린 세미나에서 이명희 공주대 교수와 정재학 전남 영암 삼호서중학 교사, 정영광 학부모 대표, 조전혁 인천대 교수 등이 '자유주의 교육의 비전'에 대해 주제발표를 했다.
예비군 훈련장의 사격 소음 때문에 인근 학교와 주민들이 '학습권 침해' 등을 주장하며 반발하고 있다. 인천시 서구 불로동 불로중과 목향초교는 인근 김포 야산의 모 보병여단 예비군훈련장과 300여m 떨어져 사격 훈련 시간에는 소음으로 창문을 열고 수업하지 못할 정도다. 특히, 예비군 훈련이 잦은 3~11월 하루 2차례씩 총성이 끊이지 않아 2002년부터 관할구청과 교육청에는 "사격장 소음을 해결해달라"는 민원이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소음 대책'에 대한 학교측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아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목향초교에 딸을 보내는 정모(37.여)씨는 "훈련기간에 거의 매일 사격장에서 천둥소리와 같은 소음 때문에 주민들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다"며 "학생들의 수업에 지장을 초래하는 만큼 훈련장 이전외에는 특별한 대안이 없다"고 주장했다. 불로중 관계자도 "교육청 등 관계기관에 수년전부터 수업에 지장을 초래하는 사격장 소음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명확한 대답이 없다"고 답답해 했다. 목향초교와 불로중에는 각각 1천200여명과 940여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으며 인근 대림.월드아파트 등에 3천여 가구가 살고 있다. 예비군훈련소측은 "지난 4월 인근 아파트에 1억2천만원이 투입된 방음벽이 설치됐고 지금까지 소음으로 인한 민원을 직접 받아본 적도 없다"면서 "주민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필수 소총 사격만 실시하고 사격 시간을 조정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립대가 특수법인으로 전환할 경우에는 고용승계 및 공무원연금 보장 등의 혜택이 부여되지만 법인화하지 않으면 교수정원과 예산배정 등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또 대학이 경영전문대학원을 설치할 때 학부를 없애지 않아도 된다. 김진표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1일 대구 인터불고 호텔에서 165명의 4년제 대학 총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주최 전국 대학 총장 하계 세미나에서 이같이 밝혔다. 김 부총리는 "대학구조개혁특별법을 제정해 이르면 내년부터 국립대 특수법인화를 유도하고 사립대 법인 퇴출 경로도 마련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정 요건이 갖춰진 대학부터 자발적으로 특수법인으로 바꾸면 되고 특수법인으로 전환하는 대학에 대해서는 고용승계 보장, 공무원연금 혜택의 지속적인 부여 등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일정 기간이 지나도 특수법인으로 전환하지 않는 대학에 대해서는 교수정원 및 예산 배정 등 행ㆍ재정적인 지원에서 차등을 두는 방안도 검토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사립대에 대해서도 자율적 구조개혁을 유도하되 불가피하게 사립대 법인이 해산하면 잔여재산 일부를 환원해 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김경회 교육부 대학구조개혁추진단장은 "출연 당시 재산에 해당하는 부분만 돌려주는 방안과 출연 당시 재산에 물가나 지가상승률 등을 더해 되돌려주는 방안 등을 놓고 연구용역을 실시 중"이라며 "교직원 명예퇴직금과 학생등록금 등은공제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교육부는 이런 내용을 담은 법안을 8월까지 마련할 예정이다. 김 부총리는 경영ㆍ금융ㆍ물류 전문대학원 설립 기준을 완화해 경제단체의 전문대학원 설립을 유도하는 동시에 기존 대학에 대해서도 종전 전문대학원 설립 전제 조건이었던 '관련 학부 및 특수대학원 폐지'를 없애 전문대학원과 학부를 병행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산업계 인사와 경영학 교수 등으로 구성되는 경영교육발전위원회를 통해 10월께까지 결론지은 뒤 연말 전문대학원 설립 인가를 내줘 내년 3월이나 9월부터 신입생을 뽑을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김 부총리는 총장들에게 "지자체나 지역 산업계와 긴밀히 협력해 독자적인 특성화 전략을 세워달라"고 당부했다.
김진표 교육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1일 "공공기관 이전과 관련해 혁신도시에 공영형 자율 중.고교를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김 부총리는 이날 대구시청에서 기자간담회를 통해 이 같이 밝히고 "공영형 자율 중.고교 설립은 중앙.지방 정부와 이전 공공기관이 공동으로 재원을 조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공영형 자율 중.고교는 혁신도시 구축 이전에 설립할 것"이라면서 "설립 이후에는 지역의 각계 인사가 참여해 학교를 자율적으로 운영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공영형 자율 중.고교는 교장과 교사를 초빙하는 등 최대한 자율권을 인정할 것"이라면서 "공교육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고, 지방으로 이전하는 공공기관의 임직원들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자립형 사립고의 운영과 관련해 "전국 6개 학교를 시범 운영 중인데 이를 곧 평가해 구체적인 문제점을 찾아 보완하겠다"면서 "획일적인 공교육의 문제점도 보완해 사교육 확산을 막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본고사형 논술고사에 대해 "학교생활기록부의 부풀리기 때문에 일부 대학들이 본고사형 논술고사 시행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학교생활기록부의 변별력과 신뢰성을 확보하는데 노력해 본고사형 논술고사가 필요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과 고교간의 학생생활기록부 신뢰성에 관한 워크숍을 계속 열어 학생생활기록부의 신뢰도 확보에 '올인'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밖에 대학의 구조조정에 대해 "대학 통.폐합은 최대한 대학들간의 자율 협정을 존중할 것"이라면서 "시장과 도지사 등이 참여하는 권역별 구조조정협의회를 구성해 대학 구조조정을 합리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는 2일 오전 대구지역 관.학.경제계 인사들과 함께 권역별 구조조정협의회 구성 등에 대해 토론할 계획이다.
일본 우익단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편찬한 후소샤(扶桑社)판 역사ㆍ공민교과서 채택률이 4년전 채택률을 크게 웃돌 것으로 보인다. 1일 역사왜곡 교과서 불채택 운동을 벌이고 있는 일본교직원노조(일교조)와 시민단체, 민단 등에 따르면 6월 30일 끝난 교과서 비교전시회장의 분위기로 보아 올해 후소샤판 교과서 채택률은 4년전의 0.039%보다 훨씬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일교조에 따르면 전국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중 16개 광역지자체에서 후소샤판 교과서가 채택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일교조 교문부 다카하시(高橋)씨는 ▲자치단체장이나 교육위원장이 후소샤 교과서를 지지하는 지역 ▲독도문제와 납치문제에 관심이 높은 지역 ▲자민당 우세 지역및 보수성향이 높은 지역 등이 후소샤판 교과서를 채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일본 우익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지사가 공공연히 새역모 지지로 해석되는 언행을 일삼는 도쿄도(東京都)와 가나가와(神奈川)현은 자치단체장이나 교육위원장이 후소샤 교과서를 지지하는 지역으로 분류됐다. 도쿄도의 경우 학교와 학생수가 많기 때문에 각 지자체가 도쿄도의 동향을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도쿄도의 동향이 다른 지자체의 교과서 채택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독도의 날' 조례를 제정한 시마네(島根)현과 인근 돗토리(鳥取)현을 비롯, 가짜 유골파동을 겪은 납치피해자 요코다 메구미의 고향인 니가타(新潟)현, 후쿠이(福井)현 등도 위험지역으로 분류됐다. 자민당의 아성 또는 보수성향이 높은 지역으로 꼽히는 야마구치(山口), 구마모토(熊本), 사가(佐賀), 미야자키(宮崎), 와카야마(和歌山), 야마가타(山形), 이바라키(茨城), 도치기, 에히메(愛媛), 홋카이도(北海道) 등도 채택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분석됐다. 새역모측은 도쿄도의 경우 절반 이상, 에히메현은 100% 후소샤판 교과서를 채택할 것이라고 호언하며 전국 조직을 독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어린이와 전국교과서 네트워크 21' 사무국 관계자는 "현 단계에서 채택률을 수치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4년전보다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일교조 효고(兵庫)현 사카모토 겐지(坂本硏二) 교문부장은 "근린제국 조항과 과거역사를 사과한 무라야마(村山) 담화 등을 강조하며 공정하고 공평한 교과서 채택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혔다. 중학교 교과서 채택은 7-8월 두달간 지자체별로 이뤄진다. 한편 민단중앙본부는 후소샤판 교과서 채택을 저지하기 위해 3일 오후 도쿄시내에서 '역사교과서와 어린이의 미래를 생각하는 포럼'을 열어 식민시절 창씨개명과강제연행의 진상 등을 고발할 계획이다. 시민단체인 교과서 네트워크는 9일자 요미우리(讀賣)신문에 올바른 교과서 채택을 촉구하는 광고를 게재키로 했다.
충남도교육청은 국립사대졸업자중교원미임용자(이하 미발추) 및 병역의무관련교원미임용자(이하 군미추)를 상대로 지난 한 달 동안 접수을 받은 결과 모두 302명(미발추 134명, 군미추 168명)이 등록했다고 1일 밝혔다. 미발추는 이에 따라 2006-2007학년도 특별정원으로 시행되는 중등교원 공개전형이나 교육대학 편입시험 가운데 한 곳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군미추는 특별채용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군미추 해당 여부가 확인되면 1년 이내에 교원에 특별채용된다. 미발추와 군미추는 1990년 10월 7일 이전에 국립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시.도 교육위원회별로 작성된 교사임용후보자명부에 등재돼 임용이 예정됐으나 1990년 10월 8일 교육공무원법 제11조 제1항(국립사대 졸업생 등 우선 채용)이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에 따라 교원으로 임용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글 | 박하선/사진작가·여행칼럼니스트 위구르족과의 첫 만남 '파인 땅 투르판'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발길을 재촉하다 보면 중국의 서쪽 변방인 '신지앙 위구르 자치구'에 접어들게 된다. 이곳은 황량한 사막지대에 '위구르족'이라는 소수민족의 세계가 펼쳐지는 곳이다. 이들은 생김새가 중국의 '한족'과는 판이하게 다를 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화조차 달라 도저히 중국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한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 닿게 되는 순간부터 마치 중동의 어느 한 지역에 와 있는 듯한 인상을 씻을 수가 없게 되고, 실크로드의 여정이 무릇 익어간다. 이 위구르족들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게 된 곳은 '투르판(吐魯蕃)'이라는 곳이었다. 이곳은 표고가 해면보다 낮은 곳이어서 여름철에는 중국에서 가장 더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곳은 역사의 고장이다. 예로부터 실크로드 상의 천산북로와 남로의 갈림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기원전부터 이 비단길을 오가던 상인들이 물과 휴식을 얻기 위해 이곳 투르판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또 구도의 길에 나선 수많은 입축승(入竺僧)들도 이곳을 거쳐갔다. 이처럼 예로부터 중요한 거점으로 인식되어 온 곳이기에 흐르는 세월 속에서 다양한 민족들의 치열한 쟁탈전이 불가피했던 곳이 바로 이 투르판이기도 하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주변 도처에 흩어져 있는 유적들이 그걸 잘 말해 주고 있으며, 더불어 당시의 영화를 짐작케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교하고성(交河古城)'과 '고창고성(高昌古城)'을 들 수가 있다. 번영의 빛이 소멸한 흙빛 도시 '교하고성' 시내를 벗어나 서쪽으로 13km쯤 떨어져 있는 '교하고성'은 이름 그대로 두 물줄기 사이로 30m나 우뚝 솟은 절벽 위에 터전을 잡은 천연의 요새와 같은 고대 도시를 말한다. 이곳은 실크로드를 오가는데 있어서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으로, 기원전 2세기 전한시대(前漢時代)에 이란계의 '차사전국(車師前國)'이 자리잡기 시작하여 14세기 말 그 번영의 빛이 소멸되기까지 흉노(匈奴), 한(漢), 당(唐) 등의 지배를 거쳐 온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은 온통 흙빛만으로 고요하기만 하다. 성문에 들어서니 벽돌길이 남북으로 일직선으로 뚫려있는 가운데 수많은 폐허들이 그 양옆으로 줄을 지어 서 있다. 그 길이 끝나는 북부에는 주로 사원이나 광장, 또는 저택 등으로 제법 규모가 있어 보이는 것들이 자리하고 있고, 남부에는 서민들의 주거지 흔적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당시 땅속 깊이 파놓은 우물들이 지금도 몇 개 남아 있는데 어찌나 깊은지 그 바닥이 안 보인다. 그 깊이를 점쳐보기 위해 돌멩이를 떨쳐 보면서 하루 종일을 이 폐허 속에 묻혀 지내보지만 지난날은 돌아오지 않는다. 현장법사가 지나간 고대 도시 '고창고성' 또 다른 고대 도시인 '고창고성'은 시내에서 좀 더 멀리 떨어져 있다. 당나라 때 전성기를 누렸던 이곳은 기기 괴괴한 모습의 '화염산'을 배경으로 길이가 5km나 되는 웅대한 성벽을 지니고 있는데, 499년 한나라 사람 '국문태(麴文泰)'가 이곳에 '고창국(高昌國)'을 세웠을 때 그 도성으로 쌓은 것이다. 교하고성이 흙 자체를 조각한 조각건축인 반면 이 고창고성은 흙벽돌을 쌓아 조성했기 때문에 파손이 보다 심해 궁전이나 사원 같은 큰 건물의 잔해만 남아있을 뿐 거의 공터로 남아있다. 이곳 고창고성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남긴 당나라의 고승 '현장(玄裝)'과도 인연이 있던 곳이다. 천축국으로 향하던 '현장'은 당시 '막하연적(莫賀延蹟)'이라 불리던 '고비사막'을 건너는 과정에서 온갖 고충을 다 겪다가 이곳 '고창국'에 도달하게 됐는데, 이때 열렬한 불교 신자였던 고창왕 '국문태'의 간청에 못 이겨 이곳에서 한 달 동안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설법하게 되었다. 또 융숭한 대접을 받고 떠나면서도 '현장'은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려 3년간 공양을 받아 줄 것을 국왕이 간절히 요청하자 그것 역시 받아들였다. 천축국을 두루 둘러보는 동안 십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고창왕과의 약속을 중히 여긴 그는 귀로에도 보다 빠르고 안락한 해로(海路)를 취하지 않고 고난으로 가득 찬 육로를 다시 거슬러 올라오게 되었다. 하지만 도중에서 고창국은 이미 당(唐)에게 멸망되고 국왕 국문태도 죽고 말았다는 소문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은 항상 모든 것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그래서 삼라만상 모든 것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드문드문 나타나는 오아시스 속에서 지금도 위구르족들은 옛 관습대로 살아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황량한 모래벌판과 고창국의 폐허를 굽어보고 있는 화염산만이 옛 모습 그대로인지도 모른다.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베제크릭 천불동' 불꽃이 날기를 천장(天丈)의 높이’라고 표현되면서 소설 '서유기'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화염산. 정말 마귀라도 금방 나타날 것만 같은 괴괴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그 산록을 끼고 돌면 또 하나의 전설이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을 찾게 된다. 그것은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베제크릭 천불동'이 오늘날 초라한 모습으로 지난 역사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뜻을 지닌 이 '베제크릭'은 수나라 시대인 6세기 말부터 14세기까지의 사이에 조성된 불교사원인데, 지금에 와서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57개의 모든 굴이 텅 비어있는 상태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번의 크나 큰 수난을 겪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14세기에 이슬람교를 신봉하게 된 이 땅의 위구르족들에 의해, 또 한 번의 결정적인 것은 20세기 초 독일, 일본, 러시아, 영국 등의 탐험대에 의한 벽화 반출 경쟁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오늘날 이 베제크릭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39굴의 '각국사절도'만이 비교적 깨끗이 남아있을 뿐, 매 굴마다 긁혀나간 벽화의 흔적들만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위구르족의 노력으로 탄생한 사막의 비밀 가는 곳마다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나 유적들이 많아 이곳 투르판 일대를 '역사의 보고'라고 한다. 이처럼 이곳에 많은 유적들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게 된 것은 다양한 역사의 흐름에도 있겠지만, 일년에 평균 강우량 16㎜밖에 안되는 건조한 날씨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지금도 이따금씩 땅속에서 발견되고 있는 '미이라'들이 잘 말해 준다. 그렇다면 이처럼 메마른 땅에서 어떻게 그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으며, 오늘날 '이곳 투르판 사람들은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일게 마련이다. 거기에는 위구르족 선인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던 것임을 이곳에 와 보고서야 비로소 알게된다. 그것은 투르판의 비밀이자 사막의 생명수라고 할 수 있는 '카레스'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막에서 뭐니뭐니 해도 가장 소중한 것은 물이다. 그래서 물이 있는 곳에 오아시스가 생겨나고, 물이 마름으로써 멸망한 왕국도 있고, 물을 잘 지배해 강성한 제국을 만든 나라도 있었다. 이곳 투르판 역시 천산산맥의 눈 녹은 물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사막의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천산의 물이 이들에게 생명을 주진 않았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천산이기에 지상으로 흘러오는 물은 아무리 많은 양이라고 해도 그 대부분이 증발해 버리기 때문에 온통 사막인 이곳을 적시기란 그야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곳 위구르족 선인들은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며 400-500년간에 걸쳐 지하 수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용되고 있는 '카레스'다. 천산 기슭에서부터 시작해 수많은 우물들을 지하로 연결해 오아시스까지 끌어들인 이 '카레스'의 물줄기. 그 총 길이가 장장 3000km나 된다고 하는데 이 엄청난 길이를 모두 손으로 파서 만들어졌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사막 속의 한쪽에서 새로운 카레스가 만들어지고 보수되는 가운데, 투르판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천산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카레스에서 물긷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고 한다.이 카레스 덕분에 이곳 투르판은 온갖 과일이 풍성하다. 그래서 일명 '과일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그 중에서도 특히 '포도'는 이곳 투르판의 특산품으로 여름철에는 이 일대가 온통 포도 넝쿨로 뒤덮인다. 수확기가 되면 집집마다 마련된 건조장에서 포도를 말리는 것이 일이다. 어느 한 곳을 찾아가니 온 가족이 동원되어 사다리를 오르내리면서 포도송이들을 막대 기둥에 걸고 있었다. 위구르족의 평화를 한눈에 엿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건조장에 걸어 놓은 이 포도들은 20일 정도면 건포도가 된다고 하면서 한 바구니의 포도를 내놓는다. 먹고 남은 것은 가져가라는 것이다. 씨도 없이 달콤하기만 한 청포도의 맛에 취하고 후한 인심에 또 취한다. 이래저래 위구르족들의 세계에서 실크로드에 대한 환상은 한없이 이어져 간다. *신비로운 실크로드의 세계! 새교육 7월호에서 만나보세요.
조현호 | 울산 옥현초 교사 귀신들이 만든 돌다리 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현존하는 전국의 돌다리를 찾아가고자 합니다. 삼국유사 편에는 '귀교(鬼橋)'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다리의 감독관은 '비형(鼻荊)'이라는 자인데 아버지 진지왕은 저승세계의 귀신이요, 어머니 도화녀((桃花女)는 이승세계의 생모이므로 비형은 반신랑(半神郞)의 독특한 신분입니다. 비형은 밤이면 귀신들과 어울려 수작을 부리곤 했는데 이를 안 진평왕이 비형으로 하여금 신원사 북쪽 개천에 돌다리를 놓도록 명령을 하지요.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하룻밤 사이에 귀신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다리를 완성하고 맙니다. 기록상 우리나라 최초의 돌다리는 바로 귀신들이 만들었던 것입니다. 불가의 다리 불가(佛家)에서는 세상의 중심에 수미산이 우뚝 솟아 있다고 합니다. 그 수미산에 부처님이 계십니다. 인간들이 수미산에 가려면 8산9해(八山九海)를 넘어야 겨우 수미산 어귀에 이르게 되고 그 수미산을 사천왕을 비롯한 여러 권속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습니다. 절집들이 깊은 산중에 입지한 경우가 많은 것은 척불(斥佛)이나 고유의 산신신앙과도 관련이 있지만 그보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의 우주관이 앞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산속에 있는 절들은 대개 계곡을 끼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필연적으로 다리를 건너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과정은 물을 건넘으로써 차안(此岸)의 세계에서 피안(彼岸)의 세계로 접어들고 해탈, 극락의 세계로 진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가에서는 '월천공덕(越川功德)'이라 하여 다리를 놓는 행위를 수행의 과정으로도 봅니다. 다리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도와 복전(福田)을 확보함으로써 깨달음에 더 빨리 이를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수행자인 스님들이 월천공덕으로 쌓은 다리 중 대표적인 다리가 벌교에 있는 ‘홍교(虹橋)’입니다. 벌교(筏橋)라는 지명은 옛날에 뗏목다리가 있어서 불린 이름입니다. 조선 숙종 44년(1705)경에 선암사의 초안선사가 이 다리를 놓았다고 하며 영조 13년(1737)에 개축하면서 3칸의 무지개다리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다리의 내력이 담긴 석비가 많이 남아있어 그 가치를 높여주고 있습니다. 과학과 미학의 조화 - 무지개다리 무지개다리를 ‘홍예교(虹霓橋)’라 일컫습니다. 주로 궁궐이나 사찰 다리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견고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석재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무지개 모양으로 양쪽에서 쌓아가다 최종적으로 이맛돌[key stone]을 끼우면 완성됩니다. 홍예교의 견고함은 바로 이 이맛돌에서 비롯하는데 이맛돌이 빠지지 않는 한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위에서 가하는 힘을 좌우로 분산시키기 때문에 붕괴 위험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과학의 힘에다 선경(仙境)에나 등장할 듯한 미학이 조화를 이룬 쾌거라 하겠습니다. 무지개다리라 하면 보물 제400호 선암사 ‘승선교(昇仙橋)’를 많이 떠올립니다. 승선교의 아름다움은 뒤에 배경으로 따라오는 강선루(降仙樓)가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신선이 타고 오르는 무지개다리와 신선이 내려와 머문다는 집의 조화가 있기에 그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토함산이 있기에 함월산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강원도 고성 거진에 자리한 건봉사에도 ‘능파교(凌波橋)’가 있습니다.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데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 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고 합니다. 그 규모는 폭 3미터, 길이 14.3미터,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미터이며, 다리의 중앙부분에 큰 아치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축조하여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보존상태도 양호하고 우리나라 돌다리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남 창녕 땅 ‘영산 만년교(萬年橋)’는 이전의 나무다리가 가진 불편함을 없애고 천 년 동안 변하지 않는 돌로 다리를 만들어 오랫동안 보존하자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반원형 홍예는 영산 석빙고가 자리한 상류에서 흘러오는 개천과 어울리면 완벽한 원을 만들어 가히 환상적입니다. 조선시대 1780년에 석공 백진기가 가설하고, 1892년 4월에 영산현감 신관조가 석수 김내경을 시켜 다시 지었습니다. 전남 여수의 흥국사 홍교, 강진의 병영성 홍교와 진도 남박다리 또한 무지개다리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돌을 나무처럼 잘라 뚝딱뚝딱 전라남도 함평군과 나주시를 가르는 고막천 위에 놓인 고막천 석교는 현지인들이 ‘똑다리’ 또는 ‘떡다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고려 원종 14년(1723)에 무안 승달산에 있는 법천사의 도승 고막대사가 이 다리를 눈 깜짝할 새에 도술로 ‘똑딱똑딱’ 하여 ‘떡하니’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다리가 있는 고막리는 행정구역으로 함평군 학교면에 속합니다. 고막마을이야 고막대사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인 것은 추론할 테고 학교란 지명이 재미있지요? 학교(鶴橋)는 ‘학다리’를 말합니다. 삽교(揷橋)를 ‘삽다리’라고 이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 다리는 무지개다리와는 달리 돌을 나무 다루듯 잘라서 교각 및 상판으로 꾸민 목조건축물의 양식을 보이는 돌다리입니다. 지난 2001년도 보수공사시 바닥 기초 나무 말뚝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최소한 고려 말, 조선 초로 밝혀져 축조연대가 상당히 오래된 돌다리임이 증명되어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나주평야가 인접하여 한 때 각종 물산을 실은 수많은 배들이 드나들던 번화한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화려함을 잃었지만 조수간만의 차와 홍수 등 모든 악재를 이겨내고 수백 년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1980년에 고막마을 사람들이 세운 유적비에 이 다리에 대한 향수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 서술컨데 이 석교는 옛날의 국도가 나주함평의 군계(郡界)를 흐르는 고막천을 통과하는 데에 가설된 것인데 철도와 신도로가 석교의 바로 전방에 개통된 1910년대만 해도 영산강을 오르내리는 선박들이 바로 교하(橋下)에 정박되어 있었음으로 미루어 그가 교통산업상 중요한 일역을 담당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고도화되는 문명으로 급속히 변모되는 세태는 석교로 하여금 그 무거운 짐을 후배 교량들께 물려주게 하였으니, 이제는 면전에서 들리는 갖가지 차량의 경적과 굉음을 푸념삼아 귀에 익히며 볏단을 나르느라 조심스레 아끼며 밟고 지나가는 농부의 발자국에도 긍지와 애착을 느끼고 그것으로써 자위 자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승지(勝地)는 불멸일세. 이 석교가 고려조 이래 수백 년간에 쌓아올린 공적과 아울러 고막스님의 이름은 고막마을과 고막강으로 흐르는 강물의 영원함과 같이 언제까지나 이 나라 이 고장을 지켜보리라…. 한편, 충청도 옥천 땅에 있는 ‘청석교(靑石橋)’도 목조건축 양식을 볼 수 있습니다. 바닥에 긴 장대석을 놓고, 그 양 끝에 네모진 돌기둥을 세워 교각(橋脚)을 만들고 그 위에 넓고 긴 상판석을 얹어 두었습니다. 고려 시대 강감찬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모기 때문에 백성들이 괴로워 하고 있음을 보고 모기에게 호령을 하여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원래 군북면 증약리에 있었는데, 보존상의 이유로 지난 2001년 4월 옥천 향토전시관 앞 인공못에 박물(博物)이 되어 서 있습니다. 근대화에 제 할일을 잃어도 미내다리[渼奈橋]는 금강지류인 강경천에 자리해 있습니다. 옛 비문에 의하면 강경의 석설산과 송만운이 처음 발의하고 주동이 되어 모금한지 일 년도 되지 않아서 관의 힘을 빌리지 않고 다리를 완성하였다고 하네요. 특히 이 작업에는 승려들이 협조해 주었다고 합니다. 원래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바위가 보인다 하여 ‘조암교’ 혹은 ‘미교’라고 일러오다가 조선 영조 7년(1731)에 지금의 다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 다리를 찾으면 다리가 냇가를 가로질러 있는 것이 아니라 강경천의 물줄기와 평행하게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다리가 물길과 평행하게 놓여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논산문화원 관계자의 답변을 듣고야 수긍이 되었습니다. 1931~1932년 일제강점기에 높은 제방을 쌓아 하천정비를 하는 과정에서 당시 여럿이던 물길을 정비하면서 다리 아래로 흐르던 물길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인근 원목다리[院項橋]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목다리는 물길을 가로질러 제 위치에 있지만 하천정비로 인해 하천의 폭이 넓어지면서 현재 다리로는 물이 들지 않고 옆으로 물이 흘러갈 뿐입니다. 다리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것이죠. 식량의 보고인 금강유역을 넘다들며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을 미내다리와 원목다리는 자신보다 훨씬 키 큰 제방 아래에 웅크린 채 옛 영화를 추억할 뿐입니다. 투박한 막돌이 모여 미려한 농다리가 ‘생거진천(生居鎭川)’은 충북 진천 땅이 살기가 좋은 고장임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진천 땅 세금천에 ‘농다리[籠橋]’라고 불리는 돌다리가 있습니다. 지역 향토지에 따르면 고려시대 임연장군이 그의 전성기에 고향마을에 쌓았다고 하는데 기록으로 보았을 때 현존 최고의 석교라 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런데 이 다리의 축조 연대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태권도 공원을 유치하기 위해서 과열경쟁을 벌이다 보니 진천이 김유신의 탄생지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이 농다리가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 장군이 고구려로부터 낭비성을 되찾을 때 가설한 다리라고 주장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던 것입니다. 하류에는 굵직한 돌을 바닥에 깔았는데 상류로부터 몰려오는 물살의 저항을 1차적으로 줄이는 역할을 해줍니다. 그 길은 또한 소와 같은 가축들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로도 활용됩니다. 항공사진을 통해 본 전체적인 생김새는 수심이 깊은 곳은 하류 쪽으로 돌출해 있고 수심이 얕은 곳은 상류 쪽으로 주춤한 곡선형입니다. 마치 교각과 판석이 어울려 배다리[舟橋]의 모습을 보는 듯하고 혹은 지네가 몸을 비틀고 있는 듯합니다. 특히, 붉은 빛이 나는 사력암질의 돌들은 다른 다리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멋을 풍기는데 결코 단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은 돌의 재질로 보아 장구한 세월을 견뎌온 것이 신기할 뿐입니다. 제대로 정련되지 않은 투박한 막돌이 모여도 이렇게 미려한 돌다리가 만들어지는구나, 농다리에 가면 새삼 길들여지지 않은 것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수한 형태의 돌다리 화성의 아름다움 중에서도 특히, 화홍문 및 방화수류정과 용연이 함께 어울린 풍광은 ‘용지대월(龍池待月)’이라 하여 화성의 백미라 일컫지요. 이중 화홍문은 본래 수문다리의 역할에다 건축물의 용도를 더한 대표적인 누교건축물(樓橋建築物)입니다. 화홍문의 홍예는 모두 7칸인 데 일곱 색깔 무지개를 형상화한 듯합니다. 수문을 통해 쏟아지는 물보라에서 피어나는 무지갯빛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팔경의 하나로 치고 있습니다. 3보사찰의 한 곳인 순천 송광사에서는 누교건축을 두 군데서 볼 수 있습니다. 절로 들어가는 초입에 계곡을 가로질러 ‘청량각(淸凉閣)’이 있습니다. 이 다리를 지날 때면 아래로 조계산의 맑은 물과 정기가 흘러 청량감이 몰려옵니다. 또 한 곳은 대웅보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건너야 하는 ‘삼청교’라는 무지개다리와 그 위에 세운 ‘우화각’입니다. 우화각은 18세기 초의 건물인데, 입구 쪽은 팔작지붕이고 나가는 쪽은 맞배지붕을 하는 특이한 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불국사에 있는 연화교(蓮華橋)와 칠보교(七寶橋),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는 국보로 지정된 계단형 다리입니다. 2단의 석단(石壇)과 함께 축조되었으며 연화교와 칠보교를 지나면 안양문(安養門)을 통하여 극락정토에 들어갑니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지나면 자하문(紫霞門)을 통하여 불국토에 들어갑니다. 계단 형태의 돌다리를 건넘으로써 극락과 불국토라는 피안(彼岸)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깨끗한 청계천을 기원하며 청계천 복원을 둘러싸고 말이 많습니다. '맑은 물'이라는 청계(淸溪)를 복원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인데 맑지 못해 한몫 챙기려는 자들이 있어 말썽입니다. 깨끗한 정치는 깨끗한 교육이 있을 때 필요하지 않을까요. 다음 호는 옛 다리를 찾아가는 마지막 여행으로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서울지역의 옛 다리를 만나고자 합니다.
국제 환율을 출렁이게 한 한은총재의 입 최근 박승 한국은행 총재가 외환보유액과 외환시장 개입에 관련해 발언한 것이 외환시장에 큰 영향을 미쳐 화제가 됐다. 경위는 이렇다.박 총재는 최근 영국의 유수 신문인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주요 외신들이 우리나라의 시장정책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잘못된 보도를 일삼는다고 판단, 중앙은행 총재로서 <FT>와의 인터뷰를 자청했다. 5월 18일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인터뷰에서 박 총재에게 달러 약세로 인한 세계 경제의 혼돈과 한국의 대응에 대해 질문했다. 박 총재는 "한국은 국가 신용도를 지키는 데 충분한 외환보유액을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외환보유액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FT는 박 총재의 말을 한국은행이 더 이상 달러를 사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해 '한국이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를 한은의 환율 방어 정책 포기로 해석한 세계의 외환 딜러와 환투기 세력은 이내 시장을 휘저어 원화 환율을 급락시켰다. 뉴욕 외환시장에서는 달러 당 995원까지 떨어졌고, 5월 19일 서울 외환시장에서도 달러 당 1000원선이 무너졌다. 한국은행은 원-달러 환율 급락을 막기 위해 급거 시장개입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1조 원을 들여 10억 달러어치의 달러를 사들여야 했다. 국내 언론에서는 박 총재의 말 한마디 때문에 한국은행이 단 하루에 1조 원 가까운 돈을 쏟아 부어야 했다고 일제히 비판했다. 우리나라 ‘통화신용정책의 수장이자 세계 4위 규모의 외환보유액을 관리하는 한은 총재’로서 신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박 총재는 이보다 석 달 전인 올해 2월에도 국회에서 한국은행이 보유한 외환의 수익성 증대를 위해 외환 보유용 통화를 다변화하겠다는 뜻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었다. 그때도 원-달러 환율이 급락해 세계 외환시장이 출렁거렸고, 언론이 일제히 박 총재의 ‘가벼운 처신’을 비판했다. 최근 한은 총재의 발언이 거듭 외환시장에 파문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본적으로는 현재 한국은행이 정책적으로 달러 보유를 늘리느냐 줄이느냐 여부에 따라 국제 환율이 요동치기 쉬울 정도로 외환, 특히 달러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외환보유액이 많다는 얘기다. 몇 년 전을 생각하면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은행의 외환보유 얼마나 필요한가? 한국은행은 평소 달러를 포함해 일정액의 외화를 보유해둔다. 국내 은행에 맡겨두거나 대출해주는 식으로 국내 금융기관에 맡겨두거나 미국, 독일 등 선진국 금융기관의 단기예금에 넣어둔다. 금을 사두기도 하고, 비교적 쉽게 현금화할 수 있는 미국 정부 채권을 사두기도 한다. 평소 외환을 보유하고 있다가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 보유 달러를 내다 팔고 원화를 사들여 원화 가치의 급격한 추락을 막는다. 반대로 환율이 급락하면 원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여 원화 가치가 단기에 지나치게 오르지 않게 해서 외환시장을 안정시킨다. 한국은행이 보유하는 외환은 우리나라 외환시장과 금융시장의 안정성뿐 아니라 나라 경제의 대외신용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국내 기업·금융기관이 혹 외화 부족으로 외국 기업·금융기관에 진 빚을 갚지 못하는 사태가 생기면 한국은행이 대신 나서 갚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은행이 국가 신용의 보루 역할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외환을 갖고 있어야 할까? 딱 떨어지는 공식은 없다. 국제금융기구인 IMF(국제통화기금 : International Monetary Fund)는 각국이 최소한 최근 3개월분의 수입대금을 치를 수 있을 정도는 보유하라고 권한다. 지난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당하기 직전 8월, 우리나라의 월평균 수입액은 120억 달러였다. IMF 권고를 따른다면 당시엔 외환을 360억 달러쯤은 갖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때 한국은행이 실질적으로 동원 가능한 외환 규모는 100억 달러도 되지 못했다. 그러다 연내로 갚아야 할 단기부채 상환 부담에 몰렸다. 중앙은행마저 외환이 부족해 만기가 돌아오는 외채를 갚지 못한다면, 그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신용을 잃는다. 해당국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일제히 외국 채권자의 빚 독촉을 받게 된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투자를 중단 내지 기피하고 기존 투자는 빼내간다. 외환위기 직전 한국은행에 외환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해외 투기세력은 적극 환투기에 나서 달러를 사재기했다. 이 바람에 원화 가치는 겉잡을 수 없을 만큼 폭락했다. 통화의 가치가 너무 급하게 오르내리면 외환시장과 금융시장, 물가, 기업의 수출입 등을 포함해 경제 전반에 충격과 혼란을 준다. 그래서 정부와 한국은행은 늘 원화 환율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정부에서는 재정경제부(재경부)가 외환정책 담당부처다. 재경부는 국민경제의 성장에 직접 책임을 지는 주무부처이기도 하므로 외환 문제 중 특히 지금처럼 환율이 떨어지는 경우에 신경을 더 많이 쓴다. 나라 경제가 성장하려면 수출이 잘 되어야 하는데 원화 환율이 떨어지면 수출이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달러 환율이 급락할 때면 국고채 같은 채권을 발행해 달러를 사들임으로써 환율 하락을 막는다. 정부와 한은은 왜 외환시장에 개입하나 정부 외환정책 당국과 중앙은행이 통화의 시세를 조정하려는 의도로 외환시장에서 통화나 외화를 매매하는 행동을 두고 ‘외환시장에 개입한다’고 말한다. 외환시장 개입은 어느 나라나 다 한다. 다만 아무 때나 그러는 것은 아니고 주로 환투기가 발생할 때 그렇게 한다. 환투기란 외환시세가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속성을 이용해 시장에서 외환을 투기적으로 매매하는 것이다. 국제 외환시장에서는 늘 환투기가 성행한다. 투기세력은 어떤 통화가 장차 오르거나 내릴 요인이 보인다 싶으면 그런 방향으로의 변화를 증폭시키고 그 흐름을 주도하면서 시세차익을 거둔다. 전형적인 방법은 미리 해당 통화를 사재기 하거나 팔아치워 시세의 오름세 혹은 내림세를 가속시키는 것이다. 자연히 환투기가 끼어들면 통화 가치가 너무 급하게 오르내리게 마련이다. 그 결과 해당 외환의 시세에 경제적 이해가 큰 나라는 금융시장과 수출, 국민경제가 치명적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따라서 환투기가 생기면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외환시장 흐름에 잘 대처해야 한다. 즉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의 외환시장 개입은 환투기를 막아 외환시세를 안정시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시장개입, 안 하느니만 못한 때는 언제? 정부나 중앙은행이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외환시장에서 가수요나 환투기를 막으려 하는 것이지만, 시장개입이 늘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시장개입 자체를 잘 해내는 것도 쉽지 않다. 개입 시기를 잘 못 고르거나 방법을 잘못 택하면 설사 개입하더라도 시장의 방향을 바꾸기 힘들다. 어설프게 개입했다간 투기꾼들의 기세를 한층 키워 차라리 개입하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 가령 원-달러 환율이 급등세인데 달러에 가수요가 붙고 환투기 조짐이 생겼다고 하자. 이럴 때 정부나 한국은행이 외환시장에 개입한다면, 보유 달러를 시장에 대거 내다 파는 행동을 보이게 된다. 이 같은 외환당국의 개입이 유효하리라는 관측이 외환시장에 받아들여지면 투기세력의 달러 사재기는 고개를 숙이고 환율 급등세도 멎을 것이다. 원화 가치는 다시 높아지고 시세가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한국 외환당국의 달러 보유액이 투기세력의 달러 사재기를 막아낼 만큼 충분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사실이 시장에 알려진다면 투기세력은 달러 사재기를 계속할 것이고, 다른 거래자들마저 투기에 가담해 원-달러 환율은 한층 급등할 것이다. 한국의 외환당국이 달러를 팔아치우는 정도로는 시장에서 환율 급등세가 멎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이 경우 노련한 투기꾼들은 우리 외환당국이 시장에 개입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거세게 달러 사재기에 나설 수도 있다. 그래야 달러 가치가 계속 올라, 투기적 달러 사재기의 결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외환당국의 시장 개입은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셈이다. 이처럼 정부나 중앙은행이 외환시장에 개입해 투기세력과 맞섰다가 패배하면 심각한 경제적 악영향이 올 수 있다. 우선 해당국 통화 가치가 국제 외환시장에서 시세의 안정성을 잃고 삽시간에 큰 폭으로 급등락할 수 있다. 외환시장은 금융시장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금융시장 안정성도 교란되고, 국민경제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 쉽다. 바로 지난번 우리가 겪은 외환위기 때가 극적인 예였다. 당시엔 원-달러 환율이 급락하면서 정부와 한국은행이 급거 시장개입에 나섰다. 그러나 시장엔 이미 한국 외환당국에 원화가치 하락을 막을 ‘총알(보유 외환)’이 바닥났다는 사실이 알려진 마당이라서 사태가 오히려 더 나빠졌다. 결국 외환위기가 현실화했고, 우리 정부는 IMF로부터 긴급 자금을 빌려 위기를 넘겨야 했다.당시 외환위기로부터 우리가 얻은 교훈은, 외환시장 개입은 개입 여부와 개입 시기, 개입의 규모와 방법 등을 항상 주의해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행은 매월 외환보유액 통계를 발표해가며 외환보유액을 높이고, 관리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러다 보니 외환위기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지금 와서는 외환 보유액이 2천억 달러를 넘어 우리가 일본, 중국 등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외환보유국이 됐다. 이젠 쓸데없이 너무 많은 외환을 보유하고 있어서 나라 재산 관리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정희창 |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맞춤법이나 표준어는 딱딱하고 지루하다고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을 담고 있는 것들도 적지 않다. 어떤 말이 옳고 그른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의외로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와 '그러고 나서'가 그러한 경우이다. '그리고 나서'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흔히 쓰이는 말이다. (1) 한두 걸음씩 걸어도 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또 울었다. (2) 채화꽃이 만발할 때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시는 못 가보고 말았지요. 그리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북간도로 떠났으니까요 위의 예에 나와 있는 '그리고 나서'는 '그러고 나서'로 바꾸어도 의미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와 '그러고 나서'는 의미가 같은 셈인데 이처럼 의미가 같고 형태가 유사한 말이 있을 경우 두 말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동의 관계인지, 의미나 용법에서 섬세한 차이가 있는지가 탐구의 대상이다. 먼저 '그리고 나서'의 띄어쓰기 문제부터 생각해 보자. '그리고나서'를 한 단어로 다룰 수도 있고, '그리고∨나서'와 같이 두 단어로 다룰 수도 있다. 한 단어라면 '그리고, 그러나, 그런데'와 같은 접속 부사와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한 단어가 아니라면 '그리고∨나서'로 분석되는데 이때는 선행 요소와 후행 요소의 문법 범주가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그리고나서'가 한 단어가 아니고 '그리고∨나서'의 구성이라는 근거로는 아래와 같은 쓰임을 들 수 있다. (3) 전라좌도의 해변을 돌면서 어디든 마음 내키는 대로 정박한다. 그리고 나면 영접 나온 그 지방 벼슬아치들을 따라 관아에 향응을 받는다. 위의 예에 나타나는 '그리고 나면'을 보면, '그리고나서'와 같이 한 단어로 형태가 굳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고나-' 전체가 하나의 용언이거나 '그리고'와 '나-'가 결합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4) 그리고 {나서, 나니, 나면, 나자 ……} '그리고나-'가 하나의 용언일 가능성은 매우 적다. 무엇보다 그러한 단어가 국어사전에 올라 있지 않으며 의미상으로도 좀 더 분석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따라서 '그리고 나서'를 '그리고'와 '나서'로 분석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나서'의 '나-'가 용언의 어간이라면 '그리고'는 무엇일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그리고, 그런데, 그러나'와 같이 학교 문법의 접속 부사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에 '고'가 결합한 구성으로 보는 것이다. 먼저 접속 부사로 볼 경우 접속 부사 다음에 용언의 활용형이 연결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5) {그리고, *그런데, *그러나, *그러므로 ……} 나서 '그리고 나서'를 제외한 '*그런데 나서, *그러나 나서, *그러므로 나서' 등은 전혀 쓰이지 않는다. 국어에서 접속 부사는 문장이나 단어를 연결해 주는 것이므로 용언의 활용형이 바로 연결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설명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그리고 나서'의 '그리고'는 접속 부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예를 보면 '그리고 나서'는 '그리고'와 '나서'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와 '-고 나서'로 분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먹고 나서, 자고 나서, 뛰고 나서, 웃고 나서 …… 위의 예들은 모두 '-고 나서'를 공유하고 있으며 '-고 나서' 앞에는 동사가 나타난다. 형용사나 서술격 조사가 오면 비문이 된다. (7) *예쁘고 나서, *슬프고 나서, *사람이고 나서 ……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나다'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뜻풀이되어 있다. (8) 나다 [보조] (동사 뒤에서 '-고 나다' 구성으로 쓰여) 앞말이 뜻하는 행동이 끝났음을 나타내는 말. 즉 '그리고 나서'는 '[동사]+-고 나다'와 같은 보조 용언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는 동사일 수밖에 없다. 동사 '그리-'는 다음과 같이 쓰인다. (9) 그림을 그린다. / 지난 날을 그린다. 문제는 동사 '그리-'가 '그리고 나서'와는 뜻이 맞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림을 그리거나 지난 날을 그리는 것과 '그리고 나서'는 의미가 다르다. 이러한 문제는 동사 '그리-'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짝을 이루는 '이, 그, 저'가 '*이리고 나서, *저리고 나서'에서는 성립하지 않는 것도 동사 '그리-'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결론적으로 동사 '그리-'를 쓴 '그리고 나서'는 동사 '그러-'를 잘못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를 써야 하는데 '그리고'에 이끌리거나 '그러다'의 의미를 가진 방언형 '그리다'에 이끌려 '그리고 나서'를 쓰게 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리고 나서'와 '그러고 나서'는 의미와 쓰임이 같았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이러고 나서, 저러고 나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그, 저'의 짝을 만족시킨다. 또한 의미적인 면에서도 완전히 일치한다. 동사 '그러-'와 관련하여 '*그리고는' 또한 '그러고는'을 잘못 쓴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접속 부사 '그리고' 다음에는 보조사가 붙지 않으므로 '*그리고는'과 같은 구성은 잘못이다. 이 또한 '그러고는'을 '그리고'에 이끌려 잘못 쓴 것이다. (10) 그때는 들은 척도 않했잖아? 그러고는(*그리고는) 이제 와서 몰랐다고?
박경민 | 역사칼럼니스트 cafe.daum.net/parque 폴리스의 형성과 발전 에게 문명은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크레타 섬이 중심이 된 BC 3000년에서 BC 1400년까지의 크레타 문명 또는 미노스 문명이고, 후기는 BC 1400년부터 BC 1200년까지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와 티린스 혹은 소아시아 트로이 중심의 미케네 문명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을 크게 이오니아인·아카이아인·도리아인으로 나눌 수 있는데, 후기 에게 문명은 미케네 문명으로 그 맥을 가까스로 이었으나 이미 BC 12세기 초에 이동한 이오니아인·아카이아 인과 달리 가장 늦게 남하한 도리아인들이 펠로폰네소스를 정복하면서 지중해로 진출하더니 먼저 남하한 그리스인들의 문명을 차례차례 파괴하면서 에게 해의 섬들을 차지하였다. 즉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발칸반도 일대에 흩어진 그리스인들은 BC 8세기부터 지리적 조건, 특히 교통의 요지를 골라 집단거주(시노이키스모스)를 시작하였으며 이렇게 해서 생겨난 도시를 '폴리스'라 하였다. 폴리스는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서 아크로폴리스(언덕)와 아고라(광장)가 설치되었으며 주위에는 성벽과 농지가 펼쳐져 있었다. 이렇게 그리스인들은 폴리스라고 하는 비교적 많은 소규모 도시국가를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형성하면서 고도의 창의성을 발휘하여 서양 최초의 문화를 창조하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대 동방(오리엔트)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해서 그들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문화를 가미한 것이었다. 그러나 창의성이 강한 그리스인들은 인간과 사회의 원리를 철학적으로 사고하여 예술과 철학·역사·정치 등 각 분야에 활용함으로써 역동적인 문명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는 그리스인들의 정치·경제·사회 생활의 기본적인 요소이며 배타적 단위였다. 폴리스에는 어김없이 한 복판의 산언덕에 아크로폴리스를 만들어 유사시에는 일종의 피난처(대피소) 구실을 하였으며 성안에는 그리스인들이, 성 밖에는 외지인들이 거주하였는데 그리스 본토에만 100여 개가 넘었고 식민지의 그것까지 합치면 1000개는 족히 넘었을 것이다. 폴리스는 상호간 정치적 지배관계가 전혀 없는 자주 독립적 사회로 전체적인 정치적 통일성이 없었으나 같은 언어와 종교(올림포스 신앙), 그리고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념적 유대감으로 올림픽 경기 등을 통해서 그들의 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그리스인들의 모험심 처음에는 귀족정치가 행하여졌지만 나중에 일반시민(자작농민)의 사회적·경제적 대두에 의한 발언권이 세어지면서 민주정치로 바뀌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크레타가 에게 해를 중심으로 해상권을 장악한 이래, 아테네가 전면에 등장한 BC 8∼7세기 무렵부터 그리스인들은 식민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리스인들이 식민지 개발에 열을 올린 이유는 소수 귀족들의 토지독점으로 영세농민이 증가하였다는 점인데, 이 말은 귀족들이 마음을 고쳐 토지의 독점을 포기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보는 편이 빠르다는 판단에서이다. 더욱이 폴리스 자체의 성장과 발전은 인구의 집중과 증가를 가져왔으며 따라서 적절한 인구의 이동이 불가피했으며 도시의 번창과 시장확대는 각 폴리스에서 생산된 상품을 내다 팔 대상 지역으로서 식민지가 필요했고, 정치적 불만세력이 식민지를 통해서 탈출구를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노렸다는 점을 들 수 있겠지만 그리스인 특유의 모험심, 다시 말해서 배를 타고 나가면 바다 저편에 뭔가 있다는 호기심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르고스 원정대 이야기'가 비록 허구적인 전설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에게 있어서 최초의 해외원정이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는 데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인들이 해외로 진출하여 많은 식민지를 건설한 것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황금의 양가죽'을 바다로 진출하여 획득한 일종의 전리품이라 전제한다면 당시 의외의 성과가 황금의 양가죽이라고 바꾸어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식민지는 지중해와 흑해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는데, BC 600년대에는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 그리스 식민지가 넓게 퍼짐으로써 그리스의 경쟁상대로는 오직 페니키아 인이 세운 식민시(植民市) 카르타고 밖에 없었다. 그리스의 정치적 변화 소위 민주정치의 원조는 그리스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민주정치가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란 가능하다면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흔들고 싶어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으면 독재정치를 펼 수 없다. 소위 민주정치의 원조라고 하는 그리스에도 귀족·평민·노예의 구별이 있었으며 기원전 8세기경부터 왕정이 행하여졌다. 그리스 역사에서는 이 시기(BC 1000∼800년)를 '왕정시대'라 하는데 소위 '호메로스 시대'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당시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그리스에서는 오리엔트, 또는 중국의 황하지역과 같은 치수사업은 필요 없었기 때문에 왕정시대라 하더라도 전제적 군주제는 아니었다. 치수사업을 위한 대규모 노동력과 이를 추진하기 위한 강력한 군주의 통치력이 필요 없었다는 말이다. 농업과 목축이 주된 산업이었으며 BC 900년경에는 동방과의 교역을 통해 페니키아의 문자(알파벳)가 전해졌다. 기원전 7세기까지는 귀족들이 군사와 국방의 중심을 떠맡는 집정관(아르콘)으로서 정권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과두정시대(寡頭政時代 : BC 800∼550년)라고 한다. 그 이유는 전쟁에 있어서 기병의 역할이 종전보다 강화되었다는 점과 귀족 가운데 일부는 전쟁에서의 전리품과 식민으로 재물을 끌어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며 식민시의 건설과 교역, 산업분야의 발전이 이루어짐으로써 귀족의 발언권이 강화된 것이다. 다음은 최고의 정치권력을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은 독재자가 국정을 좌우하는 참주정치시대(僭主政治時代 : BC 660∼500년)가 이어졌는데, 그 배경으로 부유한 중산층의 대두와 그로 인한 계급투쟁, 기병을 대신한 중무장 보병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참주에는 물론 폭군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18세기의 계몽군주와 같았으며 대부분 귀족출신이었고 인심을 얻어 자유시민(평민)과 결탁하여 귀족세력을 억압했기에 참주=독재자=폭군으로 일방적으로 매도당했다는 점을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다. 최초의 참주는 BC 6세기 후반 아테네의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 BC ?∼527)였다. 그는 아테네와 미묘한 관계에 있었던 메가라와의 전쟁에서 명성을 얻어 민중의 지지 속에 BC 560년에 참주가 되었다. 민중을 배경으로 소수 귀족을 억누르니 정권을 빼앗긴 귀족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합법적이며 독재였던 것이다. BC 7세기 오리엔트의 첫 통일을 이루었던 아시리아가 붕괴하고 네 나라로 나뉘어졌는데, 그 가운데에서 리디아에서 화폐가 발명되자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그리스의 폴리스에서도 화폐를 주조하여 부를 이룬 평민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때 많은 도시국가들이 민주정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를 민주정시대(民主政時代 : BC 500년 이후)라 한다. 재산을 모은 평민들이 자신의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여 중무장 보병부대를 편성하자 그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화되었고 사회 기득권 층도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활발한 해상활동을 하던 아테네가 가장 전형적이었지만 이러한 그리스의 정치적 발전과정은 주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아티카 지방과 트로이젠을 비롯한 폴리스 집단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와 스파르타 계열의 폴리스는 이러한 정치적 변화과정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군사 독재주의로 일관하였다. 민주정치 속의 불평등 BC 508년, 민주정치의 봄이 찾아 왔다. 아테네의 민회(民會)가 입법·사법·행정상 최고기관이 됨으로써 민주정치의 서막이 올라 페리클레스(Pericles : BC 461∼429년)시대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민회는 대의제(代議制)가 아니라, 성년 남자 자유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직접 민주정치였다. 스파르타에 비하면 개방적이며 민주적이었지만 아테네의 민주정치도 노예의 피땀 위에 이루어졌고 여성의 정치참여가 배제되어 있었다. 고대 모계사회에서 가부장적 부계사회로 넘어온 데다가 정치적 중심이 왕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도시국가(폴리스)체제가 되자,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주신(主神) 제우스를 폴리스의 수호신이며 각 가정에서는 가장(家長)을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제도의 수호신으로 설정하여 이를 파괴하려는 자는 어느 누구도 형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남성 우월적 사회에서 당시의 자유 남자시민은 노동과 집안 일에 구애받음 없이 정치에 참여하고 문화활동을 즐길 수 있었으며 오직 사회에 책임을 지는 것은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아테네조차 남·녀의 성차별은 심각하여 아버지들이 아이의 양육여부를 결정하였다. 만약 '이 아이는 키우지 않겠다'고 하면 아이를 폐기처분하였다. 다행히(?) 선택된 자녀들은 전적으로 어머니가 맡았는데 남자아이는 7세까지, 여자아이는 결혼할 때까지였다. 일곱 살이 된 사내아이는 어머니의 손에서 떠나 교사에게 맡겨져 교육을 받았는데, 남자아이의 교육 중점은 '건강한 신체, 건전한 정신'이었지만 여자아이는 결혼할 때까지 '요조숙녀(窈窕淑女) 되기'에 모아졌다. 이러한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다른 폴리스에도 확산되어 페르시아 전쟁 때에는 자기 돈으로 무기를 살 수 없었던 무산계급 시민들은 몸으로 때우는 전투에 참가하여 자발적인 힘을 유감 없이 발휘하였다. 그들은 전투함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역할을 하였고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돈 없다고 우리를 무시하면 다시는 힘든 중노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발언권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민주사회는 의무가 있는 곳에 권리도 따른다는 점인데, 전제적인 독재국가에서는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음으로써 자발적인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없다. 우선 바로 눈앞에 있는 채찍만을 두려워할 뿐이다. 아무튼 남자로서 군대가고 전쟁에 참전해야 비로소 진정한 민주시민이라는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었다. 거꾸로 가는 스파르타 스파르타는 맨 마지막으로 남하한 도리아 인들로 구성된 도시국가였으며 그들이 폴리스를 건설하기 전인 BC 1200년경에 미케네 문명(후기 에게 문명)을 멸망시키기도 하였다. 즉 도리아 일파의 정복에 의해서 탄생한 폴리스가 스파르타였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스파르타는 다른 그리스의 일반적 정치적 발전과정과는 전혀 별개의 소수 독재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물론 스파르타의 시민들도 불만을 가졌겠지만 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고 충성의 대상인 권력에 주눅이 들어 으레 그러려니 했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라코니아 또는 라케다이모니아 지방의 주요도시로서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북동쪽과 서쪽은 산악지대가 개방을 가로막아 지역적 폐쇄성이 결국 보수 과두제적 왕정에 머물러 있게 한 요인으로 작용함으로써 전제적 군사 독재로 일관하게 되었으며 참정권을 가진 시민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스파르타의 사회적 특성은 자유로운 창의성과 개성의 발휘를 억압함으로써 시민의 각성과 정치참여를 위한 대중적 투쟁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산계층이 나오지 않았으며 이러한 군국주의적 성향은 곧 문화침체로 이어졌다.
신동호 | 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기억은 어떻게 저장될까 망둥이를 보면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한다. 기억은 단편적인 경험을 체계적인 지식으로 저장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망둥이는 기억력이 약하기 때문에 바로 몇 초 전에 했던 실수를 되풀이한다. 반면 기억력이 뛰어난 인간은 실패의 경험을 되살려 더 잘하게 된다. 창의성도 뛰어난 기억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정보를 기억하고 있는 상태에서 정보가 서로 연관되면서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과학자가 젊어서 이룩한 업적으로 노벨상을 타는 이유는 기억력이 가장 좋을 때 창의성도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 머리 회전 속도가 느려도 많은 것을 알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을 더 믿는다. 이런 사람은 많은 것을 알기 때문에 이 가운데서 필요한 정보를 꺼내서 쓰는 데 걸리는 시간이 느린지도 모른다. 기억은 어떻게 저장될까? 우선 기억은 순간기억, 단기기억, 장기기억 세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전화번호부에서 집 근처 자장면집의 전화번호를 찾아보았다 치자. 책을 펼쳐 본 순간 숫자의 상이 뇌에 1초도 못 되게 잔상처럼 남는다. 이것이 순간기억이다. 우리가 만화영화를 볼 때 실제로는 끊어진 여러 장의 만화를 보는데도 마치 이어진 화면처럼 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마음속에 전화번호를 외우고 번호를 누른다. 번호를 누른 뒤 몇 분 또는 몇 시간 동안 우리는 번호를 기억한다. 이것이 단기기억이다. 다음 날 깨어나면 전화번호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만일 일주일에 한번씩 자장면집에 전화를 걸어 요리를 시켜 먹는다면 이 사람은 몇 달 또는 몇 년 동안 번호를 잊지 않게 된다. 이것이 장기기억이다. 기억 제조공장 - 해마 우리가 눈과 귀 등 오감을 통해 자극 받은 단기기억은 뇌의 원시적 부위인 변연계에 속하는 해마와 그 바로 옆의 편도체에 일시적으로 보관된다. 이 해마란 이름은 모양이 바다의 해마(海馬)와 닮았다고 해서 붙은 말이다. 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해마는 크기가 새끼손가락만하지만 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해마와 편도체가 손상되면 손상되기 전에 한 일은 잘 기억하면서도 최근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따라서 학습도 할 수 없고 지식도 늘지 않는다. 편도체는 행복, 공포, 불쾌감 같은 감정을 맡아 동기를 부여하는 부분이다. 편도체를 없애면 사람은 전혀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 감정과 동기를 만드는 편도체가 왜 기억에 관여할까? 감정이 기억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불쾌한 경험이나 자극, 공포의 기억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경험, 한밤중에 산 속에서 맹수의 푸른 눈과 맞부딪친 순간, 첫 키스의 쾌감을 우리는 절대 잊지 않는다. 이런 일을 기억함으로 해서 다음에 비슷한 위험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게 되고 다음에 또 연인과 만나 그 쾌감을 반복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감정은 기억 강화제이다. 따라서 기억은 차가운 머리가 아닌 뜨거운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또한 재미없는 공부를 기계적으로 할 때보다 흥미에 이끌려 하는 공부가 훨씬 오래 기억으로 저장된다. 해마는 단기 정보가 필요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한다. 해마는 뇌의 기억 제조공장이다. 해마에 단기기억이 일시적으로 저장되는 시간은 불과 5분 정도이다. 5분 안에 단기기억으로 갈지 장기기억으로 갈지가 정해진다. 해마는 뇌에서 신경세포가 가장 활발하게 만들어지는 곳이다. 그만큼 가소성도 뛰어나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자란 쥐를 자극이 풍부한 곳으로 옮기면 쥐의 해마에서는 신경세포가 활발하게 만들어진다. 런던 시내 택시 운전사들은 운전 경력이 오래된 사람일수록 해마의 뒷부분이 크다. 여러 군데를 다니고 다양한 사람과 만나게 되는 택시 운전사는 많은 자극에 노출돼 있기 때문에 해마의 특정 부위가 커지게 되는 것이다. 단기기억 중 단편적 지식은 곧바로 기억에서 지워진다. 뇌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억 삭제 기능이다. 만일 중요하지 않은 단편적 지식을 모두 기억한다면 우리의 뇌는 기억 용량 초과로 결국 멈춰 버리고 말 것이다. 대신 중요한 지식과 경험은 축적됐다가 고등한 인간의 뇌에 해당하는 전두엽에 장기적으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단기기억은 어느 정도의 속도로 지워질까? 독일의 심리학자인 헤르만 에빙하우스는 100여 년 전 실험을 통해 '에빙하우스 망각 곡선'이란 것을 만들어 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곡선에 따르면 암기한 단어는 네 시간 뒤에는 10개 중 5개 정도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24시간 후에는 3∼4개, 또 48시간 뒤에는 2∼3개의 단어를 기억한다. 암기한 단어의 대부분은 잊혀지지만 머리 속에 살아 남은 몇 개의 단어는 비교적 오랫동안 기억된다. 에빙하우스는 망각 속도가 시간이 흐를수록 완만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따라서 공부를 할 때 되풀이해서 복습을 하면 망각 속도가 더욱 완만해져 더욱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단기기억은 언제 장기기억으로 저장되는 것일까? 뇌는 잠자는 시간 동안 학습했던 내용을 정리한다는 이론이 가장 유력하다. 잠을 자면서 뇌에 입력된 정보를 정리하고 필요 없는 기억을 삭제하고 기억을 업데이트하고 새로운 경험을 우리의 장기기억 시스템 속에 통합하는 작업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잠을 잘 때 뇌에 새로운 신경 회로망을 만들어 기억을 저장하는 것이다. 기억은 뗄 수 없는 관계 잠과 기억의 관계를 알아내기 위해 하버드 대학 로버트 스틱골드 박사는 24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밤샘 공부를 한 사람과 공부를 한 뒤 잠을 잔 사람이 그 다음날 얼마나 더 많은 것을 기억하는지 실험했다. 예상대로 충분히 잠을 잔 학생들이 더 많은 것을 기억했다. 이처럼 잠은 장기기억의 형성에 꼭 필요하기 때문에 밤샘 공부는 시험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잠이 드는 순간 마치 불이 꺼지듯 의식이 멈추기 때문에 밤새 뇌가 쉬고 있다고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잠을 자는 동안에도 뇌는 깨어서 활동한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뇌파가 발생하고 렘(REM=Rapid Eye Movement)수면과 비 렘수면이 5∼7차례 반복된다. 특히 잠든 지 한 시간 반쯤 뒤 잠이 깊어졌을 때 시작되는 렘수면 때에는 깨어 있을 때처럼 톱니 모양의 뇌파가 나타난다. 또 눈알을 빠르게 굴린다. 심장도 빨라지고 숨도 가쁘게 쉬고 혈압이 오르고 남자의 경우에는 발기가 된다. 잠을 잘 때 눈이 빙글빙글 도는 렘수면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면서 뇌의 활동이 매우 활발해진다. 렘수면 때에 뇌교는 척추신경을 차단하고 대뇌와 시상하부 쪽으로 신호를 보낸다. 렘수면은 성인보다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서 훨씬 많이 나타난다. 갓 태어난 아기는 전체 수면 시간의 50%가 렘수면이지만 성인이 되면 렘수면이 20%가 되고 노인이 되면 더욱 줄어든다. 렘수면 상태에서는 꿈을 더 많이 꾸기 때문에 흔히 '꿈 수면'이라고도 부른다. 새로운 지식을 더 많이 경험하고 습득하는 어린이가 꿈을 많이 꾸는 렘수면 시간이 길다는 것은 꿈과 기억이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말해 준다. 꿈의 기능에 대해 현재 가장 인기를 얻고 있는 이론도 '기억과 학습 이론'이다. 이 이론은 꿈이 새로운 정보를 메모리 시스템 속에 짜 맞추면서 정서적 자극을 줄이는 동시에 다른 스트레스나 마음의 상처에 적응하도록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고 본다. 즉 꿈을 꾸면서 느끼는 복잡 미묘한 감정은 그날 습득한 경험을 뇌가 정서적으로 소화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물론 다른 주장도 있다. 꿈은 단순히 렘수면 동안 발생하는 정신 활동의 부수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소수의 의견이다. 통계적으로 보면 색다른 경험을 한 날 꿈을 많이 꾼다. 특히 스트레스를 크게 받거나 또는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때 그날 밤 강렬한 꿈을 꿀 가능성이 높다.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을 때 불이 나거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며 쫓긴다는 것이다. 이런 꿈은 며칠씩이고 반복되지만 결국 상처가 치유되면 희미해져 없어지게 된다. 따라 기억능력도 달라져 기억은 있는 그대로 차곡차곡 정리되는 것이 아니다. 환경에 따라 기억은 조작되기도 하고 쉽게 퇴화하기도 하며 전혀 없었던 일을 마치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언어의 간섭에 의한 시각 기억의 퇴화이다. 범행 현장에 있던 증인은 사건 직후 경찰에 불려가 범인의 얼굴을 설명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범인의 얼굴을 자꾸 말로 설명하다 보면 처음에는 또렷하게 기억하던 범인의 얼굴이 희미해지게 된다. 이런 사실을 밝힌 인물은 미국 피츠버그 대학 심리학자 조너선 스쿨러 교수이다. 그는 증인의 기억을 오래 보존하려면 증인을 가만히 놔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쿨러 교수는 강도가 은행을 터는 비디오를 실험 대상자에게 보여주었다. 이어 절반에게는 강도의 얼굴을 말로 묘사하게 했고 나머지 절반은 쉬게 했다. 이어 몇 장의 사진을 보여준 결과 쉰 사람들의 3분의 2는 강도의 얼굴을 구분한 반면 얼굴을 묘사해야 했던 사람들은 3분의 1만이 강도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 이유는 무의식적으로 포착한 얼굴을 말로 설명하는 의식적 활동을 하다 보면 오히려 기억이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사실 얼굴 생김새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다보니 기억이 희미해진 것이다. 영국 플리머스 대학 티모시 퍼펙트 교수는 귀로 들어 기억한 것도 언어로 묘사하게 하면 혼란스러워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퍼펙트 교수는 녹음한 음성을 실험 대상자에게 들려주었다. 실험 대상자 절반은 조용히 있게 했고, 나머지 절반은 음성의 특징을 열심히 쓰게 했다. 그 결과 조용히 있던 사람이 녹음된 목소리를 훨씬 잘 기억했다. 따라서 심리학자들은 경찰이 증인을 인터뷰할 때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턱대고 불러다가 범인의 얼굴과 목소리를 설명하라고 하는 것보다 쉬거나 음악을 들려줘 증인의 기억을 보호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기억에는 오히려 '침묵이 금'인 것이다. 세뇌가 얼마든지 가능한 기억 기억은 광고나 강압에 의해 얼마든지 주입되거나 조작될 수도 있다. 세뇌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미국 어바인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 심리학 교수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박사가 2001년 미국과학진흥협회 연례총회에서 발표한 '벅스 버니 사례'는 기억이 어떻게 조작될 수 있는 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기억에 관한 저서를 모두 19권이나 쓴 전문가이다. 로프터스 교수는 대학생들에게 디즈니랜드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워너 브라더스의 만화영화 주인공 벅스 버니(토끼)를 선전하는 '디즈니랜드의 광고'를 보여준 뒤 어렸을 적 디즈니랜드에 갔던 기억들에 관한 질문을 했다. 그러자 이들 중 36%가 디즈니랜드에서 벅스 버니를 만났다는 대답을 했으며, 상당수가 디즈니랜드에서 벅스 버니를 쓰다듬었다던가 포옹을 했다던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자세한 경험을 얘기했다는 것이다. 디즈니랜드에서는 수많은 만화영화의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지만 벅스 버니는 만날 수 없다. 벅스 버니는 워너 브라더스사의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벅스 버니를 끼워 넣은 '디즈니랜드의 광고'를 보여주자 사람들은 디즈니랜드에서 벅스 버니를 만났다고 대답했다. 이는 기억이 얼마든지 영화 같은 수단에 의해 조작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벅스 버니 사례는 사람들 가운데 약 3분의 1은 허위 기억의 인위적인 주입을 통해 전혀 겪은 일이 없는 경험을 스스로 했다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프터스 교수는 경찰 수사관이 암시나 거짓말을 통해 혐의자에게 하지도 않은 범행을 자백하게 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문하는 사람은 피의자의 마음에 어떤 암시를 심어주는 일이 없게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프터스 박사는 정신적 외상을 가져올 수 있는 사건에 관한 기억도 조작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러시아 출신의 동료 교수들과 일단의 러시아인들과의 대담을 통해 1999년 모스크바 폭탄 테러 사건과 9.11 테러에 관한 조작된 사실을 생생하게 주입시키자 나중에 이들 중 12%가 허위 사실들을 상세하게 설명하더라는 것이다. 로프터스 박사는 또 언론 매체가 지니는 강력한 암시의 힘도 시청자들에게 허위 영상을 심어줄 수 있다면서 얼마 전 워싱턴 연쇄 저격 사건이 발생했을 때 흰색 밴에 관한 보도가 나가자 사람마다 흰색 밴을 보았다는 신고가 들어온 사실을 지적했다. 기억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로프터스 박사는 지난 25년 동안 모두 2만여 명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로 볼 때 '기억이란 쉽게 조작할 수 있고, 깨지기 쉬우며, 되살린 기억 중 일부는 사실이 아니다'고 말한다. 미국 윌리엄스 대학 사울 카신 교수팀이 벌였던 실험도 기억이 어떻게 조작되는지를 보여준다. 연구팀은 컴퓨터를 일부러 고장 낸 뒤 엉뚱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하지만 주위에서 그가 고장내는 장면을 똑똑히 봤다고 우기자 상당수가 혐의를 인정했고, 몇몇은 자신이 어떻게 하다가 고장을 냈는지 설명까지 했다. 주위의 압력이 기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의도적으로도 망각할 수 있어 사람은 의도적으로도 특정한 기억을 망각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주변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학대를 당하고도 이를 잊는 사람이 많다. 아마도 이를 계속해서 악몽처럼 기억한다면 이 사람은 정신질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전쟁처럼 처참한 상황을 겪었거나 집단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경우라 하더라도 모두 정신질환자가 되지 않는 것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을 수 있는 메커니즘이 우리의 뇌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프로이드가 성욕이나 학대의 경험과 같은 기억은 의도적으로 망각돼 무의식의 세계에 자리 잡는다고 설명한 것과도 궤도를 같이 한다. 하지만 이 무의식은 이후의 삶에 지속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런 경우 꿈이나 최면으로 이 기억들을 되살려 치료를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