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곧 그 사람이다(Style is life itself). 한 편의 글을 읽어 보면 글쓴이의 지식과 사고가 드러날 뿐만 아니라 내면의 미묘한 마음까지도 알 수 있다. 나아가 글은 그의 사람됨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도구다. 세계 각국이 대학입시에서 에세이나 논술을 앞 다퉈 부과하는 소이가 거기에 있다. 미국의 에세이, 일본의 소논문, 그리고 유명한 프랑스의 바깔로레아 논술이 모두 그 나라마다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전형적인 논리적 글쓰기의 유형들이다.
우리의 경우도 늦게나마 입시의 다양화와 함께 고전 자료제시형 논술을 정착시켜가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 논술은 특정교과목의 지식을 물을 수 없으므로 통합교과형 논술인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논란이 일고 사회적 갈등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과연 그 논란이 교육적인가.
제대로 된 글쓰기 교육이 정착된다면, 그것은 공교육의 본령에 걸맞으며 우리 교육이 기본에 입각해 제자리를 찾는 모멘텀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논리적인 글쓰기는 민주시민이 지녀야 할 건전한 사회의식과 비판정신을 함양하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입시에서 교과서 지식만을 반복 암기하고 신문 한 줄 읽지 못하게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범교과적 논술 또는 한국형 고전 논술이 시작되고부터 고전을 읽고 그 쟁점을 현대의 사회문제에 적용하는 훈련을 위해서 NIE 활용 방식이 필수가 된 것이 증거가 된다.
논술의 전제가 되는 원천은 폭 넓은 독서다. 글 속에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려면 자신이 읽은 서적에서 그 자료를 가져 올 수밖에 없다. 7월에 끝난 1기 교육혁신위에서도 ‘독서이력철’ 활용을 제시한 것도 공교육의 기본을 환기한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자. 우리가 바라는 교육의 기본은 초등교에서 말하고, 읽고, 쓰고, 셈하는 기본 능력을 함양하면서, 중학교에 이르도록 폭 넓게 독서하게 하며, 고교에서는 독서와 함께 드디어 비판적이고 논리적인 서술을 해내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글쓰기 훈련을 통해서 좀 더 창의적인 인재를 길러내는 수월성 교육도 함께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만 덧붙이면, 우리 교육에서 객관성과 편의성만 고려해 수십 년간 계속된 4지선다나 5지선다형 찍기나 골라내기식 문제로 평가하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야만 우리 사회가 단순하고도 획일적인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근본이 이러함에도 치우친 관념에 빠져 지난해에는 주요 사립대의 논술을, 그리고 올해는 발표도 되지 않은 서울대 논술을 가지고 본고사로 몰아서 점거 농성까지 하는 세력이 있는 것은 온당치가 않다. 대학의 자율성 침해는 물론이고 고교 교육이 업그레이드되는 계기의 면에서도 아쉽다. 아울러 문제 제기의 비교육적인 방법도 우세스럽고, 국민적 여론의 면에서도 독선적인 것이다. 나아가 교육부의 가이드라인 제시니 사후 심의제니 하는 방식도 주견 없이 흔들리며 규제의 고리를 난마처럼 얽히게 하는 요소다. 법제화 운운하는 일부 정치권의 모습은 우습기조차 하다. 모두 재고해야 한다.
대학은 고교와 대화하고 섬세하게 교육과정을 고려해 수준 높은 논술 문제를 자율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고교에서는 일부 학교에서 적절히 시행되는 논술 지도 방식을 정착시키는 노력에 힘써야 한다. 서울시교육청의 경우처럼 서술․논술형 평가의 단계적 확대로 2007년에는 50%까지 내신 평가를 서술형이나 논술형으로 바꾸면 우리 교육이 교육력 면에서 한 계단 올라서는 계기가 될 것이다.
끝으로 우리 교육의 고질병인 사교육 문제는 본고사 사교육, 수능 사교육, 내신 사교육, 이제 논술 사교육까지 어떤 하나의 입시 방식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 모두의 문화적인 사유 틀의 문제이지, 특정 대학의 입시 방식의 문제로만 떠넘겨서는 해결되기 어렵다.
오히려 논술은 오랜 독서와 쓰기의 훈련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자연산 농산물일지언정, 예상 답을 암기해 단기간에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공산품은 아니다. 적어도 대학은 그런 정도는 가려 낼 수 있는 문제의 제시와 평가의 안목을 갖출 것이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