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출근하시나 봐요?” “예, 손주가 벌써 이렇게 컸나요?” “예, ○○아,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아이고, 참 많이 컸구나. 오늘은 보라색 예쁜 공주 옷 입었네!...” 아침 시간에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주민 간에 나누는 인사와 대화다. 가끔 이웃에 따라서는 침묵의 어색한 순간을 지나는 사람도 있지만 요즘은 대부분 주민들 사이에 인사를 나누고 대화하는 분위기가 정착된 것 같다. 이렇게 기본적인 인사말을 나누면 하루의 출발이 상큼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상호 간의 관심과 기본예절이 공동체에 주는 긍정적인 효과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우리 ○○이가 좀 늦게 일어났어요!” “어서 오세요, 괜찮습니다.... 다녀오세요~” 올해 2월말까지 어린이집에서 아침마다 나누던 인사다. 항상 아침에 컨디션 난조를 보이는 아이를 품에 꼬~옥 앉아 주면서 달래고 또 상냥하고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는 어린이집 보육교사들이 있다. 3월 초에는 유치원에 진학하여 아이는 등하원이 달라진 환경에 적응을 힘들어 했다. 하지만 아침에 유치원 현관에서 선생님들의 다정한 인사를 받고 순간 아이의 기분이 신속히 달라지는 것을 목격한다. “안녕하세요?” “안녕, 어서와~
요즘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노작(勞作) 활동이 사라져 가고 있다. 단적인 사례로 학생들의 청소 시간이 없어진다. 이는 우리 교육의 체계상 공부하기도 힘든 아이들에게 무슨 신체적 에너지를 허투루 낭비하는가에 대한 학부모의 열렬한 비난과 학생 인권 강화 측면에서 시작된 결과라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실습 체험이 이론으로 대체되고 교무실은 교사들이 청소하거나 청소 용역을 두어 관리를 한다. 이는 학생과 학부모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따라서 전례적으로 학생들에게 노작 활동의 의미를 부여하거나 봉사 시간을 부여하는 부차적인 활동도 점차 폐지되어 가는 추세다. 이는 불합리한 관행에 대해 교사들의 교육적 성찰을 요구하고 나아가 학생 지도의 금기사항으로까지 지적되고 있다. 그 결과 요즘은 교무실에서 학생들을 만나기 힘든 상황이다. 그렇다면 학생의 노작(勞作) 활동이 사라진 학교는 과연 그에 합당한 교육적 성과를 얻는가? 세계적인 교육학자이자 러시아의 교육사상가인 바실리 수호믈린스키는 선생님에게 드리는 100가지 제안에서 “나는 오랫동안 교육을 하면서 노동이 지적 교육에서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을 확인했다. 아이들의 지혜는 그의 손가락 끝에 있다.
왜 교육과 전통시장을 연계하는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상대를 배려하고 가진 것을 나누며, 상호 간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고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는 최적의 배움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서관, 박물관, 전시장, 회사, 관공서 등 많은 곳도 배움의 산실일 수 있다. 하지만 다시금 곳곳의 전통시장을 돌아보는 것이 어떠한가. 그곳엔 사람 사는 냄새가 있고 삶의 흔적과 시끌벅적한 소리, 그리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짓이 있다. 그러한 생생한 삶의 현장은 교육적으로 ‘살아있는 배움터’가 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옛 장터에는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와 기술이 있다. 지혜로운 상인은 언뜻 보기에는 손해 볼 것 같지만 시장에 나온 사람들에게 따뜻한 정을 베풀어 결국 구매를 유도하고 다음에 다시 찾아오게 하거나 다른 물건을 하나라도 더 사게 만든다. 서비스도 좋다. 구매한 물품을 정성껏 포장해주고 비닐봉지를 한 겹 더 씌워서 들고 가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해준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상인들의 훈훈한 인정이 그리워 재래시장을 습관적으로 찾아간다. 필자는 그곳에서 한 가지 물건 구매의 철칙을 준수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서민의 삶을 대표하
사랑하는 ○○○중학교 학생 여러분, 오늘은 2023학년도 1학기의 뜻깊은 여름방학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그동안 한 학기 동안 여러분은 열심히 배우고 자기주도학습을 하고 또 안전하고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함으로써 큰 과오 없이 잘 지내왔습니다. 한때 TV에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던 광고 카피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에게 패러디한다면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여, 충분히 쉬어라”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은 ‘잘 놀 수 있는 역량’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여러분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중요한 미래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논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휴테크’의 전문가 김정운 박사는 일찍이 “잘 노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잠시 여러분 주변의 어린이들을 보세요. 그들은 놀 때 진정으로 행복해 보이고 창의력과 사회성이 발달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은 잘 놀 줄 모릅니다. 왜냐면 어른들이 ‘놀지 못하는 아이’로 만들기 때문입니다.바로 여러분이 한때는 그런 어린이였습니다. 이제 산과 바다를 찾아 충분히 쉬면서 호연지기를 키우고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세요. 또 자신이
세상에는 참 아름다운 가치(價値)들이 존재한다. ‘자유, 평화, 행복, 생명, 나눔, 사랑, ....’ 말만 들어도 저절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인간이 만든 유의미한 가치들이다. 요즘은 많은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행복’을 말한다. 한때 일본의 인기 작가로부터 시작한 ‘소확행’이란 용어가 우리 사회에 널리 회자된 까닭이기도 하다. 이처럼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이후 작금에 이르기까지 일상에서 우리가 가장 추구하고 싶은 인간의 드러난 성취욕구인지 모른다. 흔히들 ‘행복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내가 행복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많은 아름다운 가치들을 실천하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들보다 더 어려운 누군가에게 작은 사랑을 베풀어 얻는 행복은 더욱 숭고한 가치를 내포한다. 지역사회와 어느 고등학교가 연대하여 교육 현장에서 작은 사랑을 나누고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선순환하는 아름다운 선행(善行)이 있어 이의 교육적 의미를 제기해 본다. 인천광역시에 소재하는 ‘계양산 전통시장’은 지역사회에서 30년의 역사를 품고 있다. 수년
철학자 안병욱 교수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만나는 최초의 스승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인생의 스승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모든 교육의 시작은 가정에서 출발함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어머니의 훌륭한 가정교육을 소중한 양육으로 간주해왔다. 중국의 맹모삼천지교는 동양의 상징이었고 한석봉의 어머니와 이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가정교육도 동방예의지국의 소중한 표상이었다. 그밖에 근현대를 거치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훌륭한 어머니의 격려와 위로를 받고 자란 자녀들이 시대를 풍미하는 영웅이자 큰 인물로 성장한 것은 역사의 기록에 남아 회자(膾炙)되고 있다.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토니 블레어 전(前) 수상은 부친이 법학 교수이고,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변호사임에도 불구하고 가정교육의 일환으로 대학 입학 전에 갭이어(Gap Year) 시기를 이용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흥미와 적성을 찾고자 프랑스 파리라는 낯선 곳에서 웨이터로 일도 해보고 사람들과 부대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던 다이애나비도 귀족 출신이었지만 찰스 황태자와 결혼 전에 베이비시터와 웨이트리스 등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런 경험은 나중에 두 왕자를 키우면
1900년 초 인도의 수상이자 철학자였던 마하트마 간디는 리더(Leader)들이 해서는 안 될 7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이 원칙들은 우리의 삶과 교육에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중에서 “인간성 없는 과학(science without humanity)”과 “인격 없는 지식(knowledge without integrity)”, 이는 교육이 가장 경계해야 할 사항으로 지적할 수 있다.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융합적 기술이 활성화되면 될수록, 상업주의나 경쟁 원리에 빠져 자칫 인간성 없는 과학 발전과 인격 없는 지식이 횡행하기 쉽다. 과학과 지식은 인간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인간의 삶의 질과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은 오직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나 상업주의적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제4차 산업혁명의 확산은 “인격 없는 지식”에 의한 “인간성 없는 과학”을 발전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미래학자들은 제4차 산업사회가 가져다줄 인간 소외와 인간의 정체성 상실, 그리고 양극화 등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왜냐면 양심과 인격이 빠진 지식은 결코 산지식이 될 수 없고 윤리와 인간성이 배제된 과학은 인류를 위
청소년은 아직 학문적, 정서적으로 성장이 완성되지 않은 마냥 ‘미성숙한 존재’라는 의식을 전환해야 한다. 이는 현업에서 생활지도를 실행하는 처지에서 볼 때 교육의 본질적인 목표를 구현하는 데 배치되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어른의 편협한 시각이 문제 키워 현실에서 교사가 학생들을 미숙한 존재로 간주해 발생하는 부작용이 많다. 우선 미숙한 학생들이 성인인 교사의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학생들의 사고를 낮게 취급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학생들은 미숙하고 그런 학생들을 성숙한 인간으로 키우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거기엔 자연히 성숙한 정도에 따라서 위계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 성숙도에 따라 점수를 부여하게 된다. 학교생활기록부 또한 이런 관점에서 관리가 되기 마련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나이가 많은 사람보다 미숙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의 존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주어진 것이고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는 어떤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인간 존엄성은 자기를 실현하게 하는 힘, 자유를 성취하게 하는 힘, 윤리적인 시민으로 자라나게 하는 힘에서 지켜질 수 있다. 오늘날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선은 편협한 측면이
“상대가 있는 싸움에서 경쟁을 그만두라.” 이 무슨 어설픈 소리인가? 하지만 경쟁에서 크게 이겨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진실이다. 누군가 상대방을 두고 그것도 고만고만한 ‘도토리 키재기’ 하듯이 소모전을 벌이는 경쟁은 득(得)보다 실(失)이 큰 결과를 낳는다. 이는 어느 단계까지는 필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본격적인 공부 단계에 진입하면 경쟁자 같은 것은 마음속에서 지우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나와 내 공부에만 철저하게 몰입할 수 있다. 또한 마음속에서 경쟁자를 없애는 까닭은 스스로 정한 경쟁자는 그 사람보다 조금만 더 잘하면 될 것 같은 비교의 함정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무한 성장에 이르러야 하는 공부에서는 그저 ‘반짝 효과’로 머무를 수만은 없다. 중요한 것은 자기와의 경쟁을 치열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에서 이겨야 할 유일한 사람은 바로 자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기와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첫째, 과거의 자기와 경쟁해야 한다. 모든 면에서 어제보다 나은 자기가 되려고 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특정 과목일 수도 있고 공부하는 태도일 수도 있다. 이때는 조금 욕심을 부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면에서 더 나아지려는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나요?” 이는 많은 청소년에게 궁금한 질문이다. 시험을 위한, 시험에 의한, 시험의 나라에서 태어나 공부를 잘하는 것만이 최고의 목표이자 성공의 척도인 대한민국에서 보면 이보다 당연한 것도 없다. 그렇다면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한마디로 효율(效率)이 중요하다. 정해진 시간 내에 하나라도 더 머릿속에 넣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을 들여 공부해도 더 효율적으로 한 학생이 점수를 더 잘 받기 마련이다. 이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세계적인 대기업, 성공한 기업에서 일하는 직장인은 열심히 그리고 집중해서 일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일하는 방식은 한마디로 바로 효율이다. 즉, 양보다는 질에 집중하여, 효율적으로 일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인가? 여기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재미와 열정 그리고 주인의식이 그것이다. 재미를 느껴야 열정을 가질 수 있고 주인의식이 있어야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몰입해서 효율적으로 일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재미있는 일이란 없다. 예컨대 과거 ‘개그 콘서트’나 ‘코미디 열전’ 같은남을 웃기는 것으로 유명한 TV 프로그램도
부모가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오늘 학교에서 뭐 배웠니?”하고 물을 때, 아이가 “나 오늘 행복한 수업 했어요”라고 대답한다면? 대한민국의 부모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의아해할 것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부모들이 이런 엉뚱한 대답에 익숙한 국가가 있다. 왜냐면 학교 수업에 ‘행복’이라는 과목이 있기 때문이다. 즉, 아이가 “오늘 행복했어요”라고 대답하는 날은 ‘행복’ 수업을 한 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생각에 빠져본다. 행복을 배운다니? 이런 학교가 있나? 그렇다면 이 수업 시간에는 도대체 무엇을 할까? 의문은 꼬리를 문다. 그렇다면 어느 나라 이야기인가? 바로 독일의 ‘행복’ 교육이다. 언뜻 들으면 위 사례는 최근 우리나라의 고등학교에서 실시하는 학생 중심의 교과 선택제인 고교학점제를 떠오르게 한다. 왜냐면 특별한 교양 선택 수업 시간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에겐 전통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독일은 이미 2007년부터 초등학교 과정에서부터 이런 교과를 운영하고 있다. 독일은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모범적인 환경교육 못지않게 인간의 행복을 교과로 직접 가르치는 강대국이자 교육 선진국이다. 우리는 이를 단지
최근 우리 사회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거기엔 온통 불공정이 화두였다. ‘조국 사태’에서 빚어진 입시의 불공정 논의는 정권의 명암을 가르는 분수령이 되었다. 2022년 대통령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여야의 후보들도 온통 ‘공정’만을 외쳤다. 불공정을 바로 잡겠다는 공약을 마치 통과의례처럼 똑같이 내세웠었다. 과거에는 꿈꾸지 못했던 ‘공정한 경쟁’을 내세워 당의 대표가 된 젊은 정치인도 있었다. ‘공정과 상식’을 외치며 국민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그렇다면 공정한 사회를 실현하면 우리 사회는 좋은 사회가 될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과 노인 빈곤률, 그리고 매우 낮은 수준의 행복지수를 보여주고 있다. 그뿐이랴. 가장 많은 청소년이 우울증을 앓고 있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일하다 죽어가고 있으며 가장 낮은 출산율은 미래의 국가 존재조차 불확실하여 세계에서 가장 먼저 소멸할 국가로 예측된다. 설상가상으로 현재 우리는 사회집단의 갈등조차 가장 극심한 나라다. 그야말로 평화로운 일상을 찾아보기가 힘든 나라가 되었다. 이것이 2021년 7월,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격상된 결과
우리말에 ‘잘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속담이 있다. 어떤 것도 결과는 시작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물론 시작이 좋지 않으면 결과도 좋지 않을 것이기에 처음부터 잘하라는 일종의 권면의식이 담겨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를 반영하듯 어려서부터 가치관 교육으로 결과가 행복한 나라가 있다. 부탄은 히말라야산맥 동부에 자리한 인구 75만 명, GNP 3000달러의 작은 나라다. 이런 국가 규모에 비해 부탄은 일찍부터 그 나름의 명성이 자자하다. 공동체 의식 강조하는 부탄 그 이유가 뭘까? 이 나라는 거친 산악지역이지만 신선한 공기와 맑은 물이 흐르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풍요로운 느낌보다는 척박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최근에는 수도 팀푸를 비롯해 푸나카, 공항 도시 파로 등 주요 도시는 개발이 한창이지만 아직도 고속도로는 왕복 2차선인데다 상하수도 시설 같은 도시 인프라도 매우 열악하다. 전통시장에서 판매하는 농산물들은 볼품이 없으며, 싱싱한 생선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최근 경험에 의하면 사람들의 인상은 하나같이 순하고 정겨웠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빛나는 미소를 간직한 사람들, 그들의 마음 역시 미소처럼
독자: 에세이를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자: 에세이는 ‘유혹의 글쓰기’입니다. 독자에게 저자를 궁금하게 하거나 글을 궁금하게 하면 됩니다. 하지만 ‘많이 읽고 많이 쓴다.’ 이것은 글쓰기에서 거의 절대적인 진리가 아닐 까 생각합니다. 여기에도 분명히 팁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구체적으로 쓸 것’입니다. 독자: 어릴 때부터 내 꿈은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요? 저자: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하여 제가 생각한 76가지의 작은 팁들을 제시하였습니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다만 술술 넘어가는 글, 매력적인 글은 조금 공을 들여야 합니다. 필자는 책을 읽고 사색에 잠기기를 좋아한다. 내향적인 성격 탓으로 변변한 잡기(雜技) 하나 없이 놀 줄 모르는 어른이 되었다. 당연히 직장에서의 스트레스가 크고 이를 극복하고자 다양한 지혜를 찾았다. 그중 하나의 수단이자 삶의 애환을 치유하고 지친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미친 듯이 독서에 몰입했다.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친다’라는 말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왜 읽기만 할까? 나도 글을 쓰면 안 될까? 라는 생각이 스멀스
일찍이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은 이기적임을 역설했다. 그렇다면 그런 인간들이 모인 사회는 얼마나 더 이기적일까? 이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바와 같다. 인간은 권력, 명예, 그리고 부를 추구하며 종국적으로 이것들이 가져다준다고 믿는 행복을 구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부모와 학교는 그런 것이 많을수록 편안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요술 지팡이라고 가르친다. 출세와 성공 지향적인 우리 사회는 특히 이러한 이기적인 성향이 매우 심하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목표를 성취하도록 몰입하는 학교 공동체는 과연 교육기관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 볼 때 학교는 완전한 ‘야만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있다. 이는 유럽에서 모든 불공정한 사회 시스템을 혁신한 6.8 혁명 당시 독일 교육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도르노가 교육을 통한 경쟁을 지적하며 “경쟁은 야만과 동격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경쟁은 이미 한국 사회에서는 ‘국시(國是)’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초중고 교육은 가장 공정한 경쟁이라 착각하는 시험 제도, 즉대학수학능력시험의 대비에 따라 한 줄 세우기에 익숙하다. 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