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7월 24일 신라시대의 문무왕릉이 경북 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인 동해에서 발견됐다. 토함산 석굴암으로부터 일직선상에 있는 수중에 십자형 암석이 석관 형태로 놓여 있다는 것이다. 가운데 못에 깔려 있는 거북이 등 모양의 큰돌은 길이 3.7m, 두께 1.45m, 너비 2.6m로 그 밑에 문무왕의 납골을 모신 용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됐다. 이 석관은 주위의 돌과 판이하게 다른데다 동해의 맑은 물이 30㎝ 정도로 덮여 있어 물 밖에서도 잘 보인다. 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의 결론을 토대로 곧바로 사적 158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이 대왕암은 문무대왕의 수중릉이 아니고 산골처라는 주장이 학자들로부터 계속 제기돼 왔다. 바위가 인공이 아니라 천연석처럼 보인다는 주장이 가장 큰 논제의 주안점이었다. 그들은 해중릉침의 복개석으로 주장된 돌은 사리장치(舍利藏置)를 덮은 인공적인 석관 덮개가 아니고 자연석임이 틀림없다고 재차 확인했다. 복개석 밑바닥은 돌과의 사이에 공간이 뜨고 그 일부분만 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왕암이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장소라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능침 구조는 아니며 그 일대의 바다에는 대왕암에 버금갈 전설과 신비
'팔만대장경'이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251년 완성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목판은 총 1513종, 6844권, 8만4685매로서 국보 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표적인 대장경판 한 장의 크기는 가로 72.6㎝, 세로 26.4㎝, 두께 3㎝ 정도인데 양끝에는 나무 조각을 붙이고, 네 귀퉁이에는 구리 장식을 달았다. 글자는 대개 23줄로 각 줄마다 14자씩이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은 조선 초기 개수한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 건물의 중요 기능은 경판을 보호하고 장기간 보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적절한 환기와 온도 및 습기 제거를 위해 건물 외벽에 붙박이 살창을 두었다. 특히 벽면의 상단과 하단, 건물의 앞면과 뒷면의 살창 크기를 달리함으로써 공기가 실내에 들어가 상단과 하단부를 돌아 나가도록 절묘한 건축기술을 발휘했다. 이 간단한 차이가 공기의 대류는 물론 적정 온도를 유지하게 한다. 경판전 안에서 향을 피워보면 향이 각 전체를 한바퀴 돈 뒤에야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판고 전체의 온도도 1.5도 차이밖에 나지 않으며 더구나 가장 추울 때와 더울 때의 차이가 10∼15도를 넘
고려자기는 황록·황갈색도 있지만 비색청자가 가장 뛰어나다. 비색이란 중국 월나라에서 나던 청자로 당나라 때 천자에게만 바치던 것이다. 이 색의 특징은 맑고 선명하며 깨끗하고 윤기가 도는 것이다. 고려의 순청자기술은 12세기 전반에 절정에 달했다. 유약을 입히는 기술이 세련되어 날렵한 자태를 가질 수 있게 했고 여기에 상감청자까지 개발된다. 상감이란 쉽게 말해 그릇표면에 무늬를 파고 그 속에 백토나 흑토를 메워 청자의 푸른 바탕에 백색과 흑색의 무늬를 장식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의 개발로 고려청자는 그 아름다운 푸른색에 흑백의 선명한 도안이 화사하게 장식되기에 이르렀다. 상감은 금속과 나전칠기에서 이미 보편화된 기법이지만 청자에 응용되어 세계 도자사에 있어 독보적인 장식기법으로 인정되고 있다. 고려청자는 많은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흙과 불의 조화이지만 그 비밀은 아직도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최근 청자의 비취색을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으나 엄밀한 고증과 현대 과학기술을 동원해도 100% 비색(秘色)을 재현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1982년 강진에서 이색실험이 있었다. 요업공학과 교수들이 청자조각을
일명 에밀레종이라고 불리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의 몸체 높이는 2.91미터이고 종걸이 높이는 0.65미터며 전체 높이는 3.7미터다. 바닥 면의 직경은 2.2미터나 된다. 에밀레종은 그동안 구리 12만근으로 만들어졌다는 삼국유사 기록에 따라 대략 20톤으로 무게를 추정해왔으나 1997년의 정밀측정에 의해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에밀레종이 세계적으로 중요한 한국유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나라 종이 갖지 못한 독특한 특성 때문이다. 흔히들 동양의 범종은 그 형식과 특징으로 보아 중국종, 한국종(주로 신라 및 고려시대 범종 형식) 및 일본종으로 구별하는데 한국 범종은 다른나라의 범종과는 비견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다. 우선 8세기의 한국 범종이 동아시아 어느 나라 종보다 훌륭한 것은 범종 재료의 배합비가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 청동 제품은 구리, 주석, 납을 섞어 만들지만 용도에 따라 비율이 달라지는데 한국의 청동에는 유난히 아연의 함량이 많다. 아연은 섭씨 900도에서 끓기 때문에 아연이 많이 들어 있는 청동을 합금으로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국의 청동이 기술적으로 중국이나 일본보다 우수한 것은 자유자재로 우수한 합금을
신라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735년 세운 석굴암은 중앙의 본존불 높이가 3.4m에 이르며 대좌까지 합쳐 5m나 되는 큰 불상으로 신체의 비례가 알맞고 각 부분이 부드럽고 세련된 솜씨로 조각되어 있다. 석굴암이 세계적으로 우수하다고 인정받는 것은 신라 사람들의 지혜와 재능을 짜내 만든 종합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열대지방인 인도에서는 부처를 서늘하게 모시기 위해 기원전 100년경부터 바위에 굴을 파 그 속에 탑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이 풍습이 4세기경 중국에 전해졌다. 이러한 석굴 신앙이 7, 8세기초 우리나라에 전해졌지만 신라에는 큰 바위산이 없었기 때문에 신라 예술가들은 새로운 방법을 창안했다. 산을 파내어 굴을 만들고 조각된 돌들을 조립한 후 흙을 덮어 중국이나 인도의 석굴사원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다. 인공으로 만들어진 석굴에 예술적으로 조각된 불상들을 배치한 곳은 세계에서 오직 석굴암뿐이다. 더구나 석굴암은 외국에 있는 대형 건축물이나 유산에 비하여 결코 떨어지지 않는 건축상의 특수성이 있다. 정교함과 화려함 때문에 찬사를 받고 있는 스페인의 아람브라 궁전에 사용된 조각품의 재료는 석고다. 석고판을 정교하게 찍어내어 천장이나 벽에 붙인 것으로 시공
우리 유산에 대해 우리는 부정적 선입감을 갖고있다. 일방적으로 우리 것이 최고라고 과장하는 것도, 얼토당치 않은 비난과 혹평으로 매도하는 것도 결국 우리 것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세계 유명 관광지에서 한글 안내 책자를 접하거나 관광 업소 종업원들이 한국인만 보면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면서 물건들을 사라고 따라 다니는 것을 경험한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유산과 외국의 유산을 비교할 기회가 많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유산들이 외국 유산에 비해 상당히 과장되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한국은 1000년 전에 지어진 건물도 변변하게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4500년 전,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은 2000년이 넘었고 로마의 고대 유적 모두가 한국에서 삼국이 세워지기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이르면 자연히 목청을 높인다. 우리의 문화 유산과 외국의 유산들을 객관적으로 비교해 볼 때 한국 것이 세계에서 최고라고 자랑했던 것이 창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빠짐없이 우리 조상들을 욕한다. 그 동안 변변한 유산하나 없이 항상 강대국에 침략 당했으며 일제 시대에는 합병이라는 수모도 당했다는 것이다.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