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명교사가 되리라.’ 내가 다니던 교대에는 일명, ‘센츄럴 파크’라는 작은 동산이 있었다. 계절에 따라 다양한 색깔의 꽃잎과 향기를 내는 꽃동산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이 바로 ‘나는 무명교사가 되리라’라는 글귀가 적힌 돌기둥이다. 따스한 봄날, 친구와 우연히 ‘센츄럴 파크’를 걷다가 아주 키가 작고 무수히 많은 가지가 뻗이 있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매화꽃처럼 빛을 발하는 하얀 꽃을 발견했다. ‘천리향.’ 그윽한 향기가 천리까지 간다고 해서 ‘천리향’이라고 했다. ‘그럼 나도 이 꽃처럼, 나의 향기를 천리까지 뻗을 수 있게 해야겠구나!’ 그런 순수하고 굳은 교직의 사명을 ‘천리향’ 향기에 실어 멀리 날려 보냈었다. 졸업을 하고, 학교에 발령을 받고, 나는 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천리향’ 향기처럼 교육의 향기를 멀리 보내겠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모든 것을 다 뿌리치고 훌륭한 교사가 되기 위해 밤낮없이 학교생활에 충실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곳에서 ‘교사의 전문성’은 무시되었고, 나 역시 더러 교직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되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 … 학생과 학부모의 무시 학교에서 학생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담임교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선생은 타락한 존재다. 스승의 날이면 그래도 어떤 녀석이 초코파이 한 조각이라도 갖다 주겠지, 하지정맥이 불거진 채 수업을 하다 잠시 자습을 시키는, 그러다 버릇없는 녀석을 혼내면 도끼눈으로 대드는, 그 녀석을 욱하는 마음으로 한 대 쥐어박으려다 참아야 하는, 그러다 인터넷 쇼핑으로 마음을 달래고, 퇴근시간만 살피는 선생은 타락했다. 회식 자리가 있어도 대충 밥만 먹고 일어나는 선생들, 자조 섞인 농(弄)으로 명퇴 운운하며 퇴직금을 따지다 이튿날이면 서둘러 출근하는 선생은 배알도 없이 타락한 존재다. 인정한다. 선생이 선생 노릇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사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잊은 것처럼 선생 역시 사도헌장을 망각했다는 것을. 그저 몸 사리며 내 할 일만 하고 다른 것엔 눈 감는다는 사실을. 창의인재나 인성은 행정서류로 적당히 철해 놓고 수업도 대충한다는 것을. 그러나 이 모든 게 어찌 선생 탓이랴. 선생보다 앞서 세상이 비리 공화국인 것을. 선생의 발목을 잡고 선생을 한낱 월급쟁이로 흔들어왔다는 것을. 언론이 선생을 발가벗기고 욕보여도 선생은 그저 침묵하였음을 인정한다. 인권조례다, 무상급식이다 진보의 완장을 두른 사람이 교권을 훼손해버린 무식한 세
오늘날 교사들은 힘들다. 일반 직장인들보다 일찍 학교에 출근하여 등교지도, 아침 조회에 이은 학생 출결파악, 수업준비, 하루에도 몇 건씩 쏟아지는 각종 행정 공문 처리, 수업과 학생생활지도에 관련된 각종 교내 위원회 참석, 교사마다 할당된 고유 업무를 위한 각종 출장, 학생 수행평가 준비 등을 하면 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이뿐만이 아니다. 직장인들에게는 달콤한 휴식시간인 ‘점심시간’에는 급식지도를, 일반 직장인들의 시기어린 질투의 대상인 ‘방학’에는 학생지도와 교원능력 향상을 위한 각종 연수에 참석한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교사란 어떤 존재일까?’ 교사는 계층 및 사회 통합을 위해 가장 중요한 활동을 하는 ‘최후의 보루’이자, 학생 한사람 한 사람의 고귀한 인격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성직(聖職)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獨學孤陋(독학고루)라는 말이 있다. ‘스승이 없이 혼자 배운 사람은 식견(識見)이 좁아 몹시 고루(固陋)함’을 일컫는 말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역시, 같은 의미이다. 즉, 훌륭한 스승 밑에서 배우고 자란 사람이 큰 인물이 된다는 조상들의 유언이다. 고대 헬레니즘 세계의 창시자였던 ‘알렉산드
모든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eudaimonia)에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은 개인으로 하여금, 이성적이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설파하였다. 결국, 교육은 인간에게 행복을 갖게 하는 기술이며, 교육을 통해 모든 인간이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때, 국가도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교육은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정한 고민보다는 사회변동이나 시대적 조류에 따라 교육제도나 시스템을 거침없이 구축해 왔다. 그 결과, 학교는 지금까지도 수직적인 교육체제의 틀에서 중앙교육행정과 지방교육행정의 교육정책 및 시책에 따라, 순응만 하면서 교육 본래의 기능을 상당부분 상실한 측면이 있다. 교육 정치화의 현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교육정책은 교육전문가 집단인 현장교원 의견을 무시하고, 정치권 및 중앙정부의 정책 입안자들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 각종 교육정책이 남발되었고, 일방적 정책시행과정에서 교육적 갈등과 문제가 나타났으며, 교육의 정체성은 상실되었다. 심지어, 교육정책 성공의 지름길이 오직, ‘교원들과 직결되어 있다’는 식의 허약한 논리들을 앞세워, 교원들을 개혁의 대상으로 몰아가는 진단 오류의 악순환을 되풀이
‘교사로 살아가기’ 참 힘들다. 교사에 대한 존경심은 고사하고, 자존심에 상처받거나, 폭행당하고, 협박받는 사례도 종종 발생하는 요즘 세상인지라, 많은 교사들이 학생지도의 어려움을 넘어, 두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오죽하면, ‘교사 수난 시대’, ‘교사는 슈퍼 을(乙)’이라고 말할까.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이렇게까지 교사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교사의 말에 잘 따르고 행동했었다. 그러나 교육이 수요자 중심의 경제논리로 취급되면서, 교사에 대한 예우와 교권이 무너졌다. 또한, 교원노조의 출현으로 교직을 보는 관점이 성직관(聖職觀)에서 노동직관으로 급격히 변하고, 교사존경에 대한 의식이 흔들리게 되었으며, 교사도 하나의 직업일 뿐이라는 인식이 교권 추락을 가속화했다. 교사를 향한 갑질, 위축되는 교육활동 ‘좋은 교육’은 우수한 교사에 의해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육정책들은 교사의 사기진작을 뒤로하고, 교사의 지도 권한인 교권을 경시하면서 수요자 중심에만 매달렸다. 그 결과, 교실에서 잠자는 학생을 깨울 수도, 면학분위기를 흐리는 학생을 제재할 수도 없는 교실붕괴로 이어졌고, 학교폭력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한 마디로 교사가 학생을 통제할
요즘 교육당국의 ‘황당한 시간정책’을 보고 있노라면 공부를 못 하는 애들이 시간 계획만 세우다 세월 다 보낸다는 우스갯말이 떠오른다. 시간정책이란 임기 안에 성과를 내려는 교육부와 교육감들의 9시 등교, 9월 신학기제, 시간선택교사제, 방학분산제, 자유학기제를 말한다. 이들의 정책엔 ‘교육과정의 정상화’와 ‘공교육의 만족도 향상’ 등과 같은 거창한 구호가 걸려 있다. 그런데도 2014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초·중·고등학교 학생의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24만2000원으로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학생 수가 648만1000명에서 628만6000명으로 줄었음에도 말이다. 혼동과 혼란으로 몰아넣는 어수선한 교육정책 5가지 교육감 직선제가 시행된 지도 9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학교는 혼란과 혼동의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가뜩이나 무상급식, 혁신고, 자사고, 학생인권조례시행으로 어수선한 학교는 언제쯤이나 정돈된 상태에서 운영될 수 있을지…. 나침반을 잃은 배처럼 오락가락하는 한국교육을 위한 평형수는 존재하기는 할까? 시간정책 1 _ 9시 등교 최근엔 몇몇 교육감들이 들고 나온 9시 등교 지침은 신통한 반응을 못 얻고 있다. 몇 몇 학교가 시행하고
“선생님, 제가 그냥 양보할게요.” 씩씩거리던 우석이가 오랜 침묵을 깨고 말했다. 순간 우리 반 아이들의 ‘와!’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꼭 쥐고 있던 손이 열리며 엄지손톱만한 야광 공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광처럼 빛나는 감동의 물결이 위풍당당하게 번져나갔다. 문제의 발단은 ‘수학시간’이었다. 이제 막 세 자리수를 배우던 우리 반은 교과서 뒤에 붙어 있는 종이돈으로 직접 물건을 사고파는 ‘알뜰시장 체험’을 하기로 했다. 각자 집에서 가져온 물건에 나름대로 100원, 200원 정도의 물건 값을 정했다. 처음엔 놀이가 끝나면 ‘사고판 물건’을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기였는데, 아이들은 진짜로 사고팔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중에 물건 때문에 울지 않기’로 다짐하고 놀이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매우 진지했고, 활기가 넘쳤다. 종료시간이 임박해지자, 마음이 다급해진 아이들의 흥정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던 중, 우석이와 준상이의 심상찮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씩씩대며) 선생님, 준상이가 이것 판다고 했으면서 다시 안 판대요.” “(억울한 듯) 아니에요. 우석이가 돈을 안 줬어요.” “나중에 줬어요. 그런데 안 판대요.” “그 때는 팔기 싫었어요.” 두서없이 쏟
문제| 학생들의 올바른 성장을 위한 학생중심교육 강화 방안 ○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가치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 자율과 공존 및 협력의 교육이다. 장차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갈 아이들이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며, 미래사회에 필요한 역량을 기르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 학교는 학생이 마음껏 배우고, 바람직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인성교육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아울러 서로 권리를 존중하고, 협력하며, 삶을 배워 나갈 수 있는 민주시민을 육성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 이와 관련하여 학생들의 올바른 성장을 위한 학생중심교육 강화 방안에 대하여 논술하시오. Ⅰ. 서론 미래 사회를 이끌어 나갈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은 학습자로서의 주체성 확립과 더불어 사는 사회 일원으로서의 사회성 확대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간은 ‘배움’을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달하며, 사회는 ‘교육’을 통해 구성원이 사회와 함께하는 방향으로 배워 나가도록 돕고, 지원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학생들의 올바른 성장을 위한 학생중심교육 강화 방안에 대하여 논술하고자 한다. Ⅱ. 학생중심교육의 제한점과 방향 1. 학생중심교육의 제한점[PART VIEW] 그
대학교수로서 나는 이른바 사회운동이나 정치활동 형태의 사회봉사와 일정한 거리를 두며 살아왔다. 이러한 원칙을 깨고 내가 세상 일의 전면에 나선 적이 딱 한번 있는데 그것은 2005년 초 교과서포럼 창립을 통해서였다. 대학교수가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교과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나 자신도 그랬다. 그런데 2002년에 발생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살 사건이 나로 하여금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역사교과서 문제를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이른바 ‘미순이 효순이’ 사건 직후 촛불시위에 등장한 어린 여학생들의 지독한 반미주의를 보고 나는 큰 충격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 때 누군가가 나한테 귀띔을 해 주었다. 요즘 학생들이 사용하는 국사교과서를 한번 읽어보라고 말이다. 과연 내가 정독해 본 당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사실의 차원에서 오류가 많았을 뿐 아니라 이념의 측면에서 너무나 크게 편향되어 있었다. 이런 역사교과서라면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배울수록 북한에 동조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싶었다. 촛불시위 현장의 반미구호가 진심이었던 것은 다름아닌 국사교과서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여기에 체제나 편집, 문장, 어휘까지 고려한다면 한
“어떤 아이들이 현천고를 선택했나요?” 너무 궁금했다. 대학진학을 염두에 두지 않은 고등학교 교육과정 운영이 어디까지 가능할 수 있을까…. 아니 의심에 가까웠다. 그런 학교를 본 적이 없었기에.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다. 아직은 전국에 몇 안 되는 공립 대안학교인 강원도 현천고등학교를 왜, 무엇 때문에, 어떤 학생들과 학부모가 선택을 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우문현답, ‘대학이 목표라면 입학하지 마라’ 교사들의 신중한 답변이 돌아왔다. “대학 입학을 결정했고, 높은 점수를 얻어야 한다면 입학하지 않는 게 좋겠죠.” 하지만 박경화 교장의 답변은 단호했다. “입학설명회에서도 밝혔지만, 우리 학교의 목표는 대학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자신의 의지로 진로를 찾고, 결정할 수 있는 자신감을 키우는 것이 목적이지요.” 박 교장은 ‘자신의 미래를 자신이 결정하기 위한 키워드’로 ‘제대로 된 기다림’을 꼽았다. 기다림이면 기다림이지 제대로 된 기다림은 뭘까? 박 교장은 “마지막 한 명까지 ‘앎과 삶이 하나 되는’ 자신의 진로를 찾을 때까지 도와주고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수수께끼가 풀렸다. “학교를 다시 다녀볼 생각이 들었어요.”, “재미있어요. 학교도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