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다운 캔버스이다. 흰색과 빨강과 노랑 그리고 초록의 물감이면 충분하다. 얼마 전까지 나무들이 몸을 쥐어짜 하양, 빨강, 노랑으로 세상을 칠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그 위에 초록을 덧칠하고 있다. 어쩌면 생명의 바탕이 초록인 듯 지상의 모든 것은 연둣빛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교실의 아이들도 여린 새싹처럼 곱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살. 푸른 하늘 아래 아이들의 눈빛은 초식동물의 눈들을 닮았다. 한동안 아이들은 사바나 초원에서 풀을 뜯으며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그리고 머잖아 어미를 닮아 튼튼한 발굽과 뿔을 지니고 초원을 달릴 것이다. 나는 그러한 어린 생명들 앞에서 푸른 교과서를 펼치고 각주를 달게 한다. 푸르게 돋아나는 생명의 시들을 판서하며 아이들의 이마를 매만진다. 아이들은 맑은 눈엔 꽃망울이 흔들리고 가슴에 풀씨 같은 상형문자가 자란다. 하얀 민무늬 노트가 그들이 새긴 부호들로 말미암아 빗살무늬가 되고 채문토기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 손끝에서만 가능한, 문명 이전의 세계를 만나는 순간이다. 알타미라 동굴에 갇힌 동물처럼 뛰쳐나갈 것 같은. 성덕대왕신종에 갇힌 선녀들이 막 소리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이다. 진실로…
2011-04-28 10:03얼마 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국정연설에서 한국의 교육을 극찬하는 발언을 해서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는 뜨거운 한국의 교육열을 칭찬하면서 “한국에서는 교사가 국가 건설자(nation builder)로 불린다”고 했고, 우수한 인재가 교사가 되기를 열망하는 한국의 상황을 부러워했다. 이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세계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압축적인 성장’은 교육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바탕에는 선생님들의 피와 땀이 숨어 있었다. 지금도 우수한 인재들이 사범대와 교육대에 진학해 교사가 돼 교단에 서기를 열망하며 학업에 매진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이 우수한 인재들의 꿈이 쉽게 실현될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식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경쟁률을 보여주는, 또 최종 합격에 이르기까지 무려 3개월여가 걸리는 3차에 걸친 임용시험이라는 커다란 산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용시험에 모든 꿈과 인생을 걸고 오늘도 노량진 학원가를 전전하는 이른바 장수생이 비일비재하며, 심지어 임용시험과 사법시험을 한국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이라고 평가하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임용시험이 왜 이렇게 살인적
2011-04-28 10:01윤오영의 수필 ‘부끄러움’은 사춘기 청소년들의 심리를 소재로 삼아 한국적이고 고전적 아름다움으로서의 부끄러움을 미학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수작(秀作)으로 꼽힌다. 먼 친척 오빠의 방문에 건넌방에 걸어둔 곤때 묻은 분홍 적삼을 들킨 소녀가 무안하고 부끄러워서 떠나는 오빠의 마중도 나오지 못하고 숨어서 반쯤 내다보는 붉어진 얼굴에서 그 옛날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성정(性情)을 발견할 수 있다. 수업에서 이런 본문을 공부한 후, 학습활동에 들어갔다. 마지막 표현하기 문항은 ‘부끄러움’과 유사한 상황의 경험을 떠올려 보고, 특별히 감동을 느끼게 된 계기를 짧은 수필 형태로 써 보는 것이었다. 글쓰기 시간으로 준 10분이 지나자 이제 자신이 쓴 글을 발표할 순서가 됐다. 짧은 시간이었기에 깊은 맛이 담긴 곰삭은 글이 나올 수 없다는 한계를 알고 있었기에 발표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두 서너 명의 발표가 끝난 후, 가운데 줄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던 현문이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늘 얼굴에 미소를 달고 사는 녀석이라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자신에게 발표할 기회를 달라는 미소처럼 보였다. 녀석은 평소에도 수업에 들어가면 강의에 집중하고 열심히 발표
2011-04-28 09:56지난 3월 11일, 일본의 대지진과 쓰나미(해일)로 전 세계가 놀랐다. 자연재해에 익숙한 일본인들은 통곡하기보다 그 다음을 대비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지진해일 후에 벌어진 후쿠시마 원전사고, 그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필자는 지난해 2월에 후쿠시마와 센다이 지역을 여행했었다. 눈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풍경과 전신의 피로를 풀어주는 온천욕, 그리고 어디를 가든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던 거리가 생생히 떠오른다. 지금은 유령도시로 바꿔버린 엄청난 재난 앞에서 할 말을 잃을 정도이다. 비 오는 금요일, 하교 지도를 마치고 통학로에 눈꽃처럼 떨어진 벚꽃을 감상하며 놀이터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 저학년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비를 맞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친구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아이가 “이거 일본비니?”라고 묻자 옆에 있던 아이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한국 비란다. 그래도 비 맞으면 좋지 않으니 얼른 집으로 가렴”했더니 그 아이는 “아, 다행이다. 한국비래!”하는 것이다. 요즘 방사능에 대해 모두가 예민하다. 비 오는 날에 등교하는 옷차림을 보면 마스크에 우비를 쓰고 완전무
2011-04-28 09:55디지털 시대에 변화의 물결을 가속화시키는 중심축은 ‘인터넷’이라고 볼 수 있다. 인터넷은 이젠 일상생활의 필수요소로서 현대인의 삶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교육에도 깊이 자리를 잡고 있다. 문제는 인터넷 사용 양태가 과연 교육적으로 유의미하고 바람직한가에 놓여 있다. 인터넷 사용의 교육적 의미에 대한 비판적 자기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의 관심과 필요에 따라 그 교육적 수준을 4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 ‘因터넷’으로서의 인터넷이다. 이런 차원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정보를 접속해서 그냥 보는 수준의 사람들이다. 인터넷은 본질적으로 네트워크(因)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데 인터넷상에 존재하는 정보는 정보 그 자체로서 독립성 또는 개별성을 띠고 있기도 하지만 그러한 독립적 정보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된 관계망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 이때 인터넷을 검색하는 도중에 발견된 정보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부가시키는 과정이 곧 ‘교육적 활동’(학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정보검색 및 접속을 통한 과정에서는 그러한 유의미한 학습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차원에서 인터넷 사용에 익숙한 사람들
2011-04-25 16:55사교육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학교 현장에서 특강을 하며 훈수를 두는가 하면, 각종 언론에 등장해서 현장 교사들의 나태함을 질타하는 일조차도 생겨난다. 필자의 학교는 지역적으로 사교육이 성행한다는 강남의 대치동과 도곡동에 위치해 있어, 여러 형태의 사교육과 사교육 강사들의 행태를 목격한 바 있다. 필자가 20대 후반의 초임 시절, 당시도 사교육의 문제는 하나의 화두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사교육 업체들이 교육의 전면에 나서서 설쳐대진 않았다. 일테면 ‘교육에 대한 예의’는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오늘날의 실용성을 강조하는 현 정권의 교육 정책은 동일 잣대를 들어 공교육 교사가 사교육 강사와 경쟁하기를 요구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는 교육 정책이 정치 논리에 휘둘린다는 점이다. 정권이 바뀌면 교육의 근간이 뿌리째 흔들린다. 전임 정권이 추진하던 교육 정책은 용도 폐기된다. 정권에 따라 평준화와 수월성의 교육 지침이 달라지고, 입시 제도는 크게 요동친다. 여기에 시도교육감의 이념에 따라 ‘국가수준 학업 성취도 평가’와 같은 행정은 강화냐, 폐지냐 하는 극단적인 줄타기를 하기도 한다. 물론 정권이 교체되면 동일하게 들고 나오는 일도 있
2011-04-21 10:33근대 산업사회에서의 삶을 지배하는 기본원리는 ‘남보다 먼저’였다. 만원 버스를 타기 위해 ‘남보다 먼저’ 뛰어야 했고, 동료보다 앞선 승진을 위해서 ‘남보다 먼저’ 출근해야 했고, ‘남보다 먼저’ 부동산 투자를 해야 돈을 벌 수 있었다. 교장 앞에서 교사들은 무기력했고, 사장의 명령에 사원들은 말없이 복종했으며, 여성은 남성의 지배를 받았고, 부하는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했다. 심지어는 학교시험조차도 하나의 정답만을 요구하는 일방성의 횡포가 만연했다. 이처럼 근대 산업사회는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이어서 가정, 학교, 사회 등의 모든 조직에서 요구하는 보편적·총체적·일방향적·위계적인 질서에 순응해야 했다. 즉,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요구하는 표준화된 질서체제와 생산체제에 길들여짐으로써 사람의 인성까지도 표준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근대 산업사회에서는 몰개성, 획일적 사고와 행동, 위계적인 권위구조에 대한 일방적인 복종, 자기통제 및 욕망의 억압 등이 미덕이었다. 그러나 정보사회에서는 일방적인 것들을 거부한다. 산업사회에서의 삶을 지배하는 대서사로 통용되었던 일방성을 거부한다. 그래서 정보화 시대, 즉 디지털 시대의 교육은 ‘남과 함께하는 협동성’과 ‘나만의…
2011-04-21 09:16과거에 학교에서는 엄한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다. 학습 지도는 물론 기본생활 습관 지키기에서도 잘못하면 따끔한 충고와 함께 벌을 받았다. 그뿐인가 학교는 엄한 징계가 있어 교칙을 어기면 정학 및 퇴학 등의 순서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 학교는 교칙을 엄하게 적용하는 경우가 드물다. 담배를 피우고 징계를 하려면 기호 식품이라고 대드는 학부모가 있다. 어떤 학부모들은 징계보다는 반성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설하라고 논점을 벗어난 제안을 한다. 왕따와 약한 학생에게 가한 폭력으로 인해 전학이나 퇴학 처분을 내리면 교육청부터 청와대까지 진정을 내며 문제화시키고 결국은 학교에 힘(?)을 과시한다. 이것이 극단적인 예이기도 하지만 학교 문화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더 이상 학교의 아이들은 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90년대 이후 ‘교실 붕괴’란 말이 돌고 2000년대 와서 학교는 무질서의 온상이 되었다.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는 것은 기본이고, 교내 폭력, 집단 따돌림 등 문제가 심각하다. 이러한 현상이 누적되면서 교사들은 학생들을 나무라지 않는다. 나무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무라지 못하고 있다. 나무라면 대들고 심지어 폭행으로 되돌아온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비
2011-04-18 11:57최근 카이스트 학생과 교수의 잇따른 자살을 계기로 카이스트 학사 운영과 서남표 총장의 거취문제가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보다도 학생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그대들이 좌절을 겪는다고 해서 자살에 대한 유혹을 쉽게 느껴서는 곤란하다. 그대들은 젊음과 미래를 함께 가지고 있는 패기만만한 젊은이들이 아닌가. 그래서 ‘젊은 사자’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무슨 이유 때문에 자살에 관한 유혹을 이길 수 없단 말인가. 물론 그대들은 아파서 그런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얼마나 아프면 목숨을 끊을 마음이 들 것인가. 그러나 요즘 베스트셀러가 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을 보라. 아픈 것은 젊음의 특권이다. 또 아프다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의 표증이고 또 아프기 때문에 나을 수 있고 면역이 생긴다는 희망도 가능하다. 젊음은 도전과 어려움의 장이다. 젊음 앞에 항상 주홍색의 양탄자만 깔리는 것은 아니다. 살다 보면 ‘루저’도 되고 ‘실패자’도 되며 ‘낙오자’도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살을 택한다면, 아픔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
2011-04-18 1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