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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학생들은 수학을 열심히 공부한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숙제도 하고 참고서 문제도 푼다. 선생님께서 어떤 내용을 가르쳐주면, 학생들은 그 내용을 열심히 익힌다. 또 그 문제와 비슷한 문제를 풀고 또 푼다. 때로는 공식을 암기하기도 하고, 선생님께서 중요하다고 강조한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하여 암기장을 만들기도 한다. 마치 무술 도장에서 무술을 배울 때, 사범의 시범을 보고 그대로 흉내를 내며 잔기술부터 몸에 익히고 또 익히듯이. 한 학생이 ‘수학 문제를 왜 풀어야 하는지’를 물었다고 해 보자. 이 질문을 한 학생은 친구들의 눈총과 어이없는 질문을 했다는 분위기에 몸둘 바를 모를 것이다. 그러나 학생을 배려하는 교사는 ‘이 문제를 풀면 남보다 좋은 성적을 얻어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서 칭찬을 들을 것이며, 좋은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고 대학을 졸업하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자상하게 설명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유이며, 수학을 공부하는 동기이다. 그러나 처음 질문을 한 학생은 그 문제를 풀기 전에 문제를 풀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물은 것이며, 이 학생의 질문에 대한 합당한 답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푸는 이유와는 상관없이 문제를 풀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상하여 가능성을 대답해준 것일 뿐이다. 수학자들은 ‘수학을 한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수학을 수학답게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수학답다는 말을 이해하여야 ‘수학을 한다는 것’과 ‘수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구별할 수 있다.‘○○답다’는 말을 알기 위하여 먼저 ‘여자답다’는 말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어떤 여자를 보고 여자답다고 한다면, 먼저 마음속에 여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으며, 그 여자가 이 기준에 적합하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여자의 기준이 있고, 어떤 여자가 이 기준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면 여자답다고 말을 하는데,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면 여자답다는 말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여자답다는 말이 있으며 이 말을 많은 사람들이 사용한다는 것은 여자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준의 바탕에는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되는 흐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미를 ‘수학답다’라는 말에 적용하면, 많은 사람들이 수학은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있으며, 이 기준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더라도 그 바탕에는 공통되는 흐름이 있다. 이 공통되는 흐름이란 수학을 수학자가 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수학자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해결되었을 때의 즐거움과 노력하고도 해결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공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해결하는 절차가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수단이나 방법도 동원하였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이 문제로부터 새로운 문제에 도전할 수 있다. 이것이 수학을 하는 동기이다. 앞서 말한 수학을 공부하는 동기는 외적 동기이고, 지금 말한 수학을 하는 동기는 내적 동기이다. 내적 동기를 우리는 본질적 동기라 하며, 수학의 본질적 동기는 수학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새로운 문제에 계속 도전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과 등산을 한다고 가정하자. 산에 가기 싫다는 아들에게 산에 가면 맑은 공기도 마시며, 몸도 튼튼해진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산에 갈 것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은 아들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맑은 공기를 마실 이유도 없으며, 몸이 튼튼하기 때문에 더 튼튼해야 할 까닭도 없다. 더욱이 앞으로 더 건강할 것이라는 설명으로 아들을 산에 데려갈 수는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타이르고 강요하며 함께 등산을 하기 시작했다. 매주 가까운 산을 다니고, 어느 때는 멀더라도 정말 아름다운 산을 다녀왔다. 아들은 점점 산이 좋아졌고, 산에 가는 날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산행의 즐거움을 알고부터 몸은 더욱 튼튼해졌고, 마음도 건강해졌다. 아들과의 산행을 예로 들은 것은 이 속에 수학을 공부하는 것과 수학을 하는 것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교사는 수학을 처음 학습하는 아동에게는 공부를 시켜야 한다. 그들이 수학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타이르며 때로는 강요하며 아동이 수학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를 시켜야 한다. 그러나 아동이 수학을 재미있어 하기 시작하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로 그쳐야 한다. 산행의 즐거움을 아는 아들이 어느 산을 갈 것인지, 무엇을 준비할 것인지, 복장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지켜봐 주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높은 산을 올라가다가 중간에 하산하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해야 한다. 아들이 훌륭한 등반가가 되지 않더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조그만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삶이 더 보람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듣던 말들이 그때는 그저 평범하고 무덤덤했는데, 나이가 들고 인생을 살아볼수록, ‘참으로 신통방통 맞는 말씀이다’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내가 예닐곱 살 되던 무렵, 할머니께서는 무언가 칭얼대는 나를 달래시며,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라는 말로 철부지 나를 달래셨다. 나는 할머니에게 “할머니, 그럼 이제 자면 떡 줘야 돼” 이렇게 억지를 부렸던 생각이 난다.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는 이 말의 뜻을 어렴풋 알 것 같다. 어린 사람들은 인생의 경륜이 풍부한 어른의 말을 경청하면 삶의 지혜와 이로움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이 말의 참뜻일 것이다. 자식을 기르면서 새삼 이 말의 뜻을 절감할 때가 있다. 길이 아닌 길을 막무가내로 가려는 아이들을 간곡히 계도해야 하는, 선생의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도 이 말은 일종의 묵시록처럼 마음에 자리 잡는다. 그런데 이 말보다도 훨씬 더 울림이 크게, 훨씬 더 강하게, 훨씬 더 깊이 각인되어 온 말이 있다. 그것은 ‘말이 씨 된다.’라는 말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 말을 자주 사용하였다. 분별없이 촐싹거리면서 덕스럽지 못한 말을 하면, 어른들은 점잖게 나무라는 어조로 “말이 씨 된다”라고 말씀하시며 주의를 주셨다. 함부로 방정맞은 말을 하다가 ‘말이 씨가 되느니라’하고 주의를 받으면 왠지 무서움 같은 것이 스스로 들었다. “네가 말한 대로 되리라” 하는 소리가 하늘 저 높은 곳 어디에서 들려 올 것 같았다. ‘말이 씨 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어떤 주술적인 힘이 작동하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말이 씨 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말도 씨앗과 같다는 것이다. 한번 뱉어 놓은 말은, 마치 밭에 떨어진 한 알의 씨앗처럼, 싹이 트고 자라서 줄기가 벋고 잎이 달리고 꽃이 핀다는 것이다. 말이란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기원을 비는 주문(呪文)이나 진언(眞言)은 한결같이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야말로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그 말의 씨앗을 심는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굿판이나 의식에서 무당이나 제관이 무어라 주문을 외는 것을 본다. 나는 그 주문의 말이 그냥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의 씨앗을 촘촘히 그리고 아주 꼭꼭 심는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말대로 된다는 믿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이 주문이나 진언의 내적 구조가 아닐까 생각한다. 씨앗이란 무엇인가. 식물을 그 종자의 특성대로 그대로 싹 틔워 자라게 하는 원천이지 않은가. 사과나무의 씨앗은 사과나무를 싹 틔워서 자라게 하고, 배추 씨앗은 배추를 자라게 한다. 말의 씨앗 또한 마찬가지이다. 좋은 말은 좋은 일을 생기게 하고, 나쁜 말은 나쁜 일을 생기게 한다. 생각 없이 불쑥 부덕(不德)한 나쁜 말을 뱉어 놓고는 “아이고! 요놈의 입이 방정이다” 하고 제가 제 입을 쥐어박는 장면이 영화나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지 않던가. 그래서 말은 그냥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의 인간적 면모를 여실히 반영한다. 말을 꺼내는 순간 그가 지닌 도덕과 세계관과 윤리가 싹을 틔운다. 말을 하는 동안 그의 존재론적 가치와 정체성은 누군가를 향하여 벋어 나간다. 기능(skill)만을 강조하는 국어교육에 ‘말은 씨앗이다’는 인식론이 더 보강되어야 한다. 말이 씨가 된다는 언어관 속에는 참으로 훌륭한 삶의 지혜가 들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다분히 금기의 영역에서 강조하여 왔던 것 같다. 경솔하게 말하지 말라. 너무 앞서서 예단하지 말라. 함부로 남을 험담하지 말라. 부정한 생각을 드러내지 말라. 이처럼 금기의 항목들이 많은 것이다. 그러니까 말이 씨가 된다고 하면서,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는 쪽으로 언어문화를 이끌어 온 면이 강했다. 나쁜 말에서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쪽으로 작용해 온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강화해 볼 필요가 있다. 좋은 말은 좋은 일을 이루어지게 하는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왜 모른단 말인가. 부정적 강화와 자기 절제의 미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긍정적으로 발산하여 어떤 강화를 하게 되는 것은 말과 삶을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좋은 말로 씨를 뿌리자. 모든 이루어지는 꿈에는 그 꿈을 말소리로 내어 본 최초의 말이 있었으므로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말의 씨가 먼저 뿌려졌으므로 마침내 꿈의 꽃이 피게 되는 것이다. 꿈이 소중하다고 말들을 하지만, 그것이 소중하기 위해서는 강한 현실의 뿌리와 연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꿈은 그냥 꿈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꿈꾸기 위해서 꿈꾸는 것은 일종의 자기 속임수인지도 모른다. 꽃으로 치면 조화(造花)이다. 이루어진다는 것을 굳게 믿고 현실을 꿈 쪽으로 추동해 나가는 것이 생화(生花)와 같은 꿈이다. 혹자는 꿈이란 가지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말하지만, 이루어지 않을 것을 너무도 번연히 알고 있는 꿈은 그야말로 하룻밤 꿈처럼 허망하다. 이런 꿈은 현실의 어려움을 피해가려는 사람이 그저 나약하게 도피하는 관념의 동굴일 뿐이다. 일종의 진통제에 불과한 것이다. 꿈이란 이루어진다는 역동적 기대와 현실적 의지를 바탕으로 할 때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 꿈을 끊임없이 추동하는 가장 현실적인 힘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그것을 ‘실천’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실천’을 지속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의 씨앗’, 즉 ‘씨가 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나를 향하여 부단히 던지고 있는 말이 꿈을 이루게 한다. 스스로의 다짐을 불변의 실천으로 굳히기 위하여, 그것을 다시 남에게 약속으로 묶어 두게 하는 말이 꿈을 이루게 한다. 말 가운데는 글로 쓰는 말이 때로는 큰 힘을 발휘한다. 존 맥스웰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중 약 95%의 사람은 자신의 인생 목표를 글로 기록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글로 기록한 적이 있는 5%의 사람들 중 95%가 자신의 목표를 성취했습니다.” 맥스웰의 말에 사족(蛇足)을 덧붙여 본다. “나의 꿈이 멀어질 때, 내가 나를 돕는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글을 쓰는 것입니다. 꿈이 흐려질 때일수록 글을 써 보십시오. 그렇게 쓴 글은 서랍 속에 감추어 두지 마십시오. 어디엔가 내어 놓고 발표하여 소통시켜 보십시오. 그러면 이상한 마력이 생겨납니다. 마치 그 어떤 신령한 존재가 나에게 영험 있는 마술을 걸듯이, 내가 나에게 마술을 걸게 되는 효과가 생기는 법이지요. 그것이 말의 힘, 글쓰기의 힘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힘이 모여서 꿈을 이루게 합니다.”| 경인교대 교수 말이 씨가 된다는 언어관 속에는 참으로 훌륭한 삶의 지혜가 들어 있다. 그런데 이 말은 경솔하게 말하지 말며, 부정한 생각을 드러내지 말라는 등 금기의 항목들이 많다. 즉, 말이 씨가 된다고 하면서,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는 쪽으로 언어문화를 이끌어 온 면이 강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강화해 볼 필요가 있다. 좋은 말은 좋은 일을 이루어지게 하는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좋은 말로 씨를 뿌려 마침내 꿈의 꽃이 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의 산야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은 짙어가는 녹음을 즐기면서도 은연중에 우리 것에 대한 흥미를 가지곤 한다. 이런 속마음을 표현하듯 혹시라도 도회지 생활에서 멀어져버린 옛 생활 용품을 만나면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흥분하며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멈추게 하는 것은 담 밖 야트막한 언덕과 어울림 한 시골 장독대와 그 속의 옹기일 것이다. 복잡한 일상을 잊게 하고 어머니 품 속 같은 편안함을 더해주는 옹기를 보는 즐거움은 우리 민족의 특혜인지도 모른다. 땅 색과 닮은 옹기를 본 사람들의 입가에는 어느새 웃음이 묻어 있고 얼굴에 화색이 돈다. 어느 마을 낯선 길목의 한옥 마당 한 켠에 겸손하게 앉아있는 옹기가 정겨운 것은 우리 민족성을 그대로 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 순응할 줄 알면서 잘난 척 하지 않고 은근한 아름다움을 가진 모양은 우리 민족의 속내를 가장 잘 표현한 물건임이 분명하다. 얼마 전 나는 어른 키보다 큰 옹기를 보며 고향에 계신 어머니 생각을 했다. 큰집이던 우리 집 장독대에는 아주 큰 장독이 여러 개 있었는데, 몇 년씩 묵은 장맛이 좋다며 이웃 아주머니들이 간장과 된장을 얻으러 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최근 일본사람들이 이렇게 사용하던 우리나라의 큰 옹기를 대거 수집해 간다는 얘길 들었다. 욕심 없이 만들어낸 장인의 키보다 큰 옹기를 일본인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 것일까. 이제 더 이상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으니 우리 인생과 동고동락하던 그 큰 옹기를 앞으로 누가 만들어낼 것인가. 눈치 빠른 일본 사람들이 차츰 귀해질 것을 미리 눈치 채고 일제강점기 때 백자사발과 민화를 가져간 것처럼 선수를 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김치냉장고 성능을 따져가며 아파트 주방에 메이커 김치냉장고를 사서 김치를 채우고 있을 때 일본인들은 우리의 생활과 마음을 훔쳐가고 있다는 생각이 하니 서글퍼졌다. 자연생명이 숨 쉬는 흙과의 동화 옹기가 가진 멋 중 으뜸은 숨어있는 기운과 생명력이다. 산소를 들이마실 줄 아는 대단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절대 뽐내거나 화려하게 내세우지 않는다. 겉으로는 순수하고 소박한 질감과 함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면서 장수할 수 있는 비결도 품고 있다. 옹기는 순박한 여인들의 손결에서 일상을 시작하면서 부드럽지만 강하고 정말 쓸모 있는 실용적이다. 그리고 한국인과 함께 하는 삶의 동지로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갈 줄 아는 자연동화의 멋도 지닌다. 구워 만드는 방법에 따라 질독, 푸레독, 오지그릇, 반옹기, 옹기 등으로 만들어져 생활 곳곳 함께 있어왔다. 삼국시대 이후 주로 환원 소성한 토기가 만들어졌지만 산화 소성한 것도 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적색토기가 만들어졌는데, 고려시대에는 조금 더 단단해진 적색토기가 만들어졌고 조선시대에는 오지그릇이 만들어졌다. 옹기는 검정 토기로부터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검정 토기가 고온으로 구워지면서 치밀한 토기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 치밀한 토기 중 한 갈래는 청자와 백자로 이어지게 되고 또 한 갈래는 옹기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옹기는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한자로는 ‘옹(瓮)’ 또는 ‘옹(饔)’이라고 쓰며, 외국어 표기는 ‘onggi’로 한다. 질그릇은 진흙으로 빚어 초벌구이를 한 그릇이고 오지그릇은 질그릇에 오짓물을 입혀 다시 구운 그릇이다. 근대 이후 윤기가 없고 겉이 매끄럽지 못한 질그릇의 사용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옹기는 주로 윤기가 있고 단단한 오지그릇을 지칭하게 되었다. 옛 선조들은 곡식을 담아도 벌레가 생기지 않는 질그릇을 저장용기로 즐겨 사용하였다. 그것은 옹기의 태토가 되는 찰흙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모래 알갱이가 그릇 안에 미세한 공기 구멍을 만들어 옹기 안과 밖으로 공기를 통하게 함으로써 안에 있는 음식물을 잘 익게 하고 잘 보존해 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숨 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옹기는 다른 용기와 비교해서 내용물이 쉽게 변색되지 않고 인체에도 무해하며 오래 보관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 거기다 옹기는 자연으로 환원할 줄 아는 성정을 가져 환경오염에도 지장을 주지 않는다. 온전한 그릇으로 있을 때는 생활에 도움을 주다가 금이 가거나 파손되었을 경우는 자연으로의 토화현상(土化現像)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고, 습기 있는 땅속에 묻히거나 노출상태에서는 풍화작용에 의해서 원래의 자연 상태인 흙으로 돌아간다. 전국 각지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양의 옹기를 굽고 사용하였음에도 이들 파편들이 묻혀있거나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이유가 바로 자연환원성(自然還元性)인 토화현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찰흙에다 부엽토와 재를 섞어 만든 잿물을 입혀 구워 내기 때문에 사람의 몸에 전혀 해가 되지 않고 금이 가거나 깨져 밖에 버리면 바로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 친화적인 소재이다. 이런 옹기야말로 가장 자연에 가까운 그릇이라 할 수 있겠다. 소박하고 기운이 넘치는 문양 옹기의 색상을 말할 때 자연 그대로의 색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옹기에서 친근감을 느끼는 이유는 자연과 닮은 색상에서의 느낌도 있겠지만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꾸밈없는 옹기의 문양을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옹기에 나타나는 문양은 어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옹기를 만드는 장인이나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그 속에서 활달하고 개방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기운과 꾸밈없고 수더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옹기의 대표적인 장식 기법으로는 우선 수화문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세계 도자에서 유래가 드문 독특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처음에는 유약의 두께를 감정하기 위한 필요로 시작되었다가 문양으로 발달되었다고 본다. 특히 손가락만을 이용하여 무늬를 나타내는 기법이어서 장인의 힘찬 터치와 대담한 선의 변화가 돋보이며 덤덤하면서도 소박하게 표현이 무기교의 기교로서의 한국미를 대변할 수 있다. 옹기의 다른 문양들에는 각종 기하문과 동식물의 상형문이 고루 발달하였다. 특히 양손을 이용한 대칭 문양이 특이한데, 아마도 대칭 문양을 새기던 장인은 온 몸으로 옹기를 감싸 안듯이 공손하게 두 손을 함께 움직이며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기하문이 있다. 곡선의 중간부분에 배가 나온 호형문, 수화문 중 가장 많이 이용되는 문양으로 곡선의 배가 모두 상향으로 나타난 파곡선문, 용수철 모양의 용수철문, 호형문이 상하로 바꾸어가며 연결되어 이루어진 파도문, 파곡선문이 방향을 바꾸어 나타낸 지그재그문, 파상문과 비슷한 형태의 문양으로 직선으로 계속되는 파상문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기하문에서는 우리 민족의 선천적인 추상미의식을 느낄 수 있다. 전혀 기교를 부리지는 않았지만 정겹고 소박한 아름다움은 물론 옹기를 마음으로 감싸 안고 만들어낸 장인의 기운도 느낄 수 있다. 또 비대칭적인 특징을 지닌 상형문도 옹기의 장식기법이다. 여기에는 꽃과 나무 문양을 새긴 초화문, 새 모양의 조문, 매듭모양의 매듭문, 산 모양의 산형문, 규칙이나 유형 없이 손 가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시문된 구름 모양의 운문 등이 있다. 그 중 운문은 옹기 문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어진 옹기 문양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 비대칭 문양은 장인의 무계획적인 계획에서 빚어낸 초월적인 미감을 가진다. 옹기의 문양은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면서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니면서도 단순한 문양에는 기운이 넘친다. 튼튼하고 투박한 생활 속 용기들 옹기는 우리 민족의 삶 속에 그대로 녹아 있는 문화로 다른 문화재와는 차별화된 인간 사랑을 담고 있다. 옹기는 귀족층에서 쓰던 청자나 사기처럼 세련되고 섬세한 맛은 없지만 값싸고 튼튼하기 때문에 서민의 실생활에 부담 없이 쓰여졌다. 기교를 모르고 투박하며 떨어뜨려도 잘 깨지지 않는 옹기의 강한 생명력은 순수한 삶을 살았던 서민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듯하다. 옹기는 우리나라 서민들이 쓰던 민족 고유의 생활 그릇으로 지역적인 기후와 자연환경, 용도와 만드는 사람에 따라 그 나름대로의 특색을 보이고 있다. 제조기법, 형태, 규모 등이 전국적으로 통일되지 않으며 지역마다 독특한 옹기문화를 형성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옹기는 상고시대부터 많이 사용되다가 삼국시대 이후 그릇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차 단단하고 가볍게 만들어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는 와기전(瓦器典)이라 하여 옹기를 굽는 직제까지 두었다고 하니 얼마나 널리 쓰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청자, 분청사기, 백자와 같은 새로운 도자기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생활 용기는 역시 옹기였다. 조선 시대에는 서울과 지방에 백여 명의 옹기장을 두었다. 그러나 도자기가 생활 용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면서 옹기는 점차 저장 용구나 주방 용구로 이용되어 살림 그릇으로서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 옹기는 일반적으로 간장, 된장, 김치, 물 등을 담는 커다란 독이나 항아리에 많이 쓰였으며, 그 외에 시루, 촛병, 등잔, 재떨이 등 생활용품으로도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또한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신을 위해 장독대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식구들의 건강을 기원할 때 쓰던 칠성, 재산운을 관장하는 업을 모시던 업단지, 종가집에서 조상신을 모셔놓기 위해 사용하던 조상단지,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농업신을 모신 용단지 등 민간 신앙용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부(缶), 훈(壎), 물박, 옹장구 등 악기를 만드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옹기가 생활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면, 확독은 보리를 갈거나 깨, 고추 등을 갈 때 사용하였고, 항아리는 담겨지는 내용물에 따라 물 항아리, 쌀 항아리, 장항아리 등으로 구분되어 사용하였다. 또 소주를 만들어낼 때 사용하던 소줏가리, 어두운 곳을 밝히는 등잔집은 서민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생활용품이었다. 특히 임금님이 드시는 쌀을 담아 두었던 큰 어미(御米)독은 항아리의 어깨부분에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했던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의 일부분인 ‘산과 소나무’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왕실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외에 불을 땔 때 발생하는 그을음과 연기를 집밖으로 내 보내기 위해 만든 굴뚝, 종교행사나 서민생활 속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악기류의 물박이 있다. 물박은 일종의 두드려 치던 악기로 자배기처럼 생긴 그릇에 물을 담고 그 위에 바가지를 엎어서 나무 막대기나 손을 이용해 박자를 맞출 때 사용을 했다. 이처럼 쓰임에 따라 옹기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어져 서민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 외 한약을 끓이고 달이는데 쓰이는 용기로 약탕기와 약탕관이 있다. 내면 깊숙이 한국미를 간직하고 있는 옹기의 아름다움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질그릇과 오지그릇으로 이름 지어진 옹기는 옛날에는 집집마다 장독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의 아름다움을 미처 알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기도 전에 언제부턴가 각 가정에서는 장독이나 옹기의 자리는 없어지고 말았다. 우리가 여행 중에 옛집에 자리 잡은 장독대를 만나면 자연과 동화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반기는 것은 큰 잘못을 저지르는 일일 것이다.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고 방치되었다고 애통해 하며 보존의 중요성을 목소리 높여 부르짖는 것도 가식일 수 있다. 이웃나라 사람들이 더 이상 우리 것을 탐내기 전에 우리 스스로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중요함을 인식해야 하며 우리 것을 잘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 것이 소중하다는 말은 아무리 많이 해도 부족함이 없다.
“조용, 조용, 우리 아가.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아빠가 너에게 앵무새를 사줄게. 만약 앵무새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아빠가 너에게 다른 걸 사줄게… 응, 뭐가 좋을까…유럽?” 미국의 한 칼럼니스트는 빌 게이츠가 자신의 딸 제니퍼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장면을 상상하며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세계에서 돈이 제일 많은 갑부에 대한 일종의 조크인데, 기분이 참 묘하다. 빌 게이츠의 재산이 50조 정도 되는데, 그 돈이면 아마도 조그만한 나라 정도는 살 수 있을 것이다. 빌 게이츠가 가난한 집 출신에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오해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빌 게이츠는 대은행가인 미국 서부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H. 게이츠 2세는 워싱턴주립대 법대를 나온 변호사로 시애틀에서 법률회사를 경영했으며 주(州) 변호인협회 회장이었다. 할아버지는 대은행가였고 증조부는 시애틀은행인 내셔널시티뱅크(National City Bank)의 설립자로 시애틀시가 생겨날 때부터 시민들로부터 존경받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는 시애틀 은행가의 딸로 워싱턴대학교의 사무처장을 지냈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자선사업가로 시애틀의 사교계를 주름잡을 만큼 활발한 활동과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고 자선단체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빌 게이츠는 3대에 걸쳐 시애틀 최고 명문가였고 지금은 세계 최고 갑부가 된 것이다. 이름도 대물림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윌리엄 게이츠 시니어, 아버지는 윌리엄 게이츠 주니어, 그리고 빌 게이츠는 윌리엄 게이츠 3세가 원래 이름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이 이름이 같다는 것은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아들은 아버지의 정신을 존중할 수 있어야 그 이름에 흠이 가지 않도록 더 열심히 살 것이기 때문이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면 오히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물려준 이름이 부담스럽거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돈 잘 쓰는 방법을 더 고민하는 가문 빌 게이츠가 최근에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영보다 세계적인 ‘자선사업가’로 더 활동하고 있는 것은 이미 3대에 걸쳐 돈에 대한 모든 것을 소유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증조할아버지는 은행을 설립할 정도로 막대한 돈을 소유했고 할아버지도 그랬다. 빌 게이츠의 아버지는 돈뿐만 아니라 변호사로서 사회적 명예도 얻었다. 그야말로 3대에 걸쳐 재물과 명예를 모두 얻은 것이다. 빌 게이츠는 증조부나 할아버지, 아버지 등 3대가 이룬 부와 명예보다 더한 것을 이루고 있다. 4대째 빌 게이츠는 이제 자신의 선조들이 못다 한 세계적인 자선사업가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미 빌 게이츠에게 돈은 어떻게 버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잘 쓰느냐에 있는 것이다. 티베트의 라마승의 이야기기인 영화 ‘삼사라(Samsara)’를 보면 주인공은 스승에게 이런 말을 한다. “5살 때부터 중이 된 나에게 또 무엇을 버리라고 하십니까. 뭘 가져보지도 못했는데 무엇을 버리라는 것입니까.” 이는 재물이든 결혼이든 가져보거나 경험해본 후에 그에 대한 미련을 접을 수 있다는 말이다. 빌 게이츠가 돈에 대해 미련을 두지 않는 것은 그의 가문이 더 이상 돈에 연연하지 않을 만큼 대대로 부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하겠다. 돈벼락을 맞을 정도로 부자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다. 예컨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철강재벌의 아들이었는데, 그는 부모가 엄청난 재산을 상속해주자 돈이 싫다면서 형에게 그 돈을 주고 평생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또 케임브리지대 교수직도 마다하고 노르웨이의 시골에서 보냈다. 그의 철학은 돈을 돌같이 본데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평생 돈을 벌려고 직장을 전전했다면 그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은행가 가문인 빌 게이츠 집안은 돈에 대한 갈증이 더 이상 없다고 할 수 있다. 세계적인 갑부가 아직도 돈에 대해 미련을 두고 있다면 그것 또한 난센스일 것이다. 이제 게이츠 가문은 더 높은 곳을 지향하고 있다. 즉, 이제는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골몰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빌 게이츠를 미국의 저명인사들이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세계 최고 갑부이지만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자선사업가로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부자의 전형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사상 빌 게이츠와 같은 인물이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빌 게이츠는 자녀를 키우는 모든 부모들에게도 우상이 아닐 수 없다. 빌 게이츠는 그야말로 공부를 잘 할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에도 탁월한 세계 최고의 CEO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공부만 잘하는 아이가 최고였지만 이제는 공부만 잘하다가는 평생 부모 속을 태울 수 있다. 요즘은 공부도 잘하고 ‘이재’에도 밝아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978년 찍은 11인의 마이크로소프트 창립멤버. 아래 맨 왼쪽이 빌 게이츠, 맨 오른쪽이 폴 앨런. 그렇다면 오늘날 빌 게이츠는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첫째, 돈에 대한 부모자녀 간의 원칙 공유를 꼽을 수 있다. 만약 빌 게이츠가 ‘부자 아버지’에 의지했다면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해도 성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부자 아버지’ 의지않고 사업 키워 빌 게이츠 아버지가 한번은 기자들로부터 “당신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더라도 지금처럼 열심히 노력했을 거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만약 빌 게이츠에게 많은 재산을 상속해 주었다면 아들은 아마 마이크로소프트를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 애가 아주 안락한 환경에서 자랐다면, 지금처럼 의욕을 갖고 사업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자라면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는 의욕이 적어지기 마련이다. 빌 게이츠 아버지는 부자였지만 아들에게 창업자금마저 주지 않았다. 빌 게이츠 또한 부자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아닐 수 없다. 빌 게이츠는 자기의 재산 가운데 99%를 자선사업에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대부분 집안에서 재산의 99%를 사회에 환원한다고 하면 필시 큰일이 일어날 게 뻔하다). 빌 게이츠를 있게 한 두 번째 요인으로는 ‘두 명의 똑똑한 친구’를 들 수 있다. 빌 게이츠는 레이크사이드 중·고와 하버드대에서 만난 두 명의 친구 덕분에 컴퓨터 황제에 오를 수 있었고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될 수 있었다. 특히 두 친구는 빌 게이츠의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해준 똑똑한 친구들이었다. 빌 게이츠는 시애틀의 사립명문인 레이크사이드에 다녔는데, 여기서 컴퓨터광인 폴 앨런을 만나 컴퓨터를 알게 되었다. 폴 앨런은 빌 게이츠에게 컴퓨터에 눈을 뜨게 해준 친구로 1975년 마이크로소프트를 함께 창업했다. 또 하버드대에서 만난 스티브 발머(현재 마이크로소프트의 CEO) 덕분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세계 최고의 회사로 만들 수 있었다. 빌 게이츠는 어릴 시절 부잣집 아들답게 모난 성격으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돈에 관심이 많아 컴퓨터 기술로 백만장자가 될 궁리를 일찌감치 했다. 특히 그는 많은 친구를 사귀지 못했지만 한 번 사귀면 깊게 사귀는 편이어서 주변에 자신의 일을 도와 줄 충직한 친구들을 둘 수 있었다. 그의 운명을 결정한 동반자를 만난 곳은 다름 아닌 레이크사이드 중·고와 하버드대이다. 명문학교에서 만난 똑똑한 친구들 덕분에 빌 게이츠가 오늘날 컴퓨터 황제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구와 함께 컴퓨터 황제 올라 빌 게이츠의 인생에서 만난 최고의 친구는 먼저 고등학교에서 만난 2년 선배인 폴 앨런이다. 폴 앨런은 그때 이미 게이츠보다 훨씬 컴퓨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컴퓨터를 직접 조립하면서 앞으로 소프트웨어 사업에 매진해야겠다는 확신을 가졌다. 고교시절의 이러한 경험으로 그들은 몇 년 후인 20살에 사업의 동반자로 다시 만나게 됐다. 빌 게이츠는 하버드대, 폴 앨런은 워싱턴주립대를 중퇴하고 1975년에 마이크로소프트를 만든 것이다. 그는 폴 앨런이 컴퓨터와 컴퓨터 칩에 대해 가르쳐주기 전까지만 해도 장차 아버지처럼 변호사가 되거나 과학자가 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우리가 아직 십대였을 때, 폴 앨런은 나에게 컴퓨터 하드웨어에 관해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마이크로프로세서에 목숨을 걸라고 격려해주었다. 나는 참으로 운이 좋았다. 그토록 젊은 나이에 친구 때문에 내가 사랑할 수 있고 나를 완전히 매혹시키는 무언가를 발견했으니 말이다.” 빌 게이츠는 폴 앨런을 만난 것을 최대 행운이라고 말한다. 빌 게이츠의 부모님은 빌 게이츠를 될수록 질문하기를 권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크도록 했다. 질문을 잘했던 빌은 폴에게 “가솔린이 어떻게 차를 움직이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주 재미있게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끔 요령 있게 설명해주었다. 이들이 우정을 맺게 된 것은 가솔린에 대한 게이츠의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게이츠는 말한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던 빌 게이츠가 선배와 같은 아이에게 질문을 했고 그 질문을 잘 설명해주자 이들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게 이들을 사업동반자로 만들었고, 세계적인 갑부가 되게 한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게이츠와 앨런이 각각 60%, 40%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데, 창업한 지 11년 후인 1986년에 주식시장에 상장되면서 이들은 억만장자가 된다. 빌 게이츠의 나이 31살 때이다. 앨런은 아직 미혼으로 세계 갑부 서열 4위이다. 앨런은 건강이 좋지 않아 마이크로소프트를 떠났는데, 현재는 스티븐 스필버그와 영화사업을 하면서 미국 프로농구단과 미식축구단 등을 운영하며 자선사업가로 살아가고 있다. 또 공상과학박물관을 설립하는가 하면 우주에 대한 연구 및 투자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수학영재였던 게이츠는 대학에 들어갈 때 하버드대뿐만 아니라 프린스턴, 예일대에서 국립 장학금으로 입학 허가를 받기도 했다. 하버드를 선택한 그는 그곳에서 스티브 발머를 만난다. 그는 게이츠에게는 폴 앨런에 이어 그의 운명을 결정지은 두 번째 친구가 된다. 하버드대 시절에 풋볼팀 선수에 문학잡지 편집장, 교내신문 기자로 활동하던 스티브 발머는 같은 기숙사에서 빌 게이츠와 만나 인연을 맺었다. 빌 게이츠가 법학과에 들어갔다 수학과로 전과를 했지만 1학년 때 학업을 그만둔 것과 달리, 발머는 하버드대를 졸업했다. 졸업 후 회사에 취직해 일하던 발머는 다시 스탠포드대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았으며, 1980년 친구 게이츠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여 마이크로소프트에 입사했다. 빌 게이츠 회장이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 사이인 발머는 영업력이 떨어지는 게이츠 회장을 대신해 지난 20여 년간 판매 영업을 담당했고 2000년에 최고경영자에 올랐다. 신문을 통해 관심분야 넓혀 오늘의 빌 게이츠를 있게 한 세 번째 요인을 꼽는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책과 신문이었다. 빌 게이츠는 매일 한 시간 이상 책을 읽는 습관을 유지해오고 있는 독서광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날마다 신문과 잡지를 읽는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요즘 신문을 안보는 추세다. 하지만 빌 게이츠의 충고를 들어보면 신문은 관심분야를 넓혀주는 ‘지식의 창고’ 역할을 한다. 빌 게이츠는 “우선 신문을 보면 또 어떤 기사가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뉴스가치를 통해 세상을 보는 안목을 기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온라인을 통해 관심 있는 기사만 읽는다면 읽기 전이나 읽은 후의 자신은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신문을 통해 기사를 읽으면 자신의 관심분야 이외의 기사도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오고 흥미 있는 기사를 읽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신문의 장점이라고 빌 게이츠는 말한다. “최소한 나는 일주일 동안의 신문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빼놓지 않고 읽는다. 신문이 나의 관심분야를 넓혀주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과학면이나 경제면 등 관심이 있는 기사만 읽는다면 읽기 전이나 읽은 후의 나는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기사를 다 읽는다.” 컴퓨터황제인 빌 게이츠이지만 그는 컴퓨터가 책을 완전히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이 사람으로 하여금 애착을 느끼게 하는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두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갖게 하기 전에 먼저 책을 갖게 해주었다고 한다. 이는 부모들이 마음속에 새겨놓아야 할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해 세계 제일의 갑부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은행가 가문출신답게 이재에 관심이 컸던 것을 꼽는다. 빌 게이츠가 부자집에서 태어났지만 돈에 대한 관심으로 일찍 비즈니스에 눈을 떴다. 고등학교 때 회사에 다니기도 했던 것이다. 빌 게이츠는 1972년에 여름방학 동안 국회에서 사무보조원으로 봉사활동을 했다. 한 국회의원 후보가 공천에서 떨어지자 게이츠는 그 후보의 선거 캠페인 배지를 개당 5센트에 사들였다. 이 배지는 곧 수집가들의 애호품이 되어 개당 25센트에 되팔았다. 또 빌 게이츠와 친구 폴 앨런은 회사에 취직해 근무하기도 했다. 이 회사에서 게이츠는 폴 앨런과 함께 회사의 급료지불기록 프로그램을 만들어주기로 계약을 하고 성공적으로 끝내 큰돈을 벌었다. 게이츠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공부를 해 18살인 1973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그는 컴퓨터광에 수학교사보다 더 수학계산을 잘하는 수학천재로 평가받았다. 그는 학교의 추천으로 하버드대에 들어갔다. 결국 아이가 빌 게이츠처럼 자라기를 바란다면 무엇보다 아이에게 결코 큰 돈을 줄 생각을 하지 말아라. 반면에 돈에 대해 부모와 자녀 간에 원칙을 공유하라. 똑똑한 친구를 사귀게 하고, 책과 신문을 읽어라. 이것이 빌 게이츠의 오늘을 만든 비결이다. 이러한 원칙들은 쉬운 것 같지만 결코 쉽지가 않다. 빌 게이츠가 말한 다음의 문장은 세상을 밝혀주는 가장 아름다운 글이 아닐까. “현명하게 돈을 쓰는 것은 돈을 버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궁극적으로 나는 내 돈의 대부분을 내가 믿는 대의를 위해 사회에 환원할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자식들에게 많은 돈을 남겨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위해서 그다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외진 시골 마을에 청교도적인 신앙의 목사와 그의 딸들인 ‘마르티나’와 ‘필리파’ 자매가 살고 있었다. 세속을 멀리하고 다만 구제와 말씀 그리고 예배 모임만을 삶의 전부로 알았던 자매의 아버지는 신앙을 이유로 딸들의 사랑이나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가르침에 자발적으로 순종했던 자매는 오히려 이를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여성으로서의 삶이 전해주는 일체의 즐거움이나 기쁨도 경험해 보지 못한 채, 평생을 신에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봉사 속에 살아온 두 여인의 일상에 어느 날 작은 파문이 일어난다. 1871년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밤, 초라한 몰골의 지쳐 쓰러질 것 같은 한 프랑스 여인이 그들을 방문한 것이다. ‘바베트’라는 이름의 그녀는 필리파가 젊은 시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오페라 가수 ‘아킬’의 편지를 가지고 있었다. 내용인즉 프랑스에서 내전이 일어나 남편과 자식을 잃은 여인이니, 부디 그녀를 받아들여 달라는 것이었다. 모든 재정을 봉사하는 일에 써야 했던 자매는 바베트를 요리사로 고용할 여력이 없었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다만 머물기를 간청하는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인간은 결국 이기적 욕망의 노예일 뿐 이렇게 자매들과 함께 생활하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베트는 검소하고 숭고해 보이는 삶이 마치 매일 계속되는 말린 생선과 약간의 빵을 넣어 끓인 멀건 죽처럼 무미건조한 일상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한다. 뿐만 아니라 겉으로 순박하고 경건한 듯 보이던 평온한 마을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실상은 오랜 시간 동안 켜켜이 쌓여온 서로를 향한 서운한 마음, 증오와 분노, 질투 등의 감정들로 점철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도시의 때가 묻지 않은 시골이나 오지의 사람들이 탈속한 천사와 같은 심성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낭만주의적 감상에 빠진 일부 도회지 사람들의 상상에 불과하다.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 살아갈지라도 인간은 인간이다. 이기적인 욕망에 쉽사리 유혹되고 넘어지는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두 자매는 찬양과 기도로써 이러한 불화를 가라앉혀 보려 애쓰지만, 이미 근본부터 깨져 버린 마을 사람들의 관계는 점점 도를 더해만 간다. 그러던 어느 날 바베트에게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다. 프랑스를 떠나 있는 대신 고국을 잊지 않기 위해 친구에게 매년 사주기를 부탁했던 복권이 당첨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자매는 이제 1만 프랑의 상금으로 부자가 된 바베트가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고 근심에 잠긴다. 그동안 그녀는 자매들의 삶은 물론 마을 전체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상금을 받은 바베트는 한 가지 엉뚱해 보이는 부탁을 한다. 작고하신 목사님을 기념하는 만찬을 자신의 솜씨와 비용으로 준비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것도 프랑스 요리로 말이다. 만찬 준비는 몰라도 그 비용까지 감당하게 할 수 없다는 두 자매의 만류에도, 바베트는 지난 세월 간의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므로 들어줄 것을 간청한다. 결국 자매는 그녀의 청을 수락하고 바베트는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14년 만에 프랑스로 돌아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베트는 외진 마을 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진귀한 식재료들과 함께 돌아온다. 최고급 포도주와 각종 새와 짐승들, 그리고 거대한 거북이에 이르는 낯선 식재료들에 충격을 받은 자매는 악몽에 시달리기까지 하면서 그녀의 만찬 준비를 걱정스런 마음으로 지켜본다. 근심스런 것은 두 자매뿐만이 아니다. 온 마을 사람들은 한데 모여 사악한 음식을 먹게 될지도 모른다며 걱정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두가 맹세하기를 음식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바베트를 생각해서 혀를 악물고 부정한 재료로 만든 음식을 삼키기는 하겠지만, 결코 그것을 감탄하거나 칭찬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프랑스 정식으로 준비되는 만찬은 아이러니하게도 마을 사람들이 다시 의기투합하는 계기가 된다. 타인을 위한 정성, 마음을 여는 묘약 드디어 만찬의 날. 서로 간의 앙금이 가시지 않고 있는 마을 사람들과 불현듯 마을을 방문한 왕실 근위대 장군 일행, 그리고 자매가 함께 하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 정식 요리 만찬은 시작된다. 음식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마을 사람들의 침묵은 그러나 연이어 터져 나온 장군의 감탄에 허물어져 간다. 1846년산 클로 부조(프랑스 부르고뉴 부조 지방산 포도주), 최고급 거북이 스프, 블러디 드미로프(원래 러시아 요리, 흰 빵에 캐비어와 사워크림을 얹어 낸 러시아 요리), 카유 엉 사르코파주(메추라기를 페스트리로 싸서 여섯 가지 이상 소스를 끼얹어 먹는 요리) 등 연이어 나오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음식들의 미묘한 맛과 색 그리고 향은 단조로운 음식으로 굳어버린 마을 사람들의 입술을 부드럽게 풀어내 버린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마음의 빗장을 열고 오래전 목사님의 훌륭했던 가르침을 되새김질 하며 나누기 시작한다. 장군은 이들에게 새로 나오는 요리에 얽힌 사연과 각각의 미묘한 맛의 조화를 계속 설명해 간다. 점차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먹는 요리가 얼마나 귀하고 가치있는 것인가를 깨달아가면서, 그저 먹어 배를 채우는 것으로부터 음미하고 즐기며 향유하는 태도로 변화를 거듭해 간다. 자기만 아는 인생의 각박함이란 여유 없이 분주히 살아가는 일상의 태도로부터 생기게 마련이다. 설령 그러한 여유 없음이 ‘신앙’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에서 기인한 것일지라도 때로 그것은 삶을 옥죄는 굴레가 될 수 있다. 좋은 음식을 통해 새삼 몸과 마음을 여유를 가지게 된 마을 사람들은 드디어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고 어제의 고통과 상처, 의심과 회의의 생각들을 치유하고 회복시켜 나간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눈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복잡한 구성이나 심오한 철학적 논설 없이, 다만 음식을 준비하고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는 지극히 단순한 방식으로 풀어낸다. 함께 식사하는 것은 단순히 같이 먹는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어렵지 않게 뚝딱 끓여주시던 김치찌개의 깊은 맛이 들어가 있다. 늘 아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의 변화를 고민하고 기대하는 교사를 향해 아마도 바베트는 이렇게 말할 는지도 모른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한 끼의 좋은 식사가 무수한 교육적 장치들 이상으로 아이들과 교사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필자 역시 불우한 가정형편으로 방황하던 시절, 총각 담임선생님이 자신의 자취방에 불러 손수 끓여 주신 라면 한 그릇의 기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남아있다. 필자에게 있어 그것은 단순한 한 그릇의 라면이 아닌, 선생님의 위로와 격려 그리고 응원의 마음 그 자체로 다가왔다. 물론 그것이 꼭 음식일 필요는 없다. 자신이 받은 상금 전액을 이 한 차례의 만찬을 준비하는데 다 써버린 바베트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자매에게 정색을 하고 말한다.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아요. 예술가의 마음속 진실한 외침은 온 세상을 울립니다.” 그렇다. 누구든 정직한 예술가와 같이 장인 된 마음으로 타인을 위해 준비한 시나 음악, 이야기와 춤, 음식 그리고 돌봄을 실천하는 삶은 결국 이를 보고 들으며, 먹고 마시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도 남음이 있다. 여기에 아이들이라고 예외일 수 있을까?
일년 내내 꽃길로 단장되는 섬진강길! 섬진강에서 태어나 섬진강에 기대어 살며 아름다운 글로 노래하는 한 시인에 의해 더 널리 알려진 이 길은 봄에는 매화꽃, 벚꽃, 그리고 배꽃이, 여름에는 밤꽃과 코스모스가, 가을에는 산국과 쑥부쟁이를 포함하는 국화꽃과 단풍꽃이, 겨울에는 차나무꽃과 눈꽃이 피는 아름다운 길이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에서 길을 떠난 섬진강물이 남해바다에 몸을 풀기 까지 212.3킬로미터를 굽이쳐 달리는데 이는 나라 안에서 아홉 번째로 길게 달리는 물길이다. 대체로 강폭이 좁고 강바닥이 많이 노출되어 있어 뱃길로 이용하는 데는 불편하나 화개장터에서 하동읍까지의 강변 고운모래는 전국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금빛의 모래밭에는 금빛의 껍질을 가지는 재첩이라는 조개가 살고 있어 하동하면 재첩으로도 유명하다. 섬진강의 이름에도 이야기가 들어 있어 두꺼비섬(蟾)에, 나루진(津)을 사용하여 ‘나루터에 두꺼비가 나타난 강’이라는 의미이다. 고려 말 하동에 침입한 왜구들이 강을 건너려 하는데, 다압면 섬진마을의 나루터에 수만 마리의 두꺼비들이 모여들어 울부짖자 왜구들이 놀라 도망쳤기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섬진강물길은 좌우로 산길을 가지는데, 이는 하동에서 구례로 가는 19번국도와 매화마을인 다압에서 구례로 가는 861번지방도로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어느 길이나 품고 있지만, 그 아름다움 외에도 많은 문화유적과 이야기를 품고 있어 19번국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추천한다. 이 길은 구례 화엄사와 운조루, 연곡사와 피아골, 영호남을 아우르는 화개장터와 화개나루, 화개동계곡의 10리 벚꽃길과 쌍계사 및 칠불사, 차밭과 푸른 섬진강물, 화개장터에서 하동읍까지의 하동포구 80리길,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와 동정호 및 악양루, ‘백사청송’으로 불리는 하동 송림과 금빛의 백사장 등을 품고 있다. 섬진강 따라 ‘가장 아름다운 길’ 열려 홍수 시 만들어진 모래와 진흙이 섬진강물에 실려 오다가 물의 흐름이 느려지는 곳에 쌓이면서 자연제방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연제방은 섬진강의 물길에서 둑의 안쪽에 고립된 호수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동정호이다. 이 동정호에는 악양천에서 내려온 물이 모여 호수를 일정한 크기로 유지시켰다. 삼한시대에 하동읍을 한다사(韓多沙, 큰 모래밭)로 불렀는데, 이곳에도 넓은 모래밭이 있어 소다사(小多沙)로 불렸다. 그러다가 신라 경덕왕 시절에 지금의 악양으로 불려지게 된다. 동정호가 위치한 악양은 중국의 악양과 지형이 비슷하게 닮았다고 하여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이 이름 붙였다고 한다. 고소성에서 바라본 악양은 지리산의 줄기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고, 넓은 호수가 있어 소정방의 눈에 언뜻 중국의 악양이 보였으리라. 지금은 몸통의 대부분이 악양들(무딤이들)로 변해버린 호수를 동정호라고 부르고, 섬진강변의 금빛 모래밭을 금당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동정호와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악양루를 세우고, 중국의 소상팔경(소수와 상강의 두 물줄기가 합쳐져 중국의 동정호를 만듬)에 버금가는 악양의 소상팔경(악양팔경)을 만들었다. 팔경은 소상야우(瀟湘夜雨), 산시청람(山市晴嵐), 원포귀범(遠浦歸帆), 어촌낙조(漁村落照), 동정추월(洞庭秋月), 평사낙안(平沙落雁), 한사모종(寒寺暮鐘), 강천모설(江天暮雪) 등이다. 이 속에 소개된 동정호의 모습은 섬진강과 악양천의 사이에 위치하고, 맑고 아늑한 동정호에 가을 달이 비치며, 섬진강과 동정호 사이에 넓은 백사장이 위치하여 그곳에 많은 기러기가 앉아 있다. 악양루에서 바라보면 식물로 뒤덮인 동정호는 잘 보이지 않고, 더 넓은 악양벌과 금빛 모래 반짝이는 섬진강변을 잘 볼 수 있다. 섬진강 주변에는 작은 규모의 자연늪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었으나 하천둑을 만들거나 농경지 개발로 대부분이 사라지고 현재는 유일하게 동정호가 남아 있다. 그렇지만 동정호도 저수지의 기능이 거의 없어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호소의 바닥이 경작지의 높이와 비슷하여 육상화로의 천이가 크게 진행된 상태이다. 평사리 외둔마을 앞쪽에 위치하며, 1990년대 초반에는 물이 찬 부분이 약 2헥타르 정도를 차지하였으나, 지금은 거의 버려져 늪의 전 지역에 키가 큰 정수식물과 왕버들이 자라고 있다. 그래서 이곳은 수생식물의 관찰은 힘들고, 물가에 주로 사는 습생식물을 관찰하기엔 좋은 장소이다. 섬진강이 만든 자연늪 ‘동정호’ 동정호 주변에서는 식물 230종류, 수서곤충류 9종류, 척추동물류는 43종류가 나타났다. 식물의 분포를 알아보면, 농수로와 일부 물이 고인 곳에는 개구리밥, 검정말, 통발, 마름, 말즘이 자라고 있었다. 늪에는 줄이 가장 넓게 분포하였고, 그 사이에 갈대, 골풀, 달뿌리풀, 매자기, 물꼬챙이골, 부들, 미나리, 세모고랭이, 소귀나물, 솔방울고랭이, 송이고랭이, 쇠털골, 애기부들, 질경이택사, 큰고랭이, 낙지다리, 고마리, 여뀌류가 나타났다. 물이 거의 말라버린 농수로에는 고마리와 나도미꾸리낚시가 가을이면 분홍색 꽃을 피워 운치를 더한다. 또 논둑과 동정호의 둑에는 봄이면 파릇한 냉이와 쑥이 싹 트고, 여름에는 분홍색의 부처꽃이, 가을에는 흰색의 가새쑥부쟁이가 꽃을 피운다. 또, 일부 고여 있는 물에는 소금쟁이가 헤엄을 치고, 아름드리로 자란 왕버들 숲에는 매미가 구슬프게 울면, 두꺼비와 유혈목이 및 무자치가 가끔씩 모습을 드러낸다. 이처럼 농경지 옆에 위치한 동정호에는 우리 주변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생물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동정호 주변에는 경작을 멈춘 많은 묵논이 있는데, 이 묵논에도 여러 종류의 식물들이 살고 있다. 묵논은 시간이 지나면 점차 개간 전의 모습으로 변한다. 이처럼 일종의 습지인 묵논이 육상화될 때, 가장 먼저 묵힌 논에 들어오는 식물이 부들이다. 부들은 ‘부드럽다’에서 온 말로 식물 전체가 부드러워 예전에는 신발이나 자리를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또 부들의 꽃으로 이불이나 옷을 만들기도 하였다. 20년 전에는 동정호에 부들이 넓게 자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를 내주고 줄이 가득 자라고 있다. 세월 따라 대부분 농경지로 변해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다가 젊음을 뽐내고, 다시 세월이 흘러 죽어서 흙의 일부분이 되듯이 늪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양이 변한다. 땅이나 강에서 어떤 요인에 의해 만들어진 호수는 시간이 흐르면서 적당한 조건이 되면 늪으로 변한다. 늪이 다시 땅으로 되는 과정에서 잘 자랄 수 있는 식물 무리도 달라지는데 이런 식물 무리의 변화를 통해 일어나는 호수의 변화 과정을 호수 생태계의 천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호수는 파도 작용에 의해 암석이 깎이면서 호수 넓이를 넓히면서도 동시에 물이 가져온 퇴적물이 쌓여 점차 호수는 얕아져 유년기 호수에서 장년기 호수로 변한다. 계속적인 퇴적과 주변 영양분이 호수로 들어와서 영양이 적은 빈영양호에서 영양이 풍부한 부영양호로 바뀌면서 많은 생물들이 살 수 있는 노년기 호수로 바뀌게 된다. 호수의 깊이가 얕아짐에 따라 예전에 살 수 없었던 물 속에 잠겨 살아가는 식물들이 자라게 되고, 다시 계속 얕아져 잎이 물위에 떠서 살아가는 식물이 자라면서 또 이곳에 늪 주변에 서서 살아가는 식물이 자랄 수 있게 되어 늪으로 변한다. 늪은 수심이 얕으므로 대부분의 지역에서 물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이 많이 자라게 된다. 늪의 기슭과 중심부에 식물이 더욱 많이 자라게 되면 늪 전체가 식물의 찌꺼기로 쌓이게 되고, 식물의 찌기는 물 속에서 세균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 분해되지만 독성이 있는 물질이 생겨나서 결국 세균 자신도 살 수 없게 된다. 그 후 계속 쌓여진 식물들은 썩지 않고 오랜 시간이 흘러 모여서 이탄을 형성하게 되고, 늪의 수위가 주변의 높이와 같아지고 사초류, 골풀 등이 밭을 이루게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곳에 초원이나 습지산림이 형성되고, 결국에는 육상식물이 가득 자라는 산림으로 변하게 된다. 섬진강의 물길에 의해 만들어진 동정호는 그동안 사람들의 간섭에 의해 그 몸의 대부분을 농경지로 바꾸게 되었다. 일부 남아있던 부분도 저수지의 기능을 잃게 되어 현재는 손바닥 만하게 남아 있는데, 앞으로의 운명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즉 동정호는 자연적인 힘에 의해 천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힘에 의해 늪이 변하고 있어, 앞으로 늪의 운명이 어찌될 것인지 예측할 수가 없다. 동정호 주변의 문화와 문학 그리고 역사 악양천과 동정호의 맑은 물로 몸을 적시던 악양벌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곳이다. 소설은 동학농민혁명에서부터 광복까지의 우리나라 근대사를 최참판댁의 변화 과정을 통해 그리면서 민족애를 담고 있는 대서사시이다. 만석꾼인 최참판댁의 힘은 악양벌에서 나왔고, 또 악양벌의 풍요로움은 동정호에 의해 살찌워졌다. 평사리에 위치한 최참판댁의 한옥에 서면 더 넓은 악양벌과 한 구석으로 밀려난 동정호가 아스라이 바라다 보인다. 이처럼 문학이든 문명이든 풍요로움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다. 평사리에는 3헥타르의 부지에 최참판댁 한옥 10동과 초가집 29동을 복원하여 두었다. 이곳에 가면 그 당시 생활모습을 일부나마 담은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또 평사리문학관에는 하동과 관련된 문학 작품인 박경리의 ‘토지’, 김동리의 ‘역마’를 비롯하여 다수의 하동 문학인을 소개하고 있다. 통영에서 출생해 진주에서 학교를 다닌 작가가 1960년대 화개마을의 친척집을 방문하는 길에 만난 악양벌은 바로 소설의 무대가 되게 하였다. 지리산의 품에 안긴 악양벌과 더 넓은 산자락, 동정호의 푸른 물결, 금빛 모래로 뒤덮인 섬진강변, 지리산에 안겨 살아온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작가의 손놀림을 더욱 쉽게 하였을 것이다. 사국시대 가야의 땅이었던 이곳에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아들들이 와서 처음으로 불국정토를 연 섬진강은 여러 고찰들을 품고 있다. 화개동계곡이 끝나는 곳에 위치한 칠불사는 김수로왕의 아들들이 성불이 된 곳으로 한번 장작불을 붙이면 한 달 동안 열기가 지속되는 아자방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화개장터에서 10리 거리에는 쌍계사가 있는데, 신라 문성왕 2년에 진감선사가 중국 선종의 육조대사인 혜능의 초상화를 모시면서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경내에는 비문을 최치원이 적은 국보급인 진감선사 태공탑이 세워져 있다. 그 외에도 가까운 곳에 피아골의 연곡사, 화엄사골의 화엄사와 천은사 등이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섬진강과 지리산의 정기와 이슬을 먹고 사는 차나무밭이 지천에 즐비하다. 이곳의 녹차 재배는 사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신라 흥덕왕 3년 당나라로 사신 간 대렴공이 차 씨를 가져와 쌍계사 근처인 화개계곡 근처에 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평사리 뒷산인 형제봉의 중턱에는 사국시대에 축성된 고소성이 있다. 둘레가 350미터인 이 성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에 위치하여 먼 옛날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또, 평사리에서 묵계재를 넘으면 운둔과 비기의 땅인 청학동이 나타난다. 이처럼 동정호 근방의 강토는 아름다움과 문화 및 문학의 땅이다. 자연과 사람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 더 발전될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이야기가 절로 만들어지는 법이다.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던 동정호가 지금 사라지고 있다. 늪의 기능이 물을 저장하여 생물들에게 삶의 보금자리만 제공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 자연을 이용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심성과 살아감의 의미도 주기에 작은 자연물이지만 보존할 값어치가 있다.
문제1 즐거운 학교를 만들기 위한 학급경영의 방침과 담임의 역할에 대해 논술하시오. 1) 序論 학급경영이란 학급의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인적·비인적 자원을 활용하여 계획, 조직, 지도, 통제하는 일련의 활동을 통하여 학급을 운영하는 협동적 활동이다. 그런데 학생은 교실에서 배우고 경험하면서 성장·발달하기 때문에 학급은 학생의 교육활동의 장이고, 학급경영은 학교교육의 성과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따라서 교사는 학교교육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바람직한 학급경영을 해야 한다. 2) 학급경영의 방침 즐겁고 효율적인 학급경영활동을 위해서는 우선, 모든 학급경영활동이 교육의 본질과 목적에 부합하도록 운영되어야 한다. 즉,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 성장·발달한다는 신념 하에 학생 개개인의 지적, 정서적, 신체적 능력을 최대로 계발하여 자아실현된 인간에 도달할 수 있도록 운영되어야 한다. 둘째, 학급경영의 구상과 전개가 학생의 이해를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학생의 발달단계에 따른 지적, 정서적, 신체적, 사회적 발달의 특징과 학습능력 및 준비도, 그리고 집단의 역학과 사회적 심리의 이해를 근거로 운영되어야 한다. 셋째, 학급경영은 민주주의의 이념, 즉 인간존중, 자유, 평등, 참여, 합의 등에 입각하여 운영되어야 한다. 학생 구성원 개개인의 인격이 존중되고 자유로운 학급분위기가 조성되며, 학생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책임질 수 있는 자율적 행동이 조장되어야 한다. 넷째,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학급이 운영되어야 한다. 학급의 자원을 경제적으로 사용하여 학급의 목표를 달성함과 동시에 학급구성원의 심리적 만족을 충족시키는 학급운영이 되도록 해야 한다. 다섯째, 학급집단의 안전과 이익을 위하여 협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생활환경적 조건을 마련해 주고 지도해야 한다. 일상의 학급생활 중 혼자의 활동보다 여러 사람이 협동하여 활동함으로써 보다 유익한 성과가 나타나는 경험의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밖에 자유의 원리, 협동의 원리, 노작의 원리, 창조의 원리, 흥미의 원리, 요구의 원리, 접근의 원리, 발전의 원리에 입각해서 운영되어야 한다. 3) 담임의 역할 첫째, 학급담임으로서의 역할을 자각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수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학급담임은 교육자로서, 그리고 학교라는 조직집단의 일원으로서의 자각과 더불어 학급경영관리의 책임, 학생지도의 책임, 학년 간의 연계와 조정, 부모와의 협력체제를 통한 지도가 필요하다. 둘째, 학생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 이해는 객관적·발달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애정은 차별적 사랑과 평등한 사랑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학교가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자유로운 교육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셋째, 자기 자신의 인격과 식견을 높이고, 항상 연수에 힘써야 한다. 학급담임은 개성 있는 학생을 지도하기 때문에 일방적인 주장에 치우치지 않고 넓은 교양과 인간성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4) 結論 학급이 학생들의 차이를 낳는다. 교사의 노력 여하에 따라 효과적인 학급문화와 풍토를 조성할 수 있고 이는 학생들의 행동 지침이 되어 학급 간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만큼 교사는 자신의 역할을 인식하고, 자신의 전문성을 향상시켜 사랑과 믿음으로 학생들을 이끌고 안내해야 한다. 학생의 모델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교사는 자기성찰과 전문성 향상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문제2 아래 글에서 밑줄 친 수업의 이론적 근거와 단위학교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서술하시오. 학부모 1 : 우리 아이는 배우는 내용을 다 알고 있어서 학교 수업이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합니다. 학생들에 맞게 수업을 하실 수는 없나요? 학부모 2 : 그건 잘하는 아이들이나 그렇죠. 우리 아이는 수업이 어려워서 따라가기 힘들다고 하던데요. 교 사 1 : 한 학급에 학생 수도 많고, 학생들 간의 학력차도 크다보니 개별지도 하기가 어렵습니다. 교 사 2 : 7차 교육과정에서 이것을 구현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교육과정에서 제시된 수업을 해야 하지만 실천이 잘 안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1) 序論 수준별 교육과정은 학습자의 학습능력 수준과 요구에 대응하는 차별적, 선택적 교육과정을 제공하여 학생들의 학습결손을 최소화하고, 잠재력을 계발함으로써 교육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 제7차 교육과정도 21세기를 주도할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한국인을 육성하기 위해 ‘자율과 창의에 바탕을 둔 학생 중심 교육과정’을 지향하고 있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수준별 교육과정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프로그램 부족과 교사들의 노력 미흡 등 기타 학교여건이 열악하여 학교현장에서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2) 수준별 교육과정의 이론적 근거 Piaget의 인지발달이론에 의하면 적정수준의 인지적 갈등이 학습동기를 유발한다고 한다. 이에 근거하여 학생의 수준과 발달단계를 고려한 개별화된 과제를 제시함으로써 학습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Vygotsky는 발달과 학습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근접발달영역(ZPD)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 또한 교육의 적합성과 수월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학생의 근접발달영역을 파악하고, 다양한 과제를 제시한다면 효과적인 수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드너(H. Gadner)의 다중지능이론에 따르면 지능은 여러 문화권에서 가치있게 인정되는 문제를 해결하고 결과를 창조해 내는 9가지 다양한 능력으로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난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적, 교육 심리적 요구에 따라 학생들의 능력, 적성, 필요, 흥미에 대한 개인차를 고려한 교육과정의 차별화, 다양화를 기함으로써 학생들의 성장 잠재력과 교육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3) 단위학교에서의 실천방안 따라서 수준별 교육과정을 단위학교에서 효율적으로 운영하려면 우선, 효율적인 반편성과 선택이 되도록 해야 한다. 수준별 반편성으로 인해 낙인되었다는 인식으로 부정적 자아개념이 형성되거나 우열반으로 인식된다면 교육과정의 취지와 달리 사교육에 의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사는 수준별 반편성의 취지와 자신에 적합한 반 선택에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한다.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 적성이나 흥미에 적합한 반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수한 강사 선발을 위한 장치를 마련하고, 체계적인 개별화 프로그램이나 교재 등을 만들어야 한다. 끝으로 교육시설의 확보, 교육 콘텐츠 개발 등 교육여건 개선을 통해 학교교육의 내실화를 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의 전문성 신장과 실천의지이다. 교사가 학생에 대한 높은 기대와 평가를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도한다면 열악한 교육여건도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4) 結論 수준별 교육과정은 세계화, 정보화 시대를 주도할 자기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인간 육성을 위한 방안이다. 취지에 맞는 인재양성을 위해서는 학교 실정에 맞는 탄력적인 운영으로 학생들의 개별 학습 기회를 확대하고 개인차를 최대한 반영함으로써 학생들의 잠재 능력이 충분히 계발, 급변하는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일선학교의 개선 의욕과 실천 의지가 가장 중요하며, 교육 실천가인 교사의 의식변화와 학생 이해를 위한 노력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문제3 신규교사인 K교사는 A중학교 2학년 3반 담임을 맡게 되어 가정통신문을 발송하려고 한다. 아래의 조건을 참고하여 학급경영방침과 구체적 실천방안을 포함시켜 가정통신문을 작성하시오. 조건 ○ 학급구성 : 남학생 18명, 여학생 17명 ○ 학교위치 : 신흥택지지구(상업지구 인접) ○ 학부모의 교육수준 : 낮다. ○ 특이사항 : 맞벌이 부부가 많다. 1) 序論 학급경영은 교육활동의 장인 동시에 생활의 장인 학급의 교육적 환경을 바람직하게 정비하고 운영하는 봉사활동입니다. 학급경영의 책임자인 교사의 경영방침과 언행은 학생의 성장과 발달은 물론 학급풍토 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교사는 다양화, 민주화 사회에 대응하여 지역사회의 특성과 학생 그리고 학부모의 요구를 반영한 창의적인 학급경영으로 교육의 효과성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2) 학급경영 방침 본 교의 특성은 학부모들의 교육수준이 낮고 맞벌이 부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업지구가 인접한 남녀공학의 학교입니다. 이런 지역에서는 자칫 학부모의 무관심으로 학생들의 학습지도가 소홀해질 수 있고, 방과 후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특히 PC방이나 게임방, 만화방 등 학생들을 유혹하는 각종 유해환경은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인터넷 게임 중독이나 비행을 조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 교사는 정규수업은 물론 방과 후의 다양한 교육활동 운영과 생활지도를 통해 전인적 발달을 이룰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3) 실천방안 이를 위해 우선 학습지도를 강화하겠습니다. 지식정보화사회에서 학력은 개인의 발전은 물론 국가의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수준별 교육과정의 효율적 운영이나 방과 후 보충지도를 통해 학습부진아를 최소화하고 특히 토픽이나 프로젝트 학습과제 제시와 수행평가를 통해 자기주도적 학습능력과 협력학습능력을 신장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방과 후 특기적성 교육을 통해 잠재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학생들의 소질과 적성 계발을 위해 방과 후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진로상담이나 지도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갈 수 있도록 조언할 것입니다. 끝으로 생활지도를 강화해서 건전한 학교생활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호기심이 많은 중학생들을 유혹하는 각종 유해환경을 감시하고 지역주민들을 설득해서 교육적 환경조성에 협조하도록 계도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와 협력하여 다양한 놀이공간을 마련해 주고 동아리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건전한 청소년문화를 향유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4) 結論 다원화 시대에 학생들을 교육하는 데 학교나 교사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인재양성을 위해 가정과 학교가 상호신뢰를 가지고 정보를 공유하고 상호 협력할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본 교는 교육의 전문가로서 교수·학습방법 향상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가정, 지역사회와의 협력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스승을 존경해야 공교육이 살아납니다” 5월은 교사들이 많은 이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달이지만 교사들에게는 골치 아픈 달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스승의 은혜를 기리고자 제정됐다는 이 날 전후로는 어김없이 ‘촌지’ 문제로 교육계며 온 나라가 떠들썩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존경받는 스승’보다도 ‘촌지 받은 교사’가 신문의 헤드라인을 화려하게 장식하곤 한다. 우리 교육이 왜 이렇게 됐을까. 하지만 교사들이 이런 세태를 탓하며 한숨을 쉬고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사람이 있다. 지난해에 이어 2년째 ‘선생님 섬기기’를 학교의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서울 강남초 김철규 교장이 바로 그 주인공. 김 교장을 만나 요즘의 스승 존경 풍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지난해 강남초에 부임하신 이후로 ‘선생님 섬기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계십니다. 왜 이 운동을 시작하게 되셨습니까? “개교 60주년을 맞은 강남초에 부임하면서 학교 발전을 위한 새 목표를 미래의 리더를 기르는 ‘초일류 강남초 만들기’로 정하고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교육이 어떤 것인지 고민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기본이 바로 선 교육’을 하자는 것입니다. 학부모와 학생이 선생님을 믿고 존경하는 ‘기본’이 갖춰져야 교육이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가 달라지려면 무엇보다 선생님과 학생이 만나는 곳, 즉 교실이 달라져야 합니다. 교사가 그 변화의 리더여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학교는 99.9%가 선생님의 영향력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초등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인성교육은 교사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선생님 섬기기 운동’은 이렇게 중요한 우리 교사의 어깨에 힘을 실어 주자는 것입니다.” -교권이 추락하고 있다는 요즘, 교사라면 누구나 가장 바라는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동안 교사의 열정을 가로막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까. ‘철밥통’이라 불리기도 하고, 일부 교사들의 일이 전체 교사의 잘못으로 비춰져서 교육에 열정적인 교사들의 사기까지 꺾어 놓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사가 움직이지 않고는 교육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세태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에게 선생님을 우리 사회에서 미성숙하고 나쁜 사람으로 바라봐서 좋을 게 뭐냐고 되묻고 싶습니다. 교사는 비난, 비평의 대상이 아니라 섬김의 대상이라는 것, 마음속에 선생님을 따르고 섬기는 마음이 있을 때 학생들의 배움도 절정에 이른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는 것, 그것은 돈이 들지도 큰 희생을 요구하지도 않는 일입니다. 누구나 마음만 보태면 교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운동을 언제부터 계획하셨습니까? “1998년 IMF 시절 서울시교육청 장학사로 근무할 때부터입니다. 그때 정년단축이 되면서 함께 교육을 펼치던 일선의 교사들이 교육현장을 떠나게 됐을 때 극심한 충격을 경험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정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고, 일부는 외면해버렸습니다. 교육이 이렇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공교육 정상화에 내 모든 노력을 다하자고 결심했죠. 특히 공교육 정상화의 키, ‘교사 존경 운동’을 펼쳐야겠다는 로드맵을 세우게 됐습니다.” -‘선생님 섬기기 운동’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지난해와 올해 3월 학부모, 어린이, 동창회원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선생님 섬기기 선포식’을 가졌습니다. 120명의 학부모를 중심으로 한 ‘선생님 섬기기 학부모회’도 조직되어 있고, 동창생들과 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선생님 섬기기 운동 상도동 본부’도 추진중입니다. 학교, 학부모, 지역사회가 한마음으로 이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스승은 있기 때문에 좋은 취지를 설명하면 공감하고 함께 나서고 있습니다. 이제 시작 단계라고 볼 수 있지만 아이들의 달라진 모습에서 교사들이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하는 등 벌써 학교에서 변화가 느껴지고 있습니다. 상도동에서 펼쳐진 운동이 동작구로 서울로 전국으로 퍼져 나가길 기대합니다. 선생님 섬기기 운동이 활성화된다면 공교육 정상화도 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추진하시면서 어려운 점은 없는지, 또 운동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보십니까? “혼자 스승 존경 운동을 주장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학부모의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죠. 지난해에 처음 운동을 전개하면서 학부모에 대한 설득과정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올해에는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교육공동체, 학부모, 지역사회에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홍보할 예정입니다. 미흡했지만 지난 1년 동안 운동을 펼쳐오면서 학부모와 학생들이 선생님에 대해 믿음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와 선생님이 하는 일들에 대해서 학부모들이 전폭적으로 믿고 지지해주기 시작했죠. 아주 의미 있는 변화라 생각합니다.” -더 존경받는 스승이 되려면 선생님들도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물론입니다. 교사들에게 항상 ‘평생 공부하는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존경과 믿음을 받으려면 교사 스스로 열심히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본교에서는 ‘선생님 세상 알기 연수’를 실시하는 등 다방면으로 선생님들의 잠재성을 끓어 올리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교사들은 구조적으로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교사의 산 경험이 어떤 것보다도 수업에서 값지다는 것을 교육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교사들의 지적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자발적 세상 알기 연수입니다. 세상 보는 눈이 트이도록 스스로 공부하는 선생님이 되자는 것이죠. 배우면 배울수록 가르치고 싶은 열정이 살아나게 마련입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다른 무엇보다 학생들의 인성교육에 중점을 두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은 무엇보다 ‘바탕 공부’가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인성교육입니다. 초등학생에게 중요한 것은 나에 대해 탐구해서 자아 존중감을 기르고, 남과의 차이를 알아가며, 또 그 사이에서 관계를 배우면서 꿈을 키워 실천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학생들의 잠재력도 깨어나는 것이죠. 아이들의 정체성을 길러주고 싶습니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김영삼 전 대통령,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등 사회 저명인사들을 여러 번 강남초의 특별 강연에 모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초일류 학교를 만드는 주체는 교사, 학생, 학부모, 동창 그리고 지역주민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가 앞장서서 이들을 공부할 수 있게 교육의 장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미래의 리더를 기르려면 본받고 싶은 인물이 있어야 하고, 이런 분들의 말 한마디가 천 마디의 공부하라는 말보다도 확실히 교육 효과가 더 높습니다. 강연을 통해 아이들과 교사 모두 목표와 꿈, 비전을 확실히 그렸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교직생활을 해오시면서 남다른 교육철학이 있다면. “아이들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키워주는 선생님이 되자는 것입니다. 교사는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아닙니다. 적어도 교육전문가라면 아이의 잠재력을 끌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학생마다 잠재력이 발현되는 시기와 계기는 다 다르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교사의 위치입니다. 교사들에게 ‘교육의 베스트셀러를 내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학생들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키워서 자기주도적 학습이 가능하게 하는 것, 저는 이것이 바로 교육의 시발점이라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교육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교육이 발전하면 국력이 신장되고, 아이들 걱정이 없으면 가정이 편해집니다. 갈수록 돈이 강조되고 있지만 그보다 마음을 보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요즘입니다. 지금 우리 교육에는 교육공동체가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학교, 선생님, 학부모, 지역사회가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 말입니다. 또 가정의 밥상머리 교육이 되살아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인성교육은 학교 교육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학부모 연수를 실시해서 어떻게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해야 합니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16개 시·도 교육네트워크’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교육 사랑방’이라 이름 붙여봤는데 정보화 시대인만큼 교육자라면 누구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커뮤니티입니다. 또 ‘영원한 교사 프로젝트’도 구상 중입니다. 순수하게 교육을 사랑하는 은퇴한 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교육 봉사 프로그램입니다. 교육에 대한 궁금증이라면 무엇이든 상담을 해주는 것이죠. 또 은퇴한 후에도 선생님 섬기기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 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