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01 (목)

  • 맑음동두천 26.0℃
  • 구름많음강릉 28.0℃
  • 구름많음서울 24.5℃
  • 맑음대전 25.8℃
  • 맑음대구 26.1℃
  • 맑음울산 22.5℃
  • 맑음광주 25.0℃
  • 구름조금부산 21.0℃
  • 맑음고창 25.3℃
  • 구름조금제주 18.9℃
  • 구름조금강화 22.5℃
  • 맑음보은 25.4℃
  • 맑음금산 26.8℃
  • 맑음강진군 22.8℃
  • 맑음경주시 28.3℃
  • 맑음거제 21.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그리스 세계가 페르시아에 패했더라면

조선이 천주교를 수용했더라면, 청이 1840년의 아편전쟁에서 승리했더라면,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가 위기로 끝나지 않았더라면… 사가들은 역사의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대체로 가정적 접근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가정적 접근은 사건의 역사적 의미나 위치를 바르게 파악하고 역사의 흐름을 읽는 혜안을 기르는 데 도움을 준다.

BC 490년. 아테네의 밀티아데스는 아테네 북방의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군 1만과 플라테이아군 1천을 이끌고 2만 5천여 페르시아군에 맞섰다. 페르시아의 기병이 주력군과 떨어져 있음을 확인한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군의 측면을 공격한 후 포위하는 데 성공했으나 결국은 참담한 패배로 마라톤전을 끝냈다.
BC 480년. 아테네해군은 8일 전 아테네를 정복하고 약탈한 페르시아군과 살라미스 해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역시 대패했고, 그로 인해 최초의 동양과 서양의 전쟁으로 운위(云謂)되기도 하는 페르시아전쟁도 10여 년 만에 막을 내렸다.

물론 사실은 그 반대였다. 그리스는 마라톤전과 살라미스해전을 값진 승리로 장식했다. 하지만 만약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세계가 페르시아에 패했더라면 고대 그리스의 역사, 아니 서양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서양문화의 뿌리, 고대 그리스
1820년대에 그리스인들이 400여 년에 이르는 오스만 제국(현 터키)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운동을 일으켰을 때 영국 시인 셸리는 “우리의 법률, 우리의 문학, 우리의 종교, 우리의 예술, 그 모든 것의 뿌리는 그리스에 있다. 그리스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아직까지도 야만인과 우상숭배자로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춘추전국시대의 문화가 중국권 동양문화의 토대였다면 고대 그리스문화는 문자 그대로 서양문화의 뿌리였다. 영어 ‘music(음악)’과 ‘museum(박물관)’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 Muse(뮤즈 : 제우스의 딸로서 시·음악·무용 등을 관장한 아홉 여신 중의 하나)에서, ‘January(1월)’가 Janus(야누스 : 두 얼굴을 가진 문의 수호신)에서 파생됐고 ‘uranium(우라늄)’이 Urania(우라니아 : 천문학을 관장하는 여신), ‘gas(가스)’가 Chaos(카오스)에서 유래한 것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상징하는 철학, 호메로스의 서사시, 아이스킬루스와 소포클레스 등의 비극,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역사학,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해 제우스·아폴로·포세이돈·니케 신전 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신전들, 비너스·니케·엘긴 마블스 조각들 등 이 모두가 후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BC 490년의 마라톤전과 480년의 살라미스해전에서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가 패했을 경우 그 모든 것들이 존재했을까? 그 무렵 이란에서 발흥한 페르시아는 소아시아까지 진출했다. 페르시아의 서진(西進)은 영토 확장은 물론 지중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지중해는 오늘날도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고대에는 지중해를 장악하는 세력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마라톤 신화 탄생시킨 마라톤전
서쪽으로 영토를 넓혀가던 페르시아는 이오니아(지중해 연안)의 그리스계(系) 폴리스들을 짓밟았고 BC 492년에 결국 발칸 반도에 침공했다. 하지만 태풍이 페르시아의 그리스 정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는 포기하지 않고 기원전 490년에 두 번째 원정을 단행했다. 페르시아는 에게 해를 건너 유베아 섬을 거점으로 삼고 한때 아테네를 통치했던 반역자 히피아스의 안내를 받으며 아티카 반도로 달려들었다. 아테네의 밀티아데스는 민회를 설득해 마라톤 평원에서 자웅을 겨루기로 했다.

9월 12일 마라톤 평원에 진을 친 아테네는 1만 명의 중무장 보병과 폴리테이아의 원군 1천명 등 1만 1천 명으로 2만 5천의 페르시아군을 맞아 사력을 다해 싸웠다. 대담하고 용의주도한 밀티아데스를 비롯한 10명의 장군이 그리스군을 지휘했다. 12일 새벽에 페르시아 주력군에 기병이 없음을 확인한 밀티아데스는 양 날개를 보강한 다음 적을 그리스군의 중심부로 밀어붙였고 결국은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포위당해 맹공을 받던 1만 5천 페르시아군은 급기야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아테네·폴리테이아군은 문자 그대로 완승을 거두었다. ‘역사학의 할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테네군은 192명이 전사한데 반해 페르시아측은 6400명이나 전사했다. 다리우스는 군대를 철수시켰고 더불어 2차 페르시아전쟁도 막을 내렸다.

마라톤전의 신화는 그로서 끝나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그때 전령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42.195㎞를 한숨에 달려 “기뻐하시오. 우리가 이겼소!”라고 말한 다음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마라톤전을 앞두고 페이디피데스가 원군요청서를 들고 스파르타까지 240㎞를 이틀 만에 달려 임무를 완수했다고 한다. 어쨌든 아테네인들은 마라톤전의 승리와 그 전령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의 올림픽경기에 ‘마라톤 경주’를 포함시켰다. 마라톤 경주는 근대 올림픽에도 채택되어 대미를 장식하는 꽃이 되었다.

아테네 해군, 그리스를 지켜내다
그러나 그리스 세계의 비극은 종결되지 않았다. 다리우스를 이어 페르시아의 황제가 된 크세르크세스가 36만여 대군-헤로도토스에 따르면 5백만이 넘었다-을 동원해 수륙양면으로 침공했다(BC 480). 200여 개의 폴리스(polis)로 구성된 그리스 세계는 그야말로 풍전등화 처지였다. 10년 전의 마라톤전 때까지도 뭉치지 못했던(당시 종교적 축제 중이던 스파르타는 축제도 축제지만 아테네가 승리해 그리스 세계의 패자가 되는 것도, 페르시아가 이겨 스파르타를 포함한 전체 그리스를 지배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어 아테네의 원군요청 수용을 주저했고 그 사이 아테네는 고군분투해 승리했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힘을 합쳐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크세르크세스가 아테네만이 아니라 전체 그리스를 정복하려는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상전은 그리스연합군의 완패로 끝났다. 스파르타의 팔랑크스(密集步兵)가 주력군이던 그리스연합군은 기원전 480년 8월 스파르타 국왕 레오니다스의 지휘 하에 테살리아 남쪽 테르모필레에서 적군과 혈전을 벌였다. 7천여 그리스연합군은 6일 동안 분투하며 버텼으나 결국 참패했다. 레오니다스와 그를 옹위하던 1천여 전사는 최후의 1인까지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가서 말하라. 여기 누워있는 우리 스파르타인들은 적의 칼에 쓰러져 여기 잠들었노라고.” 후일 그곳에 세워진 비석의 한 구절이다.

해전은 아테네 몫이었다. 스파르타가 보수적 농업국이며 육군국이었다면 아테네는 개방적 교역국이며 해군국이었다. 지상전에 완패했으므로 아테네가 맡은 해전만이 그리스세계의 남은 한 가닥 희망이었다.
“나무벽 안으로 피신하라”는 신탁(神託)을 쫓아 해전에 운명을 걸자고 주장한 인물은 테미스토클레스였다. 페르시아의 대형 겔리선 800여 척을 370여 척의 소형 3단 노(擄)겔리선으로 대적해야 했던 그는 큰 배에 유리한 대해를 피해 좁고 물살이 빠른 살라미스 해협으로 적선을 유인했다.

그리스의 운명이 걸린 기원전 480년 9월 29일. 소형이라 기동력에서 앞선 아테네해군은 11시간에 걸친 해전에서 완승했다. 아테네의 소규모 함선들이 단단한 뱃머리로 페르시아함선의 옆구리를 들이받아 파괴하고 수병들은 적선에 뛰어올라 장창을 휘둘렀다. 페르시아는 300여 척의 전선을 잃은 데다 나머지 전선들도 뿔뿔이 흩어졌지만 아테네는 40여 척을 잃었을 뿐이었다. 12척으로 133척의 왜적을 좁고 물살이 빠른 울돌목으로 유인해 대승한 이순신의 명량해전과 비교된다.

그리스연합군은 이어 벌어진 육전에서도 테르모필레에서의 패전을 되갚았다. 당시 페르시아육군은 테살리아의 동북부에서 아테네 부근의 플라테이아로 옮겨와 있었다. 스파르타군을 포함한 그리스연합군은 페르시아와 그 동맹국 테베의 군대를 꺾었다.

그때 테베 등 그리스의 일부 폴리스는 대국 페르시아에 붙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때 10만의 그리스연합군이 페르시아군과 싸웠는데, 아테네의 보병이 페르시아군을 패퇴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전쟁 승리 후 찬란한 문명 꽃피워
살라미스해전에 이어 플라테이아에서도 패한 크세르크세스는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고, 10여 년에 걸친 페르시아전쟁도 끝났다. 전쟁을 주도한 아테네는 전후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크게 발전했다. 그리스 세계가 페르시아의 도전을 일축하고 지중해 제해권을 확고히 장악했으므로 아테네를 비롯한 폴리스들의 지중해 해상활동은 더욱 왕성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전후 최대의 번영기를 맞이한 아테네에서는 민주제가 확립되고 파르테논 신전이 재건되는 등 활기가 넘쳐흘렀다.

철학을 비롯한 학문과 예술이 만개한 것도 페르시아전 이후의 일이었다. 물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페르시아전쟁 50여 년 후에 일어난 펠로폰네소스전쟁 이후에, 즉 페르시아전 후의 번영기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 세계가 몰락의 길에 들어섰을 무렵에 활동했지만 말이다. 페르시아전 후의 번영기 아테네를 이끈 페리클레스는 그때 아테네를 ‘그리스의 학교’라고 자랑했지만, 그리스 고전문화를 주도적으로 창조한 것도 아테네였다.

그리스 세계는 페르시아전쟁 후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해 결성한 델로스 동맹(BC 478)-아테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맹국의 동맹 탈퇴를 불허하고 동맹회비를 마음대로 사용하는가 하면 자국의 화폐를 동맹국 공용의 화폐로 만들고 동맹국들의 재판권마저 장악하는 등 동맹국들 위에 군림했는데, 사가들은 그것을 아테네의 제국화(帝國化)로 규정한다-과 스파르타가 주도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분열해 대립하다 결국 30년에 걸친 내전인 펠로폰네소스전쟁(BC 431~404)으로 무너지고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에게 병합되었다(BC 339). 그리고 20세에 마케도니아의 통치자가 된 알렉산드로스대왕이 그리스 세계를 괴롭힌 페르시아에 대한 응징이기도 한 동방원정에 나서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유럽·아시아·아프리카에 이르는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역사를 이룩하였다.


야만적 후진지역에서 벗어나
페리클레스의 말대로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의 학교였다. 아테네와 더불어 패권을 겨루던 군국체제의 스파르타는 그리스 고전문화에 거의 기여한 바가 없지만 민주체제의 아테네는 빛나는 고전문화를 창조했다. 그리스 문화하면 아테네고 아테네하면 그리스 문화를 생각하지 않는가. 하지만 마라톤전이나 살라미스해전에서 패했더라면 그리스의 역사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전쟁을 그리스인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 전쟁으로 평했지만 패했을 경우 아테네는 자유를 자랑하고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기는커녕 생존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헬레니즘세계-로마’로 이어지는 고대 지중해 세계의 역사는 물론 고대 이후의 지중해 세계 역사도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은 세계사의 주역이 아니라 셸리의 말처럼 야만적 후진지역으로 남아있을지 모른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