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들이 정부를 향해 반기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국가를 위해 일생을 헌신해온 공무원들의 마지막 노후보장인 연금이 용돈수준으로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적은 보수에도 성실히 근무하면 노후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공무원연금 정책이다. 이러한 정부의 약속과는 달리, 이제 와서 국가재정이 조금 어렵다고 해서 마치 공무원을 세금도둑으로 모는 것은 온당치 못한 행태다. 물론 국가경제가 어렵고 국가재정의 주요 압박요인이라면 당연히 공무원연금 개혁을 해야 한다. 하지만 개혁의 과정은 당사자 의견을 충분히 듣고 서로 양보와 이해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그러함에도 정부와 여당은 정상적 절차를 무시하고 공무원연금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앞세워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기에 공무원들이 분노하고 급기야는 총력투쟁 결의대회로 맞선 것이다. 여당은 국민대타협기구의 합의안 도출 여부와 관계없이 28일 기구 활동을 종료하고 국회 공무원연금개혁 특별위원회로 넘겼다. 도저히 타협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밀어붙이기식 정치적 압력은 민주적 대타협이 아니라 공무원에 대한 기만이며 국민대타협의 약속을 파기하는 구태 정치행태다. 이제라도 정부는 공무원연금 소득대체율을
정부가 공무원 연금을 왜곡하는 영상 광고로 가난한 교사의 소박한 꿈을 거덜 내더니, 이젠 서울시교육청이 영상 홍보를 통해 아예 대놓고 교사 집단을 돈벌레 취급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 않아도 ‘김영란법’이다 뭐다 해서 뒤숭숭한데 서울교육감조차 교사의 발등을 찍고 만 셈이다. 그래도 페스탈로치가 되고자 했고, 돈 보스코처럼 가난한 이들의 희망이 되고 싶었던 교사들을 일거에 매도하는 것은 해도 너무 했다. 세상이 돈의 노예가 되다보니 모두 돈을 좇는 사람처럼 취급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아직 썩지 않은 게 교사집단 아니던가. 일부의 몰지각한 촌지 수수를 50만 교사의 타락한 모습인 양 호도하는 것은 전체 교원들에 대한 치욕적 명예 훼손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교사들이 자긍심 하나로 묵묵히 참아왔는데, 고작 돈푼이나 얻어내려는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분명 비열한 ‘갑(甲)질’이다. 스승의 날이면 더욱 더 비참해진다. 종례 때 절대 아무 것도 가져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해야 한다. 그리하여 온정조차 차단 된 교실, ‘은혜’라든가 ‘감사’ 같은 말을 ‘대가성 뇌물’로 이해하는, 스승이고 뭐고 고발과 감시의 대상이며 그것이 ‘정의’인 줄 알아가는 학생들 앞에
교직, 27년째다. 그 많은 세월 교단을 지키면서 가장 큰 슬픔은 두 여학생이 스스로 삶을 마감한 사건이었다. 한 여학생은 재직한 학교에서였다. 평소 밝게 웃는 편이었지만 시험을 얼마 남기지 않고 우울증을 이기지 못해 생을 마감했다. 또 다른 슬픔은 이웃에 있는 여중생이었다. 둘 다 ‘공부와 성적’이 죽음의 원인자(原因子)였다. 초‧중‧고등 교육 전반적 변혁을 이런 죽음을 목도할 때마다 나 자신에게 묻는 한 가지는 ‘학생들이 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데 왜 교육을 바꾸지 않는가’였다. 학생 자살의 가장 큰 이유는 ‘가정불화’, ‘친구관계’이긴 하나 ‘성적 경쟁’과 이로 비롯되는 학생들의 ‘학업 부담’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과연 부정적 교육 프레임을 변화시킬 수 없는가. 초중등 교육에서 성적 순위보다는 ‘핀란드형 평가’ 제도 도입이 어떨까. 현재 우리의 중·고교 평가는 중간, 기말고사로 나눠져 있는데 대부분 평가 결과는 순위가 매겨지고 이는 공개되기 마련이다. 교사나 학부모는 학생들을 성적프레임에 가두고 선입견을 둔다. 일절 다른 특기나 재능이 묻혀버리는 학교 토양이다. 때문에 음악이나 미술, 체육 교과를 아무리 잘
지난 2월 어느 날 아침, 학교 복도에서 마주친 한 2학년 아이가 존경한다는 말과 함께 공손히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교장선생님, 할 말이 있는데요”하면서 주변을 살피기에 아이 가까이 귀를 댔다. 아이가 말하길 “교장선생님이 담임선생님을 정하는 거라고 들었는데 내년에도 지금 우리 선생님을 꼭 담임되게 해주세요. 꼭요”라고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건 여러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결정하는 것이지 내 맘대로 하는 건 아니라고 알려줬다. 그래도 그 아이는 거듭 부탁을 했다. 다음 날 아침, 빙판길을 달리는 통학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2학년 아이가 나를 발견하더니 색종이 봉투를 건넸다. 그 아이는 전날 복도에서 만난 아이와 같은 반이었고, 건네준 편지에는 역시나 같은 부탁이 담겼다. 또 다시 행복한 고민이 시작되면서 해당 2학년 담임선생님의 감동적인 모습들이 스쳐지나갔다. 학부모 공개 수업 날, 학부모들에게 내 반 아이들의 생생한 모습을 전해주고자 새벽 2시까지 작업했다는 동영상 자료, 5명의 다문화 학생들을 위해 전날 퇴근해서 시장을 돌며 준비한 재료로 아이들과 월남쌈을 만들던 모습, 베트남에서 온 학부모를 위해 학교생활 안내서를 인터넷
수학여행(修學旅行)의 사전적 의미는 ‘학생들이 실제 경험을 통해 지식을 넓히기 위한 학습 활동의 하나로 교사의 인솔 아래 실시하는 여행’이라고 돼 있다. 예전의 수학여행은 학교에서 정한 일정표에 따라 학년 단위로 움직이는 관람 중심의 여행으로, 이 같은 수학여행 본래 취지를 기대할 수 없었다. 더욱이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가족여행이 많아졌고 일부 학교에서는 경비를 들이더라도 외국으로 수학여행을 보내는 경우도 생겼다. 이 같이 수학여행에 대한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에서 단양고가 동아리별로 실시하는 소규모 체험학습은 좋은 경험이 됐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이뤄진 네 차례의 체험학습을 경험한 고교생 학부모로서 체험학습은 실보다는 득이 많다고 생각한다. 단양고 동아리 수학여행의 특징은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에 따라 활동하는 자율적인 동아리활동의 연장선에서 이뤄진다는 점, 그리고 동아리 학생들 스스로가 계획하고 실행하는 체험학습으로 모두가 즐거워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비슷한 진로를 생각하는 학생들끼리 자신들의 진로에 대해 탐색하고 체험하며 수학여행 본래의 취지를 살릴 수 있고, 아이들도 무척 좋아하는 만족도 높은 행사가 되고 있다. 아이들이 자신
잡무, ‘교육전문직’ 칭호 등 교사 전문성 해치는 주범 그럼에도 결국 떠오르는 건 ‘내가 변해야 세상도 변해’ 최근 새 학년을 맞아 몸단장을 하러 미용실에 들렀다가 옆 자리에서 여성 둘이 나누는 말을 듣게 됐다. ‘이번에는 젊은 남자 선생님이 우리 애 담임이 되면 좋겠어.’ ‘나는 남자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여자라도 나이든 사람만 아니면 좋겠어.’ 나는 그 사람들에게 왜 그런지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꾹 참고 내 자신을 돌아봤다. 나이가 들었다고 권위적이지는 않았는지. 새로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는지. 머리카락이 중요한 게 아니라, 머리카락 밑에 있는 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더 주목해야 하는 건 아닌지 등. 그리고 교사의 전문성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리 내가 초등교육 전문가라고 생각해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에 서글펐다. 고은 선생의 시집 '순간의 꽃'에 이런 시구가 있다.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보지 못한/그 꽃.’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을 내려오는 경력 교사는 볼 수 있음을 그 학부모들은 알지 못한다. 삶이 무엇인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무엇에 복종하고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일반적으로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높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의 이미 국민소득이 2만 달러가 넘어섰고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하였다. 경제, 사회, 문화, 체육 등 대부분의 분양에서 세계 10대 강국을 구가하고 있는 강소국이다. 아시아의 변방에서 세계의 중심 국가로 우뚝 서 있는 국가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최근 미국의 여론조사기관인 갤럽이 유엔 ‘세계 행복의 날’인 지난 3월 20일을 기해 조사한 결과,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심각하게 나타나 충격을 주고 있다. 이 조사 발표에서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조사 대상 143개국 중 118위로 최하위 수준으로 나타났다. 중동의 팔레스타인, 아프리카의 가봉과 같은 최빈국 수준으로 참담한 결과이다. 세계의 중심국가와는 영 거리가 먼 지표인 것이다. 세부적으로 한국인이 느끼는 행복감은 100점 만점에 59점이며, 지난해 94위에서 24계단이나 떨어진 참담한 결과다. 중동의 팔레스타인, 아프리카 가봉, 아르메니아와 같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종파 갈등으로 분쟁 중인 예멘과 심각한 정국 불안을 겪는 이라크보다 낮은 수준이다. 중국과 일본은 각각 75점과 66점으로 한국보다 높은 수준이다. 이번 미국 갤
오늘 아침은 비가 올 것 같다. 봄비가 많이 오면 좋겠다. 먼지도 씻어내고 건조주의보도 사라지게 하고 새 생명이 잘 자라게 하면 참 좋겠다. 비가 오지도 않고 마음만 우울하게 만드는 구름은 싫다. 어제 토요일은 즐거운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부천에 있는 산을 찾았다. 산에는 봄을 알리는 봄꽃이 싹을 피우기 시작했다. 화사한 봄꽃이 필 것 같았다. 일찍 핀 꽃은 산을 찾는 등산객들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봄의 꽃과 같이 학생들을 기쁘게 하는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랜만에 산을 오르니 힘이 들었다. 어떤 분은 중간쯤 오르다가 다시 내려오고 있었다. 칠순이 되어보이는 노부부가 열심히 등산을 하시면서 그냥 내려가면 등산하지 않는 것인데,라고 말씀하셨다. 복장을 보아도 등산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마음자세가 안 되어 있었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등산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땀을 흘려야 한다. 힘을 내어야 한다. 길도 평탄하지 않다. 높은 길이다. 험한 길이다. 걷기가 편하지 않다. 그래서 목적지를 향해서 오르고 또 오른다. 선생님들은 참된 인간, 능력 있는
초등학교 1학년 우리 반 아침 풍경 아침 7시 50분, 나보다 먼저 와서 금성초 샛별 도서관에서 독서하는 이채은, 이채린 자매. 아침 일찍 일을 나가시는 아버지가 데려다 주고 가십니다. 별 일이 없는 한 2년 동안 늘 그래 왔습니다. 가끔은 승현이, 현우 형제가 일등이 되기도 합니다. 작년에 1학년 담임을 하며 아침마다 필자랑 1등 경합을 벌인 승현이도 아침독서 대장입니다. 역시 아침 일찍 출근 하시는 맞벌이 부부인 까닭에 학교에 일찍 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일찍 등교하는 아이들을 받아주어야 합니다. 우리 학교는 그곳이 도서관입니다. 요즈음은 1학년 우리 반 8명 중 4명이 이렇게 일찍 도서관에 와서 자리를 잡습니다. 보기만 해도 뿌듯합니다. 학교 통학버스가 동네를 이리저리 돌아야 하니, 등교 시각이 빠르지 않은 아이들 4명은 8시 40분에 들어오기도 하지만 일단 도서관에서 만나는 게 우리 반의 규칙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단 5분이라도 책과 만나게 하고 싶은 저의 희망 때문입니다. 도서관에서는 소리 내지 않고 목례 하는 거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혹은 눈이 마주치지 않으면 그대로 자기 자리로 가서 책을 읽어도 된다고 해두었습니다. 3월 26일 아침에는 축구
우리는 때때로 '돈이 없어도 행복하다' 라는 느낌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얌전한 도덕 선생님이 가르쳐준 교육이다. 과연 그럴까? 사람은 늘 돈이 없어도 걱정이고, 반대로 돈이 너무 많아도 신경쓸 것이 많다. 비록 돈이 행복을 결정지을 수는 없다고 믿지만, 우리에게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은 조금은 진부하게 들리는 것 같다. 그냥 필요할 때 쓰고, 먹고, 결혼을 할 때면 집도 장만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기본 삶의 질조차 이뤄지지 못한다면, 행복보다도 한숨이 먼저 나올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학교 시스템이 아이들을 피고용인, 즉 조직의 직원이 되도록 집중하여 교육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사와 학부모들이 “학교에 다녀야 자신에게 좋은 직업, 고임금 일자리를 잡을 수 있다.”라고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다. 혹시 “학교에 가서 좋은 직업, 고임금 일자리를 창출하는 법을 배우라.”라고 말하는 교사나 학부모를 본 적이 있는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사업가에게 필요한 일련의 기술과 피고용인에게 필요한 기술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학교는 사업가가 되는 데 필요한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보다 어떻게 좋은 회사에 입사할 것인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