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만 해도 우리 마을엔 집집마다 지게가 있었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지게 없이는 못 산다'고 할만큼 대개는 남자 식구 수만큼 지게가 있었다. 들로 일하러 갈 때나 집으로 돌아올 때, 부모들은 아이를 지게에 태우고 다녔는데 걸을 때마다 흔들거리는 그 맛이란….
봄이 오면 일찌감치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지게를 지고 소 풀을 뜯으러 가거나 어른을 따라 밭에 거름을 날랐다. 농사일보다는 신나게 놀고 싶었던 아이들은 방과후에도 학교에서 딱지치기, 자치기, 공차기 등을 하며 놀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농사철이 돼 고사리 손도 아쉬운 부모들은 재 너머 하굣길을 바라보며 아이들을 애타게 기다렸다. 당시 농촌 아이들은 초등교 4, 5학년만 돼도 제법 한 몫 하는 일꾼으로 취급받았다. 그런 이유로 아이들이 있는 집에 가면 으레 자기 키에 맞는 장난감 같은 지게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 집엔 어른용 지게만 두 개 있을 뿐, 아이들 지게가 없었다. 당시 초등 4, 6학년이었던 나와 형은 다른 친구들처럼 작은 지게를 만들어 달라고 아버지를 졸라댔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코 지게를 만들어주지 않으셨다. 언제나 "지게를 지는 사람은 나 혼자로 족하다"는 말씀 뿐이셨다.
어린 우리들은 그 말뜻을 알지 못했다. 습관을 들이다보면 혹시 지게가 사랑하는 아들의 평생 밥벌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한 아버지의 속내를 말이다. 혼자서 그 많은 것을 져 나르며 농사를 지으신 아버지의 등은 끝내 `ㄱ' 자로 휘어버렸다. 내가 어른이 돼서야 병원으로 모시고 가 검사를 해보니, 척추 디스크라 했다. 젊은 날 지게를 많이 진 탓이라는 것과 함께 나이가 많아 수술이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아려왔다.
친구들이 지게를 지고 들로 산으로 일하러 갈 때, 나는 농사와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대신 아버지는 우리가 공부하지 않을 때 무섭게 야단치셨다. 그 때는 아버지가 무서워 책상에 앉아 지게 지고 건들건들 일하러 가는 친구들이 바보처럼 부러웠었다.
지난 2월 나는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버지는 내가 마치 노벨상이라도 탄 듯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지게를 만들어 달라던 철없는 자식이 당신의 소원대로 지게를 지지 않고 교편을 잡아 공학박사가 된 것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한식날 할아버지 산소에 함께 가자고 연락을 하셨다. 당신의 고달픔은 개의치 않고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셨던 아버지. 자식에게 야단 치고 매를 드는 그 심정은 어른이 되어 자식을 키워보면 알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