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의 1913년 작품 <색채 연구: 동심원이 있는 사각형(Color Study, Squares with Concentric Circles)>은 각기 다른 색과 형태가 모여 이루는 조화를 담은 작품이다. 칸마다 담긴 원이 리듬처럼 어우러지며, 우리에게 편안한 울림을 전한다.
3월은 늘 ‘열림’의 설렘과 ‘낯섦’의 긴장을 동시에 준다. ‘추상미술의 아버지’ 바실리 칸딘스키가 1913년 캔버스 위에 수놓은 12개의 동심원은, 저마다 다른 빛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자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생명의 리듬이다.
칸딘스키에게 색채는 단순히 사물의 겉모습을 묘사하는 도구가 아니다. 그는 색을 ‘영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힘’이라 믿었다. 그에게 예술가란 피아노를 연주하는 손가락이며, 색채는 그 피아노의 건반과 같다. 열두 칸의 사각형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듯한 동심원들은 관람객 마음의 건반을 두드리는 듯하다. 어떤 칸은 잔잔한 쉼표처럼, 어떤 칸은 강렬한 스타카토처럼 연주되면서 내면의 공명을 끌어낸다.
안락한 삶을 덮고 미지의 선율 속으로
칸딘스키의 인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시작’에 관한 서사이다.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서른 살의 나이에 교수직 제안까지 받았던 엘리트 학자였던 그는, 두 가지 운명적인 경험을 한다. 그리고 보장된 미래를 뒤로하고 독일 뮌헨행 기차에 몸을 싣고 떠난다.
첫 번째는 클로드 모네의 <건초더미> 연작을 마주한 일이었다. 우리가 알던 형태가 해체되고 오직 빛과 색채만이 남은 인상주의 작품을 보며, 그는 대상의 재현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인간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음을 느꼈다. 두 번째는 볼쇼이 극장에서 관람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이었다. 선율이 눈앞에서 색채와 선으로 흩어지는 공감각적(Synesthesia) 환영을 경험한 그는 음악에서 미술을 경험하며, 예술의 세계로 접어든다.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표현하는 공감각은 작품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3월의 문턱에서 칸딘스키와의 만남은 행운과 같다. 익숙한 세계를 떠나 새로운 삶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모두에게 꼭 필요한 용기를 주며 토닥토닥 지지해 주는 듯하다.
12개의 칸, 경계를 허물며 번져가는 생의 유동성
1913년에 제작된 <색채 연구: 동심원이 있는 사각형>은 사실 칸딘스키가 대중에게 보이기 위한 완성작이 아니라, 자신의 창작 과정을 조율하기 위해 작가들이 연구하고, 공부하는 일종의 습작이라 할 수 있다. 가로 31cm 남짓의 작은 종이 위에 수채·과슈·크레용이 뒤섞여 만들어낸 화면은 어지러운 듯하면서도 묘한 질서를 품고 있다. 작가는 12개의 사각형 그리드를 만들고 그 안에 동심원을 그려 넣었다. 하지만 이 선들은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매끄럽거나 계획적이지 않다. 붓질은 자유롭고, 때로는 다양한 호흡으로 작업한 듯, 작가의 감성이 남아 있다. 물감은 종이의 결을 따라 이웃한 칸의 경계를 침범하기도 한다.
작품 속의 원(Circle)들은 결코 정형화된 기하학적 형태가 아니다. 어떤 원은 옆으로 찌그러져 있고, 어떤 원은 배경색에 동화되어 형태의 경계가 모호하다. 빨간색은 노란색 옆에서 더 생동감 있고, 파란색은 보라색에 둘러싸여 깊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다. 이는 사물을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재현’의 의무로부터 예술을 해방시키려는 칸딘스키의 의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명이 가진 본질적인 ‘유동성’을 증명하는 행위다. 색채들은 서로 부딪히며 시각적 진동을 만들어내고, 그 진동은 마치 12개의 악기가 제각기 다른 선율을 연주하면서도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을 완성해 가는 과정과 유사하다.
여기서 원은 완결된 결과물이 아니라, 중심이면서 기초인 점에서 시작해 확장해 가는 듯하다. 점·선·면·형·색…. 언어에도 단어가 있어서 문장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듯, 시각 예술에서 이러한 조형의 요소는 소통의 기본 단위가 된다. 이를 유심히 관찰하고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사유하고, 나의 경험과 지식을 연결 짓는 것이 미술 감상의 방법이 된다. 이처럼 이 작품을 꼼꼼히 보면, 기본 요소가 다른 존재와 함께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하여 성장의 흔적 같기도 하다. 고정된 틀(Grid)은 존재하지만, 그 안을 채우는 생명력은 멈추지 않은 채, 화면 밖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듯하다.
불완전한 원들이 함께 그리는 우리 삶의 화음
이 작품은 오늘날 그의 어떤 대작보다도 현대인의 사랑을 받는 아이콘이 되었다. 미술사적으로 이 작품은 사물을 똑같이 그리는 것을 중시한 미적 가치인 ‘재현’의 의무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칸딘스키는 ‘모든 것은 하나의 점(dot)에서 시작된다’라고 설명하며, 점이 확장된 형태인 ‘원’을 우주의 신비와 끝없는 생명력을 담은 가장 완벽하고 평온한 형상으로 여겼다. 12개의 사각형 그리드(Grid) 역시 엄격한 틀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사각형을 담고, 작업을 할 때, 기울임·각도·방향을 안내하는 가이드라인이 된다.
얼핏 보면 차가운 이성의 틀처럼 보이지만, 그 안의 원들은 자유롭게 배치되어 완벽하지 않기에 오히려 삶의 본질적인 ‘유동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칸딘스키는 이 작은 칸 안에서 색채의 ‘진동(vibration)’을 실험하며, 마치 12개의 악기가 연주하는 다채로운 교향곡처럼 우리의 시각을 자극하고 청각적인 에너지를 준다.
칸딘스키의 불완전한 동심원은 3월이라는 새로운 계절을 통과하는 우리에게 담담한 의미를 전한다. 첫째는 우리의 ‘고유한 개별성’에 대한 긍정이다. 12개의 동심원은 단 하나도 같은 색 조합이나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다. 어떤 것은 정열적인 빨강으로, 어떤 것은 명상적인 파랑으로 각자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회라는 거대한 그리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역시 이와 같다. 우리의 삶 또한 타인의 잣대에 맞춘 완벽한 원이 되려 애쓰기보다 각자가 지닌 내면의 색채로 고유함을 추구하면 어떨까.
둘째는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조화’의 가치다. 칸딘스키의 실험이 보여주듯, 색채는 홀로 존재할 때보다 이웃한 색과 만날 때 생동감을 얻는다.
3월,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서 낯선 이웃들을 마주한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충돌하고 섞이며 예상치 못한 삶의 빛깔을 만들어내듯, 우리의 삶 역시 각자의 사회적 동심원을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올봄, 우리의 일상에 칸딘스키의 동심원처럼 찬란하고 역동적인 진동이 가득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