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작가 서유미의 단편 <토요일 아침의 로건>은 어느 날 갑자기 뇌종양 판정을 받은 50대 중년 남자의 이야기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그는 벌써 4년째 토요일 아침마다 영어선생님 젤다와 2시간씩 비즈니스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로건은 그의 영어 이름이다.
영어도 늘고 회사에서도 승진해 미국 지사 발령을 앞두고 있는데 위기가 찾아온다. 건강검진에서 뇌종양을 발견한 것이다. 그의 삶이 예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행도 힘들 것 같다. 우선 젤다에게 영어 공부를 그만두겠다고 얘기해야 하는데 선뜻 말하지 못하고 망설인다. 소설은 로건이 결국 통보하기까지 4주 동안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는 일들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로건은 왜 통보를 망설였을까. 수업하는 카페에선 한강에 있는 오리배들이 밧줄에 묶여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묶고 있는 밧줄을 풀면 오리배들은 어디로 떠내려갈까. 영어 수업을 그만두게 되면 삶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그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리시안셔스 꽃다발 주문하지만 …
그런 로건이 회사 임원 식사 자리에 참석했을 때 장미 비슷한 꽃이 화병에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흰색·분홍색·라벤다색·노란색 등 다양한 색을 가진 꽃이었다. 여러 번 온 레스토랑이지만 꽃이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꽃들은 장미처럼 여러 겹의 꽃잎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름은 알 수 없었다.’ 로건은 꽃 이름을 알고 싶어 휴대폰으로 꽃 사진을 찍어둔다.
토요일 아침, 그는 알람소리에 눈을 떴고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후드집업을 걸치고 지하철역 근처의 플라워샵에 가서 미리 부탁해 놓은 꽃다발을 찾았다. 이틀 전 퇴근길에 꽃집에 들렀을 때 꽃집 주인은 그가 찍은 사진을 보더니 리시안셔스네요, 하며 연한 분홍색의 꽃 한 단을 꺼내 보여주었다. 레스토랑의 테이블에 있던 꽃보다 더 건강해 보였다. 주인이 리시안셔스는 자른 상태에서 더 피지 않는 꽃이라며 수명이 긴 게 장점이라고 했다. 그는 얇고 부드러운 꽃잎을 보다가 꽃다발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로건은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젤다에게 줄 생각이었지만, 끝내 주지 못한다. 4주째 토요일에야 로건은 젤다에게 수업 중단을 통보한 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고 자신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알게’ 됐고, 비로소 마음이 아픈 것을 느낀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소설이었다. 작가는 토요일마다 소설 작법 수업을 한다는데, 수강생들에게 전범(典範)을 보여주듯 흠잡을 데 없는 소설을 쓴 것 같다. 4주간 영어 수업을 하면서 주인공이 본 장면과 느낀 감정들을 세밀하게 묘사하는데, 이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주인공 감정과 겹쳐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리시안셔스는 주인공이 몸의 이상을 안 다음 보이기 시작한 것 중 하나다. 소설에서 상당한 비중을 가진 소품이다. 아마도 중년의 위기에서 그제야 꽃이라는 생명 또는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한 것을, 이전과 다른 관심과 애정이 생긴 것을 보여주는 장치 아닐까 싶다.
리시안셔스, 장미와 카네이션 중간 느낌
소설에 나오는 대로 리시안셔스(Lisianthus)는 얼핏 보면 장미로 착각할 정도로 장미 비슷하게 생겼다. 장미와 카네이션의 중간 정도 느낌을 주는 꽃이다.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좋은 꽃말을 가져 결혼식 부케로 많이 사용하는 꽃이다. 물오름이 좋고, 절화(折花) 수명도 길어 최근 수요가 급증하는 꽃이라고 한다.
리시안셔스는 용담과의 한해살이풀로 원산지는 북아메리카다. 장미와는 꽃은 물론 줄기와 잎 모양에서 차이가 있다. 줄기에 가시가 없고, 잎은 마주나면서 타원형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국가표준식물목록 추천명은 ‘꽃도라지’이지만, 리시안서스·리시안사스 또는 속명인 유스토마(Eustoma)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홑꽃과 겹꽃이 있는데 겹꽃은 꽃잎이 겹쳐져 있는 모습이 터키 터번을 떠올린다고 터키꽃도라지라고도 부른다.
장미 비슷하게 생긴 절화가 하나 더 있다. 라넌큘러스(Ranunculus)인데 이 꽃은 이른 봄에 피는 꽃이라 그즈음에만 꽃집에서 살 수 있다. 원종은 선명한 황색으로 꽃잎이 5장이지만 원예종들은 겹꽃이 대부분으로 빨간색·노란색·주황색·분홍색·흰색 등 다양한 색이 있다. 꽃이 비교적 오래 가고 꽃잎이 많고 풍성해 젊은 층에 인기 있는 꽃이라고 한다.
라넌큘러스는 미나리아재빗과 미나리아재비속에 속하는 식물이니 국내에서 자라는 미나리아재비와 닮은 데가 많다. 한마디로 라넌큘러스는 미나리 같은 줄기에 장미처럼 화려한 꽃이 피는 식물이다. 라넌큘러스라는 이름은 라틴어 ‘Rana’에서 유래했는데 ‘작은 개구리’라는 뜻이다. 주로 연못이나 습지 등 습한 지역에서 잘 자라는 특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라넌큘러스를 가장 쉽게 식별하는 방법은 많은 꽃잎이다. 얇은 꽃잎이 겹겹이 겹쳐 피는데 꽃잎 수가 300장이 넘는다고 한다. 주로 알뿌리로 번식하는 구근 식물이라는 것도 기억해 둘 만한 것이다. 요즘엔 초봄 길거리 화단에도 심는 꽃이다.
서유미 작가는 꽃과 나무 등 식물을 좋아하는 작가임이 분명하다. 그가 최근에 낸 소설집 <밤이 영원할 것처럼>엔 <토요일 아침의 로건>말고도 식물이 나오는 작품이 많았다. 육아로 자기 시간을 내기 어려운 주부와 학습지 방문교사의 생활을 그린 <밤의 벤치>엔 등나무와 전나무,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가정의 균열을 조용히 체감하는 하루를 그린 <그것으로 충분한 밤>엔 실내식물 스투키, 부유하고 선망받는 위치에서 내려와 별 볼 일 없던 친구에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여성을 그린 <지나가는 사람>엔 벚꽃, 전 배우자를 독촉해 위자료를 받아내야 하는 여교수를 다룬 <기다리는 동안>에는 대표적인 실내식물인 스킨답서스가 나오고 있다. 또 표제작인 <밤이 영원할 것처럼>에서는 ‘좌천 아닌 좌천’을 당한 주인공의 심리적 충격을 벤자민고무나무로 표현하고 있다. 벤자민고무나무는 광택이 나는 작은 잎이 아름다운 관엽식물이다.
작가들의 꽃에 관한 관심도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에 소설을 읽다가 마주한 꽃들은 팬지 등 화단 꽃과 야생화 위주였다. 그런데 요즘 작가들의 작품을 읽다 보면 고무나무 같은 실내식물, 리시안셔스 같은 절화, 플루메리아 등 해외식물을 흔히 만날 수 있다. 서유미 소설집이 이런 패턴을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