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봄날, 경로잔치 겸 학예회를 하던 때였다. 프로그램은 노래와 춤, 효행 편지 낭독, 연극, 악기 연주 등 다양했다. 나는 저학년 학생들을 남녀 짝을 지어 꼭두각시 공연연습을 시켰다. 학생들은 뽑혔다는 자부심에 귀엽게 잘도 따라했다. 음악에 맞추어 고갯짓, 발짓, 너무너무 귀여웠다. 한복 준비도 잘 됐고 순서도 잘 익혔다. 발표 당일엔 예쁘게 화장하고 오라고 하면서도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다른 애들은 다 하고 와도 아마 명수는 맨얼굴로 오겠지?' 명수는 귀엽고 똑똑하고 나무랄 데 없는 남자 아이였지만, 명수 어머니는 화장을 하고 학교 오는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나가 있어서 명수 어머니가 학교에 드나드는 걸 몇 년 동안 목격했지만 언제나 학생 같은 단발머리에 주근깨 가득한 얼굴밖에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내심 명수에게 화장을 해주려고 몇 가지를 준비한 터였다. 그러나 발표 당일, 나는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다. 다른 애들은 성의 없게 화장을 하고 왔는데, 명수만은 온갖 색조 화장까지 다하고 립스틱이 지워질까봐 입술을 벌린 채 쉬잇, 쉬잇 하고 침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그란 눈이 더욱 커보이고 빨간 입술을 장난
어느 과학시간의 일이다. 다섯째 시간에 실험을 할 예정으로 점심을 먹고 나서 실험기구를 모두 갖춰 놓았다. 아이들은 밖에 나가 놀고, 나는 이 닦고 화장을 고치며 나머지 시간을 편히 쉬었다. 이윽고 과학시간! 실험을 하기로 하였다. 실험기구를 조작하며 실험결과를 관찰장에 기록하는 것이다. 첫 번째 실험은 처음의 온도를 기준으로 물을 가열하면서 2분마다 기록을 재는 것이었다. 실험은 아주 흥미롭고 조용히 진행됐다. 두 번째 실험은 물을 냉각시킬 때의 온도변화를 2분마다 재어 보는 것이었다. 미리 얼음을 갖다 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급식실에 가면 얼음이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반장을 시켜 얼음 좀 얻어 오라고 했더니 없다는 것이다. 12월 초순이라 얼음 쓸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학교 앞 가게로 아이스크림을 사러 보낼까 하고 고민을 했다. 얼음 준비를 해놓지 않은 것도 문제였지만 아이들에게 교문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린 터라 심부름시키기도 어려웠다. 잠시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해결사가 나타났다. 우리 학급 회장인 동용이었다. 점심시간 밖에 나가 뛰어 놀던 동용이는 운동장 어느 구석이 움푹 패여 물이 고여 얼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
해마다 봄·가을로 치르는 운동회이지만 그 열기는 점점 식어가고 있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운동회는 학구내의 경사였다. 울긋불긋 차려입은 학부모들과 졸업생들, 푸짐한 점심 준비, 만국기, 경쾌한 행진곡 등 모두가 한번씩은 트랙을 달리며 기쁨을 맛보곤 했다. 볼거리도 많았다. 농악, 곤봉, 부채춤, 현대무용, 짝체조, 기마전, 차전놀이 프로그램 진행 중에는 감탄사와 박수소리,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어우러졌었다. 매스게임은 작품도 대작이려니와 집단의 협동 질서가 잡혀야만 하는 프로그램들이다. 시골에도 학생수가 많아서 청·백으로 나뉘어 단체경기를 했다. 교사들은 새로운 단체경기를 짜내느라 고심하였고 한 송이 국화꽃인양 예술작품으로 화려하게 운동장을 수놓았다. 또한 고전무용을 하려면 한복을 입어야 했으니 추석빔이 저절로 되었다. 모두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래서 그 시절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곤봉 다루기도 물구나무서기도 풍물 리듬도 잘 탄다. 그러나 지금은 어렵고 위험한 경기는 아예 손대려고도 하지 않는다. 열심히 가르치는 교사도 많지만 곤봉체조는 위험해서 하지 않고, 꾸미기 체조 역시 위험해서 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10여년 전 내가 가르치고 있던 반에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내려온 학생이 한 명 있었다. 아이의 부모님이 도시에서 돈을 버느라 자식을 잠시 고향의 부모님께 맡긴 것이었다. 당시 그 아이의 얼굴은 아직도 내 눈 앞에 선하다. 1년도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함께 지내다가 떠났지만 나는 그 아이에게서 배운 정직의 아름다움을 가끔 떠올린다. 가르치는 것은 곧 배우는 것이라지 않았는가. 배움은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건 일어난다. 나는 그 아이에게서 배운 정직을 하나의 잣대로 생각하며 꼬인 일을 풀어 나가기도 한다. 그 아름다운 일이란 실은 교사들이 제일 싫어하는 금전 도난 사건으로부터 일어났다. 그 아이의 이름은 근명이었다. 쉬는 시간에 운동장가에서 그네를 타고 놀다 들어온 근명이는 돈 천원을 잃어 버렸다고 울상을 지었다. 도난 사건이 일어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묵살하고 수업을 진행할 수도 없고 대대적으로 소지품 검사도 할 수 없고 해서 막막해 하고 있던 차에 한 아이가 돈을 찾았다며 가져왔다. 돈을 가져온 아이는 천원을 복도에서 주워왔노라고 했다. 도난 사건이 종결된다는 기쁨에 근명이에게 그 돈을 내밀었지만 근명이로부터 의외의 대답
2월은 헤어짐과 새로운 만남을 예약하는 달이다. 초·중·고에서는 6년, 3년씩 가르치던 제자들을 떠나보내고 신입생을 맞을 채비로 분주하다. 학생들은 호기심과 긴장으로 3월을 기다린다. 같은 학교 선배로부터 어떤 선생님은 무섭다느니 어떤 선생님은 숙제를 많이 낸다느니 어떤 선생님은 체육을 잘하시고 어떤 선생님은 그림을 잘 그리신다느니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나름대로 새 선생님과의 만남을 기대한다. 그러나 교사들의 2월은 매우 바쁘고도 어수선하다. 어느 누가 2월은 어영부영 그냥 보낸다 했는가. 학생들과 끝내야 할 교육과정, 학년말 업무 등 일은 끝이 없다. 게다가 인사문제로 2월만큼 감정의 희비가 거세게 휘몰아치는 달도 없다. 임기가 끝나 이동을 해야 하는 교사들은 여기저기 자기의 꿈을 펼칠 곳으로 가기 위해 머리를 짜낸다. 연령별로, 남녀별로, 각자 욕심대로 학교나 업무를 고르다 보니 어찌 시끄러워지지 않으랴. 나도 물론 최근까지 그런 소용돌이 속에 서있어 보았다. 배정받은 학년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루 결근한 해도 있었다. 어리석음의 극치였다. 그러나 지금은 남보다 좋은 직업을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어렵다고 생각했던 학년도 선택하고 힘든 일도 즐겁게
"선생님 여봉이가 자꾸 나에게 불효해요." 평소 이르기를 잘 하는 진산이가 울상을 짓는다. 진산이는 짝꿍이 자기를 자꾸 괴롭힌다는 것을 불효라고 한다. '아! 교육의 길은 멀고 험하다더니…. 어떻게 수습한다지?' '효'교육을 하면서 '불효'라는 개념도 심어 주었더니 진산이는 금방 친구에게 이를 대입시킨 것이다. 엄밀히 따져 '효도'나 '불효'라는 말은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께 해당되는 말이고 친구간에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그런데도 진산이가 친구에게 '불효'라는 말을 쓴 것은 다 사연이 있다. 내가 사는 공주 지방은 '효 실천'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학교마다 '효'교육 담당자가 있어 사례 중심으로 실천운동을 펴고 있다. 그리고 공주에서 충남 전역으로 퍼진 '효 실천' 교육은 이제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 순간에도 '효'와 '학력'이라는 두 개의 바퀴는 충남교육의 축이 되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각종 사례도 많고 지도 자료도 많지만 초창기에는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효도가 무엇인지를 쉽게 알게 해 주려고 무척이나 고심했었다. 약 4년 전 저학년을 맡은 나는 어떻게든 우리 반 학생들에게 효가 무엇인지를 쉽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
남에게 칭찬을 가장 많이 해 주는 사람은 초등학교 교사라고 흔히들 말한다. 학교에서의 칭찬은 곧바로 상으로 이어진다. 칭찬과 격려 속에 자라난 아이는 자신감과 꿈을 키워 가며 자란다. 상은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 넘쳤을 때 주고 싶다. 상을 받는 쪽은 인정받는 기쁨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래서 상을 주고받을 땐 양쪽 모두가 즐겁고 행복하다. 상은 형태가 없는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과 종이 위에 공적을 써내려 간 직인 찍힌 것 등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는 것은 어찌 보면 교사들의 가장 큰 업무일 게다. 엄마 품을 갓 벗어난 저학년 학급에선 포도알로 상징되는 담임상을 매일 같이 받는다. 어쩌다 하나라도 잃어버리게 되면 아무리 쓰다듬고 귀여워해도 포도알이 되돌아오기 전엔 울상을 풀지 못한다. 선생님의 따뜻한 시선과 칭찬 속에 포도알이 포동포동 영글어간다. 변성기에 접어든 고학년 교실에서도 상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남긴다.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힐 줄 알고 참을성이 없다는 신세대들의 특징은 賞을 어떻게 보느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연간계획에 의해 달마다 주마다 실시하는 행사에 앞서 아이들은 먼저 확인부터 한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