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검 공안1부(공상훈 부장검사)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주경복 서울시 교육감 후보 불법 선거지원 의혹과 관련, 전교조가 검찰 수사에 대비해 특정 간부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내부 문건을 확보한 것으로 1일 전해졌다. 검찰은 최근 전교조 서울지부에 대한 압수수색 등을 통해 "이을재(구속) 조직국장 선에서 방어하고 실패하면 다른 간부를 내세운다"는 내용의 문건과 이메일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직교사로 주 후보의 선거캠프에서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자금 조달 및 전교조 서울지부와의 연락업무 등을 담당한 이 조직국장을 내세워 현직 교사인 다른 간부들을 보호하고 동시에 형사처벌 대상자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조직국장은 검찰 조사시 자신의 혐의는 시인한 반면 다른 간부들의 개입 여부에 대해서는 진술을 하지 않았으며, 다른 간부들도 산하 25개 지회에 대한 표 확보와 홍보단ㆍ선전단 구성 등 선거운동 지시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그러나 한차례 구속영장이 기각됐던 송원재 서울지부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재청구하면서 이같은 내용이 구체적으로 담긴 문건을 첨부했고, 송 지부장은 전교조 모금 활동 등
지난 12월 21일, 충북 옥천군 안내면과 안남면에서 중봉 조헌의 발자취와 인근의 볼거리를 돌아보기로 했다. 처음 찾은 곳이 안내면 도이리에 있는 후율당이다. 후율당(충북기념물 제13호)은 중봉 조헌이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은현감을 파직당하고 옥천에 낙향했을 때 제자들을 가르쳤던 서당이다. 중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영규의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수복하는 등 왜병들을 막아내다 금산전투에서 700의병과 함께 장렬히 순국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율곡 이이의 제자였던 중봉은 후율을 호로 정하며 스승의 사상을 잇고자 했다. 안내면 소재지에서 가까운 정방사거리에서 보은방향으로 500여m 거리에 한문으로 '後栗堂'이라 새겨진 표석이 길에 서 있다. 그곳에서 화살표가 가리키는 우측 길로 접어들어 400여m 가면 길가에서 후율당을 만난다. 돌담으로 둘러쳐 있고 북쪽으로 삼문이 나있는 후율당은 용촌 밤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오며 중봉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 되었다. 마을 안쪽에서 만나는 한옥도 옛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도이리에서 나와 37번 국도로 옥천방향으로 가다보면 다리를 건너기 전에 인포삼거리를 만난다. 이곳에서 안남 방향
해(年)가 바뀌었다. 세상의 흐름이 바뀌었다. 한 10여 년 전만해도 새해인사로 연하장을 보내다가 바로 작년 이맘 때까지만 해도 이메일을 발송하더니 이번엔 문자 메시지가 주종을 이룬다. 어제와 오늘, 새해 인사 덕담 문자 메시지 수 십 통을 받았다. 내가 먼저 보내드렸어야 하는데 선수를 놓쳤다. 그 내용을 보니 다복, 소원 성취, 건강, 행복, 평안, 감사등이 대부분이다. 리포터도 학교장으로서 학부모를 대상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작년 한 해 학교 표창 무려 4개나 받은 것은 바로 학부모님과 우리 서호중 교육가족 덕분이라고. 새해엔 사랑과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라고. 그리고 추가사항 하나! 방학 중 도서실을 개방하니 많이 이용해 달라고. 이젠 내가 받은 문자 메시지를 답신해야 할 차례다. 어떻게 보낼까? 길어도 안 되고, 고리타분한 형식적인 인사는 구태의연할 뿐 아니라 내 체질도 아니고. 마침 올해가 소띠해다. 그렇다. '소'를 이용하자. 그래서 탄생한 것이 "笑의 해가 되소서!" 경제 전망에 의하면 올해는 작년보다 경제가 더 안 좋아지리라고 한다. 생활이 더욱 어려워져 미소 지을 기회가 점점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때 일수록 일부러라도 웃어보는 것은 어떨
무창포해수욕장의 해넘이와 신비의 바닷길을 보기위해 보령으로 1박 2일의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하다 보면 꼭 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일정에 쫓겨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그동안 그냥 지나친 곳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36번 국도를 이용해 보령으로 가다 보면 청양군 정산면소재지 앞 벌판 가운데 2층 기단 위에 9층의 탑신을 올린 석탑이 서 있다. 이것이 보물 제18호인 서정리9층석탑인데 부근에 백곡사라는 절이 있던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고 안내판에 쓰여 있다. 대치터널이 뚫려 칠갑산을 넘나들기가 쉬워졌지만 옛 추억이 살아있는 칠갑산도림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옛길에서 콩밭 매는 아낙네상과 면암 최익현 선생 동상도 보고, 스타파크천문대까지 등산로를 걸으며 칠갑산의 자연을 만끽했다. 평야지대를 달리는 장항선에 작아서 더 정이 가는 청소역이 있다. 청소면 진죽리의 청소역은 1961년에 건축한 벽돌조 역사로 지붕이 녹색이다. 근대 간이 역사의 건축 양식이 잘 드러나 있는 이 건물이 장항선의 역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로 문화재청이 지정한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제305호)이다. 달랑 택시 한 대가 역전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대여섯 명만 들어서도 꽉 찰 것 같
사람만이 웃는다 인간만이 웃는다. 자신이 기르는 애완동물이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나머지 웃는다는 착시를 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동물은 웃음을 표현할 만큼 다양하게 안면근육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에 반해 인간의 안면근육은 80개에 달한다고 한다. 신은 어째서 인간의 얼굴에 그토록 많은 근육을 부여한 것일까?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불을 찾아서는 언어를 사용하기 이전의 고대 원시사회의 모습을 실증적으로 그려내면서 웃음이 인간의 문명을 열어젖히는 하나의 계기임을 드러낸다. 웃음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동물과 다른 사랑이란 감정을 자각하게 되고 언어 이전의 인간적인 소통 수단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 비극과 쌍을 이루는 희극도 존재했을 것이라는 착상을 바탕으로, 희극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게 된 과정을 그려낸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역시 웃음이 감정을 표출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방식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중세 수도원의 금욕주의적인 종교 철학은 인간의 웃음을 억압하여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웃음이 문명의 마중물이었다는 점, 인간다움을 나타내는 징표의 하나라는 점은 웃음이 단순하고 즉각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 이상
교원정책 전반 다뤄 교섭위원들 긴장 지난해 11월 12일, 정부중앙청사 16층 대회의실. 한국교총과 교육과학기술부의 2008년 상·하반기 교섭·협의를 위한 제1차 본교섭·협의위원회 개회를 앞두고 양측 교섭위원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돌았다. 오전 11시 양측의 교섭대표인 안병만 교과부장관과 이원희 교총회장이 입장하고, 교섭위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분위기는 누그러졌지만 회의 내내 보이지 않는 신경전은 계속됐다. 안병만 장관은 “지난 1992년 시작된 교과부와 교총의 교섭·협의는 그동안 교원들의 권익향상과 교육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며 “이번에도 대화와 타협을 통해 우리 교육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서로 협력하자”고 말했다. 이원희 회장도 “새 정부 들어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는 것에 감사드린다”고 화답하며 본격적인 협의를 시작했다. 이날 교총-교과부 간 본교섭·협의는 양측 교섭대표의 인사말, 교총의 교섭·협의 요구 사항에 대한 제안 설명, 교총의 제안 설명에 대한 교과부의 입장 표명, 양측 교섭위원의 자유발언, 교섭대표의 마무리 발언으로 진행됐다. 1차 본교섭·협의회를 마친 양측은 원만한 교섭·협의를
“히틀러는 독일군의 진격을 재촉했고 영국군과 프랑스군 34만여 명은 덩케르크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달랐다. 히틀러는 1940년 5월 24일 돌연 독일군의 파죽지세 진격을 중지시켰고 그로 인해 시간을 번 영·불군은 아슬아슬하게 덩케르크에서 철수할 수 있었다. 히틀러가 진격을 중지시키지 않았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전황은 어떻게 달랐을까? 제2차 세계대전 초반전은 ‘당나귀전쟁’이라 비판받지만 영국과 프랑스도 개전 초에 독일군의 북유럽으로의 진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등 실책을 범했다. 독일은 폴란드를 전격적으로 점령한 데 이어 덴마크 전역과 노르웨이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했다(1940. 4~6). 영국과 프랑스는 군대를 투입해 노르웨이를 지원했으나 독일 공군에 압도당해 철수했다. 독일은 1940년 5월에 네덜란드를 5일 만에, 벨기에를 2주 만에 장악했다. 그리고 난공불락의 마지노선을 뚫은 후 파리를 장악한(6월 15일) 독일은 6월 22일에 프랑스의 3/5를 장악했다. 소련 또한 라트비아 3국에 이어 핀란드를 침공하는 등 이른바 ‘대조국전쟁’에 나섰다. 최고의 전략가임을 자랑한 히틀러는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