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5일, 스승의 날. 매년 은사에게 감사하는 날이지만, 학교폭력과 교권침해로 바람 잘 날 없던 지난 한 해를 보내고 맞는 올해 스승의 날은 그 근본인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본지는 스승 및 교육주간을 맞아 스승의 날 본래 의미를 돌이켜보고 소통하는 학교문화를 만들기 위해 스승이 제자에게, 제자가 스승에게 보내는 편지를 현장교사와 학생들에게 받아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나누고자 한다.
예선이는 지금 고3이 돼 대입을 눈앞에 두고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겠지? 할머니는 잘 계시는지, 부모님과 어린 네 동생도 잘 있는지 궁금하구나.
해마다 이맘 때 쯤이면 네가 보낸 정성어린 편지를 받곤 했는데, 올해는 고3인 네가 나보다 더 바쁠 것 같아, 선생님이 먼저 네게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오월은 스승의 날이 있는데 어느 해 부터인가 내게는 스승의 날은 축하를 받는 날이기보다는 성찰의 날이 됐단다. 교사로서, 담임으로서 아이들에게 내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부끄러움은 없는지 자신을 뒤돌아보고 새로운 다짐을 하는 날이야. 제자인 네게 이제는 이런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할 수 있어 기쁘구나.
올해 1학년 담임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을 보며 12년 전 예선이 모습을 떠올려 본단다. 입학식 날 할머니 손을 잡고 학교에 처음 와서 수줍은 모습으로 인사하던 네 모습. 많은 아이들 중 너를 지금도 못 잊는 것은 어머니가 백혈병으로 투병하는 과정을 할머니로부터 틈틈이 전해 들었기 때문일 거야. 예선이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투병하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 해 9월에 돌아가셨지.
할머니는 교실에 오셔서 “예선이에게는 아직 어머니 죽음을 알리지 않고 먼 시골에 가셨다고 했다”고 하셨어. 그 말을 들으며 선생님은 어린 너를 생각하며 너무 마음이 아파서 할머니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단다. 할머니도 같이 우셨지.
예선이가 지금 열여덟 살 숙녀인데, 선생님은 아직도 너를 생각하면 몸집이 작고 가녀린 꼬마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커다란 눈망울, 할머니가 아침마다 땋아 주신 갈래 머리를 하고 늘 반듯한 자세로 앉아서 선생님 말에 귀 기울이던 네 모습.
네가 2학년, 3학년, 4학년에 올라갔을 때도, 스승의 날이면 나를 찾아와 네가 정성들여 만든 카드를 주고 가던 모습. 예선이가 5학년 되던 해에 내가 전근을 가서 그 때부턴 만나지 못했지. 그런데 네가 중2 때, 예선이 할머니가 내게 전화로 안부를 물으셨어. 예선이가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을 아직도 그리워한다며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셨지.
그 해 스승의 날 때쯤 네가 보낸 편지를 받게 돼 선생님은 무척 기뻤단다. 네 편지에는 새엄마와 새엄마가 낳은 아기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아기가 참 예쁘다고 썼더구나. 그 무렵 할머니와 한 번 더 통화를 했었는데 할머니는 당신의 예선이 새엄마가 할머니를 미워해 같이 못 살고 혼자 방을 얻어 산다고 하셨어. 그 얘기를 들을 때 예선이는 어떻게 적응하며 사는지 무척 걱정했었어. 그런데 네 편지에선 새엄마를 나쁘게 말하는 구절은 없고 동생을 귀여워하는 마음만 알려줘 안심했단다.
그 후 네가 고1 때 보낸 편지에서는 아빠를 원망하는 심정을 살짝 드러낸 말을 한 적이 있어. 선생님은 예선이가 좀 더 크면 어른들 세계를 이해하게 될 테니 지금은 힘들더라도 잘 참아보라고 답을 했었는데, 기억나니? 지금은 그 때보단 좀 더 컸으니 예선이가 새엄마와 아빠와 다정하게 지냈으면 좋겠구나.
최근에 우리말의 근원과 관련된 책을 즐겨 읽는데 그중에서 일지 이승헌의 저서에 이런 내용이 있더구나. 우리말에서 ‘어린이’는 얼이 차츰 어리어 가는 사람, ‘어른’은 얼이 익은 사람, ‘어르신’은 얼이 완숙해 얼이 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 ‘어린이, 어른, 어르신’은 사람의 일생을 얼이 완성되는 과정으로 보고 얼이 얼마나 알차게 영글었는가에 따라 달리 부른 말이라는 거야. 이제는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이 돼가니, 가족 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서도 좀 더 어른다워지라는 얘기야.
예선이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지. 그런 모습이 대견스럽고 참 좋아.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하고 살아야한다고 전에도 말한 적이 있을 거야. 그런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전공을 살려 사회에 나가게 되면, 그 다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람마다 삶의 방법이나 목적은 다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위와 조화롭게 어울리며 자기를 성장시키는 것이라 생각해. 이런 목적을 갖고 생활한다면 하루를 헛되이 살지도 않을 것이고, 혹시 원하는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더라도 좌절하지 않을 거야.
예선아, 해맑은 네 모습을 떠 올리면 선생님은 저절로 환한 미소가 지어진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사는 네 모습은 정말 아름다울 거야. 코끝을 스쳐가는 라일락 향기가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것처럼 향기로운 사람은 주위를 밝게 하는 힘을 지녔지.
예선아, 열어놓은 창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이 오늘따라 더욱 싱그럽게 느껴지는구나. 오월 하늘의 하얀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너에게 편지를 쓰는 이 시간이 무척 행복하다. 네가 꿈을 이룰 그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선생님 마음, 잘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