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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삼 곱하기 십'을 읽고

3일이라는 시간이 내게 주어진다면……

책 제목인『삼.곱하기.십(3×10)』이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집어 들었다. 갑갑한 일상 속에서 내게 만약 3일이라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쩌면 생각만으로도 짜릿하고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 책이 내게 그런 생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책이었다. 부제라고 해야 할까? 책의 뒷표지에 커다랗게 인쇄된 글씨는 어쩐 일인지 본격적으로 읽기 전부터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3일 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당신, 무얼 하고 싶은가요?"

참으로 도전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책을 폈을 때엔, 난 이 질문이, 단순히 죽음을 앞둔 어떤 사람들이 그들에게 남겨진 인생에 있어 3일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생각들을 담아 놓은 책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문득 옆에 있던 아내에게 넌지시 물어보고-죽음이란 건 너무 우울하니 그 부분을 쏙 빼고 최대한 부드럽게- 싶었다.

"당신, 내가 당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3일의 휴가를 준다면 뭘 하고 싶어?"

실행될 가능성이 지극히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 3일이라는 달콤한 혼자만의 휴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겨운 듯 연신 미소를 짓고 있는 아내를 보며, 내친 김에 나는 종이를 한 장 펼쳐 호기 있게 적어 내려갔다. 

① 첫째 날 : 지나간 사람들과 묵은 감정 모조리 털어내기 …… 아무리 멀리 있는 사람-물론 그들과는 전화로 해결해야 할 것 같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찾아가서 지금껏 못다 한 얘기가 있으면 다 나누고 내가 용서를 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웃으면서, 하지만 조금은 심각하게 얘기를 나눌 것. 만약 그 사람이 내게 따지거나 비난하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다 들어줄 것.

② 둘째 날 : 아내와 1박 2일로 여행 가기 …… 아이들을 어른들에게 맡기고 가까운 곳이라도 꼭 단 둘이 여행을 다녀오기. 만약에 아내가 혼자 가길 원한다면 혼자 보내 줄 의향 있음.

③ 셋째 날 : (여행에서 돌아와 허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어차피 죽을 텐데 허리 부러지는 것 쯤이야……)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주기

이렇게 쓰고 보니 갑자기 3일째 되는 날이 너무 바빠질 것 같았다. 고작 9시간 정도만 아이들과 놀아줄 수 있다. 그래도 죽을 힘을 다해 놀아준다. 어차피 힘을 다 빼 놓아야 죽을 때 편하게 죽지 않을까?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깨끗이 목욕재계하고 아내와 아이들 몰래 편지를 써 놓고 이불을 덮고 죽음을 맞이한다.

내가 생각해도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아무튼 그런 마음가짐으로 책을 폈는데……. 이런! 방향을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처음 내가 생각한 그게 이 책의 주된 테마가 아니었다. 예전에 그런 광고가 있었던 기억이 났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뭐, 이런 의미의 책이었다. 그렇다면 사실 우리가 선택할 일은 지극히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싶었다. 3일간 할 수 있는 일……, 어쩌면 그와 같은 3일은 좀처럼 오지 않을지도, 아니 사람에 따라서는 다시 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쓴 10명의 저자들도 자신에게 주어진 3일을 보내기 위해서 조금도 서슴지 않고 여행을 떠나기로 작정한다. 물론 어느 한 사람도 똑같은 장소를 택한 사람이 없다. 그냥 피상적으로 우리가 흔히 가고 싶어하는, 제주도라든지 일본의 어느 온천, 혹은 유럽의 어디어디 등의 장소가 아닌, 어쩌면 그냥 우리 주변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그런 곳들을, 묻혀 있던 나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그런 곳들을, 유년 시절의 기억이 묻어 있는 그런 곳들을, 그들은 선택했다.

하나같이 그들은 요란한 기색도 없이 조용히 그곳에 가서 자신을 추스리고 다시금 새로운 자아를 찾아서 돌아오는 여정으로서의 길을 선택했다는 뜻이다. 물론 모두가 다 여행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어떤 이는 지인의 작업실로 꽃을 들고 찾아가고, 또 어떤 이는 열심히 요리를 했으며, 또 다른 어떤 이는 여행경비회수를 위해 구입한 아이템을 판매하기도 했으며, 또 다른 한 사람은 그저 3일 간 무위도식하며 지내기도 했다. 어쨌거나 외부로의 여정이든, 자신의 내면으로의 여정이든 모두가 다 소중한 여행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멋지게 시도했기 때문이다.

일상은 우리를 지치게 한다. 그 지쳐가는 과정 속에서 자칫하면 우린 우리의 자아를 잊어버리거나, 혹은 아예 잃어버리고 살기까지 한다. 그래서 우린 살아가면서 제법 그래도 정신이 말짱한 순간에 늘 의식하는 것이 있다.

"이렇게 살면 안 돼! 뭔가 변화가 필요해!"
하지만 어쩌면 그건 마음 뿐. 물 속에 있으면서 옷이나 우리 몸이 물에 하나도 젖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 그 자체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실종된 자아정체성을 찾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여행이 아닐까? 여행은 '만남'과 '이별'을 전제로 한다. 이별은 그동안 고민하던 것들과 자질구레한 자신의 일상-정말이지 하루에도 수십 번은 내팽개치고 싶을 정도로 환멸스럽기까지 한-과의 이별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숨 돌릴 틈 없이 살아 온 껍데기 뿐이니 육신으로서의 허상적인 자아와도 이별을 고하게 된다.

원래, 이별은 슬픈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이별은 나 자신의 가슴 속 어딘가 한 켠이 뜯겨져 나가는 기분을 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한 지경에 이르면 한동안 실의에 빠져, 떠나간 그 무엇을 오래도록 갈망하며 지내게 된다. 하지만 이별은 전제로 한 여행은 절망감만 안겨주진 않는다. 떠나보내야 할 것은, 요즘 시쳇말로 쿨하게 보내버리고, 새롭게 맞이할 것은 또 그렇게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이는 성대한 의식으로서의 '만남'이 또 하나의 매력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10명의 저자들은 여행을 통해서 그런 이별을 선언했고, 돌아와서는 남은 날들을 이끌어갈 새로운 추진력을 쉽게 만났으리라고 생각했다. 각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인 저자들은, 책을 읽는 내내 말없이 그리고 끝없이 '아무것도 몰라도 좋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따라오기만 해!'라고 하는 듯 내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

그다지 길지 않은 문장들이 읽는 눈을 덜 피로하게 한 것은 물론, 곳곳에 실려 있는 사진들은 책을 덮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허락했으며, 그 사진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쉽게 넓힐 수도 있었다고 감히 장담하고 싶다.

그동안 좁은 식견으로 에세이집하면 거들떠보지도 않곤 하던 희한한 버릇이 내게 있었다. 그저 '붓 가는 대로 적은 글'이 에세이집이니 뭐, 그다지 깊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삼.곱하기.십(3×10)』을 읽으면서 교만한 나의 태도에 아무래도 변화가 온 것 같았다. 그냥 붓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쓴 글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폭넓은 사유와 고뇌의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나는 훌륭한 한 편의 철학 서적 같았다.

철학이란 게, 뭐 별 다른 게 있을까? 인생을 노래하고. 멀찌기 한 발짝 떨어져서 자신을 들여다 보는 여유를 갖게 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철학을 맛보게 해 준 책, 내가 직접 경험해 본 것은 아니지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들로 잠시라도 이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행복한 경험을 하게 해 준 책, 그래서 좀 더 시간들에 대한 소중함과 나 자신에 대한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게 해 준 책을 만날 수 있었던 것에 작지 않은 행복감을 느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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