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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신동호 | 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인간과 유전자가 흡사한 침팬지 침팬지는 나뭇잎이나 나뭇가지를 개미굴에 넣고 한참 동안 기다렸다가 여기에 개미가 까맣게 묻으면 꺼내 핥아먹는 영리한 동물이다. 인간처럼 집단을 이뤄 사냥하는 것은 물론, 사냥한 음식을 나누어 먹을 줄 알고, 돌과 나뭇가지를 도구로 사용한다.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쳐 주면 수백 단어의 수화도 할 줄 안다. 한국, 일본 등 국제공동연구팀은 2002년 침팬지의 게놈 지도 초안을 발표했다. 침팬지와 사람의 생명체 설계도를 열어보니 유전 정보를 기록한 DNA 염기서열 가운데 98.8%가 같았다. 침팬지와 인간의 염기서열 차이는 1.2%이다. 침팬지 다음으로는 고릴라, 오랑우탄이 인간과 가깝다. 고릴라는 사람과 DNA가 97% 같다. 최근에는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가 너무 흡사해 사람과 같은 호모(Homo)속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구에 생명체가 탄생한 35억 년 전을 24시간 전이라고 보면, 사람과 침팬지가 한 몸에서 갈라진 600만 년 전은 3분 전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로 동물의 행동과 진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침팬지를 거울삼아 인간의 본성을 알고자 노력해 왔다. 하지만 초기 침팬지 연구자들은 침팬지의 공격성과 잔혹성에 매우 실망했다. 야생의 침팬지들이 무리지어 다른 집단의 침팬지를 무참히 살해하는 장면이 자주 목격됐다. 침팬지 수컷들은 몇 마리씩 떼 지어 정찰을 하다가 혼자 떨어져 나와, 근처 다른 그룹의 침팬지를 발견하면 기습해 사지를 붙잡고 입으로 물어뜯고 돌로 쳐 죽인다. 침팬지 연구에 평생을 바친 여성 동물행동학자인 제인 구달은 1970년대에 아프리카 탄자니아 곰브 국립공원에서 침팬지 4개 집단 가운데 두 집단이 참혹한 동족상잔과 유아 살해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구달과 곰브 국립공원에서 1974년부터 침팬지를 관찰해 온 하버드 대학 리처드 랭햄 교수는 “수컷이 무방비 상태의 동족을 치명적인 공격으로 죽이는 것은 동물 사회에서 인간과 침팬지만의 유일한 특징”이라고 말한다. 프로 사냥꾼인 사자나 호랑이의 경우도 동족끼리 싸우면 자기 자신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기 때문에 승부가 어느 정도 가려지면 싸움을 중단한다. 반면 사람과 침팬지들은 자신은 다치지 않고 상대방 동족에게 치명상을 가하는 전문 킬러라는 것이다. 동물행동학으로 노벨상을 탄 독일의 콘라드 로렌츠 박사는 1963년 ≪공격성에 대하여≫에서 인간의 행동은 굶주림, 번식, 두려움, 공격성이 결정한다고 썼다. 그는 2차 대전의 대학살도 인간 본성의 표출로 보았다. 그는 “사자나 늑대와 같은 육식동물도 자기 자신의 종족에 대해서는 무기를 쓰지 않도록 억제하는 능력을 진화시켜 온 데 비해 불행하게도 인간은 이런 방향으로 진화하지 못했다.”고 통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침팬지에게는 공격성과 더불어 화해 본성이 있다는 증거가 많이 발견되면서 동물행동학자들이 인간을 보는 눈도 크게 변하고 있다. 침팬지는 쉽게 화를 잘 내며 흥분하고 공격한다. 그런데도 특이한 점은 침팬지들은 안정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전 세계 수십 명의 동물행동학자들이 지난 20년 동안의 연구 보고서 100편 이상을 묶어 2001년에 ≪자연의 갈등 해소≫란 책을 펴냈다. 보노보 침팬지는 성행위까지 인간과 흡사 이 책에는 침팬지, 보노보 등 영장류가 싸움 뒤 의식적인 키스, 껴안기, 섹스, 손잡기 등을 통해 화해를 모색하는 것을 밝혀낸 11건의 보고서가 포함돼 있다. 670번에 걸친 ‘짧은꼬리원숭이’의 싸움을 관찰한 결과 싸움 직후 10분 동안 이들 사이의 ‘몸 접촉 행동’은 평소보다 크게 증가했다. 또 격렬하게 싸웠던 암·수 침팬지가 10분 뒤 제3의 장소에서 껴안고, 키스하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공격적인 침팬지들이 분쟁이 초래한 사회적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화해를 시도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동물행동학자들이 영장류 사회에서 화해와 평화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흔히 피그미 침팬지로도 불리는 보노보에 대한 연구가 1980년대부터 활발해지면서부터이다. 보노보는 침팬지와 더불어 지구상에서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지만, 전쟁을 좋아하는 침팬지와는 달리 평화와 사랑을 즐긴다. 또한 침팬지가 남성 중심 사회를 이루는 데 반해 보노보는 여성 중심 사회를 이뤄 산다. 235종의 영장류 가운데 남·여가 서로 마주 보고 성 행위를 하는 것도 인간과 보노보뿐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인간은 마주 보고 하는 성 행위를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특징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침팬지나 말, 개처럼 하는 후방위를 죄악으로 여겨왔다. 보노보가 사람처럼 마주 보고 성 행위를 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독일 뮌헨동물원의 두 연구자였다. 동물이 마주 보고 성 행위를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1954년 이 사실을 논문으로 쓰면서도 비전문가는 볼 수 없게 라틴어로 발표했고, 녀석의 존재는 그 후 잊혀졌다. 보노보가 침팬지의 아종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1929년이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1970년대 들어 시작된다. 동물학자들이 아프리카 열대우림에 숨어 살며 몹시 수줍음을 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보노보 집단 옆에서 살면서 하나 둘씩 이들의 생활 모습이 공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보노보는 평화와 자유분방의 상징 미국 에모리 대학 심리학과 프란스 드 왈 교수는 미국 최대의 동물원인 샌디에이고 동물원에서 보노보를 연구해 1997년에 ≪보노보: 잊혀진 원숭이≫란 책을 출판했다. 지난 1982년에 ‘원숭이 정치학’을 통해 침팬지와 인간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남성 중심적 파워 정치학을 그렸던, 침팬지 연구가 드 왈 교수는 “보노보가 좀더 일찍 알려졌다면, 인간의 진화를 재구성하는 데 남성, 전쟁, 사냥, 도구, 파워 정치보다 남녀의 동등한 성 관계, 가족의 기원에 초점을 맞췄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인간이 침팬지류와의 공통의 조상에서 먼저 갈라져 나와 서로 다른 진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 600만 년 전의 일이다. 그 뒤 침팬지류는 다시 침팬지와 보노보, 즉 피그미 침팬지로 갈라졌다. 현재 보노보는 자이르 강변 열대우림에서 1만 마리 이하가 생존하고 있다. 학자들은 보노보가 인간이나 침팬지보다 덜 진화해 이들 3종의 공통 조상의 원형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보노보의 세계는 여성이 중심이고, 섹스를 통해 공격성을 스스로 통제한다. 또 독재자가 아닌 평등주의자이다. 보노보의 사회 생활은 섹스를 빼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미국의 성 해방론자들 그리고 동성애자들이 ‘보노보 웨이(bonobo way)’를 외치며 보노보처럼 자유분방하고 평화적으로 살자는 주장을 할 정도다. 보노보는 남녀는 물론 남-남, 여-여, 어른-청소년 등 어떤 조합으로도 섹스를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한다. 하지만 새끼는 아주 드물게 5∼6년에 한 마리씩만 낳는다. 사람의 특징인 섹스와 생식의 분리가 보노보에게서도 나타난다. 번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섹스는 인간과 보노보만의 두드러진 행동 특징이다. 만일 섹스의 목적이 오로지 번식이라면 왜 사람들은 적게 낳고 더 많은 섹스를 즐기려 하는 것일까? 보노보는 아주 쉽게 성적으로 흥분한다. 먹이를 가져다주면 수컷은 성기가 발기한다. 음식이 오기도 전에 보노보들은 서로 상대방을 섹스에 초대한다. 수컷은 암컷을, 암컷은 수컷이나 암컷을 초대한다. 또 사슴을 잡았거나 익은 무화과가 많은 숲을 발견해도 이들은 5∼10분 동안 섹스를 하고 난 뒤 음식을 먹는다. 음식을 둘러싼 쟁탈전을 피하기 위해 섹스를 통해 먼저 돈독한 분위기를 만들고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 것이다. 또한 다른 어떤 유인원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보노보의 가장 전형적인 섹스 패턴은 어른 암컷 간의 생식기 문지르기이다. 이때 이들은 오르가슴을 느끼는 것처럼 소리를 지른다. 수컷은 서로 등을 돌려 엉덩이를 붙이고 음낭을 문지른다. 특히 레즈비언 섹스는 암컷의 사회생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보노보 사회의 섹스는 사교적 행위” 보노보나 침팬지의 암컷은 어른이 되면 다른 그룹으로 이주해 새끼를 낳고 동화돼 산다. 암컷의 이주는 근친교배에 의한 열성 유전을 막고, 다양한 유전자가 서로 섞여 그 종이 생존해 나가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보통 다른 집단으로 이주한 암컷 보노보는 나이든 암컷을 한 마리를 골라 성기 문지르기를 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어 나간다. 상대가 답례를 하면 좋은 관계가 형성되고, 젊은 암컷은 그 집단의 일원으로 동화된다. 동성애가 이주자의 사회 진입을 순조롭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그리고 새끼를 낳으면 그 젊은 암컷의 지위는 더 확고해지게 된다. 암컷 보노보는 수컷이 음식을 갖고 있으면 접근해서 섹스를 한다. 그리고는 섹스중 음식을 달라고 높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 빼앗아간다. 보노보 수컷은 암컷이 먼저 음식을 먹도록 양보한다. 보노보 사회의 결속력은 암컷 사이의 결합에서 온다. 암컷들은 어떤 수컷이 특정 암컷을 괴롭히면 뭉쳐서 수컷을 쫓아낸다. 반면 수컷은 암컷에 집단적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없다. 집단 내에서 어린 수컷의 지위도 보통 자기 엄마의 지위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수컷은 평생 엄마와 아주 가깝게 지낸다. 반면 침팬지 사회에서는 사냥을 통해 사회적 결속력이 형성되고, 영토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수컷이 중심이 된다. 또한 보노보 암컷은 사람처럼 언제나 섹스가 가능하다. 따라서 제한된 시간, 즉 발정기에 암컷을 차지하려고 수컷 간에 치열하게 벌어지는 내부 경쟁이 보노보 사회에는 거의 없다. 프란스 드 왈 박사는 “보노보 사회의 섹스는 호색이나 에로틱으로 해석되기 쉽지만, 나는 일상적인 애정 표현과 같은 일종의 사교적 행위라고 표현하고 싶다.”고 말한다. 실제 보노보의 성 행위는 빈번하지만 성기 삽입 시간이 13초에 불과해 사람의 기준에 비하면 매우 짧다. 섹스와 번식의 분리는 긴밀한 남녀 관계와 사회의 기초인 가족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문제는 누가 이를 주도했느냐는 점이다. 흔히 여성은 섹스에 수동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여성은 수동적이라기보다 조심스러울 뿐이다. 여성이 조심스러운 것은 10개월의 임신과 출산 뒤 보육 등 섹스 이후의 엄청난 투자 시간을 감안할 때 상대방이 능력이 있고, 이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인가를 가리기 때문이다. 침팬지보다 인간과 더 닮은 점이 많은 보노보는 여성이 적극적으로 섹스 능력을 진화시킴으로써 미숙아로 태어난 자녀를 돌보는 데 수컷의 참여를 유도해 냈고, 결국은 이것이 핵가족 형성과 질 높은 자녀 교육, 나아가서는 일부일처제에 기반을 둔 인간의 문명이 탄생하게 됐다는 이론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곽해선ㅣ 경제교육연구소 소장(www.haeson.net) 일본에 발목 잡힌 한국의 무역 우리나라는 일본을 상대로 하는 상품 무역에서 단 한 해도 연간 흑자를 내지 못해, 만년 적자국 신세다. ‘일본을 상대로 상품을 수출하고 받은 대금’에서 ‘일본으로부터 상품을 수입하고 내 준 대금’을 빼면 그 결과가 대일 상품수지(무역수지)가 된다. 대일 상품수지는 수출액보다 수입액이 항상 더 커서 해마다 적자를 보고, 매년 적자폭도 커지고 있다. 1970년대에 우리나라의 대일 무역적자액은 145억 달러. 1980년대에는 353억 달러, 1990년대에는 1001억 달러로 대략 10년에 3배씩 규모가 늘어났다. 2000년대 들어와서도 대일 무역적자는 2000년 114억 달러, 2001년 101억 달러, 2002년 145억 달러, 2003년 190억 달러, 2004년 245억 달러로 매년 연간 적자 신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다. 해마다 적자를 크게 보면서 적자 누적액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한·일 두 나라가 대한민국 수립 후 국교를 재개한 것이 1965년. 그때부터 2003년 말까지 38년간 누적된 대일 무역적자가 무려 2070억 달러다. 달러 당 1000원으로 환산하면 우리 돈으로 200조 원이 넘는다. 2004년만 해도 우리나라의 상품 수출은 약 2542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였다. 수입은 약 2245억 달러를 해서 무역수지가 297억5000만 달러 흑자를 냈다. 그런데 대일 적자가 245억 달러다. 한 해 동안 세계를 상대로 상품을 수출해 번 돈이 일본 한 나라하고만 교역해 입은 손실과 맞먹는다. 이쯤 되면 ‘사상 최대의 수출’을 했고 무역흑자를 냈다는 얘기가 무색해진다. 1990년부터 2003년까지 14년간 우리나라가 세계를 상대로 벌어들인 무역흑자 총액이 427억 6300만 달러다. 이 금액은 2003년과 2004년, 단 2년간의 대일 무역적자와 맞먹는다. 14년을 일해서 번 돈을 불과 2년 사이 일본에 넘겨준 셈이다. 대일 무역으로 적자를 크게 보지만 않아도 우리나라 무역수지 흑자는 훨씬 커질 것이다. 그러나 대일 적자를 워낙 크게 내다보니 전체적으로는 아무리 무역흑자를 내더라도 흑자폭이 줄어든다. 미국이나 중국, 동남아, 유럽에 수출해서 버는 돈 중 상당액을 일본에 쏟아 붓는 꼴이다. 일본과의 무역, 왜 늘 적자만 보는가 대일 무역은 왜 늘 적자만 보는가? 우리가 유독 일본에만 수출을 못해서가 아니다. 유난히 일본에서 수입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일본을 상대로 해서는 우리나라도 매년 상당한 규모로 수출하고 있다. 하지만 해마다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더 크다. 왜 일본을 상대로 해서는 수출보다 수입을 더 많이 할까? 우리나라 기업들이 완제품 제조에 필요한 부품, 소재, 생산설비 등 중간재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심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경제 개발을 시작하면서 우리나라는 공업 분야 기업들이 원료를 가공해 완제품을 만들어서 수출하는 형태로 경제 성장을 꾀해 왔다. 공업 완제품을 만들어내려면 원재료(원자재) 외에 부품이나 생산설비(자본재) 등 중간재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를 만들려면 액정화면, 반도체 칩 등이 필요하고 이들 부품을 만들어내는 기계가 필요하다. 부품이나 생산설비의 상당 부분은 국내에 기술력이 충분하면 만들어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수입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기업들이 공업 완제품 생산과 수출을 늘리면 늘릴수록 중간재·자본재 수입도 따라서 늘어나게 되어 있다. 기술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경제개발을 시작한 우리나라는 수출용 완제품 생산에 필요한 중간재를 수입에 크게 의지해야 했다. 지금은 기술력 발달로 일부 중간재의 경우 국산품 자급도가 높아졌지만 여전히 수입에 의지하는 것들이 많다. 이런 경위로, 우리나라의 전체 수입 중 40∼50% 가량은 늘 중간재다. 문제는, 그렇게 수입하는 중간재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일본에서 들여온다는 데 있다. 전보다 꾸준히 줄어들고는 있지만 일제 부품·소재 수입은 여전히 우리나라 전체 부품·소재 수입의 30% 가까이 된다. 일본 다음으로 미국, 유럽에서도 많이 들여오지만 수입 중간재는 1990년대 전까지만 해도 절반이 일본산이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 기업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수출용 완제품 생산에 필요한 중간재의 태반을 일본에서 들여오고 있다. 그 결과 대일 무역에서는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항상 크다. 또한 완제품 생산에는 중간재가 필수이고 중간재는 주로 일본에서 들여오므로 국내 기업들이 제품 생산과 수출을 늘리려면 언제나 그만큼 더 많은 중간재를 일본에서 들여와야 하는 구조가 생겼다. 그래서 수출이 늘어나면 대일 수입도 함께 자동으로 늘어나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대일 의존형 무역구조가 굳어졌다. 중간재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는 대일의존형 무역구조 아래서는 기업들이 아무리 수출을 많이 해 무역흑자를 내더라도 그 흑자의 상당 부분을 일본으로부터의 중간재 수입분에 잠식당할 수밖에 없다. 중간재인 부품·소재의 대일 무역수지는 1988년 74억 달러 적자를 기록한 이래 2001년까지 계속 연평균 100억 달러 수준의 적자를 냈다. 2001년 대일 무역적자가 약 101억 달러였으므로 연간 대일 중간재 무역적자가 대일 무역적자의 전체 규모와 비슷했다. 이런 가운데 국내 경기와 대일 무역적자는 기계가 맞물려 작동하듯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국내 경기가 살아나 설비투자와 생산, 수출이 늘면 곧바로 부품·소재의 대일 수입이 늘어난다. 그 결과 대일 무역적자도 함께 늘어 무역수지가 흑자를 내더라도 흑자폭을 줄인다. 거꾸로 국내 경기가 침체하면 같은 이치를 거꾸로 밟아, 대일 무역적자도 줄어든다. 지난 1997년 대일 무역적자는 131억 달러였는데 이것이 1998년에는 46억 300만 달러로 크게 줄었다. 1997년 말 찾아온 경제위기로 국내 기업들이 일시 생산을 크게 줄이면서 대일 부품·자본재 수입을 40% 이상 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위기를 넘긴 뒤 수출이 활발해지자 대일 무역적자는 다시 1999년 82억 8000만 달러, 2000년 113억 6192만 달러로 크게 늘었다. 2001년에도 대일 무역적자는 101억 2760만 달러로 전년보다 다소 줄었다. 이 해에도 국내 경기가 침체해 기업들이 설비투자를 줄이면서 대일 부품, 소재 수입을 줄였기 때문이다. 불균형 무역·산업구조의 고착 무역구조는 산업구조를 반영한다. 중간재 수입을 일본에 의지하는 양상으로 무역의 불균형 구조가 굳어지면서 우리나라에는 산업도 일본 산업에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불균형 구조가 함께 고착됐다. 무역과 산업의 극심한 대일 의존은 지난 수십 년간 거의 그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매년 총수입의 1/5 정도를 일본에 의존하고, 농수산물 등을 뺀 중간재나 최종 완성재의 절반은 일제 수입품으로 충당한다. 우리의 주력 수출업종인 전기·전자·반도체 같은 IT 분야, 그리고 산업기계·철강·금속 분야도 일제 수입 중간재를 특히 많이 쓴다. 우리나라의 대표 수출 상품인 휴대전화만 해도 그렇다.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국산 부품은 전체의 40% 정도에 불과하다. 반도체와 LCD 같은 핵심 부품은 30%를 일제로 수입한다. 이렇게 만든 휴대전화를 수출해 100달러를 벌면 그 중 30달러는 일본 차지다. 반도체도 마찬가지다. 2003년 반도체의 대일 수출은 약 188억 달러, 반도체 부품의 대일 수입은 207억 달러로 20억 달러 적자다. 대일 무역적자 185억 달러 중 20억 달러가 반도체 부문 적자다. 수입 반도체 부품 중 상당수는 TV나 휴대전화, 기타 정보기기에 탑재되어 다시 수출 길에 오르지만 수출입 통계만 놓고 보면 반도체가 대일 무역적자에서는 큰 요인이 되어 있다. 실제로 최근 대일 무역적자의 70∼80% 가량은 반도체 등 IT 분야를 중심으로 한 부품·소재 부문에서 발생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수출하는 상품의 70% 정도는 철강·반도체·전기전자·제품·기계류 등 중화학공업 제품이다. 그러나 주력 수출품목인 전자·철강·화학제품 제조 분야에서 대일 수입의존도가 모두 30%를 넘는다. 일본은 주요 수출품이 승용차·반도체·컴퓨터·산업용 로봇·전자복사기 등 기술 수준과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에 모여 있다. 반면 우리나라 수출품은 반도체를 제하고는 기술과 부가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은 선박·직물·철강 등에 모여 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수출이 늘면 대일 수입도 그만큼 거의 자동으로 늘어난다. 수출을 많이 할수록 대일 무역적자도 커진다. 일본이 부품 수출을 중단하기라도 한다면 그 즉시 우리 수출기업은 생산을 멈춰야 한다. 우리 경제를 이끄는 견인차가 수출인데, 우리의 수출은 일본 땅에 굵은 끈으로 묶여 있다. 대일 의존에서 벗어날 길은 우리나라의 무역이 일본의 손에 묶인 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기업들이 중간재·자본재 수입처를 다른 나라로 돌리면 되지만 이 일은 개별 기업들이 당장 해내기 쉽지 않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려면 중간재도 좋아야 하는데 일제가 품질이 좋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수입 거래를 했던 까닭에 일제품에 의존하는 구조가 굳어지기도 했다. 워낙 대일 의존구조가 굳어지다 보니 요즘엔 황당하게도 ‘대일의존에서 벗어나려 하기보다, 질 좋은 일제 중간재 덕에 우리 수출이 잘 되는 걸 일본에 감사하고 일제품을 더 가져다 쓸 일(?)’이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그러나 대일무역 불균형은 한·일간 기술력 차이가 주된 원인이므로 우리가 기술력을 키우면 해결될 수 있다. 일본은 대부분의 부품·소재를 자국에서 생산하는 이른바 풀 세트(full-set)형 산업구조를 갖추고 있다. 부품·소재 생산 기술을 기반으로 두고 있으니 일본은 기술력이 좋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완성품 위주 수출 전략을 채택해 부품·소재의 수입 비중이 높다 보니 부품·소재 기술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최근 우리나라 부품·소재 기업의 설계 기술, 신제품 개발 능력, 신기술 응용 능력은 선진국의 70% 수준에도 못 미치고 생산기술 수준도 선진국의 80% 미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핵심 부품·소재를 주로 수입에 의존하다보니 선진 기업들과 구별되는 제품을 개발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부가가치도 크게 낮다. 그 결과 90년대 이후 우리나라는 수출이 크게 늘어나기는 했으나 수출단가는 일본에 비해 크게 떨어진 채 물량을 늘리는 양 위주 수출이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나라에는 전자부품용 소재만 전문으로 생산하는 기업이나 소재 관련 전문 연구소가 없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50인 이하 영세기업의 비중이 기계, 자동차, 전자 등을 중심으로 전체의 89.5%를 차지한다. 외국에서는 부품·소재 시장에서 대기업의 지배력이 높아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거꾸로 가고 있어서 기술 수준 개선이 요원하다. 기업 수나 종사 인구로 보면 국내 부품·소재 산업은 비중이 작지 않다. 2002년 4월 현재 약 9만 8000개의 제조업체 중 전기·전자·기계 분야를 위주로 3만 6000여 개 업체에서 약 123만 명이 일하고 있다. 사업체 수로는 전체의 36.7%, 종사자 수로는 전체의 46.4%로, 제조업 총생산액의 절반(48.2%)을 생산해낸다. 그러나 기술 수준이 낮기 때문에 부가가치를 높이지 못하고 기술의 해외 의존을 계속하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기술의존에서 벗어나려면 국내 기업들이 연구개발 투자를 많이 해서 자체 기술력을 키우고 일본을 뛰어넘는 원천 기술을 확보해 수출용 완제품 생산에 필요한 핵심 부품·소재와 기계류, 생산설비를 국산 기술로 마련해야 한다. 정부도 우리가 일본에 의지하는 부품을 국산화할 수 있도록 대체산업, 부품·소재 산업 육성에 나서야 한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 cafe.daum.net/parque 우선 동양을 살펴보자. 고대 4대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그러하듯, 치수사업은 공통적인 중요 과제였다. 황하 문명의 경우, 치수사업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공로로 순 임금으로부터 임금 자리를 물려받은 우 임금에 이르러 역사적으로 처음 등장하는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를 ‘하(夏)나라’라 부른다. 유물로 실증된 중국 최초의 국가, 은(殷)나라 공자의 ≪시경(詩經)≫에 나오는 하나라는 기록상으로만 존재하지만 왕권이 강화되자 비로소 왕위세습이 이루어졌다. 기원전 1500년경에 이르러 제17대 걸왕(桀王)은 말희에게 흠뻑 빠져 신하들과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위하여’를 외쳐댔다. 군주와 신하가 똑같으니 나라가 어찌 되었겠는가! 하나라는 결국 그들과 앙숙이었던 상족(商族)에 의해서 멸망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은왕조(殷王朝)’의 시작이다. 은나라는 상족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므로 ‘상(商)나라’라 일컬어지며, 470여 년을 지속해 온 최초의 고대국가라 하더라도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폭군 걸왕 때문에 멸망하고 말았다. 하나라와 은나라의 성격상의 차이는 하나라가 기록상으로 알려진 최초의 고대국가라면, 은나라는 유물로 실증되는 중국 최초의 국가라는 점에 있다. 470여 년의 하나라 사직을 무너뜨리고 혁명적인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한 은나라는 처음부터 국가 건설에 대한 의욕이 대단하였다. 이러한 의욕이 은나라 시대의 유적과 유물의 발굴로 이어져 국가적 존재가 여러 가지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사실로 입증되었지만 말이다. 기원전 16세기경에 시작된 은왕조는 농업과 군사문제 등 나라의 중대사를 모두 신의 뜻을 묻고 난 다음에 왕이 결정하는 이른바 신권정치 시대였으며 점을 칠 때에 사용된 것이 바로 ‘갑골문자’였다. 갑골문자는 중국 최고의 상형문자이며 한자(漢字)의 조상에 해당한다. 이러한 갑골문을 통해서 은나라의 국세를 짐작할 수 있는데, 당시 산동 반도에 자리잡고 있었던 강씨족(羌氏族) 포로 300여 명을 한꺼번에 제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그 당시에는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 흔했다). 앞에서 하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다만 기록에 의존할 뿐 물증을 제시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저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나, 은나라의 경우는 하나라와는 달리 유적들의 발굴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갑골문자의 탄생과 봉건제도의 시작 1899년부터 지금의 중국 하남성 안양현 소둔(小屯)의 발굴과, 여기서 출토된 갑골문자 해독에 의해서 이것이 바로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은나라 수도 은허(殷墟)의 유적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은나라는 청동기 시대였으나 귀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감히 만져볼 수도 없는 그림의 떡이었다. 다시 말해서 일반 농민들은 아직 석기시대를 졸업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석기를 이용한 농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만큼 많은 사람들이 투입되는 노동집약적 산업일 수밖에 없었으며, 생산성 향상이란 아예 기대할 수조차 없었다. 은나라가 망해 가는 과정도 하나라의 경우와 똑같았다.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달기에게 흠뻑 빠져 나랏일을 멀리하고 폭정을 일삼았으며, 주지육림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사기(史記)≫와 ≪은기(殷記)≫에서 말하는 주지육림이란, 문자 그대로 ‘술이 연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과 같다.’는 군주들의 호화로운 주연을 그리 표현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말희에게 흠뻑 빠져 주지육림의 설화를 남긴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은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이러한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도 부덕한 금상(今上)을 폐할 때 내세우는 명분으로 삼았다. 주왕이 달기를 끌어안고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동안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참담한 꼴을 당하고 말았다. 즉, 은나라의 말기적 현상을 간과하지 않았던 서쪽의 주족(周族)이 들고 일어나 기원전 10세기경에 은왕조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이때, 주족이 은나라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낚시꾼의 대명사가 된 강태공이 발탁되었다.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여상(呂尙)이라는 사람이 주족의 문왕의 눈에 들었고, 문왕은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왕을 격파한 ‘목야(牧野)의 전투’에서 커다란 공을 세운 여상에게 ‘선왕 태공(太公) 이래로 기다리고 있었던 현자’라는 뜻으로 ‘태공망(太公望)’이라는 호칭을 주었다. 그러나 아직 정복하지 않은 은왕조를 두고 문왕이 병사하자, 그의 아들 무왕이 왕위에 올라 부왕의 유지를 계승하여 전쟁으로 국력이 극도로 피폐해진 은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기원전 1121년 ‘주나라’를 세웠다. 기원전 1121년 주족의 주나라는 은나라의 영토, 즉 황하 유역의 알짜배기 땅을 차지했지만 걱정이 태산 같았다. 막상 은나라의 땅에 왕조를 세우고 정복자로 군림했지만 망해버린 은나라 귀족들과 백성들은 ‘그래, 어디 한번 잘 해봐라.’는 식이었다. 다시 말해서 한쪽 변두리를 통치할 때와는 전혀 정치능력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통치할 땅은 넓어졌지, 인적 자원은 부족하지, 게다가 중원에는 여러 씨족들이 언제 도발해 올 지 모르는 데다가 망한 은나라의 귀족세력들이 언제 외부와 연결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일으킬 지 몰랐기 때문에, 주나라 왕실은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는 일종의 회유책, 다시 말해서 그들과의 제휴를 맺기로 하였다. 우선 주나라의 무왕은 은의 귀족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은의 왕자인 녹부(祿父)에게 옛 영토를 다스리게 하였고 제사도 허용하였으며, 은 왕조 시대의 관례를 그대로 인정하였다. 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도 못했으니 대리만족이라도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호의를 베풀면 만만하게 보고 기어오를 우려가 있으므로 무왕은 자기 동생을 녹부의 감시자로 삼아 영지에 머물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주나라 봉건제도의 시작이다. 정복한 은나라의 땅을 직접 통치하지 못하고 왕자를 내세워 위임 통치케 하는 등의 여러 조치들은 비록 무력으로는 은을 멸망시켰지만, 문화적으로는 갑골문을 창시한 은에게 흡수되는 상황을 말해주는 대목이며 정치적으로는 은나라의 신권정치를 대신한 봉건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일단 제후들에게 봉토를 주어 평상시에는 제후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자치권을 주는 대신, 제후들은 정기적으로 주의 왕실을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고 자기 지역의 특산물을 바쳤다. 이것이 바로 조공의 기원이며,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주변국의 조공을 중요한 무역수단(외교수단)으로 삼았다. 서양 문명의 교차로, 메소포타미아 주변국의 파란만장한 삶 한편, 메소포타미아 주변에는 고대의 소아시아 국가들이 눈부신 활동을 하였는데, 페니키아 인의 활약으로 알파벳이 발명되고 헤브라이 인의 구약성서는 후세에 종교적·문화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는 모두 기원전 12세기경부터 동 지중해에서 활약한 해상 교역민들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 특히 이 지역처럼 잦은 구조조정을 거친 곳도 없다. 바로 문명의 교차로였기 때문에 한 많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맞물려 긍정적인 의미로는 역사발전, 부정적인 의미로는 지역주민의 편안한 삶을 보장할 수 없었다. 지정학적 중요지역, 또는 문명의 교차로라 불리는 땅은 예로부터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내지 않은 나라가 없다. 우리나라도 그 가운데 하나지만 말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살펴보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강의 동남부를 중심으로 민족과 문명이 성장과 소멸을 거듭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 소아시아에서는 여러 나라들이 흥망을 거듭하면서 고대사에 중요한 역할과 영향을 끼쳤다. 그 대표적인 나라 또는 민족으로는 해상활동과 무역을 통해서 세력을 떨친 페니키아, 유일신 야훼를 숭배함으로써 서구 크리스트 교 문명에 공헌한 헤브라이 인,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마지막으로 통일한 페르시아, 그리스 고대문명의 기틀을 놓은 에게 문명을 들 수 있다. 현재 시리아·레바논·팔레스타인 지역은 바다와 사막에 끼어 있어 커다란 국가를 건설하는 데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한계가 있지만, 동 지중해의 입구이면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통로이며 먼 옛날부터 해륙무역의 요지였기 때문에, 그 지역에 살고 있었던 민족사의 흥망도 그만큼 변화무쌍했다. 그만큼 이 지역은 강대국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침략 대상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 지역은 각각 동진과 서진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가야 할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원래 이 지역에는 기원전 1500년경부터 ‘가나안’이라는 민족이 활약하고 있었는데 기원전 13세기 말부터 계통이 불명확한 해양민족이 침입함으로써 당시에 이곳에 진출하여 있었던 이집트와 히타이트 세력이 쇠퇴하고, 그 뒤를 이어 페니키아 인·아람 인·헤브라이 인으로 일컬어지는 셈족 계통의 민족들이 활발한 교역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 세 민족은 모두 문화사적으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중요한 지역에서 살았다는 죄 아닌 죄로 한 많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알파벳을 발명한 페니키아 인 서양 세계에 알파벳을 전해준 페니키아 인은 기원전 10세기 무렵에 레바논 산맥 서쪽에 정착하여 시돈·티루스·베이루트 등을 중심으로 나라를 건설하여 지중해의 무역을 독점하고 많은 식민도시를 건설한 셈어계의 해양민족이었다. 지중해는 물론, 멀리 흑해까지 진출하여 엄청난 재물과 부를 끌어 모아 크게 번성하였으며 그들의 해상활동은 나중에 그리스인과 카르타고 인에게 견제를 받을 때까지 왕성하였다. 페니키아 인들이 건설한 시돈은 현재 레바논의 사이다(Saida)인데, 그들은 쌓아둔 재물로 온갖 사치와 퇴폐적이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므로 성서에서는 시돈을 ‘부와 악덕의 도시’라 하여 여기서 ‘시도니즘(Sidonism)’이라는 말이 나왔다. 페니키아 문자는 이집트·바빌로니아 및 크레타의 문자를 기초로 한 표음문자이며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발전하는 동안에 오늘날의 알파벳으로 만들어졌다. 앞에서 이야기한 가나안 사람들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 자기들의 셈어 발음을 끼워 맞추어 ‘시나이 문자’라고 하는 표음문자를 만들어 냈다. 가나안 사람들이 만든 시나이 문자를 배운 페니키아 인들은 그것을 페니키아 문자로 사용하였고, 해상활동을 통해서 다시 그들의 문자를 그리스에 전함으로써 그리스 문자가 생겨났고, 마지막으로 로마에 전해져 로마 문자로 정립되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알파벳’이 생겨난 것이다. 소위 최초의 서양인이라 일컬어지는 그리스의 전설에 의하면 테바이(테베)의 창업자 카드모스 왕이 처음으로 페니키아 문자를 도입하여 보이오티아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중계무역의 독점자, 아람인 가나안 사람들이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시나이문자를 만들어 냈다면, 아람인들은 ‘아람 문자’를 만들어 내었다. 기원전 1300년경 아라비아 반도로부터 시리아로 이동하여 많은 도시국가를 세운 아람인들은 말과 글이 서로 맞지 않아 아람문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아람인들은 다마스커스를 중심으로 하여 내륙의 중계무역을 독점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쓰는 아람어가 상업상의 국제 공용어로 확산되었고, 나중에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한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다. 나중에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 어가 공용어가 되다시피 하였다. 기원전 10세기로 추정되는 비문이 실제로 쓰였던 최고(最古)의 자료이며 나중에 헤브라이 문자와 아라비아 문자 등 서 아시아 여러 지방의 문자 성립의 조상이 되었다. 아람 문자는 멀리 몽골과 티베트·위구르·만주에도 영향을 끼쳤지만 사실은 가나안 사람들이 이집트의 상형문자에 자신들의 발음을 끼워 맞춘 시나이 문자에서 파생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페니키아 인들은 해상무역을 통해서, 아람인들은 내륙의 중계무역으로 동서양에 그들의 기록매체(문자)를 전파했으며, 중국의 갑골문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기록매체로서 한자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성준 | 경기 용인 지석초 교사 올해도 작년에 이어 특별활동 부서 신청란에 영어연극부를 적어 냈다. 작년에 일곱 명을 데리고 연극반을 지도하면서 충실히 가르쳐 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과, 힘들지만 많은 추억을 남겨주는 연극에 대한 애정과 미련이 교차한 것이 그 이유이다. 연극은 늘 만족하게 끝나지 않지만 본 공연보다 준비 과정이 힘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서로 걱정하고 부대끼는 가운데 아이들이나 지도교사는 형언키 어려운 값진 그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 처음 발령받아 영어교과 전담교사로서 큰 의욕을 가지고 시작했던 해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모 대학에서 개최했던 초등학생 영어연극대회에 우리 학교도 영어연극부를 급조해 참여하게 되었다. 4학년 학생 중에서 성적이나 영어 실력이 아니라, 연극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겠다고 기대되는 아이들을 뽑는 것을 캐스팅 기준으로 삼았다. 대부분 생활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상태라 학원에 안 다니는 학생이 많았다. 그러니 수업을 마치고 학교에 남아서 연습하기에는 좋은 조건이었다. 소문난 개구쟁이 우람이, 천사 같은 언니 수연이 와는 달리 고집불통 수진이, 꼼꼼하고 착한 희숙이 등등 연극부원이 확정되었다. 이제부터 피나는 연습만이 우리 앞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문화나 정서에 맞는 연극 대본을 구하기가 어려워 아이들과 직접 의논해 가며 대본을 직접 쓰기로 했다. 연극의 특성과 구조에 대해 설명해 주며 조금씩 대본을 써 나갔다. 아이들 대부분이 기초 단어도 읽을 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진척이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그림을 눈에 익히듯 문장 전체를 보면서 소리를 외워 연결시키도록 반복훈련을 시켰다. 시간은 더뎠지만 아이들과 함께 만드니 재미있어 하며 뿌듯해 했다. 흥미를 고조시키기 위해 등장인물의 이름도 아이들이 정하도록 했다. 대본 작업을 마무리하는 데 무려 한 학기 이상이 걸렸다. 제목은 ‘뱃살공주’였는데 자신의 외모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뱃살공주가 자신의 헤어스타일에 유난히 집착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미용사를 만나 결혼한다는 내용이었다. 나와 아이들이 많은 공을 들여서인지 단행본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거라고 자부할 만한 대본이 완성되었다. 대학 시절 희곡과 세익스피어 작품 수업을 빼놓지 않고 들었던 것이 그렇게 큰 도움이 되었다. 본격적인 연기 연습과 함께 무대 배경이며 소품 제작에 들어갔다. 마땅히 나서서 도와주실 학부형도 안 계셨지만 모든 것을 아이들과 나, 우리의 힘으로만 완성하고 싶은 욕심에 연극 연습이 끝난 후에도, 영어교실에 남아서 소품도 만들고 전지에 배경 그림도 그리고 색칠을 하였다. 어두워지고 추워서 더 이상 교실에 남아 있기 힘들 때가 되어서야 자장면을 한 그릇씩 먹여서 집으로 돌려보내곤 했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코러스는 도무지 지도가 되지 않아 하이라이트 부분만 빼고 카세트 테이프에 따로 녹음하여 더빙하기로 했다. 의상은 집에서 각자 구해오도록 했고, 분장은 6학년인 수연이가 맡기로 했다. 드디어 대회 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마침 10월이라 쉬는 날이 많았지만, 휴일을 모두 반납하고 막바지 연습에 전념했다. 그동안 열심히 따르고 연습해준 아이들이 매우 고마웠고 이제야 ‘사서 고생’을 좀 면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 6개 학교만이 참가 신청을 해 내심 좋은 성적의 입상을 기대하고 있었다. 대회 당일 열 두 명의 아이들과 함께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주최한 학교에 도착했다. 날은 눈부시게 맑았고, 마침 축제 기간이라 여기 저기 다양한 부스와 함께 먹거리 장터도 벌여놓고 있었다. 아이들과의 나들이는 더없이 아주 산뜻하게 시작되었다. 우리의 공연 순서는 네 번째였다. 막이 오르고 첫 공연이 시작되었을 때 아이들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우선 무대 장치와 의상에 아이들이 압도된 것이다. 형형색색의 의상과 어떻게 만들었는지 잘 꾸민 무대 배경은 마치 동화책이 살아서 눈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동물 모양의 소품의상을 입은 아이들이 무대 위를 오가며 유창한 영어로 말하고, 악기까지 연주해 가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나도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 때문에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어느새 두 번째 공연 준비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들이 무대에 여러 가지 무대 장치와 소품을 설치하느라 분주했고, 아이들에게 의상을 입히고 한 명씩 직접 분장을 해주었다. 두 번째 공연의 막이 오르자 이번에는 6학년쯤 되어 보이는 어린이가 영어로 랩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발음도 아예 원어민 발음과 다르지 않았다. 내 이마에서는 급기야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아이들을 둘러보니 풀이 죽어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아이들이 자신감을 잃을까 걱정을 하고 있는데 수진이가 울상이 되어 내 의자 옆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어떡해요. 우리는 망신만 당하게 생겼어요.” “음, 괜찮아. 우리도 열심히 연습했잖아.” 하지만 수진이는 왜 우리는 준비를 더 잘하지 못했느냐, 의상이 초라하다는 등 떼쓰기를 계속하더니 창피해서 연극을 못하겠단다. 주인공을 맡은 수진이가 공연을 못하겠다기에 수진이를 데리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때는 내 마음도 몰라주는 아이가 야속하기도 했고, 여기까지 와서 떼를 쓰는 수진이에게 화가 났던 것이다. “수진아, 너희들도 그렇지만 선생님도 최선을 다했어. 일요일, 국경일, 개교기념일에도 선생님은 학교에 와서 너희들과 연습했잖아. 선생님 입술 좀 봐! 그리고 다른 학교 아이들은 엄마들이….”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지만 누적된 피로로 내 입술은 전체가 트다 못해 주먹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헤지고 부어 있었다. 겨우 아이를 달래서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공연 전에 수진이에게 화낸 것도 미안했지만, 더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이 아이들에게 못내 미안했다. 위로 차원에서 먹거리 장터로 데려가 순대와 떡볶이를 사주니 아이들은 금세 즐거운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내가 왜 어린 아이에게 그런 말을 했었는지 겸연쩍고 우습기도 하다. 그 아이들은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 가끔은 그 연극을 떠올려 보기도 할 것이고 내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내가 나에게 주어졌던 아름다운 만남과 소중한 추억에 감사하듯이 그 아이들에게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내일 모레는 특별활동 수업이 있는 날이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소품들을 손질해야겠다.
윤석우 | 경기 고양 백석고 교사 “선생님! 저 결혼합니데이.” 원식이의 결 높은 목소리를 들은 건 그리 오래 되지 않다. 그간 자주 통화를 해서 그런지 경상도 사투리도 정겹게 들렸다.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파도가 바위를 치고 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들떠 있었다. “잘했다. 축하한다.” 기쁜 마음으로 맞장구쳤다. 주저할 이유가 없다. 그의 신산했던 지난 날을 익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흔쾌히 그 두 마디로 마음을 대신했다. 사람마다 상대를 대하는 느낌이 다를진대, 원식이는 사뭇 달랐다. 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이 다되도록 지속적으로 전화를 해왔었고, 그때마다 자신의 근황을 전해오는 몇 안 되는 졸업생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결혼 소식은 무엇보다 반갑고 기쁜 일임에 틀림없다. 자운영꽃이 햇살에 빛난다. 멀리서 응시하면 보료를 깔아 놓은 듯 신비롭게 보이는 꽃밭. 듬성듬성 자운영꽃이 피어있는 논들을 지나며 5월의 싱그런 햇살을 본다. 결석한 원식이네 집까지 가려면 제법 먼 길을 걸어야 한다. 버스를 타도 되겠지만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야 하는 마을이라서 아예 처음부터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작정했다. 학교에서 출발한 지 오래지 않아 그리 실하지 않은 자전거 바퀴에 그만 펑크가 나고 말았다. 차마 길가에 두고 갈 수 없어 자전거를 곁에 끼고 천천히 걷는다. 가끔 버스가 스쳐갈라치면 도로는 온통 먼지투성이다. 심동리 길로 들어선다. 다복솔이 깔린 붉은 황톳길이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넉넉하다. 그러나 펑크 난 자전거는 여전히 쿨럭거린다. 길지 않은 두 구릉을 넘어서야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 초입의 점방에 닿았다. 몸뻬바지를 강똥하게 차려 입은 주인 아주머니가 가게 문을 열고 나선다. “아주머니, 실례합니다만……. 원식이네 집이 어딘가요?” “원식이 아부지. 누가 찾으요.” 주인 아주머니는 빠르게 나를 위아래로 한 번 인두질하더니,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점방 안쪽으로 목을 들이밀고 목청을 높인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늙수구레한 어르신 한 분이 가게 입구로 걸어 나온다. 옷차림이 추레하다. 아마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던 듯싶다. “내가 원식이 애비요.” “원식이 담임선생입니다.” 나는 얼결에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를 했다. 점방을 나선 원식이 아버지는 불콰해진 얼굴에 성하지 않은 다리를 끌고 앞장서서, 그리 멀지 않은 집으로 나를 안내한다. 슬레이트를 간신히 이고 있는 집은 허름하다. 군데군데 슬레이트가 떨어져 나가 엉성하고 정돈되어 있지 않다. 여자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집의 어수선한 느낌, 그러니까 에푸수수하여 산만하기 그지없는 집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다만, 집 뒤쪽으로 둘러 있는 깊은 대숲이 햇볕을 따뜻하게 받고 서 있을 뿐이다. 원식이는 방에 누워 있었다. 끙끙거리며 누워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나는 곧장 방안으로 들어간다. 아직 열이 내리지 않았는지 얼굴이 벌겋다. 시골 방안의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약은 먹었니?” 아이는 고개를 흔든다. 나는 우선, 학교에서 준비해 간 몸살감기약을 먹였다. 그러고는 방안에 있는 수건을 쥐고 마당으로 내려와 세숫대야에 찬물을 듬뿍 담아 방안으로 들어왔다. 원식이 아버지는 툇마루에 돌미륵처럼 앉아 있다. 동공이 열려 있다. 아이는 찬물을 이마에 댈 때마다 움찔한다. 아직 아침은커녕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한 듯하다. 몇 번을, 수건을 번갈아 가며 열을 내리고 있는데 먼저 하교했던 기홍이 문을 열고 들어선다. “선생님, 여기…… 밥…….” 기홍이 어머니께서 원식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간단한 식사를 소반에 보내셨다. 흰 밥과 김치, 깍두기에 된장국이 전부지만 정갈하다. “원식아, 밥 좀 먹자.” 완강히 거부하는 아이를 억지로 일으켜 앉히고 뜨끈한 밥을 된장국에 말았다. 몇 숫갈 뜨다 만다. 조금 더 먹으라고 했지만 단호하다. 모든 것이 소태맛일 것이다. 아이를 다시 눕히고 이마에 찬 수건을 대어 열을 내린다. 기홍이가 대숫대야 물을 부리나케 바꿔온다. 한참을 그렇게 하고 있자니 어느 결에 아이가 잠에 떨어진다. 오훗녘 해가 금세 기울었다. 편안한 느낌의 얼굴이다. 열도 내린 듯싶고 호흡도 고르다. 좀더 자게 두고는 툇마루로 나와 앉는다. 기홍이는 저만치 앉아 있다. “어제, 늦게까지 아이들과 축구하고 놀았어요.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제 잘못인 양 기홍이는 얼굴을 들지 못한다. 그만한 나이에 그럴 법도 한 일인데 일찍 철이 들었다. 학교에서도 같은 말을 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원식이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술이 적당히 취해 툇마루에서 졸고 계시나 했는데 마루에도 없다. “기홍아, 원식이 아버지 어디 계신지 모르니?” “아까 제가 들어올 때, 선생님 자전거 끌고 점방 쪽으로 나가시던 걸요?” 기홍이가 원식이 밥을 들고 오면서 원식이 아버지를 보았다며 정황을 말한다. 그 순간 점방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석양이 머물러 있는 에움길에 원식이 아버지가 자전거를 몰고 걸어오고 있다. 비틀거리면서도 넘어지지는 않는다. 기홍이가 재빠르게 달려가서는 자전거를 받아 온다. “선생님 자전거가 빵꾸 난 것 같아서 때워 왔지라. 해드릴 것이 없어서…… 이렇게라도…….”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노을이 자운영꽃처럼 피어나는 마당에서 나는 아직도 붉은 기운이 사라지지 않은 얼굴의 원식이 아버지께 감사 인사를 올린다. 원식이는 아직도 잠에 빠져 있다. 아마도 푹 자고 나면 내일은 등교할 수 있으리라. 원식이 아버지의 다순 배려를 느끼며 자전거 손잡이를 잡는다. 기홍이가 동구밖까지 따라 나온다. 나는 그에게 원식이를 부탁하고 길을 잡아 나선다. 중천에 반달이 걸렸다. 자전거를 타고 달빛을 헤쳐 서둘러 페달을 밟는다. 마음 한켠이 흐뭇하고 따뜻해진다. 그후로 군대에서 휴가 나와 우리 집에 잠깐 들렀을 때, 원식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내가 “이제 고아구나.” 했더니 계면쩍은 웃음만 흘리던 녀석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누이가 있는 부산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울산에 자리를 잡았다는 얘길 들은 지도 꽤 오래 되었다. 긴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울산에서 만난 여자인 듯했다. 제법 나이가 들어 하는 결혼이니 만큼, 행복하고 또 행복했으면 좋겠다. 행복은 아주 사소한 데서 오는 것, 그것을 행복으로 아는 지혜로움도 알았으면 좋겠다. 고향집, 5월 들판에 피어 있던 자운영꽃처럼 원식이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길 빈다.
조현호ㅣ 울산 옥현초 교사 할미들이 만든 세상 영화 ‘마파도’에는 이런저런 사연으로 남자를 다 잃고 한 가족처럼 살아가는 다섯 노파가 등장합니다. 험한 바다와 싸워가며 억척스럽게 삶을 살아가는 그 영화 속 노파들은 각기 성격이 다르면서도 그네들만의 나라를 잘 통치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런 여성중심의 영화가 개봉되기 전 호주제 폐지를 포함한 민법 개정안이 지난 3월 초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습니다. 과도기를 거쳐 2008년부터 호주제는 완전 폐지된다고 합니다. 시대가 변했으니 제도도 바뀌어야 하겠지요. 바야흐로 남녀평등의 시대를 맞이하여 이번 호에서는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을 신화 속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생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여성은 창세신화의 주인공입니다. ‘마고할미’는 단군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세상을 만든 창조신으로 지역에 따라 ‘노고할미’, ‘서구할미’ 등으로도 불립니다. 할미가 무슨 힘이 있나 하고 의아해 하실지 모르지만 할미란 ‘한+어머니’, 즉 대모신(大母神)을 이릅니다. 마고할미 신화는 특히 온갖 수모와 학대에 시달린 여성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받아들여졌습니다. 아주 큰 덩치에 오줌을 누면 홍수가 지고 한숨을 쉬면 곧 태풍이 되었답니다. 깊은 남쪽 바다를 건널 때는 치맛자락이 적셔졌는데 젖은 치마를 벗어 월출산에 걸쳐놓으면 온 산이 덮인 채 캄캄한 암흑계로 변했습니다. 서해의 섬들은 그녀가 변을 보고 난 뒤에 생긴 것이랍니다. 할미의 힘이 엄청나죠? 이제 부안군 변산면 격포마을로 갑니다. 격포마을 해안가 돌출된 곳에 수성당(水聖堂)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서해를 다스리는 ‘개양할머니’와 그녀의 딸 여덟 자매를 모신 제당입니다. 조선 순조 1년(1801)에 처음 세웠으며 현재의 건물은 1996년에 새로 지은 것입니다. 신화 속 개양할머니도 마고할미마냥 엄청난 여신입니다. 그녀는 서해바다를 걸어 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하여 어부를 보호하고, 풍랑을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게 해주는 자상한 여신으로 딸들을 8도로 시집보내었지요. 수성당 아래는 용굴처럼 움푹 팬 지형인데 거센 파도가 이곳에서는 잠잠해집니다. 어머니의 자상함이 그 억센 풍랑을 잠재우는 듯합니다. 개양할머니의 본적이 부안이라면 ‘설문대할망’은 본적이 제주도입니다. 할망은 옥황상제의 셋째 딸이라고도 하는데 한라산을 만들 때 조금씩 흘린 흙들이 한라산 자락의 오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할망은 빨래를 할 때 제주 앞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빨래를 놓고 팔은 한라산 꼭대기를 짚고 서서 발로 빨래를 문질러 빨았다고 할 정도로 거신(巨神)입니다. 그녀는 아들을 무려 500명이나 두었는데 할망이 죽은 것을 알고는 모두 한라산 영실기암으로 변했습니다. 또한 제주도 사람들에게 제주도와 육지를 잇는 다리를 만들어주겠다 했거늘 명주 단 1필이 모자라 실패했다고 합니다. 마고할미나 개양할미, 선문대할망은 지역은 다르지만 실상 같은 성격의 창조여신들입니다. 생산만큼은 여신의 고유영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지요. 본향신으로, 여왕으로 웃손당은 금백조 셋손당은 실령조 맬손당은 소천국과 백조할망은 서울 남산 송악산서 솟아오던 임정국 님애기 소천국과 가부간 되난 아아전 오랐구나. 소천국 만나고 가부간 삼안 부배간이 렴살 때 아들 팔성제가 떨어질 듯 막동이는 배였구나….(이하 생략) 위는 제주도 송당 본향본풀이의 시작 부분입니다. 제주도 마을신 본향신을 모시는 본향당은 마을마다 분포되어 있지만 이곳 송당리의 본향당이 원조입니다. 사연인즉 금백주라는 여신이 소천국이라는 부신(父神)과 결혼하여 많은 자식을 낳고 살다가 죽은 후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당신이 되었고 그들의 자식들도 뿔뿔이 흩어져 제주도내 여러 마을의 당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백주할망은 서울에서 살다 제주로 넘어와서 이곳에 정착하여 본향당신이 되고 그 자손들을 번성시키는 정착여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습니다. 이런 본향당 주변의 나무에는 화려한 물색을 걸어두어 신목에 대한 예우를 받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최초의 여성지도자였던 여왕은 신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유명한 선덕여왕 지기삼사(知幾三事)를 보면 여왕의 선견지명이 돋보입니다. 그 중 생전에 자신이 아무 날 죽을 것이라고 예견하고는 자신을 낭산(狼山) 남쪽 도리천에 장사지내라는 주문은 후대 사천왕사가 건립됨으로써 확인됩니다. 그렇지만 성골의 남자가 다하여 덕만(德曼)이 왕위에 오른다고 했을 때 조정에서는 얼마나 논란이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성품이 관인명민(寬仁明敏)하여 치세자로서 손색이 없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첨성대, 분황사, 영묘사, 황룡사 구층탑 등 신라문화의 상징물들이 당대에 건립되었고 김유신이나 김춘추 같은 인물을 등용하여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합니다. 창세신화 속에서 여신은 생산력을 가진 창조자요 대모신의 너그러움을 지닌 존재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창세신화를 비롯한 여신이 등장하는 대부분의 신화에서 후속 이야기가 없어 이야기가 단절되기 일쑤고 설문대할망의 경우는 최후에 물장오리에 빠져 죽었다는 허망한 결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단군신화에서도 웅녀는 곰이 사람으로 환생했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정보가 없어졌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자인 판도라는 그녀로 인해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여자인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더라면 죄가 없었겠죠. 하지만 여신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여신들의 이야기가 사라지고 하는 것은 모든 것들이 남성중심사회로 변해 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남자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여자들은 필요악적인 존재로만 전락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세상은 다시 남녀평등 혹은 여성중심으로 회귀하고 있으니 희망 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승화된 사랑이 신화로 몇 년 전 안동 택지개발지구에서 무덤을 이장하던 중 남편을 잃은 아내의 애절한 마음이 담긴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 급박하게 써내려가 쓸 공간이 모자라자 윗부분까지 돌려쓴 이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중략)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정절을 강조하던 조선후기라지만 이토록 애절한 망부가를 부를 수 있었던 아내의 사랑이 숭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큰 남자 뒤에는 더 큰 여자가 있었습니다. 시조(始祖)라는 엄청난 남자 뒤에는 그의 어머니가 있었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남자 뒤에는 그를 뒷바라지 해준 아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모신앙(聖母) 혹은 신모(神母)라 불리며 지금까지도 추앙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로서 남편을 지극히 사모하여 그 사랑이 승화되어 여신이 된 이야기는 ‘치술신모 신화’에서도 나타납니다. 신라 눌지왕의 부탁으로 왕의 두 동생을 구출해낸 박제상은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박제상의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치술령에 올라 통곡하다 죽어 그 몸은 망부석이 되고 영혼은 새가 되어 은을암에 숨었답니다. 나라에서는 그녀를 치술신모라 일컫고 제의를 모시도록 하였습니다. 선묘의 사랑 또한 극진했습니다. 부석사 무량수전 옆에는 선묘를 모신 선묘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의상이 중국 유학시절 머물렀던 집의 무남독녀 아가씨였는데 의상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거절을 당합니다. 그러나 선묘는 의상에 대한 지원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고 의상이 신라로 귀국할 때는 황해에 몸을 던져 황룡이 됩니다. 이승에서 못한 사랑을 죽어서도 따라가겠노라고 하여 황룡이 되어 황해를 건너는 의상을 호위해 주고 부석사를 세울 때도 부석으로 잡귀들을 쫓아내어 주었고 최후에는 석룡이 되어 무량수전 아래에 묻혔던 것이죠. 선묘의 사랑은 세속적인 사랑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한(恨)이 한(恨)이 되어 무속에서는 한을 품고 죽은 역사 속의 주요 인물들이 신으로 모셔지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무속의 역할이란 것이 정상적인 죽음보다는 비정상적인 죽음을, 결혼한 사람보다 결혼하지 못하고 죽은 영혼을 달래는 것이 본분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안타까운 영혼들은 한이 깊어서 이승과 저승을 떠돌게 되므로 굿을 통해 이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한이 지나치면 그 폐해가 마을까지 번지게 되기에 동제로까지 확대되기도 합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강릉단오제는 대관령국사성황신이 된 범일스님과 여성황신이 된 정 씨 처녀를 모시는 제의입니다. 범일국사는 강릉에 살던 정 씨 처녀를 호랑이를 시켜 몰래 업어 오게 하고는 자신의 처, 즉 대관령국사여성황으로 삼았습니다. 대관령여성황이된 정 씨는 또한 호랑이에게 물려죽은 비정상적이고 험한 죽음이기 때문에 무속신앙이 관장하는 영혼이 된 것이죠. 사람들은 대관령국사성황과 여성황을 음력 4월 15일부터 단옷날까지 약 20일간 강릉에 있는 대관령국사여성황사에서 합신(合神)하고 무당으로 하여금 굿판을 벌입니다. 조선 3대 누각의 하나인 밀양 영남루에는 죽음으로 순결을 지켰다는 아랑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유모를 따라 영남루로 달 구경을 갔다가 괴한의 핍박을 피하다 낙동강변 아래 대나무밭에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겁니다. 이후 밀양 부사로 부임하는 사람마다 첫 날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나가는데 한 부사가 이 사연을 듣고 관련자를 처벌하고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혼백을 위로하기 시작하면서는 출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남루 아래에는 아랑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아랑사가 있으며 밀양지역 축제인 아랑제에서 규수를 뽑아 제향을 받들고 있습니다. 삼척시 원덕읍 신남마을에는 미역을 뜯으러 애바위에 갔다가 풍랑에 휩쓸려 죽은 처녀의 영혼을 위로하려고 남근을 깎아 바치면서 풍어를 기원하는 풍습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 해신당 외에 고성군에도 시집 못가고 빠져죽은 처녀의 영혼을 위로하고 풍어를 기원하는 등 동해안에는 바다와 관련한 여신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주도에도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혼령이 그 마을 수호신으로 모셔진 처녀당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남제주군 성산읍 신천리 현 씨 일월당은 오빠가 심한 풍랑을 맞아 불귀의 객이 되자 너무 슬픈 나머지 봉수대에서 떨어져 자살했다는 현 씨 처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현 씨들의 조상신으로 모셔진 것이 마을을 지켜주는 당신으로 모셔지고 있습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릿발이 내린다는데 그 원혼들을 달래줌으로써 그 여신들이 바다를 지키고 산을 지키고 우리나라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신들의 부활을 꿈꾸며 우리 국토 동쪽 끝 외로운 섬 독도가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독도는 현재 우리 땅이고 천년만년 우리 땅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럴 거라고 단정하기엔 상대방의 대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일본은 치밀하고 장기적으로 독도문제를 국제사회에 홍보함으로써, 비단 독도 뿐 아니라 우리에게서 또 다른 무엇인가를 빼앗으려는 고차원적인 술수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서해를 주름잡던 개양할미시여, 제주도를 만든 설문할망이시여, 그리고 우리의 마고할미시여, 동해의 여신들이시여…. 바다를 첨벙대던 그 거대한 몸집으로 막내둥이 독도를 지켜 주시고, 바다를 다스리는 인자함으로 우리 바다를 지켜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