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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 경남 거제중앙고 교사, 사진작가 바다와 만난 수 만년의 세월 사람이 살면서 발길이 생기고 발길이 많이 묻힌 곳에 큰 길이 생겼다. 문화와 생활을 아우르는 길은 동해안을 따라 부산에서 함경북도 온성군까지 이어져 7번 국도가 되었다. 바다와 어우러져 길게 뻗친 7번 국도는 풍광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있는 석호를 가득 안고 있다. 석호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자연유산으로 다음과 같은 과정에 의해 만들어졌다. 빙하기에 바닷물이 크게 줄어들어 해수면이 크게 낮아진 곳에 하천의 침식작용으로 동해안에는 큰 골짜기들이 생겨났다. 그 후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다시 빙하가 녹고 바닷물의 높이도 높아져 이전에 만들어 놓았던 골짜기에 물이 차게 되면서 움푹 들어간 지형인 만(灣)을 만들었다. 먼 바다에서 해안으로 밀려오는 파도는 올라왔다 다시 내려갈 때 한 쪽으로 휘어져 내려간다. 이런 파도의 힘으로 바닷가의 모래들이 계속 한쪽으로 밀려나 만의 입구에 모래로 이루어진 둑(사주, 사취)이 만들어지게 된다. 계속 모래가 쌓이면 둑은 커지게 되고, 결국은 만의 입구를 막아 버린다. 그래서 석호의 물은 담수의 물도 아니고 바닷물도 아닌 그 중간을 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강릉의 경포호와 풍호, 주문진의 향호, 양양군의 포매호와 순포, 속초의 청초호와 영랑호, 고성군의 광포호, 봉포호, 송지호, 화진포호, 북녘 산하의 감호, 삼일포, 시중호 등이 있다. 문학과 어울려진 석호의 백미는 경포호지만, 자연과 어울려진 풍광의 아름다움은 속초 북방에 분포하는 석호들에 있다. 금강산과 설악산이 품었던 지하수들이 뿜어 나와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 만들어진 여러 호수들. 이 호수들에 전해오는 이야기도 많다. 예로부터 절경의 금수강산은 우리 선조들에게 있어 하늘의 뜻을 이어받고 기개를 높이는 매개체로 이용되었다. 신라의 화랑들은 높은 산과 깊은 골에서 심신수련을 통하여 나라 사랑과 삶의 의미를 공부하였다. 그들이 즐겨 찾던 곳 중 하나가 관동과 관서를 나누는 백두대간의 대줄기인 태백준령이다. 신선이 머무는 아름다운 풍경 1만 2000개의 봉우리와 여러 계곡으로 이루어진 금강산에 아름다운 호수가 위치하니 그곳이 삼일포이다. 북녘의 산하에 놓여 있는 삼일포는 조선시대 정철이 노래한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신라시대에 금강산에서 무술을 연마하던 영랑, 술랑, 남석랑, 안상랑 등의 네 화랑이 서라벌에서 열리는 무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된다. 그들이 처음 머문 곳이 삼일포인데,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3일 동안 놀다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들이 이곳에 머문 흔적은 호수 가운데 위치한 정자의 이름인 사선정과 가까이에 위치한 해금강 총석정에 위치한 육각으로 된 네 기둥의 이름인 사선봉에 남아 있다. 아름다운 삼일포는 천연기념물 제218호로 백두산의 삼지연, 통천의 시중호와 함께 북측의 3대 호수에 속한다. 삼일포를 뒤로 하고 남으로 내려오면 구선봉 아래에 '나뭇꾼과 선녀 이야기'의 무대가 된 감호가 나타난다. 멀리 거진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보면 구선봉이 보이고, 그 아래에 보이는 작은 호수가 감호이다. 남측에서는 떠나버린 선녀를 기다리는 나무꾼의 심정으로 남방한계선과 휴전선 사이의 버려진 경작지에 자연습지를 복원하고 있다. 남측의 가장 북방에 위치한 석호는 화진포인데, 둘레 16㎞의 대부분에 해당화가 자라고 있어 말 그대로 꽃의 호수이다. 남측의 석호 중 가장 규모가 큰 화진포는 중평천과 월안천이 호수로 흘러들어 담수호를 이루고 있는데, 호수 주변에는 백사장과 소나무숲이 넓게 펼쳐져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기에 많은 별장들이 자리 잡고 있다. 화진포를 거쳐 해안을 따라 내려오면 죽왕면에 송지호가 위치하고 있다.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개발되고 있는 송지호는 맑은 물과 소나무숲 및 산봉우리가 조화되어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호수로 재첩이 잡히고 있어 여름철에 재첩잡이 체험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이곳은 호수 중간까지 만들어진 목도를 통해 송지호의 아름다움을 접하게 하고 있다. 그 외에도 고성군에는 봉포호와 광포호가 위치하고 있는데, 봉포호는 대학을 설립하면서 대부분이 사라지고 일부가 대학의 진입로 주변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담수화되었다. 속초 시내에는 청초호와 영랑호가 위치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하고 있다. 청초호는 항구로서의 기능을 하는 유일한 석호로 작은 배들이 드나드는 내항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90년대 이후 전국의 항만 중 오염도 1위를 차지하였던 청초호는 강원관광엑스포를 열면서 호수의 1/3이 매립되어 사라져 고니들의 보금자리인 갈대숲이 사라졌지만 하수 처리 시설이 설치되면서 수질은 좋아진 상태이다. 영랑호는 속초시 장천동, 금호동, 영랑동 일대에 있는 호수로 둘레가 8㎞에 달한다. 삼일포에 머물던 네 국선이 이곳을 지나는 중 영랑이 이 호수의 아름다움에 취해 무술대회에 나가는 것도 잊고 이곳에 머물면서 고기를 잡고, 뱃놀이를 하면서 풍류에 취해 오랫동안 머물렀기에 영랑호가 되었다고 한다. 영랑호 주변에는 차량이 다닐 수 있는 호안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드라이브, 도보여행, 자전거하이킹을 할 수 있으며 도심지 속의 작은 공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넓게 펼쳐진 습지대는 없지만 그런대로 자연의 운치를 느낄 수 있고, 그 운치를 더하는 속초팔경의 하나인 범바위가 있다. 주변에 콘도미니엄과 유원지가 조성되어 경관이 많이 파괴되었지만, 범바위에서 바라보는 영랑호의 전경은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범바위는 바위의 모양이 범 형상을 닮아 붙여진 이름인데, 속초사람들에게는 성스러운 바위로 알려져 있다. 해질 무렵 하구 쪽에서 영랑호를 바라보면 설악산의 울산바위와 어울려진 낙조는 이곳이 선경(仙境)임을 알게 해 준다. 바닷가 식물들의 수줍은 유혹 시냇물과 바닷물 및 육상이 만나 만들어진 석호에는 다양한 환경이 나타나 여러 종류의 생물이 살고 있다. 담수와 해수가 만나기에 담수에 사는 잉어, 향어, 메기, 붕어, 가물치와 바닷물에 사는 연어, 황어, 은어, 학공치, 숭어, 도미가 함께 살고 있다. 또 이들을 먹이로 하여 살아가는 철새들이 찾아 겨울에는 특별히 백조의 호수가 된다. 몸이 희어 백조로 일컬어지는 천연기념물 제201호인 고니, 흑고니, 큰고니가 다수 찾고 있다. 석호에 나타나는 식물의 종류도 다양한데, 육상식물, 물에서 살아가는 식물, 바닷가식물들이 어울려져 살아가고 있다. 육상식물로는 소나무가 가장 많이 자라고, 물에서 살아가는 식물에는 갈대, 물억새, 달뿌리풀, 부들, 질경이택사, 솔방울고랭이, 순채, 매자기, 송이고랭이, 세모고랭이, 창포, 큰고랭이, 부채붓꽃, 노랑꽃창포, 부처꽃, 마름, 이삭물수세미, 말즘, 민나자스말, 개발나물, 눈양지꽃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부채붓꽃은 붓꽃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 강원도 동해안을 따라가면서 일부 분포지가 나타나는 희귀한 붓꽃으로 5~7월에 꽃이 청자색으로 피며 꽃잎이 다른 붓꽃류에 비해 넓다. 우리나라에서 특정야생식물로 지정된 희귀종이며, 북측에서도 부채붓꽃 분포지인 함경남도 부전군 백암리에 있는 부채붓꽃밭을 천연기념물 제300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눈양지꽃은 우리나라 동해 바닷가에만 나는 여러해살이풀로 5~8월에 노란색의 꽃이 잎겨드랑이에 매달린다. 이곳에 나타나는 바닷가 식물에는 갈대, 청비녀골풀, 수송나물, 해당화, 갯완두, 갯메꽃, 갯방풍, 순비기나무, 좀보리사초, 쇠보리, 해란초, 지채, 갯씀바귀 등이 있다. 해당화는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이 지는 작은 나무로 바닷가 모래땅이나 산기슭에서 높이 1.5m까지 자라며, 뿌리에서 많은 줄기가 나와 큰 무리를 이루며 자란다. 꽃은 홍색으로 5개의 꽃잎이 지름 6~7㎝ 정도로 줄기 끝에서 피며, 열매는 새들의 좋은 먹이가 된다. 순비기나무는 중부 이남의 바닷가에 자라는 상록 관목으로 줄기는 눕거나 비스듬히 자라면서 전체에 회색빛이 나는 흰색의 잔털이 퍼져 있다. 꽃은 진한 자주색이고 이삭 모양으로 모여 나며, 열매는 약용으로 잎과 가지는 목욕용 향료로 이용된다. 특히 순비기나무는 해변을 망토 모양으로 덮는 역할을 하여 해변을 이루는 모래를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갯방풍은 산형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굵은 황색의 뿌리가 모래 속에 깊게 들어가며 높이는 20㎝ 내외로 자라고 꽃은 6~8월에 줄기 끝에 펼쳐진 우산 모양으로 뭉쳐난다. 전체에 흰털이 가득 나고, 뿌리는 약용으로 사용한다. 해란초는 여러해살이풀로 7~8월에 꽃이 피며 꽃대에 연한 황색 꽃이 달리며, 열매는 둥글고 씨에는 두꺼운 날개가 달려 있다. 주로 바닷가 모래땅에 자라고 꽃이 난초와 같이 아름답다고 하여 해란초라고 한다. 해당화 피는 꽃의 호수, 화진포 '황금물결 찰랑대는 정다운 바닷가, 아름다운 화진포에 맺은 사랑아~' 한때 유행하였던 이씨스터즈의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이라는 노래 가사의 일부처럼 화진포는 희망과 아름다움이 흘려 넘치는 낙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호인 화진포를 둘러보는 것은 석호에 살고 있는 생물과 석호의 역할에 대해 알아보는 귀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화진포는 소금의 농도가 낮아 수면이 잘 얼지 않고, 오염되지 않는 깨끗한 물과 넓은 갈대밭 및 주변에 농경지가 분포하고 있다. 쉴 수 있는 넓은 공간과 먹이가 풍부하여 철새들에게 좋은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지만 화진포의 대부분은 도로와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자연성을 많이 잃었지만, 도로변마다 해당화를 심어 꽃의 호수라는 이름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습지대가 형성되어 다양한 석호 생물을 관찰하기에 좋은 곳은 화포리 장평 부락과 잣골 사이에 개설된 일주도로이다. 이곳의 습지대에서 갈대, 해당화, 쉽사리, 부채붓꽃, 흰여뀌, 눈양지꽃, 벌노랑이, 개발나물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이 일주도로에는 조용한 곳을 찾는 철새들도 많이 날아오고, 사람의 왕래도 적은 곳이다. 다시 이 길을 돌아 나와 송림 사이에 위치한 이기붕과 김일성 별장을 찾아가 보자. 김일성 별장에서 바라보는 광활한 화진포해수욕장의 모습은 더욱더 우리 가슴을 풀어헤치게 한다. 해수욕장에는 많은 바닷가식물들이 살고 있는데, 갯방풍, 좀보리사초, 쇠보리, 수송나물, 해란초, 갯메꽃, 갯씀바귀 등이 있다. 다시 차량을 이동하여 화진포교 위에서 이곳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고, 그 주변에 있는 이승만대통령의 별장도 가보자. 화진포와 해수욕장을 굽어보는 위치에 해양박물관이 위치하는데, 이곳에는 바다에 사는 어류, 조개류, 갑각류의 표본들이 전시되어 있다. 모두가 지켜야 할 민족의 보물 보름달이 휘영청 쏟아지는 밤이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두레박을 타고 내려오는 석호. 가끔씩 화를 내는 바다와 높은 산이 만나 날씨의 변덕이 심한 이곳에 예전부터 사람들이 살아 왔다. 석호에 기대어 먹을 것을 얻고, 동해의 구름과 안개를 보면서 많은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온 사람들. 그들에게 석호는 삶의 터전이자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선경의 세계였다. 사람의 힘으로 쉽게 만들 수 없기에 그 값어치가 뛰어난 이곳은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 첫째, 많은 생물들이 석호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석호에 살고 있는 생물은 석호가 사라지면 같이 사라질 수밖에 없기에 석호는 보호되어야 한다. 둘째, 우리나라 최대의 휴양지인 동해안은 산과 바다가 어울러져 파라다이스를 만들고 있다. 이 낙원에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 만든 석호는 더 아름다운 운치를 더하여 준다. 셋째, 새들이 날고 있는 석호를 보면서 아름다운 심성을 싹 틔울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따뜻한 마음을 글로서 전달하는 석호의 값어치는 돈으로 환산될 수 없다. 동해안에 있는 남과 북의 석호들이 만나는 날, 민족의 혼과 웅지가 다시 한 번 떨쳐지는 날이 되리라. 이처럼, 바다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늪인 석호는 낙원이면서 희망의 땅인 것이다. 그런데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이처럼 귀중한 땅인 석호가 사라지고 있다. 선조들이 지켜 물려준 석호, 우리도 우리 후손들에게 반드시 물려주어야 한다.
나무, 새 2008년 4월! 한국인 최초 우주인이 러시아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납니다. 경쟁률만 18,000:1. 요즘엔 이벤트 상품으로 우주여행권도 등장하였으니 바야흐로 우주탐험이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닌 실제 상황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옛사람들이 우주라고 여겼을 하늘을 바라봅니다. 저 멀고 높은 하늘세계에 우리 사람들이 근접할 수는 없을까? 옛사람들의 이러한 염원에 답하기라도 하듯 신수(神樹)가 등장했습니다. 시베리아의 세계수(World Tree)나 우주나무(Cosmic Tree), 단군신화의 신단수(神檀樹)가 그것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나무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지상으로 내려오는 교통로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지금껏 산신제를 지내고, 당수나무에 제를 지내고, 무당들이 신대라는 대나무를 통해 신내림을 받는 것으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신성한 나무를 길게 잘라 만든 것이 바로 장대입니다. 나무나 장대가 신과 교감하는 통로였다면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새는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전령입니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새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컸던 것 같습니다.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三足烏)는 태양 속에 사는 세 발 달린 까마귀입니다. 기러기는 소식을 전해 주는 새이자 부부 간 백년해로의 상징이었습니다. 때와 시를 알리는 닭은 희망찬 출발이나 상서로움의 상징이며, 원앙은 부부 간 금슬의 상징으로, 까치는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해주고 꿩은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새로 알려져 있지요. 이웃한 나라에서도 새를 신성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일본 신사의 상징이랄 수 있는 도리이[鳥居]는 신이 사는 세계 ‘천(天)’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하늘의 신에게 사람의 뜻을 전달해 주는 새가 그 위에서 쉬어가라는 의미이지요.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새인 가루다는 불교에 수용되어 팔부신중으로 당당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이 가루다는 사람의 몸에 새의 머리를 하거나 전신이 새의 형상을 띠기도 하지요. 전남 구례 연곡사 서부도는 상륜부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는데 그 상륜부에 봉황 네 마리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동부도와 북부도에서도 상륜부에 머리 부분이 훼손된 봉황을 볼 수 있는데, 이 봉황 네 마리가 혹시 4천하(天下)를 상징하는 가루다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봅니다. 한편 연곡사 부도의 상대석에는 가릉빈가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가릉빈가는 극락조라고도 불리며 사람의 머리에 새의 형상을 하고서 극락정토에서 그윽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 심양 고궁 청녕궁의 정문 앞에는 7m 높이의 신간(神竿)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거주하던 공간에 어울리지 않게 나무장대가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윗부분에 있는 자그마한 용기에 쌀과 잘게 썬 돼지내장을 담아 까마귀에게 먹이를 주던 만주족의 전통에 의합니다. 만주족의 이러한 풍속은 누르하치가 위험에 처했을 때 까마귀떼가 날아와 전신을 감싸주는 바람에 살아날 수 있었다는 데서 연유합니다. 티벳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몸을 독수리의 먹이로 주는 ‘천장(天葬, 鳥葬)’이라는 독특한 풍습이 있지요. 그들은 사람의 영혼이 독수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솟대=장대+새 솟대란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나무장대나 돌기둥 위에 얹은 신앙대상물입니다. 그러니까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의 새,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나무를 상징하는 장대나 기둥이 결합된 것이죠. 지역에 따라서 짐대, 수살대, 진또배기, 거릿대, 솔대, 당산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단독으로 세워지기도 하고 장승이나 선돌, 돌탑 등과 함께 세워지기도 하죠. 이 솟대의 기원을 내부적으로 찾는 시각은 삼한시대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신성한 공간 소도(蘇塗)에서 비롯됩니다. 소도라는 공간에서 장대에 새를 올린 솟대의 형식이 나왔다는 거죠. 솟대를 세운 이 곳은 신성한 곳으로 여겨 죄인이 들어와도 잡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각은 현존하는 솟대가 남부지방에 치중하여 분포하기에 북방유입설에 맞설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만, 분명한 것은 솟대문화는 만주, 몽고, 시베리아, 일본 등 북아시아에서 고루 보이는 보편화된 샤머니즘 문화라는 점입니다. 솟대의 새는 대부분 오리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오리는 천계(天界)의 신과 왕래하는 사신이요, 물새이기에 농사에 절대적인 물을 관장하여 홍수와 화재를 막아주기도 합니다. 알도 많이 낳으니 풍농, 풍어, 다산까지 기대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철새로 남북을 오가는, 즉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새로 받아들여져 옛 가야 땅에서는 사자(死者)를 저승까지 동반하는 의미에서 오리 모양 토기를 부장하곤 했지요. 솟대의 기능은 기본적으로 액막이 즉, 제액초복(除厄招福)을 기원하기 위함입니다. 이 경우에는 단독으로 보다는 당수나무, 장승, 돌탑 등 다른 마을 지킴이와 같이 서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산신 중심의 상당신(上堂神)과 함께 마을 하당신(下堂神)으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죠. 강릉 진또배기는 경기도나 충청도 등지의 솟대가 주로 장승의 하위개념으로 들어선 것과 달리 당당하게 단독으로 강문(江門)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장대 위 물오리가 육해공(陸海空)에 두루 능한지라 바람, 물, 불의 삼재(三災)를 막아주기를 토속신에게 기원하며 풍년과 풍어를 빌었던 것이죠. 솟대만 있으면 외롭고 약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장승이나 돌탑 등에 묻혀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보다 본연의 임무에 더 충실할 수 있죠. 따라서 독립형 솟대는 혼자라기에 더 막강하고 자생력이 강합니다. 하늘을 향해 쭉 올라간 장대는 마치 수묵화에서 한 획에 선을 그은 듯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한편, 과거시험에서 급제자를 내면 솟대를 건립하기도 하였는데 이 경우 솟대의 새에 붉은 색을 칠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 문과 출신자의 경우는 솟대 위의 새를 학으로 부르고, 무과 출신자의 경우는 봉황이라고 불렀다네요. 이러한 풍속은 오리[鴨]가 ‘甲’과 ‘鳥’가 결합된 말로 새 중에서 으뜸가는 새이자, 과거시험에서의 으뜸인 장원급제를 의미하는데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PAGE BREAK]안녕과 복을 가져다주는 돛대 액막이로서, 과거급제 기념으로서 솟대를 세웠다지만 한편으로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도 솟대가 등장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곳곳에 행주형(行舟形) 지세의 마을이 있습니다. 주로 두 물줄기가 합류하는 곳이나 물돌이 마을이 대부분인데 이런 지형에는 돛대를 세워야 배가 안정적으로 운항을 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돛대로 솟대를 세웠던 것입니다. 큰 마을에는 돛대가 여러 개 있으면 좋다고 하는데 울산 언양 어음리에는 무려 다섯 개의 솟대가 들어섰다고 합니다. 이 행주형 솟대를 찾아 마을 어르신들을 상대로 솟대의 행방을 수소문해보았으나 결국은 실패였습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하던 새마을운동 시절에 일부 사라지고 또 경지정리를 한다며 흔적 없이 밀어버렸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럴까요? ‘언양 불고기’로 유명한 이 일대는 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이동하면서 상권이 위축되었고 또 고속철 건설로 엄청난 높이의 교각이 들어서 있어 곧 배가 침몰할 듯 정신없습니다. 어디 이곳만 그러하겠습니까. 흔적 없이 사라진 수많은 솟대가 어디 여기뿐이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나무로 솟대의 문화재지정 문제입니다. 나무의 특성상 현존하는 것들도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더군다나 동제가 계승되고 있는 지역일지라도 향후 그 전통이 단절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해있다면 문화재지정을 서두르거나 적어도 그 솟대를 이어갈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이 강구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경북 군위군 부악면 한밤마을은 부림 홍씨 집성마을로 팔공산 줄기로 둘러싸인 분지형 마을로 이곳도 선형(船形)마을입니다. 마을 입구 솔숲에는 진동단(鎭洞壇)이라 해서 약 4m의 돌기둥에 돌로 만든 오리를 올려 두었습니다. 이곳 역시 마을의 지세가 바다에 떠있는 배 모양이어서 오리처럼 물에 잠기지 말라는 의미로 돛대형 돌기둥을 세워두고 오리를 올려둔 것입니다. 이렇게 배와 관련한 지형에서는 우물이 많으면 배 바닥에 구멍이 나서 침몰하는 격이라 우물이 적고 대개 무거운 돌담보다는 비교적 가벼운 흙담이 많이 보입니다. 전북 부안읍 내요리에서는 ‘당산할머니’ 혹은 ‘짐대할머니’로 불리는 돌기둥이 이 마을의 수호신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당산이 풍수적으로 배의 형국인 내요리에 안녕과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배가 거친 풍랑에 안전하기 위해서는 큰 기둥을 꽂아 안정감을 주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생각에서죠. 매년 정월 보름에 주민들이 이 당산에서 마을의 복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고 줄다리기 후 동아줄을 당산에 감는 ‘짐대할머니 옷 입히기’를 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옷을 입혀주면 그 해의 농사가 잘 된다고 합니다. 절로 간 솟대 부안 동문 안 당산과 서문 안 당산은 숙종 15년(1689)에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하여 세웠다고 합니다. 동문 안 당산에서 ‘당산하나씨’, ‘짐대하나씨’ 라고도 부르는 솟대당산에는 머리를 바다 쪽으로 향하고 있는 오리가 앉아 있는데, 이는 마을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도 정월보름이면 줄다리기를 하고난 후 당산에 줄을 감는 옷을 입히고 당산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서문 안 당산의 ‘할아버지당산’ 받침돌에는 성혈과 같은 ‘알받이구멍’이 있는데 당산제를 지낼 때 쌀을 담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고 합니다. 쌀을 오리알로 동일시하여 풍요와 다산을 바라는 염원입니다. 안타깝게도 ‘할머니당산’은 반쯤 부러져서 윗부분을 볼 수 없습니다. 강원도 고성군 건봉사에서는 특이한 형태의 돌기둥을 만날 수 있습니다. 1928년에 건립된 돌솟대로 민간의 솟대문화가 사찰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주목할 수 있지요. 왜 솟대가 절로 들어왔을까요? 그 까닭을 이야기하기 전에 당간지주가 어떤 것인지를 언급해 봅시다. 장대를 높이 올려 꼭대기에다 새 대신 당(幢)이나 번(幡)을 달 수 있는 장치를 두고 장대가 쓰러지지 않도록 고정시킨 것이 당간지주입니다. 이 당간지주는 다른 나라를 통해 들어왔지만 지금은 우리나라만큼 당간지주 문화가 발달한 곳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한국판 불교의 특징 중 하나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지요. 사찰이란 이름도 찰간지주 즉, 당간지주에서 유래한 명칭입니다. 당간지주는 주로 절의 경계에 위치하여 특정 종파나 사찰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이곳이 성소(聖所)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신성한 공간이었던 소도에서 비롯된 솟대 또한 우리 마을이 액을 피하는 성소임을 의미하지요. 그렇다면 우리 솟대신앙이 불교와 결합하여 당간지주로 발전하였음을 추리할 수 있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전국의 당간지주를 찾아가고자 합니다. 요즘 TV에서 마빡이 개그가 유행합니다. 이 마빡이 개그가 옛날 민요에서 유래하였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옛날 아버지들이 시집간 딸을 처음 찾아갈 때는 다듬잇돌을 메고 갔답니다. 딸은 아버지가 선물한 다듬잇돌에 다듬이질을 해가며 다음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씨에미 마빡 뚝딱, 씨누이 마빡 뚝딱, 씨할미 마빡 뚝딱, 씨고모 마빡 뚝딱…” 역사는 돌고 도는 것입니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떠나는 시대이지만 그 이전에 도 소박한 마음으로 나무를 통해, 솟대를 통해 우주와 교통하려했던 민초들의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방학 마무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 울산 옥현초 교사
근자에 들어 공무원 장외투쟁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을 꼽는다면 1998년 11월 서울 여의도 한강둔치에서 열린 ‘교원정년단축 반대 전국교육자 총궐기대회’가 아닌가 싶다. 7만여 명도 더 되는 교원들이 차가운 땅바닥에 앉아 초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쿠데타적 정년단축 철회’를 외쳤다. 교원들의 처연하기까지 한 공분(公憤)이 표출됐지만 언론은 짐짓 이를 외면했다. 조선일보에 사진 한 장 달랑 실린 것이 전부인 것으로 기억된다. 신문․방송은 연일 ‘노령교사 1명을 퇴출하면 젊은 교사 2.5명을 채용할 수 있다’는 앵무새 같은 보도를 내보냈다. IMF사태로 경제는 파탄 나고 실업자가 넘쳐나는 때에 이보다 더 확실한 여론몰이는 없었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심리를 부추긴 행태는 교육계의 어떠한 논리와 주장도 먹혀들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 당시 이해찬 장관과 교육부 고위관료들의 언론플레이가 무용담처럼 넘쳐나기도 했다. 교육계는 대패(大敗)했고 정년은 3년이나 싹둑 잘려나갔다. 물론 교단을 뒤로한 교원들 대신 젊은 교사가 2.5배로 충원되지도 않았다. 정년단축의 결과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우리 교단을 황폐화시켰으며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을 앓고 있다. 새삼 아픈 기억을 더듬는 것은 ‘공무원 연금 개혁’을 둘러싼 작금의 논쟁이 교원 정년단축 때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공적(公敵)의 범위가 공무원 모두로 확대됐다는 것이다. 이른바 개혁 논리부터 보자. 한 신문에 실린 찬성론자의 주장이다. “국민연금에 비해 ‘덜 내고 더 많이 받아오던’ 공무원연금을 국민연금과의 형평을 고려하여 수급액을 낮추겠다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공무원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운 이 시기에 정년이 보장된 안정된 직업이라는 하나만으로도 선망의 대상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청춘을 바쳐 공무원 시험에 매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공무원들의 집단이기주의는 안 된다.” 다음은 개혁에 저항(?)하는 한 공무원의 반론. “국민연금 대상자는 월 소득액의 4.5%를 납부하지만 공무원은 8.5%를 내고 있다. 그래도 연금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어 공무원들은 전혀 고통분담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먼저 연금 부실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정부가 공무원의 동의 없이 쓴 7조 원의 기금을 메우고 또한 그간의 공로보상을 어떻게 할지 납득할 만한 대책을 세운 후 대화에 응해야 한다.” 논지의 요약에 한계가 있을 수 있으나 핵심은 이런 것이다. 국민들 입장에서야 손해 볼 것 하나 없는데 반갑지 않을 리 없다. 게다가 공무원연금의 엄청난 적자를 국민세금으로 보전해 줘야 한다는 말까지 더해지면 공무원의 논리는 맥을 출 수 없게 된다. 이 정부의 주특기인 ‘편 가르기’가 마침내 공무원과 국민을 나누고 있다. 교원과 국민이 나눠졌던 시기를 생각하면 섬뜩한 기분마저 든다.
500년 전에 도입된 ‘윈-윈’ 전략 오늘날 기업경영에서 금과옥조처럼 강조되는 ‘윈-윈(win-win)’ 전략은 이미 500년 전에 우리 선조들의 자녀교육에서 강조되었다. 수백 년 전 선조들은 삶의 주도적인 원리로 ‘상호 이익을 도모하라’는 인간관계 기술의 핵심원리를 가르쳐왔던 것이다. 이는 조선 최초의 ‘여중군자(女中君子)’를 며느리로 두었던 운악 이함 가문의 ‘지고 밑져라’라는 가풍에서 대표적으로 엿볼 수 있다. 이는 ‘대접 받고 싶거든 먼저 대접을 하라(마태복음 7장 12절)’는 성경구절을 연상케 한다. 이 구절은 세계 최대 부자들을 배출한 유대인들의 자녀교육에서 고전으로 통하는 바로 그 율법이다. 삼보컴퓨터를 창업한 이용태 박사(박약회 회장, 퇴계학연구소 이사장)는 이 가문의 17대 종손이다. 이 박사의 할아버지는 당시 어린 손자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과 사귀거나 일을 할 때는 네가 지고 밑져야 한다”고 반복해서 가르쳤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 “남을 밟아야 내가 산다”고 생각하는데 이 박사의 할아버지는 그와 정반대로 가르쳤던 것이다. 이 박사는 ‘지고 밑져라’ 가풍을 기업 경영에 적용해 위기를 극복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알려진 대로 이 박사는 한때 학원재벌로 통하기도 했다. 1970년에 동업자와 함께 학원을 개업했는데 몇 차례 위기를 겪다 급기야 문을 닫아야 하는 기로에 놓였다. 그는 궁리 끝에 동업자에게 “학원을 계속 운영하려면 추가 증자를 하거나 빚을 얻어야 한다. 이 빚은 모두 내가 책임지겠다”는 단안을 내렸다. 이 같은 결정에는 “남과 더불어 일할 때는 희생하고 손해도 볼 줄 알아야 결국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할아버지의 교훈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자 동업자는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그가 하는 일에 협력을 아끼지 않는 분위기가 싹텄다. 결국 학원은 크게 성공해 장안의 명문으로 떠올랐다. 이 박사는 80년대에 삼보컴퓨터를 우리나라 IT업계의 선두주자로 일구었지만 자금난을 겪다 경영에서 손을 떼야만했다. 이 역시 역설적으로 ‘지고 밑져라’ 가풍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3대에 걸쳐 영남 대표하는 학자 배출 재령 이씨 운악 이함(영해파, 1554~1632) 가문은 석계 이시명(1590~1674)이라는 학자를 배출하면서 명문가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운악 종가는 의령현감을 지낸 이함에 이어 석계 이시명갈암 이현일밀암 이재 등 3대에 걸쳐 퇴계학맥을 잇는 대학자를 배출해 영남의 명문가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이들은 영남에서 높은 벼슬보다 더 존경받는 대유학자로 우뚝 섰다. 운악 이함은 56살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특이한 이력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운악의 며느리인 정부인 장씨를 주인공으로 그린 이문열의 소설 〈선택〉에는 운악 이함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운악은 임진왜란으로 왜구가 침공하자 집의 창고를 풀어 굶주린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군수 물자를 조달하는데 앞장섰다고 한다.“공이 창고를 풀어 기민(飢民)을 먹인다는 소문이 나자 부황난 사람들이 문간이 비좁도록 몰려들었다. 또 물자를 명군에 조달했다. 그 공으로 벼슬길에 들어서게 되자 나라가 어려울 때 세운 작은 공로에 의지해 벼슬살이하는 걸 구차하게 여기신 공은 마흔일곱의 연세도 늦다 아니하시고 과거에 응하셨다. 그만큼 당신의 학문에 대한 믿음도 있으셨을 것이다…(중략)… 복시(覆試)를 당당히 지나신 공은 선조 임금께서 친히 임하시는 전시(殿試)에 이르러서도 막힘이 없었다. 정대(庭對, 대과의 최종 시험인 전시에서 답하는 책문)의 말을 올리는데 그 뜻이 매우 간절하고 곧아서 감탄한 시관(試官)이 장원으로 뽑고 임금께 올렸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책문을 보신 선조가 공이 장자의 말을 인용했다 하여 과방(科榜)에서 이름을 빼게 하고 파직까지 명하셨다. 그 뒤 여러 해 공은 벼슬 없이 지냈으나 선조 36년에 다시 대신의 추천이 있어 의령현감으로 나가셨다. 그러다가 선조가 돌아가시자 공은 다시 한 번 과장(科場)을 찾으셨다. 광해군 원년 공은 쉰여섯의 연치(年齒)로 문과에 급제(합격)하시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공은 벼슬살이가 싫어지셨고 광해조의 난정이 조짐을 드러내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89~95쪽) 운악은 선조 때 장자의 말을 인용해 과거시험에 불합격된 토정 이지함처럼 그 역시 불합격 당한 것이다. 선조는 장자를 무척 싫어한 것 같다. 당시 선조는 “유교경전에도 인용할 말이 많은데 어찌 장자의 밝지 못한 내용을 인용하느냐”며 토정을 불합격시킨 적이 있었는데 운악 역시 토정과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운악은 이에 굴하지 않고 무려 56살에 과거시험에 다시 도전해 합격했다. 이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자녀교육에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운악은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해 과거시험에 다시 도전한 것이 아니라 선조에 의해 억울하게 낙방했기에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방편이자 자녀들에게 귀감을 보이기 위해 다시 과거에 나섰을 것이다. 조선 최초로 ‘여중군자’ 칭호 받아 석계는 운악의 셋째 아들로 퇴계의 정통 학맥을 이은 인물인데, 병자호란 때 나라가 치욕을 당하자 경북 영양 석보에 은거하며 살았다. 이 가문은 석계에 이어 그의 아들 갈암 이현일, 갈암의 아들 밀암 이재 등 3대에 걸쳐 퇴계학맥을 잇는 학자를 배출하면서 영남의 명가로 우뚝 서게 된다. 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석계의 부인인 정부인 장씨(1598~1680, 아들인 갈암 이현일이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지내 정부인의 품계를 받음)가 회자되고 있다. 계모로 들어와 전처소생의 1남2녀 등 모두 7남3녀를 키운 장씨는 효행, 학문, 예술 등을 고루 갖춰 신사임당에 버금가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은이 쓴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이란 책 서문에도 정부인 장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 역사상에서 가장 모범적이요 대표적인 부인 한 분을 말하라 하면, 두말없이 율곡선생의 어머님 사임당 신씨 부인을 내세울 것이요, 혹시 어진 어머니를 말하라 하면, 저 신라 때 김유신의 어머니 만월(萬月), 또 어버이에게 효도한 여성을 헤아린다면 신라 때 지은(知恩), 그리고 다시 학문이 높고 시문에 능한 부인을 찾는다면 고구려의 여옥(麗玉), 글씨를 잘 쓰시었던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의 따님 장씨 같은 이들을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장씨는 퇴계 학맥을 이은 경당의 외동딸로 아버지에게 〈소학〉 등을 배워 시문과 경사에 능했다. 그렇지만 여성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던 장씨는 집안에서 그 역할을 찾았다. 특히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고 있던 석계에게 후진양성에 힘쓸 것을 적극 권유했다고 한다. 자칫 산촌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석계는 부인의 내조에 힘입어 학자로서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자녀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장씨는 아버지와 남편, 아들과 손자 등 4대에 걸쳐 정통 퇴계학맥을 잇게 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소설가 이문열은 바로 석계의 넷째 아들인 항재 이숭일의 12대손이다. 그는 에서 이문열 자신을 있게 한 장씨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그리고 있다. 자신의 재주 숨긴 채 명문가 이뤄 장씨는 조선조 500년을 통틀어 유일하게 ‘여중군자’ 소리를 들었던 여성이다. 당시 사대부들이 이름도 불려주지 않았던 여성에게 그들의 이상형인 군자 칭호를 부여한 것은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가문경영에 일가를 이룬 장씨를 현대 기업경영에서 보자면 최고의 인재를 키워낸 뛰어난 ‘인재전략 컨설턴트’로 금녀의 벽을 뛰어넘은 최초의 여성 CEO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인 장씨는 문화관광부에서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하고 자녀 교육에 귀감을 보였다며 ‘이달의 문화인물(1999년 11월)’로 선정하기도 했다. 장씨의 아버지 경당은 퇴계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의 학맥을 잇는 유학자로 장씨를 직접 가르쳤다. 무남독녀로 부친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장씨는 남자로 태어났다면 입신양명에 나설 자질을 지녔다고 한다. 경당이 자신의 집에서 가르친 제자 중의 하나가 석계 이시명이었는데, 경당은 그를 훗날 사위로 삼은 것이다. 이시명은 당시 27세로 남매를 둔 홀아비였는데, 경당은 이 제자에게 19살 외동딸을 재취부인(再娶夫人)으로 시집보냈던 것이다. 석계의 자녀들 중 존재 이휘일과 갈암 이현일은 외조부인 경당에게서 배워 퇴계 학맥을 이었다. 장씨는 병자호란으로 수치를 당하고 벼슬에서 물러난 남편에게 “공께서 세상을 버리고 숨으셨으니 마땅히 시와 예로써 자손들을 가르치셔야 하는데 어찌 세월을 그냥 보내십니까? 아이들에게 학문을 강론하고 예의를 익히게 하여 앞날을 밝히시고 뒤를 열어주는 일을 어찌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남편은 그 말을 듣고 후학들을 힘써 지도했다. 남편과 자식을 통해 여성인 자신이 이루지 못한 길, 즉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을 기르는 일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장씨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칭찬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고 시를 지어 손자를 칭찬하기도 했다. 장씨는 자신의 재주를 숨긴 채, 한 가정의 평범한 가정주부면서도 자녀들을 대학자로 키웠다. 그렇지만 자녀들에게는 늘 “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있지만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선행을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기뻐하여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퇴계의 학문을 잇는 부친의 가르침을 받은 장씨 역시 과거시험 공부보다 〈소학〉의 본질을 하나라도 몸소 실천하기를 더 바랐던 것이다. 퇴계의 가르침대로 장씨 역시 근본이 없으면 학문이나 재력, 명성 모두 모래성에 불과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자녀들에게도 공부보다 먼저 행동거지를 중요하게 여기도록 했다. 재물이 아닌 의리 중시하는 교육 장씨도 요즘 어머니들처럼 같은 고민을 했다. 요즘 대부분 어머니들은 행여 아이의 기를 꺾을까봐 아이의 행실이 잘못되어도 꾸짖지 않는다. 그렇지만 장씨는 먼저 아이에게 존귀한 것이 있음을 먼저 가르치고, 이어 아이의 기상을 길러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이의 기를 꺾을까봐 과잉보호에 나서면 결국 버릇없는 아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아이의 기상을 기른다는 것은 그 꿈을 다듬고 북돋아주는 일이다. 그런데 요즘의 젊은 어머니들을 보면 그 둘을 모두 혼동하고 있는 듯하다. 존귀한 것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이의 기를 죽이는 것으로 잘못 알아 겁나는 것이 없는 아이를 길러놓는다. 아이의 욕구를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이의 꿈을 키워주는 것으로 믿어 절제할 줄 모르고 참을성 없는 심성을 부추긴다. 그래서 겁나는 것 없고 욕구를 절제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 공공의 장소에서 안방처럼 휘젓고 다니며 소란을 떨고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데도 제 아이 기 살아 있는 것만 좋다고 웃는다. 기껏 나쁜 버릇만 길러놓고 기상을 길렀다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164~165쪽) 장씨는 또 아이들에게 재물을 쫓다보면 인간관계를 해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는 오늘날 강조되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사람이 몸을 가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게 재물이나 물고기는 향기로운 미끼 때문에 죽고 선비의 아름다운 이름은 재물로 상한다. 재물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떠나서는 값이 없다. 남이 모두 넉넉할 때 내 재물이 많은 것은 자랑과 여유가 되지만 남이 모두 없는데 홀로 많이 가짐은 재앙일 뿐이다. 남이 모두 굶는데 홀로 가득한 곳간은 마침내 화를 부르는 문이 될 뿐이니 너희는 그 이치를 알아 재물을 대하도록 하라. 의리는 무거운 것이고 재물은 가벼운 것이니, 재물은 지금 없다 하더라도 뒷날에 다시 생겨날 수 있으나 의리는 한번 깨어지면 되살리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찌 무거운 것을 버리고 가벼운 것을 취하는가.”(168~169쪽) 운악의 셋째 아들인 석계는 부인 장씨의 자녀교육에 힘입어 다시 일가를 이루어 분가를 하게 된다. 현재 운악 가문은 이용태 삼보창업자가 종손이고, 분가한 석계 가문은 이돈(李燉)씨가 13대 종손으로 일가를 이루어오고 있다. 석계가의 종가도 석계가 태어난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가 아니라 그가 은거했던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에 있다. 이곳에는 그의 후손인 이문열이 세운 광산문학관이 있다. 수많은 명문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가문의 토대를 쌓는 이른바 ‘가문주식회사의 CEO’의 존재 여부이다. 가부장적 신분사회에서 대부분 명문가의 경우 그 역할을 남성이 맡았다. 하지만 남성중심의 사회 속에서도 수많은 여성들이 주역 못지않은 조연역할을 했다. 정부인 장씨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창밖에 소소히 내리는 빗소리 / 소소한 그 소리 자연의 소리(窓外雨蕭蕭 / 蕭蕭自然)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으니 / 내 마음도 자연 그대로 일세(我聞自然聲 / 我心易自然) 이 시로 인해 정부인 장씨는 후대인에게 ‘부인 중에서 현명한 유학자(閨閤中賢儒)’라는 평가를 받았다. 즉, 여중군자라는 것이다. 또 장씨는 우리나라 최초로 요리책을 쓴 여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1673년에 요리책 〈음식지미방(飮食知味方)〉을 썼다. 이미 10살 때 ‘소소음(蕭蕭吟)’이란 시를 쓴 정부인 장씨는 요즘으로 보면 요리에 정통한 전업주부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시인이자 자녀교육의 CEO였던 것이다.
김경원 | 저자 [문제] 괄호 안에서 자연스러운 표현을 고르시오. 1. 허구헌 날 밥그릇 (다툼만/싸움만) 허고 앉아 있는 놈들 좀 보게. 2. 갑돌이와 갑순이는 늘 1, 2등을 (다투는/싸우는) 라이벌이다. 3. 개 두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다투는/싸우는) 장면이 볼만했다. 4. 그 친구는 말로 (다퉈서는/싸워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상대다. 5. 고래 (다툼/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풀이] ‘다투다’는 어디까지나 말로 시비하는 것 매일같이, 아니 시시각각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과도 부딪히며 다투거나 싸우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다. 그런데 ‘권력싸움’이 아니라 ‘권력다툼’인 것은 왜일까? 그리고 ‘파벌다툼’이 아니라 ‘파벌싸움’인 까닭은? 또 ‘부부다툼’이 아니라 ‘부부싸움’인 것은 어째서일까? 실로 ‘다툼’과 ‘싸움’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먼저 ‘다투다’는 의견이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서로 따지며 옥신각신한다는 뜻이다. “다투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아이들 교육 문제로 아내와 다투다”, “돈 문제로 집안 사람들끼리 심하게 다투었다” 등에서 ‘다투다’는 어떤 사안과 관련해 상대를 누르고 자기를 내세우고자 하는 행동인데, 다행스럽게도 이때 이기고자 하는 의지는 ‘말’로만 나타난다. 즉, ‘다투다’는 상대의 감정을 언짢게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말로 시비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 말을 할 줄 모르는 동물들은 ‘싸우기는’ 해도 ‘다투지는’ 못한다고 봐야겠다. 한편 ‘싸우다’는 사람이나 동물이 힘이나 무기를 써서 상대를 공격하여 이기고자 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이때 ‘무기’에는 ‘말’이라는 수단도 들어간다. 따라서 ‘친구와 싸운다’나 ‘칼로 싸운다’ 같은 용례와 더불어 ‘말로 싸운다’는 표현도 성립한다. ‘다투다’ 안에는 이미 말로 치고받는다는 전제가 들어 있으므로 ‘말로 다툰다’는 표현은 어색할 수밖에 없으나 복합어로서 ‘말다툼’이나 ‘말싸움’은 모두 훌륭하게 성립한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이유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은 힘이 센 놈들끼리 싸우는데 뜻하지 않게 사이에 끼여 애꿎은 피해를 입는 경우를 뜻한다. 필자는 어릴 때 이 속담을 들은 뒤로 “새우 싸움에 고래 등 터진다”와 곧잘 헷갈렸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고래 싸움’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제대로 그리지 못했던 듯싶다. 고래 두 마리가 거대한 몸집을 서로 부딪쳐 싸우면서 바닷속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상상했더라면 그런 혼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래들이 벌이는 수중 소동이야말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제3자인 새우를 피해자로 만드는 원인일 테니 말이다. 여기서 조금 장난기를 발동해서 ‘고래 다툼’을 떠올려보자. 두 마리 고래 사이에서 끼이끼이 하며 고성(?)이 왔다갔다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흥분한 다혈질 고래라면 삿대질도 하고 몸부림도 칠 터이니 바닷속이 꽤나 시끄럽고 물살이 일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말만 왔다갔다하는 시비인 바에야 새우 등이 터지는 비극까지는 벌어지지 않을 듯하다. 물론 ‘다툼’이 ‘싸움’으로 번지면 새우의 안존이 위태로워질 터이니 눈치빠른 새우라면 몸을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것쯤은 진작에 알고 있으리라. 이렇게 ‘고래 싸움’이냐 ‘고래 다툼’이냐에 따라 새우의 등은 무사할 수도 있고 터질 수도 있으니, 여기에 ‘다툼’과 ‘싸움’의 큰 차이가 있다. ‘다툼’보다 ‘싸움’의 규모가 크다 이렇게 새우 등이 터지느냐 마느냐 하는 절실한 문제에서 충분히 알아챌 수 있듯이, 어쨌거나 말로 싸우는 편이 물리적인 완력으로 싸우는 것보다는 덜 격렬하다. 물론 한마디로 상대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독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물리력 자체만 따져보건대, 아무리 심한 말이라도 상대를 땅바닥에 쓰러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투다’와 ‘싸우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수단의 차이는 겨루는 주체들이 누구냐 하는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투다’는 개인들 사이에서 일대일로 벌어지는 대립이나 갈등을 나타내는 데 비해 ‘싸우다’는 나라와 나라, 아군과 적군, 관군과 의병처럼 집단과 집단 사이에 벌어지는 큰 규모의 대결을 가리키기도 하는 것이다. 즉 “이라크와 미국이 싸운다”, “죽창을 들고 적과 싸웠다” 할 때 ‘싸움’은 ‘전쟁’이나 ‘전투’와 동의어가 된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갈등이 표현되는 격렬함의 정도에서도 두 낱말 사이에 차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죽자사자 ‘다툰다’고 한들 ‘싸움’이 발산하는 격렬함에 비하면 약과일 따름이다. ‘싸움’의 대상이 더 고차원적이다 ‘다투다’가 주로 개인들 사이에서 사적이고 일시적인 사안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의견 대립을 의미하는 데 비해 ‘싸우다’는 윤리적인 견해나 정치적 입장을 둘러싸고 공적으로 혹은 장기적으로 대립하는 경우를 포함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다투다’는 감정적인 측면이 강하고 때로는 좀스러운 갈등이라는 느낌을 주는 반면, ‘싸우다’는 갈등의 면모가 거창하고 대단하게 느껴지는데다 때로는 정신적 분투나 내면적 투쟁처럼 추상적인 차원까지 아우르는 어감이 있다. 그래서 ‘싸우다’에는 가난, 굶주림, 고통, 죽음, 병마, 추위, 유혹, 자신 같은 추상적인 대상에 맞서 그것을 이겨내려고 노력하거나 시련을 참아낸다는 뜻이 들어 있다. “조국의 발전을 위해 싸우는 노동자들”, “시베리아에서 겨울을 맞이한 군대는 살인적인 추위와 싸워야 했다”, “자유는 피 흘려 싸워야 얻을 수 있다” 등이 모두 이런 경우다. ‘다투다’와 ‘싸우다’는 공격성에서도 차이가 난다. ‘다투다’가 상대를 제압해서 쓰러뜨리려고 하기보다는 자기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 초점을 두는 데 비해 ‘싸우다’는 기필코 자신이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싸우는’ 목적을 달성하려면 반드시 자기 발아래 상대의 무릎을 꿇려야 하니,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식의 오기와 승부욕이 따라붙을 수 밖에 없다. 목표가 초점이면 ‘다툼,’ 상대가 초점이면 ‘싸움’ 앞에서 왜 ‘권력싸움’이 아니라 ‘권력다툼’이며 왜 ‘파벌다툼’이 아니라 ‘파벌싸움’이냐는 질문을 던졌었다. ‘다투다’는 남보다 앞서거나 상대를 이기기 위해 서로 겨루되, 어디까지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함이라는 긍정적인 뜻이 강하다. 즉 ‘권력을 다투다’, ‘왕권을 다투다’, ‘수석을 다투다’, ‘우승을 다투다’, ‘선두를 다투다’, ‘앞을 다투다’, ‘주도권을 다투다’ 등에서 ‘다투다’는 상대를 꺾어 누르기 위함이 아니라 권력, 왕권, 수석, 우승, 선두, 앞,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따라서 ‘다툼’이나 ‘싸움’이 따라붙는 복합어의 경우에 앞에 오는 말이 어떤 목표를 제시하는 것일 때에는 응당 ‘다툼’이 되어야 한다. 이런 뜻을 좀 넓힐 때 ‘시간을 다툰다’는 관용 표현을 얻을 수 있다. “한시를 다투는 긴급한 출동”, “1분 1초를 다투는 위급한 수술”에서처럼 짧은 시간이라도 되도록 아끼려고 애쓸 때 ‘다툰다’고 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목표가 초점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다. “고도의 정확성을 다투는 기술”, “1mm를 다투는 정밀성”같이 아주 미세한 차이로 성패가 갈릴 때 ‘다툰다’는 말을 쓰는 것도 똑같은 맥락에서다. 한편 ‘싸움’의 경우에는 대결의 상대가 표면으로 떠오른다. “최선을 다해 싸운 경기였다”, “강한 팀을 맞아 힘겹게 싸웠다”에서 ‘다투다’가 아니라 ‘싸우다’가 쓰인 까닭은 승리라는 목표 자체보다는 상대를 염두에 둔 전투적 대결의식과 승부욕에 초점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중요한 차이점이 또 하나 있다. ‘다투다’는 엇비슷한 힘을 소유한 이들끼리 대등한 관계에서 갈등하는 것인 데 비해 ‘싸우다’는 힘이나 실력에서 우위에 있는 상대와 대결하는 경우에 쓰인다는 것이다. ‘부부다툼’이 아니라 ‘부부싸움’인 까닭 그렇다면 목표가 앞에 제시되어 있는 ‘밥그릇싸움’의 경우에는 왜 ‘밥그릇다툼’이 아닌 걸까? 그 까닭은 ‘밥그릇’이 단순히 먹을 것이나 이익을 비유했다기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의 이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밥그릇싸움’이라는 말에는 정당하지 못한 목표를 놓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사람들에 대한 윤리적 비난의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다툼’ 앞에는 어디까지나 긍정적인 목표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밥그릇’과 달리 긍정적인 대상인데 어째서 ‘사랑다툼’이 아니라 ‘사랑싸움’인 걸까? 여기서는 ‘사랑’이 쟁취의 대상이 아니라 갈등의 주체라는 데 열쇠가 있다. 즉 ‘사랑싸움’은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 서로 부딪치며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을 나타낸다. 이렇게 대결의 주체가 앞에 붙었기 때문에 ‘사랑다툼’이 아니라 ‘사랑싸움’이 된 것이다. ‘소싸움’, ‘닭싸움’에서 ‘소’와 ‘닭’이 대결의 주체인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부부싸움’이다. ‘부부다툼’이면 좋았을 것을, 왜 하필 ‘부부싸움’이 된 것일까?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해답은 부부라는 갈등의 주체가 전면에 등장하고 또 ‘상대’가 초점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니 아무리 부부라도 일단 ‘싸움’을 벌인 이상 우열을 가리는 일은 피할 수 없다. ‘다투다’가 그저 남보다 더 잘하고자 하는 것이어서 상대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지는 않는 데 비해 전투성과 공격성을 전제로 하는 ‘싸우다’에서는 진 쪽이 쓰라린 피해를 입게 되어 있다. 따라서 ‘부부다툼’이 아니라 ‘부부싸움’이 된 까닭은 무릇 이런 갈등이 상대의 가슴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히기 마련이어서인지도 모른다. 실로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속담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요약] 다투다 ∙개인들 사이의 일대일 대립만을 가리킴 ∙말이 주요 수단 ∙대등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갈등, 경쟁, 비교적 일상적인 대립 싸우다 ∙개인 대 개인, 집단 대 집단 대결을 두루 가리킴 ∙말보다는 힘이나 무기가 주요한 수단 ∙제압을 목적으로 한 격렬한 대립 [답] 1. 싸움만 2. 다투는 3.싸우는 4.싸워서는 5.싸움
변수란 | 일본 동경한국학교 파견교사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수업이 끝난 후 학급 아이들을 잠시 남게 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담임선생님이 남으라고 하면 야단맞는 일을 제외하고는 다들 좋아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보충 학습을 위해서 혹은 교실 청소를 위해서 반 아이들을 남게 하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게 되었다. 잠시 남으라는 말에 되돌아오는 첫 마디가 “저, 학원가야 하는데요”다. 그래서 요즘은 청소도 수업이 끝나고 하기가 힘들다. 한 분단에 열 명이나 되건만 청소를 할 수 있는 아이는 고작 한두 명이다. 거짓말처럼 들릴지도 모르나 현 상황이 그렇다. 학교에서 실시하는 특기적성교육은 수업이 끝난 후 바로 시작이 되고, 개인적으로 학원에 가는 아이들도 학교에서 머뭇거릴 시간은 좀처럼 나질 않는다. 청소야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미리 해둘 수도 있다지만 보충 학습(보습)을 해야 하는 경우에도 학원에 가야 한다는 이유로 남기를 꺼려하는 것에는 씁쓸함마저 느끼게 된다. 입시 전쟁을 비롯한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 등 비정상적 교육열은 일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중·고교의 입학시험이 있는 일본의 경우 학원 수강에 있어서는 한국을 초월한다고 볼 수 있다. 제법 오래된 통계이기는 하나 93년에 실시된 구 문부성의 조사에 의하면 500만 명이나 되는 초·중학생이 학원에 다닌다고 나와 있다. 컴퓨터다, 영어다 해서 배울 것이 더욱더 많아진 지금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의 숫자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왜 이렇게 학원이 날이 갈수록 강성해져 가는 것일까? 일본의 교육행정학회장으로 있는 유우키 마코토씨는 그 이유로 세 가지를 꼽는다. 그 첫째는 진학과 학력 획득을 위한 경쟁, 둘째 학원을 통한 학교교육의 보상, 셋째는 최근 높아지고 있는 사립 중·고교 지향을 들고 있다. 사립 중·고교로의 진학률이 높은 지역일수록 학원에 다니는 비율이 현저히 높게 나와 있다. 일본의 한 일간지에서 얼마 전 ‘학원의 존립 여부’에 관한 여론 조사를 실시했는데, 응답자 6344명 가운데 약 80%가 학원은 ‘학력 향상을 위해서 있는 것이 좋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초·중학생 자녀를 학원에 보내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 ‘학원에 보내는 이유’에 대해 조사한 결과 ‘중·고교 수험을 위해서’라는 답변이 2135명 응답자 가운데 약 60%로 가장 많았고, ‘아이들이 가고 싶어 해서’, ‘학교 수업을 따라 가기 위해서’, ‘기타’가 비슷한 비율로 나타났다. 또한 ‘다니고 있는 학원의 종류’에서는 ‘진학 학원’, ‘보습 학원’, ‘기타’의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여 복수 회답을 가능하게 한 결과 응답자 1920명 가운데 ‘진학 학원’이 65%, ‘보습 학원’이 25.2%, ‘기타’가 16.1% 순으로 나타났다. 교재비 등을 포함한 학원비 지출액 조사에서는 3만 엔 이상이라고 답한 응답자 비율이 30%를 넘어서고 있다. 위 여론 조사의 결과처럼 평소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다니는 보습 학원보다 입시를 위해 다니는 진학 학원 수강률이 몇 배나 더 높은 것은 사립이나 이름 있는 중·고교로 입학 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초등학교 3, 4학년 정도부터 진학 학원에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자녀를 학원에 보내는 보호자의 의식에는 공립학교의 전반적 분위기에는 만족하고 있으나 수업의 질적, 양적인 면에서는 부족함이 많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보호자들의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학교의 기능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것이다. 학교는 원래 지·덕·체 3요소를 아우르는 전인교육을 실시하는 교육의 장으로서 최근에 와서는 정보교육까지 포함되어 교육과정 내용이 훨씬 많아졌다. 이에 반해 진학 학원 및 보습 학원은 상급 학교로의 진학 및 학력의 보강, 향상에만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학교와 학원의 존재 의의가 다르다. 의무교육1) 으로서의 공립 초·중학교 교육은 모든 아동·학생들에게 최저한도에서의 교육을 평등한 시각에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들 요즘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가정의 아이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적 여유가 있으니 수강료가 비싼 학원에 쉽게 보낼 수 있고 고액 과외도 주저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경제력과 학력은 비례한다는 사회 풍토가 조성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언젠가는 학교 무용론이 가시화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날 학급의 남자 아이 한 명이 결석을 하는 바람에 그날 실시한 국어 시험을 혼자만 보지 못했다. 그 다음 날 등교한 그 아이에게 오후에 남아 시험을 보고 하교하도록 지시했더니 수학 학원을 가야 해서 남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참을 그 아이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니 내일도 다른 학원이 있어서 안 되겠고, 모레쯤엔 남아서 하고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쩔 땐 ‘그래, 모르는 건 학원에 가서 배우거라’, ‘학원 숙제도 많은데 학교 숙제는 조금만 내 줘야겠지?’라고 교사로서 무책임한 말을 할 때도 솔직히 있다. 물론 화가 나서 한 말이긴 하지만 학원에 의존하는 것은 책임 방치에 지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 지난 호에서 일본 어느 지역의 중학교에서는 학원 강사를 불러 보습을 하게 하는 등의 활동으로 학력 향상을 도모하고 있는 내용을 소개한 바 있다. 이 또한 교육 행정이 학원에 접근하고 있는 한 단면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일반화가 되면 그다지 모양새는 좋지 않은 일이라 여겨진다. 어떻게든 공교육의 본질을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체능과 같이 현실적으로 학교에서 전문적 교육이 불가능한 경우를 제외한 교과 공부는 학교에서 마치는 것이 이상적이다. 의무교육 기간 동안 만큼은 학교에서 보충 학습 등을 통해 학습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수업을 끝내고 또 보충 학습을 한다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아이들이 하교한 후에 본격적으로 학급 업무를 보거나 교재 연구 등을 해야 하는 교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힘든 일이다. 그러나 몸은 좀 고될지언정 아이들이 학교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의식 없이 학원을 오가는 일은 없앨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학교 수업을 좀 태만히 해도 ‘학원에 가니깐 괜찮다’라는 인식이 심어지면 그 아이는 계속적으로 학교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런 아이들은 학원에 가도 여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학력 향상 또한 기대하기 힘들다. 결국 학교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또 다른 학원을 찾게 되고 이중 삼중의 학원 수강은 불가피해진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빼앗기게 되고 보호자들은 보호자대로 교육비 지출에 부담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교육에 관한 근본적 의식의 전환이 없는 한 학원은 계속적으로 늘어갈 것이고 학교보다 학원을 더 신뢰하는 보호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학원은 이제 더 이상 학교의 보조 기능을 하는 장소가 아닌 메인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시대의 흐름이고 고착된 사회 풍토로만 치부해서 간과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지금이야말로 공교육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한계점으로 지적되어 온 부분을 다채로운 시각에서 해결해 나가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근대로 가는 역사 구분의 전환점 우선 개념정리부터 필요하다. ‘소생’ 또는 ‘재생’을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르네상스(Renaissance)’는 역사상 어느 특정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구분을 뜻하는 말이다. 즉, 중세를 졸업하고 근대로 가는 역사 구분의 전환점에서 바로 르네상스가 동행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 특히 북부지역에서 시작된 배경은 옛 로마제국 시대로부터의 유산을 직접적으로 물려받고 일찍부터 다른 유럽 국가보다도 도시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십자군 운동기간에 이탈리아 상인들은 동방의 여러 나라와 접촉하여 고도로 발달되고, 아라비아의 과학이 접목된 그리스 자연과학 및 철학사상과 접할 수 있었으며 이때 그리스-로마신화가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적극적 후원자였던 교황들과 제후들은 미술과 문학 분야에 있어서 인문주의자의 활동을 마치 자기 일처럼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였는데, 특히 교황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 피렌체의 메디치가(家), 밀라노의 비스콘티가(家)가 대표적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쟁쟁한 인문주의자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휴머니스트 중의 휴머니스트, 휴머니스트의 왕’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는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순수성과 소박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벌여 교회의 타성화된 의식(儀式)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뜬 참다운 생활로 돌아가자고 호소하면서 당시 교회에서 사용되어 오던 ‘불가타역(譯)’이라는 라틴어 신약성서를 불신하고 그리스어로 된 원전을 다시 번역하여 수년간의 고생 끝에 초기의 필사본에서 신약성서를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1516년에 출판하였다. 비록 우리나라보다는 200년이나 늦었지만, 이미 1447년에는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하였고 1454년에는 구텐베르크 성서출판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최초의 원어 신약성서 출판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노력은 가톨릭교회의 타성적 형식주의를 비판하는 데에 이르렀는데, 대표적 저서인 〈치우신예찬(痴愚神禮讚, Encominum moriae)〉에 그의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았다.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이 책은 교회 성직자의 부조리와 부도덕성을 공격함으로써 루터의 종교개혁(1517)에 민중이 호응할 수 있는 기틀을 다져 놓았던 것이다. 새로운 항로 개척에 나선 두 나라 중세 말까지 유럽인의 세계관은 극히 제한적이었으나 십자군 원정 기간을 통해서 접한 동방 문명으로 세계관이 넓어짐에 따라 아라비아 저편의 동쪽 지역과 대서양 건너편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대항해 시대 이전에도 탐험의 시도는 있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5세기 전에 당시 노르웨이인 에릭이 아이슬란드에서 추방되어 그린란드를 발견하였고, 다시 11세기 초 에릭의 자손인 라이프가 아메리카 쪽으로 내려와 라브라도르에 도착하였으며 더 남하하여 뉴잉글랜드에 닿았다. 그 밖에도 노르웨이인들은 북극지방으로 항해한 적도 있었으나 하나의 전설로 유럽사에서 잊혀진 일이 되고 말았다. 7세기에 모하메트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후,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투르크에게 점령을 당한 후에는 더욱 유럽 세계가 좁아졌고 실크로드를 통한 유럽과 동양 사이의 통로가 사실상 폐쇄되었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유럽에서 제해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세계 탐험에 나서면서 탈 유럽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불가능해진 육로 무역을 포기하고 동양 항로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기나 긴 세월동안 이슬람과의 국토회복 전쟁을 통해서 천문과 지리에 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으며, 게다가 몽골제국 시대에 유럽으로 전해진 나침반으로 장거리 항해를 위한 성숙된 여건을 갖출 수 있었다. 포르투갈이 먼저 선수를 쳐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4년 전에 이미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인 희망봉에 도착하였고 10년 후에는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하였다. 당시 인도의 후추를 비롯한 향료는 유럽에서는 같은 비중의 금과 교환된다고 할 정도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어 유럽인들은 항로개척에 정열을 쏟아 부었다. 바다의 동쪽 길을 이미 포르투갈에 의해서 선점 당한 스페인은 바다의 서쪽 길을 통해서도 향료의 나라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 콜럼버스에게 후원을 약속하였고, 그에 대한 보증으로 ‘산티페 협약(1492년)’을 맺었다. 식민지 건설로 이어지는 대항해 드디어 콜럼버스는 구름이 짙게 깔린 스페인의 사르테스 강을 핀타 호, 니냐 호, 산타 마리아 호를 이끌고 조용히 빠져 나와 대양을 항해 하였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망망대해에서 선원들은 지치기 시작하였고, 콜럼버스 자신도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인도로 가는 길이 너무 험하고 멀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그 순간, “육지다, 육지!” 핀타 호의 마스트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었던 갑판원이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1492년 10월 12일 새벽 2시 무렵이었으며 콜럼버스는 자신의 계산이 들어맞았다며 인도라 믿는 바람에 그 뒤로부터 졸지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인도 사람(인디오, 인디언)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콜럼버스가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고 네 차례의 항해 끝에 1518년 산또 도밍고(Santo Domingo)에 본격적인 식민지 경영을 위한 총독부를 설치함으로써 라틴 아메리카에는 유럽인들에 의한 침략과 정복, 약탈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항해술이라고 하면 결코 스페인에 뒤질 포르투갈이 아니었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는 1497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로부터 인도 항로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고 리스본을 출발하여 이듬해에 아프리카 동해안의 메린다에 도착하였다. 그 후 10년 동안 항로를 찾아 인도에 도달하여 동양 항로를 개척하였고(1498), 까브랄은 브라질을 발견하여 그곳에 포르투갈 식민지를 건설하였다(1500). 특히 원래 포르투갈 사람인 마젤란(?~1521)은 1518년 스페인 국왕(카를로스 1세)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카알 5세)의 특허장을 받고 1519년 5척의 함대와 승무원 280명을 이끌고 세비야(Sevilla)를 출항하여 세계일주여행(1519~1522)을 떠났다. 1520년 남아메리카의 남단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자, 그 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큰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는‘태평양’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는 계속 항해하여 1521년에는 괌도를 지나 필리핀 제도를 발견하였지만, 막탄섬에서 원주민들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으며 드디어 1522년 만신창이가 된 한 척의 배가 귀항하였는데, 그 배는 다름 아닌 마젤란의 탐험대 가운데 한 척이었다. 살아 돌아온 인원을 세어보니 거지꼴을 한 18명이 타고 있었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개척한 이후, 포르투갈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인도로 항해하였고, 그 때 고아, 실론, 수마트라, 자바 등을 점령하여 무역 전진기지로 삼았으며 1542년에는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에까지 이르렀다. 1557년에는 마카오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극동 무역의 중심지로 삼았다. 사회 변화로 이어지는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댕긴 루터의 주장이 많은 유럽인들의 호응을 얻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루터의 개혁(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이 단순히 종교적인 면에서만 출발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루터의 개혁운동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고 각 지역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인 요인이 추가되어 하나의 역사적 대사건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일차적인 원인은 가톨릭의 쇠퇴와 형식주의적 타성에 있었으며 또 한 가지 중세 말기의 경제 및 사회적 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도시의 발달과 상업 르네상스가 ‘황금만능주의’를 유발시킴으로써 면죄부 판매의 길을 쉽게 열어주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루터는 세 가지 유일사상, 즉 ‘오직 성서(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총(Sola Gratia)’이라는 오캄의 유명론 신학을 발전시켜 ‘만인 사제론(萬人 司祭論)’을 주창하였다. 그는 1517년 면죄부 판매에 반발하여 95개 논제를 제기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겼는데,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 바젤의 출판업자들이 이 내용을 출판함으로써 1518년에 들어서면서 이 논제가 세인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이는 활자매체를 통한 언론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 최초의 사건이었으며 결국 루터는 1521년 1월 3일에 공포된 교황의 교서에 의해 정식으로 파문을 당했다. 그러나 루터의 명성은 독일 전국에 퍼졌고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그를 지지하여 루터는 1522년에 비텐베르크로 돌아가 루터교(Lutheranism)를 창립하였다.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의 주도로 개혁운동이 진행되었는데 그는 루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에라스무스의 종교적 관념을 일상생활의 철학적 지침으로 받아 들였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루터보다 더 과격하였으며 자유로운 성서 해석을 하였다. 츠빙글리의 프로테스탄트는 유아세례 문제로 1524년 재세례파가 등장함으로써 분열되었는데,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작된 츠빙글리의 개혁운동은 다른 주(canton)로 옮겨가고 차츰 스위스 밖의 지역, 예를 들어 슈트라스부르크 및 라인강 상류의 다른 독일 도시로 전파되었으나 1531년 츠빙글리가 전사하자 그의 개혁교회는 지도자를 잃고 침체하였다. 1532년 스위스의 가톨릭 주(canton)와의 싸움에서 츠빙글리가 전사한 후 개혁운동이 주춤했으나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의 출현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대륙에서는 루터파의 직접적인 영향이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이외 지역에는 미치지 못하였고, 스위스·프랑스·네덜란드·스코틀랜드 지역은 칼뱅의 개혁교회 세력에 지배되고 있었다. 특히 스위스를 중심으로 칼뱅의 개혁교회가 쉽게 뿌리를 내린 것은 이미 앞에서 말한대로 츠빙글리에 의해 기초가 다져진 덕분이었다. 사실 칼뱅의 개혁사상은 루터보다는 츠빙글리에 가까웠으며, 16세기 전반기 스위스 13개주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각기 독립적인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의 심장부에 위치한 스위스는 상업과 교역으로 크게 번창하였고 스위스의 북부 도시, 예를 들어 취리히, 바젤, 베른 등은 일찍부터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을 받아들였으며 특히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칼뱅은 장로직제를 골자로 하는 개혁을 단행하였고 상공계급이 많은 북 네덜란드에서는 고이센파, 프랑스에서는 위그노파, 스코틀랜드에서는 퓨리턴파라 불렀으며 그의 개혁운동이 성공한 요인은 ‘경제활동의 합리화’로 이는 궁극적으로 근대적 자본주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Q1. 1급 정교사 자격 취득 후 대학원에서 취득한 석사학위 이수성적을 1정 자격연수 성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A1. 「교육공무원인사관리규정」 제12조 제1항 제1호에 의거 교(원)감과정연수 응시대상자 순위명부작성 시 평정하는 자격연수는 ‘1급 정교사·전문상담교사 또는 1급 정교사 자격증 취득 후의 사서교사’로 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1급 정교사 자격 취득 후에 석사학위를 취득한 경우 대학원 이수성적을 1급 정교사 자격연수 성적으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1급 정교사 자격연수 성적은 전문상담교사(1급) 또는 1급 정교사 자격증 취득 후의 사서교사 자격연수 점수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Q2. 교육경력 7년인 중등교사입니다. 교육경력 4년차 되는 해에 00교대 교육대학원에 입학하여 올 8월에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 1정연수를 받지 않아 석사학위로 대체하려고 합니다. 석사학위로 1정자격연수를 대체할 수 있는지요? A2. 「초·중등교육법」 별표 2에 의거 초등학교 정교사(2급)자격증을 가지고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자로서 1년 이상의 교육경력이 있는 자는 정교사(1급)자격기준에 부합됩니다. 선생님의 경우 위 요건에 부합되므로, 올 8월에 취득한 석사학위를 통해 1정 자격연수를 대체하여 1정 자격증을 관할 교육청에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공무원승진규정」 제36조에 의거 학위취득실적은 연구실적으로 평정될 수 있지만 동 규정 동조의 단서에 의거 제33조 제4항에 의하여 자격연수성적으로 평정된 석사학위취득실적은 평정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즉, 선생님께서 학위취득실적으로 1정연수를 대체했다면 연구실적으로 이중 평정이 불가합니다. 참고로 「교육공무원승진규정」 제33조 제4항에 의거 교육대학원이나 대학원 교육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자에 대한 자격연수성적은 다음과 같이 평정합니다. 평 어평정점 최상위 등급의 평어(A학점 이상)만점의 90% 차상위 등급의 평어(B학점 이상)만점의 85% 제3등급이하의 평어(D학점 이상) 만점의 80%
마산 청소년 문화의 집 새롭게 태어나다 마산공설운동장 내의 올림픽국민생활관 3층에 자리한 ‘마산 청소년 문화의 집’은 2002년에 들어선 청소년의 문화공간이다. 이번에 '이미지 아트 프로젝트'를 통해 '공공미술 연구소 프로젝트 쏠' 소속의 작가들과 문화의 집 참여 학생 41명, 문화의 집 교사 등 60여 명이 함께 참여해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태어났다. 지난해 10월 29일부터 현장조사와 작가편성, 아이디어 회의 등을 수차례 진행하였다. 올해 1월21일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 새로운 모습으로 청소년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 청소년 문화의 집은 학원이나 학교 교실과 별반 다를바 없는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느낌의 흰색 페인트로 칠해진 공간이었다.이곳을 지역작가와 지역대학 미술학과 학생, 실제 공간을 사용하는 청소년과 담당 선생님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나누며 만들어갔다. 학생들이 직접 페인트칠을 하고, 핸드프린팅 등을 작가들과 함께 진행하면서 미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공간을 함께 가꾸어 나갔다. 생전 처음 해보는 작업이라 옷에 페인트가 묻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이에 개의치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손에 페인트를 묻혀 벽에다 칠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공간을 꾸며나갔다. 필자는 작업 과정을 제대로 지켜보기 위해 1월 19일 '공공미술 연구소 프로젝트 쏠'을 찾아 작가들이 아이디어 회의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1월26일 마산 청소년 문화의 집 현장을 찾은데 이어, 31일 또다시 찾아가 완성된 모습을 확인했다. 60여 명이 약 10일간의 노력 끝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마산 청소년 문화의 집은 만화방, 회의방, 댄스방, PC방, 영상방, 풍물방, 사무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방의 특색에 맞게 꾸며져 신선하게 와닿았다. 엘레베이트가 있는 복도에는 학생들의 핸드프린팅 작품이 벽을 장식하고 있어 입구에서부터 시선을 끈다. 복도에는 탁구대가 설치되어 청소년들이 탁구를 즐길 수 있다. 마산 청소년 문화의 집이 '이미지 아트 프로젝트'를 통한 새단장을 축하하기 위해 1월31일 저녁 7시 간단하게 개장식과 축하공연을 가졌다. 마산 청소년 문화의 집 운영주체인 마산YMCA의 차윤재 사무총장의 인사말에 이어 축하공연이 열렸다. 풍물패 해달의 풍물공연과, 그레이트 걸스 등 2개 댄스팀의 댄스공연이 이어지며 축제 분위기를 돋구었다. 이어 영상팀에서 그동안 작업한 과정을 촬영한 영상을 상영하며 그동안의 작업 과정을 보여주었다.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작업하면서 페인트 등으로 망가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환하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현대미술은 체험을 통해 좀 더 가깝게 와닿을 수 있는 것이다. 이로서 프로젝트의 취지와 의미가 청소년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어 성공리에 마무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민예총의 배꾸마당 풍물패의 신명나는 공연을 끝으로 축하공연이 막을 내렸다. 그리고 김밥, 토스트, 떡볶이 등으로 간단하게 저녁을 먹은 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마산 청소년 문화의 집 : 055-252-8318 홈페이지 : www.masan1318.com
학생수련활동 중 이틀째가 되면 체력단련을 하는 시간이 있다. 점심식사 후 오후 반나절은 체력단련시간이다. 나로서는 꼭 함께 참여해야 할 좋은 건강 프로그램이지만 보통 때는 참여하지 못하고 하루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그 때 계속 그 시간을 내어 함께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학생들 중에는 체력단련시간이 되면 흔쾌히 참여하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참여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 중 약삭빠른 학생들은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지기도 한다. 특히 못된 애들 중에는 아예 담당 연구사님께 말씀을 드리지 않고 빠지는 학생들이 있다. 내가 체력단련에 참여하는 날 정만영 교육관님께서도 함께 참여하셨다. 학생 몇 명이 참여하지 않은 것을 보고 직접 그 애들을 데리고 함께 참여한 것이다. 모든 면에 모범을 보이시는 교학부장님! 이런 분이 계셨기에 한국 교육의 아름다운 모습이 계속 이어져 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순례를 나서는 날이 99년 4월 22일이었는데 그 날은 제11기 학성여고 수련생 240명이 국토순례길에 오르는 날이었다. 운동장에서 국토순례 발대식을 마치고 연수원 정문을 나섰다. 연수원에서 출발해서 방어진으로 해서 섬끝마을을 우회 행군하는 코스였다. 거리는 약6㎞ 정도다. 슬도에 이르면 동해의 푸른 바다를 접하게 된다. 그 때 담당 연구사님께서는 바닷바람을 마시면서 출렁거리는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마이크를 들고 큰 소리로 멀리 바라다 보이는 대왕암을 가리키면서 말씀을 하시기 시작한다. “신라 문무왕의 대왕암과 남해의 충무공 해전터를 바라보고 ‘나라사랑’의 호국정신을 새깁시다. 신라 문무왕은 죽어서까지 호국 대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유언은 후세에 귀감이며, 왜적을 섬멸한 충무공의 애국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깁시다. 우리 고장 울산은 나라의 운명이 누란지위(累卵之危)에 봉착했을 때 선열들이 온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한 충절의 고장입니다. 삼국시대 이래 대륙 진출의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던 일본이 침략하려던 반도의 관문에 위치하여 수없이 많은 침략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반구대와 백운산 일대의 화랑 유적지와 망부석과 문무 대왕비 수중릉이 보여주듯 애국 충정심과 활기찬 기상이 넘치는 우리 고장의 선조들은 왜구의 침략에 맞서 그들의 야욕을 무위로 돌렸습니다. 특히 전대미문의 전란인 임진왜란 때에는 우리 고장 출신의 의병이 중심이 되어 일본의 주력 부대와 7년간 계속하여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던 곳입니다. 크나큰 인명과 재산의 피해 속에서 용감하게 싸워 일본의 세력을 동해 바닷가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하게 묶음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습니다. 민족혼과 애국정신이 깃든 유적지와 희생의 피가 묻은 산하를 걸으며 우리는 경건하게 옷깃을 여미자, 유유히 굽어치는 태화강은 그 날의 함성과 뜨거운 정열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수련생 여러분들은 국토에 대한 애착심과 호국정신을 배양하고 심신을 단련하며 호연지기를 기르기 바랍니다. 국토 순례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자연과 대화하며 안전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그러고 나서는 바닷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돌아오게 된다. 돌아올 때는 지금 교장선생님으로 계시는 정건 교학실장님의 안내로 강인한 의지와 인내력을 배양하기 위해 평지를 선택하지 않고 가파른 오르막 산길을 향한다. 연세 많으신 교학실장님께서는 평소에 잘 단련된 체력을 밑바탕으로 해서 조금도 쉬지 않고 잘 이끌어 나가신다. 나는 학생들의 뒤에서 40년 교육 경륜의 정만영 교학부장님과 함께 산길을 오르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분의 교육철학과 인생경험을 배우게 된다. 그러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대화하는 가운데 두 명의 학생이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빠지는 것을 보고 그들을 합류시키기 위해 힘든 몸을 이끄시고 함께 국토순례에 참여했다는 정부장님의 말씀에 나는 절로 감동하게 한 채 산길을 오른다. 힘들어하는 학생들에게 “힘든 오르막길이 있으면 쉬운 내리막길이 있으니 힘내라”고 하시는 말씀이 꼭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려왔다. 드디어 연수원 운동장에 모여 해단식을 하게 된다. 국토순례 해단식 때 정 교육관님께서는 수련생들에게 “수련생여러분! 만 보를 걸으면 백수(白壽)하는 데 여러분 모두 성공을 하였습니다. 앞으로 삶에 있어서 성공적인 삶이 계속 이어지도록.....” 정부장님의 훈화말씀이 차랑차랑하게 들려온다. 아마 이 날의 훈화말씀이 학생들 모두에게 가슴에 깊이 박혀 건강관리를 하는데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교원 급여에 대한 재검토를 진행하고 있는 중앙교육심의회의 작업 부회는 1월중 회합에서, 관리직을 보좌하는「주간」직이나 다른 교사를 지도하는 「리더 교사」직을 신설하는 것에 합의했다. 초점이 되고 있는 시간외 수당의 도입에 대해서는 결정을 미루었으나 금년도 중에 결론을 낼 전망이다. 부회가 정리한 보고안은 주간에 대해 「관리직을 보좌하고, 담당하는 교무를 주관한다」, 리더 교사는 「지도력이 뛰어나 다른 교사에 대하여 교육상의 지도 조언이나 연수에 임한다」라고 명기하여, 교원 직급의 복선화를 밝힌 것이다. 기본적으로 교장과 교감, 교사, 준교사의 4급체제인 현행의 급료표를 새로운 직무도 포함해 수정하고 급여에 대한 신축성을 갖도록 하고 있다. 또, 문부과학성에 의한 교원의 근무 실태 조사의 결과를 바탕으로, 아이들의 지도보다 학교 운영과 관계되는 업무의 비중이 많아지고 있다고 보아, 이 같은 대책으로 대규모 학교 등에 「사무장」직을 신설하는 것도 합의했다. 검토중인 시간외 수당은 관리직을 제외한 교원에 일률적으로 지급되어 온 교직 조정액을 폐지하고, 일반 공무원과 같은 구조로 고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같은 제도는「교원의 근무 특수성과는 거리가 있다」라는 의견도 있어 아직 결정에 이르지 않았다.
최근 교육계에 워낙 많은 이슈가 있어서 어지간한 이슈는 수면위로 떠오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이슈는 교원평가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교단개혁이 단연 으뜸이다. 이 틈을 타고 종종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이 교복문제이다. 원가보다 엄청나게 부풀려진 가격문제 때문인데, 학부모들은 교복없이 등교시키는 문제까지 검토하고 있다니 쉽게 넘어갈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교복역시 업체마다 하청업체를 두고 있다(특히 대기업일 경우). 이들 하청업체에서 제작하는 교복의 원가는 인건비를 포함하여 10만원 남짓이라고 한다. 실제로 교복을 유통시키는 업체에서도 이와같은 사실을 인정은 하고 있다. 문제는 유통과정이라고 하는데, 공장원가 10만원짜리를 본사가 지역총판에 15만원 정도에 넘긴다. 이 가운데 1만 5천원을 지역총판에서 남기고, 지역총판은 다시 대리점에 교복을 넘기게 되는데, 대리점에서는24만 5천원 정도에 판매를 한다. 이렇게 유통을 거치면서 본사 이익이 3만 5천원. 지역총판 1만 5천원, 대리점 9만 5천원 정도의 이익이 포함되어 원가보다 2.5배 정도에 학부모가 구입하게 된다.(자료: MBC뉴스, 1월 31일자) 결국 원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교복을 구입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인데, 여기에 유명연예인을 동원한 광고가 성행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앞으로 교복값은 얼마나 더 오를지 예측하기 어렵다. 이런 부담들은 당연히 학부모들에게 경제적 압박을 가하게 된다. 대리점 측에서는 한철 장사라고 주장한다. 당연히 교복판매이익이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업체측에서는 교복은 일반양복보다는 사정이 좋은 편이라고 한다. 따라서 거품이 많지 않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교복을 공동구매로 구입하면 가격을 많이 낮출 수 있지만 이 방법도 쉽지만은 않다. 지난해의 경우를 보면 대기업체는 공동구매에 참여하지 않거나, 참여하더라도 할인폭이 높지 않아 실효를 거두기 어려웠다. 또한 공동구매에 참여하는 업체도 일정량 이상 구매할때 가격을 낮추겠다는 옵션을 내걸기도 한다. 만일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다음해에 공동구매추진에 상당한 애로가 있게 된다. 그래도 일선학교에서는 학부모를 중심으로 공동구매를 매년 추진하고 있다. 많은 학부모들이 공동구매에 참여해야 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 현실적으로 공동구매를 통해 구입하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주로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공동구매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학부모들의 대기업체 교복을 선호하는 인식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학부모들은 '공동구매로 계약된 업체의 교복보다 참여하지 않은 업체의 교복의 질이 더 좋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더라고 공동구매에 참여하지 않은 업체의 교복을 구입한다.'고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업체가 공동구매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현재로써는 공동구매가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이것도 문제가 많다면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즉 교복을 폐지하면 어떨까 싶다. 학생들의 두발자율화가 대세인 요즈음에 굳이 교복을 입혀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두발은 자율화 하면서 교복은 억지로 입힌다는 것이 시대적으로 볼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물론 교복을 없애면 많은 문제가 발생할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그렇지만 현재와 같이 교복 문제가 수시로 대두되는 시점에서 하나의 방안으로 검토해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예전에 교복자율화를 실시했을때도 생각보다 큰 문제는 없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교복가격거품을 제거하여 적절한 값으로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문제가 자꾸 커진다면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하며 그 대책중에는 교복폐지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치원 전환’을 조건으로 지난 2년간 유아교육비를 지원받은 유아미술학원 대부분이 유치원으로 전환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교육부는 약속을 어긴 유아미술학원에 대해 1년간 더 예산을 지원할 방침이어서 “혈세 낭비”라는 유아교육계와 교총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유아교육발전을 위한 유아교육대표자 연대’는 31일 교육부 후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근 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지원을 받은 미술학원 중 유치원으로 전환하겠다는 비율은 고작 14.6%고 나머지는 거부 의사를 밝혔다”며 “정부의 허술하고 무계획적인 지원이 공교육비로 사교육을 조장한 꼴이 됐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교육부가 최근 41개 유아미술학원을 표집조사한 결과, 단 6곳만이 유치원 전환 의지를 밝혔고 나머지는 ‘전환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는 ‘유치원 전환 희망 학원에 대해 유아교육비를 지원한다’는 유아교육법시행규칙에 정면 위배되는 것으로 “정부가 불법 지원을 자행하고 있다”는 비난을 자초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이번 연구를 수행한 육아정책개발센터 한 관계자는 “시도에 따라 각서를 받기도 하고 안 받기도 하는 등 기준이 모호했고, 사실 처벌규정이나 지원비 환수 규정도 없어 미술학원에 유치원 전환을 강제할 근거가 없다”고 설명했다. 유아교육대표자연대는 “미술학원 지원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2년 한시로 못박은 법에 따라 추가 지원 방침을 즉각 중단하라”며 “이를 거부한다면 유아교육계는 감사원 감사청구, 위헌 소송, 가처분 신청은 물론 시민, 학부모, 교원단체와 총연대해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와 관련 1일 당정협의를 가진 정부와 교육부는유아미술학원 1년 연장 지원과 함께 좀더 근본적인 정책방향을 모색하기로 해귀추가 주목된다. 한 관계자는 "매번 연장 지원을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장기적인 정책대안을 마련해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당정협의를 마친 교육부는 바로유아미술학원 지원 유효기간을 2008년 2월 28일로 하는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오는 12일 학교운영위원회에 참가하는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잡지, 월간 ‘학부모’가 창간된다. 발행인 송인정 전국학교운영위원회총연합회 상임 공동대표(사진)는 학부모들의 교육정책에 대한 이해를 돕고, 교양 함양에 도움을 주고자 월간 ‘학부모’를 창간하게 됐다고 이유를 밝혔다. “학교운영위원회가 도입된 지 10여년이 됐지만 제도적으로 정착하지 못한 이유는 학부모 위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학부모 위원의 임기가 시도교육청별로 2년에서 짧게는 1년으로 임기가 짧은데다 교육에 대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받지 못해 학교에서 역할이 제한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송 대표는 학운위 운영의 우수사례, 비교분석의 정보를 줄 수 있는 매체가 필요하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지난 해 9월 대구학교운영위원회총연합회장 재임 시 이미 같은 제호의 잡지를 발간한 경험이 있는 송 대표는 이번 전국을 대상으로 한 잡지의 발간과 함께 ▲교육정책 및 주요업무 추진 현황 ▲선진국 학운위 사례 제공 ▲학생복지분야 정보 제공 ▲유학·입시 정책 및 관련 정보 제공 등으로 내용을 다졌다. 송 대표는 “월간 ‘학부모’를 통해 학운위원장에게 좋은 정보가 제공되면 학교운영의 중요한 축으로서의 역할도 잘 담당하게 될 것이고 잡지를 통해 서로 네트워크화 돼 교류와 소통도 원활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전국학운위원장 1만 여명에게 무가지로 제공될 월간 ‘학부모’는 학교와 교육청 및 관심있는 독자를 대상으로 판매할 예정이다. 예상 발행부수 4만 여부. 가격은 5000원. 수익금의 일부는 결식학생 돕기, 학운위 기금으로 사용할 계획이다.
경기인천지역 대학생 공동행동(준)은 31일 광화문 정부청사 후문에서 대학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는 뜻에서 반소매 차림으로 시위를 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등록금 인상 상한제를 실시하고 학자금 대출을 무이자로 할 것을 요구했다.
유아교육발전을위한유아교육대표자연대는 31일 광화문 정부청사 후문에서 '미술학원 지원 연장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대표자연대는 이날 2월말로 유효기간이 끝나는 만5세 미술학원 유아교육비 지원의1년 더연장에 대해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 했다.
국가청소년위원회(위원장 최영희)는 최근 ‘청소년유해환경접촉 종합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학교·가정생활, 유해매체, 음주, 흡연, 유해업소, 가출, 폭력, 성 등 8개 분야에 대해 전국 중·고등학교 재학생 1만4430명과 전국소년원, 가출청소년, 학교 부적응 청소년 등 위기 청소년 1500명을 대상으로 작년 9월부터 11월까지 실시됐다. 조사 결과, 청소년들의 가정생활 만족도는 50.8%, 학교생활 만족도는 34.5%로 낮게 나타났다. 이는 2005년에 비해 가정생활 만족도는 0.5%, 학교생활은 2.3%가 더 낮아진 수치다. 일반 청소년의 57.1%는 가출충동을 느꼈으며 이 가운데 19.0%는 실제로 가출을 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는 2005년 9.9%에 비해 두 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평균 가출 횟수는 3.4회(위기청소년은 7.7회)로 나타났다. 가출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부모와의 갈등’이 28.3%로 가장 많았고 성적 부담감(14.8%), 학교통제가 싫어서(12.4%), 그냥 놀고 싶어서(10.8%), 공부하기 싫어서(9.8%), 호기심(4.2%) 등이 뒤를 이었다. 부모와의 갈등요인으로는 학업성적(35.1%), 컴퓨터 사용(15.2%), 진학·진로(14.5%) 등이 지적됐다. 폭력 피해 경험과 가해 경험은 28.3%, 24.2%로 2005년의 37.6%, 33.7%에 비해 각각 줄어들었으며, 폭력 유형은 욕설(11.8%), 폭행(6.5%), 금품갈취(7%), 왕따(3%) 순으로 조사됐다. 폭력 피해율과 가해율은 가정경제 수준이 높은 청소년들 사이에서 높았고 학교 성적이 낮은 청소년들이 폭력가해 경험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유해매체 이용은 유선방송 시청 41.5%, 비디오·영화 39%, 음란사이트 38.4%, 간행물 36.5%, 핸드폰 13.3% 순이었으며 가정경제 수준이 낮을수록, 가정 및 학교생활 만족도가 낮을수록 유해매체 접촉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반적으로 2005년에 비해 5~10% 가량 접촉률이 낮아졌으며 특히 음란사이트 이용은 45.6%에서 32.6%로 크게 줄었다. 그러나 유해매체를 처음 이용한 시기가 초등 4~6학년과 중학교 1학년이라는 응답이 최고 32.9%에 이르는 등 11~14세에 집중돼 있어 이 시기에 올바른 미디어교육이 시급한 것으로 분석됐다. 일반 청소년들의 하루 컴퓨터 사용시간은 3시간50분이었으며 게임(28.9%), 자료검색(20.3%), 공부관련(19.0%), 미니홈피 및 카페(15.1%), 채팅(10.2%), 음란물 검색(2.7%)의 순으로 나타났다. 반면 위기 청소년들은 하루 5시간53분을 컴퓨터 사용에 할애했으며 게임이 38.0%, 메신저 및 채팅이 15.8%, 자료검색 12.9%, 음란물 검색 4.0% 등으로 나타났다. 최근 1년간 음주 경험을 조사한 결과, 절반에 가까운 47.6%가 음주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최초 음주시기에 대해서는 중1,2학년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일반 청소년은 중1(20.2%), 중2(20.2%), 위기청소년은 중1(28.5%), 중2(22.5%)로 조사). 청소년 흡연도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2005년 8.8%로 소폭 감소(2002년 10.7%)했던 일반 청소년의 흡연율은 2006년에 9.9%로 다시 증가했다. 그러나 위기 청소년의 경우 2005년 48.8%보다 오히려 감소해(44.8%) 긍정적인 면모를 보였다. 국가청소년위원회는 “학령별 미디어교육프로그램을 보급해 유해매체 접촉연령이 낮아지는 것을 막고 보건복지부와 함께 초·중등학교 흡연예방교육 강화, 청소년 음주·흡연 관련법 제정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청소년위는 또한 청소년들의 가출이 급증한 점을 고려, 가출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한 이동쉼터 등을 확충하고 가출 사전예방을 위한 1388 상담전화 홍보를 강화할 계획이다.
유아교육발전을위한유아교육대표자연대는 31일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교육부에 유아미술학원 지원 연장 방침의 철회를 요구했다. 이 단체는 "교육부가 2월 말 끝나는 유아 대상 미술학원에 대한 교육비 지원 제도를 유아교육계와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1년 더 연장하려 하고 있다. 이는 공교육을 죽이고 사교육을 조장하는 반교육적 정책이므로 당장 철회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지원 대상 학원은 유치원으로 전환하는 것을 조건으로 지원을 받은 것이지만 제도가 시행된 지난 2년간 유치원으로 전환한 학원이 전체의 14.6%에 불과해 예산만 낭비한 셈이 됐다. 정부가 제도 연장방침을 중단할 때까지 온.오프라인 시위와 서명운동을 벌여나갈 계획이며 위헌소송과 가처분 신청 등 법적 조치도 불사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교육부는 2005년 3월부터 2년간 유치원 전환을 희망하는 유아미술학원 중 유치원에 준하는 시설과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경우 교육비를 지원하는 내용의 '미술학원 유아교육비지원사업'을 펼쳐왔으며 최근 이 같은 제도를 1년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2007년 1월 18일과 19일에 전남 고흥의 우주발사대를 방문하였다. ‘우주’라는 거대한 세계를 향해 내노라하는 선진국들이 아닌 우리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것을 매스컴을 통해 스쳐지나가는 정보만 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오감각으로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항공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남편에게 부부동반 초청이 왔다. 남편은 자문위원으로 발표도 하고 행사에 참여하는 등 고흥에 여러번 갔으나 필자는 지도를 통해 익혀야 할 정도의 낯선 고을이었다. 하지만 자문활동이 고맙다고 보내주는 ‘유자차’ ‘멸치’ ‘간장’ ‘된장’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고 있었던 터라 지역은 낯설지만 누가 말하면 ‘아~ 고흥’ 하고 아는 듯이 여기고 있었다. 필자가 살고 있는 대전에서 꽤 먼거리라 자동차로 거의 5시간이 걸렸다. 남편의 일거리가 느즈막히 끝난 탓으로 늦은 출발을 하였더니 새벽 1시에 고흥에 도착하였다. 그 시간까지 항공우주분야의 학자들이 모여서 모임을 가지고 있었던 탓으로 필자는 정해진 숙소로 가고 남편은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눈을 뜨고 커튼을 걷으니 한밤중이라 볼 수 없었던 장관이 나타났다. 창밖이 바로 바다였으며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따듯한 방안에서 찬찬히 해를 구경하고 물결치는 바다의 소리를 들었다. 매생이와 양태국으로 아침을 마친 후에 초청된 부인들에게 고흥을 알리는 군의 알리미 행사에 참석을 하였다. 필자가 참석하지 못한 전날에는 맛있는 떡과 수산물을 판매하는 곳에 갔었단다. 버스에 함께 앉은 부인들이 떡을 신청하고 수산물도 샀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해주는 동안 필자는 못내 아쉬웠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청정의 바다와 바로 코 앞에 가까이 있는 섬부터 다소 떨어진 곳에 있는 섬까지 바다와 섬, 육지가 함께 어우러진 풍경 좋은 고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이곳 주민들이 얼마나 발전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차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은 얼마전만해도 길이 없어서 들어올 수 없었어요. 배를 타고 섬으로 나가야 하고 힘든 일이 많았는데 우주센터가 들어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저 삼나무 숲을 보세요, 산책로로 아주 좋아요.” 지난해의 우주 축제에도 얼마나 열심히 묻고 전화하고 알려달라고 도와달라고 매달리고 보채는지 학자들이 감동을 하였단다. 우주센터에 이르렀다. 아직도 흙이 쌓여있고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우주 박물관과 연구동 등을 여러 채 짓고 있었다. 도중에 연구동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과학자분이 버스에 동승을 하여 지나치는 건물의 용도와 우주발사대 건립에 대한 주변국들의 반응과 어려움, 보람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알려주었다. 우주발사대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세계 8개국이 있으며 우리나라가 9번째 나라가 될 것이라 한다. 일본과 중국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주시하고 있고, 한국에 정보를 주면 중국과 북한으로 유출될 가능성 때문에 미국은 기술 이전에 소극적이며 따라서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는 설명, 인공위성이 발사되어 파편이 일본의 영토에 들어가면 국가간의 분쟁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필리핀과 일본국 사이에 좁게 나있는 공간에 파편이 떨어지도록 해야한다는 발사의 어려움 등을 들었다. 일본은 섬이 많아서 필리핀 근처까지 일본의 영토란다. 짧은 기간 구경만 하고 가는 관광객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절벽과 바다, 등대와 섬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절벽 끝에 바다와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섬을 바라보는 위치에 지어진 연구원 숙소를 보며 ‘정말 좋으시겠어요’ 하고 부인들이 말을 건네자 과학자분은 잠시 가만히 있더니 ‘대부분의 연구원들이 우울증에 걸렸다’고 하였다. 사실 우리도 산을 몇 개 넘고 이 곳에 왔다. 산과 바다 그리고 연구실만 바라보며 일년 열두달을 견디라면 우울증에 걸리는것이 정상이겠다. 가족과 친구들이 위문공연차 자주 들러야 함과 더불어 효율적인 연구활동을 위해 심신을 달래주는 운동이나 오락 활동이 가능하도록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오지에서 또 남극이나 북극의 기지 등등에서 참 많은 분들이 고생을 하고 있다. 인공위성을 발사함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은 위성을 운반하는 운반체 제작기술로 쉽게 말해 운반체는 버스, 위성은 화물이라고 할 때 버스를 만드는 기술이 대단히 복잡하고 어렵다고 하였다. 러시아는 기술이전을 해주지 않으려고 직접 과학자를 파견할 계획이며 많은 과학자들이 2007년도에 들어와 머물 예정이란다. 2007년 1월 21일과 27일 사이에 필자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를 방문했었다. 교육프로그램이 훌륭하다고 하여 직접 보고 느끼려고 갔었다. 그 교육 프로그램에는 그 도시의 정신과 가치, 일상의 생활 모습이 들어있었다. 자기의 몸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을 때 가장 편하고 잘할 수 있으며 남도 훌륭하게 본다. 섬과 바다, 육지로 이루어진 경관이 좋은 고흥을 나서며 청정의 바다, 우주센터. 일출과 일몰, 육지가 가까운 섬을 떠올리며 이곳에 맞는 프로그램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였다. 태국에 갔을 때 어부들이 작은 배에 2,3인의 관광객을 태우고 배 밑을 유리로 만들어 바다 밑을 보게 하기도 하고, 낚시도 하는 것을 보았던 것을 떠올리기도 하고, 우주센터 때문에 외부인들과 외국인들도 많이 온다고 하던데 특히 러시아 과학자들이 많이 온다고 하던데 한국의 과학자들과 러시아 과학자들, 주민들간의 소통 공간을 만들어 러시아의 이방문화도 지역의 장점으로 살려도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떡도 맛이 있다고 하던데 해산물을 이용한 떡인가? 아니면 바닷가 지역에서 접한 땅에서 나는 곡식으로 만든 떡인가? 섬마다 특색이 있지 않을까? 국내외 바다음식 전문 요리사를 초빙하여 지역에서 나는 음식을 발전시키고, 대회를 개회하여 알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러시아 음식을 수용하고 개발하면 오는 이방인들도 편하고 쉽게 친구도 되며 먼곳까지 가지 않아도 그 문화를 익힐 수 있겠다. 필자는 등대를 멀리서만 보았다. 등대는 그 이미지가 망망한 바다 한 가운데서 배의 길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어렸을 때부터 불렀던 등대지기 노래탓인지 외롭고 고단해 보였다. 가까이 가보지 못한 탓인지 등대를 체험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물론 배의 길잡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소홀히 하게 하면 안되므로 등대 체험 호텔이면 어떨까? 등대는 좁고 위태한 작은 땅 위에 세워지므로 방이 몇 개 없겠지? 운전을 하고 오면서 식당에 들렀는데 생선을 얇게 썰어 튀겨서 양념을 한 반찬이 나왔다. 대단히 파삭하고 맛이 있었다. 생선은 요사이 선호되는 식품이다. 오뎅은 생선을 다듬고 나머지로 만들었다고 하던데 부산물로 파삭한 과자를 만들어 주면 아이들의 간식, 다이어트를 원하는 여성들, 아줌마들의 군것질용으로 좋지 않을까도 생각하였다. 부산물이므로 지저분하게 가공하면 화학첨가물이 최소화되고 천연재료라 할지라도 먹을 생각이 나지 않겠지? 모처럼 남편과 남해 나들이를 하며 잠시 고흥의 주민이 되어 이러저러한 상념에 젖어보았다.
교사직과 교육행정직 등 각종 시험에서 여성 합격자 비율이 갈수록 높아지는 등 경기도 교육계 전반에 여성파워가 거세지고 있다. 31일 도 교육청에 따르면 지난해말 750명을 선발하는 초등교원 임용시험에서 전체 합격자가운데 여성이 83.5%(626명)를 차지했다. 이는 1천400명을 선발한 전년도 같은 시험의 여성합격자 비율 82.1%(1천150명)보다 1.4%포인트 높아진 것이다. 지난 29일 중등교원 임용시험 최종 합격자 발표에서도 전체 합격자 1천569명가운데 여성이 1천293명으로 82.4%를 차지, 역시 지난해 여성합격자 비율 81.9%보다 0.5% 높아졌다. 도내 각급 학교의 여성교사 비율에서도 여성파워의 강세는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도내 초등학교 여교사 비율은 2004년 74.6%, 2005년 75.5%, 지난해 76.1%로, 중학교는 2004년 71.9%, 2005년 72.6%, 지난해 72.8%로 매년 높아지고 있다. 고등학교 여교사 비율 역시 2004년 49.9%에서 2005년 50.4%로 높아지면서 처음으로 절반을 넘어선데 이어 지난해는 51.2%를 기록했다. 지난해 11월 실시된 도내 9급 교육행정직 시험에서도 역시 전체 합격자 190명 가운데 여성이 83.2%인 158명을 차지한 것은 물론 수석을 포함, 상위권 합격자 대부분을 여성이 차지했다. 이같은 여성강세에 대해 도 교육청은 관계자는 "남성들의 군복무 가산점이 없어진 이후 각종 시험에서 여성 합격자 비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며 "당초 각종 시험에서 여성들을 배려하기 위해 만든 '양성평등채용목표제'가 요즘은 남성들을 위한 제도가 됐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성에 비해 여성이 높은 집중력을 보이는 것도 여성합격자가 많은 원인중 하나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한 교육계 인사는 "현재 일부 초등학교의 경우 교장을 포함, 모든 교사가 여성들로만 이뤄진 학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학생들이 학교에서 남.여 선생님들로부터 고른 교육을 받는 것이 인격형성 등에 좋을 것으로 판단되는 만큼 적절한 대책이 마련될 필요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