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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김철수 | 경남 거제중앙고 교사, 사진작가 늪을 나누는 기준은 늪 주변 지하수 높이와 늪의 수위와의 상관관계에 따른다. 늪의 수위가 낮으면 저층늪, 늪과 주변의 수위가 같으면 중층늪, 늪의 수위가 주변보다 높아지면 고층늪이라고 한다. 보통 저층늪은 강이나 하천 주변에서 형성되어 있고, 중·고층늪은 높은 산에 분포하고 있다. 산에서 늪이 만들어지는 원리는 반드시 지하수가 분출되어야 하고, 이곳에 사초류와 벼과 식물이 자란다. 이들은 높은 산에 분포하므로 밤에 기온이 내려가서 풀들의 죽은 찌꺼기가 완전히 분해되지 않고 이탄층이 된다. 이때 늪의 수위가 주변의 높이와 같아지면 삿갓사초류, 진퍼리새 따위가 밭을 이루는 중층늪이 된다. 여기에서 더 진행되어 물이끼층이 발달되어 이탄의 퇴적층이 볼록하게 되어 늪의 수위가 주변보다 높아지면 고층늪이 된다. 산위에서 다양한 동식물 품고 있어 둔철(屯鐵)산은 황매산에서 흘러내린 산자락이 정수산을 거쳐 경호강에 몸을 풀기 전 811.7m의 높이로 우뚝 솟아 있다. 경호강 건너편에는 지리산의 동쪽 끝자락인 웅석봉이 마주하고 있다. 둔철늪이 위치한 경남 산청군 신안면 안봉리를 이루는 흙은 검은색을 보여 철 성분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철을 생산하였다는 말이 전하고 있으며, 산 전체에 철이 쌓여 둔철이다. 늪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울산의 뻔지늪과 무제치늪이 4천~6천 년 전에 만들어졌으므로 대략 이 정도로 추정된다. 둔철분지는 둔철산과 대성산이 서로 가슴을 펼쳐 만들었는데, 대략 6백만㎡로 추정된다. 둔철분지를 이루는 골짜기는 모두 골이 깊고 물이 풍부하였기에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을 가슴에 안아줄 수 있었다. 사람이 영향을 주기 전에는 둔철분지의 대부분이 늪을 이루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일부분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둔철늪 주변에는 작은 호수가 있고, 그 주변으로 얼마 전까지 경작지로 이용하였던 논들이 늪 면적보다 넓게 펼쳐져 있다. 둔철늪은 지리산 인근에 위치한 왕등재늪, 외고개늪, 황매산늪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천연기념물 330호인 수달 및 환경부 보호종인 꼬마잠자리의 최대 서식지이다. 2003년에 발견된 이 늪은 해발 640m 지점에 위치하며, 2만여 평의 면적을 나타낸다. 이 중 자연습지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부분은 약 2천5백 평 정도이다. 습지 가운데 일부는 고층습원인 대암산 용늪처럼 식물체가 완전히 분해되지 않아 만들어지는 이탄층이 발달되어 있어 발로 밟으면 10~20㎝ 높이로 울렁거린다. 한때 논으로 이용된 이곳은 20년 전부터 경작을 포기함에 따라 점차 원래의 습지 모습을 회복하고 있다. 수령 30~50년의 오리나무가 자라고 있는 자연습지는 습지 사이에 암석이 많아 개발이 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주변의 지역은 논으로 경작되다가 지금은 자연습지로 회복되고 있다. 습지로 회복되는 과정에 진퍼리새와 삿갓사초 및 도깨비사초가 넓게 자라고 있다. 환경부 조사에 따르면 붓꽃, 꽃창포, 민솜방망이, 큰방울새란, 통발, 도롱뇽, 무자치 등 170여 종의 동식물과 장수하늘소 등 26종류의 곤충류가 서식하여 국내 산지늪 중 동식물 분포가 가장 높고 다양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단지 늪 안에서만 조사한 결과이지, 둔철분지 전체를 조사한 결과는 아니다. 그 외에도 천연기념물 제323호인 매류와 환경부보호종인 삵의 흔적이 다수 발견되었다. 특히 이곳에는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잠자리 중 가장 크기가 작은 꼬마잠자리가 국내 산지늪 중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다. 크기는 100원 동전보다 작은 2센티미터 정도이며, 암컷과 수컷의 색깔이 다르다. 수컷의 몸은 처음에는 황색이다가 나중에 붉은색으로 변하고, 암컷은 황색 바탕에 갈색과 흑색의 반점이 섞여 있다. 넓은 가슴으로 많은 사람들 포용 둔철늪을 가는 길은 두 갈래다. 산청읍에서 3번 국도를 따라 단성으로 가는 중간에 외송마을이 나온다. 외송마을에서 산길로 들어서면 내송마을이 나오고, 이곳에서 3㎞를 올라가면 둔철마을이 나온다. 지도상에는 외송과 내송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이 지역 사람들은 바깥솔기와 안솔기로 부르기를 좋아한다. 둔철마을에서 1㎞ 정도 올라가면 농사를 짓고, 오골계를 기르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단성에서 합천댐으로 가는 길에는 2006년 담장이 등록문화재(260호)로 지정된 단계마을이 나온다. 단계마을에서 사계마을을 지나면 정취암 가는 산길이 나온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2㎞ 정도 오르면 둔철늪에 인접한 경작지가 바로 눈앞에 나타난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따라가면 둔철마을로 연결되는데, 바퀴가 낮은 자가용차는 지나가기가 힘이 든다. 도로 주변의 적당한 공터에 차를 주차하고 작은 연못을 찾으면 그 주변과 아래쪽이 둔철늪이다. 평지늪과는 달리 사람이 다니는 길이 없으므로 조심해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둔철늪 서쪽 편에는 3백m 길이의 암괴류가 넓게 분포하고 있어 웅장함을 더한다. 둔철분지는 많은 사람들을 감싸왔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화전민들이 이곳을 개척하였고, 자주 산불이 났기에 분지의 많은 부분에는 억새와 키 작은 나무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고사리, 참취, 미역취, 원추리, 비비추, 삽주 등의 산나물들이 해마다 가득 싹을 틔운다. 지금도 둔철분지 주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근의 진주와 거창에서 온 사람들은 봄이면 삼삼오오 모여들어 많은 양의 나물을 채취하고 있다. 산청군과 산림청은 2011년까지 둔철늪을 포함한 둔철분지 약 18만 평에 둔철생태숲을 조성할 계획이다. 생태숲은 생물다양성 유지를 위해 생태적 기능보전을 강화하고, 생태계의 교란과 훼손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추진하는 사업이다. 생태숲은 지리산 모델숲, 활엽수원, 야생화단지, 약초테마원, 고원습지원, 생태연못, 습지관찰 덱 등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또 도시 생활에 싫증을 내고 유기농을 통한 전원생활을 꿈꾼 사람들에게 가슴 한 부분을 내주어 안솔기공동체를 꾸리게 해 주었다. ▶ 둔철늪 옆 정취암 전설 둔철늪 가까이에 있는 정취암은 대성산 동쪽 아래의 큰 암벽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암벽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문가학이라는 사람이 정취암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정월 초하루에 스님들이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하였다. 이유인즉 설날 밤에 요괴가 나타나 사람을 잡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가학은 술 한 동이와 안주를 준비한 다음 기다렸는데, 밤이 되자 한 여인이 나타나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게 된다. 여인이 술에 취한 후 가만히 보니 늙은 여우였다. 여우를 묶자 여우는 자신에게 둔갑하는 법을 적은 비술책이 있다고 살려 달려고 한다. 끈으로 묶인 여우는 문가학을 벼랑으로 데려가 입으로 책을 물고 내려오게 된다. 책을 보는 동안 여우는 책의 끝장을 물고 벼랑을 올라가 버린다. 문가학은 비술을 익혔지만 옷고름만은 감추지 못하였다고 한다. 벼슬을 하면서 비술을 사용하다가 잘못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 생태계의 의미와 산지늪의 중요성 생태계(生態系, Ecosystem)는 생물과 환경에 의해 이루어진 모임이다. 환경은 생물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모태로서 토양, 공기, 물, 빛, 온도 등이다. 생물은 역할에 따라 생산자, 소비자, 분해자를 말하는데, 생산자는 다른 생물이 먹을 것을 빛을 이용해 만들고, 소비자는 이를 이용하고, 분해자는 동식물의 사체를 분해하여 흙의 성분을 만든다. 즉, 생태계는 생물과 환경의 어울려짐을 이야기하는데, 생물은 환경이 없으면 살 수 없고, 생물이 잘 살지 못하는 환경(예를 들면 사막이나 빙하)은 삭막하다. 서로가 도움이 되는 살기 좋은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사람이 자연(인간을 제외한 생물과 환경)에 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이다. 중·고층늪은 특수한 환경에 적응된 생물들이 살고 있는 특별한 생태계로 전국적으로 손꼽을 정도로 희소하다. 따라서 이 생태계가 파괴되거나 훼손되면 이곳에 적응하여 살아가던 생물들은 멸종하여 다른 어떤 장소에서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희귀한 자원을 무작정 보존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며, 멸종된 자원을 복원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기 위해서 멸종되어가는 자원의 종 다양성 유지, 천이 계열과 습원 생태계의 보존 연구, 화분학을 통한 고생태학과 고기후학 연구 등이 필요하다.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무덤의 주인인 안티오크 두상* 박하선 | 사진작가, 여행칼럼니스트 산 정상에 남아있는 왕국의 자취 터키의 드넓은 아나톨리아 평원을 지나 동부로 향하다 보면 건조한 스텝 지대가 펼쳐지면서 군데군데 산들이 나타나기 시작해 앞길을 막기 시작한다. 이러한 산들은 거의가 석회암 질이어서 키가 작은 나무들만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을 뿐이다. 또 어떤 곳에는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들고 크고 작은 바위들만 뒹굴고 있어 삭막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것들도 있다. 이렇듯 이 모두가 한눈엔 별 볼일 없어 보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산들 중에서 그냥 지나치지 못할 산이 하나 있다. 그게 바로 '넴루트 다이'다. '다이'라는 말은 이곳 말로 '산'을 뜻하기 때문에 '넴루트 산'이라고 해야겠다. 이 넴루트 산은 해발 2150m로 역시 삭막한 바위투성이의 산이다. 이 정도 이상의 높이를 갖은 산은 동부 터키에는 많다. 그렇다면 만년설을 이루고 있을 정도로 높은 것도 아니고, 또 수려한 계곡이나 숲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이 넴루트 산의 매력이어서 뭇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일까.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특이하게도 이 산 정상에는 수수께끼의 고분과 거대한 석상들이 뒹굴고 있기 때문이다. 기원 전 150년경부터 이 일대에 '코마제네(Commagene)'라는 왕국이 자리하고 번영을 누리고 있었는데,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왕 '안티오크 1세'의 무덤이 20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왕의 무덤 지키는 거대한 석상들 심하게 가파른 산도 아니고 또 어느 정도까지는 차로 올라왔기 때문에 등산을 하기 시작한지 30여분 만에 정상에 닿을 수 있었다. 제법 차가운 새벽 공기가 몸을 움츠리게 하는 가운데 저 멀리서 어둠을 가르고 서서히 동이 터 오기 시작한다. '신의 발자욱'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지금 서 있는 곳이 정상이라고 하는데 아직도 눈앞에서 시야를 가리고 있는 것이 있다. 피라미드처럼 보이는 거대한 자갈무더기다. 그리고 주변에는 바윗덩이들이 제 멋대로 뒹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수수께끼의 석상들과 안티오크의 무덤이다. 이윽고 이 안티오크의 무덤에 오늘의 첫 번째 태양빛이 비추었다. 그리고 이 태양빛과 함께 찾아온 여러 신들이 거대한 석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제우스', '헤라클레스', '아폴론', 독수리 형상인 '카라쿠스', 사자 모습인 '아슬란', 그리고 코마제네의 여신인 '포르토나'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2000년 동안 이곳에서 코마제네 최고의 왕이었던 안티오크의 무덤을 지켜 왔다. 그러니까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바윗덩이들이 바로 이러한 신들의 두상이었던 것이다. 개중에는 안티오크 자신의 모습도 끼어 있다. 이러한 신상들은 애초에는 무덤 앞에 20여개의 바위들로 조합한 거대한 모습으로 가지런히 서 있었는데 언제인가 있었던 지진으로 인해 이렇게 두상들만 떨어져 나와 땅바닥에 뒹굴게 된 것으로 밝혀져 있다. 아직도 무덤 앞에 가지런히 남아 있는 몸체들이 그걸 잘 말해 주고 있다. 두상들의 크기만 해도 2m 정도이고, 가장 큰 신상은 제우스상인데 전체 무게가 91톤이나 된다고 한다. 이러한 신상들은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뿐만 아니라 무덤의 뒤편, 즉 태양이 지는 서쪽에도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아침에는 동쪽을, 늦은 오후에는 석상들이 석양빛에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서쪽에서 여러 신들로부터 코마제네 왕국 시절의 전설을 듣게 된다면 이 넴루트 산 등정의 최고의 맛을 느끼게 된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는 수수께끼 사실 이 넴루트 산정에 이토록 엄청난 석상들이 나뒹굴고 있는 고분이 있다는 것을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다 1881년 오스만투르크 시절의 지질학자들이 이 넴루트 산의 지질조사에 나섰다가 우연하게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계속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가, 1953년 미국 고고학계에 의하여 어느 정도 그 수수께끼는 풀렸다. 밝혀진 바에 의하면, 고대 코마제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비명과 비문을 남기려고 해 왔다. 그래서 이 안티오크의 자갈 무덤과 석상들을 만드는데 대략 12년이 걸렸으며, 동원된 인원이 엄청날 뿐만 아니라 수천 명이 공사 중 죽었다는 사실이다. 자갈 무덤의 높이가 75m였으나 계속 흘러내려 현재는 50m정도다. 또 각 두상이나 발판 등에 한 변의 길이가 5cm정도의 네모난 구멍이 깊이 7cm 정도로 뚫려 있는 것으로 봐서 이곳에 바를 끼어서 들어 올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자갈 무덤 또한 처음에는 모래로 봉분을 만드는 것에서 헬레니즘 시대에 접어들면서 코마제네 왕가에 의해 처음으로 채택되어 거대한 조각상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것들은 많다. 특히 이 고분의 주인공인 안티오크에 대한 것은 고분 동쪽 비문의 기록에 의해서 코마제네 최고의 왕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페르시안, 어머니는 마케도니아 사람이었다는 것뿐이다. 이것은 당시 코마제네 왕국은 동으로는 페르시아, 서로는 마케도니아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족의 딸들을 양쪽으로 결혼시켜 가면서 평화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지만 안티오크가 언제 태어났고, 얼마동안 왕위에 머물렀으며,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렇다 보니 많은 고고학자들이 이 무덤 속을 궁금해 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 실시한 것이 전자탐사다. 이 전자탐사는 이곳뿐만 아니라 코마제네 왕국의 두 번째 수도였던 '에스키 칼레'에 있는 안티오크의 아들 '카라쿠스'의 무덤에서도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의외다. 카라쿠스의 무덤 속에는 뭔가 들어있는 것으로 나왔으나 정작 이 안티오크의 무덤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도굴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공식적으로 발굴하기 위해 자갈을 퍼내기 시작한 적이 있었는데 퍼낼수록 계속 위쪽에서 자갈들이 흘러내리기 때문에 중도 포기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일까. 이것 또한 수수께끼로 남는다.
지난 호에서는 변강쇠와 옹녀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함양과 남원 지역의 장승을 찾아갔었지요? 이번 호에서는 돌장승을 중심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돌은 나무에 비해 내구성이 뛰어나기에 처음 조성 당시의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게다가 일부 장승은 조성했을 당시의 날짜를 기록해 두어 장승의 변천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하지요. 그에 반해 나무장승은 일정한 시간을 두어 교체를 해야 하기에 장승을 만드는 사람에 따라 저마다 개성을 뛴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장승에 대한 자료를 뒤지다가 다음 ‘장승코’라는 시를 찾아내곤 그 여운이 진하게 남아 소개하고자 합니다. 예로부터 코는 남성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돌부처의 코를 갉아 마시면 득남한다는 속신(俗信)을 갖고 있었지요. 그런데 1931년 7월 1일자 동아일보 문예란에 박 금이라는 사람이 쓴 시에서 장승의 코는 다른 용도로도 사용이 된 듯합니다. 장승코 - 洪原아리랑 朴 錦 낙태약 된다고 저 장승코를 어제 밤 비온 뒤 또 글거갔소 오목오목 들어간 고무신 자국 키 작은 여자가 발버팀쳤소 우뚝하던 그 코가 없어지고도 그 자리가 한 치나 패어드러났네 캄캄한 밤중타서 찬칼을 품고 저 장승 코 베려 달려들 때에 약한 맘 얼마나 발발 떨었노 아니다 대답하지 그 처녀아기 야심한 밤, 두려운 맘으로 장승 곁으로 가 작은 키로 발돋움하며 장승코를 긁어댔을 그 상황을 떠올려 봅니다. 얼마나 긴박한 상황이었기에 오죽했으면 장승에게 달려들었을까요. 장승이란 산신, 성황당, 당수나무, 돌탑, 솟대 등과 함께 당당한 마을 지킴이인데, 그 장승코를 베고 긁고 하다니요. 키 작은 그 여자는 그의 저주에 겁먹으면서 얼마나 몸서리쳤을까요. 하지만 그는 주먹만 한 자신의 코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왕방울만한 눈으로 내려다보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그녀를 보듬고자 했을 겁니다. 발악 한 번 하지 못하고 벅수같이 그냥 그 자리에 우두커니 그 자세로 서서 ‘그려, 그러면 내 몸뚱이라도 주마’ 그러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코를 베이고도 모른 척하는 그 녀석의 넉넉함에 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돌장승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벅수 같다’는 표현처럼 푼수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석공이 장승을 만들 때 더 무섭게 표현하기 위해서 애쓴 흔적이 역력하지만 결국 그 석공 또한 민초의 여리고 착한 마음을 가졌을 터인데 그 심성에서 만들어진 무서움의 정도가 과연 얼마만큼이나 표현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네 장승은 무섭고 화난 모습이 오히려 어색해 보일 정도로 친근할 때가 많습니다. 저래 가지고 어떻게 잡귀니 재액을 쫓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까지 합니다. 그런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어떤 이들은 장승의 모습이 마치 우리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닮아서 그렇다고들 이야기하고, 어떤 이들은 농사만 짓고 살던 순박한 민초들이 아무리 매섭게 눈썹을 치켜 올리고 한들 결국 드러내지 않는 웃음을 띠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서양의 악마는 근본적으로 악에 가득 찬 존재입니다만 우리에게 있어서 잡귀나 재액은 어쩌면 적당히 잘 대접하여 원한을 풀어주어 타협점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융통성이 있기에 악의 근원인 서양의 악마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장승을 영문으로 ‘Devil Post'라고 표현하는 것은 서양식 악마의 개념이 강조된 것 같아 적절치 않다고 보아집니다. 하여튼 얼굴을 제아무리 무섭게 조각하고 몸집에 칼을 채우고 한들 장승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장승의 주된 기능을 알리면서 그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몸뚱이에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호법선신(護法仙神),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등이 적힌 명문(銘文)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이 명문을 통해 하늘에서나 땅속, 동서남북 어느 곳에서나 빈틈없이 한 공동체를 지키는 늠름한 장군이나 역사(力士)로서의 지위를 부여받게 되지 않았을까요? 사찰의 돌장승 남원 만복사터는 김시습의 금오신화 중 만복사저포기의 무대가 되는 곳입니다. 이 절터에 가면 마치 목을 옥죄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얼굴과 목, 어깨 일부만 드러내고 나머지 몸통이 땅에 묻힌 채 길가에 방치되다시피 한 돌장승이 한 점 있기 때문입니다. 얼굴 부분만으로 보아서는 사찰의 금강역사로 볼 수도 있지만 발굴 결과 드러난 일자형 몸통으로 보아 장승으로 보는 시각이 합당할 듯합니다. 땅에 묻힌 채 하루 종일 자동차 매연을 마셔야 하는 그를 바라보고 애틋함을 갖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비록 그런 열악함에도 볼에 탄력이 넘치고 퉁방울을 치켜떠서 응시하는 그 당당함은 만복사 넓은 절터를 수호했을 과거의 영화를 떠올려 주기에 충분합니다. 곶감과 자전거로 유명한 상주 남장사 석장승은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임진구월립(壬辰九月立)’이라는 명문이 남아 있어 남장사 극락보전의 현판과 대조하여 조선 순조 32년(1832) 혹은 고종 29년(1892)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코에 비뚤어진 입, 가분수 머리에 좌우에 귀, 쭉 삐져나온 이빨 두 놈까지 달린 이 장승을 보면 누구나 투박하고 친근한 정감을 갖게 됩니다. 그와 나란히 서 있었을 ‘상원주장군’은 어디에 있을까요? 서울 안국 전철역에서 내려 인사동으로 오다 보면 인사동 거리 입구에 장승 두 기가 서 있습니다. 서울 한 복판에 서 있는 이 장승은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와 인사동과 관훈동 지역주민의 평안과 발전을 기원하기 위해 1988년 6월 18일에 세운 것으로 나주 불회사 입구 돌장승을 모델로 제작한 것입니다. 불회사는 절집으로 들어가는 숲길이 매우 아름다운 곳입니다. 불회사 석장승은 중요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오른쪽 남장승에 하원당장군이라 적혀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남장승은 상원주장군으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인데요. 또한 누군가 ‘下’ 자를 ‘正’ 자로 바꾸어 놓은 흔적도 보입니다. 왼쪽 여장승에는 주장군이라는 명문이 남아있는데 이는 상원주장군을 줄여 이름붙인 것입니다. 콧등과 미간에 주름이 가득하고 잇몸이 쭈글쭈글한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푸근하게 느껴지는 장승입니다. 불회사 돌장승을 만나기 전 근래 새로 지은 일주문 근처에도 수많은 나무장승이 각양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회사 돌장승과 가까운 운흥사 터에도 돌장승 두 기가 남아 있습니다. 불회사 돌장승과 비교해 봅시다. 대개 장승은 오른쪽이 남자 장승이 왼쪽이 여자 장승입니다만 이곳은 남녀장승의 위치가 반대입니다. 또한 불회사와는 달리 남장승은 상원주장군으로, 여장승은 하원당장군으로 불립니다. 비로소 제 이름을 찾은 것입니다. 불회사 남장승의 수염이 한 줄기로 길게 늘어서 있는 반면 이곳의 남장승은 수염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습니다. 여장승인 하원당장군의 뒷면에 강희 58년(1719년)이라는 명문이 있어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어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두 장승 모두 안경을 쓴 듯 굵은 테를 둘렀고 특히, 턱과 입 부분이 움푹 들어가 불회사 장승, 정읍 원백암 마을 장승과 함께 대표적인 할머니, 할아버지 형 장승이라 하겠습니다. 장승 바로 앞에는 성혈바위가 자리하고 있어 장승과 함께 기자(祈子)를 향한 민초들의 염원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경남 창녕 관룡사 돌장승은 단정하고 투박한 멋이 우리나라 돌장승 중에서도 최고로 꼽을 만합니다. 왼쪽의 장승은 벙거지 모자를 쓴 듯한 형태에 얼굴만으로는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돌하르방의 이미지가 느껴지고 오른쪽 장승은 눈도 동글, 코도 동글, 얼굴도 동글동글합니다. 모두 명문은 없으며 다문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장승은 지난 2003년 태풍 매미로 쓰러져 있던 것을 군청에서 흙으로 덮어두었는데 누군가가 훔쳐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한 달 가까이 노력한 끝에 절도범들이 군청에 전화를 해 충남 홍성군 폐 공장에서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원래 위치보다 더 위에 옮겨 세웠습니다.[PAGE BREAK] 미륵, 裨補神으로 다가온 그들 장승은 미륵신앙으로도 발전하고 나아가 문무인석과 닮은 형태도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곳곳에서 장승신앙과 불교신앙이 결부되어 미륵으로 불리는 곳이 많습니다. 절집에서 볼 수 있는 미래불인 미륵불과 달리 장승형 미륵은 질박하며 자비스럽고 친근하게 우리를 맞이합니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강댕이미륵불은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원래 위치에서 상류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이 장승은 서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역로에 위치하여 안전운행을 위한 의도로 세웠다고 보기도 하고 보원사의 비보장승으로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오른쪽 팔은 가슴까지 올리고 왼쪽 팔은 배까지 올리고 있으며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습니다. 전북 익산 동고도리에 있는 보물 제46호인 고도리 석불입상은 명칭은 석불이지만 흔히 수구막이라고 불리는 장승에 속한다고 봅니다. 중건비석의 내용에 ‘그 형(形)이 불(佛)과 같고’, ‘옛 사람들이 처음 세울 때에 수문(水門)의 허(虛)를 막기 위함이었다’는 내용이 있어 풍수지리상 세워진 비보장승으로 분류됩니다. 100m정도 거리를 두고 사다리꼴 모양의 돌기둥에 2구의 석상이 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전남 화순군 화순읍 대리 석불입상은 높이 350㎝의 돌기둥을 사각형으로 다듬어서 전면에 얼굴 부분만 돋을새김 하고 나머지 신체부분은 선각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육계나 삼도와 같은 불상의 특징은 볼 수 없고 대신 넓적한 코, 부라린 눈 등 석장승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조선후기 불교와 민간신앙의 혼합된 유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합천군 삼가면 원금마을 미륵불은 마을 입구 냇가에 자리해 있는데 아들을 낳고자 하는 강씨 집안에서 치성을 드렸더니 소원을 잘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수년 전 이 미륵불 앞으로 도로가 나면서 사람들이 미륵불 앞 돌탑을 없애버렸다는데 그 해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합천 묘산면 가산리 장승은 마을 입구에 한 쌍, 고갯마루에 한 쌍이 자리하고 있어 한 곳에서 네 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요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된 통영 문화동 벅수는 마을의 전염병과 액운을 빌기 위한 비보장승으로서, 동남방이 허하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1906년(고종 10년) 세워졌습니다. 토지대장군이라는 명문은 비보장승임을 말해줍니다. 우리나라 돌장승 중에서 유일한 채색 장승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U자형으로 벌린 입과 입 밖으로 솟아난 두 개의 송곳니가 요물스러운 귀신을 막아내는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벅수를 보면 다른 돌장승과는 달리 왠지 음습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장승의 색채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관모와 눈썹, 귀, 세 갈래로 갈라진 턱수염은 검은색으로 치장되었고 얼굴과 몸통 뒷부분은 붉은빛이 감돌고 있습니다. 다른 돌장승들이 육안으로 형체가 잘 구별되지 않지만 이곳은 눈, 코, 이빨, 잔주름까지 훤하게 드러나는지라 그런 기분이 더 강하게 드는 듯합니다. 양쪽의 송곳니도 유달리 커 보이고 붉은빛의 얼굴은 처용설화에 나오듯이 귀신을 쫓기에 충분하리라 생각됩니다. 대개의 장승이 우락부락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울산 언양벅수의 경우는 색다릅니다. 한 마디로 부라린 눈, 우뚝한 코, 큰 입에 튀어나온 이빨 등 돌출된 형태와는 전혀 거리가 먼 수줍은 새색시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입도 있는 둥 마는 둥 육안으로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윤곽으로나마 눈과 코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원래 이 벅수는 돌다리로 쓰였었는데 뒤늦게 벅수임이 밝혀진 것입니다. 중원고구려비가 빨래판으로 쓰였던 것처럼, 이 벅수도 기묘한 과거사를 갖고 있습니다. 한편, 대전 동구 비룡동 지하여장군은 하트형의 얼굴에 여느 장승과 다른 자그마한 코에 살풋 웃음 띤 얼굴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충북 음성 원남면 마송리 정계대장군(淨界大將軍)은 세상을 정화하고자 하는 염원을 명문으로 담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방학에 광화문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주최한 교원직무연수를 5일간 받았습니다. 연수기간 민속박물관을 쉼 없이 돌아다니면서 인상 깊었던 점은 바로 외국인이 눈에 띄게 많이 찾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제로 박물관 측의 안내에 의하면 용산에 재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경복궁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외국인이 민속박물관을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서양인들이 처음 우리나라를 찾았을 때 그들은 장승을 일컬어 ‘조선의 우매한 민중들의 우상숭배’로 폄하하였지만 이제 그들은 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서 있는 장승을 보며 그 속에서 한국인을 찾고,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느끼고자 합니다. 한 나라의 문화가 경쟁력이 되는 이 시대에 박물관에서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장승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다음 호에도 장승답사는 계속됩니다. | 울산 옥현초 교사
서울지역 초․중․고생 가운데 35.9%가 정신장애를 겪고 있으며 13.2%는 2가지 이상의 정신장애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는 최근의 보도는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3명중 1명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문제치고는 간단치 않다. 이 같은 결과는 서울대병원 소아정신과와 서울시가 지난해 9~12월 초․중․고교 19개를 무작위로 선정해 2672명을 대상으로 한 역학조사에 따른 것이다. 학생들의 정신장애는 특정공포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적대적반항장애, 틱장애 순이었다. 특정공포증은 천둥․어두움․벌레 등 특정 대상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이고, ADHD는 지나치게 부주의 하고 학업에 몰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어른에게 사사건건 반항하는 것을 적대적반항장애라고 하며, 끊임없이 눈을 깜빡거리거나 이상한 소리를 계속 내는 것이 틱장애다. 남학생의 정신장애는 ADHD, 여학생의 정신장애는 특정공포증이 많았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고 인터넷을 많이 하는 학생은 그렇지 않은 학생에 비해 ADHD, 적대적반항장애, 품행장애(절도․가출․결석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장애), 조증(지나치게 즐거워하는 장애) 등이 더 심한 것으로 조사됐다. 교사들이 흔히 ‘골치 아픈 녀석’으로 치부(置簿)하는 그 녀석들의 ‘골치 아픈 행동’을 전문가들은 정신장애라 한다. 멀리 있는 강아지를 보고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거나, 공부를 하면서 계속 다리를 떨어대는 것도 일종의 정신장애다. 서울대병원 조수철 교수는 “ADHD에 적대적반항장애, 품행장애가 병행되면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있다”면서 “대부분의 부모나 교사가 학생들이 심각한 정신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걱정했다. 학생들에게 많은 ADHD는 충동적․무절제․과다행동이 나타나면서 소근육 협응이 안 되고, 학습장애와 정서불안이 나타나는 질병이다. 발병 원인은 전두엽(frontal lobe) 기능상실 정도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학령기 아동의 5% 정도가 ADHD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는 한 반에 두 명꼴이다. 약물치료만으로도 나아질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뇌파훈련과 함께 식이요법 등의 비약물치료도 받게 된다. 전문가들은 ADHD를 앓고 있는 학생들은 교사가 쉽게 구분할 수 있으므로 각별한 관심을 갖고 돕고자 하면 상태가 크게 호전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지난달부터 본지에 ‘뇌 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한 정신과 전문의 박형배 박사(마인드메디 원장)는 “되도록이면 교사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게 하고 수업 중에 시선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흐트러지는 집중력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ADHD 학생들이 증가하는 만큼 교사들의 역할도 커지게 됐다. 두 손 두 발 다 들게 하는 한두 명의 골치 아픈 아이, 바로 치료가 필요한 아이다. 가장 가까이서 그들을 지켜보는 교사들의 관심과 사랑이 1차적인 치료가 될 것이다. | 이낙진 leenj@kfta.or.kr
전제상 | 경주대 교수 평가는 인간이 조직의 일원으로 생활하는 한 어디서나 수시로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활동으로 특정 대상에 대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을 뜻한다. 교원평가는 본질적으로 사람의 사람에 대한 평가, 즉 주관적 가치를 전제로 판단하는 것이므로 아무리 타당한 평가기준을 새롭게 설정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나름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원평가를 둘러싼 공정성, 객관성, 신뢰성 을 확보하기 위한 논의와 논쟁이 치열하게 진행되어 왔다. 지난 8월 11일 대통령자문 교육혁신위원회는 교장(50%)과 교감(50%)이 교사를 평가하는 현행 시스템을 교장(40%), 교감(30%), 동료교사(30%)가 교사를 평가하는 개선방안을 확정․발표하였다. 당초 교육혁신위원회가 교사평가에 학생 및 학부모(10%)를 참여시키는 개선방안을 제안하였다가 교육계의 거센 반발 등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철회하였다. 현행 교사근무성적평정은 1964년부터 지금까지 교장과 교감만이 참여할 뿐 다른 이들의 참여를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폐쇄적 운영시스템 때문에 교사평가의 공정성과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평가시스템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이 줄기차게 진행되었지만 교육공동체간 합의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교사평가과정에 교육공동체, 특히 학생 및 학부모가 참여함으로써 평가의 공정성과 객관성이 일정 부분 향상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평가의 신뢰성마저 완전하게 담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사평가는 교사의 자질과 태도를 비롯한 직무수행 능력과 과정, 그리고 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고도의 가치판단 활동이다. 교육공동체가 교사를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교사에 대한 정보를 함께 공유하면서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교육활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식견을 갖췄을 때 평가하는 사람이나 평가받는 사람이 평가의 공정성, 객관성, 신뢰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다. 물론 교육공동체의 일원인 학생 및 학부모가 교사평가과정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교육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가진다. 특히 학부모는 학생 교육을 위임한 자로 학생의 학습권이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 지를 확인할 권리가 있으며, 학생은 교사 교육의 직접적인 수혜자로 교사평가에 참여하는 것이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교사평가에 있어서 누가 평가자로 설정할 것인 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교사평가의 결과는 특정 교사의 현재와 미래 행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이 교사평가의 결과가 주로 승진에만 활용되는 시스템 속에서는 동료평가, 학부모 및 학생평가의 결과가 일정 비율로 승진점수에 반영된다면, 해당교사들의 평가결과에 대한 공정성과 신뢰성 담보장치에 대한 요구가 빗발칠 것은 당연하다. 만약 이러한 교사평가결과에 대한 공정성과 신뢰성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없으면 학교현장은 교원승진을 둘러싼 막심한 갈등과 혼란이 발생될 수밖에 없다. 물론 교사평가에 대한 교감과 교장에 의한 폐쇄적인 평가방식에서 벗어나 동료교사, 학생 및 학부모에게 평가참여의 기회를 확대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나, 교사근평의 결과가 승진에 반영된다는 현실적인 점들을 고려한다면 학생 및 학부모의 교원평가는 참고자료로 활용되는 수준에 국한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선진국의 경우에도 평가자는 평가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역량을 가진 자로 평가결과에 대한 책임도 동시에 질 수 있는 사람에 국한하여 참여하고 있다. 미국교육연구소(Educational Research Service)가 909개 교육구의 교원평가방식에 대해 조사한 결과, 관리자 평가 99.8%, 동료평가 6.0%, 학생평가 3.0%, 학부모 평가 1.0% 등을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조사 결과는 미국의 경우에 교사평가의 결과가 교사의 재임용과 보수 및 승진 등에 직결되는 민감한 문제로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교사평가시 평가자가 잘못된 정보와 판단에 의해 특정 교사에 대한 평가점수가 낮아 해고되거나 연봉 등이 삭감될 경우에 해당 교사는 평가자 및 교사평가위원회를 대상으로 각종 소송으로 이어지게 된다. 교사의 교육활동에 대한 법정의 판결은 일차적으로 평가자 등이 특정 교사의 학생교육 과실에 대한 책임을 입증을 해야 하는 등의 절차를 가지며, 이 과정에서 교사의 교육활동 과실에 대한 인과관계 불명료성을 인하여 교사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선진국들이 학생 및 학부모의 교사평가에 참여하는 방식은 대부분 교사에 대한 만족도 정도를 알아보고 이것을 교사의 교육활동에 참고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것은 교사의 교육활동에 대한 평가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지적인 가치판단의 활동으로 평가의 공정성과 신뢰성 등의 중요성을 고려한 결과이다. 평가에 있어서 공정성과 신뢰성을 상실한다면 평가로서의 존재 가치가 상실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평가는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전문적인 방식으로 평가할 때 평가 존립의 의의를 가진다는 기본을 인식한 결과이다. 따라서 새로운 교사평가시스템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외국의 사례를 무분별하게 적용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장 교육실정에 어느 것이 부합되는 지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요구된다. 즉, 교사다면평가시스템의 장․단점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더불어 교사다면평가 설계시 고려사항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 지, 그리고 평가자를 어떻게 구성하고 평가자의 비중은 어떠한 방식으로 할 것인지, 또한 평가요소와 평가척도는 무엇으로 할 것인지, 평가결과의 활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에 대한 세부적인 검토가 뒤따라야 한다.
몽골에 갔었다. 남(南) 고비 사막의 대평원을 가서, 몽골 원주민들의 전통 주거인 겔(GER)에서 머물렀다. 겔은 중국식 이름으로는 ‘파오’라고 불린다. 원통형 본채에 원추형 지붕으로 된 몽골 유목민의 전통 가옥이다. 겔에서 지내다보니 어린 시절 살던 초가집 생각이 난다. 자연 그 자체를 두르고 살았던 점에서 겔과 초가집은 통한다. 몽골 평원의 대자연은 외경스러웠다. 우러러보면 밤하늘에는 살찐 별들이 보석 밭을 이루고 있었다. 별들은 제 광채를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대지에 총총 쏟아져 내릴 듯 했다. 다음 날에는 저물 무렵 대평원의 아득한 지평 저쪽으로 거대한 비구름의 기둥이 옮겨가는 모습을 보았다. 땅과 하늘을 수직으로 잇는 거대한 구름 기둥이 서서히 옮아간다. 백리 밖 비 내리는 모습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장관이다. 어둠이 내리자 구름 속에서 번개가 쳤다. 그러자 구름 기둥은 이내 장엄한 불기둥이 되었다. 먼 천둥소리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소년처럼 감흥이 일었다. 나의 감관이 경험한 대자연이 너무 황홀하였다. 주체하기 어려웠다. 보들레르의 말이었던가. ‘자연은 하나의 신전(神殿)이다.’는 말이 실감났다. 겔(GER) 안으로 들어 와 나는 엽서를 썼다. 젊은 한 시절 같은 직장에서 친했지만 어느새 무심하게 된 친구에게 엽서를 썼다. 자주 대하지만 이미 황홀한 대화가 증발된 일상의 친구들에게도 엽서를 썼다. 이럴 때 편지쓰기는 주체할 수 없는 진실의 황홀경을 나의 일상 속으로 잡아두는 과정이다.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먼 곳에서 편지쓰기’만한 것이 또 있을까. 겔의 지붕 위로 어느새 가느단 빗방울 소리가 듣는다. 사춘기 어느 해 가을, 가슴 설레며 그 누구에게 편지를 썼다. 사랑의 마음을 어렵사리 한 장의 편지로 담으며, 그런 마음조차도 차마 부끄러워, 내 감정을 직접은 토로하지 못하고, 내 마음을 남의 시에 의탁하여 전하고자, 온갖 시집을 다 뒤져, 정지용선생의 시 하나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편지의 말미에 정성스레 이 시를 적어 넣었다.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내 영혼 안의 고운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사람 바다에서 솟아올라 나래 떠는 샛별 쪽빛 하늘에 흰 꽃을 달은 고산식물(高山植物) (그대는)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그대는)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그대는) 홀로 어여삐 스스로 한가로워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 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며지며 구비 구비 돌아나간 시름의 황혼 길 위 나는 바다 이 편에 남겨진 그의 반임을 고히 지니고 걷노라. (정지용, ‘그의 반’ 1935) 연애편지 쓰기는, 학교가 의도적으로 가르치는 활동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개인이 경험하는 총체를 교육과정으로 보는 경험주의 교육철학자들의 눈으로 본다면, 그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교육과정이다. 쓰는 동안, 나의 모든 지식이 순종하고, 나의 모든 열정이 다 무릎 꿇고, 나의 모든 감정이 길들여지는, 그리고 나의 모든 도덕이 아름답게 자극받는, 그런 총체적 경험의 마당이 곧 연애편지 쓰기의 마당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메아리 없는 편지이기 십상이다. 상대의 무심함에 쓰린 상처를 감내하며, 세상에 대한 면역을 키우던 첫 계절이 연애편지 쓰던 학창시절 아니었던가. 휴대폰이니 채팅이니 하는 것들이 생겨나면서, 속 깊고 은근한 편지들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러면서 사람들 가슴의 진정성도 사라져 버렸다. 그 진정성 때문에 아름답기까지 하던 사람들의 부끄러움도 사라져 버렸다. 요즘의 사귐과 사랑은 그저 무수한 휴대폰의 수다와 부질없는 감정 확인으로, 쉽사리 이합집산(離合集散)한다. 도처에 소통이 과잉이지만, 오히려 진정한 소통은 빈곤해지는, 이 ‘가벼움의 시대’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소외(疏外)가 걸려 있다. 말없이 전해 받고 오래도록 따뜻한 온기로 남아 있던 편지글의 여운과 감촉을 추억해 보자. 우리들은 안다. 드러내자니 부끄럽고 안으로 감추어 두자니 안타깝기 그지없던 ‘진정한 내 마음’이 마지막 인내하는 그 끝자락에서 우리는 마침내 편지를 쓰지 않았던가. 편지는 그런 웅숭 깊은 삶의 맛을 우러나게 한다.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 ‘펜팔(pen pal)’이란 말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모던(modern)하고 매력 있게 들리는 말이었던가. 1970년대 당시 유명한 잡지나, 농촌 계몽용 잡지, 대중잡지 등에는 펜팔 난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 실제로 펜팔을 하는 친구들을 발견할 때면 부럽기도 하고,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펜팔에는 늘 전설이 따라 다녔다. 내용은 이러하다. 참으로 순정하고 순진하여 오히려 통속성이 드러나는 이야기이다. 어떤 청년이 마음 고운 아가씨와 펜팔을 하였다. 얼굴도 모른 채 여러 해를 펜팔로 사귀며 그 고운 마음씨와 성격에 깊은 흠모의 정을 쏟아 장래를 약속하자고 하게까지 되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 상대 아가씨로부터 자기를 이제 그만 잊어달라는 편지가 왔다. 그 간 자기에게 사랑과 정을 베풀어 준 것에 대해서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라며,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 왔더란다. 그런데 자기를 잊어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청년이 너무 당혹스러워 그 아가씨의 펜팔 주소지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그 아가씨의 마을에 가서 알아보니 그 아가씨는 신체마비로 운신이 어려운 몸이었다는데, 얼마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었다. 유서에는 한 줄의 글이 적혀 있었다. “나의 청춘은 행복했었다.”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펜팔이란 것이 더 멋있고 고상해 보였다. 생각하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참으로 삭막한 일이다. 전설 같은 이야기 앞에서도 고상한 감동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이야기의 상투성을 먼저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이가 들수록 황홀한 정서를 담은 편지를 쓰기란 점점 어려운 일인가. 편지쓰기가 가지는 원형의 이미지 가운데는 진정성의 이미지가 스며 있다. 편지는 전화로 불쑥 하는 말과는 다르다. 격을 갖추는 글이어야 한다는 데서 오랜 생각의 축적과 시간의 준비를 요한다. 그것을 일러 우리는 ‘심사숙고’의 과정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내가 그 누구를 향하여 심사숙고한다는 것이 주는 진정성, 누군가 나를 향하여 자신의 감정과 정신 전체를 모아 심사숙고해 준다는 것, 이것이 편지쓰기의 숨어 있는 메커니즘이다. 누구나 사춘기 시절, 마음에 살아 있는 편지 한 장이 있을 것이다. 심각한 오해의 끝자락에서 친구가 보내오던 편지 한 장, 세상과의 불화를 온통 혼자 걸머진 듯 저항의 표정으로 길을 떠나며 불쑥 던져 놓던 편지 한 장, 토스토에프스키의 무거운 독서에 심취하며 온갖 지적 허영과 오만으로 난해한 의식에 스스로를 분열시키던 편지 한 장, 밤이 하얗게 새도록 갈증 속에서 사랑의 마음을 써 놓고는 마침내 아침에는 부치지 못하는 편지! 우리는 편지쓰기의 공간을 통해서 모순의 현실에 대한 고뇌를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그 고뇌를 통해서 우리의 생을 성숙시킨다. 그런 편지를 떠올리노라면 지금도 감회가 아득하게 어리어 온다. 진정을 다하는 편지의 언어는 늘 미더웠고 관용이 넘쳤다. 눈앞에 현존(現存)하지 않는 상대를 향하여 마음의 눈으로 끝없는 응시를 함으로써 비로소 얻어내는 한 구절의 메시지! 아,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에 대한 믿음’과 통하는 것이었다. 한 세대 전만해도 그렇게 모던(modern)해 보이던 ‘펜팔’이란 말이 이제는 구시대의 문화 유물처럼 되어간다. ‘일선에 계신 국군 아저씨들에게’ 쓰는 그 형식적인 편지쓰기마저도 이제는 사라졌다. 새로운 의사소통의 습관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겠지만, 편지 문화의 한 가운데서 우정과 사랑을 쌓았던 우리들에게는 아쉬운 감회가 아니 일어날 수 없다. 기성의 세대라면 누구에게나 가슴 아린 옛 편지의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 못 보낸 편지들을 정갈하게 다시 써 봄이 어떠하겠는가. 아니 세대를 막론하고 보내지 못한 마음의 편지들이 있을 것이다. 상대가 너무 소중해서, 내 마음의 풍경이 오묘해서, 그 밖에도 내 안의 모순을 감당하지 못해서 보내지 못한 편지들을 이 가을에 어찌 할 것인가. 세월이 곰삭을수록 옛정은 더욱 깊어지는 법.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왜 그런 노래도 있지 않던가. 나의 몽골 여행은 4박 5일의 짧은 일정이었으므로, 몽골 대평원에서 쓴 편지보다 내가 먼저 귀국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슴지 않고 몽골에서 그 편지들을 부쳤다. 나의 감회가 황홀하였고, 그것을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소중하였으므로, 시간 형편에 상관하지 않고 나는 몽골에서 그 편지들을 부쳤다.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가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릴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편지보다 내가 한국에 먼저 돌아갈 텐데. 뭐.’ 이 고정관념이 편지쓰기를 방해한다. 한국에 먼저 돌아오는 것과 편지를 부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같은 공간에 같이 있어도 황홀경의 소통은커녕 대화 한 마디 없는 것이 우리들 삶의 면모이다. 하기야 진정성이 촌스러워 보인다는, 잘난 현대인들도 없지 않은 세태이니까. 귀국하여 여러 날이 지났을 때, 나의 수신인들은 편지 받은 즐거움을 내게 반갑게 전해 주었다. 그 전언들로 인하여 나는 몽골에서의 편지쓰기보다 더 황홀한 경험을 누릴 수 있었다. “이 디지털 시대에 무슨 아날로그 원조(元祖)같은 육필 엽서를 받다니.” “무슨 과거로부터 받은 편지 같아서 충격이 참신했다네.” 얼굴 못 본 지가 족히 2년도 넘은, 후덕하고 마음씨 좋은, 나의 옛날 직장 친구, K여사는 이렇게 말한다. “몽골서 보낸 엽서 받으니, 뭐랄까, 하여튼 내 일상이 확 깨어나더라. 마치 늘 무덤덤하게 지내던 이웃집 총각에게 느닷없이 프로포즈라도 받는 듯한 분위기라고나 할까. 그 분위기 한 사흘은 가더라. 고맙다. 난 그런 생각도 못했는데. 우리들 일상이란 것이 참 빤한 것인가 봐.” 가을이 깊어간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옛날 노래 가사가 와 닿는다. 순진하여 통속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그리 나쁠 것은 없으리라. 그냥 영악하다는 평판에 갇히는 것보다야 낫겠다. 또 통속적이어서 순진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만은 않으리라. 이 깊어가는 가을에 조용히 스스로에게 권유해 보기로 하자.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경인교대 교수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충돌할 수밖에 없는 두 세력 문제(文帝)는 북주(北周)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아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면서 국호를 수(隋)로 삼았다. 이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국호였다. 서기 589년 문제는 마지막 남조 국가인 진(陳)을 멸망시키고 무려 370년 만에 중국을 재통일했으나, 역사가 주는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진나라의 시황제와 거의 비슷한 길을 걸었다. 문제는 짧은 기간에 통일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지는데 주력하여 관료의 등용문인 과거제를 비롯하여 본격적인 율령국가 체제를 완성시켰다. 중국에서 과거제도는 청나라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약 1300년 간 지속되었다. 604년 양제(煬帝)도 부황(문제)의 국가건설 의욕을 그대로 이어받아 대규모 건설 사업을 강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전체 길이 1800㎞에 달하는 대운하를 비롯한 여러 가지 토목사업이었다. 610년에 완공된 대운하 덕분에 중국에서는 물류혁명이 일어났다. 즉, 항저우[杭州]에서 베이징[北京]까지 선박수송이 가능해졌으며 강남의 풍부한 쌀을 비롯한 곡물을 화북지방까지 수송할 수 있어 중국을 명실상부한 통일국가로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대규모 토목사업은 백성들의 고통을 수반하므로 욕을 먹게 되어 있다. 공사장에 나가서 노역을 해야지, 세금은 세금대로 내야지, 정말 죽을 맛이었다. 모두 양제를 비난하여 결국 수나라를 단명에 그치게 하고 정작 이익은 당나라가 보았다. 대운하를 건설하는 양제에게는 또 하나의 고민이 있었다. 왜냐하면 동북방민족(한민족과 같은 계열)이 중국의 분열시대에 힘을 쌓아 강성해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수나라도 전신이 같은 계열인 북주가 아닌가! 한 무제 이후 역대 중국 정권은 토벌작전과 동화정책으로 흉노는 사라졌으나 그 대신 돌궐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부황인 문제는 고단수 이간책을 써서 돌궐족을 동 돌궐과 서 돌궐로 분리시켜 세력을 약화시켜 놓았지만 이번에는 소수림왕 이후,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영토 확장으로 동북아시아 강대국으로 떠오른 고구려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먹지 않으면 먹힌다!' 양제는 위기감을 느꼈다. 고구려가 수나라에 결코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제 서진하여 중국을 도모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였다. 더욱이 문제 때에도 고구려의 선제공격으로 혼쭐이 난 바 있었으므로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생각했는지, 결코 만만치 않는 고구려를 상대로 무모한 군사도발을 감행하였다. 무모하게 끝난 양제의 도전 양제는 나름대로 정복 시나리오를 짰다. 즉, 대군을 동원하여 속전속결로 결판을 내되, 만약 장기전으로 이어지게 되면 대운하를 통해서 원정군의 보급을 확보하여 지속적인 작전수행에 차질이 없도록 하고 대륙과 해상을 봉쇄하여 고구려를 말려 죽이겠다는 작전을 세웠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대운하를 너무 믿었다. 611년 양제는 무모한 군사도발을 감행하였다. 중국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동원하여 침략전쟁에 나섰으나 고구려도 이미 만반의 대비를 갖추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섰다 하면 그 다음 순서는 이민족 정리였기 때문이다. 양제는 고구려가 곧 무너질 줄 알았지만, 처음부터 무리였다. 엄청난 병력의 수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을지문덕을 중심으로 치밀한 작전을 세워 전쟁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 고구려의 전략은 첫째, 대규모의 군대를 맞이해서 정면승부를 건다는 것은 무모하니 성을 중심으로 수비에 들어가서 적과 말을 배고프게 만들고 둘째, 시간이 갈수록 적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다. 적의 염탐꾼에게 아군의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보안에 각별히 유의하며 치고 빠지는 유격전술을 적절히 구사한다는 것이었다. 고구려의 작전계획은 들어맞았다. 양제가 몸소 친정을 하여 대군을 이끌고 요동성을 공략했으나 4개월이 넘도록 함락하지 못하고 들판에서 이슬을 맞으며 자야 했다. 초조해진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병력 30만을 내어주면서 평양을 신속하게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우중문 군대 이외에 수나라 병사들은 수륙양면으로 평양을 공격하는데, 손발이 맞지 않아 수군이 단독으로 공격하다가 나중에 영류왕이 되는 건무에게 전멸을 당하다시피 하였다. 수나라 육군은 당황하였다. 평양에 먼저 도착한 수나라 군대가 보급물자를 받을 수 없는 난감한 입장에 빠진 것이다. 적을 눈앞에 두고 수나라 병사들은 굶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을지문덕 장군의 차례다. 아무리 적군의 숫자가 줄었어도 대군은 대군이다. 그는 우중문의 군대를 상대로 전선을 축소하는 작전을 썼다. 넓은 들판에서 싸우면 적군에게 포위되기 십상이지만 협곡 등 좁은 장소에서 싸우면 아무리 대군이라 하더라도 분명히 앞뒤가 생기기 마련이다. 넓은 장소에 많은 사람을 풀어놓으면 '옆으로 나란히'가 가능하여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좁은 곳에서는 '앞으로 나란히' 밖에 될 수 없기 때문에 제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차례차례 맞서 싸우면 된다. 을지문덕은 적의 대군을 유인하여 치고 빠지면서 심리적으로 지치게 만들고 길목마다 병사들을 매복시키는 한편, 백성을 성안으로 대피시키고 양식을 감추고 우물까지 메워버렸다. 흥분한 우중문은 숨을 몰아쉬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여 을지문덕을 추격하였으나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우중문의 퇴각명령과 함께 을지문덕의 공격명령이 동시에 내려졌기 때문이다. 때를 기다리며 전투다운 전투를 못해 스트레스가 쌓은 고구려군은 살수(청천강)에서 수나라 대군을 몰살시켜 버렸다. 왕조는 바뀌어도 고구려만은 양제의 도전정신은 대단했다. 그 뒤로도 두 차례의 원정을 준비하였으나 백성들의 반응이 냉담했다. '정말 속없는 황상폐하, 못 말리는 황제폐하, 언제나 철이 드나'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운하 건설에 불만이었던 백성들은 무모한 전쟁준비에 반기를 들고 말았다. '사지(死地)에 들어가 고구려군의 칼에 맞아 죽거나 물귀신이 되기보다는 폭군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죽더라도 죽자'면서 '양현감(楊玄感)의 난'을 계기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618년 양제로부터 모반의 위험인물로 몰려서 지방으로 쫓겨났던 이연(李淵)이 수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점령하여 당나라를 세웠다. 시황제의 진나라보다는 조금 나아도 명이 짧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수나라를 보면 '죽 쑤어서 개준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당 고조 이연은 수나라의 제도를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 문제와 양제가 나라의 기초를 너무 잘 정비해준 덕분에 손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당 시대'가 여러 면에서 '진·한 시대'와 비슷하지만 성격은 크게 다르다. 오늘날의 국가적 의미는 수·당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진·한 시대에는 봉건적 잔재가 남아있었지만, 수·당 제국은 율령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율령은 오늘날의 모법, 즉 헌법에 해당되며 북조시대에 싹이 터서 수나라를 거치면서 당나라에 이르러 통치의 근간으로서 자리를 확고히 했던 것이다. 정관(貞觀)은 당 태종의 연호이다. 그가 통치한 23년을 역사에서는 '정관의 치(貞觀의 治)'라 하며 당나라의 번영을 표현하고 있는데, 당 태종은 내치만이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당의 세력판도를 크게 넓히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나쁜 인연을 맺었다. 당이 건국되자 고조(高祖)는 백성들의 여론을 감안하여 고구려에 대해서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냈으며 고구려 역시 당나라와 싸움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두 나라는 서로 긴장감을 풀기 위해서 포로도 교환하고 이때 당으로부터 도교가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야심만만한 태종이 제위에 오르자 사정이 달라졌다. 국내정치가 안정되자 고구려에 대해서 압력을 가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바람에 고구려가 반발하였고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요동지방에 천리장성을 쌓는 등 철통같은 경계태세로 맞섰다. 이때 고구려의 영류왕은 당과의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북수남진(北守南進)을 대외정책으로 삼았다. 이는 북으로 당나라와 평화를 유지하고(北守), 남으로는 신라를 친다(南進)는 정책이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서기 642년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당에 대해서 강경책을 썼던 것인데 당 태종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임금(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벌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패배 이후 장기 전략으로 전환 서기 644년 당 태종은 대군을 이끌고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져 있는 요동성을 공략하여 고전 끝에 함락에 성공하였으나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의 지휘 하에 고구려의 백성들과 병사들이 목숨을 건 총력전을 전개하는 바람에 두 달간의 공격을 포기하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군대를 철수시켜야만 했다. 그 후 두 차례나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그때마다 고구려에 의해서 격퇴당하는 수모 때문에 당 태종은 깊은 마음의 병을 얻어 서기 649년 '고구려'라는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눈도 감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 태종의 죽음을 계기로 고구려에 대한 당의 전략이 수정되어 속전속결의 단기전을 버리고 장기전의 우회공격으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당은 고구려의 남쪽 백제를 먼저 치는 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한편 고구려의 북수남진(北守南進) 정책에다 백제의 측면공격으로 신라는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당에 접근하였고 이것이 나중에 나·당 연합군의 결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포괄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우리 국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7세기에 이르러 한반도의 상황은 복잡한 삼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수 양제나 당 태종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한반도의 허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7세기를 기준으로 이미 삼국은 전쟁과 평화, 동맹과 적대 관계를 복잡하게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원의 통일제국으로서 삼분된 한반도를 공략한다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을 것이며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정리를 해야 한다는 절실한 시대적 요청도 작용했을 것이다. 7세기에 벌어졌던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종전의 산발적인 전투가 아닌 삼국의 총력전에 당나라와 왜국(일본)까지 개입된 국제전 양상을 띠게 되었고 결국 신라의 불완전한 승리로 삼국시대가 마감되었다. 요동과 만주, 한반도를 잇는 옛 조선(고조선), 그리고 조선의 실지회복을 국시로 삼았던 고구려는 찬란하게 빛나는 영광된 한민족의 역사이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 전제한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과거에 그러했듯이 현재도 민족의 역량을 모아 선조의 영광을 되살리겠다고….
김정호 | 서울 양화초 교사 사건은 상하이시의 한 지역에 설립된 ‘맹모당(孟母堂)’이라는 사설교육시설에서 발단이 되었다. ‘맹모당’은 의무교육기관에서 수업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국가의 의무교육이 아닌 사설교육을 실시하는 전일제 사설교육시설로,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의 고전인 공자와 맹자의 경서 암송을 위주로 하는 과거의 전통식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시작되어 현재 12명의 학생을 상대로 학부모를 포함한 4명이 교사가 운영하는 이 교육시설이 문제가 된 것은 최근 맹모당의 독특한 교육방법이 언론에 보도되고, 상하이시 교육위원회의 감사가 시작되고 난 후부터이다. 언론에 맹모당의 특별한 교육방법이 보도된 후 상하이 교육위원회는 즉각적인 감사를 실시하여 맹모당의 교육방법은 일반적인 부모가 자식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가정교육의 범주를 넘어섰기 때문에 순수한 가정교육(Home Education)도 아니고, 중국의 의무교육법의 규정을 위배하였으며, 학교설립과 관련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불법임을 지적하고, 맹모당을 즉각 폐쇄할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상하이시의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맹모당의 설립자 및 학부모들은 강력히 반발하며, 상하이시 교육위원회를 기소하는 동시에 가정교육(Home Education)의 권리에 대한 토론을 요청하였다. 이들 학부모 및 설립자는 맹모당의 교육방식은 의무교육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학부모들이 발표한 성명에 따르면 이 교육시설은 단지 가정의 자주적인 학습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국가가 규정한 학교설립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교육기관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이유로 정부에 학교설립을 허가받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이들 주장의 핵심은 맹모당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와 학생들은 서로 아는 사이로 서로 자기의 교육방식을 가지고 자신의 자식들을 교육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식 학교 교육은 아니라는 것이다. 中 정부, 맹모당 정식 교육 아니다 이와 같은 쌍방의 논쟁은 의무교육논쟁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상하이시 교육위원회 측이 주장하는 맹모당 측의 의무교육 위반 사실은 의무교육 단계에 있는 학생들의 교재와 관련해서는 국가에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의무교육단계의 사립학교들은 반드시 자금, 교실, 교사와 학생의 수에 있어 정부의 규정에 따라야 하는데, 현재 맹모당의 교육내용이나 시설, 교사 등의 질이 이러한 의무교육법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맹모당 측은 이들이 현재 받고 있는 수업의 질이 의무교육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육의 요구에 도달하고 있으며, 중국 의무교육법에는 적령아동들은 반드시 교육부문이 인가한 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고, 가정교육을 불허한다는 규정 역시 없기 때문에 이는 의무교육법 위반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은 의무교육법 제정의 목적이 적령기 아동들에 대한 교육의 보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행 학교교육에 만족을 못하는 학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보다 나은 교육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은 의무교육법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상하이시 방송국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과반수의 학부모들은 맹모당의 교육방식에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세상에서 부모보다 더 자기의 자식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고, 자녀들의 교육적 요구에 대해 이해를 많이 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학부모들에게는 마땅히 자녀의 교육을 책임져야 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학부모들은 현행 교육의 문제, 즉 현행 의무교육체계는 입시위주의 교육으로 아이들을 몰아가고, 교육 본래의 책임을 홀시하고 있기 때문에 부모들은 어쩔 수 없이 더 좋은 교육방법을 갈망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육전문가들은 학부모들이 주장하는 중국의 현행 의무교육제도의 문제점에 대체로 공감하면서도 입시교육의 문제는 정부의 교육정책과 관계가 있는 것이지, 의무교육법률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실제로 의무교육법 제1조에 의무교육과 관련하여 ‘적령기 아동, 소년의 의무교육 받을 권리의 보장, 의무교육의 실시의 보증, 국민의 소질 제고를 위하여 헌법과 교육법에 근거하여 본 법을 제정한다’고 그 목표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는데 맹모당 사건은 이러한 교육법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안학교인가, 사교육인가 결국 교육당국의 공통된 의견은 맹모당 식의 교육방법은 현행 교육기관에 의한 교육을 보충하는 교육으로 실시되어야할 것이지 그 자체가 주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맹모당 측이 그들의 교육사상대로 이 교육을 실시하려면 반드시 국가의 의무교육법과 상하이시의 유관 규정에 따라 교육부문의 학교설립조건, 교사, 학교설비, 수업의 질량 등의 방면에서 비준을 획득한 후 허가증을 받게 되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맹모당 측과 상하이 교육위원회 측의 논쟁은 상하이 교육계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관심거리로 등장하였다. 실제로 맹모당과 같은 국가의 교육기관을 대체하는 사설교육기관들은 전국적으로 여러 곳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란조우[蘭州], 시아먼[厦門], 광조우[廣州] 등에는 이와 유사한 전일제 사설교육기관들이 있으며 이들 역시 아직 합법적인 지위 및 신분을 취득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이번 맹모당과 상하이시 교육위원회 간의 분쟁의 해결 결과에 따라 전국적으로 사설교육기관의 설립을 부추길 것인지 아니면, 의무교육법에 따른 보조적인 학원으로 전락할 것인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신아연 | 호주 칼럼니스트 ‘우리 가족은 엄마 둘, 그리고 나와 동생 이렇게 네 명입니다.’ ‘우리 집에는 엄마는 없지만 아빠는 두 명입니다.’ 호주의 초등학교와 유치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재나 동화책 가운데는 이처럼 알쏭달쏭한 표현이나 문구가 이따금 등장한다. 이른바 ‘동성애 부모’를 가진 아동들의 가족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란 말 그대로 ‘어머니’와 ‘아버지’ 양친을 일컫지만 호주에서는 반드시 그런 개념만도 아니다. 즉, 부모란 양성을 가진 두 사람일 수도 있고, 어머니 두 분을 나타내거나 혹 아버지 두 분을 뜻하는 단어도 될 수 있다. 동성애 부부 사이에서 양육되는 자녀의 처지에서는 부모의 정의가 일반 가정의 자녀와는 분명히 구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호주의 가족법은 동성애자들의 혼인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동성애자들의 자녀 양육권 또한 법적으로 어떠한 보호도 받을 수 없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동성애 커플은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둘 만의 관계에 만족하는 단계를 넘어 자녀를 갖기 원하는 경우도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어쩌면 동성애 커플일수록 입양, 혹은 정자 기증이나 대리임신 등을 통해 둘 사이에 자녀를 둔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욕망이 이성애자들보다 더욱 강할지도 모른다. 지난해 호주 서부의 한 여성 동성애 커플은 약 3년간 3만 호주 달러 (한화 약 2400만 원)라는 거금을 들여 지난한 노력 끝에 정자를 기증받아 인공수정에 성공했다. 이 커플은 보통의 이성애 부부나 사실혼 관계, 심지어 미혼모조차 적용되는 의료 보조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재정적으로 큰 곤란을 겪었음에도 자신들의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로 미루어 볼 때 머지않은 미래에 호주 사회는 동성애자들의 가족 관계를 수용하고 가족 구성원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현상이 보편적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예단도 나오고 있다. 차제에 동성 부모와 그 가족들을 싸안기 위한 교육 차원의 움직임도 이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호주 빅토리아 주의 수십 개에 달하는 초등학교에서는 동성 부모 가정을 배려한다는 취지 하에 학생들에게 ‘엄마, 아빠’란 말 대신 ‘돌봐주시는 분들(parent)’ 이나 ‘보호자 (carer)’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사회적 소수나 상대적 약자 그룹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포용과 관용을 실천한다는 명분으로 동성애 관련 명사들을 모은 포스터도 제작됐다. 또 여성이나 남성을 상징적으로 부각시키는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도 되도록이면 배제할 것을 아동들에게 권장하고 있다. 사회적 소수 인정하도록 아동기부터 교육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여 초등학교 저학년 교사들이 어린 학생들을 가르칠 때 동성애 부모에 대한 차별의식을 없애는 것에 초점을 둔 일련의 교육방침이 일선교사들에게 전달됐다. 이 가운데는 동성 부모를 둔 어린이들의 현실을 묘사한 가상 시나리오를 실연케 하고, 그랬을 경우 발생할 주위 사람들의 차별에 대해서 학생들 간에 토론을 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초등학교뿐 아니라 동성애 가정을 모델로 한 그림책을 학습 교재로 사용하는 유치원도 등장했다. 물론 이 같은 가이드라인은 교육부의 공식 승인에 의해 정식으로 교과과정에 뿌리내린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학교 재량에 따라 채택 여부가 결정될 뿐이지만 사회적 소수인 동성애자들을 다수에 속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인정하도록 아동기부터 교육을 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상 호주는 ‘동성애자들의 천국’이라 불릴 정도로 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나 비난이 그다지 심하지 않은 나라에 속한다. 더군다나 최근 들어 유치원생과 초등학교 저학년생들을 대상으로 동성애 가정 또한 이성애의 그것과 다름없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주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권익이 보다 가시적인 형태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호주는 지난 1993년부터 동성애자들에 관한 관용이 사회적으로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동성애는 비정상적 성적 기호나 이른바 변태가 아닌 유전자적 특성에 기인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동성애자들에 대해서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이 많이 거두어진 후 이제는 ‘동성혼’을 인정하고 자녀양육을 허용하는 법적 기반을 마련하는 차원으로 한 걸음을 더 내딛고 있는 상황이다. 양성 학부모 “게이 교사 용납 못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들이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의 벽은 그리 만만치 않다. 동성애 부모들과 그 가정의 자녀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교육 분위기와는 모순되게도 얼마 전, 일선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성교육을 하던 동성애 교사에 대한 해고조치가 내려진 일이 있었다. 초등학교 5, 6학년생들을 대상으로 성에 관한 교육을 하던 이 교사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동성애자란 사실을 밝혔다는 이유로 한창 예민한 나이의 학생들에게 성 윤리에 관한 그릇된 정보와 의식을 주입했다며 학교 측으로부터 교직을 박탈당한 것. 동성애자들의 권익보호와 기회균등을 지속적으로 주장해 온 인권단체들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교사직을 그만두게 한 것은 명백한 인권 탄압이라며 강력히 맞섰지만 자녀에게 유해한 교육환경을 제공할 수 없다는 ‘양성 학부모’들의 반발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학부모들은 어린이들에게 동성 부모와 그들 가정의 존재를 인식시키기 위한 학교교육과정 변화에 절대 동의할 수 없으며, 더군다나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학생들에게 그대로 드러낸 교사를 교단에 계속 세월 둘 수는 없다며 강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다. ‘교실에서 이런 것까지 가르치길 기대하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는 않았다’며 거세게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호주에서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끼리 모이면 뼈 있는 우스갯소리로 ‘자식이 이성 친구를 사귀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나중에 커서 이성 신부감이나 신랑감만 데려오면 무조건 고맙겠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동성애자들의 증가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이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학교 교과과정에까지 이 같은 분위기를 옹호하고 부추기는 수업내용을 끼워 넣는 것에 자식 가진 사람들이 격한 항의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신동호 | 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바람직한 식사는 채식과 육식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인간은 초식동물이 아닌 잡식동물이기 때문이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고기 좋아하는 원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백만 년 동안 인류의 고기 섭취 비율은 장소와 계절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대개 20∼40%였다. 인간의 고기 섭취 비율을 20%로 낮게 잡아도, 이 비율은 235종의 영장류 가운데 가장 높다. 진화의 레이스에서 최근 인간과 갈라져 나간 침팬지도 고기 섭취 비율이 4%에 불과하다. 육식 위한 과잉 사냥으로 동물 멸종 인간의 진화를 설명하는 유력한 이론으로 '사냥 학설'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사냥과 육식을 통해 언어와 사회적 협동 관계가 발달하고, 영양 상태가 좋아져 뇌가 커졌다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이 원시 사회의 표본으로 삼고 장기간 연구를 해온 아프리카 보츠와나의 쿵족은 하루 일과의 40%를 사냥을 하거나 또는 사냥 얘기로 보낸다. 이들 사회에는 '고기 고프다'는 단어도 있다. 인간이 고기 좋아하는 원숭이로 진화하면서 지구에서는 매머드 등 대형 포유류들이 대량 멸종했다. 그 원인도 사실은 워낙 인간이 사냥과 육식을 즐겼기 때문이다. 그동안 과학계에서는 동물의 멸종 원인을 놓고 빙하기 때문이라는 가설과 인간 때문이란 가설이 팽팽히 대립돼 왔다. 2001년 과학 잡지 에는 신대륙인 호주와 아메리카에 인간이 침입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엄청난 숫자의 동물이 멸종됐다는 논문이 두 편 실렸다. 호주에서는 마지막 빙하기 때 무서운 발톱을 지닌 캥거루 등 무게 45㎏ 이상의 대형동물 24속 가운데 23속이 멸종했다. 멜버른 대학 지질학자 리처드 로버츠가 이끄는 연구팀은 대형동물의 뼈가 무더기로 나온 호주 지층들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이들이 묻힌 시기는 약 4만 6400년 전이었다. 호주에 인간이 발을 들인 시기는 5만 6000년 전. 불과 1만 년 만에 인간은 사냥을 통해 대형동물의 씨를 말린 것이다. 호주보다 훨씬 늦게 인간이 침입한 북미 대륙에서는 약 1만 년 전 41종의 초식동물 가운데 30종이 멸종했다. 들소, 매머드 등이 그것이다. 산타 바바라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 존 앨로이 교수팀은 수렵 채취인이 늘면서 동물이 한꺼번에 멸종했다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사람과 초식동물 41종의 개체수 변동 관계를 모형으로 만들어 컴퓨터로 모의실험을 했다. 이 실험은 전체 41종의 초식동물 가운데 32종의 운명을 비교적 정확히 맞추어 '인간에 의한 과잉 살육 가설'을 입증했다. 이 모의실험에서 30종의 동물이 멸종하는 데 걸린 평균 시간은 1229년. 이는 1만 3400년 전 무렵부터 북미 대륙에서 살았던 최초의 인류 거주 흔적과 1만 2260년 전 동물의 잇따른 멸종을 알려주는 화석 기록과도 거의 일치했다. 15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다른 대륙으로 진출한 호모 사피엔스는 다름 아닌 '킬러 사냥꾼'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음식으로 단백질 섭취해야 인류가 수백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원숭이로 살 때는 숲 속의 과일과 견과류를 주로 먹는 원숭이였다. 그러나 빙하기가 엄습해 아프리카의 숲이 건조한 사바나 초원으로 바뀌고 사냥과 육식에 오랫동안 적응하면서 육식에 적합한 신체 구조를 갖게 됐다. 즉, 인간은 생선이나 고기에서 풍부한 필수 아미노산과 지방산, 철, 아연, 비타민 B6, 비타민 B12를 얻게 된 것이다. 우리의 몸은 단백질이란 벽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리카락, 피부, 눈, 심장, 뇌, 근육이 대부분 단백질이다. 뿐만 아니라 산소를 실어 나르는 헤모글로빈, 적혈구와 인체의 대사를 조절하는 호르몬과 효소도 단백질이다. 식물이나 미생물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단백질을 스스로 합성할 수 있으나, 동물은 그런 능력이 없으므로 단백질 또는 아미노산을 음식물로 섭취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동물성 단백질은 식물성 단백질보다 영양가가 높다. 또 단위 중량당 단백질의 함유량도 동물이 식물보다 많다. 단백질의 종류에 따라 아미노산의 종류와 양도 다르므로 여러 가지 단백질을 고루 섭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가 단백질을 먹으면 아미노산으로 잘게 부서져 혈액 속에 공급된다. 그러면 세포가 이들 아미노산 가운데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골라 항체, 호르몬, 효소, 혈액을 만든다. 이때 8개의 필수 아미노산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일 이 가운데 하나라도 부족하면 세포와 효소를 만들지 못해 몸에 이상이 온다. 다양한 살코기는 완벽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설사 채식주의자라 하더라도 계란과 우유를 먹으면 필수 아미노산을 얻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채식주의자가 필수 아미노산 부족에 걸리지 않으려면 콩, 과일, 호두, 식물 씨를 적절히 먹어야 한다. 그래야 채식만을 할 때 부족해지기 쉬운 리신, 트립토판, 메치오닌 같은 필수 아미노산을 공급받을 수 있다. 채식과 육식의 적절한 조화 필요해 채식만을 할 경우 부족해지기 쉬운 또 다른 영양분은 붉은 색 고기에 특히 많은 철과 아연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도 가장 흔한 영양실조가 바로 고기를 섭취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철 결핍성 빈혈이다. 혈액이나 살코기가 붉은 색을 띠는 것은 적혈구의 헤모글로빈이 철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은 체내의 산소 운반을 맡는 헤모글로빈이 산소와 결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철분이 부족하면 헤모글로빈을 만들 수 없어서 안색이 창백해지고, 쉽게 피로해지며, 저녁이 되면 발이 붓는다. 철 성분은 붉은 색 살코기나 간에 많지만 시금치, 해조류, 참깨, 콩에도 꽤 들어 있다. 하지만 식물에 들어 있는 철은 체내에 잘 흡수되지 않는다. 고기에 들어 있는 헴철은 식물에 들어 있는 철보다 인체가 이용하기가 훨씬 쉬워 체내 흡수율이 4배나 높다. 식물 속에 들어 있는 철분은 무기 화합물 형태의 철이고, 육류에 들어 있는 철은 인체가 흡수해 이용하기 쉬운 유기 화합물 형태의 헴철이다. 현재 유럽에서는 철 결핍 때문에 정부의 지도 아래 주식에 철을 첨가하는 방법이 실시되고 있다. 스웨덴 정부는 밀가루에 철을 첨가하도록 하고 있다. 독일, 덴마크, 영국, 일본에서도 철의 함량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철의 결핍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낮아서 효과적인 대책은 아직도 세워지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는 유아의 아연 부족도 심각한 문제다. 아연이 부족하면 인지 능력과 생리 발달이 저해되고 면역력도 약화된다. 한국의 어린이에게도 아연 부족은 성장 장애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 경희대 식품영양학과 박현서 교수가 2003년 유아의 머리카락을 조사한 결과 열 명 중 아홉 명이 아연 부족증에 빠진 상태였다. 어린이들의 체내에 아연이 부족할 경우 입맛이 없고 키도 정상적으로 자라지 않는다. 어린이들에게는 아연이 풍부한 살코기, 굴, 조개 등 아연 성분이 많은 음식을 골고루 섭취해야 한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는 직업인이 아닌 '선생'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적잖은 도전과 위로를 주는 영화이다. 박준용 | 한양대 강사, 문화평론가 불가능한 완성에 맞서 투쟁하는 삶 흔히 사용하는 속담에 말을 물가에 까지 이끌 수는 있으나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말이 목이 마른지 어떤지를 분간하여 물가로 인도하는 사람조차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예로부터 교사에게 기대되는 여러 가지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아이들의 잠재적 가능성을 찾아내 이를 실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교육현실에서 교사가 학생 개개인의 특별한 재능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를 발전하도록 돕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지나치게 많은 학생 수는 물론, 교사로 하여금 아이들에게만 집중할 수 없게 하는 과중한 업무와 입시 위주의 실용주의적 교육환경 등등은 교사를 인생을 먼저 살고 경험한 '선생(先生)'의 삶이 아닌 단순한 직업인의 길로 전락시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삶, 곧 그네들의 생각과 태도를 바람직한 방향성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긍정적인 가능성으로 충만한 관계가 곧 교사와 학생과의 만남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어찌 보면 이 땅에서 교사의 길이란 불가능한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며 나아가는 삶인지도 모른다. 이번에 감상할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는 그런 스승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적잖은 도전과 위로를 주는 영화이다. 외로운 가능성을 희망으로 이끌어 소년 빌리(제이미 벨)의 환경은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혀 앞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 그 자체이다. 자상했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쇠락해 가는 탄광의 광부인 아버지(게리 루이스)와 형은 가망 없는 파업으로 정부와 투쟁 중이며, 빌리가 돌봐야 할 할머니는 치매로 동네를 떠돌아다닌다. 사람들이 고통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 모습이다. 하나는 고통으로 인한 절망 속에서 자포자기한 채 살아가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고통을 창조적인 에너지로 승화시켜 이를 극복해 내는 것이다. 후자의 표현이 좀 더 멋있어 보일런지 모르지만 현실적인 조건에서 이런 승화는 대단히 드물 뿐만 아니라, 대개 반항적인 일탈의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기 쉬워 쓸데없는 객기로 오해받기 쉽다. 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느 사내아이들처럼 권투도장에서 원하지도 않는 권투를 배우던 빌리는 장소상의 문제로 같은 공간을 나누어 쓰게 된 여자아이들의 발레레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에게 있어 '춤'이란 꽉 막혀있는 현실을 잊고 자유로운 비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이요, 즐거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열악한 경제상황에 처해 있던 보수적인 아버지와 형,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눈에 사내아이가 권투를 하지 않지 않고 발레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종의 객기요 일탈이며 반항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 빌리의 도전은 제약을 받는다. 그런 빌리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었던 것은 발레 레슨을 맡고 있던 윌킨슨 부인(줄리 월터스)이었다. 아이들을 레슨 할 때조차 담배를 손에 놓는 법이 없는 윌킨슨 선생은 쇠락한 탄광마을처럼 지친 삶의 일상에 찌든 채 평범한 소녀들에게 발레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권투 글러브를 낀 채 호기심어린 눈으로 춤추는 소녀들을 바라보고 있던 빌리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의 만남이었지만 윌킨슨은 빌리가 가진 가능성의 가냘픈 빛을 '탈선'이 아닌 가능성으로 발견한다. 부모의 기대와 충돌하는 교사의 발견 하지만 그녀가 빌리를 대하는 방식은 혹자가 상상하듯 자상함과 배려로 가득 찬 이상적인 어떤 교사의 모습은 아니었다. 가난한 빌리에게 꼬박꼬박 레슨비를 독촉해 받아내는 냉정한 모습에서 볼 수 있듯, 그녀는 일방적인 도움을 주기 보다는 빌리 자신이 원하는 것이 얼마나 간절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스스로 깨닫고 따라올 수 있도록 자극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말을 물가로 이끌 수는 있지만 결국 물을 먹어야 하는 말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빌리가 발레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와 형이 이를 막으려 하자 가족들과의 충돌을 무릅쓰고 단호한 어조로 빌리의 재능과 가능성을 주장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학부모와 교사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구받는 오늘날, 아이를 사이에 두고 가정에서의 기대와 이와는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 교사의 의견이 충돌하는 상황은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다. 더욱이 가정이 교육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현실에서 교사가 거기에 개입해 방향과 진로를 바꾸려 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긴장과 갈등을 감수해야 한다. 또 설령 이렇게 된다한들 교사에게 돌아오는 것은 잘못되면 욕설이요, 잘되 봐야 그것은 오늘의 일이 아닌 먼 훗날의 어떤 것이기 십상이다. 한 마디로 지금 당장 교사에게 득 될 것이 없는 개입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긴밀해야 할 가정과 교사 사이의 간극은 현실 속에서 멀어지기만 한다. 예정된 실패임에도 불구하고 빌리의 미래를 위해 윌킨슨 부인은 어떻게든 이 간극을 뛰어 넘으려 애써본다. 그리고 기다린다. 최선을 다해 빌리의 가능성을 가정에 알리고 그것이 당장 거부되었을지라도 잠잠히 시간을 두고 가족들이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교사의 몫은 바로 여기까지이다. 완고하기 그지없던 빌리의 아버지는 윌킨슨 선생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사내아이가 발레를 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난방연료가 없어 죽은 아내가 소중히 여기던 피아노를 땔감으로 쓸 수밖에 없던 어느 암울한 크리스마스 저녁, 권투도장에서 자유롭게 춤추는 빌리의 비상을 목격하고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부터 아버지는 빌리를 위해 모든 것, 곧 자신의 존재감을 유지시켜 주던 유일한 힘이었던 자존심마저 내 던지는 결심을 한다. 멀리 윌킨슨 부인의 집에 찾아가 그녀가 옳았음을 인정하고 빌리를 부탁하는 것은 물론 파업 중인 동료들의 비난을 감수한 채 돈을 벌기 위해 일터로 돌아가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선생'의 역할 가능성으로 가득 찬 아이가 훌륭한 모습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있어야 하는 이상적인 조건을 영화 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아이의 원함과 행함, 그리고 이를 발견해 이끌어주는 교사와 희생적인 가족들의 헌신이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적어도 영화 속에서 그것은 윌킨슨 부인으로 상징되는 교사의 역할이다. 그녀는 빌리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것이 온전히 발현되도록 자극할 뿐만 아니라 부정적이었던 가족이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 안도록 설득했다. 이를 통해 교육의 세 주체라 할 수 있는 가정과 학교 그리고 학생이 같은 목표를 향해 걸어갈 수 있게 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최고의 무용수로 성장해 빌리의 공연장을 찾은 가족과 친구들의 모습 속에 뜻밖에 윌킨슨 부인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생을 변화 시킬 만큼의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선생님과의 만남을 가졌던 이들은 분명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그 분이 어디에 계시는 지 알 수는 없지만 바로 우리 가슴 속에 선생님의 가르침이 생생한 감동으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무대 위 어둠을 가르며 비상하는 백조로 분한 빌리의 날갯짓 속에 윌킨슨 선생은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