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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여름철 대평늪의 모습* 김철수 | 경남 거제중앙고 교사, 사진작가 아득한 향수 간직한 함안의 늪 함안군은 남쪽에 여항산, 서북산, 봉화산 및 장노산과 같은 비교적 높은 산이 위치하고 북쪽에 남강이 있어 하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형태를 보이면서 남강변에 넓은 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홍수 시 이런 지형과 낙동강 수위의 증가로 인해 함안천의 물이 남강으로 잘 유입되지 못한다. 그래서 남강의 아래쪽인 대산면, 법수면, 군북면 일원에 대평늪을 비롯한 8개의 작은 자연늪이 있다. 함안의 자연늪은 홍수 때 남강의 강물이 범람하거나 함안천의 물이 남강에 잘 흘러 나가지 못하여 만들어진 배후습지성호수이다. 함안의 자연늪은 농경지를 만들기 위해 무리하게 하천 둑을 만들어 넓은 평야를 개간하였다. 그러다보니 군 전체에 하천의 범람을 위해 막은 하천 둑이 즐비하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하천 둑이 가장 긴 곳이 함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여름철에 누렁이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모습이나 하천 둑에 매달린 무지개와 뭉게구름은 보는 사람들에게 아득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함안천과 남강이 만나는 합수부에는 처녀뱃사공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봄철 함안늪의 수로에는 노랑꽃창포가, 논에는 자운영이 무리지어 피어 길가는 나그네의 마음을 유혹한다. 늪 주변의 수로나 농수로 등 물이 있는 곳이면 자라고 있는 노랑꽃창포는 길쭉한 꽃대에 맺힌 샛노란 손수건이자 가족 품으로 간절히 돌아가기를 원하는 아버지나 연인을 기다리는 가족의 사랑을 나타내는 노란 손수건처럼 보인다. 노랑꽃창포는 바로 사람들에게 희망과 약동의 시간을 약속하는 샛노란 손수건이 아닐까? 노랑꽃창포는 연못가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유럽에서 들어 왔는데, 요즈음에는 수질 정화용으로 도심지의 하수도에 많이 심고 있다. 자운영은 콩과에 속하고 중국에서 목초용으로 들어온 잡초로 우리나라 남부에서 재배하고 있다. 꽃은 대부분은 홍자색을 띠나 간혹 흰색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남부 지방의 논에서 봄을 한껏 뽐내는 꽃이 자운영이다. 자연생태의 寶庫 매립 막아야 함안에는 자연늪이 많았는데,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이 농경지로 개발되었고, 일부의 늪들이 작은 규모로 농경지 사이에 고립되어 분포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대평늪, 질날벌, 유전늪, 수문벌, 옥수늪, 시등늪, 월포지 등이다. 공장을 만들기 위해 이들 중 유전늪은 대부분이, 수문벌과 옥수늪은 완전 매립되었다. 가을이면 통발의 노란 꽃이 장관을 이루고 기러기 등의 철새들이 힘차게 솟아오르던 옥수늪은 지금 황량한 황무지로 변해 있다. 함안에서 자연늪을 관찰하기에 좋은 곳은 어느 정도 규모를 가진 대평늪과 질날벌이다. 대평늪은 함안군 법수면 대송리 883-1번지에 속하고 1984년 문화재 관리국에 의해 '함안 법수면의 늪지식물'로 천연기념물 제34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 번지에 해당하는 대평늪에 나타나는 늪지식물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지, 함안에 분포하는 여러 자연늪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늪지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유일한 곳이어서 늪지식물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곳임은 물론 아이들의 자연과학 학습에 유익한 곳이다. 특히 대평늪 주변에는 광주 안씨가 오래 전에 정착하면서 풍수지리에 근거하여 후손의 번창을 위해 늪지대를 지금까지 보호하고 있다. 대평늪은 물이 드러나는 부분의 넓이가 5.5ha, 습지의 넓이가 4.0ha로 동서로 길게 위치하고 물은 동쪽으로 흘러 남강으로 들어간다. 평균수심은 1.2m 정도이고, 농업용수로 이용되며, 이곳에 살고 있는 수생 및 습지에 사는 식물은 55종류가 보고되어 있다. 대평늪 주변에는 늪 전체를 둘러볼 수 있도록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도로가 있기 때문에, 늪 전체를 걸어서 둘러보는데 약 1시간 정도가 걸린다. 겨울철 농한기의 고기잡이는 이곳의 좋은 전통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행하지 않고 있다. 몇 년 전 까지만 하여도 늪에 얼음이 얼기 전에 늪 가장자리에 입구가 길쭉한 큰 웅덩이를 몇 개씩 팠다고 한다. 늪의 수온이 낮아지고 얼음이 얼면 잉어와 붕어들은 체온 유지를 위해 웅덩이로 모여 들었다고 한다. 얼음이 두껍게 얼면 물고기의 출입을 확인한 다음 웅덩이의 수로 부분에 나무쐐기를 박아 잉어의 도망을 막고 고기를 잡아 마을 잔치를 하였다고 한다. 사라짐을 슬퍼하는 울음 소리 질날벌은 법수면 면소재지 바로 옆에 위치하는데, 법수면 우거리와 대송리에 분포하며, 넓이는 약 18.1ha이다. 남북으로 약 1㎞ 정도의 길이로서 도로를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다. 연중 수심은 1~2m이고 겨울 철새도래지로 청둥오리, 기러기 따위가 모여들고 있다. 원래 이 늪은 대평늪보다 약 3배 정도 큰 늪지였지만, 지금은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늪의 약 1/5이 매립되어 없어져 버렸다. 매립된 늪의 상류가 흙과 돌로 덮여 있어 항상 머리가 아프다고 외치는 질날벌이지만, 물이 드러나는 부분에는 가시연꽃과 마름이 자라고, 늪 주변에는 줄이 잘 자라고 있다. 또 적은 넓이지만 도로 옆 습지에는 선버들과 버드나무가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관찰하기에 좋은 지역은 매립된 지역과 늪이 끝나 수로가 이어지는 내송마을 앞의 습지이다. 줄이 가장 크게 자라는 6월에서 7월초에 이곳에 가면 늪이 ‘킁킁’하며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늪이 이런 소리를 내는 것은 늪지대에 쌓인 영양분이 분해되면서 만들어진 메탄가스가 빠져 나오는 소리이다. 그러나 이런 소리를 듣기 위해 늪에 들어가면 늪에 온 몸이 빠질 수도 있는데, 늪에 빠지면 계속 몸이 빠져 들어가는 성질이 있어 위험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는데, 함안 지역의 자연늪 중에서 이름만 남기고 사라져가는 늪이 있다. 남해안고속도로 장지IC 바로 옆에 있는 유전늪이다. 1982년 지도에 나타난 유전늪의 크기는 길이 750m, 너비 500m로서 그 넓이가 37.5ha에 달하였으나, 1983년부터 매립한 결과 현재는 대부분 지역이 공장과 대지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생물학자에 의해 이곳에서 처음 발견된 마름이 있는데, 이곳의 지명을 따서 유전마름이 되었다. 사실 유전마름은 경남의 어느 지역에서나 나타나는 식물이다. 이 식물의 잎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름모꼴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모양에서 마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마름은 물밤이라고 부르는 열매의 모양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데, 우리나라에 자라는 마름의 종류에는 마름, 네마름, 포평마름, 유전마름, 애기마름 등이 있다. 하얀 꽃대를 달고 있는 마름의 잎은 모두가 비슷하지만, 가을이 되면 달리는 열매의 모양은 조금씩 다르다. 우포늪과 주남저수지가 크고 널리 알려졌지만, 우포나 주남이 들어가는 이름을 가진 식물은 없다. 지금은 공장 옆에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유전늪이지만 그 적은 넓이에도 만족하며 분홍색의 연꽃을 피우고, 많은 버들류가 자라고 있다. 유전늪을 비롯한 함안의 여러 자연늪들은 사라지고 있지만, 유전마름은 영구히 우리의 늪에 있을 것이다. 늪과 함께 문화 지키는 가야인 기원전후에 세워져 오백년의 역사를 가진 아라가야의 중심지는 오늘날 함안군 일원으로 그들의 흔적은 1000여 기로 이루어진 가야읍 도항, 말산리 고분군에 남아 있다. 말산은 말이산, 마리산, 머리산을 뜻하는데, 아라가야의 역대 왕들이 묻힌 우두머리의 산을 의미한다. 지금의 가야읍 대부분은 지대가 낮아 그 당시에는 갈대밭이 무성한 자연늪으로 추측되고, 철괴를 실은 배들이 낙랑, 대방, 왜 등으로 나아가는 통로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뱃길의 주요 교통로인 남강과 그 지류를 지켜보는 자리에 고분군이 위치하고 있으며, 1500년 전의 영광을 가슴 깊이 새기기 위해 해마다 아라축제를 열고 있다. 산인면 모곡리에 가면 고려동유적지가 있다. 이곳은 고려시대 성균관 진사 이오선생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후 대대로 그 후손들이 살아온 곳이다. 담장을 쌓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이라는 비석을 세워 논과 밭을 일구어 자급자족했다. 그는 자식들에게 조선왕조에 벼슬하지 말고, 자신의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 것을 유언하였다. 그의 유언을 받든 후손들은 19대 600여 년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고려동은 절개의 고향으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후손들이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가꾸면서 벼슬길에 나아가기보다 자녀의 교육에 전념하여 학문과 절의의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비, 고려동담장, 고려종택, 고려전답, 자미단, 고려전답, 자미정, 율간정, 복정 등이 있다. 인공연못과 정자로 이루어진 무진정은 함안면 괴산리에 위치하고, 조선시대 춘추관의 편수관을 지낸 무진 조삼 선생을 기리는 곳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팔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함안천에 의해 물돌이지던 이곳에 만들어진 늪을 개량하여 만든 인공연못으로 자라풀, 노랑어리연꽃, 왜갓냉이가 자라고, 연못 주변에는 수령이 오래된 왕버들, 느티나무, 소나무가 심겨져 있다.
*카라쿠리 호수에서 바라본 만년설의 무즈타크* 박하선 | 사진작가, 여행 칼럼니스트 중국에서 아랍을 만나다 한없이 이어지는 황량한 대사막을 구름에 달 가듯이, 망망대해에 조각배 흐르듯이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숨은 전설을 찾아가다 보면 실크로드의 성지라고 말하는 '카슈가르'라는 곳에 닿게 된다. 이름부터가 좀 특이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이곳은 현재 중국에 속해 있지만 오히려 중동의 한 지역 같은 느낌을 준다. '위구르족'이라는 터키계 회교권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조차 중국말과 판이하게 다르고 생활환경 또한 아주 이색적이기 때문이다. 또 파미르의 고봉들을 등에 지고, 망망한 바다와 같은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슴에 안고 있는 이곳 카슈가르는 수천 년의 역사가 증명하듯 동서를 잇는 문물 교류의 가교 역할을 해 왔던 곳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과거 수많은 입축승(入竺僧)들이 구도의 길을 떠도는 와중에 이름 그대로의 오아시스 역할도 충분히 해 왔으며, 근세에 들어서도 서방의 여러 탐험가들, 즉 영국의 스타인, 스웨덴의 헤딘 같은 불굴의 업적을 남긴 의지의 사나이들에게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던 요충지였다. 그 전설적인 오아시스 카슈가르가 지금에 와서도 옛 모습을 잃지 않고 실크로드의 여정을 북돋워 주고 있다. 슬픈 역사 품고 있는 운치(韻致) 그렇다고 이런 오랜 역사에 걸맞은 유적지 같은 것이 이곳 카슈가르 도처에 산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여행자들이 쉽게 머릿속에 그리게 되는 그런 그림 같은 풍경은 더더욱 기대할 수도 없는 곳이다. 굳이 지난날을 이야기해주는 유적을 찾아 나선다면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서역 최대의 회교 사원이라고 자랑하는 '에이티가르'와 변두리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커다란 돔의 '호자무덤'이 고작이다. '시앙페이무'로 더 알려져 있는 이 호자무덤은 청나라 건륭제의 구애를 계속 거절하다가 끝내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 호자족 처녀의 애달픈 영혼이 맴돌고 있는 곳으로 청록색 타일이 빛나고 있는 귀족무덤이다. 그러나 사실 이 호자무덤 자체보다는 그곳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마차를 타고 포플러 가로수 사이를 누비며 시골 풍경을 즐기는 맛이 한층 더 운치가 있어 좋다. 시내의 한복판에 있는 에이티가르 사원은 과거 이슬람 대학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정면에 있는 노란색의 첨탑이 아름답고, 이따금씩 서쪽을 향해 예배를 드리는 무리들을 빼놓고는 공원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하지만 금요일에는 온 카슈가르의 시민들이 다 모인 듯 엄청난 인파가 운집해 엄숙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면 서역 최대의 회교사원임을 실감케 한다. '옛날'을 찾아보는 즐거움 카슈가르의 가장 큰 볼거리는 엉뚱하게도 '오달데 바자르'를 비롯한 다양한 '바자르(시장)'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는 바자르는 현대 문명에 길들여진 우리들에게 남루하게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는 좀처럼 보기 드문 진귀한 것들이 이곳에서는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 먼 과거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덥수룩한 수염이나 콧수염을 기르고 가지각색의 모자를 쓰고 있는 위구르족 남자들과 움푹 들어간 눈에 화려한 색상의 스카프를 쓰고 있거나 아니면 밤색의 차도르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여인네들, 수많은 마차,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수박이나 '고곤'이라 부르는 커다란 참외를 비롯한 각종 과일, 카펫 장사, '케밥'이라 부르는 꼬챙이 구이를 구워 내며 피어나는 자욱한 연기, 대장간의 망치 두드리는 소리…. 이 모두가 옛날이다. 이중에서도 특히 일요일마다 열리는 '선데이 마켓'의 열기는 수많은 여행자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만다. 그래서 이곳 카슈가르에 간다는 것은 곧 ‘선데이 마켓’을 보기 위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모든 여행자들은 일요일을 이곳에서 보내기 위해 미리부터 일정을 조절하곤 한다. 하지만, 옛날의 분위기를 느껴 볼 수 있는 곳이 비단 바자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불볕 같은 태양 빛을 잠시 벗어나 쉬고 싶을 때 가장 좋은 곳은 주택가의 미로와 같은 골목길이다. 흙담과 흙담이 계속해서 이어져 있는 그 골목길에 들어서면 대낮에도 어둑어둑하다. 조금씩 남겨 놓은 하늘 공간으로 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통행하는데 큰 불편은 없지만 구불구불한 미로 속을 헤매는 것은 마치 토굴 속을 걷는 것 같다. 그래서 한 번 들어가면 제자리로 빠져나오기도 쉽지 않아 어쩔 때는 한참을 헤매기도 한다. 골목길에서 놀고 있는 꼬마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이따금 위구르족들의 집에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가 토방에서 빵을 굽고 있던 여인네들과의 만남을 이룩한 것도 두고두고 잊지 못하게 한다. 전통의 맥 이어가는 전설 이곳은 사막지대다. 그래서 여름에는 햇볕이 불볕이고 일교차가 크다. 또 겨울에는 반대로 대단히 춥다. 이 더위와 추위를 막는 데는 흙이 최고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막에서는 모든 집들을 흙으로 지어왔다. 이러한 흙집들은 외관상 매끄럽지가 않기 때문에 이곳 카슈가르의 구시가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폭격을 당한 전쟁터의 폐허처럼 보인다. 하지만 집안에 들어가 보면 의외로 깔끔하다. 가재도구도 아무것도 없다. 그저 바닥에 카펫 한 장 깔려있고, 나무침대와 조그마한 상자 하나가 고작이다. 마치 무소유의 생활 철학이 몸에 배인 사람들처럼…. 여름철에 밖이 아무리 불볕이라 해도 방안에 앉아 있으면 시원하다. 방 안 뿐만이 아니다. 어느 곳이고 그늘 밑에만 있으면 시원하다. 그래서 골목길 위로도 건물을 연결시켜서 그늘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또 건조성 기후로 인해 햇볕에 있어도 그다지 땀이 나지 않는다. 거기다가 아무리 햇볕이 따가운 여름철에도 해가 지고 나면 금세 시원해지고 한밤중에는 오히려 싸늘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이곳 위구르족 중에는 여름철에도 털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고 두터운 겨울옷을 걸치고 다니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곳은 오히려 우리나라의 여름철보다도 더 지내기가 편하다. 사막의 바다를 건너 마치 지구 끝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곳 카슈가르에 와서 잠깐 둘러보는 것만으로 이곳을 마무리 짓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을 것이다. 두 번 오기가 힘든 곳이고, 또 그만큼 여러 가지로 매력이 넘친 곳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여유 있는 일정을 짜야 뒷날 후회가 없다. 이렇듯 카슈가르로의 여행은 결국 먼 과거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는 것이다. 지금껏 실크로드의 분위기를 잃지 않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전설적인 오아시스 '카슈가르'. 실크로드를 꿈꾸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언제까지나 빛나는 진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멜이 본 조선인들의 믿음 국립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마을 공동체 신앙물로 돌탑, 장승, 솟대를 전시해 놓았습니다. 지나가는 외국인들이 그 신앙물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면 과연 그들은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잠깐 독자 여러분과 함께 17세기 조선시대로 돌아가 보고자 합니다. 한국을 서방에 최초로 소개한 하멜은 조선인들의 신앙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김태진이 옮긴(서해문집, 2003)를 통해 장승신앙과 관련한 당시 민초들의 믿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반인들은 그들의 우상 앞에서 일종의 미신을 지키지만 우상보다는 공직에 있는 관리에게 더 경의를 표한다. 고관과 양반들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데 자기 자신들이 우상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우상숭배는 아마도 장승이나 돌탑과 같은 마을 공동체 신앙물을 의미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민초들의 믿음에 반해 일부 양반이나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심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들은 선한 일을 한 사람은 나중에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 믿고 있다. 하멜은 조선인들의 국민성을 이야기하면서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하고, 속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그들을 지나치게 믿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도 ‘성품이 착하고 곧이 잘 듣는 사람들이라 원하는 것을 믿게 할 수 있다’고 기술함으로써 권선징악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설교와 교리문답 같은 것은 전혀 없으며, 그들의 신앙을 서로에게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들이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해도 종교에 대해 논쟁하는 법은 결코 없다. 그 이유는 전국에 걸쳐 우상에 대해 동일한 방식으로 예배하기 때문이다. 전국에 걸친 우상숭배의 형태가 동일하다는 그의 지적은 아마 장승과 같은 마을 공동체 신앙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절대신을 숭배하는 당시 서양의 종교와는 달리 조선인들의 다신 숭배는 뚜렷한 경전도 필요 없고, 그 믿음을 설교하는 사람도 없으며 전국적으로 공통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상대방의 종교를 두고 논쟁거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질병 특히 전염병에 대해서는 대단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전염병에 걸린 환자는 당장 읍이나 마을 밖 들판의 작은 초막으로 데려가 거기서 살게 한다. 그 근방을 지나가는 사람은 그 환자의 앞쪽에 있는 땅에 침을 뱉는다. 하멜은 ‘조선인들은 피를 보기 싫어하며 어떤 사람이 싸우다 쓰러지면 다른 사람들은 도망간다’고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것은 두 번씩이나 큰 전쟁을 치르면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고 전쟁 후엔 돌림병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기에 전쟁에 대한 거부감이 만연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천연두, 콜레라, 수두 등의 돌림병이나 흉년 또한 나쁜 귀신이 붙어 생기는 것으로 믿었기에 역신들을 물리치고 달랠 수 있는 장승신앙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위 하멜의 기록을 통해 두 차례 큰 전쟁 후 국토의 황폐화, 돌림병의 유행, 자연재해에다 일부 탐관오리의 횡포 등으로 인해 민초들로서는 장승과 같은 마을 지킴이가 절실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남쪽엔 돌장승, 중부엔 나무 장승 이번 호에서는 나무장승을 찾아갑니다. 나무장승은 나무의 재질상 썩기 때문에 매년 혹은 2년에 한 번씩 장승제를 통해 새로운 장승이 탄생하게 됩니다. 산업화로 인해 장승제가 생략되고 나무대신 돌장승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장승제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나무장승은 새것과 오래된 것이 서로 어울려 형제인 듯, 쌍둥이인 듯 정겹게 느껴집니다. 이전에 만들어진 놈들은 키가 짧아졌고 명문도 희미해지고 풍우를 겪은 상처가 드러나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돌장승은 남부지방에, 나무장승은 중부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나무장승이 밀집된 곳은 경기도 남한산성 일대와 충남 칠갑산 일대입니다. 먼저 경기도 광주로 떠납니다. 남한산성 동문매표소를 통과하여 산성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오른쪽 길가에 선 검복리 장승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천하대장군’이란 명문을 단 남장승입니다. 반대쪽 개울 너머에 ‘지하여장군’이 풀숲에 우뚝 서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2년에 한 번씩 장승제를 열고 장승재료로는 오리나무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현재 각각 네 기씩 서 있습니다. 솟대로 치장한 장승은 옛날 할머니가 비녀를 풀어 귀에 살짝 꽂으실 적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광주 엄미리장승은 병자호란 이후 엄씨 성을 가진 이가 자신의 성씨로 마을 이름을 짓고 임금을 지켜달라는 소원으로 장승을 세웠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광주시와 하남시의 접경인 은고개에서 좌회전하면 엄미리가 나옵니다. 계곡을 따라 난 도로는 한창 공사 중인데 그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상호명이 ‘잣나무집’인 음식점이 나오고 그 식당 좌우에 한 쌍의 장승이 서 있습니다. 인근 미랴울 마을의 장승과 생김새가 같습니다. 동일한 사람이 조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엄미리, 미랴울 마을의 장승은 잣나무집 장승을 지나다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남자 장승의 수염은 턱 부분에 구멍을 뚫어 그곳에 볏짚이나 풀 껍질 등으로 수염을 만들어 붙여 놓았습니다. 시원시원한 장승의 생김새에다 더 입체감을 불어넣는 제작자의 예술 감각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관모에다 눈은 수직에 가까울 정도로 비뚤하고 굵은 칼집으로 처리한 입 부분 등에서 대개의 나무장승이 이빨을 붓으로 그리거나 깎아내는 방법과는 차별화되어 있습니다. 여장승인 지하여장군은 민머리에 단촐한 느낌입니다. 현재 남장승이 네 기, 여장승이 두 기 남아 있습니다. 한 마을아낙은 남장승을 바깥장신, 여장승을 안장신으로 불렀습니다. 부부간 호칭을 안사람과 바깥사람으로 지칭하듯 장승에게도 그런 호칭을 붙인 듯합니다. 이 미랴울 장승은 또 장승 아랫부분에 ‘수원 七十里’, ‘서울 七十里’라고 안내해놓은 글귀가 보입니다. 10리 혹은 30리마다 노표(路標)역할을 하던 장승이 섰다고 하는데 이곳에서나마 이정표 역할을 했던 장승의 역할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엄미리 장승은 두 곳 모두 명문이 같고 개울을 사이에 두고 남녀장승이 돌 무지 위에 서서 서로 마주하며 서 있습니다. 단지, 잣나무집 장승의 경우 오른쪽에 여장승이, 왼쪽에 남장승이 서있다는 점이 다르다 하겠습니다. 2년마다 장승제를 지내고 있으며 이때 삭아 넘어져 가는 장승들을 뒷산에 묻어주어 지킴이로 임무를 다한 장승에 대한 제사를 베푼다고 합니다. 광주에는 이곳 외에도 하번천리 양짓말 장승, 서하리 연골 장승, 사마루 장승, 무갑리 장승, 관음리 장승 등을 만날 수 있어 가히 장승의 고장이라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는 고장입니다.[PAGE BREAK]칠갑산의 ‘축귀대장군’ 칠갑산을 중심으로 한 충남권 일대는 아직도 장승제가 실시되는 곳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청양지역은 장승공원을 조성하여 지역의 다양한 장승들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고, 해마다 ‘칠갑산 장승문화축제’를 개최할 만큼 장승에 대한 관심이 많은 곳입니다. 축제기간 동안 칠갑산 장승대제와 장승 깎기, 솟대 제작, 장승제 시연, 장승 명문식, 가족 장승 깎기 대회 등의 프로그램이 운영됩니다. 청양 지역 장승을 찾는 의의는 바로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에 익숙한 장승의 명문에서 벗어나 동서남북 및 중앙 등 오방(五方)과 관련한 명문을 많이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킴이로서 장승은 무섭게 새긴다고 새긴 장승의 모습보다 명문에서 더 막강한 영향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장승에 명문을 쓰거나 새기는 순간 장승은 무사나 장군의 단계를 넘어온 세계를 잡귀로부터 지키는 신적 존재로 탄생하는 것이고, 그러한 권능이 있음을 온 세계에 선포하는 셈이지요. 즉, 우리 마을이 장승이 지키는 소우주로까지 승화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성한 우리 마을을 오방(五方)에서 침범하는 사악한 귀신으로부터 쫓아내려는 의도를 명문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칠갑산 육중한 산세를 뒤로하고 천장리 장승이 서 있습니다. 길쭉한 몸에 코를 강조하여 돌출시키고 전체적으로 앞부분을 납작하게 다듬어서 키만 멀쭘해 보입니다. 길 양쪽에 남녀장승이 각각 두 기씩 서 있는데 명문이 ‘동방청제축귀대장군 지위(東方靑帝逐鬼大將軍 之位)’로 동일합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동쪽으로만 나 있기에 이곳에 동쪽을 지키는 장승을 세워 비보하고 잡귀의 침입을 막고자 하는 의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송학리 장승은 나무장승, 솔대, 솟대, 금줄 등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남장승은 ‘서북방백흑제축귀대장군(西北方白黑帝逐鬼大將軍)’이고 여장승은 ‘동남방청적제축귀대장군(東南方靑赤帝逐鬼大將軍)’입니다. 각각 세 기씩 서 있는데 새끼줄로 동여매어진 채 키가 달리 붙어 마치 친형제 자매 같습니다. 이빨을 일일이 다듬어 잘 표현했고 솟대에는 먹으로 새의 형태를 그려 넣었습니다. 남장승은 사모에 수염을 길렀고, 여장승은 머리에 족두리를 그려 놓았습니다. 장승제를 앞두고 새 장승을 훔쳐 가면 득복한다고 하여 이웃 마을에서 호시탐탐 노리므로 도난당하지 않으려고 주민들이 밤을 새워가면서 장승을 지키기도 했답니다. 해남골 장승은 ‘서북향흑제축귀대장군(西北向黑帝逐鬼大將軍)’과 ‘동남향적제축귀대장군(東南向赤帝逐鬼大將軍)’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습니다. 서북방향이라면 ‘백흑제(白黑帝)’로 동남향이면 ‘청적제(靑赤帝)’로 이름 붙여져야 할 것 같은데 ‘흑제(黑帝)’와 ‘적제(赤帝)’로 이름붙인 그 의도가 궁금합니다. 원래 나무장승이었던 것을 1960년대초에 돌장승으로 교체하였다가 근래에 나무장승이 다시 섰다고 합니다. 인근 대박리 장승은 근래에 돌장승으로 바뀌었습니다. 용두리에서는 남장승 ‘천상천하축귀대장군(天上天下逐鬼大將軍)’과 여장승 ‘동서남북중앙축귀대장군(東西南北中央逐鬼大將軍)’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당수나무 아래에서 각각 솟대를 끼고 있습니다. 남장승은 천상천하의 수직적 세계를, 여장승은 사방의 수평적 세계를 관장하도록 하여 그야말로 빈틈없이 경계태세에 접어든 것 같습니다. 네모난 입모양에 이빨을 대칭되게 그려놓았는데 그 생김새가 장방형에 옥수수 알처럼 친근합니다. 당수나무 뒤편에는 오래되어 뽑혀나간 장승 한 쌍이 놓여 있습니다. 일제시대 일본인 지서장이 장승을 불태우고 몹쓸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난 후 장승을 함부로 손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용두리장승에 비하면 부여 은산장승은 우락부락한 눈매에 마치 드라큐라를 연상시키는 들쭉날쭉한 송곳니를 묘사하여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얼굴에 황토칠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된 부여 은산별신제는 억울하게 죽은 장군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사방에 장승을 세우는 내용입니다. 생김새로 볼 때 은산장승은 티끌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원칙에 충실한 장승이라면, 용두리장승은 한 번씩은 일부러 못 본 척해줄 듯 어리숙함과 인정스러움이 느껴집니다. 마을을 떠나다 절집에서도 나무장승을 볼 수 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2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머리를 풀어헤친 듯한 나무장승 둘이 우뚝 서 있습니다. 이 장승은 60년대까지 지리산 쌍계사를 지키다 새 장승이 들어서면서 현역생활을 접고 박물관으로 수집돼 온 것입니다. 장승목은 뿌리 쪽 방향이 장승의 머리 부분이 됩니다. 그래야만 장승의 머리 부분이 몸통에 비해 왜소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뿌리까지 활용해서 장승 머리털로 조성한 이른바 산발형 장승은 그리 흔하지 않았습니다. 아산 외암마을에서와 같이 요즘에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장승이 되었지만요. 순천 선암사 목장승은 몸 전체에 붉은색을 칠했는데 호법선신(護法善神)과 방생정계(放生淨界)의 명문이 보입니다. 오른쪽 호법선신은 불법을 수호하며 일체 중생을 성불하도록 돕는 착한 신들을 뜻하며 왼쪽 방생정계는 이곳부터는 더욱 모든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며 매인 것들에게 자유를 베풀어야 함을 뜻합니다. 낙안읍성 가는 길에 자리한 금둔사에도 선암사의 것과 똑같은 장승을 볼 수 있습니다. 해남 대흥사 입구에도 금귀대장(禁鬼大將) 등의 불법을 수호하는 장승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편 80년대 이후 각 대학에서는 ‘백두대장군’, ‘한라대장군’, ‘민족천하대장군’ 등 통일을 소재로 한 다양한 시국장승이 부활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개인의 염원까지 담아 ‘대입합격기원대장군’, ‘수능시험우수여장군’ 등 명문이 등장했고, 강릉 선교장 일대에 조성된 장승중에는 ’산촌대장군’, ‘어촌대장군’, ‘수두예방’, ‘감자대장군’, ‘논개여장군’ 등 다양하고 재미있는 명문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마을을 떠난 장승이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이죠. 실속보다는 겉치레에 치중하는 젊은이들을 일컬어 ‘된장녀’니 ‘된장남’라고 부릅니다. 왜 하필이면 ‘된장-’ 일까요. 분명 된장을 비하하는 의미가 다분하다고 하겠습니다. 이틀 걸러 한 번씩은 꼭 된장국을 먹어야 하는 저로서는 왜 그들을 된장에 비유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내 돈이니까 내 맘대로 해도 되고, 내 삶이니까 내 스타일대로 살면 되고,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내 것, 가족 것부터 챙기는 것이 우선이라는 이 세태에 공동참여, 공동창작, 공동신앙의 산물이었던 장승을 돌이켜 봅니다. | 울산 옥현초 교사
나라는 늘 어수선하고, 뉴스(news)는 줄어드는 법이 없습니다. 뉴스가 없으면 그것이 큰 뉴스가 될 것 같은 ‘뉴스의 시대’에서 선생님들은 어떤 뉴스를, 어떻게 보십니까. 한동안 ‘바다이야기’에서 ‘작통권 환수’를 안주삼아 ‘체벌 법제화’를 놓고 열을 올리다 ‘내 소신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둔사(遁辭)를 남기고 파하지는 않았는지요. 뭐니 뭐니 해도 선생님들의 화제는 단연 교육일 것입니다. 입 가진 사람마다 교육에 대해 한 마디 하는 세상에 살다보니 오히려 선생님들의 논리가 궁해지고, 때론 궁지에 몰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최근 우리는 참여정부의 6번째 교육수장을 맞이하였습니다. 참여정부라서 그런지 장관에 참여하는 사람도 많고, 참여하게 된 이유도 다양합니다. 아시다시피 김신일 교육부총리는 학자로서 크게 흠 잡을 데 없는 분입니다. 교원․학부모단체에서도 오랜만에 ‘적임자’라는 평가를 내렸고, 정치권도 대체로 그러했습니다. 김 부총리는 몇 년 전 ‘한국교육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평준화는 학교 간 학생의 질적 수준을 균등화하기 위하여 신입생을 강제 배정하는 정책이지 교육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본격적 정책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연학(硏學)에 배어있는 이러한 철학을 두고 일각에서는 수월성 교육을 강조하고, 평준화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졌다며 문제를 제기한 것도 사실입니다. 평준화의 공과가 지루한 논란거리이듯 그의 교육철학에 이의는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지요. 현 정부 교육정책의 핵심이 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를 금지한 이른바 ‘3불(不) 정책’의 고수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김 부총리의 철학과 다르기는 해도 그의 표현처럼 “정부의 정책기조와 기본 방향에서 일치한다”고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교육관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참여정부의 그것과 다르니, 같으니 하며 트집을 잡는 정치권의 협량(狹量)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크게 다를 바 없다’며 비켜서는 모습에서 ‘역시나…’하며 낙담한 선생님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선생님들은 혹 이런 답변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지요. “학자로서 나의 철학과 현 정부정책의 기저가 다를 수 있지만 각계각층의 고견을 수렴해 교육본질의 가치를 실현하고, 교육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맹종의 무리를 이루는 것보다 생산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겠다. 서로 다른 코드에서 일어나는 스파크를 사회통합의 에너지로 승화시켜 나 갈 것이다.” 요즘 우리는 ‘교육으로 흥한 나라 교육으로 망하게 됐다’는 비장한 걱정을 수 없이 듣고 있습니다. 이제 김 부총리의 결과적으로 정치적이지 못했던 수사(修辭)를 탓하지 않겠습니다. 이어지는 공세에 응변(應變)하며 나온 실수라 믿고, 더 이상 지적하지도 않을 작정입니다. 합리적인 품성에 깃든 그 소신이 빛을 발하길 치켜볼 뿐입니다. | 이낙진 leenj@kfta.or.kr
박찬석 | 공주교대 교수 현대사회는 물질적 풍요와 상대적인 빈곤 그리고 마음보다 육체에 대한 맹목적 인식, 부에 비해 정신에 대한 인식의 퇴조 등 다양한 극단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들은 그들이 느끼는 문제와 미래에 대한 고민을 미룬 채 현실에서 빠져 나가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 회피 조건을 잘 마련해 주는 것이 컴퓨터와 핸드폰이다. 이 세계로 학생들은 별 생각 없이 빠져 들고 있다. 가히 컴퓨터와 핸드폰의 세상이 된 것이다. 전국의 모든 학교에 인터넷 초고속망이 보급되었고 핸드폰 없는 학생은 초·중·고등학교를 막론하고 드물어졌다. 그렇기에 우리 학교교육은 이러한 청소년들의 고민 회피에 맞서서 윤리적 성찰에 대해 새삼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컴퓨터와 핸드폰의 능숙한 활용으로 인하여 문자는 물론 비디오, 사진, 영화, 오디오 등 다양한 매체를 손 안에서 보고, 듣고, 즐기고 있다. 이로 인해 무한한 자료와 주제를 갖게 된 학생들은 자신의 선택을 중시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끽하게 된 셈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활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올바로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스스로 학습도 하고 놀이도 할 수 있게 해준 컴퓨터가 이제는 오히려 제대로 된 학습도 못하고 놀이도 못하게 만들고 있다. 현실에 대한 무관심 내지 냉소적 경향을 보이는 신세대 학생들은 그들의 관심 및 흥미에 대한 인내를 배우지 못하고 무차별적으로 시도하는데 익숙해 있다. 이러한 때일수록 교육은 학생들이 갖는 사이버 세계와 현실을 분별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즉, 학생들이 건전한 정보통신자로 인내를 배우며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는 사이버와 현실을 더욱 분별력 있게 가르쳐야 하며, 학생들은 더 참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내를 배워 나가야 한다. 이제 어느 누구도 유혹에 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 청소년들이 관성적인 자기 실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우리 교육은 끊임없는 주문을 해야 한다. 자기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통제가 불가능한 것이라면 교사부터 컴퓨터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는 일들을 좀 줄여나가야 할 것이다. 교사 스스로 학교에서 참고 견디며, 내일을 설계하는 교육 방식에 대해 더욱더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학교는 학생 수준에 맞추려는 노력과 함께 고래(古來)로부터 가지고 있는 인내에 대한 인간 고유의 인성적 특성도 강조하여야 할 것이다. 인내에 대해 더 사유하는 학교가 청소년들을 더 조숙하고 삶의 깊이를 갖게 육성할 것이다. 그렇기에 교사들은 새로운 사회 상황에 알맞은 윤리적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는 인내에 대해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인내는 실질적인 삶에 도움을 주고 한 개인의 존엄성, 자율성, 책임, 자유, 평등, 분배적 정의, 공정한 절차, 공동체, 공동선 등에서 실제 학교에서 숨 쉬고 모든 일에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인내가 살아 숨 쉰다면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 성적 비관, 폭력 사태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인내의 가치와 덕목이 지금의 정보사회에서나 앞으로의 수 세기가 온다 해도 여전히 유용함을 확신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청소년들이 인내가 상황적이거나 상대적이라고 봐서는 안된다. 현실 세계이든 가상 세계이든 인내는 인간이기에 갖는 가장 좋은 윤리적 가치 일 것이다.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는 절대적인 윤리적 규범과 원리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보편타당성을 지니는 것이다. 특히 교육에서의 인내는 무엇보다 중요한 윤리적 신념을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덕목이야말로 정보사회인 지금 학교에서 확실하게 우리 청소년들에게 가르쳐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인내는 허상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강한 거부이며 힘센 자나 거친 표현을 억누르는 위계 높은 덕목인 것이다. 한 사람의 인내는 분명 밝혀지는 것이며 그 사람의 행실이요, 그 사람의 얼굴이나 이름으로 남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대의 교육에서 인내는 더 절실히 요구되며 실질 생활에서 긍정적인 힘으로 발휘할 수 있는 덕목인 것이다.
얼마 전에 겪었던 일이다. 어떤 기관에서 부진아 문제의 교육적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전문가 협의회에 참석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연구하려 할 때, 관련 전문가들의 아이디어를 빌린다는 취지로, 이런 종류의 협의회가 활용된다. 미리 회의 자료를 보내 주면서 잘 검토를 하고 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주최 측의 자세가 진지하고 성실하여 나는 이 회의에 호감과 기대를 가지고 참석하기로 했다. 문제는 협의회가 시작되면서 발생했다. 참석한 인사 중의 한 사람이 자신이 가진 특정의 견해를 밝히면서, 학습부진아 문제의 발생을 당국의 정책 부재 탓으로 나무라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서서히 비분강개하기 시작했다. 그의 비분강개는 계속 다른 국면으로 전이되었다. 그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사람들이 기회균등의 교육철학을 제대로 가지지 못했다는 공격적 발언으로 불특정의 여러 학자 전문가들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비분강개의 와중에도 그는 자신이 이러저러한 힘과 경력의 소유자임을 빠트리지 않고 끼워 넣었다. “고정하시지요”하는 말을 꺼내기도 무색할 정도로, 그는 분기탱천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 언성을 높였다. 다른 참석자들은 마치 문제의식도 없고, 정의감도 없는 부류의 인간들로 순식간에 내몰리는 분위기이었다. 그가 비분강개하는 동안, 어정쩡하기 그지없는 침묵이 흘렀다. 협의회에서 의미 있는 대안들을 생산하려던 개방적 소통의 분위기가 금방 유실되는 듯했다. 속된 말로 김새는 분위기이었다. 이런 성격의 회의에서는 자유로운 소통이 생명이다. 그 사람의 비분강개의 정도가 하도 심하여 나는 이런 의심도 해 보았다. 혹시 저 양반이 다른 무슨 이유로 이미 화가 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회의를 주재하는 사회자가 몇 번씩 사과 아닌 사과를 해서 겨우 진정시켰다. 사실 생각해 보면 사회자가 그 사람에게 사과를 해야 할 이유는 없다. 나는 심리적으로는 마치 폭력에 휘둘리는 느낌을 받았다. 참으로 가당치 않은 억압의 분위기이었다.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나중에 확인할 수 있었다. 이어진 회의는 부자연스러웠다. 그 사람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분들은 극심한 마음의 부자유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 사람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지 아니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부자연스럽고 부자유스러웠다. 그날 회의는 총체적으로 실패한 회의이었다. 다음 회의 날짜를 기약했지만, 유쾌하고 의욕적인 약속으로 받아들일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인가. 나는 그날 ‘소통의 적’을 보았다. 그는 아마도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를 것이다. 자기가 소통 파괴의 주역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뒤에라도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을까. 그걸 깨달을 수 있다면 애당초 그런 행동 패턴을 보일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오늘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의로운 행동을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참석한 사람들에게 큰 깨우침을 불러 일으켜 준 데 대해서 스스로 만족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른 장소에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용담처럼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오늘 회의에서 교육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정신 번쩍 나게 해주었지.” 자기중심의 소통으로 일관하는 자위적(自慰的) 소통의 전형이다. 이처럼 일방성의 극치를 보이는 소통은 형식상 대화를 가장할 뿐, 내용상으로는 폭력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는 조직폭력배 사회의 담화구조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소통의 자질에서 보면 가히 ‘소통의 적’이라 할 수 있겠고, 정신건강의 차원에서 보면 일종의 정서불안에 연결된다. 이렇게 자기 존재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존재를 보지 못하게 하는 감정의 안개가 바로 비분강개라는 점이다. 비분강개 현상에 대한 의미 부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비분강개에 대해서 우리의 잘못된 사회적·문화적 고정관념이 잘못된 소통 패턴을 유발하게 하는 면이 없지 않은 것 같다. 비분강개(悲憤慷慨)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으면 ‘슬프고 분하여 마음이 북받침’으로 설명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말 자체는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찬 감정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비분강개는 그런 감정 현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이 실제로 사용되는 맥락을 살펴보면, 단순히 감정 노출 현상을 넘어서서, 더 확장된 가치 개념이 은연중에 작동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비분강개는 그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이 지닌 의로운 태도나 의지까지도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부연한다면, 비겁하고 소심하고 옹졸한 사람이 슬프고 분하여 마음이 북받칠 경우에 ‘그가 비분강개했다’라고 쓰면 왠지 잘 어울리지 않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그런 고정관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비분강개를 용기나 정의감에서 슬픔·분노를 토로할 때만 사용해야 하는 표현으로 인식한다.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민족의 근현대사가 일제에 의한 식민지 고난으로 점철되고, 다시 전쟁과 궁핍과 민주화의 역정을 거쳐 오면서, 슬프고 억울하고 분하고 한탄스러운 정서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경험했던가. 슬프고 억울하고 분하고 한탄스러운 정서를 토로하는 장면 자체가 독립과 자유와 해방과 생존을 갈구하여 저항하는 역사적 장면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따라서 슬프고 억울하고 분하고 한탄스러운 정서를 사회·문화적 가치로 축적하는 사이에 비분강개는 긍정적 가치의 감정으로 수용되고 발현될 수 있었으리라 본다. 이런 인식은 비분강개를 연출하는 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사람 앞에서 비분강개의 감정을 거침없이 보여주는 쪽에서도 이 비분강개의 내용이 일종의 정의감과 협기(俠氣)에서 연유되는 것임을 알게 모르게 내어 비친다. 자신이 얼마나 용감하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인 줄 아는지를 비분강개와 더불어 토해 내는 것이다. 우국충정(?)의 울분을 가득 담아내는 선거 유세 등에서 보여주는 정치인들의 비분강개 스타일의 연설도 실은 비분강개의 사회적 문화적 전통에 기대는 것으로서, 비분강개는 일종의 언어적 문화형(文化型)으로 자리 잡아 정치인들의 스피치 기법으로 자동화되는 국면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와 근대화가 조화롭게 이루어졌다는 세계적 평가를 받는 현재에 이르러서는 우리는 개방적 자긍심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 민주화와 근대화를 관류하는 핵심어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소통’이라고 말하고 싶다. 더 자세히 말하면 ‘개방적 소통’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때의 소통이란 문화적 가치의 수준에서 일컬어지는 개념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 비분강개라는 말(또는 현상)은 현 시점에서 재개념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비분강개는 소통을 방해할 수 있다. 개방적 마인드를 가두어 버릴 수 있다. 상투화 된 비분강개는 대화를 돕지 못한다. 비분강개는 쌍방적 대화와는 무관한 말이다. 비분강개를 감정의 작용으로 본다면, 비분강개의 감정이 가 닿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라고 보는 것이 적실하다. 그러니까 비분강개를 통해서 일종의 감정의 카타르시스[淨化]를 경험하는 것이다. 여기에 비분강개의 순기능이 있기도 하다. 만약 일상적 대화에서 비분강개의 구체적 대상이 있다면, 그 비분강개는 잘 다스려지지 않는 적개심의 변종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서로 대립되는 관점을 가진 양측이 나와서 토론을 전개하다가, 한쪽 패널이 상대 패널을 향하여 날이 선 목소리로 ‘부끄러운 줄 아시오!’ 하고 일갈하는 장면을 보았다. 고도의 개방된 공적 공간에서의 대화와 소통 토론 장면, 이를테면 텔레비전 토론 등에서는 비분강개는 금물이다, 소통의 양식과 태도를 존중해 주는 데서 토론의 참 기능이 살아나는 것이다. 무슨 자격으로 상대를 그렇게 비분강개하여 나무랄 수 있는가. 상대방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시청자들로 하여금 ‘아 저 사람이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구나’하고 판단하게 하는 데에 이르도록 해 주는 것이 개방적 토론 문화 속의 패널이 갖추어야 할 소통 자질이다. 내 감정으로 상대를 모두 주관화하여 야단치고 개탄하고 하는 것은 혼자 있을 때 하는 것이다. 국민 대중이 환시하는 텔레비전 토론에서 쌍방의 대화적 소통 형식을 무시하고, ‘부끄러운 줄 아시오’하고 내 감정만으로 상대를 재단하려 한다면, 그 발언의 동기가 아무리 진정하다 하더라도, 마침내는 국민으로부터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는 소리를 되돌려 듣기에 꼭 알맞다. 국권상실의 비통함을 안으로 깊이 아프게 새기며 ‘절명시(絶命詩)’ 56자에 그 비분강개의 소회를 묵시록처럼 전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매천(梅泉) 선생의 비분강개에 새삼 숙연해 진다. 속인(俗人)들의 얄팍하고 요란하고 감정 배설적인 비분강개를 우리도 이제는 비판할 수 있는 수준에 왔다. | 경인교대 교수
"와! 교과서가 너무 얇다. 옛날에는 배우는 게 별로 없었나봐." "저것 봐라. 아빠가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란다." 경기 파주초등학교(교장 황덕순)에 마련된 파주교육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의 반응이다. 교육 변천 과정 한자리에 지난 4월 파주초에서는 개교 100주년을 맞아 파주교육박물관(이하 박물관)을 개관했다. 1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개관한 박물관은 '파주초등학교 100년 사관', '교육역사관', '파주교육관', '옛날 교실 체험관', '야외 전통놀이 학습장 및 야외전시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민속자료관'도 준비 중이다. 또 실물 전시자료 1900여점과 터치스크린, 3D 입체 영상자료 45점이 확보되어 있어 다른 박물관에 손색이 없다. 그동안 박물관에는 10여개 학교에서 단체 관람을 했고 일반인들도 400여명이 넘게 찾았다. 그중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파주초등학교 100년 사관과 교육역사관. 100년 사관은 파주초가 설립된 이후부터 현재까지 주요 연혁을 중심으로 100년사를 한 눈에 체험할 수 있도록 파노라마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을 졸업한 동문들이 내 놓은 자료들이다. 이 학교 동문인 김순희 씨는 초등학교 시절 6년간 쓴 일기를 기증하기도 했고, 상장과 통지표 이외에 육성회비 납입통지서 등 지금은 보기 힘든 자료들이 모였다. 100년 전 학교와 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 또 직접 찾아볼 수 있는 졸업 앨범(51~97회)과 바닥 유리를 통해 볼 수 있는 각종 메달 및 우승컵은 동문들에게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교육역사관은 삼국시대부터 7차 교육과정이 시행되고 있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별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곳이다. 특히 1차 교육과정부터 7차 교육과정까지 실제 교과서, 교육자료 등이 전시되어 근대 우리 교육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 또한 실제 자료를 구하기 어려운 근대 이전의 교육 자료는 모형과 홀로그램을 통한 영상자료로 보충하여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 校·民·官의 합작으로 탄생 12학급의 작은 초등학교에서 교육박물관을 만들게 된 것은 100주년 기념관을 계획하면서 시작되었다. 한때 40학급이 넘는 학교였지만 학생 수가 감소하면서 생긴 학교 내 빈 공간을 활용하고 100년의 역사를 기념하고자 준비된 사업이었다. 그러나 100년간의 역사 자료를 수집하던 중 박물관의 교육적 가치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파주시청과 파주교육청을 비롯한 파주지역주민들의 관심이 모아졌고, 경기교육청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아 박물관으로 탄생했다. 지역단위에서 교육역사를 정리·보존하여 연구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박물관을 만드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교무부장 박미영 교사(45)는 "우리 박물관을 세밀하게 관찰하면 교육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많은 학교가 방문해 주길 바란다"며 "앞으로 학예연구사가 파견 배치되어 상주 근무하면서 전문적인 관리 체계를 마련해 진정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난 9월에 이 학교로 발령을 받은 황덕순 교장(52)은 "전임 교장 선생님(김기풍 현 칠봉초 교장)을 비롯한 많은 선생님과 주민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박물관이니 만큼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는 전국적인 박물관으로 발전시킬 것"이라며 "우리의 교육 노하우를 후손들에게 전수하고 교육지표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이니만큼 계속해서 가치 있는 자료를 발굴, 보존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파주초는 앞으로도 실물 교육자료 및 민속자료를 계속해서 확보하여 박물관을 파주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만들고 '파주향교'나 '수리홀 통일체험 학습장'과 연계한 체험 학습 프로그램 등을 개발하여 많은 사람들이 박물관을 찾도록 할 계획이다. 박물관의 단체 관람을 원하는 학교나 단체는 홈페이지(www.paju.es.kr)에서 신청 양식을 다운 받아 관람 15일 전까지 접수하면 된다.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한 날(10:00~17:00)에 개방을 하고, 개인 방문도 가능하다. 관람 문의 : 파주초 교무실 031-952-4216 | 엄성용 esy@kfta.or.kr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보물 제414호)* 최효찬 | 저자, 비교문학 박사 위기 때 빛난 '절충의 리더십' "류성룡이 활약한 시대는 당쟁이 시작되고 당쟁으로 인해 최초로 사화가 일어났던 시기이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성혼, 송강 정철, 이산해, 이덕형, 이항복, 윤두수, 이원익 등 기라성 같은 문신들이 있는가 하면, 이순신, 원균, 권율, 김시민, 곽재우, 사명당 등 조선시대에 가장 출중했던 인물들이 그와 함께 활약했다. 류성룡은 이들과 때로는 반목하고 때로는 화합을 하면서 정치력을 발휘하여 국정을 이끌었다. 동인의 계열에 있으면서도 서인인 정철을 변호하여 절충과 상생의 리더십을 실천했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징비록(懲毖錄)〉을 바탕으로 쓴 〈우국의 향기〉에서 저자 이수광은 서애에 대해 묘사하면서 그가 '절충의 리더십'을 가졌다고 말한다. 절충의 리더십은 때로 현실 영합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사관이 쓴 인물평가〉에 따르면 서애는 30여년 관직에 있었지만 임금에게 직간(直諫)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성정이 오히려 임진왜란 전후 위기의 시대에는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온 국토가 왜군에 짓밟혀 있는 상황에서 정쟁의 단서가 될 만한 발언을 하거나 시비를 하는 것은 고위공직자로서의 올바른 길이 아닐 것이다. 이는 요즘 우리 사회를 봐도 알 수 있다. 혼란한 시대일수록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해 세상을 어지럽게 하기보다 말 한마디로 세상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그런 리더십이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서애는 인재를 키우는 데도 누구보다 탁월한 안목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알려진 대로 당시 좌의정이던 서애는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을 적극 천거했고, 선조는 이순신을 종6품 정읍현감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로 7품계나 올려 파격적으로 승진시켰다. 요즘으로 보면 중대장급에서 사단장급으로 진급한 셈이다. 당연히 파격 인사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있었지만 서애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서애의 인재를 키우는 안목이 왜구로부터 조선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애는 이순신뿐만 아니라 종5품 판관 권율 장군도 5품계 특진시켜 정3품인 의주목사에 기용했다. 이순신과 권율의 인사는 조선왕조 500년 사상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서애는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에 절충의 리더십을 발휘해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고 또 인재를 키우는 데도 소신껏 임했다. 자녀 교육에도 관심 갖은 '총리' 뿐만 아니라 그는 가정에서는 아버지로서 솔선수범하며 언제나 집안을 독서하는 분위기로 이끌었다. 임진왜란 전후의 혼란기에 영의정 등 최고위 공직을 지낸 서애였지만 자녀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학문을 점검하고 독려하는 한편으로 따끔하게 질책하고 조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서애는 공부하기 위해 절에 들어간 두 아들에게 자신의 심경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최고 권력을 누리는 총리로서의 준엄한 모습 대신 자식들이 공부에 더욱 매진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절절히 담겨 있는 편지였다. "며칠 동안 너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괴로웠다. 산사는 조용하고 편안하니 독서를 하는 데 아늑하고 평온하지 않겠느냐. 퇴계 선생이 손자에게 주신 이 시를 너희들도 본받기 바란다. '나이 어린 때는 산속 절에서의 즐거움을 가장 사랑하였기에 / 벽사를 드리운 창 깊은 곳에 등 하나 밝혀놓았구나 / 평생 동안 이뤄낸 많은 사업들은 모두가 / 이 한 등 아래서 나온 것이었네'." 서애는 산사에 들어간 자녀들이 공부를 게을리 하자 자녀들에게 '어린 시절 산사의 적막한 등불아래 읽은 책들이 평생 동안의 나침반 역할을 해주었다'는 퇴계의 시를 들려주며 공부에 매진하기를 당부했던 것이다. 요즘 고위공직자들 가운데 과연 자녀들이 무슨 책을 읽고 있으며, 제대로 공부를 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조언을 하는 이들이 있을까? 더욱이 그가 일국의 총리라면 다섯 명이나 되는 아들의 공부에 신경을 쓸 수 있을까? 과연 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국무총리가 아니라 대부분 직장인들도 '바쁘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자녀 교육을 어머니에게 맡겨놓기 예사이다. 아버지는 자녀 교육에 필요한 돈만 벌어다주면 제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퇴계 이황이나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 같은 위대한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자녀 교육에 열성적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심지어 독서를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까지 꼼꼼하게 챙기고 게을리 하면 질책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리더의 한 가지 공통점은 독서 미국 교육과학연구소가 2002년에 발표한 '미국의 리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보고서를 보면 미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은 초등학교 시절에 좋은 책을 많이 읽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반면 범죄자들은 대부분 거의 책을 읽지 않았거나 교육적인 가치가 없는 책을 읽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보고서에는 '초등학교 시절에 읽은 책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KEDI)이 발표한 보고서에도 고등학교 1, 2학년 중 성적이 상위 10% 이내인 학생들의 첫 번째 특징으로 독서량을 꼽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의 분석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특징이 대부분 독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공부는 스스로 자기 주도적으로 한다 ▲학원보다는 도서관이나 집에서 혼자 조용히 공부한다 ▲공부하는 것이 매우 즐겁다 ▲문학작품이나 신문을 즐겨 읽는다 등이다. 서애는 이러한 독서의 중요성을 400여 년 전에 꿰뚫고 있었다. 서애는 틈틈이 자녀에게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는 형식으로 공부를 제대로 하는지를 점검했다. 편지를 보고 아이들의 글이 별로 진전이 없을 때에는 심지어 "젖비린내가 난다"면서 단호히 꾸짖으며 학문에 더욱 힘쓸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모범만큼 더 훌륭한 교육은 없다. 서애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위기의 시대를 살았지만 항상 독서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는 집에서 항상 책을 읽으며 다섯 아이들에게 솔선수범했다고 한다. 퇴계 이황으로부터 "그는 하늘이 내린 인물이다"는 평가를 받았던 서애는 네 살 때부터 붓을 잡기 시작해 66세로 죽을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서애는 열여덟 살 때 관악산으로 들어가 절에서 몇 달 동안 〈맹자〉를 스무 번 읽어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했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고향인 하회에서 〈춘추〉를 서른 번도 넘게 읽었는데, 이때부터 문장 짓는 방법을 조금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서애는 처음부터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맹자〉와 〈춘추〉 등을 공부했는데, 이게 큰 도움이 되어 과거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점수 따기'식 공부 대신, 학문하는 자세로 공부를 한 결과 과거에도 합격하고 학문도 깊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과거 공부를 하는 데 합격하는 길로 통하는 문을 살핀 일이 없다. 다만 경서를 연구하는 학문은 비록 얻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평생토록 아끼며 귀중하게 여기고 있으니, 너희들도 부질없는 과거 공부를 잠시 접어두고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가져다가 정밀하게 사색하고 익숙하게 읽어서 자기의 것이 되도록 한다면, 안목은 저절로 높아지고 마음도 저절로 넓어질 것이니 기타의 보잘것없는 것들이야 힘들이지 않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태산에 오르고 나면 모든 산들이 언덕과 개미둑처럼 작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부디 노력하기 바란다." 서애는 자신의 독서 경험을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일깨워주었다. 한번은 독서를 게을리 하는 자식들에게 서애는 편지로 준엄하게 꾸짖기도 했다. 독서를 하면 모르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고, 또 궁금한 것이 생겨 질문을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독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위인이나 성공한 사람, 학자들의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나 독서광이었다는 점이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집안이 몰락해도 자신과 가문을 일으키는 방법은 오직 독서밖에 없다. 오직 독서만이 살 길이다"라고 호소했다. 책 읽는 집안에서 인재가 난다 요즘은 대부분 학생들이 입시준비 위주로 공부를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책을 읽어보지도 못하고 청소년기를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의 신문 보도를 보면 고등학생들은 대부분 국어 시험에서 큰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한다. 영어와 수학은 평소에 과외나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해둔 덕에 좋은 성적을 얻는 반면, 국어는 문학과 비문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독서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지 않은 학생들은 그야말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당장의 성적을 의식한 나머지 한가하게 소설책이나 읽고 있을 여유가 없다. 반면 평소에 책을 많이 읽어 '책벌레'라는 별명이 붙은 학생들은 그야말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해 국어 시험에서 다른 학생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성적이 높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점수 따기'식 공부와 '정도(正道) 공부'의 차이다. 결국에는 점수 따기식 공부를 하는 학생보다 정도 공부를 하는 학생이 막판 뒤집기에 성공해 더 높은 성적을 얻기도 한다. 그런데 자녀의 교육을 직접 챙기는 부모들은 여기서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부모는 아이에게 점수 따기식 공부를 하게 할 것이냐, 아니면 다양한 양서(良書)를 읽게 해 이해력과 사고력을 높이는 정도(正道) 공부를 택할 것이냐의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초등학교 때부터 점수 따기식 공부를 외면할 수 없어 전 과목 과외를 시키는 경우도 있다. 필자 역시 아이가 전 과목 과외를 시켜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기초를 중시하는 정도 공부 방식을 고수했다. 결국에는 책을 많이 읽은 아이, 즉 기초가 튼튼한 아이가 세상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고 사회성이 높은 아이로 자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더욱이 미국 교육과학연구소의 보고서를 보더라도 독서가 평생을 좌우한다고 했고, 퇴계는 평생의 등불이 된 것이 바로 어린 시절 등을 밝히며 읽은 책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책 읽는 집안에서 인재가 난다는 옛말이 있다. 서애의 다섯 형제 가운데 장남은 벼슬이 장수도찰방에 이르렀고, 차남과 삼남은 각각 세자익위사 세마와 사헌부 지평에 올랐다. 그리고 서애에서 시작해 내리 9대 직계손들이 모두 벼슬길에 올랐다. 물론 음직(국가에 공을 세웠을 경우 그 자손에게 벼슬을 주는 제도)도 있었고, 과거에 급제한 경우도 있었지만 노론이 득세한 조선 후기의 상황을 감안하면 9대째 공직에 나아가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노론계와 달리 영남의 남인 집안은 대부분 당쟁에서 밀려 과거에 급제해도 관직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그들 대부분은 일찌감치 벼슬길을 포기하고 학문과 후학을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벼슬을 하지 못한 선비들을 '백두(白頭)'라고 불렀는데, 이들 중에는 몰락양반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대로 벼슬길에 오른 서애의 후손들은 풍산 류씨의 대종가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파보를 만들었다. 하회마을에 있는 풍산 류씨 대종가는 서애의 친형인 겸암 류운용이 살던 '양진당'이다. 서애는 대종가에서 분리된 소종가로 '충효당'이라고 불린다. 하회에 정착한 풍산 류씨는 서애의 부친 류중영이 문과에 급제해 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냈고, 그의 아들인 겸암과 서애에 이르러 명문가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다. 공직자로서 청렴한 생활 실천해 서애는 평생 청렴결백하게 살아 66세로 세상을 떠날 때에는 장례 비용조차 없었다고 한다. 서애의 제자였던 우복 정경세는 "어찌 10년 동안이나 재상을 지내고도 제갈량이 남겼다는 뽕나무 800그루도 없단 말인가"라며 그의 청렴한 기백을 기렸다. 현재 후손들이 살고 있는 충효당은 서애의 제자들이 그의 정신을 기려 사후에 지은 집이다. 서애는 중앙조정의 관직에 있으면서도 서울에 집이 없었고 전세를 얻어 생활하였다. 당시 지방에서 올라온 벼슬아치들은 한양에 첩을 두었는데 이를 '경첩(京妾)'이라고 불렀다. 경첩은 유행이었는데, 백의정승으로 이름난 황희도 첩을 두기도 했다(서자가 있었는데 나중에 궁중의 물건을 훔치다 들통나 가문에서 쫓겨났으며 성을 조씨로 바꿔 살았다고 한다). 물론 서애는 경첩을 두지 않았다. 서애는 첫째 부인과 사별한 후 재혼을 해 5형제를 두었다. 서애는 25세에 벼슬에 올라 영의정을 지냈고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중국의 선비들이 '서애선생'이라고 칭할 정도로 학문에 밝았다. 청백리로 산 그는 고향에서도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어 풍산 서미동(西美洞)의 깊은 산중에 초가를 짓고 칩거했다. 여기서 그는 임진왜란을 후세의 교훈으로 전하기 위해 〈징비록〉을 썼다고 한다. 서애는 국난에 처한 위기의 시대에 리더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자녀 교육에 열정적인 부모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긴 유시(遺詩)에서 후손들에게 "충효만큼 더 중요한 사업은 없다(忠孝之外無事業)"는 교훈을 내리며 후손들에게 삶의 지표를 제시한다. 후손들은 이처럼 서애의 정신을 본받아 명문가의 전통을 이어갔던 것이다. 이러한 방침은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 방위산업체로 이름난 풍산그룹은 바로 서애의 후손이 창업한 회사이다. 서애는 한 가문의 가장으로서 귀감을 보여주었다. 이는 요즘 비유하자면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와 같은 면모를 보인 것이다. 무엇보다 서애는 공직자로서 청렴한 생활을 앞장서 실천했다. 또 최고경영자가 기업에 꼭 필요한 인재를 키우듯이 이순신 등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천거했고, 가정에서는 자녀들의 교육에 헌신했다. 서애의 청렴한 삶은 오늘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처신이나 입시위주의 공부, 자녀이기주의가 팽배한 현실을 반추해보기에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최남선은 1908년 11월 한국 최초의 잡지인 을 창간하고, 그 권두시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썼다. “따린다, 부슨다, 문허 바린다,/ 텨……ㄹ썩, 텨……ㄹ썩, , 튜르릉, 콱.” 거대한 산과 집채만 한 바위를 때려 부수는 것은 이제 천둥과 번개가 아니다. 바다의 거친 파도였다. 이 파도는 서구문명을 상징한다. 서구문명의 상징인 파도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낸다. 거세게 밀려드는 파도는 한국 사람들에게 호통친다. 무지몽매한 인간들아, 우리의 힘을 보았느냐! 그렇다면 어서 잠에서 깨어나라, 야만에서 탈출하라, 우리의 힘을 믿어라! 거센 바다를 헤치고 외국으로 떠나라! 바다가 밀려왔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천둥과 번개보다 더 두려운 문명제국의 해일. 바다를 점령하는 국가, 바로 문명제국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영국, 태평양을 지배하는 미국, 동아시아의 길목을 점령하고 있는 일본. 바다를 지배하지 않고서는 문명제국이 될 수 없었다. 윤치호도, 서재필도, 유길준도, 이광수도, 최남선도, 김옥균도 모두 바다를 건너 문명제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바다를 건넜던 이유는 조기유학의 붐에 편승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한국이 싫어 도피성 유학을 떠났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이들이 왜 하필이면 바다를 건너야 했을까? 왜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지 않았을까? 청나라는 쇠약해 가는,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 일본이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가열차게 추진하고 있을 때, 청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한국 사람들이 바라본 19세기 후반의 청나라는 더럽고 불결한, 아편에 찌들어 사는 야만국이었다. 서재필이 을 창간하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을 때, 그리고 많은 한국의 계몽지식인들이 ‘독립’, ‘독립’ 또 ‘독립’을 부르짖었을 때, 그 독립은 다름 아닌 중국으로부터 완전한 자주독립이었다. 일본과 미국이 문명의 표본으로 다가왔을 무렵, 청나라는 절대 닮아서는 안 될 후진국가의 모델로 전락해 있었다. 특히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참패한 이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니 당연히 많은 지식인들은 일본과 미국을 선호했고, 국가에서는 일본과 미국으로 관비유학생들을 파견하게 된다. 사비 유학생이 등장하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파들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김옥균과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망갔고, 서재필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떠났다. 개화파의 실패로 일본에서 학업에 열중하고 있던 학생들은 뒤통수를 맞았다. 정부가 학비지급을 중단한 것이다. 따라서 국비유학생들은 한국으로 강제 귀국해야만 했다. 이후 한국정부의 유학생 파견은 거의 실시되지 않았다. 1894년 일본의 거센 입김이 작용한 갑오경장이 단행된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개혁이 단행되었고, 그동안 주춤했던 유학생 파견이 다시 추진되었다. 고종의 교육입국조서 반포 후 해외 유학생 파견 사업은 다시 탄력을 받았다. 정부의 주요 인사들의 자제들 중에서 선발된 113명이 1895년에 일본으로 떠난다. 이들 또한 일본의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 입학하여 근대 학문을 배운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났고 연이어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이로써 한국은 친러세력의 지배하에 놓인다. 격변하는 정세에 따라 유학생들의 활동 또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는 국비유학생이라는 신분적 제약 때문이었다. 그들의 몸은 국가에 얽매여 있었다. 정부는 일본유학생들에게 학비지급을 중단하고 그들을 한국으로 소환한다. 잠시 중단되었던 정부의 일본유학생 파견은 1897년 후반에 들어 재개되었다. 그렇지만 1903년 한국정부는 또다시 일본유학생 전원에게 귀국훈령을 내렸다. 이유는 경비부족이었다. 정부의 소환 명령이 떨어지자 일본에 있던 유학생들은 국가의 명령에 반발하며 단지(斷指)를 결행한다. 피로써 자신들의 주장을 널리 알린다. ‘공부하고 싶다. 우리는 한국의 문명개화를 위해 이 한 몸 받친 사람들이다. 우리가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돈을 보내달라’. 유학생들이 피를 흘리자 한국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위해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유학생들을 돕기 위해 정부가 아닌 시민사회가 나선 것이다. 더 이상 정부가 유학생들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학생들의 단지동맹이 있은 후 한국정부의 유학생 파견은 주춤했고, 드디어 사비 유학생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때는 바야흐로 1905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1908년 10월 11일 오후 1시, 도쿄 시내에 있는 어떤 건물에 백여 명의 청년들이 운집했다. 그들의 표정은 비장했다. 학생들을 헤치고 한 사내가 연단 위로 올라갔다. 그의 이름은 윤태진(尹台鎭)이었다. 연단 위로 올라간 윤태진은 가슴 벅찬 표정으로 일장 연설을 한다. “실로 가슴이 벅찹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한 이후 이렇게 많은 수가 당도하기는 처음입니다. 어찌 축하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일은 한국유학생사에 남을 미증유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조국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 옵니다. 우리나라는 밖으로는 열강의 보호를 받고, 안으로는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된 상황은 국민의 단결심이 없는데서 연유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서구열강과 일본이 독립국이 된 것은 국민의 단결심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천만 동포가 이천만 개의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어찌 국가가 독립할 수 있겠습니까. 유학생 여러분! 우리는 단결해야 합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단결하는 일뿐입니다.” 윤태진의 축하연설이 끝나자 신입 유학생 대표인 윤우식(尹宇植)이 답사를 했다. “선배 여러분! 이렇게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조국을 떠나 만리타국에 왔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장래의 희망을 찾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그 희망은 다름 아니라 고통받는 국가를 위해 이 한 몸 받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유학생들의 의무인 것입니다.” 이후 여기저기서 연설이 빗발쳤다. 환영회 자리는 갈수록 그 열기를 더해갔다. 유학생들은 한국의 ‘미래’를 위해 일본에 왔다. 그 미래란 어떤 모습이었을까? 또한 한국보다 몇 십 년의 미래를 이미 앞당겨 살고 있는 일본에서 그들은 어떻게 생활했을까? 미래로 돌아가다 모든 것이 낯설고 놀랍기만 했다. 도쿄는 유학생들에게 미래의 도시였다. 거미줄처럼 뻗은 전선줄, 눈앞을 휙 하며 달아나는 자동차, 굉음을 울리며 전진하는 기차, 3~4층 높이의 건물. 모든 풍경이 낯설었다. 근대화된 도쿄의 문물은 유학생들 전체를 삼켜버릴 듯이 포효했다. 유학생들은 일본에서 서구의 학문을 습득해 갔다. 근대의 과학과 기술을 배웠고, 언어를 배웠고, 철학을 배웠다. 특히 다윈의 진화론을 현실 사회와 접목한 ‘사회진화론’은 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강한 자만 살아남고 약한 자는 멸망한다. 힘센 놈이 세상을 지배한다. 근대화된 일본에서 그들은 생존경쟁의 치열함을 배워나갔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길은 철저하게 힘을 기르는 것이다. 서구 문명의 힘으로, 이를 먼저 배운 일본을 모범으로 하여. 유학생들은 빡빡한 일본 학교의 교과과정을 이수했다. 일본 학교는 한국의 서당과 달랐다. 학생들은 군인처럼 훈련을 받았다. 수업이 끝나면 10분간 쉬는 시간이다. 10분 후 다시 수업을 하는데 수학과 물리학과 지리 등을 오전 중에 배운다.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가 울리면 30분간 점심시간이다. 점심을 먹고 운동장에서 잠깐 동안 휴식을 취한다. 오후 수업 종이 울리면 모두 운동장에 집합한다. 운동장에 모여 병식체조(兵式體操)를 훈련하고 오후 2시가 되면 수업은 끝난다. 일본이라는 미래사회에서 유학생들은 ‘문명인’으로 훈련받았다. 일본과 서양제국들은 한국을 야만국으로 취급했다. 일본으로 떠난 유학생들은 야만국에서 문명국으로 시간대를 이동한 셈이다. 일본에서 한번 굴절된 서구문명이었지만 학생들의 열광은 거의 절대적인 숭배에 가까웠다. 유학생들에게 문명이란 지고지선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배워온 모든 사유체계를 전복시킬 만큼 그 위력은 컸다. 유학생들은 몸은 하나이지만 정신은 두 방향으로 가지를 뻗었다. 한 몸으로 두 삶을 살아가는 것. 미래와 과거를 동시에 살아야 하는 숙명이었다. 유학생들은 전근대 사회라 불리는 한국에서 태어나 근대 사회로 추앙받는 일본에서 생활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럴수록 그들은 한국에 대한 일정한 거리감을 느꼈다. 유학생들은 서구의 문명을 다른 누구보다 재빠르게 받아들이고 이를 한국 사회로 전파하였다. 우선 그들은 유학생 단체를 만들었다. 유학생 단체는 유학생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상을 함께 공유하는 역할을 겸했다. 또한 그들은 잡지를 만들어 자신들이 학습한 문명을 전파한다. 최초의 유학생 잡지인 를 비롯하여 , , 등이 연달아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신문과 더불어 잡지라는 새로운 근대적 미디어는 인민들을 계몽하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던 최남선은 일본에서 를 편집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고국으로 돌아와 1908년 한국 최초의 잡지인 을 창간했던 것이다.[PAGE BREAK]박람회, 문명제국의 실상을 파악하다 1903년 오사카 박람회[大阪博覽會]를 시작으로 일본은 박람회장 내에 식민지관을 설치하여 다른 나라의 인종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오사카 박람회 측은 한국인을 비롯한 32명의 이민족을 ‘학술인류관’에 보란 듯이 전시했다. ‘학술인류관’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에도 불구하고 이는 유럽의 ‘식민지관’을 그대로 복제한 것이다. 1907년 3월 도쿄 박람회가 열리고 있는 우에노 공원에서 1903년과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한국인 유학생 일부가 도교 박람회를 관람하기 위해 우에노 공원에 들어섰다. 학생들은 관람료 10전을 내고 제 5호 조선관 부속 수정관에 입장하였다. 눈부시게 화려한 수정관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해하던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물품’이 있었다. 복장은 매우 초라했다. 얼굴은 하얗게 화장을 했고, 볼 주위에는 진흙처럼 뒤범벅된 붉은 연지 기름이 금방이라도 흘러 떨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통역관이 서 있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람자들에게 괴상망측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 전시품은 다름 아닌 한국인 여자였다. 학생들은 조선관에 전시되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남자는 부산 출신이었고, 여자는 대구 출신이었다. 이들은 도쿄 박람회에 가면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는 일본 상인의 꼬임에 빠져 따라왔다. 그들은 박람회에서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몰랐다. 그저 일본인들이 시키는 대로했을 뿐이었다. 일본인들은 돈을 미끼로 이들을 전시했다. 일본인들은 돈을 벌 목적으로 한국인을 전시했다고는 하지만, 그 행위 안에 잠복하고 있는 자신들의 인종적 우월감을 몰랐을 리 없다.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은 밀림에 사는 동물과 같았다. 미개하고 열등한 인종, 그렇기에 유리창 뒤에 전시해 놓고 관람료를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한국 여자(인종)를, 특히 초라하고 꿈틀거리는 동물처럼 전시함으로써 한국이 ‘야만국’임을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확연하게 보여 주었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문명제국 일본, 구원자인가 침략자인가? 대다수의 유학생들이 그랬던 건 아니지만,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 학생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문명제국으로 편입하려는 욕망이었다. 특정한 어느 나라를 닮는 것이 아니라 ‘문명’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권력에 편입하고 싶은 욕망. 그래서 누구보다 더 열심히 문명제국의 문화와 풍속을 모방하려는 관성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일종의 문명제국에 대한 콤플렉스지만, 그 콤플렉스를 벗어나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문명제국은 두 얼굴을 지닌 야누스와 같다. 근대 초기 유학생들은 몰랐을지 모른다. 문명제국이 자신들의 구원자가 아니라 결국 침략자라는 사실을. 초기 유학생들에게 문명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었고, 자신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무기였다. 그들은 문명국의 힘을 빌어서 한국 또한 문명제국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 인천대 강사·한국문학
박경민 | 역사 컬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교회가 중세인의 모든 것을 제어하던 유럽사회도 도시의 발달과 함께 근대를 향한 허물벗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봉건군주들이 교황권을 배제하는 왕령국가를 건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4세기 이후 중세 유럽사회를 받쳐주고 있었던 양대 지주인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봉건제가 무너지고 농민반란이 이어졌다. 거듭된 수난으로 약해져가는 교황 성직임명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로부터 '카노사의 항복'을 받아내고 교회개혁에 앞장을 섰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불행한 최후를 마친 후(1085년), 2세기만에 교황권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황권 쇠퇴는 유럽의 단일성 파괴의 신호탄이었다. 소위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세 유럽연합의 붕괴가 교황 보니파시우스 8세(1294~1303)의 재임 시에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보니파시우스 8세는 교황 우월적 내정간섭 문제로 영국과 프랑스 왕과 갈등을 빚다가 1303년 프랑스 왕 필립에게 체포되어 연금을 당하는 수모를 당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교황들이 약 70여 년 동안 프랑스 왕의 꼭두각시로서 아비뇽에 강제로 머물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시인 단테나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 등을 비롯한 이탈리아 지성인들은 아비뇽의 교황들을 프랑스 왕의 포로라 비판하면서 '교황의 바빌론 유수(幽囚)'라 비꼬아 표현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아비뇽 교황청의 과세확대와 징수방법은 유럽 전체에 걸쳐 교회에 대한 원성을 샀고 점입가경으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와 대립하니, 이에 대한 강한 비판론이 제기되었다. 즉, 성직계급에 대한 불만과 교황권에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70여 년의 아비뇽 교황 시대는 일단 그레고리우스 11세에 막을 내렸지만, 그레고리우스 11세는 로마로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후 후임 교황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로마 군중들의 폭력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후임 교황은 나폴리 출신 우르바누스 6세(1378~ 1389)였다. 그러나 선출 이후 그가 도움을 준 프랑스 추기경단을 푸대접하자, 프랑스 추기경단은 로마에서 철수하여 클레멘스 7세(1378~1394)를 따로 선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교회에 두 명의 교황이 생긴 것이다. 이 시기가 교황권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상처를 주게 된 대립교황시대이다. 이때부터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이 따로 분립되는 상태가 약 40년 간(1378~1417) 지속되었다. 이때 유럽 국가들은 이해득실의 눈치작전으로 어느 한 쪽에 가담해야만 했다. 이탈리아(로마)와 프랑스(아비뇽)가 직접적인 이해 당사국이라면 나머지 국가는 국가 간의 역학관계, 즉 우호관계나 적대관계를 고려해서 어느 한 쪽에 가담하는 복잡한 국제관계가 형성되었다. 프랑스에 우호적인 스페인과 스코틀랜드 및 독일의 일부 제후들은 아비뇽 측을, 그와 반대로 영국과 네덜란드, 신성로마제국, 포르투갈, 스칸디나비아 제국은 로마 측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참담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1409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공의회, 1414년에는 콘스탄스 공의회가 개최되어 우여곡절 끝에 오랜 교황의 분립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교황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당시 수많은 비판가들 가운데 윌리엄 오캄이 있었다. 그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마르시글리오(Marsiglio of Padua)와 존(John of Jandun)은 〈평화의 옹호자〉라는 책을 저술하여 교황권의 한계를 꼬집었다. 봉건제 붕괴 가속화한 흑사병 유행 중세 서양의 정신적 지주였던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권위에 대한 회의가 일자 민심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두려움에서 종교가 시작되었다 전제한다면, 이러한 조짐은 당시 유럽인들이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대혼란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상업의 발달과 화폐경제의 활성화, 십자군 운동의 실패, 교황권의 추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데, 유럽인의 정신적 공황을 불러 일으켜 정신보다는 물적 욕구를 자극하여 '돈을 벌자'는 경제욕구 팽배로 이어졌다. 한편 봉건영주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화폐가 많이 필요해짐에 따라 부역 대신에 생산물과 화폐를 거두었다. 다시 말해서 봉건국가에서 왕령국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절실해진 것이 돈(화폐)이었다는 말이다. 농민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둔 소출을 시장에 내다 팔아서 돈을 벌었고 일정한 지대(地代), 또는 세금을 낸 나머지는 저축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농노의 신분에서 차츰 벗어나 경제적인 향상을 누릴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 무렵 유럽 전체를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간 대사건이 발생하였는데, 1347년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페스트(흑사병)의 유행'이 바로 그것이었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모르는 상황에서 페스트라는 괴질은 전 유럽으로 파급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무려 유럽의 인구를 삼분의 일로 감축시키고 말았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전체 인구의 과반수가 사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음의 위안을 주어야 할 가톨릭교회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민중들에게 스트레스만 주었다. 페스트는 창궐하고 민심이 흉흉하니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했겠는가. 흑사병으로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자 각 지방의 영주들은 농촌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농민의 처우를 개선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페스트가 사라지자 생활이 곤란한 영주들은 다시 농민들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358년 프랑스에서는 '자크리 반란'이 일어났는데, 여기서 '자크(Jaques)'는 흔해빠진 프랑스 남자를 일컫는 말이며 '자크리(Jacquerie)'는 당시의 농민폭동 그 자체를 가리킨다. 쉽게 '김 서방의 난'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 난은 노르망디·피카르디·샹파뉴 지방의 농민들의 폭동이었으며 많은 귀족들이 살해되고 방화가 벌어졌다. 이를 왕은 무력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한편 1381년 6월 10일 영국의 켄트 주에서는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났다. 이 난은 영주에게 저항하여 와트 타일러가 주도한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반란이었다. 반란군이 캔터베리 시와 런던을 점령하자, 위기감을 느낀 왕실이 유화적 태도로 타일러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였다. 타일러는 국왕 리처드 2세와의 면담을 통해서 농노제 폐지, 시장독점 배제, 지대율의 인하 등을 약속 받고 두 번째의 면담에서 교회재산 몰수, 농민에 대한 토지분배를 관철시키려 하였지만 런던 시장 월워스의 계략에 빠져 살해되고 지도자를 잃은 농민군도 진압되었다. 비록 농민반란은 결과적으로 영주와 국왕에 의해서 진압되었지만 이러한 농민의 신분해방 운동, 즉 '봉건체제의 붕괴'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고 말았다. 신도들로부터 외면 받는 가톨릭 12세기에 마케도니아로부터 카타리(순수파)의 사상이 여행 상인과 십자군에 참전한 군인들에 의해 유럽에 도입되었다.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경건한 군인(일반 신도)들은 직접 성지 예루살렘에서 가난했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는데, 목수였던 가난한 예수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교회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더불어 가난했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미 12세기에 성장한 도시들은 더 이상 주교들의 교권 하에 있지 않아 도시에서는 민중들의 발언권이 확대되었고 이에 일반 신도들도 자각하여 교회와 종교문제를 성서에 입각하여 해결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타리파는 12세기 중반 독일의 쾰른에서 처음 시작되어 차츰 프랑스와 이탈리아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특히 남 프랑스의 카타리파를 '알비주아(Albigeois)'라 불렀으므로 일명 '알비파'라고도 하였다. 알비파는 가톨릭교회의 정통적 교의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는데, 악의 세계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육식과 성(性), 결혼, 재산을 완전히 부정하는 철저한 금욕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또한 철저한 반정부 노선을 걸었는데, '황제는 사탄의 수괴, 제후들은 사탄의 협조자'라 비난하였고 남 프랑스, 특히 알비 지방의 카타리파는 프랑스 왕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제후들과 제휴하여 '알비 전쟁(1209~ 1229)'을 일으켰다. 한편 1173년 프랑스 리용의 상인이었던 왈도는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일종의 사회구제단체를 창설하였다. 그는 모든 재산을 버리고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청빈의 고귀함에 대해서 설교하였다. 왈도파가 가톨릭교회를 긴장시킨 이유는 성직자들을 무시하였고 진실한 크리스천의 길이란 오로지 가난한 생활을 하는 것이라 주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성직자 무용론, 다시 말해서 성직자의 역할과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모든 교의를 부정하였다. 1184년 교황 루치우스 3세가 왈도의 활동을 금지시켰으나 그는 이에 반발하였고 결국 파문을 당했다. 오히려 종교개혁 앞당긴 마녀사냥 사태가 심각해지자, 국가와 교회가 공통적 위기감을 느끼고 공동으로 대처하였다. 그들이 정치·사회·종교의 기반을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1183년 교황 루치우스 3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교회가 파문한 이단을 즉시 제국이 체포하여 국가법정에 세우는 종교재판 설정에 합의하였다. 당시 유럽사회는 정치와 종교를 공동 운명체적인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종교재판의 절차는 교황 인노첸시우스 3세 시대에 완성되었다. 국가는 이단자가 고발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능동적으로 색출하며 이단 용의자에 대한 공소를 제기하기 위해 종교 심문관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1252년에는 이단자가 이실직고하도록 종교 재판관들에게 고문까지 허용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당시의 신학자들은 신앙 문제에 있어서 폭력을 배격하였지만 일반대중들은 종교적 이단자를 곧 정치적 반란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고문허용이라는 불행한 결과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속칭 '마녀사냥'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종교재판은 원래 이단자를 색출하고 단죄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교회의 시책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나 정치적인 반대파의 숙청에도 교묘히 이용되었다. 국가는 이단자가 고발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들을 적극 색출하여 공소를 제기해야하는 상황에서 익명의 제보만 있어도 '체포 → 구금 → 기소 처형'의 정해진 코스를 진행하였다. 게다가 당시는 개인별 검거건수가 저조하면 바로 무능 아니면 직무유기로 이어지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1517년 마르틴 루터 이전부터 여러 가지 개혁운동이 있었다. 일반인 청빈운동으로 일컬어지는 가톨릭 내부의 개혁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12세기의 카타리파와 왈도파의 이단운동에 이어 13세기에는 교회개혁은 탁발 수도회, 즉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코 수도회에 의해서 자극을 받았다.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부자를 무조건 비난하거나 재산 그 자체를 악이라 매도하지 않았다. 이러한 탁발 수도회가 중세 그리스도교 사회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미술은 특히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두 수도회는 포교 사업을 확장하여 중국까지 파고 들어갔다.
신아연 | 호주 칼럼니스트 한국의 대학 입시가 가까워 올 때나 학년 말경이면 호주 유학에 관해 물어오는 주변 사람들을 자주 접한다. 중고생들은 물론이고 초등학생조차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둬야 하는 한국 실정에서 한 학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이 되면 뭔가 미진하고 만족스럽지 않은 지금의 학업 상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이나 돌파구를 찾고 싶은 심정에서 일 것이다. ‘머리 회전 빠르고 두뇌 기능 말랑말랑할 때 영어가 쏙쏙 들어가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초등학교 저학년인 자식을 1, 2년 정도 단기 유학을 시키고 싶다는 학부형들을 비롯해서, 자녀가 중학생만 돼도 내처 호주에서 대학까지 보내는 게 어떨지를 진지하게 상의해 오는 부모들도 있다. 부모와 자녀들이 머리를 맞댄 심사숙고 끝에 마침내 ‘유학을 간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고 이와 더불어 기왕 가는 것, 제대로 해 보자는 의욕 또한 하늘을 찌르게 마련이다. 유학생활의 이점은 생활공간과 일상 자체가 바로 영어 습득 체험 기회로 하루 24시간을 영어를 하며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원컨대 꿈조차 영어로 꾸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고스란히 ‘영어의, 영어에 의한, 영어를 위한’ 시간으로 채워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의욕이 이 정도로 넘치다 보면 학교생활뿐 아니라 먹고 자는 곳도 기왕이면 호주 사람 집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타진해 온다. 자녀가 유학 기간 중에는 되도록 한국 사람과 접촉을 안 했으면 하는 것이다. 부모 동반 유학이 아닌 경우 현지에 친척이나 지인 등 자녀를 돌봐 줄 사람이 있다 해도 다만 얼마간은 자녀 혼자 독립적으로 영어권의 생활을 고스란히 경험하게 하고 싶다는 욕심에서이다. 호주 현지인들과 생활하려면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거나 호주인 집에서 하숙(홈스테이)을 해야 하는데 원한다면 학교에서 외국 유학생들과 홈스테이 가정을 체계적으로 연계해 주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호주 가정에서 유학 짐을 풀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 발생한다. ‘이제부터 내 아이가 호주 사람들과 밤낮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겠지…’ 한다면 대부분 착각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호주인 홈스테이를 경험한 한국 학생들 대부분이 제대로 적응을 못 하거나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일쑤이며, 심지어 다시는 호주 사람 집에 안 가겠다며 공포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말하기 좋게는 이질적 언어와 환경에 어린 학생들이 적응을 못한 탓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고 듣게 되면 단순히 문화 차이와 언어 불 소통에서 원인을 찾을 일만은 아니라는 느낌이다. 한국 학생들에 대한 호주인들의 공통적인 평가는 한 마디로 ‘기본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자고 난 후 침대나 책상 정돈, 옷가지 개기, 욕실 사용 후 뒤처리 등 개인의 위생과 신변 정리 습관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지적이다. 물론 한국 학생들 처지에서도 할 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정에 따라 지나치게 부실하고 빈약한 식단을 제공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사사건건 일거수일투족을 트집 잡거나 학생들의 행동에 지나친 잔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심하다 싶은 쪽은 역시 한국 학생들이다. 호주 하숙집 아줌마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눈치를 살피려 해도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어질러도 뒤치다꺼리는 당연히 엄마의 몫이며 그저 공부만 잘하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 호주에 왔다고 해서 갑자기 자기 주변을 척척 정리 정돈하기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탓이다. 더욱이 깔끔한 집에 걸렸다가는(?) 영어 회화보다는 묵묵히 입 다물고 청소하는데 시간을 죄다 보내야 하는 설움조차 겪을 판이다. 특히나 호주 사람들은 욕실 사용 후에 물기 한 점 남김없이 깨끗하게 닦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바닥에 머리카락을 흘린다거나 세면기 주변이 젖어 있을 경우 질색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아왔다. 우리나라 부모들이 그저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식의 응석받이로 자식들을 키우고 있다면 호주 부모들의 자녀 양육 관은 사람 사는 일의 기본을 철저히 가르치는 것을 우선시한다. 내가 사용한 물건을 제자리에 두고, 내 주변은 내가 정리하는 것을 아주 어릴 때부터 몸에 배도록 훈련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 간의 최소한의 책임이자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를 익히는 첫걸음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가까이 지내는 호주 청년 하나가 잠시 한국의 한 가정에 머물면서 어릴 적부터 습관화된 매너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경탄 어린 칭찬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 청년은 기상 후 반듯하게 이부자리를 개키고 샤워를 하고 난 후에도 몸을 닦은 타월로 말끔하게 물기를 훔쳐내는 등 지나간 곳마다 두 번 손 갈 일이 없도록 자기 단속을 철저히 하더라고 했다. 자기 자식들을 그렇게 가르치고 남의 자녀들에게도 같은 가정교육을 기대하는 이 나라 사람들의 눈높이를 맞추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제멋대로 살아온 한국 학생들로서는 호주 가정의 엄격한(?) 규칙을 지킨다는 것이 고역스런 일이 아닐 수 없고, 그러다 보면 밉살스레 보이게 되어 말 한마디라도 퉁명스레 주고받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대개는 한 달, 길어야 두 달을 채우지 못하고 보따리를 꾸려 다시 한국 가정으로 거처를 옮기는 학생들을 볼 때면 씁쓸함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느껴진다. 어린 아이들을 탓할 게 아니라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가르친 부모 탓이라는 생각 때문에서이다. 귀한 내 자식이 남의 나라에 공부하러 가서 집에서도 생전 해 보지 않은 방 청소나 목욕탕 청소를 하고 있다면 펄쩍 뛸 부모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자유롭게 말을 통하기 위해서는 피차간에 마음을 여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함께 있는 공간이 즐겁게 느껴져야 비로소 대화가 오고 갈 수 있는 법이다. 기본 예의가 없는 이방의 어린 학생들을 너그러운 시선으로 받아 줄 수 있는 호주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14년을 호주에서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이 나라 사람들을 겪어온 경험자로서 이 기회에 한마디 충고하고 싶다. 혹 호주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면 원어민을 통해 자식에게 영어를 가르치겠다는 섣부른 욕심만 가지고는 십중팔구 일을 그르치게 된다는 것을….
김정호 | 서울 양화초 교사 우리나라에서도 대학 생활을 경험한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시험에서 부정행위의 유혹을 받았거나,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시도한 적이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험에서의 부정행위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을지라도 어떤 식으로 소위 ‘커닝’이라고 부르는 시험 부정행위가 이루어지는지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시대가 변하여 이러한 시험에서의 부정행위나 그 행위의 방법들이 다양하게 변하고 그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바뀌었을지라도 우리 사회에서는 보통 한두 번 시도하는 추억거리로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행위도 심하면 학생의 학적을 박탈할 수 있다는 논리에 대한 논쟁이 현재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신학기가 시작되던 지난 9월 초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한 대학에서는 기말고사에 있어서의 부정행위 학생들에 대한 학교 측의 제명조치가 부당하다는 베이징시 교육위원회의 결정문을 받고 이에 승복할지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다. 베이징대 시험부정행위자에 일벌백계 사건의 발단은 지난 1월 학기말고사를 치르던 이 학교 학생 10여 명이 시험부정행위로 학교 측에 적발되면서 시작되었다. 학교 측은 이들이 시험에 나올 내용을 요약한 쪽지 및 자[尺]를 몸에 지닌 채 시험장에 들어간 행위에 대해 엄중한 시험부정행위로 간주하고, 이들에게 일괄적으로 퇴학조치를 내렸다. 학교 측의 입장은 대학생들의 관리를 위해 중앙정부에서 정한 ‘일반대학교 학생관리규정(普通高等學校學生管理規程)’에 명시된 ‘시험에서 타인이 대신 시험을 본 행위, 타인을 대신해 시험을 본 행위, 부정행위를 한 행위, 통신설비를 이용한 시험부정행위 등 기타 시험부정행위가 엄중할 경우 학교는 학생의 학적을 박탈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퇴학을 당한 10명의 학생은 모두 이러한 엄중한 시험부정행위를 저질렀고 학교 측에서는 앞의 교육부 명령에 따라 이들에게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이는 정당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학교 측의 조치에 대하여 몇 명의 학생들은 불복하였고, 베이징 시교육위원회에 이의를 신청하였다. 학생들의 주장은 이 학교에서 교육부의 명에 따라 자체적으로 마련한 ‘시험에 있어서의 부정행위에 관한 결정’이 시험에서의 사소한 부정행위도 용납하지 않고, 이를 저지른 학생들에게 일괄적으로 퇴학조치를 내리도록 해 학교의 권한 남용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들이 참가한 시험에서 휴대한 쪽지 등이 직접 시험부정으로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시험부정으로 간주되어 퇴학처분을 받는 것은 너무 심하기 때문에 학교 측의 퇴학조치에 수긍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교위 ‘커닝 대학생’에 복학 판결 8개월 동안 베이징시 교육위원회에서 논의한 결과 학생 측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고 인정됐다. 시교육위원회는 대학 측에 이들 4명에 대한 퇴학처분을 취소하라는 결정문을 내려보냈다. 시교육위원회가 수긍한 이들의 주장은 학교는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기관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들이 있으면 마땅히 이들을 교화시키는 교육을 다시 할 필요가 있는바, 이러한 학생들에 대한 재교육의 기회를 활용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손쉬운 조치인 퇴학을 결정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특히 학생들의 사소한 잘못을 가지고 학교는 퇴학이라는 강경조치를 취한 것은 학생 개인과 가정에 매우 큰 영향을 가져오게 될 것이므로 학교 측은 이러한 강경조치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 측은 이번 시험부정행위자에 대한 조치가 지나치게 강경했다는 시교육위원회의 지적에 대해 아직도 수긍하지 못하는 분위기이다. 학교 측은 선량한 학생들을 보호하고 학습 분위기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벌백계로 다스려 타인에 귀감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항변한다. 이러한 학교 측의 주장은 현재 중국에서 치러지고 있는 모든 시험에서 부정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사회문제가 되는 것에 대한 교육기관으로서의 엄정한 조치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날이 갈수록 지능화되고, 대범해지는 온갖 시험에서의 부정행위는 이제 중국 전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이러한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강경한 조치로 따끔하게 본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각종 시험에서의 부정행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우리의 대학시험에 해당하는 까오카오[高考]에서는 물론이고, 각종 자격증 시험, 심지어는 어학능력시험에서조차 빈번하게 대리 시험 및 첨단 장비를 이용한 부정행위로 몸살을 앓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시험에서의 부정행위를 퇴치하기 위해 각 시험담당 부서들에서는 대안 마련에 분주한 가운데 중국 교육부는 지난해 9월 1일부터 실시하게 된 ‘일반대학교 학생관리규정’의 54조 4항을 통하여 시험에서의 엄중한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학적을 박탈할 수 있도록 규정한 바 있다. 中 각종 시험 부정행위로 골머리 교육부의 이러한 규정에 근거하여 현재 각 대학은 자체적인 학교 규칙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베이징대학[北京大學]의 경우 학생이 시험 중에 부정행위를 위한 종이 등의 물건을 휴대할 경우 그것을 보았건 안 보았건 간에, 이는 시험부정행위 혹은 엄중한 학술규범 위반행위로 규정하여 시험 성적을 영점으로 처리하고,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리도록 되어 있다. 또한 런민대학[人民大學], 중국정법대학(中國政法大學) 등 기타 대학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시험부정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을 하도록 되어 있다. 시험에서의 부정행위는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게 현재 중국 대학의 학생 및 학교 측에게 형성된 공감대이지만 이를 퇴학으로까지 결부시키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학생 측의 의견과 이를 통해 선량한 학생들을 보호하고 학교의 기강을 유지해야 한다는 학교 측의 의견 갈등 속에서 이번 베이징 시교육위원회의 ‘퇴학처분 철회’ 건의가 향후 각 대학의 시험부정행위자에 대한 처벌과 관련하여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관심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