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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양명희 | 경희대 교수 교육의 질적 개선을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전개되고 있다. 교실 수업 개선, 교원평가제 도입, 우수교사 확보, 수업 전문성 개발 등이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제도적인 장치만으로 교육혁신을 보장하기는 어렵다. 진정한 변화는 교사의 의지와 참여를 수반할 때 가능하다. 교사동기에 대한 관심 높아져야 교육혁신의 주체로서 교사의 중요성은 교사가 교수·학습 과정을 주도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우선 찾아볼 수 있다. 교사는 학생들의 학업 성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며, 교사의 행동과 사고는 학생들의 사고, 태도, 가치관 및 행동 변화로 연결된다. 따라서 교사가 수업과 학생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지각을 이해하는 것은 교육의 질적 개선을 위해 중요하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나라는 교사에 대해 주로 정책적이고 거시적인 접근을 취함으로써, 교사들이 수업, 학생과 관련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며, 교직에 대해 가지고 있는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아이들의 학습 동기를 유발시키기 위해 아이들이 경험하는 어려움이나 사회 심리적 욕구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면, 동일한 논리로 교사가 교직에서 지각하는 어려움이나 경험하는 문제에 대해서 귀 기울이고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3단계로 나눠지는 교사관심사 교사들이 학교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이나 그들이 지각하는 문제점은 교사관심사라는 틀 속에서 연구되어 왔다. 교사관심사는 교사교육 분야의 한 주제이며, 미국의 Fuller가 1960년대부터 이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탐구한 영역이다. Fuller는 교사양성 프로그램이 의도한 교육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것은 교육을 받는 대상인 교사의 관심사와 흥미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교사 교육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교사들이 경험하는 문제점과 관심사를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이러한 생각들은 그가 예비교사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하다가 발견하게 된 것이다. 11주간 그룹면담 연구를 하던 중 예비교사들의 관심이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차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을 주목한 것이다. 학기 초에 예비교사들의 관심은 어떻게 새로운 교직환경에서 적응, 생존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으나 후반에는 수업이나 학생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학생들의 학습 향상을 위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로 관심을 전환하였다. Fuller는 이 결과를 일반화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집단에 반복 연구를 실시하였으며, 1차 결과와 동일한 결과를 얻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후 Fuller의 개념은 다른 수많은 연구들을 통해 경험적으로 확인되고 정교화되고 확장되었다. 현재 세 종류의 관심사(자기관심, 직무관심, 효과관심)가 논의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교직 생활 초기에는 교직에 성공적으로 적응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대부분 교사들은 교사로서의 '자기(자기관심)'에 초점을 맞춘다. 자기관심은 주로 학생 및 수업 통제 능력, 교직 생활에 대한 적응, 교사로서의 이미지 관리, 생존 및 위기 상황 극복, 교사 자질의 적합성, 학부모와 교장·교감의 기대 부응, 학생 및 동료교사로부터의 평가 등에 관심이 높다. 교사불안에 대한 연구에서도 초임교사들이 학생 통제, 교사로서의 능력 부족, 학생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 수준이 높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초임교사가 교직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생존과 관련된 당면 문제들을 해결하고 나면, 수업을 비롯한 '직무과제'를 만족스럽게 수행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관심사가 이동하게 된다. 이제 관심은 직무 과제로 향하는데 수업이나 직무 수행에 있어서 숙달성과 효율성에 많은 관심을 나타낸다. 따라서 직무관심도가 높은 교사들은 전문성 성장을 위한 기회 부족, 학급당 과밀한 학생 수, 교사에 대한 많은 규칙과 규제, 불충분한 행정 지원, 수업내용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율성 부족 등과 같이 효율적 직무수행에 방해가 되는 문제들에 주목하고 관심을 기울인다. 점차 수업에 필요한 기술이 향상되고 직무 수행에 있어 숙달 수준이 높아지면, 만족감을 지각하면서 교사의 관심사는 이제 학생에게로 향하게 된다. 이는 '효과관심'이라고 불리는데, 교사관심사의 마지막 단계이며 가장 성숙된 형태이다. 이 단계에 있는 교사들은 학생들의 학습향상 및 학업성취, 학생들의 사회적·정서적 욕구에 대한 이해, 학습 동기 유발, 학생의 잠재력 극대화, 학생들의 지적, 정의적 성장 유도, 배움의 가치를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 등에 높은 관심을 보인다. 요컨대 교사관심사는 교사로서의 자기 적응과 생존의 문제해결에서 수업과 직무 수행의 효율성 추구로, 다시 학생에 대한 자신의 교수 효과성 추구로 발달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관심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 이러한 결과는 주로 서구의 나라들을 중심으로 확인된 결과이다. 이에 우리나라 중·고교 교사들에게도 교사관심사가 뚜렷하게 구별되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를 확인하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신규교사 연수(초임교사)와 1급 정교사 자격 연수(경력교사)에 참여하였던 중·고교에 재직 중인 교사 106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교사들에게도 자기관심, 직무관심, 효과관심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관심사임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외국의 교사들은 '교사로서 받는 외부로부터의 평가'와 '교실 통제'를 모두 자기관심으로 인식하는데 비해, 우리나라 교사들은 외부로부터의 평가와 교실 통제가 분리되어 오히려 직무관심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평가'와 '직무 수행'이 섞여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중·고교 교사들이 외부 평가를 자신의 과제 수행과 밀접하게 관련지어 지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외부 평가를 자신의 직무 수행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우리나라 교육의 독특한 구조, 환경, 풍토를 반영하는 결과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결과는 우리나라에서는 초임교사가 교사관심사의 세 영역 모두에서 경력교사보다 더 높은 관심을 나타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Fuller는 초임교사가 자기관심에 높은 관심을 보이는 반면 경력교사는 직무수행이나 교수효과와 관련된 영역에 높은 관심도를 보인다고 하였는데, 한 단계의 관심이 다른 관심으로 변화하는 것은 지각된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초임교사가 자기관심이 높은 것은 외국의 연구 결과와 일치하는 바이다. 그러나 경력교사가 초임교사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높은 자기관심을 보인다는 점은 눈여겨볼만한 대목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에서 경력교사가 자기와 관련하여 지각되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사관심사는 교사들이 교직을 수행하면서 지각하는 동기적 특성과 어떠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을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교사들의 자기결정성과 교직에 대한 내재적 동기와의 관련성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결과, 세 영역의 교사관심사가 자기결정성이나 내재적 동기와 같은 교사의 동기를 차별적으로 설명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자기관심이나 직무관심은 자기결정성이나 내재적 동기를 감소시키는 것으로, 반대로 효과관심은 교직수행에 있어 유능감, 자율성, 즐거움, 내재적 가치 지각의 향상을 가져온다는 매우 재미있는 결과가 나타났다. 내재적 동기 높이는 해법 찾아야 나아가 교사관심사와 교사동기 간에는 일정한 관계 패턴이 형성되어 존재하였는데, 이를 통해 우리나라 교사의 유형을 크게 3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었다. 그 첫 번째 유형은 자기관심과 직무관심이 낮으면서 효과관심이 높은 교사들이다. 이들은 자기결정성이 높고, 교직에 대한 내재적 동기도 높으며, 압력 및 긴장감을 지각하는 수준이 매우 낮았다. 따라서 이러한 유형의 교사들은 생존이나 직무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고 교육자로서의 지녀야할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 효과관심으로 관심이 이동된 상태에 있는 교사들로 추측해볼 수 있다. 두 번째 유형은 효과관심과 더불어 자기관심 또한 높은 유형이다. 이들은 교직에 대한 가치를 높게 지각하고, 교사로서 다양한 노력을 투자하며 동료 교사와의 관계 또한 친밀하고 소속감을 강하게 인식하면서 동시에 교직 수행에 대한 압력 및 긴장감도 더불어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행동의 주체가 되어 의사결정권을 갖고 활동이나 직무에 대하여 가치를 인식할 때 느끼게 되는 자율성이라는지, 개인의 능력을 행사하여 주어진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를 원하는 내적 욕구에 해당하는 유능감이 높지 않았다. 마지막 유형은 자기관심이 높지만, 직무관심과 효과관심이 낮은 교사 유형이다. 그런데 이들은 교직수행에 있어 즐거움, 노력 투자, 유능감 지각과 마이너스의 상관을 나타내었으며, 교직에서 지각하는 압력 및 긴장감이 높았다. 이 경우 첫째 유형과 비교한다면, 교직에 대한 동기는 매우 부적응적이라 할 수 있다. 자기결정성이라는 심리적 특성은 삶의 만족감과 심리적 안정감 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핵심적인 특성이다. 또한 교직에 대한 내재적 동기를 가진 교사들은 개인적으로 가르치는 활동과 관련하여 즐거움과 내재적 재미, 성취감, 자아실현을 경험하고 만끽하게 된다. 이러한 개인적 경험 이외에도 교사의 내재적 동기는 학생들의 학업성취, 노력, 지속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교수 상황에서 교수전략과 같은 교사 행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교직에 대한 내재적 동기가 높은 교사의 학생들이 학습에 대해 더 높은 흥미를 보여준다는 연구결과를 고려한다면 교사동기를 교사들이 보이는 여러 개인차 중 하나로만 인식하기에 앞서, 그 중요성을 새삼 검토하고 확인할 필요가 여실한 것이다. 결국 교사관심사는 교사들의 교육에 대한 요구를 나타내는 것이며, 유능한 교사가 되고자 하는 하나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교사가 변화의 핵심이며 그들에 대한 이해가 교육혁신을 위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부분이라면, 교사들이 수업과 관련하여 지각하는 어려움과 문제 등이 파악되어야 하고, 해결되도록 이를 지원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사가 자기관심이나 직무관심에 머무르지 않고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효과관심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들의 어려움과 문제를 충분히 공유하고,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교육적인 풍토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또한 교사의 의지와 참여를 수반할 때 가능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진동섭 |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지난 반년 동안 가장 중요하게 한 일 중의 하나는 모 교육청에서 실시하는 학교평가에 참여한 것이다. 그 동안 필자의 주된 관심 분야가 학교조직인데 일선 학교와 가깝게 지내지 못하는 상황이 항상 죄스러웠다. 그러던 차에 학교평가위원으로 일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시간적 부담은 있었으나 그동안의 죄스러움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고, 스스로에게도 좋은 배움의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되어 기꺼이 참여하게 되었다. 민감한 감각을 가진 우리 아이들 현장방문 평가에서는 각종 문서를 확인하고 관련 교사와 교장 및 교감을 면담했다. 필자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활동은 학교시설을 돌아보고,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교실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첫 번째 학교에서부터 눈에 들어온 것은 책상에 엎드려 자는 학생들이었다. 그냥 조는 것이 아니라, 책상에 엎드려서 곤히 자는 학생들이 대여섯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밤늦게까지 공부하느라 힘들어서 잠깐 자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그렇게 자는 학생들을 한 학급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학급들에서도 볼 수 있었다. 지역사회 여건이 그렇게 좋지 못한 총 17개의 학교를 방문하였는데, 이러한 모습을 소수 학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교에서 볼 수 있었다. 30여명의 학생 중에는 자는 학생이 대여섯 명 포함되어 있었고, 음악을 듣는 학생, 멍하게 앉아 있거나 다른 책을 보는 학생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만화책을 보는 학생들도 있었다. 교사는 절반 정도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하고 있었다. 학교평가를 하는 중이었던 지난 9월, 모 일간지에 소개된 마틴 린드스트롬의 〈세계 최고 브랜드에게 배우는 오감 브랜딩〉이란 책을 접하게 되었다. 오감(五感) 브랜딩(branding)이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신체 감각을 통해 감성적으로 브랜드를 경험하게 하는 마케팅 전략이다. 이는 인간 의사소통의 95%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80%는 감각을 통해 전해진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내일신문 2006. 8. 10). 오감 브랜딩의 내용을 읽는 순간, 방문했던 '잠을 자는 학교'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내용은 새로운 깨달음과 함께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새삼 새롭게 깨달은 내용은 기업이 브랜드를 만들고, 이를 고객의 머릿속에 각인시켜 판매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의 깊이이다. 자동차 회사는 자동차 엔진의 가속음에서 고급스러움을 느끼게 하기 위해 부드러운 저음으로 할지, 아니면 젊은 느낌을 주기 위해 경쾌한 소리로 할지를 연구하고 실험한다. 심지어 트렁크 여닫는 소리, 깜빡이와 에어컨 소리도 고객의 취향을 고려해서 만든다. 운행 시 타이어 타는 냄새가 역겨운 것에 착안해서 일정 속도 이상으로 달리면 라벤더 향이 나도록 하는 '아로마 타이어'를 개발한 사례도 있다. 이러한 깨달음에 이어진 고민거리는 변화를 예측하기 어려운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 것인가이다. 미국에서는 성인 한 명이 하루에 1500~2000개의 브랜드를 접한다고 한다(동아일보 2006. 9. 11). 이렇게 많은 브랜드 자극에 의해 민감해진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요즘 아이들은 MP3로 노래를 들으면서 군것질을 하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수학 문제를 풀고 영어 단어도 외운다. 핸드폰 문자를 찍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들은 성인들에 비해 감각적으로 대단히 발달해 있다. 어떻게 이들을 가르칠 것인가? 이는 학교평가가 끝난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고민거리이다. 그런데 우리 교직 사회의 요즘 걱정거리는 무엇인가? 혼란한 교직사회 속에서 잠들어 지난 해 우리의 교직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 혼란의 중심에는 교원평가제가 있었으며, 교사들은 교원 성과급 지급에 반대하는 운동도 하였다. 이 혼란 속에서 교장 공모제, 선출 보직제와 같은 교장 임용 제도와 수석 교사제 등이 단위 학교의 교육과 경영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제기되어 논의되고 있다. 자립형 사립학교 확대 실시 논란, 개방형 자율학교 시범 운영, 방과 후 학교 제도 시행 등도 2006년 교직사회를 흔들어 놓았다. 교육위원회를 시·도의회로 통합하고, 교육감과 교육위원을 직접 선출하는 것이 국회 교육위원회를 통과한 일도 있었다. 이는 시·도 단위에서 교육제도 수립과 운영의 효율성을 기하고 주민들의 참여도를 높이기 위한 구상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도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들 사이에서 뜨거운 찬반 공방이 벌어졌다.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사안들에 대해 이해당사자들이 하는 주장들은 모두 명분이 있고, 논리적 설득력도 있으며, 실제적으로 필요한 측면도 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 주장의 타당성이나 합리성이 아니다. 교사들, 교육 행정가들, 학부모들, 정치가들이 이런 논의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갑론을박하는 동안 학교에 온 많은 학생들이 교실에서 잠자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다시 잠자는 학급으로 돌아가자.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자거나 딴 짓을 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대표적인 예로 철야 아르바이트, 컴퓨터 게임, 과외 수업, 혹은 건강 문제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볼 때 특정 과목은 대학입학에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며, 몇몇 학생들은 대학입학에 관심조차 없을 수도 있다. 혹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누적된 학습 결손으로 인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교사들은 이러한 학생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교장, 교감도 마찬가지이다. 직업반을 만들어 운영도 해 보지만, 학생도 학부모도 좋아하지 않는다. 성적이 낮은 학생들을 따로 모아 가르치면 좋겠는데 소위 우열반 편성은 금지되어 있다. 운동 등 공부 이외의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의 경우 각자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하도록 하고 싶으나 그것도 규정, 재정 형편, 혹은 담당교사 문제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학부모와 지역사회가 소위 'SKY 대학' 입학생 수만 세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자는 학생, 딴 짓하는 학생은 지금처럼 그대로 놓아두고 공부할 학생만 데리고 수업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 교실에서 학생 각자의 요구와 특성에 맞게 직업교육, 특기적성교육 그리고 입시준비교육을 모두 하는 것이다. 학교 공동체에서의 교사의 위상 교사는 '학교'라는 조직의 한 구성원이다. 학교는 학부모들과 지역사회 주민까지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공동체이다. 때문에 교사는 학부모와 지역사회 주민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하게 된다. 교사의 역할은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교사가 가지고 있는 위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진동섭, 근간). 교사직은 전문직이다. 동시에 교사직은 고도의 정신노동을 하는 근로자이기도 하다. 교사직의 근로자성은 교사의 노동조합 활동을 법률로 보장하는 것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표시열, 2002: 215). 전문직이자 정신노동자인 교사는 구성원들과의 관계에서 다음과 같은 다양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는 서로가 선택해서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니다. 이들은 우연적이고 일시적으로 만나서 가르치고 배우는 공적인 관계이다. 그러나 이들 간의 관계는 교육애와 애정, 신뢰와 존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교사와 학부모의 관계는 학생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비선택적·일시적 관계이다. 교사는 교육공급자이고 학부모는 교사가 제공하는 교육의 수혜자 혹은 소비자이다. 교육에 있어서 비전문가인 학부모는 전문가인 교사에게 자녀들의 교육을 위탁했다. 교사는 교육전문가임과 동시에 학부모에 의해 자녀교육을 위탁 받은 사람이다. 교사와 교사의 관계를 살펴보면, 교사들은 서로를 가장 편안한 상대로 생각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이들 사이에서는 전문적 협력이 이루어지지만 이는 개인적인 친분에 의한 것인 경우가 많다. 교사와 교장은 학교에 의해 고용된 피고용자의 신분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이들은 같은 배를 타고 있는 동업자임과 동시에 학교조직의 상급자와 하급자 위치에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입장에서 보든지 교사는 자율성과 책임감을 가진 전문직이라는 점이다. 학교는 개방적 공동체다. 학교와 환경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서로 도움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학교 내 구성원들 간 관계에서도 개방적인 교류가 이루어진다. 이 안에서 교사가 처한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어렵다. 대표적인 예로 교사들은 학교라는 담장 안에서 제한된 시간 동안 학생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교사가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줄어들고 교사에 대한 기대와 책임은 높아져만 간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자명한 사실은 교사의 존재를 확인하는 곳은 '교실'이고, 교사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교육의 질'이고, 교사의 존재를 지켜 주는 것은 '전문성'이라는 점이다. 학생에 대한 선택권이 없는 교사로서 교사에 대한 선택권이 없는 학생을 상대할 때는 물론이고 하급자인 교사로서 상급자인 교장을 상대할 때, 피위탁자인 교사로서 위탁자인 학부모를 상대할 때, 전문가인 교사로서 똑같은 전문가인 동료 교사를 상대할 때, 교사는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당당함과 자신감은 교사의 전문성에서 나온다. 교사전문성의 핵심은 교육에 대한 전문적 지식 및 기술 체계와 교직윤리 의식이 핵심을 이룬다. 교사들은 이러한 전문성을 기반으로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교육전문가'가 되어야 한다(진동섭, 2002). 전문가로써 해야 할 세 가지 역할 변화하는 학교사회에서 교사가 전문직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화기 위해 수행해야 할 역할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 중 세 가지만 강조하고자 한다. 우선 현장연구자로서의 역할이다. 로티는 교사직을 '특수하지만 그늘에 있는 직업'이라고 했다. 교사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나 교육행정가,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 교수의 그늘 속에 있다는 것이다. 교실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교육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고 학습하는 현장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현장에 근거한 지식과 기술을 개발함에 있어서 이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교사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다음은 교육 디자이너로서의 역할이다. 교사는 45분 혹은 50분의 교수·학습 활동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교육 디자이너는 정해진 교육내용을 기계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의 특성과 요구에 맞게 학습내용, 학습방법 등을 디자인해주는 사람을 뜻한다. 세 번째는 학교 컨설턴트로서의 역할이다(진동섭, 2003). 학교 컨설팅은 교원들이 직무 수행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이나 새로운 과제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그 해결을 도와주는 일이다. 40만 교원들은 모두 나름대로 교육에 관한 비법들을 한 보따리씩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교사들 간에 공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장연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 보다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지식과 기술이 만들어진다. 이것을 다른 교원들의 전문성 개발을 위해 활용하고, 본인도 다른 교원의 도움을 받아서 서로의 전문성을 공유하자는 것이 학교 컨설팅의 취지이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역할은 교사들이 혼자서 고민하고 수행해야 하는 역할이 아니라, 학교 공동체 내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역할이다. 현장연구는 개인 혹은 다수가 수행할 수 있다. 교육 디자이너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학교 컨설턴트로서의 역할 역시 상대방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 글에서 말한 인문계 고등학교 교실 상황은 전국 모든 학교의 상황이 결코 아니다. 오감 브랜딩은 학교가 아닌 기업의 이야기다. 이는 학교가 기업을 쫓아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업이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하는지 알 필요는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업들이 만들어가는 사회변화가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파악해야만 한다. 학교는 학생들을 위해 꼭 필요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일선 학교는 자력으로 그러한 조직으로 만드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 안주할 수는 없다. 행정가와 정치가들이 여건을 마련해 줄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교사들은 교직의 현실을 자조(自嘲)가 아니라 자조(自助)해야 한다. 현장연구자, 교육 디자이너 그리고 학교 컨설턴트로서 교사의 역할을 돌아보고, 현재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함께 찾아서 함께 시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심영옥 | 경희대 겸임교수·미술사 경남 진주의 촉석루 입구에는 '실크박물관(1층)'과 '향토박물관(2층)'으로 구성된 진주향토민속관이 있다. 이 향토민속관은 '태정박물관'이라 불리기도 한다. 태정은 김창문의 호다. 김창문은 원래 진주에서 양화점을 경영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6.25 한국전쟁 후 어느 날 자신의 가게 앞에서 엿을 팔던 엿장수 지게 위에 내팽개쳐져 있던 경첩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함부로 버려진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그 후 40여 년 동안 서양가구의 보급으로 하찮게 버려진 수많은 장석과 가구, 생활민속품을 수집했고, 수집품은 향토박물관의 토대가 되었다. 평범한 시민의 정성어린 집념이 자칫 사라질 수 있었던 우리의 아름다움을 되살린 것이다. 학문적인 내용이나 사상을 제쳐놓고서라도 의기 논개가 몸을 던져 나라를 도운 것처럼 태정도 자신의 사업을 멀리하며 한국미의 뿌리를 만들어 놓은 것은 어쩌면 우리 민족에게 흐르는 예술혼 덕분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한 사람의 집념으로 수집된 장석은 우리 전통 가구의 아름다움은 물론 장석들의 다양한 문양을 통하여 옛 선조들의 미의식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 더욱 의미가 크다. 장석(裝錫)이란 자연미와 인공미를 최대한 조화시킨 소박한 전통 목가구에 우리 민족의 생활정서와 멋을 더하여 장식용 치레로 사용되어진 모든 금속으로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멋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한국의 아름다움이다. 품격 있는 조화 이끄는 생활의 지혜 장석의 역사는 정확히 언제부터 제작되어 사용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고대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짐작되고 있다. 장석이 서민들에게까지 보급된 시기는 서민들이 목가구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대략 17~18세기로 볼 수 있다. 초기에는 생활에 필수적인 기능 위주로 대부분 검소하고 단순한 모양이었다. 그러다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문양도 다양해지고 모양은 복잡해지면서 아름다움도 추구하였다. 그러나 상징적인 내용을 중시하여 문양들은 다소 도식적인 경향을 보인다. 장석은 건축물의 기둥이나 목가구 등이 뒤틀리거나 상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이음새를 보완하는 기능을 하거나, 문짝 등의 여닫이 기능과 아름답게 치장하는 꾸밈새로도 쓰인다. 장석의 재료로는 거멍쇠, 청동, 황동, 백동 등이 있다. 이 중 장석의 재료로 가장 먼저 사용된 것은 거멍쇠로 이는 색깔이 검기 때문에 붙여진 순우리말로 흔히 무쇠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국 전통 목가구는 대체로 '결구식 목공기법'을 사용하여 외형의 소박한 아름다움과 함께 건실하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이는 판과 기둥의 다양한 짜임과 이음을 못을 사용하지 않고 제작해 더욱 빛을 발한다. 장인들은 이러한 목가구의 짜임과 이음의 보완 말고도 더욱 완벽한 기능의 강화와 아름다움을 위하여 금속제 장석을 사용하였다. 목공예품에서 목재의 연약한 재질을 보강하고 묵직한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드는 장식적 효과를 얻기 위해 다양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부착한 것이다. 장석을 만드는 장인을 예전에는 '두석장(豆錫匠)'이라 불렀는데, 장인들은 목가구의 기능적인 면과 장식적인 면을 겸비할 수 있도록 슬기와 지혜를 녹여 장석을 만들어 붙였다. 금속장석 중 경첩이나 앞바탕, 고리, 들쇠 등은 필수적인 부분에만 사용되었고, 감잡이, 귀잡이 장석 등은 구조의 결함을 보강하기 위해 부착하였다. 전통 목가구는 쓰임새에 따라 목재의 색감이나 무늬결이 각기 다른데, 꾸밈 장석도 목가구와 어울리는 모양을 만들어 붙여 전체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색감과 문양을 자연스럽게 조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선천적으로 배어 있는 우리 선조들의 미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한국적 미감을 지닌 장인들에 의해 고안된 금속제 장석들이 가구의 형태와 용도에 따라 모양과 문양이 적절히 표현되어 전체 의장을 더욱 품격 있는 조화로 이끌었던 것이다. 실용성과 조형성 더해진 미의식 일상생활에 유용하면서 미적인 감각으로 표현된 기능적인 장석에는 앞바탕, 경첩, 들쇠, 자물쇠 등이 있고, 면과 귀를 서로 짜 맞추기 위해 만든 감잡이 장석과 귀잡이 장석이 있다. 이러한 장석은 실용적인 면을 우선으로 하였지만 삶을 풍요롭게 하는 염원과 함께 우리 선조의 정서와 생활상을 담은 한국적 미의식을 담고 있다. 실용적이면서 조형성이 돋보이는 장석의 기능은 한국적 아름다움을 배가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다. 앞바탕은 가구의 자물통을 채우는 부분에 사용되어진 얇고 판판한 쇠붙이를 말한다. 배목이나 자물쇠 등을 가구에 견고하게 붙일 수 있도록 하고 자물통으로부터 가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종류로는 자물쇠용과 들쇠용, 배목과 고리용 등이 있으며, 가구의 구조와 기능에 관계없는 장식용 앞바탕도 있다. 형태는 기하학적인 모양의 단순한 것에서 각종 동식물 형태가 정교하게 투각된 것까지 다양하며 가구 앞면과 중앙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가구 장식의 인상을 많이 좌우한다. 초기에는 기능만을 생각하여 무늬 없이 단순하게 만든 데 비해, 후기로 갈수록 많은 무늬를 투각하거나 새긴 것이 나타났다. 형태에 따라 둥근형, 약과형, 약과형투각, 팔각형투각, 나비형, 실패형이 있다. 경첩은 문을 열고 닫기 위해 만든 장석이다. 대칭이 되는 두 개의 쇠조각(날개판)을 맞물리어 기둥쇠에 말아 고정시키고, 기둥쇠가 회전함에 따라 문을 여닫게 하는 것이 경첩의 원리이다. 경첩은 좌우, 상하로 열리는 것과 기둥쇠만 보이는 숨은 경첩, 날개판이 보이는 노출형 경첩으로 크게 나누어지며, 대칭이 되는 두 개의 쇠조각(날개판)이 겹쳐지며 열린다고 해서 '겹첩'이라고도 불린다. 장이나 농, 문갑, 반닫이 등 문이 달린 가구의 몸체와 문판을 연결하여 문을 여닫을 수 있게 한다. 건축물의 문에도 같은 구실을 한다. 조선시대 가구에서는 노출 경첩이 대부분인 반면, 숨은 경첩은 조선말기 이후에 제작된 의걸이장이나 문갑 등에서 간혹 눈에 띄는 정도이다. 생긴 모양에 따라 둥근형, 약과형, 화형, 실패형, 나비형, 저고리형, 인동초형, 허리띠형, 제비초리형, 문자형 등이 있다. 들쇠는 '들어 올리는 쇠'라는 순수한 우리말로, 가구전체를 들어 올리거나 혹은 서랍이나 문짝을 열 때 잡아당길 수 있도록 부착된 손잡이를 말한다. 가구를 들어올리기 위한 들쇠는 양쪽 옆널에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나 박천반닫이 등에서는 앞판과 뒷널에 쓰인 예도 있다. 열거나 드는 데 힘이 적게 드는 서랍이나 문에는 배목 한 개의 들쇠를 쓰고, 가구 전체를 들어 올리는 데는 배목 두 개의 들쇠를 사용했다. 가구 자체를 들어올리기 위한 뜻에서 들쇠라는 이름이 사용되었으나, 점차로 장식성을 띤 손잡이와 작은 서랍을 여는 손잡이, 고리 등을 총칭하는 의미로 발전하였다. 들쇠는 그 기능상 유동성이 있어야 하므로 일반 못으로는 가구에 부착시킬 수 없기 때문에 머리 부분에 공간이 있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배목을 사용하였다. 들쇠는 크게 배목 1개인 고리형태의 들쇠와 배목 2개 들쇠로 나누어진다. 형태에 따라 활형, 새형, 물고기형, 약과형, ㄷ자형, 꽃무늬형 등이 있다. 감잡이는 ‘감다’와 ‘감아준다’의 합성어로 기둥과 기둥, 판과 판이 만나는 접합부분이나 모서리 부분에 부착되어 나무의 결속력을 강화시켜 주고, 외부와 접촉할 때 가구자체의 모서리를 보호해 주는 역할도 한다. 기둥과 판널들을 서로 잇대러 짠 부분이나 모서리를 구조적으로 보강해주는 장석이다. 또는 가구의 뒤틀릴 현상을 어느 정도 보완해준다. 형태에 따라 둥근감잡이, 상두감잡이, 약과형감잡이, 기하형감잡이, 당포감잡이, 둥근고깔귀잡이, 투각고깔귀잡이 등이 있다. 귀잡이 또는 귀장식은 그 역할이 감잡이와 동일하나 감잡이가 입체적으로 양면으로 잡아주는데 비하여 귀장식은 한 면(귀부분)만을 잡아준다. 세면이 만나는 꼭지점에는 귀싸개(통귀쌈)을 사용하였다. 세 면이 만나는 귀 부분에 사용되어 외부와의 접촉을 방지해주는 역할을 하여 가구를 보호해준다. 형태에 따라 둥근형귀잡이, 약과형귀잡이, 새발귀잡이, 연밥귀잡이 등이 있다. 광두정은 머리가 넓은 못으로 기능은 가구를 제작한 후에 생기는 여유 공간을 잘 구성하는 것으로 허전한 공간에 적절하게 배치하여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여 가구의 미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데 있다. 또 가구 제작 당시 실수로 생긴 표면의 흠집을 감추어주고, 가구 재료로 쓰일 나무가 꼭 필요한 부분에 흠이나 벌레가 파먹을 경우, 그 곳을 막기 위해 사용되었다. 대체로 반구형의 작은 크기인 광두정은 장석 가운데도 도드라진 입체감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적절한 공간에 박힌 광두정은 가구에 중량감과 함께 견고한 느낌을 주는 효과도 아울러 지닌다. 그리고 미적으로 허전한 공간을 일정한 방향과 크기로 연속성 있게 좌우, 상하로 대칭 시켜 균형미 있는 장식의 조화를 이루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가구에 부착되는 장식 중 입체감을 주는 유일한 금속장식이다. 다른 장석에 비해 크기와 모양이 다양한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자물쇠는 여닫게 되는 기물에 채워서 열쇠가 없으면 열지 못하도록 잠그는 장석의 일종으로 자물통, 잠금쇠, 열쇠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열쇠는 '자물쇠를 여는 쇠'로 개금(開金) 또는 건(鍵)이라고도 한다. 유물자료를 살펴보면 이미 삼국시대에 ㄷ자형 자물쇠가 사용되었고, 가구의 기능과 구조가 발전하면서 새로운 형태로 발전되어 갔다. 자물쇠의 종류로는 대롱자물쇠, 함박자물쇠, 물상형자물쇠, 은혈자물쇠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민간신앙적 사상 배경으로 한 문양 장석은 금속제품은 물론 목제품, 죽제품, 지승제품, 석제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쓰였다. 그 중 특히 목공품의 구조 보강에 필요 불가결한 본래의 목적 외에 외형에서 느껴지는 장식성이 큰 몫을 차지하였다. 장식용의 역할을 하는 장석을 꾸밈장석이라고 하는데, 이는 가구의 빈 공간 등에 붙여서 가구를 더욱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문양은 크게 동·식물 모양의 십장생이나 문자를 고안하였다. 문자는 주로 수복강녕(壽福康寧), 부귀다남(富貴多男), 백복자래(百福自來), 오군만년(吾君萬年)의 길상(吉祥)적 의미를 지닌 글자를 사용하여 가내평안을 염원하였다. 그리고 동·식물 문양으로는 학, 사슴, 거북이, 모란 등 무병장수의 의미를 지닌 십장생을 많이 사용하였다. 십장생 이외에도 다산의 의미가 있는 물고기문양, 태극문양, 당초문양, 남대문문양 등도 사용되었다. 물고기를 기능적인 자물쇠 장석으로 사용되었을 때에는 항상 눈을 뜨고 있다는 습성을 비유하여 집이나 복을 지켜달라는 의미이며, 장식용으로 사용되었을 때에는 알을 많이 낳는데 비유하여 다산을 상징하였다. 특히 잉어는 출세, 성공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잉어와 연관된 등용문(登龍門)이라는 한자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장식용 장석에서 사용된 문양들은 대체로 조선후기 민화의 소재로도 많이 사용되어진 것이다. 그림이든 생활용품이든 간에 이는 일반 서민들의 생활에서 가족의 평안을 염원하는 민간신앙적인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한국미의 특징을 표현한 것이다. 수 백 번의 망치질로 펴고 다듬어서 멋진 장식물을 만들던 도석장인의 인내심도 대단한 것이며, 한국인의 정서를 담아 미적으로 표현한 장석은 진정한 한국의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김철수 | 경남 거제중앙고 교사, 사진작가 금빛 물결 출렁이는 넓은 갈대밭 넓은 갈대밭과 끈적끈적한 머드팩의 모태, 순천만 갯벌! 육지의 물과 바다의 물이 만나 하모니를 이루며 만든 순천만 갯벌은 자연늪이라기 보다는 자연습지이다. 오늘도 8백만 평의 광활한 순천만 갯벌은 사람을 포함한 많은 생물들에게 생존의 의미가 되고 있다. 순천만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를 다리 삼아 깊숙이 들어와 형성된 만으로 길이가 동서 22㎞, 남북 30㎞다. 만의 입구에 적금도, 낭도, 둔병도 등이 있어 빠른 물살을 줄이는 역할을 하나, 워낙 수심이 얕아 조석 간만의 차이가 심하게 나타난다. 미네랄이 들어있는 영양수를 제공하는 동천, 이사천, 해룡천이 남해바다에서 밀려온 파도와 만나는 기수역에서 토사의 퇴적이 일어났다. 이렇게 만들어진 더 넓은 갯벌에 사람들은 염전을 만들었고, 천일염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염전은 가을이면 노란물을 들이는 농토로 변신했다. 농토와 갯벌 사이에 둑을 쌓아 둘을 단절시켰지만 기수역의 퇴적작용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밀려온 토사들은 더욱더 바다 멀리 나아가 쌓여 갯벌의 면적을 넓혀 왔고, 앞으로도 더 넓어질 것이다. 순천만은 바다뿐만 아니라 갯벌, 염생식물이 섞여 자라는 갈대밭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갯벌에 일차적인 영양분을 공급하는 식물에는 44종류의 관속식물이 나타났는데, 이 중 벼과와 국화과 식물이 반을 차지하고 있다. 어떤 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생물을 우점종이라고 하는데, 이곳의 우점종은 갈대이고, 그 외에도 갯잔디, 메귀리, 가는갯능쟁이, 부들, 모새달, 칠면초, 나문재, 갯질경 등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게 분포한다는 갈대밭은 5.4㎢로 이는 바닷물의 빠짐에 의해 들어난 갯벌의 속살 27㎢ 중 20%를 차지하고 있다. 가을이면 금빛 물결을 일으키는 갈대밭은 동천과 이사천이 만나는 곳에서 대대포구까지의 수로, 대대포구에서 장산마을로 이어지는 제방의 안쪽, 대대포구에서 와온마을의 순천만 해수랜드까지의 해변에 주로 분포한다. 갈대 다음으로 넓은 면적을 가진 칠면초는 일 년에 일곱 번 색깔이 바뀌어서 붙어진 이름이다. 순천만 사람들은 '기진개'라고 부르고, 한때 사람들의 먹을거리가 되기도 한 칠면초는 철새들의 주요 먹이가 되고 있다. 칠면초의 화려한 색깔은 매일 맞이하는 일몰과 갈대꽃이 만발할 때 더욱 돋보인다. 철새 유혹하는 넉넉한 안식처 제공 여러 식물들이 자라면서 어패류와 게들이 서식처와 먹이를 무한히 제공받아 번성을 누리고 있다. 먹이가 풍부하고 숨기에 알맞은 갈대숲을 지녔기에 여러 종류의 새들이 어미의 품을 찾아가듯 순천만을 찾아오고 있는데, 겨울에만 200여종의 철새들이 찾아들고 있다. 일 년 내내 많은 새들이 이곳을 찾고 있는데, 특히 멸종위기종인 흑두루미, 재두루미, 노랑부리백로, 저어새, 검은머리갈매기도 찾고 있다. 희귀철새 도래지인 이곳에 흑두루미는 세계 생존 개체 수의 1%(100 마리), 검은머리갈매기는 10%(1000 마리)이상, 혹부리오리는 이동개체수의 18%(1만 1000 마리), 민물도요는 7%(9300 마리)가 서식하고 있다. 특히 혹부리오리의 경우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서식지이다. 특히 이곳은 도요와 물떼새들이 호주와 시베리아를 오갈 때 중요한 이동 통로로 이용하고, 겨울철에는 흑두루미의 이동 통로이자 월동 지역으로 이용되고 있다. 우리는 학(鶴)을 두루미라고 한다. 두루미는 울음소리에서 유래된 순수한 우리말이다. 두루미의 종류에는 흑두루미, 두루미, 재두루미, 검은목두루미, 시베리아흰두루미 등이 있다. 두루미는 시베리아 우수리 지방, 중국 북동부, 일본 훗카이도에서 번식하는데, 겨울에는 남으로 이동하여 중국 남동부와 우리나라 비무장지대에서 월동한다. 우리나라에는 1940년대까지 수천마리의 두루미가 찾아왔으나 지금은 철원과 강화지역에 약 500 마리가 찾아와 월동하고 있다. 흑두루미는 전 세계에 1만 마리가 살고 있는데, 이 중 8000 마리는 일본 규슈의 이즈미에 텃새로 살고 있고, 우리나라에는 1백 마리 정도가 찾아온다. 우리나라에는 11월에 찾아와 이듬해 3월에 날아가는데, 주요 월동지가 바로 순천만이다. 철새의 이동은 번식지와 월동지(월하지) 사이를 일 년에 2번씩 있는데, 대체로 남북으로 이동한다.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여름에 남쪽에서 건너오는 제비와 두견이를 여름새, 겨울에 북쪽에서 날아오는 기러기, 물오리, 백조 등을 겨울새라고 한다. 이들을 통틀어 철새라고 하는데, 이동 경로가 정해져 있으며 한번 번식이나 월동을 하면 매년 같은 지방이나 같은 장소로 돌아온다. 우리나라의 주요 철새도래지에는 철원평야, 강화도 갯벌, 천수만, 금강하구, 순천만, 우포늪, 주남저수지, 을숙도, 성산포 등이 있다. 이들의 특징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광활한 물과 주변의 넓은 농경지가 분포하여 먹을 것이 많다는 것이다. 겨울철새는 추위를 따라 이동하는데, 초겨울엔 중부지방에, 한겨울과 늦겨울에는 남부지방에 많이 분포한다. 1㏊ 당 2천만 원 넘는 가치 지녀 순천(順天)만, 하늘의 도리를 따르는 땅, 아니 하늘의 뜻처럼 좋은 일만 생기는 땅으로 순천만의 갯벌은 순기능이 더 많다. 갯벌로 몸을 만들고, 몸을 살찌우다가 갯벌에 몸을 눕히는 생물이 어디 한 둘이랴. 해양생물의 66%가 갯벌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고, 생산성도 높아 육지의 9배나 된다고 한다. 순천 시내를 거쳐 내려온 생활하수를 걸러 주어 깨끗한 정화수를 만드는 곳도 이곳이다. 또 홍수에 따른 급격한 강물의 흐름을 완화하고 저장하며, 태풍 시 밀려오는 바닷물의 흐름을 감소시키는 곳도 순천만이 하는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넓은 가슴에 아름다운 경치를 담아 두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편안함과 심미안을 준다. 고흥반도를 감싸는 순천만과 보성만은 심성이 고운 많은 문학가를 잉태하여 이들의 아름다운 글과 말은 여러 사람들을 지금도 행복하게 하고 있다. 이런 갯벌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1헥타르 당 약 1만 달러가 된다고 네이처지가 발표했다. 우리나라의 환경부에서는 갯벌의 가치를 외국보다 높은 2만4천 달러로 평가하였는데, 이는 우리가 갯벌을 이용하여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순천만 경치 볼 수 있는 매혹의 장소 순천만을 둘러보는 방법은 크게 두 갈래 길이 있다. 팔마체육관 앞의 고가도로를 이용하여 17번 국도(여수방향)를 따라가다 순천농수산물시장 앞에서 우회전하면 해룡면소재지를 만나고, 용산전망대와 낙조로 유명한 와온마을에서 순천만을 볼 수 있다. 해룡면소재지에서 863번 지방도로를 따라 월전, 도롱, 중흥, 해창, 선학마을을 지나면 농주마을이 나타난다. 농주마을에 들어서면 갯벌의 동쪽에 위치한 구동마을로 가는 꼬불꼬불한 마을길이 나타난다. 구동마을의 해변에는 전어와 왕새우양식장이 있고 이곳에서 대대포구 쪽으로 난 비포장길을 300m 운전하면 예전에 양식장 건물로 사용한 곳에 간이주차장이 나타난다. 간이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0분 정도 낮은 야산을 오르면 이곳이 용산전망대이다. 용산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갯벌의 아름다움은 갈대밭과 어울려진 S자 수로, 대대포구로 귀환하는 어선과 유람선의 모습에 있다. 특히 이곳에서 맞이하는 일몰이 장관으로 갯벌에 쏟아지는 햇살에 부딪친 칠면초의 색깔과 하늘에 영롱하게 어린 석양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곳을 나와 다시 도로를 따라가면 해룡초등학교 농주분교가 나온다. 바다 쪽으로 우회전하면 와온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이곳의 일몰도 장관이고, 특히 순천만 해수랜드에서 몸의 피로를 삭이는 것도 좋은 일이다. 다른 하나는 순천청암대학교차로나 인안교차로에서 순천만자연생태공원(대대포구)과 일출을 볼 수 있는 별량면 화포마을로 가는 것이다. 순천시 대대동과 별량면 학산리의 들판은 갯벌을 개간하여 만들었는데, 대대포구에서 장산마을까지 갯벌과 농경지를 가로지르는 둑 옆에 비포장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대대포구에는 순천만생태자연공원이 조성되어 갯벌 생물에 대한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 대대포구에는 순천만을 살펴볼 수 있는 유람선이 운항되고 있고, 갈대밭까지 보행교가 설치되어 나무 통로를 따라 갈대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갈대밭 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기에 좋은 장소는 보행교 위이다. 대대포구에서 장산마을까지 내려오는 길은 어디에서나 갯벌생물들을 만날 수 있고 특별히 갈대밭과 어울려진 수로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인안교 부근이다. 특히 인안방조제 부근에서는 겨울동안 흑두루미를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부근에 태양광발전소가 설치되어 환경과 조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갯벌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체험장을 둔 곳도 이곳이다. 장산마을을 지나 화포마을에 도착하면 순천만의 몸통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순천만에서 유일하게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다. 사람 모여드는 다양한 문화 공간 예전부터 넉넉한 남도의 인심은 많은 사람들을 이곳에 모여들게 하였다. 바다의 물산이 풍부하고 농토가 비옥하여 사람들이 터 잡고 마을을 이룬 곳이 낙안읍성이다. 사적 302호로 지정된 낙안읍성은 1367년(태조 6년)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것으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읍성들 가운데 가장 보존이 완벽한 곳이다. 예부터 남해 바다에서 불어온 갯바람은 차나무를 잘 자라게 하였기에 야생 차밭이 분포하고, 다도의 맥이 정립되고 흘려 나온 곳도 이곳이다. 그 뜻을 이어받아 보성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차밭이 조성되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순천만에는 해마다 그 넓은 농토에 허수아비문화제가 열리고, 황금 들판에서 허수아비가 사라질 즈음 갈대가 꽃을 피워 갈대제가 열린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영감과 희망을 얻어가는 순천만은 이용하고 가꾸는 만큼 즐거움과 이익을 주는 땅이다. 이 모든 것이 자연이 주는 고마움이 아닐까?
선돌이 여근을 만났을 때 선돌은 대체적으로 청동기시대 산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선돌이 청동기 유물로 대표적인 고인돌과 결합한다면 어떨까요? 경북 영주로 떠나 봅시다. 시내 휴천동에서 고인돌 2기와 선돌 1기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선돌의 높이는 약 1.5m로 그리 크지는 않으며 고인돌에 사용된 덮개돌 두 점이 제 자리를 잃은 채 바닥에 엎어져 있습니다. 덮개돌엔 성혈(性穴)이 몇 점 보입니다. 성혈은 여근을 상징하며 선돌은 남근을 상징하니 음양의 조화가 완벽합니다. 이렇듯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문화재인 지석묘가 선돌과 나란히 서 있는 것은 이례적인 경우라 하겠는데, 순흥 땅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영주시 순흥면 청구리 선돌은 5m 간격을 두고 2기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마을 입구 소나무 숲에 위치해 있는데 오른쪽에 서 있는 선돌 앞에도 덮개돌이 보이고 그 표면에 역시 성혈이 보입니다. 마침 인근에 여근동(女根洞)이라는 마을이 있어 그 여근에 대해 남근을 상징하는 선돌을 세운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여근과 관련해서 선돌이 세워진 것으로 해석하는 이러한 사례로 부산 기장군 철마면 선돌을 들 수 있습니다. 선돌 관리를 맡고 있는 이중희씨에 따르면 맞은편에 내다뵈는 계곡의 형태가 여자의 음부를 닮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이 마을 사내들이 그 기운에 억눌려 제 명에 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이곳을 지나다 그 사연을 듣고는 음기를 차단할 수 있도록 선돌을 세우게 하였고 그 이후로 화가 물러 갔다네요. 이 선돌이 선사시대에 세워졌건 후대에 세워졌건 분명하진 않습니다. 선돌이 이러한 풍수지리개념으로 들어섰다면 그 선돌은 역사시대의 산물일 테고, 가만히 서 있던 선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갖다 붙였다면 청동시시대의 산물일 테지요. 여기서 ‘청동기시대 = 선돌’이란 등식이 성립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접근이 가능하겠습니다. 이 철마 선돌 바로 앞에는 동래 정씨 문중의 산소가 위치하고 있는데 그 망주석을 앞에 내세우고 뾰족한 철마산을 배경으로 4m 가까운 거대한 선돌이 땅을 우뚝 밟고 있어 그 날카로움에 이내 기세가 꺾이고 맙니다. 성기숭배신앙의 흔적을 찾아 이러한 남근숭배신앙은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유포되었던 부근당(府根堂) 당집에는 남자 성기를 상징하는 목각물을 곳곳에 걸어두었었고 삼척 해신당에도 역시 남근을 바치는 풍속이 이어지고 있지요. 경주 안압지에서 남근을 조각한 목제품이 출토되었고,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지철로왕의 거시기 이야기와 선덕여왕 지기삼사 중 여근곡과 관련한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특히, 유교문화가 절대적으로 지배했던 조선시대의 경우는 아들을 낳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부여받은 여인네들에 의해 이 남근숭배신앙이 확산되기에 이르렀지요. 인도의 경우, 시바신을 모신 사당에서 생명의 원천이요, 풍요의 상징인 링가와 여근을 상징하는 요니가 결합되어진 것을 볼 수 있지요. 우리나라 곳곳에서 자연적으로 혹은 인공적으로 다듬은 성기숭배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남근과 여근신앙은 쉬쉬하는 차원을 벗어나 당당히 문화재로서 대접받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몇 군데를 둘러볼까요? 전북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원백암마을 입구에는 300여 년 전 선비 박잉걸이 세웠다는 남근석이 있습니다. 그는 마을 뒷산에 있는 여근곡과 여근암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장승과 함께 남근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자손이 귀한 사람이나 불임증이 있는 여자가 네 번 절하고 이 돌을 안아주면 아이를 갖는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선무도 도량으로 유명한 경주 골굴사에도 남근바위가 있습니다. 이 남근바위를 마주보는 곳에 산신당이 조성되어 있는데 산신당 앞 평상 한 곳에 네모난 구역을 표시해 두었습니다. 그것을 들면 둥그스름한 천연바위에 물이 가득 고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여근바위 위에 앉아 남근바위에 절하고 산신령님께 절하고 정상의 부처님께 절하니 그 정성이 더하여 좋은 소식이 있을 법합니다. 전북 순창 팔덕면 산동리와 창덕리에 각각 지방민속자료로 지정된 남근석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약 500여 년 전에 한 여장부가 2기의 남근석을 조각하여 치마에 싸 가지고 오다가 무거워서 1기는 창덕리에 버리고 1기는 산동리에 세웠다고 합니다. 화강석으로 정교하게 조각하였고, 하단부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것이 눈에 띕니다. 임실 사곡리 남근석은 옛날 이 마을에 돌림병이 돌아 민심이 흉흉해지자 마을 어른들은 마을 형상이 여자의 옥문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마을 입구에 이 남근석을 세워 그 기운을 누르고자 하여 세운 것이라 합니다. 이처럼 남근석은 기자신앙의 대상으로뿐만 아니라 마을전체의 안녕과 번영을 소원하던 공동신앙물이기도 했습니다. 안양 삼막사에도 남근석과 여근석이 함께 있는데 특히 여근석의 적나라함이 눈에 띕니다. 전북 김제 귀신사에는 사자를 닮은 짐승이 웅크려 있고 그 위에 남근을 닮은 마디진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위에 또 하나의 작은 돌기둥을 얹어 두었습니다. 충북 제천 무도리 용암은 여인네들이 건너편에서 돌을 던져 바위에 들어가면 득남한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역시 제천 동산(東山)에 있는 천연 남근석은 그 적나라함이 삼막사의 그것과 쌍을 이룰 수 있을 듯합니다. 소위 공알바위라 해서 바위를 돌로 갈아 구멍을 내는 행위는 울산 어물리 마애불이나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두 자식을 바라던 민초들의 소리 없는 반항이자 항변이었습니다. 다랭이 마을에서 암수바위를 만나다 남해 바다에 있는 남해군은 볼거리가 참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남해군이 가진 매력은 창선대교에서 내려다보는 죽방렴, 파도와 해풍을 막기 위한 방풍림, ‘어서 오시다’ 혹은 ‘안녕히 가시다’와 같은 남해 섬 특유의 사투리, ‘물건’이니 ‘도마’니 해서 생각만 해도 잔웃음을 자아내는 재미있는 지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다가 김만중이 유배를 와서 그의 생을 마무리했던 노도, 이순신이 운명한 이락포, 이성계가 명명한 금산 등 역사적인 이야기까지 덧붙이고 산과 바다에서 나는 풍부한 자원까지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보물섬’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해에서 찾아낸 보물 중 보물은 뭐니 뭐니 해도 바다로 곧 떨어질 듯한 논배미라 하겠습니다. 섬을 일주하다 바다에 바로 접하기까지 논배미가 첩첩히 조성되어진 것을 흔히 볼 수 있지요. 특히, 남면 가천마을에 이르면 다랭이논이라 해서 지난 2005년 1월 명승 제15호로 지정된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랭이는 ‘다랑이’, ‘다락’, ‘달갱이’의 사투리로 좁고 작은 논배미를 일컫는데 코딱지만한 크기부터 보통 20-30평 남짓한 크기의 다양한 계단식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쯤이면 마늘과 같은 밭작물이 제 푸르름을 더해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다랭이마을 아래에 암수바위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숫바위를 숫미륵, 암바위를 암미륵이라 일컫습니다. 남근석처럼 우뚝 솟은 숫바위 바로 뒤에는 둥그스럼한 바위가 반으로 갈라진 채 여근의 형상으로 자리하고 있고 그 뒤에는 만삭이 된 여성이 비스듬히 누워있는 듯한 암미륵이 보입니다. 1751년 10월 23일에 남해 현령 조광진이 꿈을 꾸고 난 후 이 바위를 땅에서 꺼내 미륵불로 봉안하고 논 다섯 마지기를 바쳤다고 합니다. 크고 생김새가 독특한 선돌이 대개 미륵신앙의 대상이 되었듯이 이 바위 또한 남근석을 닮은 선돌이 미륵불로까지 승격된 사례라 하겠습니다. 암수바위를 보고 마을로 몇 걸음 올라오다보면 이번에는 돌탑으로 쌓은 밥무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현지인들이 ‘밥구디기’라고 부르는데요, 이곳에서 매년 음력 10월 보름 저녁 8시경에 동제(洞祭)를 지내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 밥무덤 옆에 당산나무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동제를 두 번 모시는데 10월 15일에는 밥무덤에서, 암수바위가 발견된 10월 23일에는 암수바위에서 제의를 갖는 것이죠. 밥무덤은 제삿밥을 얻어먹지 못한 혼령에게 밥을 주어 풍작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을내 세 군데 밥무덤이 있는데 마을 가운데 자리한 돌탑형식의 밥무덤에서만 동제를 지내고 나머지 두 군데에는 밥만 모시고 있답니다. 마을 뒷산 깨끗한 곳에서 채취한 황토를 기존 밥무덤의 황토와 바꾸어 넣고 햇곡식과 과일, 생선 등으로 상을 차려 풍농과 마을 안녕을 비는 제를 올린 뒤 황토를 파서 그곳에 밥을 모시고 덮개돌로 덮어둡니다. 초등교원 신규임용시험을 치르는 날, 대폭 줄어든 채용인원으로 인해 시험장 분위기가 여간 어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4년을 공부했던 어제의 동기가 오늘엔 서로가 서로를 떨어뜨리고 경계해야하는 경쟁자여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채용인원이 줄어든 데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는 현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제 저출산 문제는 우려할만한 수준을 훌쩍 넘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나타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 멀리 선사시대 암각화에서부터 선돌과 남근석, 성혈, 장승, 풍수지리사상에서 남아선호사상까지 긴 흐름을 겪으면서 민초들이 바랬던 것은 결국 ‘다산(多産)과 풍요(豊饒)’였던 것 같습니다. 그 염원에는 가정사의 문제만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마을 전체의 번영을 위한 염원도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 바램은 한 가정의 문제, 한 마을의 문제를 벗어나 국가적 과제로까지 다뤄져야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이래저래 낮아지는 출산율을 보며 한동안 왁자지껄했던 그 시절에 대한 미련을 가슴속에만 묻어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울산 옥현초 교사
1 여덟 번 째 막내딸의 결혼식 전날 일흔 둘의 어머니는 내일이면 신부가 될 막내와 나란히 누워 천정을 쳐다본다. 이 딸을 낳던 그 이른 봄 쌀쌀했던 산부인과 병실에 누워있던 자신의 모습이 어제처럼 다가온다. 어머니는 성장한 딸의 어깨를 가볍게 껴안는다. “엄마, 얼마만이예요. 저를 껴안고 자던 것이?” “세 살 때까지 엄마의 젖을 먹었으니까, 이십삼 년 만이다.” “제가 세 살 때까지 엄마 젖을 먹었어요? 그 때까지 엄마가 젖이….” 막내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세 살 때까지 젖을 먹었다니, 처음 듣는 말이다. “세 살 때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너도 천재는 아니구나.” 옆 침대에서 아버지가 장난스럽게 말한다. “제가 세 살 때까지 엄마 품에 잤다면 아빠가 저를 얼마나 싫어했을까? 제가 엄마의 젖을 다 차지해 버렸으니?” 막내가 아버지를 향해 돌아누우면서 실눈으로 웃었다. “아, 생각이 나요? 자다가 한밤중에 잠이 깨어보면 제가 엄마 등 뒤에 혼자 있었어요. 아빠가 절 뒤로 밀려버렸지요?” “프로이드할아버지가 들으면 웃겠구나. 엄마를 사이에 두고 딸이 아빠와 다투었으니….” 셋은 소리 내어 웃는다. “그런데 왜 저를 세 살 때까지 젖을 먹이셨어요? 우유가 없었어요?” “왜 우유가 없었겠니? 네 언니들과 오빠들 중에는 엄마가 젖이 모자라 우유만 먹고 자란 애도 있었어.” 아버지가 대신 대답한다. 그렇다면 왜 나는 세 살 때까지 젖을 먹였을까? “어머니는 너를 누구보다도 사랑했으니까, 그랬지.” “제가 몸이 허약했었나요?” 막내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런 것도 아니다. 세 살 때까지 엄마 젖을 먹었으니 얼마나 건강했다고….” 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막내는 그 음색이 유다르게 들렸다. 처음 듣는 말이다. 그 때 막내는 엄마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엄마가 너를 가졌다는 것을 안 때에 네 맏 언니 결혼 날짜가 잡혔던 때였지. 그래서 너는 규중이와 겨우 여덟 달 밖에 차이가 안 나지 않니?” 규중이는 큰 딸의 맏아들이다. 막내를 가졌다는 것을 안 것은 큰 딸이 약혼을 할 무렵이었다. 아무래도 몸이 이상해서 몰래 혼자서 산부인과를 찾았다. 엄마의 아기 일곱을 다 받아낸 늙은 여의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엄마는 덜컥 겁이 났다. “엄만 저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서 즐겁지 않으셨군요?” 막내의 말에 어머니는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일평생 네게 죄지은 심정으로 살아오셨다.” 아버지가 아내의 마음을 딸에게 전한다. “그럼 혹시 중절수술을 생각하셨어요?” “엄마는 겁쟁이라 그런 마음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태연히 말한다. 어머니는 남편을 향해 돌아누운 막내딸의 등을 뒤로 감싸 안고 그 등에 볼을 댄다. 스물일곱의 처녀가 돌도 채 안된 아기가 된다. 늘 딸에게서 풍겨오던 젊음의 향기가 비릿한 젖 냄새로 변한다. 딸을 껴안을 팔에 힘을 준다. 토실토실 살 오른 아기가 품안으로 들어온다. 2 일곱을 낳았어도 이렇게 진통이 심하지는 않았다. 온 몸의 뼈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부서지고 있었다. 아픔이 더해질 때부터 산모는 모두 제 죄 값으로 알았다. 버리려 했다가 어쩌지 못해서 배속에 안고 살아왔으니, 아기가 어머니 자궁 속에서 당한 배신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이제 그 앙갚음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느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진통이 더해질수록, 잘못했습니다. 부디 이 아기를 낳게 해 주신다면 제가 어느 자식보다 잘 키우겠습니다. 그렇게 발광하듯이 기도했다. 모진 아픔 중에서도 순간순간 그 아픔이 쉴 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산모는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다가 아픔에 못 이겨 잠시 의식을 잃었던가, 힘을 더 내라는 의사의 재촉에 내가 마흔여섯 해 동안 쌓아두었던 힘을 다 쏟았다. 순간, 아픔이 가시더니, 어디선가 닭울음소리처럼 가느다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두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딸이구나. 참 귀엽게 생겼구나. 참 너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니….” 친정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더니 차츰 눈앞으로 부연 공간이 트여갔다. “정신이 드느냐? 딸이다. 넷씩 잘 되었다. 막내딸은 보배다. 이 서방이 좋아하겠구나.” 친정어머니는 목소리가 낭랑했다. “우리 아기! 다, 다 있어요?” 산모는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건강한 아기예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옆에 남편이 서있었다. “어디 봐요?” 산모는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가만히 누워 있으라.” 친정어머니가 아기를 싼 보자기를 풀어서 산모 앞으로 내밀었다. 산모는 아기를 받았다. 눈을 감고 발그스름하게 홍조 띈 볼이 실룩거렸다. 물속에서 튀어나온 듯이 젖은 머리가 얼굴 위에 몇 오라기 드리워졌고, 그 아래로 발그스름한 뺨 근육이 조금씩 움직였다. 이것이 생명이로구나. 산모는 아기의 얼굴에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아기는 잠에 빠져있었다. 산모는 감겨있는 아기의 눈이 불안했다. 저 눈이 뜰까. “어머님, 아기 발 좀 봐요.” 산모는 아기보자기를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는 아기 다리를 만져보았다. 연하디 연한 발에 손이 닿자 즉각 반응이 왔다. 어른 엄지손가락만 발이 옴지락거렸다. 발가락을 세여 보았다. 양쪽 두 다리에 각각 다섯 개씩이다. 아기의 손을 잡았다. 꼭 누르면 없어질 것 같은 연하디 연한 손이 산모의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다. “손가락은 다 있냐?” 친정어머니가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아기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눈을 감고 있는 아기의 얼굴색이 차츰 펴지는 것 같았다. 두 팔과 두 다리가 꼼작거렸다. 그 때마다 산모의 심장도 같이 뛰었다. 딸 셋 아들 넷을 낳았으나 이렇게 갓난아기를 눈여겨 들여다보기는 처음이다. 입술 언저리가 실룩이고, 발가락과 손가락도 이따금 미세하게 꼼틀거리는 것 같았다. 살아있는 생명의 울림이었다. “모자란 것 없이 다 달렸다. 다리와 팔과 모가지와 눈이 멀쩡하고, 입과 코와 예쁘다.” 아기를 안은 외할머니가 산모에게 확인시키듯이 말했다.[PAGE BREAK]4 너는 한 달이 지나면서 젖살이 붙기 시작했다. 얼굴과 손과 다리에 포동포동 살이 오르더니 하루 다르게 얼굴 윤곽이 번듯해지더라. 한 번은 네 침대로 다가갔더니, 천정을 행해 바로 누워있던 네가 고개를 나에게로 돌리더구나. 사람 기척을 알고 목 가누기를 하는 것이었다. 엄마를 알아본다. 엄마는 가슴이 벅차더구나. 이제는 네가 미련한 엄마를 거부하지 않는구나. 그날부터 너는 바로 눕혀놓으면 되돌아 바로 눕기도 하고, 오른편으로 누웠다가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인기척이 나는 곳으로 눈동자를 굴리기도 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빨기도 하고, 손을 허우적거리고 발을 바동거리기도 했다. 엄마는 안심했다. 고개를 돌릴 수도 눈동자도 자유롭게 굴리는구나. 나와 의사가 소통되는구나. 몸의 각 부위를 자유롭게 움직이는구나. 너는 젖을 빨면서도 주변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천정에 매달린 종이비행기를 바라보면서 눈동자를 굴렸다. 내가 나지막하게 네 이름을 부르면 너는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아주면 좋아라고 벙긋 웃었다. 그런 네 모습을 대하니 안심되고 감격스러우면서 누구엔지 모르지만 감사했어. 우선 네가 고마웠다. 엄마의 그 모진 마음을 알아주고 풀어주는 네 웃음과 손놀림이 고마웠다. 그 때 내가 지금 내가 믿는 주님을 알았다면 그 분에게 감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에 대한 내 마음을 네가 그 분에가 돌려드렸다고 생각되었다. 두 달이 지나면서 너는 하루 다르게 변했다. 침대에 눕혀두면 깨어 있을 때에는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허공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리고 발짓을 하면서 울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은 특별했다. “미연아!” 내가 네 이름을 불렀다. 그 때 너는 벙긋 웃더니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우리 아가 착한 아가” 이번에는 다른 말을 하면서 일부러 눈을 크게 떴다. 그 때 너는 엄마를 향해 벙긋 웃으면서 눈동자를 굴렸다. 순간 나는 네가 무슨 소리를 듣고 반응한다는 것을 알았다. 단순한 기척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엄마의 소리를 듣고 대답한다는 알았다. 순간 나는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네 조개껍질 같은 귀가 엄마의 말을 듣는구나. “미연아아아!” 엄마는 크게 소리질러 네 이름을 부르면서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너는 한참 내 입놀림을 바라보더니 벙긋 웃었다. 내 말에 응답하는 네가 신기했다. 그런데 엄마는 더한 욕심을 갖게 되었다. 소리를 듣기는 하는데 정말 말할 수 있을까. 엄마는 하루에 몇 번씩 너를 안을 때마다 ‘착한 미연아!’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네가 듣기는 하는 것 같은데, 정말 듣고 말할까. 그 날도 나는 낮잠에서 깨어난 네게 젖을 먹이면서, “오호, 착한 미연아!” 고함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랬더니, “응, 응” 네가 벙긋 웃으면서 옹알거리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내 말에 대한 의사 표시였다. 그 순간 가슴을 누르던 큰 바위가 스르르 풀려나갔다. 엄마는 목이 매였다. 말을 하는구나. 네가 이 세상에서 처음 말했던 그것이 ‘응응’이었다. 그날부터 엄마는 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는 항상 ‘응응’ 대답하더니, 어느 날부터 인가 ‘응아, 응아,’ 두 음절로 바꾸어졌다. 그 뒤부터 너는 몸놀림이 아주 자유로워지면서 적극적이었다. 고개를 뻣뻣하게 세워 좀더 멀리 보려고 했고, 젖을 다 먹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기도 했다. 5 네 몸이 하루 다르게 커져갔다. 갓났을 때보다 거의 두 배는 되었을 것이다. 그 즈음 너는 이따금 울기도 했고, 혼자서 놀다가 사람이 다가가면 좋아서인지 ‘까르륵 까르륵’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젖을 먹다가는 젖에서 입을 떼고는 한 손으로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는 것이었다. 너무나 신기했다. 다른 애들이 자랄 때도 그랬는지 기억이 없지만, 너는 엄마의 젖꼭지에서 젖이 나와서 먹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네가 만지는 젖꼭지에서 젖을 짜내면 그것을 혀로 핥아보고는 방긋이 웃었다. 그리고는 곧 젖을 다시 빨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몸과 그 놀림이 달라졌다. 장난감을 주면 좋아라하면서 손에 쥔 채 흔들었다. 엄마가 장남감을 빼앗으면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그것을 도로 달라고 울기도 했다. 텔레비전을 켜놓으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려 유심히 바라보기도 했다. 어느 날 시골에서 외할머니가 올라오셨다. “오오. 내 새끼 이렇게 컸구나!” 노인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너를 안아 뺨에 입을 맞추는데, 네가 그만 ‘으앙’ 하고 울어버렸다. 외할머니는 멀쑥했다. “이놈이 벌써 낯을 가리는구나!” 외할머니가 너를 방바닥에 내려놓았는데, 아니, 이게 어쩐 일이야? 네가 엎드린 채 두 다리와 두 팔로 방바닥을 쓸면서 내게로 기어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 애가 기는구나! 기어?” 외할머니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놀라면서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기어 다니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온 몸을 움직이다가 뒤로 나자빠지더니 ‘만세 자세’를 하더니 뭣이 마음대로 안 되는지 ‘아앙’하고 울어버렸다. 그러다가 다시 허우적거리더니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그런 자세로 손발을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자, 어서 와라. 어서 와 와 와!” 엄마는 우는 아이를 달래지 않고 엎어져 허우적거리는데도 다가오기를 재촉하였다. 아기는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다시 기를 쓰고 기어보려고 했다. “이젠 그만 해라. 됐어. 내일이나 모래쯤이면 온 방안을 기어다닐 것이다.” 외할머니는 아기의 기는 것이 기특했던지 얼른 아기를 안아서 내게 넘겼다. 나는 아기를 안고서 눈물과 콧물과 땀으로 뒤범벅이 된 아기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람의 얼굴을 알아봐서 낯가림을 하더니, 네가 기는구나. 팔과 다리가 온전하구나. 내가 그렇게 벽장에서 뛰어내리면서 너를 지우려 했는데도, 너는 끄떡 않고 이렇게 한 생명으로 태어나서 내 앞에서 시위를 하는구나. 엄마는 부끄럽고 감격하여 네 당찬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기는 사람이 나타나면 좋아라고 소리를 질렀고, 낯선 사람이면 낯가림을 했다. 젖을 먹다가도 장난감을 보면 얼른 젖을 버리고 기어가서 그것을 갖고 왔다. 온 방안에 아기 장난감으로 가득찼다. 우리 부부는 아기를 위해서 침대를 치웠다. 방에서 마음대로 놀도록 했다. 언니나 오빠가 쓰던 장난감들이 많은 데도 모두 새것으로 채워주었다. 아기는 잠을 자면서도 몸을 자주 뒤척였다. 반듯하게 눕혀놓았는데, 조금 있으면 엎드리기도 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에 식구들은 다시 이 막내의 재롱을 보려고 둘러앉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 우리 집으로 오셨을 때였다. 엄마 품에서 할머니에게로 기어가던 아기가 갑자기 멈추더니, 뒤돌아서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식구들이 아기를 중심으로 빙하니 둘러앉아 있었다. 아기가 뒤돌아 기려고 하다가 잠시 멈칫 하더니 오똑 일어나 앉았다. 몸이 기웃뚱거릴 때마다 아기는 손으로 방바닥을 짚으면서 중심을 잡았다. “아니, 아기가 앉는구나? ” 아들 집에서 막내 손녀의 재롱을 받으려던 두 노인의 눈이 커졌다. “제가 몇 달째냐?” 노인이 모르고 묻는 것이 아니었다. 손녀의 출생년월일시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어른이었다. “아직 여섯 달인데 홀로 앉아?” 아기는 앉은 채로 바로 위 오빠가 던져주는 인형을 들더니 그것을 안고서 상체를 뒤틀면서 제 엄마를 찾았다. 그런데 나는 할아버지를 향하고 앉아있는 미연의 바로 뒤에 앉아 있었다. 아기는 엄마를 찾지 못했는지, 앉은 채로 움직이더라. 식구들이 박수를 쳤다. 엄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등뼈에도 이상이 없구나. 그 때 아기는 뭣이 좋은지 두 손을 마주부딪치면서 손뼉을 쳤다. 아! 손가락들도 이상이 없구나. 엄마에게는 감격이었다. 아기가 홀로 앉기를 시작해서 두 주일쯤 지나서였다. 아기가 입을 열고 ‘압’ ‘엄’하고 그 뒷 음절을 말하려고 애를 썼다. ‘응응’ ‘으앙, 응앙’에서 다른 음절을 배우고 있었다. 어느 날 엄마는 아침 식사 후에 아기 젖을 먹이다가, “맘마 찌찌.” 그렇게 말하고서 오른손을 가로 흔들었다. 그만 먹으라는 신호였다. 그 동안 이 신호가 엄마와 아기 사이에 이루어졌던 약속이었다. “맘마? 엄마!” 아기가 입에서 젖을 떼더니, 엄마 목소리대로 말하는 것이었다. “뭐야? 엄마라고!” 나는 ‘맘마’라는 불명확한 음절이 ‘엄마’로 들렸던 것이다. 그래서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아기를 꼭 껴안았다. “엄마라고 했니! 내가 네 엄마야!” 나는 복받치는 울음을 어금니 사이로 씹으면서 같이 울었다. 그 날부터 아기의 입에서는 집안 식구들 호칭이 계속되었다. 엄마, 아빠, 언니, 오빠, 할버지. 할니…. 그러나 그 음절들은 나의 귀에만 들리는 특별한 단어였다. [PAGE BREAK]6 며칠 머무시다가 노인네 두 분이 집으로 돌아가신 뒷날 저녁에 아기의 온 몸이 열로 끓기 시작했다. 재어보니 39도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아빠와 밤새도록 아기를 간호했다. 찬 물수건으로 열을 잡았다. 열이 38도로 내렸고, 칭얼대던 아기는 힘이 진하여선지 신음소리만 내다가 눈을 붙였다. 뒷날 병원을 찾아서 소아병동에서 이틀을 살고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기를 방바닥 한가운데 앉혀 놓았더니 어느 새에 자기 침대로 기어갔다. 아기는 침대 모서리를 붙잡고 일어서는 것이었다. 옷을 갈아입던 남편이 소리를 질렀다. “미연아!” 아기는 소리를 들은 척도 않고 두 팔로 자기 침대로 올라가려 끙끙거렸다. 이틀간의 외출에서 돌아온 아기는 제 침대를 찾고서 반가웠던 것일까. 엄마는 얼른 아기 침대의 한쪽 문을 열어주었다. 이런 때를 예상했던지 아기 침대의 한편을 문으로 여닫을 수 있게 만들어놓았다. 아기는 엄마가 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채었는지, 침대를 놓고 방바닥에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열려진 문으로 가 침대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미연아!”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며칠 고열에 신음했던 아기에게 이런 힘이 어디서 솟아났던가. 아기는 방 구석구석을 기어 다니면서 손에 잡히는 것을 의지해서 혼자서 일어나려 했다. 누구도 만류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 애 손을 붙들고 같이 세워 걸려보고 싶었으나 참았다. 혼자 그러다가 자기 침대를 붙잡고 쉽게 일어났다. 항상 침대 문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거기를 통해서 침대 위로 올라가려고 애를 썼다. 아기는 그 침대 안에 있는 장난감을 집어내기도 했다. 이따금 젖을 먹이다가 우유병을 침대 안에 놔뒀더니 그것을 들고 젖꼭지를 빨았다. 그러다가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의 젖 맛을 그 우유병에서 맛보았다. 젖을 먹이는데 아기의 잇몸 감촉이 예전과 달랐다. 젖꼭지에 이상한 이물질이 끼어있는 듯했다. 혹시 아기가 다른 것을 입안에 넣고 젖을 빨고 있는가 해서 물렸던 젖을 빼었다. 아기가 울었다. 그 순간 아기의 연분홍 잇몸을 비비고 하얀 젖니가 눈을 트듯이 솟아나고 있었다. “여보!” 엄나는 아빠를 불렀다. 퇴근해서 세수하던 아빠가 놀라서 나와서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미연이가 이가…이가…?” 물렸던 젖을 다시 빼고서 아기의 두 잇몸 사이에 앞 젖니를 보였다. “아니, 이 애가 빠르긴 빠르구나!” 아빠 엄마는 서로 쳐다보면서 웃었다. 잇몸에서 하얀 이가 돋아나면서 아기는 젖을 먹는 태도도 달라졌다. 젖을 빨다가 이따금 젖꼭지를 슬며시 물어뜯기도 했다. “아얏” 엄마가 소리를 지르면 아기는 입술을 젖에서 떼고서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엄마 젖을 깨물면 어떻게 해?” 엄마는 아기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아기가 깨문 젖이 아파도 엄마는 즐거웠다. 7 미연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11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달마다 태어난 날에는 생일을 차려주기로 작정했다. 그것으로 미연에게 대한 엄마의 마음이었다. 토요일이었다. 학교 갔던 미연의 누나와 오빠들이 돌아왔다. 아버지도 일찍 퇴근했다. 오늘은 미연이가 태어난 3월 23일이었다. 모두들 함께 저녁을 먹고서 이 늦둥이를 가운데 놓고 집안 식구들이 즐기고 있었다. 미연이는 식구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인지 얼른 침대 모서리를 붙잡고 일어섰다. 그리고서 침대를 붙잡고 중간에 있는 침대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짚고서는 걷는구나.” 누군가가 신기한 듯이 중얼거렸다. 아기는 침대 문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침대 위로 올라갈 것인가, 말 것인가, 계산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미연아! 이리 아빠에게.” 아빠가 퇴근길에 사온 나팔 장난감을 흔들어 보이면서 아기를 불렀다. 침대로 오르려던 아기가 고개를 젖히고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미연아! 여기 와라.” 아빠는 장난감을 흔들어보였다. 나팔 장난감 끝에는 종이 달려있었다. 침대에 오르려던 아기가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미연아! 이리 와라!” 아빠가 파랗고 노란 색이 칠해진 장난감 나팔을 흔들었다. 거기에서 종소리가 났다. 아기는 잠시 사람들 시선을 살피더니, 휘청거리면서 아빠에게도 두어 걸음을 내딛었다. “아기가 걷는다!” 누가 고함을 질렀다. 틀림없이 미연이는 걷고 있었다. 엄마는 두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걷다가 주저앉은 아기를 보면서 울었다. 쓰러진 아기가 다시 일어나서는 계속 나팔 종을 흔들고 있는 아빠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겨놓았다. 겨우 한 걸음을 걷고는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다. 두 발자국 옮겨놓더니 주저앉았다. 그러나 누구도 아기를 거들어주지 않았다.
-선생님과 어른들을 존경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교육이 제대로 될 수 없음을 명심하고 우리가 실추시킨 교권을 우리가 일으켜 세우는데 앞장선다. -우리는 우리 자식들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과 어른들을 낮추는 어떠한 언행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시는 선생님의 어떠한 교육적 지도도 적극 지지하며 불미스러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성지도와 생활지도에 헌신적으로 노력하시는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학교와 일관된 가정교육을 통해 참된 인간성 함양에 동참한다. 2001년 11월 대전 월평동에 위치한 서대전고등학교에서 열린 ‘스승존경 결의대회’에서 학부모와 동문, 지역주민이 채택한 결의문이다. 학부모들은 때려서라도 사람을 만들어 달라며 회초리도 전달했다. ‘학교붕괴’라는 유행어가 탄생할 즈음 열린 이 결의대회는 인근 학교는 물론 전국으로 확산돼 나갔다. ‘사랑의 매’ 전달이 이어지고, 선생님 구두 닦아 드리기와 선생님께 편지쓰기 운동도 일어났다. 스승의 은혜에 금연으로 보답한다며 담배 화형식을 갖는 학교도 나왔다. 교권회복 운동의 메카가 된 서대전고가 스승존경 운동을 시작한 것은 선생님들이 기(氣)를 펼 수 있게 해줘야 학교붕괴도 막고 공교육도 살릴 수 있다는 오원균 교장의 신념에서 비롯됐다. 오 교장은 학부모 대표들에게 “교사들이 뒤탈을 우려해 수업 중에 아이들이 엎드려 자거나 말거나 내버려둬서야 교육이 되겠느냐”며 선생님 존경의 필요성을 역설해 나갔다. 이 말에 공감한 학부모들이 주축이 돼 스승존경 결의대회를 연 것이다. 결의대회 이후 선생님들의 사기는 오르고,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을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툭 하면 걸려오던 학부모들의 시비전화도 사라졌다. 신바람이 난 선생님들은 수업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고, 아이들의 눈동자는 빛났다. 학교가 제대로 돌아간 결과는 시험성적이 말해줬다. 2003학년도 대입수능시험의 평균 점수가 8점이나 올랐다. 전국 평균 점수가 전년대비 3.2점 떨어진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선생님 존경하니 성적은 저절로 올라’라는 제목의 보도가 줄을 이었다. 서대전고는 스승존경 운동을 펼치면서 지역 명문고로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이 운동을 주도하고 스승존경운동중앙협의회장을 맡고 있는 오 교장은 지금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여러 시․도에 스승존경운동협의회가 만들어지면서 전국적인 교육시민사회운동으로 승화될 것 같았던 스승존경운동이 침체에 빠졌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의 사기진작에 1차적인 책임이 있는 교육부나 교육청은 언론의 관심이 멀어지자 덩달아 이 운동을 외면하고 있다. 오 교장은 “스승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사기를 높여주면 교실붕괴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 사실이 올해도 우리의 숙제다. / 이낙진 leenj@kfta.or.kr
필자는 2006년 새해 벽두에 본란을 통해 2006년 한 해는 무너진 교육의 기강과 규율이 바로 서고, 추락한 교원의 사기와 권위가 회복되는 해로 만들어야 하며, 법과 원칙을 지켜야 손해 보지 않는다는 행위준칙이 지켜져야 우리 교육에 미래와 희망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새해가 열릴 때마다 금년에는 좀 더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와 발전에의 희망과 정성과 열성을 다하려는 다짐으로 출발하지만, 기대와 희망과 다짐이 충족되기란 어려운 모양이다. 여전히 교육에서의 기강과 규율은 비틀거리고, 교원들의 사기와 권위는 뒷걸음질치고 있다. 교육은 국가발전 전략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으며, 여건의 개선 없는 신자유주의적 사고가 교육계를 휘감고 있다. 이제 다시 2007년을 열면서 과거를 되돌아보고, 교육의 주체들이 서로 네 탓만 할 것이 아니라 내 탓이 무엇인가를 성찰하면서 새해에 관한 설계를 실행에 옮겨야 할 때다. 지난 2006년은 어느 해보다 다양하고 복잡한 우리 교육계의 절실한 과제들의 논의와 논쟁이 이루어졌다. 교원능력개발평가제 시행에 대한 논란, 교육인적자원부장관 임명 파행, 학교급식 파문, 사립학교법 개정을 둘러싼 논쟁, 공무원연금법 개악 시정 촉구, 학급총량제 도입에 따른 열악한 교육환경 논쟁, 지방교육자치제의 정체성 혼란 문제, 열악한 교육재정 극복의 시급성, 수석교사제 도입, 학제 개편 등 교육제도와 정책에 관한 논의 및 논쟁, 교사 폭행, 학교폭력, 집단 따돌림 등의 교원과 학생의 인권침해 논쟁, 통합논술 도입에 따른 대학입시의 타당성 제고 논쟁, 공교육 정상화 등 숱한 과제로 교직사회의 불안정과 교육의 이해 혹은 관련 집단 간 의견의 상충이 심화된 해였다. 이러한 논쟁과 이견들은 그 자체로 생산적일 수 있다. 논쟁과 논의와 타협 및 설득을 통하여 보다 나은 방안이 도출되고 제3의 길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논쟁과 논의만 무성했지 어느 것 하나 교육이해 집단 간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다시 2007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금년 한 해는 어떤 주제로 고민하는 해가 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필자는 ‘공교육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해’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교육의 역사를 통하여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 국민의 교육에 대한 신뢰는 매우 높았다. 교육은 개인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으로 여겼으며, 교육이 국가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러한 교육에 대한 신뢰는 지난 IMF 시점을 정점으로 최근 10여년 사이에 불신의 곡선이 거의 직선을 그리는 양상으로 진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된 이유는 다양하지만, 핵심적인 요인은 우리 교원들과 정부라고 생각한다.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우리 교육자들에게 그 1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과 학생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데, 그 변화를 생산적으로 이끌기 위한 교육자들의 노력과 분발이 미흡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개선․혁신․개혁과 같은 이야기만 나오면 거부감을 보이고 회피하려는 행태를 교육자들이 지니고 있다는 사회인과 학부모들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교육자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다시 한 번 점검할 일이다. 정부 또한 교육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다. 교육예산 GDP 6% 확보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국가발전을 위한 교육의 중요성과 신뢰감을 떨어뜨리고 있다. 교육은 투자 없는 결실을 기대하기 어려운 공적 기업이다. 과대 과밀학급을 해소하고 학급당 학생 수를 1명이라도 줄이기 위한 투자, 교사 대 학생 비를 줄이기 위한 투자, 교사의 수업시수를 OECD 수준으로 접근시키는 등의 교육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자, 유능한 교원 양성을 위한 투자, 교원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투자, 사교육이 아니더라도 상급학교 진학과 학생 개개인의 적성 및 잠재능력 개발이 가능한 공교육에의 투자, 학교경영과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투자 없이 교원들의 희생과 교육애를 호소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 처사다. 교원들로 하여금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주면서 열성을 다 해 학생 교육과 지도에 힘쓰자고 호소하는 것이 순리에 맞는다. 지난 2006년과 마찬가지로 2007년에도 교육계에 풀기 어려운 과제들에 대한 논쟁이 무성할 것이다. 교원능력개발평가제, 수석교사제, 교육자치제, 입시제도 등의 제도에 관한 논쟁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 수준 교육과정의 부분 개편과 더불어 어떤 인간을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 등 교육의 본질 추구 논쟁도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교육에 관한 이 모든 논의와 논쟁들이 교육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한다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최효찬 | 저자, 비교문학 박사 조선시대 최초의 사립학교 건립 진 리프먼 블루먼은 인재를 중시하는 리더십으로 '관계지향적 리더십'을 들고 있다. 관계지향적 리더십은 다른 사람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돕는 데 보람을 찾는다. 여기에는 협력형, 헌신형 그리고 성원형 스타일이 있다. 협력형 스타일의 사람은 팀을 구성해 협력하며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헌신형 스타일은 다른 사람의 일을 도와주는데서 진정한 만족을 얻는다. 성원형 스타일은 다른 사람들의 성취감을 북돋워 주거나 스승처럼 조언하고 자신이 동일시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업적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갖는다. 즉, 관계지향적 리더십은 아이들을 뒷바라지 하는 '엄마형 리더십'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관계지향적 리더십은 다름 아닌 가문의 기획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덕목이다. 명문가의 초석을 닦고 자녀교육에 앞장선 가문기획자들은 통상 가부장적일 것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오히려 여성적인 엄마형 리더십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예컨대, 퇴계는 아들과 손자, 조카뿐만 아니라 형의 외손, 질녀, 형의 사위, 형의 손자, 조카의 글공부와 어려움을 힘닿는 대로 보살폈다. 수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이지만 퇴계는 먼저 일가의 큰 어른으로서의 역할도 다했던 것이다. 퇴계는 맏형의 외손자가 공부를 게을리 하자 닭 한 마리와 생선을 보내며 학문에 힘쓰기를 당부하기도 했다. 가문의 CEO가 어떠한 리더십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명문가로서의 위상과 명성이 달라질 수 있다. 파평 윤씨 노종오방파의 명재 윤증(1929~1724) 가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이 가문은 단순히 자녀교육에 그치지 않고 이를 체계화해 조선시대 최초로 사립학교를 만들었다. 즉, 명재가문은 이미 4백 년 전에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원스톱' 영재교육 시스템을 도입한 가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퇴계 이황이 자신의 가문이 아니라 후학양성을 위해 도산서원을 세운 것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퇴계의 경우 68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사상을 전하는 후학양성에 취지를 두고 도산서원을 설립해 300여명에 이르는 제자를 배출했다. 체계적인 교육 커리큘럼 마련 명재가문의 경우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문중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당시에는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립 문중학교인 '종학당(宗學堂)'을 세워 후손들의 교육에 전념했다. 당시 공교육으로 서울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 사립학교로는 서원과 서당이 있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양반가는 대부분 스승을 두고 과외를 했는데, 명재가문은 당시 사교육의 폐해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문중학교인 종학당을 설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00년을 이어오는 명재 윤증 가문의 자녀교육 비결은 가문의 전통을 세우고 자녀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가문의 기획자'에 있었던 것이다. 명재가문에 교육의 토대를 놓은 이는 명재의 백부인 동토 윤순거(1596~1668)로, 이 가문의 인재산실 역할을 해온 종학당을 세운 사람이다. 윤순거는 노종오방파의 정신적 전통과 인물양성에 기틀을 다진 인물로 종학당을 건립하고 서책과 기물을 마련하여 자제들을 가르치고 가문의 규칙을 마련한 주역이다. 종학당은 관학인 성균관과 대조를 이루는 사학(私學)의 대표적인 기관으로 요즘의 초·중·고와 대학이 함께 있는 종합캠퍼스와 같다. 10세 아이부터 과거를 보는 청소년들까지 연령과 학문에 따라 단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이는 당시 서당 등의 교육현실에 비춰보면 크게 진일보한 것이다. 종학당은 동토의 아우인 윤선거와 윤선거의 아들인 명재가 차례로 학장에 오르면서 본 궤도에 올랐고 명성을 크게 얻었다. 종학당은 문중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인근에 사는 청소년들도 입학할 수 있었다. 즉, '가문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지역의 교육기관으로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동토는 근대적인 교육체계가 없었던 당시에 가문 차원에서 체계적인 자녀교육 커리큘럼과 프로그램을 만든 '사교육의 기획자'였던 것이다. 동토 윤순거는 아우인 윤선거와 함께 가문의 규칙인 종약과 가훈을 만들었다. 종약에는 종학당의 교육지침과 운영에 관련된 내용도 들어있다. "바야흐로 자라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한번 잘못되어 어릴 때 교양이 바르지 못하면 어리석고 어둡게 되는 것이니 이는 매우 두려운 일이다. 이제 약 10세 이상의 자제를 모두 한 당(堂)에 모아서 스승을 세우고 글을 외우게 하고 읽게 한다. 학업과 학예를 갈고 닦게 하여 반드시 인재를 길러내는 일이 필요하다." 윤순거가 종학당을 세우며 이같이 후학에 전념한 것은 병자호란 때 아버지 윤황이 척화를 주장하다 귀양살이를 하고, 숙부인 윤전(尹火全)이 세자교육을 담당하던 시강원 벼슬을 지내다 강화도로 피난갔다 순국하는 등 불행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윤순거는 벼슬을 사양, 향리에 은거하여 종학당을 세우고 후학들을 교육하는데 전력했던 것이다. 이러한 집안내력이 윤황-윤순거-윤증으로 이어지면서 향리에 은둔하며 후학양성에 힘을 쏟는 가풍이 생겨났다. 명재는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등 4대에 걸쳐 임금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았지만 정승에 오른 역사상 보기 드문 인물이다. 그의 학문적 세계는 양명학파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명재는 양명학자로 강화학파를 형성시킨 정제두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400여 명의 과거합격자 배출해 종학당은 명재가 백부 윤순거와 부친 윤선거에 이어 3대 학장(당장)에 부임하면서 명성을 드높였다. 선비교육과 함께 과거시험 준비가 모두 종학당에서 이루어져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명성이 높아지며 학생들이 늘어났고 150년 후에는 동토의 5대손인 윤정규가 건물을 더 지어 확대 개편했다. 종학당은 조선후기 들어 최고의 명문사립대학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종학당의 규정이 적혀있는 종법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종학당의 운영지침을 마련해놓고 있다. 종학당은 일반서원이나 서당과는 달리 교육과정과 목표를 설정하고 철저한 규칙과 규율 속에서 교육이 이루어졌다. 때문에 파평 윤씨 가문의 종인들 대부분이 종약의 규율아래 체계화된 프로그램과 엄격한 규칙에 따라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종법에는 공부의 근본인 독서에 대해 독서의 의의, 독서의 순서, 독서의 방법 등으로 나눠 자세하게 강조하고 있다. 독서는 예나 지금이나 공부의 기본이지만 독서에도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종학당은 교칙이 엄격했다. 여기에는 일용(日用, 하루에 할 일)·야매(夜寐, 밤에 잠자는 것)·지신(持身, 몸가짐의 방법)·사물(四勿,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독서지서(讀書之序, 독서의 순서)·독서지법(讀書之法, 독서의 방법) 등이 포함돼 있다. 또 먼동이 트기 전에 반드시 일어나 부모의 처소에 가서 안부를 여쭈어야 한다. 밤에는 늦게까지 공부하고 잠자리에 들고 밤에 잘 때에는 부모님께 밤새 안녕하시기를 여쭙는다. 요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할 뿐만 아니라 저녁에도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1564년경 야트막한 니산(泥山) 아래에 터를 잡은 파평 윤씨 일가가 명문가로 우뚝 서고 또 자녀교육 문화를 주도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종학당에서 이루어진 체계적인 교육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파평 윤씨는 조선시대에 전주 이씨를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성씨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가 기록돼 있는 국조방목(國朝榜目)에 따르면, 조선 건국이후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300여 성씨에 1만 4624명이 합격했다. 이 가운데 전주 이씨가 844명을 배출해 가장 많고 파평 윤씨 412명, 안동 권씨 359명, 남양 홍씨 324명, 안동 김씨 310명 등의 순이다. 종학당은 1646년 설립된 이후 과거가 폐지될 때까지 46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고 시호(諡號, 죽은 뒤에 공덕을 기려 임금이 내린 이름)를 받은 인물이 9명이다. 특히 윤황, 윤선거, 윤증은 3대가 모두 시호를 받았다. 한 가문에서 이같이 걸출한 인물이 배출된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실용적 학풍으로 시대 앞서가 명재가문의 특징은 백의정승 집안답게 실용적인 학풍이다. 종학당은 이재(理財)에 대한 과목을 개설해 토론하는 시간을 별도로 가졌다. 지금으로 보면 17세기에 이미 경영학을 가르친 것이다. 또 유교사회의 폐단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제사의 허례허식을 개선해 제수품의 수를 줄였다. 당연히 제사상도 작은 것(68×99)으로 바꾸었는데, 이런 전통은 아직도 내려오고 있다. 예학을 중시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명재가 집안의 부녀자들이 잦은 제수품 준비로 너무 혹사당한다며 간소화했다고 한다. 요즘 표현으로 대학자인 명재는 페미니스트였던 것이다. 명재의 9대손인 이은시사(離隱時舍) 윤하중(尹昰重)이 천문학을 연구한 것도 실용을 추구하는 가풍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명가의 종손이 천문학을 연구했다는 것 자체도 눈길을 끌지만 더 파격적인 것은 천문학을 연구한 윤하중은 음력설 대신 양력설을 지내고 모든 행사를 음력이 아닌 양력을 기준으로 치르는 전통을 만들었다. 심지어 출생신고도 양력으로만 한다. 아직도 음력설을 쉬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다. 윤하중은 연구에 그치지 않고 〈성력정수(星曆正數)〉라는 천문학 책을 펴내기도 했다. 여기에서 그는 1년 동안 1분의 시간이 느리게 계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1년이 365일 5시간50분인데 365일 5시간49분으로 계산되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실용적인 가풍에 따라 요즘도 명재 집안에는 정치인은 거의 없다. 대신 공대출신이나 기업경영자, 의사 등 실용적인 학문이나 전문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명재의 실용적인 가풍을 이어 후손가운데 두 명이 굴지의 대기업 회장에 올랐다. 한국야쿠르트 창업주인 윤덕병 회장은 명재의 8세손이다. 윤 회장은 전문경영인이 소신대로 회사를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일체 경영에 간섭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35년 동안 대표이사가 단 3명에 불과할 정도로 전문경영인이 소신 있게 일하는 회사로 키웠다. 또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을 때도 대리인을 참석시켰다. 마치 명재가 임금이 불러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웅진 그룹 윤석금 회장도 이 집안 출신이다. 윤 회장은 기업에서 인재육성에 대한 철학과 고집으로 '인사 파격'이라고 불릴 만한 사건을 많이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종학당에서 인재를 키웠듯이 윤 회장은 기업을 이끌고 갈 사장을 키워내는 데 남다른 안목을 갖고 있다. 매년 여름방학 때면 명재의 후손들은 종학당에 모여 명재의 가르침을 받는다. 이른바 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한 문중교육의 전통이 수십 년째 해마다 이어지고 있다. 매번 400여명이 교육을 받는다. 400년 전에 자녀교육을 체계화한 가문답게 자녀교육의 지침을 담은 〈훈강〉이라는 교재도 매년 새롭게 만든다. 선비정신을 실천하며 '파평 윤씨 주식회사'의 방향을 정립한 윤순거, 윤선거, 윤증 등 가문 CEO들의 가르침은 아직도 후손들의 정신 속에 깊숙이 남아 마음의 등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자녀교육을 위한 여성적 리더십 흔히 유럽의 귀족들이나 명가에서 자녀교육을 언급할 때는 언행의 신중함과 절제미를 들고 있다. 우리나라의 명문가에도 명재가의 경우처럼 엄격하고 철저한 규율이 존재했고 종법이라는 문서로 체계화되어 전승돼오고 있다. 명재가문은 근대적인 교육체계가 없었던 당시에 가문 차원에서 체계적인 자녀교육 커리큘럼과 프로그램을 만들어 대대로 인재를 배출할 수 있도록 했다. 퇴계 이황이나 청계 김진, 명재 윤증 등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요즘 지식사회의 감성시대에 각광받는 관계지향적 리더십, 즉 여성적인 리더십으로 지속가능한 가문경영의 초석을 쌓았다. 오늘날에는 이들처럼 아버지가 엄마형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자녀교육의 전면에 나서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자녀교육에 열정을 가진 극히 일부 아버지들에게 해당되고 있다. 대부분의 가정은 어머니가 직장일이나 비즈니스로 바쁜 아버지를 대신하면서 자녀교육의 CEO로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이른바 '대치동 엄마'들처럼 자녀교육에 열정적인 어머니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요즘에는 가정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섬세하고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한 엄마형 리더십이 각광받고 있다. 학교교육을남성들보다 여성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여성적 리더십이 한 몫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가 자녀교육에 임할 경우 기존의 가부장적인 권위주의적 리더십으로는 오히려 자녀교육도 못하고 부자관계마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들도 섬세하게 보살피고 이끌어주는 엄마형 리더십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500년 전에 가문의 기획자들은 이미 그런 리더십을 발휘해 새 세상을 열었다. 이제 자녀교육에 나서는 모든 아버지들도 엄마형 리더십으로 무장하자!
이승원 | 인천대 강사 기차가 달려온다! ‘속도’가 우리의 일상을 삼켜버렸다. 단 몇 초 만에 부팅되지 않는 컴퓨터는 고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제 시속 300㎞로 질주하는 고속철도의 속도도 그리 빠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속도는 속도를 낳을 뿐만 아니라 속도는 인간을 훈육한다. 좀 더 편리하고 윤택한 세상을 꿈꿨던 인간은 새로운 사이보그의 출현을 갈망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대뇌와 신경세포는 마치 CPU와 RAM의 기능으로 탈바꿈하여 인간이 세상을 인지하는지, 기계가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을 인지하게 만드는지 모르는 모호한 경계가 도래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기계와 인간은 모두 진화의 진화를 거듭해 왔다. ‘IT 산업’이 각광받고 있는 현시점에서 바라본다면 구닥다리 기계가 판을 치는 시대였을지는 몰라도, 백여 년 전 세계는 새로운 기계의 출현으로 급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기계란 바로 ‘증기기관’이었다. 5대양 6대주를 횡단했던 유길준은 1889년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은 ‘증기의 세계다!’ 산업혁명의 적자인 증기기관이야말로 신세계를 이끌어가고 구성해가는 최첨단 엔진이었다. 증기기관의 운동이 가열 차게 회전할수록 세상도 그와 함께 재빠르게 변해갔으며, 우리의 삶은 증기기관의 자장(磁場) 속으로 급속하게 빨려 들어갔다. 증기기관의 발명은 단순한 기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최신식 DMB폰으로 인해 전 세계의 다양한 정보를 손쉽게 내 손안에서 주무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증기기관은 세상을 쉼 없이 움직이고 유통하게 만드는 거대한 기관이었다. 1895년 12월 28일에는 뤼미에르 형제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영화를 상영했다. 그 제목은 이었다. 영화를 관람하던 관객들은 기차가 마치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줄로 착각을 했다고 한다. 물론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를 보았던 관람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은 근대식 동력기관의 총아라고 불리는 ‘기차’ 그 자체는 아니었다. 무성영화이었기 때문에 기차의 우렁찬 굉음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스크린 위에 재현된 영상이 현실을 대체할 만큼 사실적이었고, 바로 그 리얼리티를 만들어 낸 영화에 대해서 감탄한 셈이다. 문자문화 탄생이 말하기를 구술·청각의 세계에서 시각의 세계로 전환시킨 인류 문명사의 대변혁이었듯이, 영화의 탄생은 근대적 시각화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시각화되는 세계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뤼미에르 형제가 섭외한 근대의 상징이 ‘기차’였다는 것은 실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증기기관을 이용한 기차와 증기선은 근대의 상징이자, 세계 여행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교통수단이었다. 만약 이 두 기관이 출현하지 않았다면 ‘세계’란 말은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중국과 일본을 뛰어넘어 전 세계를 견문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제국주의 열강들이 동아시아를 식민지로 개척하면서 비롯되었다. 개항을 계기로 외국을 여행한 사신(使臣)들은 기차의 외양과 내부의 화려함에 정신이 혼미해 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을 무엇보다도 놀라게 만들었던 것은 기차의 ‘속도’였다. 조선 최초의 수신사 김기수의 표현을 빌면 “기차는 불을 뿜고 회오리바람처럼 가 버리며 눈 깜짝할 사이에 보이지 않게 되어 그저 머리만 긁적거리게 만드는 기기음교(奇技淫巧)의 극치”였다. 그러나 ‘눈을 현혹하는 음란한 기술’인 기차의 출현은 나와는 다른 이질적인 사회와 문화를 접속하게 만들어 주었던 획기적인 미디어였다. 그것은 일본 애니메이션 에서 쿠사나기 소령이 마지막에 일갈했던 말과 동일할 것이다. “네트는 광대해!” 여행,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하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대한 문화적 체험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개인이건 사회건 간에 주체성 형성에 있어 타자의 발견은 필수적이다. 타자의 발견 없는 주체성의 형성은 절대자인 신(神)의 위치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기회로서의 여행이 깃발을 올리기 시작했다. 물론 여행의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시대로부터 존재했다. 고대로부터 근대까지 지속되어 온 여행의 목적은 왕명의 집행을 위한 공적인 목적의 여행, 상인들의 대상행렬(隊商行列), 성지순례, 치료를 위한 여행, 그리고 여행 그 자체를 위한 여행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유럽중심주의적 개념인 ‘지리상의 발견’ 이후의 여행은 단순한 대상행렬이거나 성지순례 등의 여행과는 그 목적이 다르다. 이는 증기기관의 발달로 인해 증기선과 기차가 중요한 여행의 교통수단이 되면서 등장한 근대적 여행, 즉 ‘관광’도 마찬가지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의 여행은 겉으로 보기에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정책이라는 경계 안에서 행해졌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유럽(서양)의 타자인 ‘동양’을 발견해냄으로써 유럽문명을 선(善)하고 우월한 것으로 규정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유럽 국가들은 많은 지식인들을 동양으로 파견하였으며, 그들은 철저한 필드워크를 진행하면서 수집한 자료들을 기반으로 ‘동양의 이미지’를 재구성하였다. 이때 구성된 동양은 ‘야만’과 동일한 말이었다. ‘야만의 박물지’로 명명할 수 있는 동양에 대한 기록은 동양에 대한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서양인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이미지이다. 이는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해 왔었다.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었고 그 밖에 위치한 나라들은 ‘오랑캐’로 치부했다. 조선의 사신들은 자신의 젖가슴을 꺼내어 보여주는 일본 여자들과 몸을 칼로 찔러서 산수와 초목을 그린 문신을 한 일본사람들에 대해서 “사람과 같지 않은 오랑캐에 불과하며, 그들은 한 마디로 매우 더러워할 만하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조선 사신들의 이러한 말은 유럽인들이 동양인들에 대한 비하의 발언과 동일한 맥락이었다.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렇지만 개항의 거센 물결이 조선에 들이치자 조선인들도 어느덧 야만스러운 ‘오랑캐’가 되어 있었다. 영국 사람들은 조선을 똥과 오물이 나뒹구는 더러운 나라이자 도망치고 싶은 흉악한 나라로 불렀다. 조선의 여행자들이 일본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이나 영국의 여행자들이 조선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의 근거에는 철저하게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이 존재했다. 또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역전되어 오히려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야만인’으로 부르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조선반도라는 협소한 공간에서 살았던 조선인들은 기차와 증기선의 발달에 따라 서로 다른 나라를 쉽게 왕복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인들은 이제 ‘바람이 달리고 번개가 치는 듯한 충격’을 온몸으로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대식 교통체계의 발달에 따른 세계관의 변화와 자아와 타자의 새로운 네트워크 형성은 수평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화의 정도와 권력과 힘에 의해서 수직적으로 재편되어 갔다. 미지와의 조우, 신세계를 견문하다 100여 년 전 조선인들의 세계 체험은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의 세계 여행은 대부분 사행(使行)이었다. 조선은 일본을 비롯하여 서양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사신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고, 사신들은 공적인 여행을 통해서 조선과는 다른 세계를 체험하였다. 이들이 여행한 공간은 근대식 공원, 박람회, 학교, 무도회장, 연극장, 감옥, 전신국 등이었고, 이는 서양이 자신들의 우월한 문명을 과시하는 공간이었다. 사신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곳’을 여행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나라들이 ‘보여주고 싶은 곳’을 어쩔 수 없이 보아야만 했다. 사신들은 서양이 보여 준 공간을 통해서 근대화를 실감했으며, 이러한 경험을 기반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했던 것이다. 100여 년 전 사신들의 여행은 단순히 여행으로 끝났던 것이 아니라 ‘진정한 지식의 대근원을 살피는 것’이었으며, 그 지식이란 서양의 사상과 문화에 대한 앎이었다. ‘지금 - 여기’의 우리 삶은 바로 100년 전 여행자들이 체험했던 서양 세계를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100년 전 여행자들은 서구 문명국가가 만들어 놓은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시선 속에서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그리고 그들의 여행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이제 100년 전 여행자들의 여정에 따라 그들이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긴장하며, 때로는 요동쳐야만 했던 현장 속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이 여행의 목적은 지금도 우리의 몸과 의식 속에 깊숙하게 각인되어 있는 ‘서구화 = 근대화’의 본질과 싸우는 일이기도 하다.
김철호 | 저자 [문제] 괄호 안에서 자연스러운 표현을 고르시오. 1. 딸아이에게 한 달에 한 번씩 용돈을 (주기로|건네기로) 약속했다. 2. 고마운 마음에 만원짜리 한 장을 (주었지만|건넸지만) 노인은 한사코 받지 않았다. 3. 젊은 사서는 내가 신청하지도 않은 책을 태연히 (주는|건네는) 것이었다. 4. 아이가 어머니에게서 받아 온 편지를 선생님에게 (주었다|건넸다). [풀이] ‘주다’의 다양한 쓰임새 한국어에서 ‘주다’만큼 쓰임새가 다양한 낱말도 드물 것이다. 상대에게 물건을 가지도록 건네는 일, 돈·요금·봉급 따위를 지불하는 일, 먹을 것이나 영양을 공급하는 일, 일이나 책임을 맡기는 일, 권리나 지위 같은 것을 부여하는 일, 도움이나 혜택을 제공하는 일, 고통·해·창피 따위를 겪게 하는 일에도 ‘주다’가 쓰인다. 이밖에도 주의나 언질 같은 말을 하는 일, 전화를 하거나 연락을 취하는 일, 점수나 학점을 매기는 일, 상이나 벌을 받게 하는 일, 시간이나 여유를 허락하는 일, 속이나 정을 내보이는 일, 감동이나 겁, 느낌 따위를 느끼게 하는 일, 세례나 안수를 베푸는 일, 몸에 힘을 쓰는 일, 액센트나 변화 같은 영향을 가하는 일, 눈이나 귀를 일정한 방향으로 돌리는 일, 눈치를 보내는 일, 자식을 남의 집 며느리나 양자로 들이는 일, 몸이나 마음을 이성에게 허락하는 일 등등, ‘주다’의 대상에는 거의 제한이 없어 보인다. ‘건네다’는 ‘건너다’에서 온 말 한편 ‘건너다’의 어간 ‘건너-’에 사동접미사 ‘-이’가 붙어서 생겨난 ‘건네다’는 크게 세 가지 뜻으로 쓰인다. 첫째, ‘건너다’에서 나온 사동사라는 태생에 충실하게, 사람이나 물건을 ‘건너가게 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다. ‘건네다’가 이렇게 본래 의미로 쓰이는 경우에는 ‘건네다’보다는 ‘건네주다’의 꼴을 취할 때가 많다. “사공이 나룻배로 여인을 건네주었다”, “아이를 업어서 징검다리를 건네주었다” 등이 그 예다. 또 한 가지는 “말을 건네다”, “인사를 건네다” 같은 경우다. 이럴 때는 상대에게 말을 붙이거나 인사를 한다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건네다’는 “물건을 건네다”나 “돈을 건네다”에서 볼 수 있듯이 ‘무언가를 남에게 넘겨준다’는 뜻으로 흔히 쓰인다(이 글에서는 이 용법에 한정해서 ‘주다’와 비교하기로 한다). 주의는 ‘주고’ 인사는 ‘건넨다’ ‘준다’나 ‘건넨다’나, 뭔가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일을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그런데도 한국어에서는 이 두 낱말과 어울리는 대상들 사이에 비교적 엄격한 구별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돈을 넘겨줄 때에는 “돈을 준다”고도 할 수 있고 “돈을 건넨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건너가는 것이 돈이 아니라 말[言]이면 ‘준다’는 안 되고 ‘건넨다’만 된다. 더 흥미로운 것은, 말 중에서도 인사나 수작 같은 것은 ‘건넨다’고 하지만 주의나 언질 같은 것은 ‘준다’고 한다는 점이다. 이런 차이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누구나(?) 좋아하는 ‘돈’을 예로 들어보자. “돈을 주었다”와 “돈을 건넸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예컨대 “어머니가 아이를 잘 봐달라며 담임선생에게 돈봉투를 주었다”와 “~ 돈봉투를 건넸다”는 어디가 어떻게 다른 걸까. 한번 ‘준’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주었다’나 ‘건넸다’나, 돈이 교사의 손으로 넘어간 사실을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둘 사이의 차이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상황에서 생겨난다. 즉, 교사가 돈을 받아서 ‘꿀꺽’ 해버렸다면 ‘주었다’가 어울리고, 정색을 하면서 돌려주었다면 ‘건넸다’가 좀 더 어울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다’의 대상이 된 사물은 한번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 반면, ‘건네다’의 대상은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 십상이다. 그래서 “돈봉투를 주었지만 손사레를 치며 받지 않았다”보다는 “돈봉투를 건넸지만 손사레를 치며 받지 않았다”가 훨씬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이다. ‘주다’는 소유권 이동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무엇이든 ‘주면’ 그 사물은 새 주인을 섬기게 된다. 첫머리에서 ‘주다’와 어울릴 수 있는 것을 여러 가지 살펴보았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주다’에 의해 소속이 바뀐다. 누군가한테 돈을 ‘주면’ 그 사람이 돈의 새 임자가 되고, 권리를 ‘주면’ 그 사람이 권리의 소유자가 된다. 남에게 ‘준’ 상처나 모욕은 고스란히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 된다. 주의나 언질도 한 쪽이 다른 쪽에게 일방적으로 주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어서, 상대가 무언가를 돌려주고 말고 할 것이 없다. ‘건넨’ 것은 돌아오는 것이 정상이다 이에 반해 ‘건네다’는 단순히 어떤 물건의 소재가 다른 사람 손으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이때 사물의 소유권 자체에는 변동이 없어서, 건너갔던 것은 다시 주인에게 돌아오는 것이 정상이다. 흔히 “줬다 뺏는 법이 어딨냐” 하듯이, 한번 ‘준’ 것을 도로 가져오려면 ‘빼앗는’ 방법밖에는 없다. 반면 ‘건네준’ 것은 도로 ‘건네받으면’ 그만이다. 다른 사람한테 말을 ‘건넸는데’ 상대가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말을 건네면 말이, 인사를 건네면 인사가 돌아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공이 ‘건네준’ 여인도 언젠가는 돌아오게 되어 있다. ‘주다’는 일방적이고 비대칭적이며 자기완결적이다. “몸 주고 마음 주고 정도 주었지만” 운운하는 노랫말에서도 보듯 ‘주는’ 행위는 그것으로 그만이어서, 그에 상응하는 것이 돌아오지 않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것이(이를테면 배신이나 보복이) 돌아온다. 이에 반해 ‘건네다’는 쌍방향적이고 대칭적이며 순환적이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건넨’ 것과 똑같은 것이, 또는 그에 상응하는 것이 돌아오게 되어 있다. ‘건네다’는 소유권과 무관할 때가 많다 그런데, ‘주다’와 ‘건네다’ 사이에는 소유권과 관련해서 좀더 근본적인 차이가 숨어 있다. 앞에서 ‘주다’는 소유권 이동을 전제로 한 낱말이라고 했다. 이에 반해 ‘건네다’에서는 애초부터 소유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여인을 ‘건네준’ 사공이 여인의 주인이 아니듯이, 어머니의 편지를 받아서 선생님에게 ‘건네는’ 딸에게도 편지와 관련한 권리가 전혀 없다. 영어로 치면 ‘주다’는 ‘give’고 ‘건네다’는 ‘pass’다. 영어사용자들이 식탁에서 “Give me the salt”라 하지 않고 “Pass me the salt”라고 하는 이유는, ‘give’가 소유권의 존재와 그 이동을 전제로 한 말인 데 반해 ‘pass’는 소유권과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축구에서 동료에게 공을 넘길 때 ‘give’한다 하지 않고 ‘pass’한다고 하는 까닭도 이와 같다. 공을 넘겨주는 선수나 넘겨받는 선수나 결코 공의 임자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건네다’는 구체적, ‘주다’는 추상적 ‘건네다’와 ‘주다’ 사이에는 또 한 가지 중대한 차이가 있다. 누구한테 뭔가를 ‘건네기’ 위해서는 우선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야 한다. 그리고 ‘건네주는’ 사람이 ‘건네받는’ 사람에게 몸소 물건을 넘겨주어야 한다. 이에 반해 뭔가를 ‘주는’ 일은 서로 만나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장은 책상에 가만히 앉아서도 다른 직원을 시키거나 자동이체를 통해서 얼마든지 직원에게 급료를 ‘줄’ 수 있다. 당사자를 직접 대면하지 않고(이를테면 공개적인 글을 통해) 상대에게 모욕을 ‘주는’ 일도 가능하다. ‘건네는’ 행동은 구체적이고 ‘주는’ 행위는 추상적이다. ‘주다’는 한 인간에게서 다른 인간에게 뭔가가 건너가고 넘어가고 흘러가는 온갖 경우를 두루 싸잡아 가리키는 말이고, ‘건네다’는 그 중에서 신체의 실질적인 움직임을 동반한 경우만을 지칭한다. ‘건네다’는 ‘주다’의 부분집합이다. 두 낱말의 상대어가 공히 ‘받다’임을 생각하면 이 점이 한층 분명하게 드러난다. 점잖은 글말로 물러난 ‘건네다’ 이렇게 ‘주다’와 ‘건네다’ 사이에는 의미심장한 차이가 숨어 있지만, 입말에서는 ‘건네다’를 쓸 곳에 ‘주다’를 쓰는 일이 흔하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주다’가 ‘건네다’에 비해 발음이 쉽다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워낙에 ‘주다’의 쓰임새가 넓다 보니 한국어사용자들의 무의식 속에 “‘주다’는 모든 사물에 쓸 수 있다”는 단정적 사고가 자리 잡게 된 연유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입말에서 ‘건네다’를 썼을 경우 말하는 이의 점잖은 성격이나 지긋한 나이를 느끼게 한다. ‘건네다’가 ‘주다’에 눌린 까닭 ‘인간人間’을 풀면 ‘사람 사이’가 되듯이, 사람이란 어쩔 수 없이 사회를 이루어 서로 뭔가를 주고받으며 사는 존재다. 하기야 그렇게 모여 사는 과정에서 말이라는 것도 생겨났을 테니, ‘주다’의 용법이 다종다양한 것도 더없이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사람의 성정이 저마다 다른 탓인지, 내가 누구에게 무언가를 해주어도 상대가 똑같이 갚아 오는 경우는 흔치 않은 듯하다. 아니면, 사람이 서로 제각각이다 보니 자신이 받은 만큼 고스란히 돌려주기보다는 받은 것에 모자라게, 혹은 그보다 넘치게 돌려주는 일이 많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쓰임새의 가짓수에서 ‘주다’가 ‘건네다’를 압도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은 아닐는지. [요약] 주다 -양자의 직접적인 대면과 신체행동이 따르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두루 가리킴 -소유권의 존재와 그 이동을 전제로 함 -일방적, 비대칭적, 자기완결적 건네다 -양자의 직접적인 대면과 신체행동이 따르는 경우만을 가리킴 -소유권 불변을 전제로 하거나, 소유권과 상관없음 -쌍방적, 대칭적, 순환적 [답] 1. 주기로 2. 건넸지만 3. 건네는 4. 건넸다
2000년 4월 7일 새벽,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에 위치한 운봉산에 화재가 발생했다. 초속 12~20m의 강풍을 타고 번진 불은 9일간 계속되며 고성 일대에 산림 피해액만 350억이 넘는 큰 피해를 입혔다. 이른바 '고성산불'. 첫 발화지인 운봉산 인근에 자리 잡고 있는 오호초등학교도 불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김철정 교장을 비롯한 11명의 교원은 새벽에 학교로 달려와 학내전산자료가 입력된 컴퓨터 본체와 학적부 등 주요 자료만을 옮길 수 있었고 불길에 휩싸이는 학교를 바라봐야만 했다. 교사들 노력으로 전소(全燒) 위기 면해 80여년의 역사를 가진 학교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거센 화마(火魔)가 지난 후 뼈대만 남은 창고와 급식시설이 모습을 드러내 안타까운 마음이 컸지만 다행히 본관 건물은 외관만 그을린 채 멀쩡해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현재 오호초의 교장으로 재직 중인 장원진 교장은 당시 교감으로 그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한밤중에 당시 군청에 근무하던 동생의 연락을 받고 학교로 가보니 불이 이미 학교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어요. 긴박한 상황에서 본관 창문을 꼼꼼히 점검한 덕분에 전소(全燒)를 막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의 틈만 있었어도 모두 다 사라질 뻔했죠. 그리고 당시 관사에서 자고 있던 교사를 대피시킬 수 있었던 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장 교장은 이 학교 33회(1962년) 졸업생이다. 모교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서 의욕에 불타올랐지만 갑작스럽게 발생한 재난 앞에서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에 학교를 되살리는 데 앞장섰다. 학교를 5개 구역으로 나눠 매년 하나씩 복구를 해나갔다. '학교 되살리기 5개년 계획'을 실천한 것이다. "제한된 예산으로는 복구에 모든 걸 집중할 수 없었어요. 무엇보다 아이들의 교육이 우선이었으니까요." 위기 상황이었던 만큼 교직원과 학생들을 동원할 수도 있었지만, 수업에 지장을 줄 수 없었기에 장 교장은 굳이 인부를 부르지 않아도 될 때는 학교 기사와 함께 직접 일을 해 나갔다. 그래서 학교를 찾은 사람들에게 일꾼인지 교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말도 자주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 끝에 이제 학교는 제 모습을 찾았다. 오히려 불타기 전보다 더 아름다운 학교로 변했다. 지금은 학교를 찾는 사람들은 학교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장미와 연산홍으로 둘러싸인 교정, 운동장 한 쪽에 마련되어 있는 수목원과 분수공원은 오호초의 자랑이다. 뒷산에 남아있는 산불의 흔적을 보지 못한다면 불이 났던 곳인지 전혀 의심할 수 없다. 작년 여름 고성을 찾았다가 오호초에 들렸다는 이시연 전주교육청 초등교육과장은 "우연히 들린 학교가 너무 아름다워 부럽네요.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학교가 되길 바랍니다"라는 글을 학교 홈페이지에 남기기도 했다. 장 교장은 5년간의 오호초 생활을 마치고 2004년 교장으로 승진하며 다른 학교로 옮겼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2006년 초빙교장으로 다시 부임했다. 그간의 노력이 주민들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다. "모교라는 애착이 있긴 하지만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당연한 일인데 칭찬을 받으니 더 어깨가 무겁습니다." 올해부터는 야생화단지 조성, 과학교육을 위한 간이 기생대·암석원·식물원의 시설 보강으로 학교공간을 다양한 체험 학습의 장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3F 운동, 드럼 수업 등으로 내실 다지기 지난 해 부임하면서 장 교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학교의 외관이 아닌 내실을 다지는 것. 지방의 소규모 학교(현재 6학급 75명)가 대부분 그러하듯 오호초도 점점 줄어드는 학생 수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속초시가 15분 거리에 있어 학생을 유지하는 데 더욱 힘든 형편이다. 또한 학생의 20% 이상이 결손 가정 아동들이고, 50여 가구에 불과한 재학생들의 사교육비가 연간 8000여만 원이 소요돼 이를 보완하는 것도 시급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자를 중심으로 한 특색교육과 독서, 정보, 영어, 리코더에 대한 인증제인 '오호금별제'를 실시하여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또한 작은 실천으로 큰 보람을 갖자는 '3F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3F 운동은 '나부터(From I)', '지금부터(From Now)', '작은 일부터(From Small)'를 통해 기본 생활 습관 형성과 봉사, 공동체 의식을 배양하는 따뜻한 심성을 함양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학생 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학교에 다니면 뭔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평준화를 강조하다보니 학교마다 갖고 있는 특색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뛰어난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르다는 말을 듣게 해주고 싶어요. 학생은 교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노력하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호초의 특색 있는 교육관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드럼 수업이다. 사물놀이, 댄스스포츠, 풍선 아트 등 특기적성 교육을 하고 있지만 장 교장은 직접 배우고 있는 드럼을 작년 9월부터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퇴직 후 '실버악단'을 구성해서 봉사활동을 다니고 싶은 욕심에 배우기 시작한 드럼에 푹 빠진 장 교장은 학생들과 같은 기쁨을 나누기 위해 지원자를 뽑아 드럼 수업을 시작했다. "어린 아이들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저보다 배우는 속도가 빨라요. 이젠 점점 긴장이 된다니까요. 앞으로 조금만 있으면 고성군에서 하는 행사에 우리 '드러머'들이 단골로 출연할 것 같네요. 좀 더 익숙해지면 색소폰도 배워 수업을 하고 싶어요." 직접 구입한 드럼을 학교에 놓고, 방과 후는 물론 주말에도 아이들과 함께 한다. 생소한 악기를 접한 아이들은 한번 드럼을 치면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모른다. 5학년인 최자은 양은 "처음엔 신기하기만 했던 드럼을 치다보면 정말 신나고, 땀도 흘릴 수 있어서 좋아요. 처음엔 무섭던 교장선생님이 지금은 하나도 안 무서워요"라며 웃었다. 장 교장은 드럼이 한 대 뿐이라서 많은 아이들이 함께 하지 못해 올해는 한 대를 추가해 더 많은 학생들을 가르칠 예정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흥이 나고 속초에서 일주일에 두 번하는 드럼 레슨도 더 열심히 받게 됐다고 한다. 2년 전 오호초에서 처음 교직 생활을 시작한 박진우 교사는 "일요일에도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학교에 나오시고, 또 자비를 털어 식사와 간식을 함께 하시는 교장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참 많은 것을 배웁니다. 우리 교사들에게도 행정업무에 대한 부담 없이 수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해주시는 교장선생님을 만난 것이 행운이에요"라고 말했다. 학교의 모습을 바꿔 누구든지 즐겁게 찾을 수 있게 하고, 학생들에게는 인성교육과 함께 다양한 특색교육을 하는 장 교장의 이러한 노력들은 지방 소규모 학교의 경우, 학교가 주민과 하나가 되고 지역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소신에서 시작됐다. 학교가 중심이 되면 학교의 황폐화를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 발전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졸업생 수가 3000여 명 정도입니다. 그 중에 저는 20년 가까이 다니고 있으니 제일 오래 다니는 거죠. 그만큼 더 열심히 해야 되겠죠? 지역 주민들이 모두 선·후배고 제자들이기 때문에 불편한 점도 있지만 적극적인 도움을 주고 있어 누구나 찾고 싶은 학교를 만들고 싶습니다." 장 교장은 마지막으로 지방의 소규모 학교를 살리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전국의 많은 교원들에게 올 한해는 함께 소중한 결실을 맺길 바란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 엄성용 esy@kfta.or.kr
이동웅 | 울산여고 교장 한 제자로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제자와 함께하는 자리는 다른 어떤 자리보다 순수하고 부담이 없어 좋다. 그래서 이런 초대를 앞둔 날이면 마냥 마음이 설렌다. 함께 초대된 분은 제자의 담임이었던 최 선생님, 그리고 지인인 강 선생님이었다. 음식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했던가? 과거 학교시절 이야기며, 세상 살아온 이야기, 또 살아갈 이야기 등 모처럼 모든 일들을 다 잊어버리고 있는 말, 없는 말 다 털어놓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특별한 자리로 우리를 초대한 제자 하 선생은 학성여중에 근무할 당시의 제자로 명문대 약대를 졸업했다. 이후 본인의 적성을 고려하고 사회에 더 큰 봉사를 하고자 의과대학에 진학해서 소아과를 전공한 후 개업의로 10년간 환자를 돌보다가, 다시 정신과 전문의 4년 과정을 거쳐 지금은 부산의 어느 정신과 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드문 이력의 소유자다. 좀 별난, 그러나 특별한 제자와 함께하는 자리라 잘 못 먹는 술도 마시고, 서로 헤어지기 아쉬워 밤늦게까지 찻집에 들려 또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말 오랜만에 가져보는 편안한 시간이었다. 하 선생은 앞으로 울산에 정신병원과 양로원을 세워 울산의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사회활동을 하면서 일생을 보내려고 병원부지까지 준비해 놓았다는 이야기도 했고, 여러 교육문제에 대해서도 자기 나름의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부모가 자신의 생각에 자식을 맞추느라 자식이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며, 부모들이 우리의 좋은 교육제도를 마다하고 자식들을 멀리 외국으로 보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 또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교육이 아이들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긴다며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학교도 함께 변해야 한다는 이야기며, 부모도 교사 못지않은 교육전문가이니 학교가 그 전문성을 학교 안으로 끌어 들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등 여러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냥 어린 제자라 생각한 하 선생과의 대화로 학교 안에서만 생각하는 필자가 우물 안 개구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교문 안과 교문 밖의 온도차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으며, 나 자신이 진정한 교육자로서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도 했다. 도리어 내가 제자로부터 회초리를 맞는 자성의 시간으로, 솔직한 충고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기발한 아이디어로 성공을 일구어 내고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하 선생의 모습이 자랑스러워서 시간을 내서 우리 학교 교직원과 학부모,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해달라고 부탁도 했었다. 다음 날 점심 식사를 하고 막 들어오는데, 바로 전날 즐거운 대화를 나눈 하 선생이 오전 서울에서 위암 수술을 받았다는 비보가 전해진다. 눈앞이 캄캄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제의 자리는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그리운 사람을 보고 가려고 미리 마음먹고 정한 자리였음이 분명하다. 그 넉넉한 여유는 어디서 나는 것일까? 삶의 목표와 철학이 남다른 까닭인 것이었다. 위로받아도 부족한 처지에 타인을 편안하게 해주고자 자기 몸 생각하지 않고, 내색 하나 없이 늦게까지 시간을 내준 하 선생이 안쓰럽고 한편으론 밉다. 내가 진정 이렇게 가르쳤냐고 가까이 있으면 큰소리 내어 꾸짖고 싶은 심정이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도 남을 먼저 배려하려고 애쓰며, 모든 사람에게 비전을 제시해주는 보기 드문 큰 그릇 하 선생. 스승보다 크게 성공하여 항상 자랑스러웠고, 그를 통해 교직의 보람을 느끼며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한, 강한 자부심을 나에게 심어준 하 선생인데 그런 하 선생에게 위암이라니! 그러나 현실을 어떻게 부정할 수 없어 너무 안타까웠다. 나의 자랑스러운 제자 하 선생! 빠른 쾌유를 빕니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너무 열심히 살아왔기에 잠깐 쉬어가라는 강한 메시지로 생각합시다. 이제까지 쉼 없이 달려온 하 선생에게 뒤도 한번 돌아보고, 자신을 사랑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으로 생각합시다. 그래서 지금의 그 열정과 통찰력으로 생각한 바를 꼭 이루어내야 합니다. 보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 말입니다. 하 선생은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은 사람입니다. 지금까지처럼 모든 걸 충분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빨리 회복해서 늘 그랬듯이 즐겁게 사회 활동하는 좋은 모습 꼭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하 선생만이 가진 특별한 향기를 우리 사회를 위해서 꼭 피워 내리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