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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올해 새학기부터 학생들이 배우고 익힐 5.18 민주화 운동 관련 교육청 첫 인정 교과서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광주시교육청의 인정을 통과한 교과서는 초등학생용과 중.고등학생용 2권이다. 초등학생용은 5.18 민주화운동 전개과정, 5.18 민주화운동 속에 담긴 정신, 함께 하는 5.18 등 3개 단원으로 구성됐다. 단원 아래 2-3개의 소주제와 5-7개의 세부내용이 만화와 사진 등과 함께 소개돼 있다. 소주제는 공부할 내용과 관련된 '도입글' 등 '생각열기'와 학습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탐구하는 '살펴보기', 단원별 학습내용을 정리하는 '활동하기', '정리하기' 등으로 꾸며져 있다. 초등학생 눈높이에 맞춰 5.18 발생 계기, 5.18에 담겨 있는 정신을 물음과 답변 등을 통해 어린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함께하는 5.18'에서는 5.18 사적지, 국립묘지 찾아가기, 연극, 노래 해보기 등 주변에서 5·18 정신을 되새기고 체험할 수 있는 손쉽고 다양한 방법 등을 제시했다. 책 표지는 5.18민중항쟁추모탑을 향해 달려가는 해맑은 어린이 모습에서 광주시민이 이루고자 했던 민주주의의 꿈을 나타냈다고 집필진은 설명했다. 중.고등학생용 교과서는 '나와 5.18', 5.18 민주화운동, 5.18과 문화, 5·18 정신 이어받기, 아시아의 광주, 세계속의 5.18 등 5개 단원으로 이뤄져 있다. 사건 자체의 단순 기술보다는 사건이 가진 의미에 초점을 맞춰 학생들이 그에 맞는 탐구활동 등 직접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5.18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과 서울의 봄, 5.18 전개과정, 민주화운동으로 되기까지 등을 기술했으며 5월 관련 문학,음악,미술 등 5.18이 문화, 예술 활동에 끼친 영향 등을 살펴봤다. 5.18에서 찾을 수 있는 민주.인권.평화 등의 사례를 언급하고 필리핀의 '피플 파워', 인도네시아 '5월 혁명' 등 아시아에서의 민주화 운동 등도 설명했다. 집필에 참여한 한 교사는 "5.18 민주화운동의 진행과정을 살펴보고 민주.인권.평화.공동체의 5.18 정신을 몸소 실천하며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른길을 찾는 것이 이 책을 낸 궁극적 목적이다"고 강조했다.
부산지역 학생 수 감소에 따라 각급 학교의 학급수가 급격히 줄고 있다. 부산시 교육청은 학생 수 감소에 따라 올 신학기에 초등학교는 256학급, 중학교는 79학급, 고등학교는 45학급이 줄어드는 등 초.중등학교 전체적으로 380학급이 줄어든다고 1일 밝혔다. 이에 따라 초등학교는 지난해 8천253학급에서 7천997학급으로, 중학교는 4천95학급에서 4천16학급으로, 고등학교는 4천112학급에서 4천67학급으로 각각 조정된다. 또 각급 학교의 학급당 학생 수도 줄어 초등학교의 경우 지난해 32명에서 올 신학기부터는 31명으로 줄고, 고등학교도 일반계는 지난해 39명에서 37명으로, 전문계는 32명에서 30명으로 줄어든다. 단 중학교는 지난해 37명과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부산시 교육청 관계자는 "부산지역 인구감소로 학생 수가 줄면서 2005년부터 각급 학교의 학급수도 함께 감소하고 있다"며 "당분간 학급수가 계속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남는 교실 활용방안 등 대책마련에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공상훈 부장검사)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주경복 서울시 교육감 후보 불법 선거지원 의혹과 관련, 전교조가 검찰 수사에 대비해 특정 간부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내부 문건을 확보한 것으로 1일 전해졌다. 검찰은 최근 전교조 서울지부에 대한 압수수색 등을 통해 "이을재(구속) 조직국장 선에서 방어하고 실패하면 다른 간부를 내세운다"는 내용의 문건과 이메일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직교사로 주 후보의 선거캠프에서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자금 조달 및 전교조 서울지부와의 연락업무 등을 담당한 이 조직국장을 내세워 현직 교사인 다른 간부들을 보호하고 동시에 형사처벌 대상자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조직국장은 검찰 조사시 자신의 혐의는 시인한 반면 다른 간부들의 개입 여부에 대해서는 진술을 하지 않았으며, 다른 간부들도 산하 25개 지회에 대한 표 확보와 홍보단ㆍ선전단 구성 등 선거운동 지시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그러나 한차례 구속영장이 기각됐던 송원재 서울지부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재청구하면서 이같은 내용이 구체적으로 담긴 문건을 첨부했고, 송 지부장은 전교조 모금 활동 등 선거비 불법 지원에 대한 가담 정도가 구체화되면서 결국 구속됐다. 송 지부장은 지난 7월 서울시 교육감 선거 당시 전교조 서울시지부 공금 2억원과 전교조 회원들을 대상으로 모금한 8억여원을 당시 교육감 후보로 나선 주경복씨 측에 기부하고 허위 회계자료 제출에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한편, 검찰은 조만간 주 후보를 한 차례 더 소환 조사한 뒤 형사처벌 수위를 결정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2월 21일, 충북 옥천군 안내면과 안남면에서 중봉 조헌의 발자취와 인근의 볼거리를 돌아보기로 했다. 처음 찾은 곳이 안내면 도이리에 있는 후율당이다. 후율당(충북기념물 제13호)은 중봉 조헌이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은현감을 파직당하고 옥천에 낙향했을 때 제자들을 가르쳤던 서당이다. 중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영규의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수복하는 등 왜병들을 막아내다 금산전투에서 700의병과 함께 장렬히 순국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율곡 이이의 제자였던 중봉은 후율을 호로 정하며 스승의 사상을 잇고자 했다. 안내면 소재지에서 가까운 정방사거리에서 보은방향으로 500여m 거리에 한문으로 '後栗堂'이라 새겨진 표석이 길에 서 있다. 그곳에서 화살표가 가리키는 우측 길로 접어들어 400여m 가면 길가에서 후율당을 만난다. 돌담으로 둘러쳐 있고 북쪽으로 삼문이 나있는 후율당은 용촌 밤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오며 중봉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 되었다. 마을 안쪽에서 만나는 한옥도 옛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도이리에서 나와 37번 국도로 옥천방향으로 가다보면 다리를 건너기 전에 인포삼거리를 만난다. 이곳에서 안남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575번 지방도로다. 중봉 조헌 신도비(충북유형문화재 제183), 표충사, 중봉 묘소(충북기념물 제14호)가 있는 도농리에서 처음 만나는 게 길가의 신도비다. 임금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둔 것이 신도비다. 인조 27년(1649)에 세워진 중봉 신도비에는 중봉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최후의 격전지였던 금산싸움이 자세히 적혀있고, 좌의정 김상헌이 글을 짓고 이조판서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표충사는 신도비에서 바라보이는 150여m 거리에 있다. 표충사의 대문인 삼문은 충의문으로 가운데 문이 높고 양쪽의 문이 낮은 솟을삼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삼문에 들어서면 주병덕 전 충북지사가 쓴 '표충사'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는데 이곳에 중봉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지당에 비 뿌리고 / 양유에 내 끼인 제 // 사공은 어디 가고 / 빈 배만 매였는고 //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 오락가락 하더라 잔디밭에 있는 조헌 시비 앞에서 옛 시조 한 수 읊으며 당시의 생활풍습을 생각해보는 것도 현대인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다. 표충사와 영모제 사이로 연결된 돌계단을 60여m 오르면 중봉의 묘소다. 묘소는 낙낙장송들이 에워싸고 있는 언덕 위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우암 송시열이 중봉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과 문인석이 서 있는 묘소에서 표충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표충사에서 청정리를 찾아간다는 것이 마을 입구에 수령 300여 년의 느티나무가 서 있는 화학리 2구로 들어섰다. 회관 앞에 36년 전에 부락훈을 새겨 넣은 표석이 있어 어느 곳에 가든 새로운 문화가 있다는 것을 깨우친다. '열심히 일하자, 굳게 뭉치자, 서로 받들자'는 글귀가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며 살았지만 늘 부지런했고, 나눌 줄 알았고, 예절바르던 옛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마을에 나타난 낯선 사람을 집에서 지켜보다 밖으로 나온 정척기 어른은 인근 마을과 옥천의 역사를 꿰뚫고 있다. 숨을 몰아쉬면서 옥천 육씨와 옥천 전씨, 본인의 이름에 얽힌 일화를 들려줬다. 안남천이 흐르는 길가의 청정리에 3기의 선돌이 있다. 돌도 돌 나름이라고 답사를 하다 보면 역사적으로 중요한 돌을 많이 만난다. 가까운 거리에서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선돌들은 나름대로 역할과 의미하는 바가 크다. 1호 선돌은 폐교된 삼호초등학교 앞 논 가운데에 있고, 윗부분을 뾰족하게 손질한 숫선돌로 마을에서는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일부다처제를 의미하듯 암선돌 두 개를 좌우에 거느리고 있다. 선돌 옆에 서 있는 신태만선생교육공적비와 유리창에 붙어 있는 교장실, 교무실이라는 글자가 기도원으로 바뀐 옛 삼호초등학교를 알려준다. 송정마을 뒤 논 가운데에 있는 2호 선돌은 뒤로 배가 불룩 튀어나오게 손질한 암선돌로 마을에서 할머니라 부르고, 마을회관 앞 냇가에 있는 3호 선돌은 윗부분을 둥글게 손질한 암선돌로 아이 낳기를 기원하는 여성들이 돌로 문질러 반들반들하다. 청정리에서 안남면 소재지인 연주리로 가면 해발 384m에 불과하지만 한반도가 내려다보이는 둔주봉에 오를 수 있다. 한반도를 보려면 등산로 입구인 안남초등학교 옆길을 따라 점촌고개까지 간다. 이곳에서 900여m 거리의 전망대까지는 길이 평탄해 산책을 하듯 편히 오를 수 있다. 전망대에 있는 정자에 올라 아래를 바라 보면 금강의 물길이 U자를 만들며 휘돌아나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강 건너편으로 물길 안에 갇힌 땅이 영락없는 한반도의 모습이다. 물론 영월 서강의 물길이 만든 한반도의 모습과는 다르다. 둔주봉은 부산은 왼쪽, 목포는 오른쪽에 위치하도록 한반도의 좌우를 바꾸며 기막힌 반전을 보여준다. 둔주봉 정상은 전망대에서 가파른 산길을 500여m쯤 더 올라가야 한다. 비교적 조망이 좋은 정상에서 바라보면 대청호가 만든 물굽이와 산봉우리들이 아름답다. 정상에서 전망대 사이에 독락정으로 가는 하산로가 있다. 둔주봉에서 내려오면 초계 주씨들이 많이 사는 연주리 2구의 독락정이 가깝다. 독락정(충북문화재자료 제23호)은 절충장군중추부사를 지낸 주몽득이 1607년에 세운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 정자다. 독락정 바로 앞이 둔주봉에서 바라본 한반도다. 1991년에 세운 '연주리 마을 자랑비'를 읽어보면 이곳의 자연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안다. 앞에는 금강물이 휘돌아 흘러가고 뒤에는 층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니 산천이 아름다워 정자 없이 지낼 손가. 이곳에 정자 지어 이름은 독락이라 어찌 홀로 앉아 즐거운 낙 누리리까. 태평세민 모두 모여 함께 낙을 누려보세. 대청호에 물이 차니 고기 반 물 반이요 낚싯대 드리우니 현세낙원 이곳이라. 옥천은 중봉이 관직에서 파직당한 후 학문을 가르치고, 구국의지를 불태우고, 뼈를 묻은 곳이라 자취가 곳곳에 새겨져 있다. 중봉의 발자취를 조금이라도 더 알아보고 싶어 군북면 이백리의 이지당으로 향했다. 이지당(충북유형문화재 제42호)은 중봉이 후학을 교육한 서당으로 조선시대 중엽 금(金), 이(李), 조(趙), 안(安)의 4문중이 합작해서 세웠다. 각신동이라는 마을 앞에 있어 처음에는 각신서당으로 불렀는데 중봉의 제자인 우암 송시열이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는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의 끝 글자인 '지(止)'자를 따서 이지당(二止堂)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이지당까지는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한적한 숲길이다. 산모롱이를 돌아서면 수수해서 정이 가는 전통가옥이 나타난다. 뒤는 상수리나무와 느티나무가 많은 야산이 감싸고, 앞에는 시냇물이 흘러가며 졸졸졸 물소리를 내는 이지당이다. 이지당은 본채와 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앞면 7칸ㆍ옆면 1칸의 강당건물이고, 누각은 앞면 1칸ㆍ옆면 1칸으로 높은 단 위에 누마루를 두고 있다. 풍광이 아름다운 누각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개울과 주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지당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정자가 하나로 동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통안내] 경부고속도로 옥천IC - 보은방향 좌회전 - 문정삼거리 좌회전 - 문정사거리 직진 - 37번 국도 - 석호삼거리 보은방향 우회전 - 정방사거리 직진 - 500m - 도이리입구 - 400m - 후율당
해(年)가 바뀌었다. 세상의 흐름이 바뀌었다. 한 10여 년 전만해도 새해인사로 연하장을 보내다가 바로 작년 이맘 때까지만 해도 이메일을 발송하더니 이번엔 문자 메시지가 주종을 이룬다. 어제와 오늘, 새해 인사 덕담 문자 메시지 수 십 통을 받았다. 내가 먼저 보내드렸어야 하는데 선수를 놓쳤다. 그 내용을 보니 다복, 소원 성취, 건강, 행복, 평안, 감사등이 대부분이다. 리포터도 학교장으로서 학부모를 대상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작년 한 해 학교 표창 무려 4개나 받은 것은 바로 학부모님과 우리 서호중 교육가족 덕분이라고. 새해엔 사랑과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라고. 그리고 추가사항 하나! 방학 중 도서실을 개방하니 많이 이용해 달라고. 이젠 내가 받은 문자 메시지를 답신해야 할 차례다. 어떻게 보낼까? 길어도 안 되고, 고리타분한 형식적인 인사는 구태의연할 뿐 아니라 내 체질도 아니고. 마침 올해가 소띠해다. 그렇다. '소'를 이용하자. 그래서 탄생한 것이 "笑의 해가 되소서!" 경제 전망에 의하면 올해는 작년보다 경제가 더 안 좋아지리라고 한다. 생활이 더욱 어려워져 미소 지을 기회가 점점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때 일수록 일부러라도 웃어보는 것은 어떨까? 공익 광고를 보니까 하루 20초만 웃어도 이틀의 수명이 연장되고 하루 45초만 웃어도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웃을수록 행복은 더 커진다고 한다. 어려울수록 서로 웃고 힘내자는 광고에 공감이 간다. 그 뿐일까? 웃음치료사의 말에 의하면 웃으면 행복해진다고 한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억지로라도 웃으면 행복이 찾아온다고 강조한다. 웃음을 잃은 어른들에게는 악담(?)까지 한다. 웃음을 잃을수록 죽을 날이 가까와졋다고. 그렇다. 우리가 유년시절, 학창시절 얼마나 웃음이 많았는가? 낙엽이 바람에 쓸려 가는 모습, 소똥 굴러가는 모습만 보아도 웃었다. 리포터도 학창시절 월남파병 용사 귀국 환영 행사시 도로 맞은 편에 있는 여고생 모습을 바라보고 웃다가 학생주임 선생님께 따귀를 맞은 아픈 기억이 있다. (웃는 것이 크게 잘못된 것은아닌데 그 선생님은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싫었나 보다. 졸업 후 그 분은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교닷컴애독자 여러분에게 웃을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혹시 웃을 일이 좀 줄어들더라고 일부러라도 함께 웃어 보는 것은 어떨까? 웃음속에 행복이 찾아오는 것을 체험했으면 한다. 하루하루 웃으면서'행복한 교단' 을 앞장 서 만들자. '笑'의 해가 되소서!
무창포해수욕장의 해넘이와 신비의 바닷길을 보기위해 보령으로 1박 2일의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하다 보면 꼭 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일정에 쫓겨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그동안 그냥 지나친 곳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36번 국도를 이용해 보령으로 가다 보면 청양군 정산면소재지 앞 벌판 가운데 2층 기단 위에 9층의 탑신을 올린 석탑이 서 있다. 이것이 보물 제18호인 서정리9층석탑인데 부근에 백곡사라는 절이 있던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고 안내판에 쓰여 있다. 대치터널이 뚫려 칠갑산을 넘나들기가 쉬워졌지만 옛 추억이 살아있는 칠갑산도림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옛길에서 콩밭 매는 아낙네상과 면암 최익현 선생 동상도 보고, 스타파크천문대까지 등산로를 걸으며 칠갑산의 자연을 만끽했다. 평야지대를 달리는 장항선에 작아서 더 정이 가는 청소역이 있다. 청소면 진죽리의 청소역은 1961년에 건축한 벽돌조 역사로 지붕이 녹색이다. 근대 간이 역사의 건축 양식이 잘 드러나 있는 이 건물이 장항선의 역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로 문화재청이 지정한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제305호)이다. 달랑 택시 한 대가 역전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대여섯 명만 들어서도 꽉 찰 것 같은 대합실의 크기가 이용객이 작다는 것을 알게 한다. 경적을 울리며 시골 역을 오가는 기차들을 바라보는 것도 추억거리다. 무창포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에 남포방조제에 있는 죽도에 들렸다. 방조제가 완공되며 육지와 연결된 죽도는 지난 5월 4일 갑자기 해일이 밀려와 낚시하던 사람과 관광객들의 인명피해가 컸던 곳이다. 사고 후 관광객들이 발길을 끊어 주민들의 걱정이 컸었는데 예전처럼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해돋이는 앞이 확 트여 붉은 해가 수면에서 떠오르는 동해안에서, 해넘이는 올망졸망 늘어선 섬 사이로 붉은 해가 사라지는 서해안에서 봐야 제맛이 난다. 무창포해수욕장의 해넘이는 서해안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이 났지만 흐린 날씨가 하늘 위에서 해를 감추고 백사장에 모여선 사람들의 마음을 깜깜하게 만든다. 그 덕에 해수욕장에 설치되어 있는 조형물을 꼼꼼하게 관찰했다. 전국이 흐리다는 일기예보가 이튿날 아침의 해돋이를 포기하게 했다. 살다 보면 날씨 때문에 저절로 흥이 나거나 괜히 우울한 날도 있다. 구름이 잔뜩 낀 날씨 탓인지 무창포해수욕장 앞 바다에 신비의 바닷길이 열렸지만 사람 수가 적다.
교원정책 전반 다뤄 교섭위원들 긴장 지난해 11월 12일, 정부중앙청사 16층 대회의실. 한국교총과 교육과학기술부의 2008년 상·하반기 교섭·협의를 위한 제1차 본교섭·협의위원회 개회를 앞두고 양측 교섭위원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돌았다. 오전 11시 양측의 교섭대표인 안병만 교과부장관과 이원희 교총회장이 입장하고, 교섭위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분위기는 누그러졌지만 회의 내내 보이지 않는 신경전은 계속됐다. 안병만 장관은 “지난 1992년 시작된 교과부와 교총의 교섭·협의는 그동안 교원들의 권익향상과 교육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며 “이번에도 대화와 타협을 통해 우리 교육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서로 협력하자”고 말했다. 이원희 회장도 “새 정부 들어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는 것에 감사드린다”고 화답하며 본격적인 협의를 시작했다. 이날 교총-교과부 간 본교섭·협의는 양측 교섭대표의 인사말, 교총의 교섭·협의 요구 사항에 대한 제안 설명, 교총의 제안 설명에 대한 교과부의 입장 표명, 양측 교섭위원의 자유발언, 교섭대표의 마무리 발언으로 진행됐다. 1차 본교섭·협의회를 마친 양측은 원만한 교섭·협의를 위해 각각 5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를 구성, 교섭·협의를 진행시키기로 합의했다. 소위가 몇 차례 만남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면 전체 교섭위원이 모여 합의서에 조인하는 것으로 당해 연도의 교섭·협의가 마무리된다. 일선 교원들은 물론 교총 회원들조차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교총과 교과부의 교섭·협의는 ‘교원지위향상을위한특별법’ 제11조 및 ‘교원지위향상을위한교섭·협의에관한규정’ 제4조에 의거해 실시되는 것이다. 교섭·협의의 범위는 ▲ 봉급 및 수당체계의 개선에 관한 사항 ▲ 근무시간·휴게·휴무 및 휴가 등에 관한 사항 ▲ 여교원의 보호에 관한 사항 ▲ 안전·보건에 관한 사항 ▲ 교권 신장에 관한 사항 ▲ 복지·후생에 관한 사항 ▲ 연구활동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사항 ▲ 전문성 신장과 연수에 관한 사항 등 교원정책 전반이 망라돼 있다. 교섭위원들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 2008년 제1차 본교섭·협의위원회에서 교총의 교섭위원들이 교과부 측에 요구한 발언을 살펴보면 교총-교과부 간 교섭·협의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관리직회원을 대표해 교총 교섭위원으로 참여한 김윤선 전남 구례동중 교장은 “학교전기료는 교총의 강력한 요구로 2005년부터 16.2%가 인하됐으나 수도료는 그대로 있다”며 “학교의 수도료도 전기료처럼 교육용으로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학회원 대표인 안양옥 서울교대 교수는 “저소득층 가정의 학생부터라도 대입전형료를 경감해주고, 초등교원의 전문성 신장을 위해 교육대학에 박사과정이 설치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유·초등회원 대표인 전상훈 서울 인헌초 교사는 수석교사제 법제화와 실질적인 잡무경감 방안을, 중등회원 대표인 조병선 인천 서곳중 교사는 성과상여금 개선과 주5일제 수업의 완전한 정착이 필요하다고 각각 밝혔다. 양시진 교총 부회장(경기 구봉초 교장)은 “일반직 공무원은 퇴직 전 6개월의 공로연수를 갖지만 교원들은 그나마 있는 3개월의 퇴직준비 휴가도 쓰기 어려운 형편”이라며 “교원들에게도 일반직과 동일하게 6개월의 공로연수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교원 대표로 나선 이순희 대구과학고 교사는 정년퇴직자 특별승진 문제를 거론했다. 이 교사는 “40대 후반 정도의 교사가 명예퇴직을 하면 교감으로 특별 승진하는데, 62세에 정년퇴직하는 교사는 그냥 교사로 퇴직한다”며 “정년퇴직자도 특별승진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기 초부터 회원들 상대로 안건 공모 교총은 해당 연도의 교섭·협의를 진행하기 위해 신학기 시작부터 준비 작업에 들어간다. 지난해 37개조 75개항의 교섭·협의 요구안 또한 일선 회원들을 상대로 공모와 여론조사 절차 등을 통해 선정한 것이다. 교섭·협의 요구안은 제1장 ‘전문직 교원단체 활동보장’, 제2장 ‘교원의 근무여건 개선 및 전문성 함양’, 제3장 ‘학생인권보호 및 교권신장’, 제4장 ‘교원처우 및 복지 개선’, ‘보칙’ 등으로 구성됐으며 우리 교육발전과 교원의 권익향상에 도움이 되는 모든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제1장 ‘전문직 교원단체 활동보장’은 교원이 전문직 교원단체에 전임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관계법령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것과 교과부가 전문직 교원단체와 최소한 분기별로 정례 협의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교총의 전문성 신장 및 학부모, 학생연수 등 교육력 강화를 위한 현장교육지원센터의 설립을 행·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현장교육연구대회, 전국교육자료전, 초등교육연구대회 등 전국규모 대회 입상자들에게 해외여행의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연구 분위기를 조성할 것도 촉구하고 있다. 제2장 ‘교원의 근무여건 개선 및 전문성 함양’에는 행정안전부가 갖고 있는 교원정원 관리권의 교과부 이관, 수석교사제 법제화, 현장교육연구대회 입상비율 개선, 교원 연구년제 조기 도입이 들어 있다. 근무성적평정 기간을 10년에서 5년으로 단축하고, 우수성적 2~3회치를 반영하는 한편 교사다면평가의 시범실시를 2009년까지 연장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교육공무원승진규정 개정도 요구하고 있다. 교원정년 연장, 교원의 공로연수 시행 등 일선의 강력한 요구가 있는 사항도 빠지지 않는다. 제3장 ‘학생인권보호 및 교권신장’도 매년 교섭·협의의 주요과제다. 교권이 부당하게 침해되는 것을 방지하고, 교원이 교육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학생의 학습권 및 교원의 교육권을 보호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가칭 ‘교권보호법’ 제정이 핵심이다. 교원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교육에 헌신해 사회적 귀감이 되는 순국·순직교원에 대해 헌정할 수 있도록 가칭 ‘교원명예전당’ 설립도 요구하고 있다. 교육 유해환경 차단, 저소득층 대학입학전형료 경감·지원 등 학생들의 피부에 와 닿는 정책도 담고 있다. 교직수당가산금 인상, 교원자녀 대학학비 수당 신설·지급, 영양교사 업무수당 월 3만 원 신설·지급, 교(원)감 직책급 업무추진비 신설·지급, 유치원을 병설한 초등학교 및 병설 중·고등학교에 근무하는 보건교사에게 월 3만 원 범위 내에서 겸임수당 신설·지급, 도서벽지수당 인상, 사서교사 수당 신설, 대학교원 연구보조비(성과급) 예산 증액 등 제4장 ‘교원처우 및 복지 개선’은 교총의 끊임없는 요구사항이다. ‘역사왜곡 대응팀’ 상설 설치·운영 등 교육현안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적 제언도 포함됐다. 물론 교총의 이러한 요구사항을 교과부가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소위원회의 실무협의 과정에서 강제력을 배재한 채 “~노력한다, ~추진한다”는 등의 선언적 형태만으로 합의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총-교과부 간 교섭·협의가 우리 교육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은 그간의 실적을 통해 알 수 있다. “교총의 여러 활동 중 가장 의미 있어” 교섭·협의 원년부터 줄기차게 요구한 교직수당은 1992년 11만 원에서 2001년 25만 원까지 인상됐다. 초등교원 보전수당 가산금은 97년 교사 2만 원·주임 2만 5000원·교감 3만 원 교장 4만 원이 인상됐고, 2002년 유치원 및 초등교원 모두 평균 1만 원 인상됐다. 2003년에는 1만 7000원 인상이 인상돼 교사 4만 7000원, 보직교사 5만 2000원, 교감 5만 7000원, 교장 6만 7000원이 됐다. 1994년 담임수당이 신설, 지급되면서 계속 인상됐다. 6만 원 → 8만 원 → 11만 원에 이르고 있으며, 보직교사(부장교사) 수당도 3만 원 → 5만 원 → 7만 원에 이르렀다. 이 밖에 봉급 조정수당을 인상하고, 폐지된 체력단련비를 가계안정비로 부활한 것도 교총-교과부 간 교섭·협의 합의로 이뤄진 것이다. 임용 전 군경력 100% 교육경력으로 인정(2001년), 육아 휴직기간을 첫 1년에 한하여 100% 교육경력으로 인정(2001년), 교육대학 대학원 설치(1995년), 산업체 근무 경력 70%로 상향 조정(2002년), 명절휴가비 100% → 150%(2003년), 정액급식비 8만 원 → 9만 원(2003년) → 12만 원(2004년), 교장·교감 직급보조비 교장 인상(2003년)도 교섭·협의 결과물이다. 김동석 교총 대변인은 “교총과 교과부 간 교섭·협의는 교원에 대한 예우 및 처우를 개선하고 신분보장을 강화함으로써 교원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한편 교육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며 “교총이 벌이는 여러 활동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중앙단위에서 이뤄지는 교총-교과부의 교섭·협의뿐 아니라 시·도교총과 시·도교육청 간의 교섭·협의도 지방화·분권화 시대를 맞아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경기교총과 경기도교육청은 지난해 경기도 내 교사가 자율연수를 받을 때 교육청이 경비의 70% 이상을 지원키로 했다. 또 승진가산점 중 선택가산점을 대폭 축소하고, 초등전입교사가 전입 희망교에 임용될 수 있도록 했다. 교직원 자녀를 위한 보육시설 설치, 학급당 학생 수 감축, 학교 신축 시 교사 휴게실·탈의실·연구실 설치 등도 합의했다. 경기교총-도교육청 단체 교섭·협의 결과물이다. 지난 2006년 강원교총과 강원도교육청은 특수지 및 농·산·어촌 지역의 교원사택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노후된 사택의 보수 및 부족사택 확충을 연차적으로 추진하고, 특수지 중심지역에 임대사택을 운영하는 방안을 마련키로 했다. 같은 해 대전교총과 대전시교육청은 학교마다 다르게 편성돼 있는 대전 시내 학교의 교사 연구활동비를 일원화하는 내용에 합의하기도 했다. 이처럼 시·도교총과 시·도교육청의 교섭·협의는 해당 지역 교원들의 교육활동 애로사항을 해결하는 창구로 자리 잡았다. 교총은 시·도교총이 보다 효율적으로 교섭·협의를 할 수 있도록 지난해 7월 사무국 직제개편을 통해 담당 부서를 신설하기도 했다. 시·도교총의 교섭·협의를 지원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교총 교육정책연구소 정책지원팀 관계자는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한 교섭·협의가 되도록 시·도에서 필요한 교섭·협의 과제를 발굴하고, 교섭위원들의 전문성을 신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에 대한 연수를 권역별로 실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올해로 교섭·협의 역사가 18년에 이른다. 교총-교과부, 시·도교총-시·도교육청 간 교섭·협의에서 다뤄진 수많은 과제는 우리 교육현실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합의를 통해 실현된 것들과 미뤄진 과제 모두가 소중한 이유다.
훌쩍 떠나기, 그리고 쥘 베른의 ‘경이의 여행’ 지구본을 손가락으로 돌려본다. 비스듬히 누워 있는 지구가 돌아가면서 둥글게 세상이 펼쳐진다. 익숙한 지명들 사이로 조금만 비켜가도 낯선 곳.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어느 누군들 그러지 않으랴. 아침 출근길에서 또는 답답한 교실에서 문득 먼 하늘 바라보면 어느새 마음은 어디론가 떠나고…. 어느 계절인가 훌쩍 떠난 길. 한적한 강원도의 산간 도로를 미끄러지듯 차로 달릴 때, 온몸에 파고드는 듯한 떨림에 놀란 적이 있었지. 문득 대학 시절 걸었던 긴긴 옛길들, 떠오르고, 하늘 가득 쏟아질 듯 은하수, 젖어 있고, 그 아래 터벅이던 발자국들, 가슴 쿵쾅거리고, 철썩거리던 파도 소리, 발끝을 간질이고, 백두대간의 산맥들에서 뿜어 나오는 나무들의 숨소리. 작은 새의 호흡처럼 이어지던 길. 끝 모르게 펼쳐지던 생각들. 누구나 일상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누군가는 벗어나 마침내 돌아오고 또 누군가는 벗어나지 못한 채 사라진다. 쥘 베른(Jules Verne·1825~1905).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작품이 번역된 작가. 그는 인류의 가슴에 영원한 여행의 꿈을 심어 준 작가다.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라지지 않도록,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끊임없이 꿈꾸게 한 영혼이 바로 쥘 베른이다. 그는 우리들의 시선을 달나라로 가게 했으며(달나라 탐험: Autour de la Lune), 바다 속으로 향하게 하고(해저 2만리: Vingt mille lieues sous les mers), 하늘 높이 날게 하다가(기구를 타고 5주간: Cinq semaines en ballon), 지구 속으로 파고들게 하고(지구 속 여행: Voyage au centre de la Terre), 다시 80일간 세계를 넘나들게 한다.(80일간의 세계일주: Le Tour du monde en quatre-vingts jours) “그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면 반드시 인용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열한 살 때인 1839년, 동갑내기인 사촌누이 칼로린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쥘은 산호목걸이를 구해서 선물하려고 인도로 가는 원양선에 몰래 탔다가 루아르 강어귀에서 아버지에게 붙잡혀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그때 소년은 ‘앞으로는 꿈속에서만 여행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80일간의 세계일주, 347쪽) 현실의 여행을 금지당한 쥘 베른은 법조계 집안의 전통에 따라 공부한 끝에 법학사 학위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작가의 길을 걷는다. 뛰어난 편집자이자 작가인 피에르 쥘 에첼(Pierre-Jules Hetzel, 1814~86)을 만난 그는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우뚝 서게 된다. 1863년 그는 기구를 타고 5주간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 ‘경이의 여행(Voyages extraordinaires)’ 시리즈를 완성해 간다. “‘알려져 있는 세계와 알려지지 않은 세계’라는 부제로도 알 수 있듯이 ‘경이의 여행’은 인간이 아직 발을 들여놓지 않은 미개지, 망망대해에 떠 있는 무인도로의 여행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지구의 중심으로 들어가거나, 극지방으로 가거나, 공중으로 떠오르거나, 바다 밑바닥으로 내려가거나, 지구의 대기권을 뚫고 우주로 날아가는 등 웅장한 규모를 갖는 모험 여행이다. ‘경이의 여행’에는 지리학·천문학·동물학·식물학·고생물학 등 많은 정보와 지식이 들어 있기 때문에 ‘백과사전 여행’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인간 형성의 통과의례가 아니라 유럽인의 근저에 숨어 있는 신화나 종교에 도달하기 위한 ‘통과의례 여행’이기도 하다. …(중략)… ‘경이의 여행’은 요즘 말하는 SF(공상과학소설)의 선구이기도 했다. 실제로 잠수함, 포탄에 의한 우주여행, 비행기계, 입체 영상 장치, 움직이는 해상 도시 등 현실보다 앞선 작품 속에서 ‘발명’되거나 실용화된 기계와 장치도 많다. 그런 것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에도 베른의 작품은 언제나 학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적인 정보를 많이 담고 있어서, 계몽적 과학소설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80일간의 세계일주, 영원한 오마주의 원천 쥘 베른의 수많은 작품들은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만든다. 우리들은 그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상 속으로 빠져들어 마침내 경이롭게 세계를 만나며 거듭 태어난다. 그의 작품을 읽지 않고 유년의 세계, 청소년 시절을 보낸 이가 얼마나 될까. 전 세계 수많은 푸른 영혼들에게 쥘 베른은 삶을 펼쳐가는 영원한 여행의 돛이다. 우리는 쥘 베른의 언어를 통해 미지의 의문부호 같은 삶을 풍요롭게 풀어간다. 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개혁클럽의 일원인 필리어스 포그는 어느 날 교통수단의 발달로 80일 만에 세계 여행을 마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성공 여부를 두고 거액의 내기를 한다. 80일이라는 ‘시간’과 세계라는 ‘공간’, 이러한 장벽(Barrier)을 ‘인간’이 통과(일주)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간결한 설정, 여기에 다채로운 세계의 풍물을 담고, 도처에서 빚어지는 극적인 사건들, 개성적인 성격이 빛나는 인물들, 마지막의 반전 구조 등을 담은 80일간의 세계일주는 흥미진진한 요소들을 모두 담고 있다. 어렵지 않으면서 신기하고, 재미있으면서도 로맨스가 깔리고, 긴박하면서도 마침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에 세대와 국경을 초월해서 열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수많은 작품을 새롭게 낳은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 잡는다. 무엇보다도 전 세계의 수많은 여행기들 가운데 상당수는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1936년에 발표된 장 콕토의 다시 떠난 80일간의 세계일주(장 콕토 지음, 예담)만 해도 좋은 예다. 17세에 시단에 데뷔한 장 콕토는 소설가이면서 안무가, 극작가, 평론가, 영화감독, 삽화가, 디자이너, 무대장치가 등으로 다양하게 활동, 레종 도뇌르 훈장과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과 같은 광휘를 자랑한 프랑스의 천재 예술가다. 그는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으며 여행에 대한 욕망과 탐험에 대한 의지를 키울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장 콕토는 이 작품을 각색한 유년 시절의 연극까지 기억하면서 쥘 베른(1828~1905)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자 소설 속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가며 80일간 느긋하게 돌아다녀보자고 마음먹는다. 친구인 마르셀 킬이 아이디어를 낸 이 여행은 파리-수아르(Paris-Soir) 편집장 장 프루보스트가 받아들여서 마침내 이루어진다. 하지만 장 콕토 일행의 생각은 처음부터 빗나간다. “신문사는 그 유명한 ‘80일’이 단순한 이야기나 망상이기보다는 쥘 베른이 착상한 축음기, 비행기, 잠수함, 잠수부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걸작이 주는 설득력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믿도록 만든 것이다. 그런데 1936년에 비행기도 타지 않고 필리어스 포그의 도박을 답습하여 연결편을 숨차게 갈아타며 그 이상적인 진로를 실제로 좇아가니 정말로 더도 덜도 아닌 80일이 걸릴 것 같았다.”(장 콕토, 16쪽) 결국 이들의 여행은 “소설 속 주인공들의 자취를 찾아가는 한가로운 산책이 아니라 하나의 기록, 섬세한 퍼포먼스”로 바뀐다. 이들의 여행은 제1장 이탈리아에서 이집트로의 여행, 제2장 인도에서 싱가포르까지, 제3장 신비의 동양을 거쳐, 제4장 미국에서의 마지막 여정으로 크게 4부로 나뉜다. ‘너무 버거운 도시 로마’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이들의 여정만 보아도 이 작품은 아편과 허무에 취한 천재 예술가의 시적 표현이 근사한, 또 다른 80일간의 세계일주다. 이들은 1873년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와 프랑스인 하인 파스파르투가 80일 만에 끝낸 소설 속 상상 여행을 자신의 ‘버전(version)’으로 바꾸고 실제 여행까지 덧붙여 낸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다양한 오마주 작고한 고우영 화백(1938~2005). 그는 한국 만화계가 낳은 불세출의 천재였다. 탄탄한 그림 실력에 특유의 익살과 해학은 물론 판소리의 추임새와 랩의 기법 등 다양하게 구사한 서술기법 등은 현대 문학 이론의 도움을 받아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빼어났다. 그는 무한 자유를 보여주는 천의무봉의 솜씨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절제가 무엇인지 아는 드문 작가였다. 그에 대한 상찬이 적지는 않지만 그는 아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작가다. 그가 그린 만화를 읽으면서 어린이들은 꿈을 꾸었고, 청소년들은 세상을 훔쳐보았고, 청·장년들은 일상을 웃음으로 넘길 수 있었다. 1942년 16쪽짜리 딱지만화 ‘쥐돌이’를 시작으로 1960년대에는 어린이 만화 ‘짱구박사’를, 그리고 1970년대 청년 만화 ‘임꺽정’으로 이어지는 그의 창작과정 자체가 한국 현대만화사의 정리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고우영 화백이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만화로 극화한 것은 1970년대 후반, 어문각 클로버문고의 만화 시리즈에서였다. 당시에 나온 두 권의 흑백 만화였던 원본에 다시 컬러를 입히고 사진 자료도 바꿔서 새로 내놓은 작품이 80일간의 세계일주(고우영 글/그림, 자음과모음, 2005). “작가의 말은, 이 책을 새로 엮는 도중 고우영 화백께서 영면하시는 바람에 여백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음을 밝혀둡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편집부의 정중한 조사가 붙은 작품집이다. 그가 원작을 만화로 옮겼을 때 모든 인물은 마치 새로운 판본이라도 되듯이 생생하게 활력을 얻었다. 그가 그려낸 임꺽정과 홍길동은 물론 삼국지와 수호지, 초한지, 열국지 등의 수많은 인물은 고우영이란 붓 끝에서 새롭게 부활되며, 나중에는 텍스트 속의 이미지마저 좌우할 정도로 강력한 인상을 주었다.(싫든 좋든 나는 고우영 만화에서 본 유비 모습을 삼국지의 유비로 가끔 떠올린다.) 하지만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는 놀랍게도 고우영 화백 특유의 다양한 서술 기법은 그리 나오지 않는다. 쥘 베른의 작품이 워낙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데다가 작품 전개에 결정적인 촉매 역할을 하는 인물 파스파르투의 활약 때문이다. 파스파르투는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하인 역으로 나오는 인물. 주인에 대한 강한 충성심과 함께 여정의 곤경을 만들기도 하고 풀어나가기도 하는 약방의 감초, 사건 전개의 완급을 조정하는 인물이다. 파스파르투가 빠진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도저히 생각하기 힘들 정도다. 고우영 화백은 파스파르트를 자신의 이미지와 똑같이 그려낸다. 자신의 서술기법을 충분히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파스파르투이기 때문이다. 이는 80일간의 세계일주 1, 2(고우영 글/그림, 자음과모음)가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대한 오마주 이상의 오마주임을 보여준다. 한편, 파스파르투는 세계적인 아시아 배우 성룡에 의해 좀 더 창조적으로 바뀐다. 예전에 나온 영화(1956년작, 마이클 앤더슨 감독)와 다른 80일간의 세계일주(Around The World In 80 Days, 2004)(감독 프랭크 코라치)에서 성룡이 맡은 파스파르투는 런던 은행에서 불상을 훔쳐 고향인 중국으로 가는 인물이다. 성룡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자 괴짜 발명가인 필리어스 포그(스티브 쿠건)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며 마침내 80일간의 세계일주가 이루어진다. 영화 미학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생생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이 영화는 성룡이라는 인물의 캐릭터가 민첩하고 실수연발에 따뜻하고 정의로운 파스파르투와 정확히 일치하며 또 다른 재미와 감동을 준다.(물론 나이가 들었기에 예전만 하지 못한 성룡. 과학 기술의 발달로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지만 가는 세월까지야 막을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준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장 콕토에 의해서 실제 여행과 또 다른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다시 고우영 화백과 성룡에 의해서 만화와 영화로 멀티미디어 시대에 다양하게 리메이크 되었다. 여기에 그동안 나온 애니메이션과 PC 게임 등 수많은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모두 쥘 베른에 대한 한없는 무한 오마주 그 자체인 셈이다. 앞으로 또 얼마나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오마주될 것인가.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우리 인류에게 끝없는 해방의 영감을 흥미진진하게 제공한다. 새로운 80일간의 세계일주 시도하기 나 역시 쥘 베른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꿈꾸어오던 아이디어, 실제 여행을 하기 힘드니 독서 여행 글쓰기를 하면 어떨까. 독서는 저자와 나누는 대화, 곧 나 아닌 세계와 만나는 행위인 여행이다. 그렇다면 배낭여행을 떠나듯 가고 싶은 여행지를 자유롭게 정하고 일정을 잡으며, 내가 읽고 싶은 책, 그리고 읽어야 하는 책들을 읽어가는 여행, 그 과정과 흔적을 글로 써보자는 것.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세계 여행을 떠나려면 대개 인천 국제공항에 가야 한다. 그렇다면 일단 출발지인 인천과 관련한 작품이나, 작가·등장인물·작품배경 등과 관련하여 직접 눈으로 확인한 사실을 쓰거나 기타 관련 자료들을 읽으며 정리한 내용을 얹는다. ‘인천의 맛집 여행’ 식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인천에 가면 이 음식(작품)을 꼭 맛봐라. 주인장(작가)은 어떻고, 식재료(작품의 공간과 인물, 관련 배경 등)는 어떻고, 실제 맛본 평가(기타 책을 읽은 뒤의 메모나 독후감 등)를 쓰는 식이다. 인천을 여행하는 데 필요한 실제 정보들(교통편, 숙박편 등)도 함께 집어넣고. 인천에서 떠난 세계 여행의 첫 기착지는 어디일까. 서쪽으로 떠나 중국의 상하이로 갈 수도 있고, 일본 교토로 가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탐미적인 소설 금각사의 무대를 밟아볼 수도 있다. 내가 어디로 떠날 것인지, 즉 어느 곳을 거쳐 어느 작품과 작가를 만날 것인지는 전적으로 내 자유고 내 취향이다. 요컨대 세계 각국을 책으로 여행하는 내용의 글쓰기를 꿈꿔본다. 이때 ‘책으로’는 여행을 가는 데 필요한 작품과 저자를 제시하는 내용이며, 독서라는 여행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즉, ‘책으로 떠나는 세계 여행’은 ‘자신이 다닌 곳의 작품과 저자, 배경 등에 대해 쓰는’ 실제 여행일 수도 있고, ‘자신이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가보고 싶은 마음에서 책을 통해 시도하는’ 가상 여행일 수도 있다. 그래. 그래. 그냥 뜻 가는 대로 써보자. 책과 만나는 과정이 실제/환상/책들로 이어지는, 도대체 어디까지가 책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이며, 실제인지 모르게 쓰는 글을 써보리라. 실제 여행이기도 하고, 대리 여행이기도 하고, 추체험 여행이기도 하고,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여러 겹에서 파헤쳐보는 탐사기이자 에세이, 소설 같기도 한 글. 나 역시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대한 존경의 오마주를 글쓰기로 펼쳐야 쥘 베른에 대한 부채 의식을 즐겁게 풀어낼 수 있을 듯싶다. 2009년에 본격적으로 시도하리라 마음먹는다.
학교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래, 그러니까 여덟 살 이래 나는 줄곧 학교에 다니고 있다. 초로에 이른 여태까지 학교에 다니고 있다. 신작로 옆 측백나무 울타리 초등학교로부터 소읍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그리고 도회의 대학교를 거쳐 다시 그 도회의 중학교에 이렇게 다니고 있는 것이다. 어릴 적, 야트막한 단층 교사(校舍)는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 학교 운동장은 세상에서 가장 넓은(?) 마당이었고, 그 운동장 가장자리에 줄지어 선 플라타너스는 세상에서 가장 장대한(?) 나무였다. 어디 이뿐인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도 학교를 통해서 만났다. 한 분 한 분 어떤 인간형의 전형으로서 큰 바위 얼굴처럼 우뚝 서 계시던 여러 선생님을 만났고, 또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여러 벗을 만났다. 학교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였고, 그 세계를 딛고 또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하는 거대한 창(窓)이었다. 그랬다. 학교는 온전히 하나의 세계였다. 세상 그 여느 풍경과 마찬가지로 사람살이의 애환이 간단없이 굽이쳐 흐르는 현장이었다. 저마다 자신의 삶을 위해 흘리는 땀과 눈물이, 탄식과 환호가 끊이지 않는 바로 그 삶의 현장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 벗들에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학교는 여전히 늘 새로운 세계였다. 반짝이는 영혼을 지닌 어린 벗들이 그야말로 시시각각 생동하는 생명의 숲이었다. 이 생명의 숲에서 나는 수없이 많은 풍경을 만났다. 번다한 일상 속에서 대부분은 묻히고 흘러갔으나 어떤 풍경들은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옹이 같은 그 몇몇의 풍경들은 잊기는커녕 오히려 날이 갈수록 나의 내면에 또렷한 실루엣을 드리웠다. 그런데 그러한 풍경들 속에는 늘 어떤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람, 결국은 사람이었다. 세월 저편의 풍경이든, 엊그제 대면한 풍경이든 그 풍경들의 주인공은 늘 ‘사람’이었다. 지금 내 곁에 있을 리 없는 그 ‘사람’은 언제나 그날 그때의 풍경을 생생하게 되살려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사람’이 되살려준 풍경을 무딘 솜씨로나마 옮겨 적곤 했다. 별리 윤효1) 국민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갑자기 읍내 학교로 전근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울고불고 하였습니다. 전근 가시는 날, 선생님께서 떠난 신작로 길을 아이들이 줄지어 따라나섰습니다. 뽀얀 자갈 먼지 헤치며 뛰었습니다. 교감 선생님도, 교장 선생님도 말리지 못하였습니다. 김영태 선생님 부적국민학교 6학년 1반 우리 담임선생님은 풍금을 잘 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늘 음악책을 갖고 다니게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국어나 산수 수업을 하다가도 옆 반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면 얼른 음악책을 꺼내놓고 그 옆 반의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6학년 때 그렇게 배운 노래들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가장 잘 부릅니다. ‘별리’와 ‘김영태 선생님’은 나의 초등학교 시절 두 담임선생님을 노래한 삽화이다.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참 멋진 선생님이셨다. 운동장 조회 때면 구령대에 올라 하얀 지휘봉을 드셨다. 목소리 또한 미성이셔서 그 영롱한 음성으로 또박또박 수업을 이끄실 때면 우리 반 아이들은 무엇인지 모를 감화를 받곤 하였다. 그런 선생님께서 갑자기 학교를 떠나시게 되었으니 우리들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어린 나이에 경험한 이별의 슬픔이었다. 그리고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늘 음악책을 갖고 다니게 하셨다. 옆 반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면 음악책을 펼치라 한 뒤 그 노래를 따라 부르라 하셨다. 우리 교실에서는 좀처럼 풍금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우리들은 그런 담임선생님을 믿고 따랐다. 함석헌 1 새 담임선생님 오신다고 아이들 정거장으로 내달릴 때, 일제히 환호하며 정거장으로 정거장으로 내달릴 때, 가만히 걸음을 멈추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내달린 길 되돌아 교실로 향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교실로 돌아온 아이는 말끔히 청소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 쓰시는 책상이며 교탁이며 그리고 아이들 책걸상이며 유리창까지 정성스레 쓸고 닦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우리나라 서북 끄트머리 용암포 바닷가 소학교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교실에서 새 담임선생님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새 담임선생님은 그 환하게 설레는 눈빛 중에서 가장 맑은 눈빛 하나를 보았습니다. 함석헌 2 1930년 무렵, 아직 서른도 되기 전의 선생이 오산학교에서 역사와 수신을 가르칠 때의 일입니다. 나라도 제대로 건사 못하던 그 딱한 시절에 웬 사회주의 바람이 밀어닥쳐서, 학생들도 온통 무슨 동맹인가를 만들어 늦가을 가랑잎같이 몰려다니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는 그 학생들이 교무실로 우르르 몰려와서는 ‘민족주의 선생들은 물러가라! 물러가라!’ 외치며 끝내는 손찌검을 퍼붓기도 하였습니다. 늘 흰 고무신에 한복을 차려입고 우리말로 우리 역사와 수신을 가르치던 선생도 그만 치도곤을 당하였습니다. 자리에 앉은 채 두 눈 꼭 감고 고스란히 당하기만 하였습니다. 며칠 후, 어떤 학생이 찾아와 그때 왜 두 눈을 꼭 감고만 계셨느냐고 여쭈었습니다. “나는 수양이 덜 된 사람이라서 나를 때리는 학생의 얼굴을 알게 되면, 그 후부터 그 학생을 전과 같은 마음으로 대할 수가 없을 것 같았네. ” 그 학생은 선생의 그 깊고 넓은 오지랖에 파묻혀 그만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선생이 오산학교에서 늘 흰 고무신에 한복을 차려입고 역사와 수신을 가르칠 때의 일입니다. ‘함석헌 1’과 ‘함석헌 2’는 내가 어른이 되어서 다니고 있는 오산학교의 졸업생 씨 함석헌(1901~1989) 선생에 대해 읽었거나 들었던 풍경이다. 평생토록 “깨어 있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쳤던 들사람 함석헌 선생은 어려서는 물론 성년이 된 이후에도 이처럼 곡진한 순정의 사람이었다. 새로 부임하시는 담임선생님을 위해 책상과 교탁과 교실 구석구석을 정갈하게 쓸고 닦았던 그 마음이 훗날 선생을 한 학교의 교사를 넘어 겨레의 스승으로 설 수 있게 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배우는 게 일이든 가르치는 게 일이든 학교에 다니는 이들은 과연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할지 헤아릴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선생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김학표 선생님 휴지를 줍고 계단을 쓸었다 복도에 붙은 껌을 떼고 거미줄을 뗐다 수도꼭지를 고치고 소변기를 닦았다 막힌 대변기를 뚫었다 꽃을 심고 풀을 뽑았다 해진 출석부를 꿰매고 재떨이를 씻었다 교감 할 일이 그렇게 없냐고 수군거렸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낙엽 지면 낙엽 쓸고 눈 내리면 눈을 쓸었다 ‘김학표 선생님’은 나의 청년교사 시절 만났던 어느 선배 선생님의 초상이다. 이 선생님께선 학교 상장에 흔히 씌어 있는 표현대로 근면 성실한, 그리하여 타의 모범이 되는 생활인이셨다. 평소 낚시를 즐기셨는데, 어느 해인가는 국어책을 내려놓고 교감선생님이 되셨다. 그 무렵 내 눈에 비친 선생님의 하루하루는 가히 ‘헌신’이라 일컬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셨다. 몸소 학교의 궂은일을 애써 찾아 도맡으셨다. 우러르게 되었다. 꽃이 피긴 피는데 아이들에게 도라지꽃을 보여주고 싶어서 파주 어디쯤 가서 그 뿌리 넉넉히 얻어다가 교정 가득 심어놨더니 꽃이 드디어 피긴 피는데 하얀 꽃 보라 꽃이 피긴 피는데 그때가 하필 방학 때지 뭐예요. 얼마나 섭섭하던지 얼마나 속상하던지 그 도라지꽃 생각하면 지금도 잠도 안 와요. 아름다운 학교 1 판매원 없이 운영하는 협동조합에서 학생들 모두 돌아가고 난 뒤 결산을 해보니 공책 한 권 값이 비었다. 이튿날, 학생들 모두 돌아가고 난 뒤 결산을 해보니 공책 한 권 값이 남았다. ‘꽃이 피긴 피는데’는 내가 즐겨 찾는 야생화모임에서 만난 서울 어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일화이다. 교장선생님께선 시멘트 문명의 그늘에서 자라나고 있는 어린 벗들에게 이런 꽃들의 세계가 우리 곁에 있음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수더분하면서도 청초한 자연의 은총을 어린 벗들 곁에 가득 펼쳐놓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안타까움을 토로하면서 지으시던 그 교장선생님의 표정을 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었다. 도라지꽃의 화기(花期)를 왜 미리 고려하지 않았느냐고 그 교장선생님을 나무랄 일은 이미 아니었다. 생동 개학하고 한 사흘 지나자 계단 끝에 덧댄 철판 위에 여름내 곰팡이처럼 번진 붉은 녹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하더니, 한 열흘 지나자 말갛게 씻기었다. 아이들이 발끝으로 피워낸 빛이 채송화처럼 환하다. 학교 안에 머물고 있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세계와 우리 사회는 매우 빠르게 변화를 거듭해왔다. 학교 또한 그 변화의 물결 속에서 새로운 모색을 꾀해왔다. 그러나 경제적 효율과 조급한 성과만을 숭상하던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학교를 향해 다투어 종주먹을 대기 시작하였다. 붕괴되었다느니, 망했다느니, 죽었다느니 하는 그 민망한 삿대질이 십자포화처럼 학교를 향해 쏟아졌던 것이다. 안타까웠다. 학교 안에 머무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학교는 아직도 따뜻한 인간애가 흐르는, 저마다의 어린 꿈들이 알차게 영글어가는 아름다운 삶터임을 알리고 싶었다. 어쩌면 항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학교 1’과 ‘생동’은 이런 무렵에 씌어졌다. 어린 벗들과 동행하며 누군가에게 들었거나 내가 직접 보았던 장면들을 조촐하게 옮겨 적은 것이지만, 어린 벗들이 이룩해내고 있는 삶의 가치가 이미 충분히 높다랗다는 것을 나는 이 두 시편을 통해 헤아리고 싶었다. 학교에는 누가 사는가? 어떤 이들이 무슨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일이다. 오직 한 번뿐인 자신의 삶을 싱그럽게 가꾸기 위해 애쓰는 맑은 영혼들이 산다고. 그 어린 영혼들을 따뜻한 눈길로 감싸 안아주는 넓은 가슴들이 산다고. 그리하여 교학상장(敎學相長), 서로 동행하면서 날마다 새로운 날들을 열어가고 있다고. 다만 먹빛 세사(世事)에 얽매여 날로 무디어져 가고 있는 나의 이 가슴이 문제다. 이 가슴의 냉기를 다시 따뜻하게 지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일 아침 만나는 어린 벗들에게 물어보아야겠다. 고백 훤칠하니 의젓하고 늠름하여 바라볼수록 성스러운 삼나무과 침엽교목이 콘크리트 교사에 치여서 가지를 제 뜻대로 드리우지 못하고 있다 나 또한 커 가는 아이들 오금만 저리게 하는 것 같아 스스로 부끄러워지다 스승의 날에 저 맑은 눈망울들과 한철을 살았건만 내 눈은 점점 흐려져 가고, 저 착한 눈빛 속에서 꼬박 또 한철을 살았건만 그 눈빛 속 좁다란 길을 나는 걸을 수 없네. 오늘은 다만 물푸레 잎사귀가 깔아놓은 햇살방석에 앉아 내 젖은 몸을 말리네. 교원들이 참여하는 독자와 함께하는 새교육은 수필, 동화 등의 문학작품, 교단일기, 교육정책 제언, 색다른 수업 등 주제의 구분 없이 모두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선생님께서는 새교육 이메일 sae@kfta.or.kr로 원고를 보내주십시오. 관심 있는 선생님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히틀러는 독일군의 진격을 재촉했고 영국군과 프랑스군 34만여 명은 덩케르크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달랐다. 히틀러는 1940년 5월 24일 돌연 독일군의 파죽지세 진격을 중지시켰고 그로 인해 시간을 번 영·불군은 아슬아슬하게 덩케르크에서 철수할 수 있었다. 히틀러가 진격을 중지시키지 않았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전황은 어떻게 달랐을까? 제2차 세계대전 초반전은 ‘당나귀전쟁’이라 비판받지만 영국과 프랑스도 개전 초에 독일군의 북유럽으로의 진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등 실책을 범했다. 독일은 폴란드를 전격적으로 점령한 데 이어 덴마크 전역과 노르웨이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했다(1940. 4~6). 영국과 프랑스는 군대를 투입해 노르웨이를 지원했으나 독일 공군에 압도당해 철수했다. 독일은 1940년 5월에 네덜란드를 5일 만에, 벨기에를 2주 만에 장악했다. 그리고 난공불락의 마지노선을 뚫은 후 파리를 장악한(6월 15일) 독일은 6월 22일에 프랑스의 3/5를 장악했다. 소련 또한 라트비아 3국에 이어 핀란드를 침공하는 등 이른바 ‘대조국전쟁’에 나섰다. 최고의 전략가임을 자랑한 히틀러는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해 자신의 몰락을 재촉했지만 전쟁 초기 덩케르크작전에서도 큰 실책을 범했다. 개전 초기의 벨기에 전선. 연합군의 북부군과 남부군 사이의 모든 연락은 아르덴에서 솜강을 향해 활(弓) 대형으로 서진하던 독일군에 의해 차단되었다. 브뤼셀 동쪽의 다일 방어선에서 셸트 강으로 퇴각한 북부의 연합군은 포위되었고, 영국군 사령관 거트 공(公)은 이미 1940년 5월 19일에 바다를 통한 영국군(BEF)의 철수를 고려했다. 그러나 그는 공세적 작전을 펴라는 런던으로부터의 명령에 따라 5월 21일에 아라스로부터 남쪽으로 독일군의 오른쪽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의 반격은 독일군 사령부를 잠시 놀라게 했을 뿐 작전의 성공에 필요한 무력(武力)이 크게 부족했다. 그 사이 하인츠 구데리안 휘하의 독일 탱크들이 볼로뉴와 칼레를 휩쓸고 올라온 다음 덩케르크 부근 방어선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5월 24일. 불가사의한 히틀러의 명령이 그들의 진격을 멈추게 했다. 그래서 구데리안의 탱크들은 덩케르크로 돌진할 수 있는 위치로부터 해협방어선으로 물러났다. 당시 덩케르크는 영국군의 주력부대가 유럽대륙으로부터 철수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였고, 영국 내각은 결국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철수를 결정했다. 영국군의 해안으로의 철수는 독일군이 덩케르크를 점령하기 전에 이루어져야 했다. 절체절명의 다급한 상황에서 영국 해군성은 철수작전에 도움이 될 경우 아무리 작은 배일지라도 징발했다. 철수는 5월 26일에 시작되었지만 27일에 이르러서는 분초를 다투는 일이 되었다. 발터 폰 라이헤나우 휘하 독일 6군단의 진격으로 좌익과 중앙이 무너진 벨기에가 휴전을 호소한 데다 독일공군(Luftwaffe)이 27일에 폭탄을 퍼부어 덩케르크의 부두가 기능을 거의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0마일에 걸치는 해변에 모여 있던 수만 명의 영국군은 해군으로 징발됐지만 대개 아마추어 뱃사람이 운행하는 소형 선박들에 올라타 철수해야만 했다. 다행인 것은 다수의 영국군이 파괴된 부두의 방파제를 이용할 수는 있었다는 점이다. 작전은 6월 4일에 종료됐고, 영국군 19만 8000명과 프랑스군과 벨기에군 14만 명이 구출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중무기와 장비의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으며 41척의 구축함 중 6척은 침몰하고 19척은 심한 손상을 입었다. 구출된 병사들은 영국군 정예병의 상당 부분을 점했고 따라서 연합국 측으로서는 매우 값진 작전이었다. 1940년 독일군의 진격으로 덩케르크 해안지대에 포위된 영국, 프랑스군들.사실 영국에서 출격한 영국 공군기의 폭격도 덩케르크 철수작전의 기적적 성공에 기여했다. 하지만 화급한 상황에서 별다른 희생 없이 작전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구데리안의 탱크들을 멈추게 한 히틀러의 24일의 명령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 그 명령을 내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즉, 독일 공군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히틀러가 공군만으로도 덩케르크에 집결한 연합군을 격파할 수 있다고 잘못 확신했고, 히틀러 자신도 영국군이 굴욕적으로 항복하지 않을 경우라야 평화조약을 더 용이하게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 육군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비슈가 히틀러를 설득해 독일군을 덩케르크로 재진격시켰을 때는 이미 연합군이 철수한 3일 이후의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군은 전열을 재정비한 영국군의 보다 강력해진 저항에 부딪혀야 했다. 히틀러는 독일군의 진격을 다시 중지시키고 남쪽으로 진군케 하는 한편 솜-아이슨(Somme-Aisne)선 공격을 준비했다. 프랑스 북부에서의 전투는 구데리안과 라이헤나우가 남쪽으로 향한 후 퀼러 휘하의 전사들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독일군은 3주 동안 6만 명의 희생자를 낸 대가로 100만 명 이상의 포로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22만의 연합군이 북서 프랑스의 항구들(셰르부르, 생말로, 브레스트, 생나제르)에서 구출되었다. 그리하여 덩케르크에서 철수한 병사들과 합쳐 모두 55만 8000에 이르는 연합군이 사지에서 철수할 수 있었다. 대전의 추이를 따라가 보기로 하자. 마지노선이 뚫리고 뒤이어 파리가 점령되고(6월 15일) 국토의 3/5이 점령되자 프랑스는 어쩔 수 없이 휴전을 제의해 성사되었다(6월 22일). 그리고 페탱 원수를 수반으로 하는 꼭두각시 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런던으로 탈출하여 자유프랑스를 이끈 드골장군은 다음 날 BBC 방송을 통해 “우리의 패배는 최종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 프랑스는 고립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도 구축국의 일원으로 참전한(6월 10일) 가운데 유고슬라비아에서 그리스에 이르는 동남부 유럽을 석권하고 북아프리카까지 장악한 히틀러는 1940년 8월부터 공군기를 동원하여 영국 도시들을 무차별 폭격했다. 영국은 수상 처칠의 지도하에 타협을 거부했고, 히틀러는 결국 영국 상륙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영국의 저항으로 서부전선에서 결정적 승리를 얻지 못한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에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한 다음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결국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기 시작했다. 소련을 과소평가한 히틀러는 소련을 제압해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 투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를 타도하고 나아가 독일의 생활권을 동유럽에서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했던 것이다. 9월에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 육박하고 10월에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의 진격을 자랑하던 독일군은 그러나 소련의 후퇴작전과 동장군(冬將軍)에 무릎을 꿇고 결국은 수비태세를 취해야 했다. 한편 미국은 1941년 3월에 영국에의 전쟁물자 공급을 승인함으로써 중립을 포기했다. 이어 동년 8월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처칠과 더불어 대서양상의 영국전함에서 ‘대서양헌장’을 발표하고 전후에 추구할 민주주의의 원칙들을 선언했다. 이후 일본이 진주만공격(1941년 12월 8일) 직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자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 하여 미국도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그 사이 전선은 더욱 확대되어 일부 중립국(포르투갈·스위스 등)을 제외한 전 유럽이 전쟁에 휩쓸려 들어갔다. 하지만 1942년 가을에 볼가 강에 도달한 독일군은 사력을 다했으나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 패해 후퇴해야 했고, 그것은 전쟁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1943년부터 주도권을 장악한 연합군은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8월 15일에는 연합군이 프랑스의 지중해 연안에 상륙했다. 그 이전에 아프리카전선에서 롬멜의 독일군에 반격을 개시해 튀니지를 탈환한 연합군은 1943년 7월에는 시칠리아에 상륙하고 9월에는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다. 무솔리니 정권은 무너지고 이탈리아는 연합군과 제휴했다.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에 연합군의 진격이 일시 멈칫했으나 1944년 6월에 결국 로마를 탈환했다. 동부전선에서도 스탈린그라드전 이후 독일군을 추격하던 소련군은 1944년 말에 독일국경에 도달했다. 생포된 독일군은 잔혹한 보복을 당했고 요새들은 파괴되었다. 동시에 서부에서도 연합군이 독일 국경을 넘었다. 문자 그대로 사면초가에 처한 히틀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독일은 1945년 5월 7일에 항복했다. 그리고 일본의 진주만공격으로 촉발된 태평양전쟁도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되고 9일에는 소련이 일·소 불가침조약(독일의 소련 침공 2개월 전인 1941년 4월 13일에 일본과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을 깨고 만주로 진격하던 중 일본의 무조건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제2차 세계대전은 여러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과는 비교되지 않는 전쟁이었다. 폭격기나 전투기는 물론 개량된 화포와 자동화기 등이 엄청난 살상력을 자랑했다. 특히 원자탄의 가공할 파괴력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원자탄의 파괴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폭격기 편대들은 인구밀집 도시들을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었다. 1945년 11월의 교황청 통계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는 2200만이 넘고 부상자는 3440만이었다. 다른 통계에 따르면 교전국의 사망자와 실종자는 1500만이 넘었다. 미국도 1940년 경우 미국인 450명 중의 1명에 해당하는 30만 명이 전사했다. 물론 중국·한국·필리핀 등 아시아인도 다수 희생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3배를 넘는 희생자들 가운데는 민간인도 다수 포함되었다. 전쟁물자의 수요 또한 엄청나게 증대해 국가가 온통 군수공장으로 변하고 전 국민이 군수품의 생산에 매달려야 할 형편이었다. 더불어 이전의 사회질서는 완전히 무너졌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강제로 추방되거나 적군의 공격목표가 되었다. 특히 독일·폴란드·소련 거주 유대인을 비롯해 다수의 유대인은 집단수용소의 가스실 등에서 살해되었다. 독일군이나 일본군에 점령된 여타 지역의 사람들도 살육당하거나 비인간적 학대를 받았다. 피정복민이나 포로 군인들은 독일과 일본의 전시경제를 위해 착취당했으며, 어떤 저항도 폭력으로 진압되고 털끝만한 혐의도 죽음으로 다스려졌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때와는 달리 전쟁도발자들은 전후 개별적인 책임도 져야 했다. 뉘른베르크전범재판과 맥아더사령부에 의한 일본의 전범재판에 의한 처벌이 그것이다. 히틀러가 오판하지 않았고, 따라서 연합군을 덩케르크로 몰아붙이면서 쇄도하던 독일군의 작전을 5월 24일에 중단시키지 않았다면 대전의 초반 전황은 어떤 양상으로 진행되었을까? 영·불 연합군은 덩케르크에서 치명적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이 전의를 상실해 히틀러와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북부의 연합군이 독일 탱크부대의 노도와 같은 공세에 포위되거나 후퇴해야 할 정도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점, 그리고 덩케르크에서 철수한 연합군이 34만에 달했고 그들이 정예군이었음을 염두에 둘 경우 히틀러의 불가사의한 명령이 없었을 경우 연합군이 개전 초반에 입었을 손실과 그 손실이 대전 전반에 끼쳤을 영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엔 버스를 타고 긴 여로(旅路)에 오르는 것이 설렘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좁은 공간에 갇혀야 하는 그 시간이 지루함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낯선 사람을 옆자리에 앉힌 채 긴 시간을 함께 자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다란 무게감을 지닌 채 다가오는 법이다. 그런 만큼 나이가 웬만큼 든 승객들은 차에 오르며 혼자 앉게 되기를 갈망한다. 김명자 씨도 그런 바람을 가지고 고속버스에 올랐다. 가는 곳은 같되 그곳을 향하는 목적은 서로 다른 승객들이 이미 열댓 명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승차권에 기재된 번호를 확인한 뒤 자리에 앉았다. 바랐던 대로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의자를 뒤로 젖히며 등을 깊숙이 묻었다. 온몸이 물에 잠긴 솜뭉치처럼 무겁고 나른했다. 눈을 감자 심신이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 풀어졌다. 종아리에서 찬바람이 일도록 일분일초를 아끼며 하루 종일 뛰어다닌 노력의 결과가 건더기가 전혀 건져지지 않는 장국처럼 멀겋게 쑤어져 피로감은 더했다. 경기가 좋지 않다 보니 모두는 보호 시설에마저 조금의 정도 나누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운전석 위의 전자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출발 시각이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그녀는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그렇게 자리가 계속 비어 있기를 다시 한 번 간절히 기원했다. 그러나 기대는 버스가 출발을 위해 꽁무니를 빼는 순간 깨어졌다. 급하게 승강구를 오른 중년의 남자 하나가 좌석 번호를 훑으며 통로를 거슬러 오더니 그녀의 옆에 털썩 엉덩이를 내렸던 것이다. 수신호를 해주는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후진을 한 버스는 차들이 뒤엉킨 차로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긴 장정에 올랐다. 다양한 간판과 다양한 걸음걸이의 행인들을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뒤로 뒤로 밀어내던 버스가 제 속력을 찾은 것은 고속도로로 올라선 뒤였다. 그즈음 먼 산골짜기로부터 먹어 들어오기 시작한 땅거미가 차의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차내에도 어둠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운전기사는 단추 크기만 한 머리 위의 실내등을 점등했다. 김명자 씨는 실내등을 비틀어 끈 뒤 의자를 뒤로 눕혔다. 잠이 머리꼭지에서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리기 시작한 잠이 등을 타고 무릎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PAGE BREAK] “삐리리 삐익 삐리리리리리…….” 옆자리에 앉은 중년 남자의 품속에서 휴대폰의 신호음이 울렸다. 조용한 공간을 산산이 부수면서 쏟아져 나온 그 소리는 막 잠이 들려고 하던 승객들의 신경 모두를 뾰족하게 날을 세우도록 만들었다. 차 내의 분위기가 너무도 조용했던 까닭에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김명자 씨에게도 선명하게 들렸다. “저예요.” 중년 여자의 목소리였다. “응. 왜?” 남자는 목소리를 한껏 맞추어 말했다. “지금 어디예요?” “버스 안. 그리 가는 중이야.” “그래, 볼일은 잘 봤어요?” “아니. 요즘 다 그렇잖아. 대리점 사장이 며칠만 봐달라고 싹싹 빌어. 별수 있어? 그러자 했지. 그러나저러나 잘 찾아가는 길이야?” “못 찾겠으니까 전활 했죠. 내가 뭐래요? 요즘 대리점엘 가 봐야 뻔하니까 수금은 다음으로 미루고 이 일을 당신이 직접 처리하라니까……내게 미루더니 이 모양이잖아요? 송 기사 바꿀 테니까 지리 좀 자세히 설명하세요.” 부인을 통해 중요한 물건을 어딘가로 옮기는 모양이었다. 운전기사가 목적지를 잘 찾지 못하는 모양으로 남자의 입을 통해 자세한 그림 지도가 건네지고 있었다. 중소기업이나 유통업을 운영하는 사람쯤으로 여겨졌다. 장기적인 불경기 때문에 전 세계가 불황으로 신음 중이어서 버스 안에서까지 사업에 일일이 간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버스 안이고 지금 모두는 어둠 속에서 영혼을 안주시킬 차비를 마친 상태여서 남자의 전화가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뒤척거리는 낌새가 역력했다. 통화가 끝났다. 다시 고요가 찾아 들었다. 김명자 씨도 서둘러 멀리 달아나려는 잠의 꼬리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한데, 그 시간 이후, 남자의 전화는 김명자 씨가 진작부터 신흥 공해로 치부했던 버스 안에서의 휴대폰 통화 소음을 확실하게 인식시키겠다는 듯 시도 때도 없이 이어졌다.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의 통화가 끝났을 때 뒤쪽 좌석의 어디쯤에선가 젊은 목소리가 참다못해 볼멘소리를 냈다. “사업도 좋지만 남도 좀 생각합시다. 차내에서는 휴대폰을 잠금 상태로 해두는 것이 예의 아닐까요?” 김명자 씨는 중년 남자를 나무라는 젊은 목소리가 반갑기는 했지만 이쪽의 반응이 냉랭하게 나가면 둘 사이에 설전이 벌어져 더욱 시끄러워질 텐데 하고 조금은 염려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남자는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그쪽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한 뒤 공손하게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좀 급히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서 아내에게 일을 부탁했는데 길을 찾지 못해 자꾸 묻고 있습니다. 목적지의 근처에 다 갔으니까 곧 찾게 될 겁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정중한 사죄였기에 더는 얘기가 없었다. 전화기는 잠시 후에 또 울었다. “두 갈래 길이에요. 어느 쪽이라고 했죠?” 이제는 중년 남자도 주변이 의식되는지 짜증 섞인 목소리를 보냈다. “당신도 참. 왜 그렇게 길눈이 어두워? 그러게 내가 뭐랬어? 함께 가자고 할 때마다 그렇게도 싫다 싫다 하더니.” 자연히 전화기 저쪽에서도 짜증이 넘어왔다. “당신이 언제 함께 가자고 했어요? 내가 따라붙는다니까 남의 눈에 뜨일 염려가 있어서 안 된다고 할 땐 언제고?” 부인의 얘기가 맞는 모양으로 남자는 조금 움츠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이제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요.” 하지만 여자는 난감한 말투로 하소연하듯 말했다. “여보. 오늘 꼭 가야 해요? 다음에 가면 안 되겠어요?” 부인은 목적지를 찾는 것이 영 자신 없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단호했다. “안 돼. 기다리는 사람들 생각을 해야지.” “당신은 언제쯤 도착해요?” “한 시간쯤 후에 도착하게 될 거야. 당신이 그곳에 닿는 시각과 거의 같을 테니까 정문 근처에서 기다려. 택시를 타고 바로 쫓아갈게.” [PAGE BREAK] 그 후에도 전화는 승객들의 신경질을 팽팽하게 부풀릴 정도로 계속 이어졌다. 이제 승객들은 아예 잠을 포기했다. 여기저기에서 실내등이 점등되었고 신문을 펼쳐 드는 소리가 부스럭부스럭 났다. 김명자 씨도 잠을 포기하고 의자를 바로 세웠다. 남자의 전화 내용이 귀를 파고들어서 더욱 괴로웠다. 그런데 가만히 그쪽으로 귓바퀴를 열고 있자니 남자가 그리는 그림지도가 점점 더 익숙한 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왔다. ‘혹시?’ 김명자 씨는 이제 남자와 부인 사이의 통화 내용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남자가 설명하는 지리가 점점 더 김명자 씨의 확신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부인이 기사를 대동한 채 움직이는 목적도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다 다음의 대화에서 김명자 씨는 결정적인 확신을 가졌다. “짐은 빠짐없이 챙겼지?” “그럼요. 당신이 포장해둔 것 모두를 빠짐없이 챙겼어요.” “인형도?” “그럼요. 그걸 빠뜨리면 어떻게 해요?” “녀석들이 좋아하겠지?” “당신도 참.” “올해는 너무 늦어져서 안 오는 줄 알고 실망들 했을 거야. 다른 때는 이삼일 전에 들렀는데.” “어쨌거나 새해가 오기 전에 들르게 되었으니 됐어요.” “아, 참. 냉장고에 넣어 둔 사골(四骨)은?” “걱정 말아요. 그걸 빠뜨렸다가 당신한테 쫓겨나게요?” 틀림없었다. 김명자 씨는 남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인데 그지없이 인자한 얼굴이었다. 시계를 보았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삼십 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김명자 씨는 이쯤에서 작전을 개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승객들의 호기심 주머니를 부풀려 시선을 모아야겠기에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저, 여보세요!” 남자의 얼굴이 이쪽으로 돌았다. 기대대로 승객들의 시선도 일제히 둘 쪽으로 모였다. “통화 내용을 엿들으니 나쁜 일을 하시는 분 같군요. 미안하지만 기사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차를 경찰서 앞으로 몰아야겠어요.” 남자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착한 품성을 내보이며 당황해하는 모습 때문에 김명자 씨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럼 뭐예요? 전화기 저쪽 사람이 지금 장물을 운반하는 것 아닌가요?” 당황한 남자는 손까지 휘휘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실은… 남모르게 누군가를 조금 돕고 있습니다. 제가 출장을 다녀오느라 시간이 없어서 아내에게 그 근처까지 선물을 옮겨놓으라고 부탁했는데 아내가 지리를 잘 몰라서 이 소동을 겪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나쁜 일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PAGE BREAK] 이제 증거는 확실해졌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김명자 씨는 벌떡 몸을 일으켜 통로로 나섰다. “여러분! 지금 제가 미제(未濟) 사건 하나를 해결했습니다. 미제 사건 아시지요? 범인을 못 잡아 오리무중으로 남겨진 사건. …… 여기 서 있는 저는 여러분이 가시는 도시의 변두리에 자리한 희망고아원이라는 보호 시설의 원장입니다. 매년 새해가 되기 직전이면 저희 고아원에 온갖 선물을 한 트럭분 살짝 부려놓고 떠나가는 그림자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그 그림자를 찾았습니다. 이 차에 탄 여러분 모두를 2시간 동안이나 끈질기게 괴롭힌 이 분이 바로 그 그림자임이 분명합니다. …… 본의는 아닙니다만 옆자리여서 오고가는 통화 내용을 엿듣다 보니 이 분이 설명하는 지리가 저희 고아원 주변이 틀림없고 전화기 저쪽의 트럭에 실린 내용물이 범인임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남자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김명자 씨는 예의 바른 자세로 그림자에게 사실 확인을 부탁했다. “어떠세요? 제 말이 사실 아닌가요?” 그는 이마에 주름을 만들면서 오른손으로 턱을 한번 쓱 쓸었다. 곤란한 일과 마주치면 무의식중에 행하는 버릇인가 보았다. 결국 그는 방법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천천히 위아래로 주억거렸다. 숨긴 선행이 선명하게 실체를 드러내자 남자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모두는 약속이나 한 듯이 박수를 짝짝짝 쳤다. 모두는 귀중한 잠을 도둑맞긴 했지만 밝은 새해가 될 서기(瑞氣)를 느끼며 푸근한 얼굴이 되었다. 그들의 얼굴을 2시간 동안 뒤덮고 있던 짜증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새해가 오기 꼭 3시간쯤 전의 일이었다. --------------------------------------------------------------------------- 최창중 청주교대·한국교원대 대학원 졸업을 졸업했다. 현재 충북도교육청 장학사이며 펜클럽한국본부·한국문인협회·한국소설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양문학·자유문학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대산 문화재단 소설부문 창작지원자로 선정됐다. 소설집으로 건배가 있는 삽화, 대설주의보 등이 있다.
미완의 건국, 숨차게 달린 한국교육 35년 서럽고 쓰라린 일본의 식민 지배를 자력으로 벗어나지 못한 대가는, 정작 건국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해야 될 주인이 주도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남과 북에 외국 군대가 진주하고, 종국에는 일 민족 두 개의 국가가 들어섰다. 이 민족에게 드리워진 국토 분단의 멍에는 대한민국 건국 60년이 된 오늘에도 우리에게 좌절과 각오를 교차시키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건국은 그 자체가 놀라운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건국은 힘들었고, 건국 후에도 위기의 터널을 달려왔다. 건국초기부터 내외의 온갖 방해와 저항이 있었으나 건국 후에는 국제전으로 비화한 6·25 동족상잔으로 취약했던 경제기반 마저 잿더미가 된 피폐한 나라가 되었었다. 전후에도 안보위협을 계속 받았고, 선거부정, 학생유혈봉기, 군부독재, 시민유혈봉기와 같은 내부 진통이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이러한 대내외의 위기를 극복해왔고, 서구 사회가 200여 년에 걸쳐 이룩한 산업화를 불과 40여 년 만에 이루는 경제적 기적을 낳았다. 민주화도 달성했다.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하게 OECD 회원국, G20 그룹에 속하는 경제대국이 되었다. 이제 대한민국의 국가 발전 경험은 많은 나라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서 나가는 나라이고, 미래가 있는 나라이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가능성 있는 나라로 움직이고 있는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상호 상승적으로 호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유민주주의를 국가체제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우리 국민의 자녀 교육에 대한 무한 투자이다. 우리 교육은 이 두 요인의 상승작용으로 이제 더 이상 팽창할 수 없는 양적 성장의 한계점에 도달했다. 한 마디로 숨 가쁘게 달려온 길이다. 이렇게 한계점에 도달하기까지 양적 성장을 거듭해 오면서, 우리 교육은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역할을 해 왔다고 확신한다. 세상을 읽는 기본 능력을 키웠다. 민족정신과 자유민주주의 원리와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합리적 사고와 성취동기가 높은 시민들을 길러냈다. 전통사회로부터 잔존했던 저항적, 냉소적, 운명론적 태도들을 긍정적, 합리적 세계관으로 바꾸었다. 이런 교육으로 충원된 시민들에 의해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움직이고 있다. 첫째, 우리 교육은 민족자주독립정신과 민족 정체성을 기르는 민족교육에 공헌했다. 해방되자마자 ‘한글 첫걸음’, ‘국사’ 교과서를 우선적으로 발행 보급하여 자주독립 국가 교육으로서 민족 정체성, 민족의 긍지를 확립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우리의 교육은 민족혼을 길러내는 보루였다. 둘째, 민주주의 교육에 공헌했다. 건국 초기에 교육선각자들이 시도했던 민주주의 교육은 지금도 한국교육을 지배하는 중요한 논리이다. 건국 60년 역사적 굴곡에서 있었던 반부패, 반독재 항쟁들과,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화의 수준은 학교가 민주주의 가치와 정신을 일관되게 가르쳐온 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셋째, 우수한 기초교육으로 시민의 문해력을 고양했다. 팀스(TIMMS), 피사(PISA) 등 각종 국제학력평가결과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한국의 기초교육은 세계 정상을 달리고 있다. 넷째, 경제발전에 필요한 과학 기술 교육에 공헌했다. 외국의 교육내용과 비등한 수학, 과학의 이론과 방법론을 학교는 가르쳤다. 다섯째, 교육재정 열세에도 불구하고 내용 압축 정선식 교과서 발행, 다인수 학급 운영 등을 통한 저비용 전략으로 교육기회를 확대했다. 적어도 학교 교육 기회에 관한한 우리 교육은 저비용 고효율의 나라이다. 여섯째, 지속적 교육개선, 또는 개혁 정책으로 교육발전을 위한 노력을 펼쳐왔다. 1980년대 이후로는 국가 주도로 교육개혁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도해 왔고, 나름대로 교육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공헌했다. 반성적 성찰 이러한 긍정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육은 여전히 극복해야 할 고질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역대 정부의 감축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축되지 않는 사교육 시장, 우수 두뇌들의 외국 대학으로의 유학 행렬, 국내 학교에 만족하지 못한 학생들의 조기해외 유학 현실이 보여주듯이 학교가 수요자들에게 만족을 주고 있지 못하고 있는 문제이다. (1) 고비용 저효율의 부실한 교육 = 가계의 사교육비 규모는 20조원이 넘고, 외국 유학으로 유출되는 국부(國富) 또한 10조원에 달하고 있다. 참고로 2008년도 국가 총 교육 재정 규모는 40조원이다. 이 모든 것을 합치면 70조원이 된다. 대한민국은 교육에 고비용을 지출하고 있는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 경쟁력은 하위권에 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국내 대학가운데 세계 100대 대학 가운데 포함된 대학은 1개뿐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2008년도 ‘세계 경쟁력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고등교육 경쟁률은 55개국 중 53위를 차지했다. 반면, 고등교육(대학) 이수율은 55개국 중 4위를 차지해 최상위권이었다. 2007년도 29위였던 국가 교육경쟁력은 35위로 6단계나 떨어졌다. 이 경쟁력 지표는 우리 국민의 고비용 부담을 무릅쓴 높은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저급한 것이라는 것과, 특히 최종 단계인 고등교육은 세계에서 바닥권에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고비용을 쏟아 붓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육경쟁력이 낮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까지의 분석과 처방이 적합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반드시 교육을 그 본령에 충실하도록 살리겠다는 결연한 결단과 일관된 의지가 없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의 근원을 새롭게 규명하고 거기서 도출되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2) 학교교육의 이중구조 = 우리 교육이 질적 수준이 낮고, 경쟁력이 없게 된 원인은 복잡한데에 있지 않다. 너무나 관행적으로 오랫동안 후진적 교육형태인 간판주의 교육에 영합하여 교육 제공자들(학교, 대학, 정책당국 등)이 편의위주로 제도 교육을 운영해 오는 동안에 교육의 본질을 무시하게 됐다는 것, 그리고 교육의 본질이 무시되고 있으므로 해서 야기되는 교육의 문제가 너무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고질적인 문제가 됐다는 것, 그래서 어떤 처방으로도 단기간 해결 가능하지 않으므로 해서 또 다시 당면 정책의제에서 제외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는 데에 문제의 근원이 있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교육의 본질이란 교육과정에 설정된 교육목표에 충실한 형태로 학습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말한다. 우리 교육에는 교육과정은 있으되, 교육과정을 무시하는 학력관리제도가 위세를 떨치고 있다. 즉, 학교 교육 이중 구조가 존재한다. 하나는 정규 교육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수능과 학교생활기록부로 대표되는 학력관리제도이다. 이 이중구조의 틀에서 후자가 학생들의 대입진학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한 후자는 전자를 누르게 되어 있다. 교육과정은 있으되 그것은 죽은 교육과정이 되는 것이고, 학생, 학부모, 교사, 학교를 지배하는 것은 학력관리제도이다. 즉, 수능과 학교생활기록부 방식이 교육과정을 대신하는 것이다. 우리 교육의 경쟁력은 모든 학교가 정상적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는 날이 올 때에라야 만 가능하다. 질 높은 교육, 경쟁력 있는 교육은 공동체적 동의에 의해서 설정된 교육과정에 충실하도록 학교의 모든 학습활동이 교육과정 중심으로 정렬되어 있는 교육, 교육목표가 세계 수준에 있는 교육, 목표 달성을 위해 지켜야 할 기준이 서 있고 이를 엄정히 지켜나가는 교육, 즉 교육본질을 살리는 교육이라야 가능하다. 한국 교육의 과제 한국 교육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지금처럼 경쟁력 없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의 시험준비 교육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교육본령을 살리는 방향으로 바꿀 것인가? 양자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1) 기본으로 돌아가자 = 잘못 채워진 단추는 처음부터 다시 채워야 한다. 그것은 교육본질을 왜곡시키는 학력관리제도를 혁파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과제이다. 학력관리는 교육과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학교가 오로지 시험준비기관으로 예속되는 한, 학원과 경쟁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교육의 진정한 목표가 죽게 되는 것이다.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진정한 교육목표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크게 두 가지 작업이 요구된다. 첫째는 교육목표로서 각 교육주체들(학교, 교사, 학생, 행정당국 등)이 이행하고 수행해야 할 교육표준을 엄정하게 설정하는 것이다. 초·중등 학교급별 목표, 교과별 목표를 선언적인 문서가 아니고, 달성해야 할 과제로서 제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유명무실하게 관행적으로 문서화 해 온 교육과정을 살아 움직이는 교육의 표준이 되도록 목표중심으로 재조직해야 한다. 학교 생활기록부가 대입선발에서 가장 중요한 전형 자료가 되도록 해, 학생들은 고득점 시험 점수를 위해서 학원을 찾지 않아도 되도록, 학교의 위상을 확립하고 교사의 권위를 세워주어야 한다. 둘째, 수능과 등급제 학교생활기록제도를 교육과정 중심으로 개혁해야 한다. 수능에는 두 가지 대안이 있다. 교육과정 중심 학력시험으로 전환하든가, 아니면 원점수의 효력이 수년간 유지되는 순수한 학업적성검사(SAT)로 개선하는 것이다. 학력시험으로 전환하는 경우, 지금과 같은 학교외적 시험으로 실시하기보다 학교 자체평가가 공정하게 되도록 지원하는 방식으로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등급제 학교생활기록부는 학생들이 친구들과의 비교 등급이 아니라 교과별 성취목표에 비추어 달성한 성적이 무엇인지를 엄정하게 표기하는 방식으로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대학입시 자율화가 이명박 정부에서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지만, 고등학교 교육에 심대한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대학본고사, 논술고사와 같은 고등학교 외적 시험을 반대한다. 대학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자체 시험을 실시하려고 하기보다, 대학이 원하는 지원자가 갖추어 주기를 바라는 실력이 무엇인지를 공지하여, 학생들이 고교 과정에서 준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상황주도력을 기르자 = 미래 세계를 선도해 갈 수 있는 한국인들을 기르려면 상황주도력을 기르는 교육을 해야 한다. 즉, 어떤 미래 상황에서도 원하는 대안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가진 사람들을 길러내는 교육이다. 예측 가능한 상황은 물론, 불확실한 인재, 자연 재해 등 어떠한 돌발 상황에서도 주도력을 갖추어 주는 교육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중요하게 의식해야 한다. 상황주도력을 갖추는 교육의 핵심 요소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는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인들이 협력해 지혜를 총동원하여 늘 새롭게 설정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의 결과가 교육과정에 목표로 설정되어야 하고, 이것이 교실 수업으로까지 규율할 수 있어야 한다. 차기 교육과정은 우리의 성장 세대들이 세계 선도역량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세계 수준의 목표를 설정하고 반영해야 한다. (3) 한국형 국민역량 자격체계 개발하자 = 교육의 실제는 설정된 교육목표를 구체적으로 실현해 가는 과정이다. 교육목표는 전 국민에게 우리 사회가 가치 있게 지향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시민 누구나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핵심 역량이 무엇이고, 각자의 적성이나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진로선택의 영역에 무엇이 있고, 선택한 영역에서의 자격 체계는 무엇이며, 그것을 갖추기 위해서 학습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를 설정해 놓은 것이다. 그것이 선명하면 할수록 국민의 학습을 안내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국민 역량 자격체계는 서구에서는 오래전부터 정착되어 왔다. 영국은 국민의 자격 체계를 크게 학력(學力)과 직업능력으로 대별하여, 각 영역별로 자격 단계를 8단계로 위계화하고, 동일 단계의 자격 간 호환이 가능하도록 한 국민자격체계(National Qualification Framework)를 구축했다. 이 자격체계에는 국민공통 역량으로 핵심기능 여섯 영역을 설정하였는데, 의사소통력, 수리력, 정보력, 문제해결력, 학습력, 협동력의 6개이다. 각 핵심 영역의 기능은 1-6단계 수준으로 위계화하고, 수준별로 학습내용과 성취기준을 명시하고 있다. 경쟁력 있는 교육은 총체적으로 국민의 자질 향상에 직결된 목표설정을 선명하게 설정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작업이 아니다. 이미 있는 학교 교육과정, 각 직업분야별로 설정되어 있는 자격기준들을 하나의 국민적 자격체제 틀로 연계시키고 체계화 시키면 되는 것이다. 국가 인적자원개발 과제의 첫 번째 과제는 국민역량 자격체계를 구축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4) 교육과정 리더십을 세우자 = 우리 교육이고비용 저효율의 저급한 경쟁력에 머무르고 있는 근본문제는 교육과정 리더십 부재에서 생긴 문제이다. 교육과정이 교육의 중심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주변적인 것으로 경시한데에서 우리나라 교육의 만병이 생겼다. 어떤 대입제도이던 고등학교가 교육과정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고, 그것에 춤추게 하면, 고교 교육을 입시준비기관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대입제도의 중심에 교육과정이 있어야 한다. 학교 교육을 교육과정 중심으로 정렬시켜 학교가 본령에 충실하게 하고, 학교에서 생성되는 자료가 가장 중요한 학생들의 정보가 되게 하는 학교 교육 정상화를 도모하는 길 이외에는 교육 경쟁력을 확립하는 일이나 사교육 부담을 줄이는 대안은 없다고 확신한다. 한국 교육의 위기는 교육과정 리더십의 위기이고, 교육 세력들이 이를 무시한 대가에 불과하다. (5) 아픈 역사 치유하는 교육을 생각하자 = 건국 60년은 남북 대치 60년이고, 아픈 역사 60년이다. 민족 고통의 역사, 분열의 역사, 대결의 역사를 화합과 상생으로 가는 역사, 그래서 역사를 치유하는 교육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픈 역사를 치유하는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가 먼저 제안하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 어떤 돌발사태가 남북관계에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치유로 가는 대안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는 말 : 교육이냐?, 정권이냐? 국가의 진운이 현명하고 책임 있는 시민에 의해서 좌우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대한민국이 건국된 덕분에, 그리고 자녀 교육에 아낌없는 투자를 해온 한국 국민의 높은 교육열에 의해서 우리 교육은 그 한계점에 도달할 정도로 양적인 성장을 이룩했고, 오늘의 대한민국 위상을 확립하는데 공헌했다. 그러나 그것은 외래 지식과 기술을 베끼고 암기하는 교육으로 가능했던 산업사회 시대의 이야기이다. 세계화, 정보화가 전면적으로 우리의 생활을 압도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교육구조는 고비용 저효율의 저급한 경쟁력 수준에 머물러 있는, 매우 낙후한 교육으로 판명되고 있다. 이런 교육으로 미래 상황을 주도하는 구성원들을 길러낼 수 없다. 우리 교육은 과감한 방향전환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무슨 굉장한 처방이라고 볼 수도 없는 아주 단순한 것이다. ‘기본으로 돌아가라’이다. 교육 이용자의 입장이 아닌 교육자의 입장에서 교육해법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육현실은 기본에서 너무나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그 기본으로 돌아가는 일이 어려워졌고, 그래서 쉽게 손댈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권이냐? 아니면 교육이냐?’를 놓고 한 판의 운명적인 도박을 벌려야 하는 일과 같은 위험을 감행하는 일이다. 막대한 세력들의 이해관계로 고착된 지금의 교육을 뜯어 고치려면, 그것은 정권에 위협이 되는 엄청난 도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과제이며 정권을 초월하여 장기적으로 꾸준히 지속해야할 과제이다. 교육과정 리더십을 살리는 교육은 정권을 걸고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도의 힘든 과제일지 모른다. 하지만 저급한 경쟁력에 머물러 있는 이 나라 교육을 살리는 길은 그것 이외에 대안은 없다고 생각한다. 교육의 본령이 중시되는 학교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그 교육은 일차적으로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들을 크게 완화시킬 것이다. 학교가 즐거운 학습의 공간, 생활공간이 될 것이다. 선생님들의 권위가 신장될 것이다. 사교육이 위축될 것이다. 개성, 창의성이 자연스럽게 신장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국가 교육 경쟁력이 강화될 것이다.
실천은 아무나 하나 ? 연초, 어떤 계획들을 세우셨나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세우는 신년계획에는 운동, 금연, 다이어트와 같은 건강계획, 이직, 어학능력향상 등의 자기계발, 솔로탈출, 결혼하기, 재테크가 주를 이룬다고 하네요. 저 역시 지난해 다이어리를 펴고 신년계획을 살피니 ‘다이어트, 영어회화, 솔로탈출’ 3가지 항목이 모두 포함되어 있더군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3가지 계획은 전혀 실천하지 못한 허울뿐인 계획이었다는 사실에 탄식할 뿐입니다. 왜 매년 반복되는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새해에는 다시 계획을 세우는 일에 급급할까요? 실제로 실천할 방법은 없을까요? 계획은 세부적이고 구체적으로 세워라 지인의 상사 중엔 이런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업무 진행을 위한 플로차트 작성 시에는 분 단위까지 계획하여 제출하라’는 지시를 하는 타입. 업무라는 것이 10분 만에 끝날 수 있는 일도 있고, 한 달이 걸려도 원점으로 돌아와 진척되지 않는 일도 발생하는, 다양한 아이템들의 집합체인데, ‘1분’, ‘5분’을 가르는 계획을 작성하기란 너무 융통성 없는 지시였겠지요. 그런데 그분은 “일단 실천하는 데 의미가 있다”며 팀원들을 밀어붙였고, 회의시간 역시 ‘10분’을 넘기지 말자는 룰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물론 처음엔 이게 과연 실행될 수 있을까 모두들 의심스러워했는데, 몇 달이 흐른 후, 분 단위 계획이 실행되어 돌아가는 모습에 팀원들 모두가 놀랐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실천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계획을 세부적으로 수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막연하게 세우는 ‘운동해야지’, ‘영어 공부해야지’와 같은 구체적이지 않은 계획은, 다짐만 하다가 작심삼일이 되기 일쑤죠. 연초에 세우는 계획도 분기별/월별/주별로 쪼개어 세우고 ‘이번엔 여기까지, 다음번엔 어디까지’와 같이 진도를 정해놓으면 실행에 옮기는 데 더 많은 동기부여가 된다고 합니다. 귀찮아서, 시간이 없어서, 두려워서, 다른 일이 생겨서라는 그럴듯한 이유들 때문에 다음 날로 미루고 또 미룬 일들을 먼저 적어보는 게 그 첫걸음 아닐까요? 메모하라 ! 그리고 확인하라 ! 실천력을 키우는 데 필요한 또 다른 노력은 ‘메모하는 습관’을 키우는 일입니다. 메모는 목적에 따라 그 기술이 다르게 적용되겠지만, 자신의 계획을 되새기고 확인하는 데는 메모만한 것이 없겠지요. 본인만 알 수 있는 메모 이외에 구체적으로 세운 계획을 책상 앞에 붙여 놓는 행동은 주변사람들에게도 자연스럽게 공표가 되기 때문에 더욱 자극이 된다고 합니다. 특히 ‘금연’과 같은 계획을 실천할 때는 더욱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겠죠. 성취지향의 계획만 세우지 말라 ! 계획이라고 하면 뭔가 배우고 취득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고정관념은 계획을 세우고 실천을 옮기는 데 더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달 초 가까이 사는 후배에게 밤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후배는 대뜸 심야영화를 보러 가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후배는 매달 한 가지씩 자신을 위한 이벤트를 계획해 실천하고 있었다네요. 워낙 이른 출근 때문에 밤 시간을 포기하고 사는 자신의 라이프 사이클에 변화를 주어보고자 ‘심야영화보기’ 계획을 세웠답니다. 1년간 그녀가 추진해 온 ‘나만의 이벤트’ 실천 이력을 들어보니, ‘비 오는 날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술 사달라고 하기’, ‘스승의 날 고3 때 담임선생님 찾아뵙기’, ‘편지를 쓰고 우체국 가서 부쳐보기’, ‘지하철 타고 종점까지 가보기’와 같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음직하지만 평소에는 실행하기 어려운 일들을 해왔더군요. 거창한 것만이 계획은 아니죠. 무언가 일상에 변화를 주고 기쁨을 누리는 일. 왠지 실천에 발동이 걸릴 것 같지 않으세요?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벌써 신년을 맞았네요. 혹시 새해 첫날부터 시작된 신년계획들을 작심삼일로 날려 보내시지는 않으셨나요? 지금은 2009년의 시작 1월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지난해를 돌아보고 꼭 했어야 하는 일들 우선순위를 매겨 실행에 돌입해야 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내년에도 또 똑같은 계획세우기를 반복하는 실천력 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자극이 되시라고 좋은 명언 한 구절 소개하며 글을 마칠까 합니다. ‘꿈은 날짜와 함께 적어놓으면 목표가 되고, 목표를 잘게 나누면 계획을 되며, 계획이 실행에 옮기면 꿈은 실현되는 것이다.’(그레그 S.레이드)
1 아부(阿附)를 싫어하는 사장님이 있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부하 직원들에게 자기는 아부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고 말하였다. 또 실제로 아부 모드로 접근해오는 부하 직원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면박을 주며 나무라기 일쑤이었다. 그렇게 되자 모두들 사장님 앞에서 환심을 사려고 알랑거리는 말이나 태도를 취하기는커녕, 사장님에게 격려가 될 수 있는 말조차도 꺼내기를 조심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모두들 사장님이 기분이 나빠져 있을 때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할지 전전긍긍하는 분위기가 나타나기도 했다. 회사 내에 그야말로 아부하는 분위기는 사라져 갔다. 물론 사장님 앞에서는 아부의 ‘아’자조차도 튀어나올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사장님은 달라진 분위기가 되어도 부하 직원들의 변화를 인정해주려는 기색이 없었다. 그냥 계속해서 자기는 아부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는 말만 되뇌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업부장 직위를 가진 부하 직원이 사장님을 모시는 공식·비공식 자리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사장님은 아부하는 사람을 정말 싫어하십니다. 아주 강직하신 분입니다.” “사장님께서는 아부하는 근성을 용납 않으시는 분입니다. 사장님 또한 아부의 처세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정직과 성실로 인간관계를 맺고 당당하고 합리적인 자세로 업무에 입하도록 합시다.” 사장님은 흡족해했다. 영업부장의 사장님 예찬론은 널리 퍼져 나갔다. 사장님 자기 스스로 ‘나는 아부를 싫어한다’라고 말하는 모습 대신, 영업부장의 사장님 예찬이 더욱 세련되게 퍼져 갔다. 그만큼 아부를 싫어하는 사장님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 사장님이 아부를 싫어한다는 것은 이제 모든 회사원이 알고도 남게 되었다. 심지어는 이 소문이 회사 바깥에로도 알려져서 사장님의 곧고 바른 성품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사장님의 신화가 생겨나고 있었다. 사장님은 매우 흡족해했다. 영업부장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영업부장은 사장님의 독점적 총애를 입었다. 누구보다도 빨리 중역으로 승진하고, 회사 내에서 가장 힘 있는 실세 중의 실세로 통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장님이 아부를 싫어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회사 직원들은 심각한 회의(懷疑)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장님은 정말 아부를 싫어하는 분이실까. 사장님이 정말로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장님은 아부를 싫어하신 것이 아니라, 아부를 싫어하는 멋있는 분으로 알려지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부를 즐기는 것은 권력 가진 사람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게다가 중독성까지 있어서 좀더 강력한 아부를 원하면서 점점 더 그 쪽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도 바로 아부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유혹이 강한 것이 있다. 더구나 그것은 중독되는지도 모르면서 중독되어 가는 것이다. ‘멋있는 사람으로 인정되고 싶은 욕구’가 바로 그것이다. 2 대범함을 강조하는 교장 선생님이 계셨다. 학교를 위해서 노심초사 일을 많이 하셨다. 교육청에 들어가 학교 시설의 열악함을 호소하고, 새로운 학교 운영 계획을 의욕적이고 창의적으로 지역사회에 제시하고, 유관기관들을 부지런히 설득하여 학교 발전을 획기적으로 실현해나가는 중이었다. 워낙 대범하신 분이어서 이런저런 노력과 공적들을 자기 스스로 말하고 다니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의 활동이 학교 밖에서의 활동들이어서 학교 내의 선생님들도 교장 선생님의 수고와 공(功)을 소상하게 잘 알지는 못했다. 교장 선생님은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건 의당 교장이 할 일이다. 이런 일 정도로 내가 내 수고를 스스로 공치사하고 다니는 것은 소인배나 할 행동이지, 대범한 사람이 할 일은 아니다. 어쨌든 교장 선생님의 노고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학교 발전의 성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교장 선생님은 대범하게 자기 공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사정을 잘 모르는 학교 선생님들로서는 교장 선생님의 공을 무심히 지나치게 되었다. 그런데 차츰 시간이 경과하면서 교장 선생님은 섭섭한 마음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수고를 몰라도 너무 몰라주는 교직원들의 마음이 왠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소인배 같은 마음을 스스로 나무랐다. 대범하게 품위를 지켜야 할 내가 내 입으로 학교를 위해 이런 노력도 하고 저런 업적도 쌓고 등등 이렇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낯간지러운 일 아니겠는가.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한번 생긴 서운한 마음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다지만 교장의 이런 헌신적 노력을 그렇게 외면하듯 몰라줄 수 있단 말인가. 젊은 교사들이야 학교 실정을 몰라 그렇다손 치더라도, 중견 교사 누군가 나서서 “아! 우리 교장 선생님께서 이러이러하게 활동하시고, 저러저러하게 애를 써주신 덕분으로 우리 학교와 구성원들이 이런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 해주면 얼마나 좋단 말인가. 교장 선생님은 서운한 마음이 조금씩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대범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찍이 공자님도 말하지 않았던가. 남이 나를 몰라준다고 해서 화를 내면 그것은 군자가 아니라 소인배의 행동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일로 선생님들께 섭섭하게 생각 말아야지. 그거 뭐 별 대수로운 것도 아닌데. 교장 선생님은 자신이 그렇게 쪼잔하고 쩨쩨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대범하고 멋있는 모습을 유지하려 하면 할수록 자신의 노고를 몰라주는 교직원들이 미워지는 것이었다. 그런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근본적인 회의가 들었다. 나는 대범한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그냥 대범한 사람으로 보이려는 욕구, 그래서 멋있는 관리자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내 자신이 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더구나 고약한 것은 나를 몰라주는 사람들에 대해 미움과 짜증의 감정이 날로 커 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니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교장 선생님은 깊이 고민했다. 대범한 사람으로서의 멋을 보이기 위해 계속 이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내가 내 입으로 교직원들에게 내 노력과 업적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했다. 생각 끝에 교장 선생님은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그 이유로서는 현재 상태로 학교 교직원들이 섭섭하고 미워지는 자신의 마음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까짓 거, 내가 좀 대범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이면 어떤가. 내가 교직원들을 미워하는 마음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지.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다. 교장 선생님은 마침내 자신의 공적을 스스로 말하기로 했다. 그간 아무도 몰라주는 것 같아서 좀 섭섭했다는 말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살짝 끼워 넣었다. 그 대신 대범하고 멋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또 한 가지를 분명히 했다. 이러한 자신의 공치사는 전체 교직원이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 오늘 딱 한 차례만 하고 이후에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3 교장 선생님의 판단은 지혜로웠다. 효과가 금방 나타났다.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저마다 교장 선생님의 수고를 따뜻한 말로써 화답해 주었다. 며칠 동안은 사람들이 교장 선생님을 만나면 인사처럼 교장 선생님의 수고에 감사의 언어를 표현해주었다. 교장 선생님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던 섭섭함과 미움의 감정들이 서서히 씻겨 내려갔다. 다시 평명한 감정의 상태로 돌아와 학교 관리에 유쾌하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교직원들과 밝은 감정과 상쾌한 기분으로 소통을 할 수 있는 마음의 기조를 되찾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대목에서 사실 교장 선생님과 같은 지혜를 발휘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대범함을 강조하면서, 부하 직원들에 대한 섭섭함과 미움의 감정은 술자리 등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자리에서 여과 없이 거칠게 나타낸다. ‘내가 대범해서 그런 이야기 안 하려고 했는데, 내 참 섭섭했다고, 나쁜 놈들…’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단골 메뉴처럼 이야기를 꺼내서, 나중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는, 매우 고약한 상황을 자초한다. 이야말로 자기모순의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대범함은 대범함대로 상실하면서, 직원들과의 소통은 단절되고,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애초에 교장 선생님이 그렇게 집착하여 보여주고자 했던 ‘대범한 멋’이라는 것이 섭섭함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마음의 미움을 없애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교장 선생님은 ‘연출된 멋’에 홀리지 아니하고 ‘우러나는 멋’의 경지를 체득하신 것이다. 아부를 싫어했다는 사장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진정으로 아부를 배척하는 철학을 실천했다기보다는, 아부를 싫어하는 ‘멋있는 사장님’이라는 이미지에 집착한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는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이다. 이미지는 보여줌으로써 멋과 매력을 극대화한다. 그럴듯한 멋진 모습들은 모조리 이미지로 전달되고, 대중매체는 그것을 열심히 매개한다. 이미지가 빚어내는 멋은 순간의 감성으로 전달되고 포착된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의 관계 또한 파편적이고 순간적이다. 그런 탓인지 현대인들은 누구나 자신의 멋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연출하려 한다. 상업 자본들이 그런 욕구를 끊임없이 부채질한다. 그러니 리더십마저도 ‘멋있어 보이려는 성향’으로 흐른다. 더러는 ‘연출된 멋’에 ‘우러나는 멋’이 쫓기는 형국도 있다. 그러나 연출되는 멋은 일시적으로 매력을 발하지만, 우러나는 멋은 오래 향훈이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연출되는 멋’은 ‘우러나는 멋’보다 한 수 아래이다.
오늘날 교육에 관한 일이라면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없다. 주위 사람들 혹은 언론보도 등으로부터 얻은 간접경험을 추가하여 모두가 자칭 교육전문가로 군림한다. 제반 교육문제에 대해서 서슴없이 칼을 들이대고 자신들의 상식과 잣대로 교육을 비판하고 평가를 내린다. 깊이 연구하고 생각해본 적도 없으면서 교육이 무너진다는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당면한 문제들을 스스로가 세운 기준에 의거해서 예리하게 분석하고 명쾌하게 판단하며 때로는 그럴듯한 처방까지도 내려준다. 사회 어느 분야보다도 교육은 그 특성상 성과나 실적을 가늠하기 어렵다. 교육의 궁극적 결과물은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전체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각종 교육기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은 최종 산출물이 될 수 없다. 사회 각 분야로 흩어져 학창시절에 배우고 익힌 실력을 바탕으로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국민 모두가 교육의 결과이다. 학교 시설물이나 그 속에 있는 교사, 학생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핵심과 본질은 놔둔 채 건물을 얼마나 짓고 기자재를 어떻게 개선하고 어떠한 행사를 몇 번 실시했다는 등의 가시적·외형적·단편적 실적이 점수화, 계량화되어 교육의 결과로 간주되고 있다. 교육에 관한 한 5000만 국민 전체가 당사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 모두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교육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너나없이 일가견을 가지고 교육을 논한다. 교육의 영역이 너무나 광범위하고 관련된 사람들이 많다 보니, 그중에는 문제가 되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어디 교육 자체만 탓할 문제이든가. 일류대학 일류학과를 나오지 않으면 사람 대접을 못 받고 결혼은 물론 취업마저도 어려우니, 누가 학교교육에만 만족하고 가만히 앉아 있겠는가. 어떤 제도, 어떤 여건 속에서도 내 아이만은 옆집 아이를 누르고 세칭 일류대학의 인기학과에 진학을 해야 하는 지상과제 앞에 과연 누가 자유롭고 초연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 사회가 겉으로는 민주화되고 직업에 대한 귀천이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속을 들여다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입만 열면 인간교육이 중요하며 순수과학과 기초학문에 대한 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안정된 직장에서 괄시받지 않고 궁핍하지 않은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다. 고3 진로지도를 할 때의 일이었다. 심사숙고 끝에 적절한 학과를 추천하면, 학부모가 “거기 나와서 밥벌이나 제대로 하겠습니까?”라고 되묻는다. 결국, 특기니, 적성이니 소질 따위는 무시하고 모두가 하나같이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인기학과로 눈을 돌릴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사회생활을 하는 데 지장이 없고 인간 대접을 받으며 사람 구실하는 데 문제가 없는 사회가 빨리 와야 한다. 전문기술과 특별한 재주로 사회생활을 하는 데 불편한 점이 없다면, 누가 구태여 대학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모든 것을 걸겠는가. 학벌과 관계없이 기술인과 전문인이 우대받는 풍토가 조성된다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그리되면 아이들은 능력과 소질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 나설 것이다. 과다한 눈치작전도 없을 것이며 모두가 일류대학 인기학과에 진학하고자 온 몸을 던지는 비극도 사라질 것이다. 교육은 전체 사회현상 중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교육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도 사회라는 큰 틀 속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각종 교육문제를 낳게 한 근본 원인에 대한 치유책도 당연히 범국가적 차원에서 강구해야 한다. 단순히 입시제도만 바꾼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아무나 나서서 함부로 교육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법은 법을 전공한 법조인에게 맡기고 질병은 전문적인 의술을 습득한 의사에게 맡기듯이, 교육도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교사들에게 맡겨라. 일단 맡겼으면 믿음을 갖고 지켜보라.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듯 조급증을 보여서는 안 된다. 절대로 교육을 단기적 안목으로 보지 말라. 적어도 10년 혹은 20년의 시간을 두고 생각하라. 밥은 몇 숟갈만 먹어도 배가 부르지만 몇 달 공부했다고 해서 바로 표가 나는 것이 아니다. 평가라는 장치를 통해 아이들의 머릿속에 든 것을 측정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이것은 다른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해서 택한 궁여지책일 뿐 교육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땅은 좁고 자원이 부족하여 믿을 것이라고는 인력자원뿐인 우리나라가 이만큼 살고 있는 것은 바로 교육의 힘이 아니었던가. 세계가 놀라는 경이적인 경제발전도 교육의 힘이었으며, 지구촌 곳곳을 누비는 대한 건아들의 더 높은 기상도 교육의 결과임을 잊지 말라. 무엇보다도 내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즐거운 가운데 긍지와 보람을 느낄 때 내 아이의 장래도 밝다는 점을 명심하라.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에 대한 험담을 함부로 늘어놓지 말라.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신중하게 이성적으로 접근하라. 사회 구성원 전체가 그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며 학교교육을 신뢰하고 지원할 때, 우리 교육은 제 구실을 다할 것이며 국가의 미래도 보장될 수 있다. 가슴 벅찬 감동과 크나큰 희망 속에 기축년(己丑年) 소의 해가 밝았다. 소는 옛날부터 인간과 친숙하게 지내면서 온갖 힘든 일을 도맡아 했던 든든한 일꾼이었다. 가축이기보다는 오히려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그 유순하고 성실한 천성이 사람들에게 골고루 전파되어, 우리 국민 모두의 심성 또한 여유롭고 부드러워졌으면 좋겠다. 소처럼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다 하는 인재를 길러내야겠다. 그러기 위해서 교육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교육가족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 힘과 정성을 한데 모아야 한다. 새해에는 교육을 비롯한 국가의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잘 풀려서 온 국민이 환한 얼굴로 함께 활짝 웃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강화산성 안파루(남문). 강화동종. 강화역사관에 있으며 강화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안내해주었다.서울을 지키는 천연 요새 섬을 찾아가는 여정은 이제 강화도로 향합니다.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 큰 섬으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모두 축소되어 있다고 할 만큼 유적지가 많은 곳입니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참성단을 비롯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군도 있고 팔만대장경판도 여기서 만들어졌습니다.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다른 어느 곳보다 외침을 많이 받았으며 특히, 외세의 개방 압력에 제일 먼저 노출된 곳이었습니다. 유사시에는 도읍지인 개성과 한양을 대신하는 피난처로 활용되었고요. 서울을 지키기 위한 천연 요새였던 이곳에는 섬 구석구석 군사시설로 꽉 차 있었습니다. 강화도로 떠나는 여행은 이렇게 강화도에 있는 관방시설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외규장각, 되찾아야 할 기록 고려 고종 때입니다. 몽골의 침입에 맞서 항쟁하던 고려는 드디어 개성을 떠나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합니다. 서기 1232년의 일입니다. 도읍을 옮겼으니 성을 쌓고 궁궐을 지어야 하겠죠? 그 흔적이 강화산성과 고려궁터에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강화도는 39년간 항몽의 근거지였습니다. 강화산성은 원래 토성이었는데 조선 초에 이르러 석성으로 개축되었습니다. 동문 망한루, 서문 첨화루, 남문 안파루, 북문 진송루의 4대문을 두었으며 강화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데 쓰던 강화동종이 현재 강화역사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고려궁터라고 하지만 막상 그곳에는 고려시대 궁궐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건물들은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었던 동헌이나 이방청, 도서관이었던 외규장각 건물뿐이죠. 강화유수부 동헌은 조선시대 강화도가, 유수가 다스리는 유수부(留守府)였으며 이곳이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말해줍니다. 서울을 둘러싼 개성이나 광주, 수원이 강화도와 함께 유수부가 설치된 곳이었죠. 이곳에 있던 외규장각은 1782년 2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입니다. 하지만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서적을 약탈하고 불에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더군다나 그때 약탈해간 고서들을 아직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기록이요, 되찾아야 하는 기록인 셈입니다. 지난 1993년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찾아와 한국의 고속철도기종으로 TGV를 선정하면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주기로 하고 ‘휘경원 원소도감의궤’를 반환하는 시늉을 했습니다. 하지만 고속철도기종으로 TGV가 낙찰되었건만 아직껏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약탈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동안 오랜 시간이 지났다. 따라서 이제는 프랑스 소유의 문화재가 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억지주장일지 모르겠습니다. 한 포털사이트에서는 외규장각 도서 환수 모금 운동을 펼치고 있고 민간단체에서도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반환운동을 펼치고 있는 중입니다. 〈르몽드〉지에 실린 외규장각 도서 반환과 관련한 광고 문구처럼 외규장각 도서가 반환될 때 대한민국 국민은 휴식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전 세계 낯선 땅에 잠들어 있는 7만여 해외 문화재가 하루빨리 우리 곁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합니다. 정족산성, 살아 있는 기록 외규장각과 달리 정족산성 내 정족산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 등 소중한 자료는 다행히 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양헌수 부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1866년 프랑스는 자국의 선교사를 처형한 것을 구실로 7척의 군함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병인양요입니다. 당시 양헌수 장군은 강계포수 300여 명과 함께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고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이로써 사고(史庫)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죠. 삼랑성이라고도 불리는 정족산성을 막 통과해 전등사로 가는 길에 양헌수 장군 승전비를 만날 수 있지요.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실록의 역사는 고려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기록하게 하였으며 전왕시대의 역사를 기록해 실록이라 해서 사고에 보관해왔습니다. 대개 사고에는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史閣)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寶閣)이 함께 있습니다. 조선왕조는 1409년부터 1413년까지 4년간의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을 시작으로 정종실록 6권,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하고 위 3조실록 각 2부씩을 등사하여 서울의 춘추관과 충주사고에 보관하였습니다. 그러나 2부의 실록만으로는 향후 보존이 염려돼 1445년에 다시 2부를 더 등사하여 전주와 성주에 사고를 신설하고 보관하게 됩니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주사고를 제외한 나머지 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맙니다. 전주사고의 경우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옮겨 보관했기 때문에 무사했던 것이죠. 1606년(선조 39년) 전주사고본은 서울과 가까운 강화로 옮겨져 명종대까지의 실록이 더해져 3부가 더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전주사고본 원본은 마니산사고에, 나머지 3부는 춘추관·태백산·묘향산 사고에 보관합니다. 오대산사고에는 교정본을 보관하였죠. 사고의 관리는 인근의 절에서 담당하게 했습니다. 이후 병자호란과 이괄의 난 등으로 춘추관과 마니산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이 불에 타거나 파손되었으므로 다시 4부의 실록이 작성되어 이곳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에 1부씩 보관합니다. 이 중 오대산에 있던 실록은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관동대지진 때 대부분 불타버렸고 적상산의 것은 북한에 있습니다. 지금 규장각에 남아 있는 실록은 정족산사고본, 태백산사고본입니다. 정족산사고본이 남아 있게 된 데는 외규장각 침탈과 같은 문화적 만행을 막아낸 양헌수 부대의 승전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정족산성 내에는 가궐터도 남아 있습니다. 가궐을 짓고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사를 지내면 몽골이 물러가고 주위 대국들이 와서 조공할 것이라는 풍수설에 의해 지어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역사의 시곗바늘은 그 예언을 벗어나버렸군요. 어재연 장군기 (인천시립박물관에 원본이 있다).신미양요의 격전지 광성보 강화도를 여행하다 보면 ‘진(鎭)’, ‘보(堡)’, ‘돈대(墩臺)’등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실 겁니다. 이 군사시설들은 수장이 누구냐에 따라 그 위상이 달라지겠습니다만 대략적인 규모를 기준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진은 덕진진, 초지진,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등 모두 다섯 군데가 있었습니다. 강화지역 문화유산을 안내해주시는 분에 의하면 진은 지금으로 치면 대대급 규모를 말한다고 합니다. 보는 광성보, 철곶보, 장곶보, 선두보와 같은 곳으로 모두 일곱 군데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중대급 규모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돈대는 해안가나 고지에 설치된 소규모 군사시설로 그 형태는 원형, 타원형, 네모형 등 다양합니다. 오늘날 초소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몇몇 돈대가 모여 하나의 진이나 보를 이루게 됩니다. 강화도에는 5진 7보 53돈대와 8포대가 해안을 따라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1970년대 복원사업을 거쳐 관광지로 알려진 곳은 덕진진, 초지진, 광성보, 용진진, 갑곶돈대 등이 대표적입니다. 광성보의 경우도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입니다. 미국의 장삿배인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와서 무역할 것을 요구하자 사람들이 그 배를 불태워버렸습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해서 미국은 1871년 군함을 앞세워 조선을 침략하는 데 이것이 신미양요입니다. 초지진을 거쳐 강화해협으로 들어선 미군함은 광성보 근처에서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당시 미국은 1861년부터 4년간 남북전쟁을 겪으면서 풍부한 전쟁 경험을 갖추었으며 근대화된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조선군의 무기는 형편없어서 전쟁은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백병전으로 전개된 전투에서 총지휘관인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 등 조선군은 거의 전멸하고 미군은 3명만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여러 모로 보나 비교가 안 되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운 그들의 희생정신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용두돈대에 있는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격전지였던 강화도를 핵심적으로 잘 나타낸 말이 아닐까 싶네요. 강화는 한강 어귀에 있어 사면에 물이 둘리고 섬 안에는 산악이 중첩하여 천연적인 요새지다. 역대를 통하여 전란 때에는 피란처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 병화를 입어 편안한 날이 없었기에 이 언덕 저 갯가 풀 한 포기 돌 한 덩이에 역사의 사연이 서리고 끼치지 않은 것이 없다.(이하 생략) 손돌목과 수자기 용두돈대에서 강화해협을 바라보면 물살이 급한 곳이 있습니다. 이곳을 손돌목이라고 부릅니다. 이곳에는 뱃사공 손돌과 관련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광성보 손돌목 고려 고종(혹은 이괄의 난을 피해 강화도로 향했던 조선 인조 때라고도 합니다)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로 피난을 가는데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뱃길을 안내하게 되었습니다. 강화해협을 건너 강화도로 향하던 배가 점점 여울목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피난길에 있던 왕은 손돌을 몽골의 첩자로 의심해 즉시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손돌은 이곳의 지형이 원래 그렇다고 했으나 왕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기 전 바가지를 배 앞에 띄워 그 바가지가 가는 대로 따라 가면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손돌이 죽고 난 후 상황은 더 악화되어 결국 사람들은 손돌이 말한 대로 바가지를 띄워 그 바가지가 떠가는 대로 가게 되었는데 정말로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었답니다. 그 여울목이 손돌목인 것입니다. 손돌목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손돌의 묘가 있습니다. 뱃사공의 말도 믿 지 못해 민초의 억울한 희생이 있었던 것입니다. 왕은 살아남기 위해 섬으로 피신해야 했던 절박한 상황이었겠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전쟁 동안 얼마나 많은 민초들의 희생이 뒤따랐을지 짐작해봅니다. 이를테면 고려 정부가 강화도에 머물던 39년간 육지에 살고 있던 민초들의 삶은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또 16년간에 걸쳐 팔만대장경판을 만들면서 외딴 섬에서, 혹은 깊은 산 속에서 후박나무며 자작나무를 채취해 강화도로 옮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민초 들이 목숨의 위협을 느꼈을까요. 광성보에 있는 쌍충비각은 어재연, 어재순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입니다. 참,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기인 수자기(帥字旗)가 미군에 의해 약탈당했습니다. 이 기는 누런 삼베 천에 장수를 나타내는 수(帥)자를 새긴 것입니다. 미군에 의해 약탈당한 후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가 지난해 국내에 들여와서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보관 중입니다. 2010년 개관 예정인 강화역사박물관에서 상설 전시될 예정이랍니다. 우리 문화재이지만 최대 10년간 대여형식으로 가져온 것이라 기간이 끝나면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군요. 13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수자기가 두 번 눈물 흘릴 일이라 하겠습니다. 쌍충비각 근처에 있는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은 미군과 싸우다 순국한 이름 없는 용사들의 묘입니다.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51위를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두었습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웠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자못 숙연해집니다. 1월입니다. 제가 새교육에 연재를 시작한 지도 지도 만 5년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만날 수 있게 해주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아울러 그동안의 친분을 빌미(?)로 살짝 제 자랑도 한번 할까 합니다. 전교생 22명의 우리 분교 아이들이 문화재청 스토리텔링 콘테스트에서 당당히 금상을 차지했습니다. 이 기쁨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2월에도 강화도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일본의 전국학력조사에서 2년 연속 전국 최고 수준이었던 아키타현내 초・중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현교육위원회의 과제는 고교생의 학력 향상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들어가기 힘든 대학 수험을 지망하고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입시학원 강사를 초청하여 집중강의「토요강좌」를 시작했다. 학원이 적은 아키타현내에서 수도권의 학원 강사들의 강의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학생들의 학력 향상을 꾀하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자, 여기를 메모하세요」. 아키타시 메이토쿠칸 고교에서 23일에 있었던 2학년을 대상으로 한 첫 강의 시간이다. 도쿄에서 초청 된「요요기 세미나」학원의 수학강사가 1교시 수업을 적절한 속도로 진행했다. 센터 시험문제 등 대학수험의 실전적인 문제를 푸는 한편, 잡담도 섞어가면서 재미있게 진행해 나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강의에는 아키타, 아키타키타, 아키타미나미, 아키타주오, 혼조 등 5개 교 약 40명이 수강했다. 토요강좌는 현교육위원회가 올 해 시작한「고교생 파워 업 추진사업」의 일환이다. 현내 고교생의 2007년도 입시 센터시험의 성적은 전국 39위이다. 한편, 현교육위원회에 의하면 졸업자 전체에서 국공립대학 입학자의 비율은 15.5%로 전국 14위이다. 국공립대 합격자를 10명 이상 배출하고 있는 고교 수의 비율로 보면 동북지방 6개현에서 가장 높다. 실업고교에서 국공립대 진학률도 높고 공업고교에서는 전국 1위이다. 현내 고교생의 실력을 엿볼 수 있는 수치이다. 이번 강좌에서는 1,2학년에서 주로 성적이 상위권인 학생들의 실력을 높이는데 특화시켰다. 학원 강사 외에 현내 고교에서 선발된 교사가 가르친다. 학생들은 교재비만 부담한다. 2학년은 영어, 수학, 화학을 1학년은 영어, 수학을 배운다. 90분 강의를 오전에 2시간, 점심시간 후 오후에 한 시간 받는다. 아키타시, 오다테시, 요코테시 등 현내 3곳에서 내년 2월까지 14회를 예정하고 있다. 12개 학교에서 약 200명의 학생이 참가하였다. 강의를 들은 아키타미나미고교 2학년 한 여학생(17세)은「평상시에는 토요일은 늦게까지 자고 있다. 재미있고 알기 쉽게 가르쳐주니까 집중해서 들을 수 있었다. 좋은 습관이 생길 것 같다」라고 이야기했다. 어느 고교의 남교사는「다른 학교 학생이 있어서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라고 하면서「지금까지 어쩐지 대립관계이었던 학원이지만 수험 관련 자료 지도 방법을 많이 가지고 있다. 우리도 배울 점이 많다」라고 이야기 했다. 이처럼 일본의 농촌지역의 교육회생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모습에서 현직 학교 교사들의 가슴에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고 있을까?
교대 부설학교 등 전국 43곳의 국립학교를 3월부터 공립학교로 전환하려던 정부의 계획이 2010년 이후로 미뤄졌다. 1일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이르면 올 3월부터 전국의 국립학교를 공립학교로 전환키로 하고 최근 국립학교 설치령 등 관련 법령 입법예고까지 마쳤으나 법령 개정 작업을 유보하고 공립화 계획을 내년 이후로 미루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과부 관계자는 "국립학교 공립화에 대한 이견이 많아 좀더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올 3월과 5월께 공청회를 열고 필요할 경우 입법예고안을 다시 만들어 2010년 이후 재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교과부가 공립학교로 전환을 추진한 학교는 서울대 부설 초ㆍ중ㆍ고를 비롯한 각 국립대 부설학교, 서울교대, 경인교대 등 전국 10개 교대 부설 초등학교 등 부설학교 40곳과 공립공고 3곳(부산기계공고, 전북기계공고, 구미전자공고)이다. 교과부는 국가 업무가 지방으로 이양되는 추세를 반영하고 학교 감독 권한이 교과부와 시도 교육청으로 이원화돼 있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따라 이들 43개 학교를 시도 교육감이 관리, 감독하는 공립학교로 전환하는 계획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전국의 교대 총장, 교수, 국립학교 교장, 교사, 학부모들은 "일반 공립학교의 모델이 되는 국립학교의 기능을 무시하는 행정 편의적 발상"이라며 공립화 방침에 강하게 반발해 왔다. 교과부 관계자는 "의견 수렴을 위해 시기가 미뤄지는 것일뿐 공립학교로 전환하겠다는 기본 방침에는 변화가 없다"고 강조했다.
교단의 학습조직화, 수업전문성 신장을 위해 올 3월 시범도입된 수석교사제가 2009년 3월부터 두 배로 확대 운영된다. 하지만 수석교사 법제화는 해를 넘겨 올 6월 임시국회 이후에나 다시 논의될 전망이다. 교과부는 최근 수석교사 시범운영계획’을 각 시도교육청에 시달했다. 이에 따라 방학 중인 1월에 수석교사 선발전형이 진행되게 됐다. △기간=2차년도 시범운영 기간은 올 3월부터 내년 2월까지로 1년이다. 수석교사 선발, 배치를 시도 전체 차원에서 실시하거나 특정 지역교육청(또는 2, 3개 교육청을 묶은 시범교육청 群)을 정해 운영할 수 있다. △규모=시범운영 대상이 현재 171명에서 300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난다. 현장에 수석교사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학교급, 시도 등 다양한 조건에 따른 수석교사제 도입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다.서울 34명, 부산 20명, 대구 18명, 인천 18명, 광주 16명, 대전 16명, 울산 16명, 경기 34명, 강원.충북.충남.전북.전남.경북.경남.제주 각 16명을 선발한다. △역할=수업 담당 외에 수업 코칭, 교내 연수 주도, 교육과정 교수학습평가방법 개발보급, 신임교사 지도 등 교단의 학습조직화와 수업전문성 신장이 주 임무다. 이외에 교원양성, 연수기관에서의 강의 등 교과교육 관련 외부 활동을 하게 된다. △선발교과=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 10개 교과와 전문교과 중 공업, 상업에 관한 교과에서 선발한다. 시도별로 반드시 선발해야 하는 1개 교과를 지정해 초중등별로 각 1명을 선발하되, 그 외 과목은 자유롭게 선택해 선발하게 된다. △지원 자격=초중등 교육경력 10년 이상 1정 소지자(1안), 15년 이상자(2안)가 지원하는 두 가지 방식이 진행된다.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경기, 제주는 1안을 적용하고, 서울,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은 2안을 적용해 선발한다. 교육경력에는 기간제 교원으로 근무한 경우도 포함된다. △지원 서류=소정의 수석교사 지원서, 교육활동실적 요약서, 수석교사 활동계획서, 기타 수석교사 선발에 필요한 서류가 있다. △전형방법=시도 전체 교사를 대상으로 응모를 받거나 시범 지역교육청 관할 교사만을 대상으로 하거나는 시도가 정한다. 시도별 수석교사 심사위원회에서 지원자를 대상으로 3단계 전형을 실시하며, 1차는 서류전형, 2차는 수업능력 심사 및 심층면접, 3차는 동료교사 등 면담이다. 심사위는 교장, 교감, 교사, 교육전문직, 학계 전문가 등을 포함해 7인~11인으로 구성한다. 2008년에 수석교사로 활동한 대상자는 1, 2차 전형이 면제된다. △문제점=한국교총은 “수석교사제를 확대 시범운영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나 이들이 현장에서 제 역할을 하도록 지위를 부여하고 지원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1기 수석교사들의 가장 큰 애로사항이었던 수업 부담은 전혀 개선되지 않을 전망이다. 지침은 ‘학교실정에 따라 20% 정도 경감가능’하다고 했지만 임의규정이라 실효성이 미지수다. 지난해에는 시간제 강사도 제때 확보하지 못해 동료교사들이 수업을 떠맡아 애꿎은 수석교사들이 비난의 화살을 감수해야 했다. 이와 관련 초중등 수석교사회는 “수업참관과 컨설팅, 연수 주도, 교육과정 등 개발 보급, 외부 특강 등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주당 10시간 이내로 수업이 조정돼야 하며, 이를 위해 수석교사 수만큼 별도 정원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처우도 그대로다. 전년과 동일한 연구활동지원비 월 15만원 외에 인센티브 제공은 시도 재량이다. 동료교사 면담, 각종 자료제작, 연구에 쓰다보면 ‘우대’랄 게 없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수석교사의 위치를 ‘교감과 부장교사의 중간 위치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자’로 규정한 것이다. 관리직만큼 우대받는 교수직 트랙을 만들어 교사의 전문성을 신장시키고 학교교육력을 극대화한다는 근본 취지를 근본부터 뒤흔드는 규정이기 때문이다. 이원춘 중등수석교사회장은 “수석교사에게 충분한 지위와 처우를 제공해 우수한 교사들이 교실에서 좋은 수업을 하며 긍지를 갖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데 이래서야 누가 수석교사에 지원하겠느냐”며 지침 내용의 삭제를 촉구했다. 이에 대해 교과부는 “지금은 시범운영인데다 현 교단 정서상 한번에 지위를 교감급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무리가 있다”며 “단계적으로 효과를 입증하고 정착 단계를 거치면 내후년쯤에는 교감 옆자리에서 장학을 협의하고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