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엔 버스를 타고 긴 여로(旅路)에 오르는 것이 설렘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좁은 공간에 갇혀야 하는 그 시간이 지루함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낯선 사람을 옆자리에 앉힌 채 긴 시간을 함께 자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다란 무게감을 지닌 채 다가오는 법이다. 그런 만큼 나이가 웬만큼 든 승객들은 차에 오르며 혼자 앉게 되기를 갈망한다.
김명자 씨도 그런 바람을 가지고 고속버스에 올랐다. 가는 곳은 같되 그곳을 향하는 목적은 서로 다른 승객들이 이미 열댓 명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승차권에 기재된 번호를 확인한 뒤 자리에 앉았다. 바랐던 대로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의자를 뒤로 젖히며 등을 깊숙이 묻었다. 온몸이 물에 잠긴 솜뭉치처럼 무겁고 나른했다. 눈을 감자 심신이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 풀어졌다.
종아리에서 찬바람이 일도록 일분일초를 아끼며 하루 종일 뛰어다닌 노력의 결과가 건더기가 전혀 건져지지 않는 장국처럼 멀겋게 쑤어져 피로감은 더했다. 경기가 좋지 않다 보니 모두는 보호 시설에마저 조금의 정도 나누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운전석 위의 전자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출발 시각이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그녀는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그렇게 자리가 계속 비어 있기를 다시 한 번 간절히 기원했다.
그러나 기대는 버스가 출발을 위해 꽁무니를 빼는 순간 깨어졌다. 급하게 승강구를 오른 중년의 남자 하나가 좌석 번호를 훑으며 통로를 거슬러 오더니 그녀의 옆에 털썩 엉덩이를 내렸던 것이다.
수신호를 해주는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후진을 한 버스는 차들이 뒤엉킨 차로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긴 장정에 올랐다.
다양한 간판과 다양한 걸음걸이의 행인들을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뒤로 뒤로 밀어내던 버스가 제 속력을 찾은 것은 고속도로로 올라선 뒤였다.
그즈음 먼 산골짜기로부터 먹어 들어오기 시작한 땅거미가 차의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차내에도 어둠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운전기사는 단추 크기만 한 머리 위의 실내등을 점등했다. 김명자 씨는 실내등을 비틀어 끈 뒤 의자를 뒤로 눕혔다.
잠이 머리꼭지에서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리기 시작한 잠이 등을 타고 무릎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PAGE BREAK]
“삐리리 삐익 삐리리리리리…….”
옆자리에 앉은 중년 남자의 품속에서 휴대폰의 신호음이 울렸다. 조용한 공간을 산산이 부수면서 쏟아져 나온 그 소리는 막 잠이 들려고 하던 승객들의 신경 모두를 뾰족하게 날을 세우도록 만들었다.
차 내의 분위기가 너무도 조용했던 까닭에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김명자 씨에게도 선명하게 들렸다.
“저예요.”
중년 여자의 목소리였다.
“응. 왜?”
남자는 목소리를 한껏 맞추어 말했다.
“지금 어디예요?”
“버스 안. 그리 가는 중이야.”
“그래, 볼일은 잘 봤어요?”
“아니. 요즘 다 그렇잖아. 대리점 사장이 며칠만 봐달라고 싹싹 빌어. 별수 있어? 그러자 했지. 그러나저러나 잘 찾아가는 길이야?”
“못 찾겠으니까 전활 했죠. 내가 뭐래요? 요즘 대리점엘 가 봐야 뻔하니까 수금은 다음으로 미루고 이 일을 당신이 직접 처리하라니까……내게 미루더니 이 모양이잖아요? 송 기사 바꿀 테니까 지리 좀 자세히 설명하세요.”
부인을 통해 중요한 물건을 어딘가로 옮기는 모양이었다. 운전기사가 목적지를 잘 찾지 못하는 모양으로 남자의 입을 통해 자세한 그림 지도가 건네지고 있었다. 중소기업이나 유통업을 운영하는 사람쯤으로 여겨졌다.
장기적인 불경기 때문에 전 세계가 불황으로 신음 중이어서 버스 안에서까지 사업에 일일이 간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버스 안이고 지금 모두는 어둠 속에서 영혼을 안주시킬 차비를 마친 상태여서 남자의 전화가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뒤척거리는 낌새가 역력했다.
통화가 끝났다. 다시 고요가 찾아 들었다. 김명자 씨도 서둘러 멀리 달아나려는 잠의 꼬리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한데, 그 시간 이후, 남자의 전화는 김명자 씨가 진작부터 신흥 공해로 치부했던 버스 안에서의 휴대폰 통화 소음을 확실하게 인식시키겠다는 듯 시도 때도 없이 이어졌다.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의 통화가 끝났을 때 뒤쪽 좌석의 어디쯤에선가 젊은 목소리가 참다못해 볼멘소리를 냈다.
“사업도 좋지만 남도 좀 생각합시다. 차내에서는 휴대폰을 잠금 상태로 해두는 것이 예의 아닐까요?”
김명자 씨는 중년 남자를 나무라는 젊은 목소리가 반갑기는 했지만 이쪽의 반응이 냉랭하게 나가면 둘 사이에 설전이 벌어져 더욱 시끄러워질 텐데 하고 조금은 염려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남자는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그쪽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한 뒤 공손하게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좀 급히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서 아내에게 일을 부탁했는데 길을 찾지 못해 자꾸 묻고 있습니다. 목적지의 근처에 다 갔으니까 곧 찾게 될 겁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정중한 사죄였기에 더는 얘기가 없었다. 전화기는 잠시 후에 또 울었다.
“두 갈래 길이에요. 어느 쪽이라고 했죠?”
이제는 중년 남자도 주변이 의식되는지 짜증 섞인 목소리를 보냈다.
“당신도 참. 왜 그렇게 길눈이 어두워? 그러게 내가 뭐랬어? 함께 가자고 할 때마다 그렇게도 싫다 싫다 하더니.”
자연히 전화기 저쪽에서도 짜증이 넘어왔다.
“당신이 언제 함께 가자고 했어요? 내가 따라붙는다니까 남의 눈에 뜨일 염려가 있어서 안 된다고 할 땐 언제고?”
부인의 얘기가 맞는 모양으로 남자는 조금 움츠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이제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요.”
하지만 여자는 난감한 말투로 하소연하듯 말했다.
“여보. 오늘 꼭 가야 해요? 다음에 가면 안 되겠어요?”
부인은 목적지를 찾는 것이 영 자신 없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단호했다.
“안 돼. 기다리는 사람들 생각을 해야지.”
“당신은 언제쯤 도착해요?”
“한 시간쯤 후에 도착하게 될 거야. 당신이 그곳에 닿는 시각과 거의 같을 테니까 정문 근처에서 기다려. 택시를 타고 바로 쫓아갈게.”
[PAGE BREAK]
그 후에도 전화는 승객들의 신경질을 팽팽하게 부풀릴 정도로 계속 이어졌다. 이제 승객들은 아예 잠을 포기했다. 여기저기에서 실내등이 점등되었고 신문을 펼쳐 드는 소리가 부스럭부스럭 났다.
김명자 씨도 잠을 포기하고 의자를 바로 세웠다. 남자의 전화 내용이 귀를 파고들어서 더욱 괴로웠다.
그런데 가만히 그쪽으로 귓바퀴를 열고 있자니 남자가 그리는 그림지도가 점점 더 익숙한 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왔다.
‘혹시?’

김명자 씨는 이제 남자와 부인 사이의 통화 내용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남자가 설명하는 지리가 점점 더 김명자 씨의 확신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부인이 기사를 대동한 채 움직이는 목적도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다 다음의 대화에서 김명자 씨는 결정적인 확신을 가졌다.
“짐은 빠짐없이 챙겼지?”
“그럼요. 당신이 포장해둔 것 모두를 빠짐없이 챙겼어요.”
“인형도?”
“그럼요. 그걸 빠뜨리면 어떻게 해요?”
“녀석들이 좋아하겠지?”
“당신도 참.”
“올해는 너무 늦어져서 안 오는 줄 알고 실망들 했을 거야. 다른 때는 이삼일 전에 들렀는데.”
“어쨌거나 새해가 오기 전에 들르게 되었으니 됐어요.”
“아, 참. 냉장고에 넣어 둔 사골(四骨)은?”
“걱정 말아요. 그걸 빠뜨렸다가 당신한테 쫓겨나게요?”
틀림없었다. 김명자 씨는 남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인데 그지없이 인자한 얼굴이었다.
시계를 보았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삼십 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김명자 씨는 이쯤에서 작전을 개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승객들의 호기심 주머니를 부풀려 시선을 모아야겠기에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저, 여보세요!”
남자의 얼굴이 이쪽으로 돌았다. 기대대로 승객들의 시선도 일제히 둘 쪽으로 모였다.
“통화 내용을 엿들으니 나쁜 일을 하시는 분 같군요. 미안하지만 기사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차를 경찰서 앞으로 몰아야겠어요.”
남자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착한 품성을 내보이며 당황해하는 모습 때문에 김명자 씨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럼 뭐예요? 전화기 저쪽 사람이 지금 장물을 운반하는 것 아닌가요?”
당황한 남자는 손까지 휘휘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실은… 남모르게 누군가를 조금 돕고 있습니다. 제가 출장을 다녀오느라 시간이 없어서 아내에게 그 근처까지 선물을 옮겨놓으라고 부탁했는데 아내가 지리를 잘 몰라서 이 소동을 겪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나쁜 일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PAGE BREAK]
이제 증거는 확실해졌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김명자 씨는 벌떡 몸을 일으켜 통로로 나섰다.
“여러분! 지금 제가 미제(未濟) 사건 하나를 해결했습니다. 미제 사건 아시지요? 범인을 못 잡아 오리무중으로 남겨진 사건. …… 여기 서 있는 저는 여러분이 가시는 도시의 변두리에 자리한 희망고아원이라는 보호 시설의 원장입니다. 매년 새해가 되기 직전이면 저희 고아원에 온갖 선물을 한 트럭분 살짝 부려놓고 떠나가는 그림자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그 그림자를 찾았습니다. 이 차에 탄 여러분 모두를 2시간 동안이나 끈질기게 괴롭힌 이 분이 바로 그 그림자임이 분명합니다. …… 본의는 아닙니다만 옆자리여서 오고가는 통화 내용을 엿듣다 보니 이 분이 설명하는 지리가 저희 고아원 주변이 틀림없고 전화기 저쪽의 트럭에 실린 내용물이 범인임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남자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김명자 씨는 예의 바른 자세로 그림자에게 사실 확인을 부탁했다.
“어떠세요? 제 말이 사실 아닌가요?”
그는 이마에 주름을 만들면서 오른손으로 턱을 한번 쓱 쓸었다. 곤란한 일과 마주치면 무의식중에 행하는 버릇인가 보았다.
결국 그는 방법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천천히 위아래로 주억거렸다. 숨긴 선행이 선명하게 실체를 드러내자 남자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모두는 약속이나 한 듯이 박수를 짝짝짝 쳤다.
모두는 귀중한 잠을 도둑맞긴 했지만 밝은 새해가 될 서기(瑞氣)를 느끼며 푸근한 얼굴이 되었다. 그들의 얼굴을 2시간 동안 뒤덮고 있던 짜증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새해가 오기 꼭 3시간쯤 전의 일이었다.
---------------------------------------------------------------------------
최창중 청주교대·한국교원대 대학원 졸업을 졸업했다. 현재 충북도교육청 장학사이며 펜클럽한국본부·한국문인협회·한국소설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양문학·자유문학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대산 문화재단 소설부문 창작지원자로 선정됐다. 소설집으로 <건배가 있는 삽화>, <대설주의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