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검색결과 - 전체기사 중 48,544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상세검색요즘 우리 선생님들은 마치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처럼 난도질당하기 일쑤이다.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야단법석을 떠는지 모르겠다. 교원평가제가 교원단체의 반발에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 상태에서 다시 불거져 나온 말이 부적격 교사 퇴출제이다. 아직까지 부적격 교원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이 제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들이 많다. 설령 확정된다 할지라도 많은 부작용을 초래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한편으로는 긁어 부스럼 만드는 꼴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우리 선생님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고 본다. 이런 식으로 우리 선생님을 궁지로 몰면 결국 피해는 누가 보겠는가? 마치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학생이나 학부모, 시민단체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된다면 공교육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공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애쓴다고 하는 교육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심스럽기만 하다.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선생님은 청렴결백하며 아이들을 보면서 자정능력을 키워 가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마저 가식이라고 한다면, 성당에 가서 신부님 앞에서 고해성사라도 받으란 말인가. 일부 몰지각한 선생님들로 인해 참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선생님마저 그런 식으로 매도되어 진다는 사실에 불쾌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의 사기만 저하시키는 이런 특별법을 구차하게 만들지 않아도 선생님은 스스로 교단에서 물러나는 것이 예사다. 벼룩도 낯짝이 있는 법. 그런 선생님이 어떻게 학생을 바른 길로 지도할 수 있겠는가. 또한 아이들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 볼 수나 있을까? 결국은 학생들이 그런 선생님으로부터 배우기를 거부할지 모른다.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다."라는 말이 있다. 특히 선생님에게 있어 스승은 학생이라고 본다. 선생님도 학생들로부터 힐책받아야 할 것은 받아야 한다고 본다. 자기 표현을 잘하는 요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말을 무조건 믿어서도 안되지만 지나가는 말 중에는 귀 닫아 들어야 할 내용도 있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보람으로 산다'라는 말이 이제 옛 말로 되어버렸단 말인가. 연일 계속되는 무더운 날씨. 교육부는 선생님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정책에만 열내지 말고 열악한 우리나라 교육 현장이 거듭날 수 있도록 교육 여건을 개선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한번은 어떤 선생님에게 우스갯소리로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하루 중 언제 제일 행복하세요?” 그 선생님은 질문에 대답 대신 이렇게 말을 했다. “아마 선생님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실 아이들과 수업하는 시간이 제일 행복합니다. 그 시간에는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니까요.” 나 또한 그 선생님의 생각과 똑같았다. 누군가로부터 교권을 침해받는 것보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없다고 본다. 아마도 선생님들 모두의 생각이 그러리라 본다. 교권은 우리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고 본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가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선생님들 자신이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그 어느 누구도 우리의 교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재무장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교사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21세기 우리나라를 짊어지고 가야 할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몸짓 하나까지도 배운다고 하지 않는가. 선생님이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제일 행복하고 멋있게 보이듯 우리의 행복지수는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한다.
초ㆍ중ㆍ고교 교장들이 대대적인 노동교육을 받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3일 한국노동교육원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달 말까지 서울, 경기, 전남, 전북 등 전국의 초ㆍ중ㆍ고교 교장과 교감 1천386명이 2박3일씩 26회에 걸쳐 '학교노동교육'을 수료했다. 노동교육원은 학교장들이 노동조합 소속 교사들과 건전한 '노사관계'를 유지하고 학생들에게도 올바른 노사관을 심어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교장, 교감들은 노동교육과정을 통해 △교원 노사관계의 특징과 쟁점 △교원노동법과 부당노동 행위 △학교운영과 노사관계 사례 발표 △노사관계의 이해와 갈등해결 전략 △선진 교원 노사관계의 이해 △성 희롱 예방 등을 배우고 있다. 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선생님'은 노동교육원 교수진과 외부에서 초빙한 공인 노무사, 법률 전문가, 교육 전문가 등이 맡고 있다. 교육을 마친 교장 ,교감 대다수가 노동교육에 대해 '깊이 있게 배우고 싶다', '다른 교장들에게도 권장하고 싶다', '노사관계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등의 호응을 보이고 있다고 교육원측이 전했다. 대구 현풍초등학교 정재복 교장은 "노동교육을 통해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느꼈고 학생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지도해야겠다고 느꼈다"면서 "아울러 교내 계약직이나 일용직의 권익과 애환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서울 금옥여고 남인숙 교장은 "학교내 선생님들과의 관계를 아직은 사용자 입장이라기보다 교육의 동지로 보고 있다"면서 "교육을 받으며 처음으로 노사관계 차원에서 접근해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노동교육원 안종근 원장은 "올바른 노사관 형성을 위해서는 학교시절부터 균형적인 인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를 위해서는 교장, 교감은 물론 교사들이 먼저 노동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안 원장은 아울러 "교장들이 노조 가입 교사 응대법이나 성희롱 관련 문제 등을 제대로 알아야 갈등을 줄일 수 있다"며 "연말까지는 전국 교장과 교감, 사회과 교사 등 3천여명까지 노동교육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국 중ㆍ고교 및 대학 수천곳을 정보통신망으로 연결해 우주에서 내려오는 미립자를 측정, 우주 탄생의 비밀을 푸는 연구가 추진된다. 이화여대 물리학과의 박일흥.양종만 교수는 2일 서울대 등 전국 15개 대학의 천문학자, 물리학자 등 30여 명과 함께 이같은 연구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국의 중ㆍ고교에 4㎡정도 넓이의 소규모 측정소를 설치한 뒤 이를 정보통신망으로 묶어 거대한 고에너지 우주선(宇宙線 cosmic ray) 측정망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우주선은 우주에서 지구로 쏟아지는 에너지를 띈 미립자로 이들의 기원은 현대 물리학의 미스터리 중의 하나다. 고에너지 우주선을 측정, 연구해 그 기원을 푸는 작업은 향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를 배출해 낼 연구 과제로 꼽히고 있다. 연구진은 현재 일차적으로 서울지역 학교 수백 곳에 우주선 측정소를 짓기 위한 방안을 정부 및 관련 지자체와 논의 중이다. '코리아'(COREA:Cosmic Ray Educational Array)로 이름 붙여진 이 측정망은 서울시내 구축작업이 끝나면 향후 전국 수천 개 학교로 확대될 예정이다. 양 교수는 "이미 북미와 유럽 등에서는 COREA와 같은 우주선 측정망 시스템이 2∼3개 가량 구축되고 있다"며 "우리나라는 초고속 인터넷망 등 정보기술(IT) 인프라가 뛰어나고 학교밀도도 조밀해 사업의 성공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라고 말했다. COREA 측정망은 완공시 국내 첫 지상 우주선 관측 시설로 국내 연구진의 우주 및 물질 연구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 대학 연구진이 측정 시설이 설치된 중ㆍ고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우주선 측정 작업을 진행함으로써 중ㆍ고생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리는 등 교육적인 효과도 함께 얻을 수 있다고 참여 학자들은 설명했다. 참여 학자들은 오는 8월께 전국 중ㆍ고교 교사 50여 명과 함께 'COREA 사업단'(가칭)을 발족시키고 구체적인 측정망 구축 모델을 선보이는 등 본격적인 활동에 나설 예정이다. 고에너지 우주선은 지표면 1㎢의 면적에 1년 동안 겨우 한번 떨어질 정도로 그 양이 적어 지상에서 관측할 경우 넓은 평원에 대규모의 측정 설비를 구축하는 것이 필수다. 그러나 산이 많은 국내에서 측정 시설 부지로 넓은 평지를 확보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실정이다. 양교수는 "각 학교에 소형 측정기를 설치해 전국적인 네트워크로 묶을 경우 지형상의 한계도 극복할 수 있고 학생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도 올릴 수 있어 과학연구와 교육 모두를 챙기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전 미국 뉴욕에 있는 여론조사기관인 'NOP월드'가 전 세계 30개국을 대상으로 주당 독서시간을 조사하여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열악한 독서 문화를 실감할 수 있다. 한국의 독서 시간은 주당 평균 3.1시간으로 조사 대상국 중 꼴찌로 나타났다. 1위를 차지한 인도(10.7시간)는 한국보다 무려 3배 이상 높았으며, 태국(9.4시간)이나 필리핀(7.6시간), 그리고 이집트(7.5시간) 같은 개발도상국들도 한국에 비해서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낮은 독서시간과는 달리, 한국인들이 TV(주당 15.5시간)를 시청하거나 컴퓨터(주당 9.6시간)를 사용하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음악을 듣는 등 전자기기(휴대전화, MP3 등)에 빠져 독서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청소년들이 갈수록 늘고 있어 걱정이다. 그러니 독서 문화가 실종됐다는 지적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 리포터가 거주하는 지역의 공공도서관에는 어린이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 조사 결과를 무색케 하고 있다. 도서관 내에 위치한 어린이 열람실은 책을 읽기 위해 찾아온 아이들로 인해 빈 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비좁은 소파에 걸터앉아 고사리 손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마음까지 풍성해지는 느낌이다. 이처럼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어린이들과는 달리 정작 독서가 필요한 청소년이나 어른들은 갈수록 책과 담을 쌓은 채 지내고 있어 아이들보기가 민망할 따름이다.
충북 영동의 한 산골 초등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학생을 위해 매일 20분씩 수화를 배우고 있어 훈훈한 화제다. 전교생 63명에 불과한 영동 용화초등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지난 4월부터 매일 2교시 수업이 끝난 뒤 인터넷 방송을 통해 함께 수화를 배운다. 이 학교 3학년에 다니는 김훤(9)양을 위해서다. 청각장애 2급으로 말하거나 듣지 못하는 훤이는 지난 2년간 학교생활을 하면서 수업은 커녕 급우들과 의사소통이 안돼 항상 교실 구석에 앉아 그림책이나 뒤적이는 외톨이였다. 올해 이 학교에 지체나 학습장애학생을 위한 특수학급이 만들어졌지만 훤이처럼 장애가 심한 학생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보다 못한 특수학급 담당 박영자(44.여) 교사는 '나 혼자라도 훤이 친구가 되자'는 각오로 한국수화인터넷방송을 통해 수화 배우기에 나섰고 이를 본 동료교사와 학생들이 가세, 전교생이 수화교육을 받는 훈훈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비록 단어 위주지만 수화수업이 시작된 뒤 외톨이 훤이에게 서툰 손짓 몸짓으로 말을 붙이는 친구가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외톨이 생활에 익숙했던 훤이의 내성적인 성격도 차츰 밝아지고 있다. 박 교사는 "아직 초보수준이지만 더듬더듬 서툰 손짓으로 수화를 배우고 있으면 훤이와 사이에 가로놓인 벽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라며 "친구를 알지 못했던 훤이가 머지않아 교우들과 어울려 넓은 운동장을 밝은 표정으로 누비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 학교 교사들은 훤이에게 작으나마 소리를 되찾아 주기 위해 최근 난청전문병원 정밀진단을 받게 한 데 이어 백방으로 재활치료법 등을 모색 중이다.
4~6학년 276명의 어린이들과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2박 3일간 무주종합수련원으로 수련활동을 다녀왔다. 수련활동을 계획하고, 장소를 정하고, 직접 아이들을 인솔해야 하는 교사들에게는 수련활동 자체가 심적 부담이다. 그래도 청소년활동을 오랫동안 맡았었고, 수련활동에 대한 경험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아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수련활동이 어렵다는 걸 이번에 절실히 느꼈다. 어쩌면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고, 그런 이유로 교육활동이 위축될 것이기에 걱정을 하며 문제점을 몇 가지 짚어본다. 첫째, 수련활동비 거출이 예전보다 어렵다. 어쩔 수 없이 수련기관에 훈련을 위탁하다보니 수련비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데 수련비를 납부해야 하는 부모님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요즘같이 경제가 어려운 때에 수련비가 가정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학교에서도 걱정한다. 하지만 수요자가 당연히 납부해야 할 경비를 습관적으로 미루는 극소수의 부형들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둘째, 학교와 교사를 믿지 못한다. 학교 교육과정에 의해 실시하는 수련활동이건만 여러 가지 핑계나 이유를 들어가며 참여시키지 않으려는 학부모가 있다. 아이의 교육상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학부모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지만 그렇다고 학교에서 아이를 수련활동에 참여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담임교사가 수련비를 납부했는데도 참여를 거부해 답답하게 한다. 셋째, 수련활동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자세가 소극적이다. 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는데 잘못이 있다고 지적한다. 어떤 일이든 적극적으로 매달리면 끝이 있고, 성공도 보장된다.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의 어린이들일수록 더 씩씩하고 적극적이란다. 나약한 어린이보다는 자기 자신을 책임지기 위해 매사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어린이를 기르는 교육이 필요하다. 넷째, 책임을 모두 학교나 교사에게 떠넘기는 시스템이다. 어떻든 수련활동 등 학교 행사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교사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어린이들은 활동반경이 넓은데 비해 사고력이 부족하기에 아이들의 신변에 어떤 일이 발생할 줄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 아무리 열심히 교육활동을 했던들 사소한 작은 일에도 불똥이 모두 학교나 교사에게 날아오는 이렇게 대책이 없는 시스템에서 어떻게 교육활동의 활성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교육은 학교와 교사를 믿는 데서 시작된다. 학교와 교사에게 힘을 줘야 교육이 발전한다.
충북에서 교육전문직 진출 여성 교사들의 비율이 해마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일 도교육청에 따르면 올해 공개 전형 시험을 통해 선발한 유치원과 초.중등 교육 전문직 24명 가운데 12명이 여성 교사로 비율이 41%에 이르렀다. 유아교육은 2명 모두 여성으로 선발됐으며 초등도 선발 인원 10명 가운데 절반인 5명이 여성이었다. 지난해도 교육 전문직 선발 인원 32명 가운데 40%인 13명을 여성 교원이 차지했다.
경북도교육청은 대학진학 정보 사이트(http://kbejinhak.net)를 개설, 운영에 들어갔다고 2일 밝혔다. 이 사이트는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대학 진학과 진로 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사이버 상담 활동을 벌이기 위해 개설했다. 주요 내용은 입시 뉴스와 상담, 진학 정보, 입시 자료 등으로 세분해 놓았고 대학진로 지도교사 협의회가 중심이 돼 운영한다. 사이트에 들어 가려면 직접 주소를 입력하거나 도교육청 홈페이지(www.kbe.go.kr)에서 '대학진학정보'를 클릭하면 된다.
우리 교육은 국가의 독점에서 위기가 비롯됐다며 교육의 자유와 자율, 책무성을 강조하는 교육운동단체가 탄생했다. 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이하 교육연합)은 1일 오후 4시 서울 명지빌딩에서 창립식을 갖고 김정수 교사(구미여고 교사), 배호순 교수(서울여대), 조전혁 교수(인천대), 이남정 교장(인천명신여고) 등 4명을 공동대표로 선임했다. 창립 직후 열린 총회에서는 정범모 한림대 석좌교수, 김진홍 두레교회 목사,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김진성 명지대 겸임교수, 김선호 전 경희대교육대학원장 등을 상임고문으로 추대했다. 교육연합은 ▲자유주의교사연대 ▲자유주의학부모연대 ▲자유주의연구자포럼 ▲자유주의교육원로포럼 등의 4개 조직으로 구성되며 운영위원회(위원장 이명희 공주대 교수)를 통해 조율된다고 밝혔다. 조전혁 공동대표는 “교육연합이 뉴라이트의 대표적인 교육운동기구로 뜻을 같이하는 시민들과 아울러 우리 교육을 변화시키고 우리 아이들에게 보다 나은 교육환경과 내용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창립기념세미나에서 이명희 교수는 “자유주의란 근본적으로 학생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하는 교육”이라면서 “그러나 자신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책임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전제했다. 그는 이를 위해 “학교의 자율성, 책무성이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재학 교사는 교육부의 교육독점, 전교조의 각성, 역사교육 왜곡 시정을 요구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날 행사에는 윤종건 교총회장, 박효종 바른사회를위한시민회의 공동대표, 이석연 시민과함께하는변호사들 공동대표 등 각계 인사가 참여했다.
고교 평준화 해제와 고교등급제ㆍ본고사ㆍ기여입학제를 금지하는 '3불 정책'의 폐지 등을 추구하는 뉴라이트 교육단체가 1일 공식 출범했다. 자유주의 교육운동연합(교육연합)은 이날 오후 서울 명지빌딩에서 2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식을 열어 구미여고 김정수 교사(교사 대표)와 인천대 조전혁 교수(일반학계 대표), 서울여대 배호순 교수(교육학계 대표), 인천명신여고 이남정 교장(교육원로 대표) 등 4명을 공동대표로 선임했다. 정범모 한림대 석좌교수와 김진홍 두레교회 목사,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김진성 명지대 겸임교수, 김선호 전 경희대 교육대학원장 등은 상임고문으로 추대됐다. 교육연합은 창립 취지문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정부의 교육통제를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획일적 교육을 강요하는 교육평준화체제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 수정ㆍ보완ㆍ폐지하는 '자유주의 교육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학교교육을 통해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살려나갈 수 있도록 '공교육 정상화운동'을 벌이는 한편 교육의 국민자치제 실현을 위해 학교교육을 수요자 입장에서 바라보고 평가하는 '수요자 중심 교육운동'도 전개하기로 했다. 교육연합은 자유주의 교사연대와 자유주의 학부모연대, 자유주의 연구자포럼, 자유주의교육원로 포럼 등 4개 조직으로 구성됐다. 교육연합 관계자는 "정부는 교육개혁의 목표와 방향을 상실하고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평등주의적 교육정책을 남발해 개개인의 능력과 자유를 무시하고 획일적인 교육을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앞으로 정부에 고교 평준화 및 3불 정책 개선을 요구하는 한편 자유주의 이념 및 가치 전파, 새 교재 및 혁신적 학습방법 개발 등에 나설 계획이다. 창립식이 끝난 뒤 열린 세미나에서 이명희 공주대 교수와 정재학 전남 영암 삼호서중학 교사, 정영광 학부모 대표, 조전혁 인천대 교수 등이 '자유주의 교육의 비전'에 대해 주제발표를 했다.
김진표 교육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1일 "공공기관 이전과 관련해 혁신도시에 공영형 자율 중.고교를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김 부총리는 이날 대구시청에서 기자간담회를 통해 이 같이 밝히고 "공영형 자율 중.고교 설립은 중앙.지방 정부와 이전 공공기관이 공동으로 재원을 조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공영형 자율 중.고교는 혁신도시 구축 이전에 설립할 것"이라면서 "설립 이후에는 지역의 각계 인사가 참여해 학교를 자율적으로 운영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공영형 자율 중.고교는 교장과 교사를 초빙하는 등 최대한 자율권을 인정할 것"이라면서 "공교육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고, 지방으로 이전하는 공공기관의 임직원들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자립형 사립고의 운영과 관련해 "전국 6개 학교를 시범 운영 중인데 이를 곧 평가해 구체적인 문제점을 찾아 보완하겠다"면서 "획일적인 공교육의 문제점도 보완해 사교육 확산을 막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본고사형 논술고사에 대해 "학교생활기록부의 부풀리기 때문에 일부 대학들이 본고사형 논술고사 시행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학교생활기록부의 변별력과 신뢰성을 확보하는데 노력해 본고사형 논술고사가 필요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과 고교간의 학생생활기록부 신뢰성에 관한 워크숍을 계속 열어 학생생활기록부의 신뢰도 확보에 '올인'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밖에 대학의 구조조정에 대해 "대학 통.폐합은 최대한 대학들간의 자율 협정을 존중할 것"이라면서 "시장과 도지사 등이 참여하는 권역별 구조조정협의회를 구성해 대학 구조조정을 합리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는 2일 오전 대구지역 관.학.경제계 인사들과 함께 권역별 구조조정협의회 구성 등에 대해 토론할 계획이다.
충남도교육청은 국립사대졸업자중교원미임용자(이하 미발추) 및 병역의무관련교원미임용자(이하 군미추)를 상대로 지난 한 달 동안 접수을 받은 결과 모두 302명(미발추 134명, 군미추 168명)이 등록했다고 1일 밝혔다. 미발추는 이에 따라 2006-2007학년도 특별정원으로 시행되는 중등교원 공개전형이나 교육대학 편입시험 가운데 한 곳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군미추는 특별채용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군미추 해당 여부가 확인되면 1년 이내에 교원에 특별채용된다. 미발추와 군미추는 1990년 10월 7일 이전에 국립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시.도 교육위원회별로 작성된 교사임용후보자명부에 등재돼 임용이 예정됐으나 1990년 10월 8일 교육공무원법 제11조 제1항(국립사대 졸업생 등 우선 채용)이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에 따라 교원으로 임용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글 | 박하선/사진작가·여행칼럼니스트 위구르족과의 첫 만남 '파인 땅 투르판'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발길을 재촉하다 보면 중국의 서쪽 변방인 '신지앙 위구르 자치구'에 접어들게 된다. 이곳은 황량한 사막지대에 '위구르족'이라는 소수민족의 세계가 펼쳐지는 곳이다. 이들은 생김새가 중국의 '한족'과는 판이하게 다를 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화조차 달라 도저히 중국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한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 닿게 되는 순간부터 마치 중동의 어느 한 지역에 와 있는 듯한 인상을 씻을 수가 없게 되고, 실크로드의 여정이 무릇 익어간다. 이 위구르족들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게 된 곳은 '투르판(吐魯蕃)'이라는 곳이었다. 이곳은 표고가 해면보다 낮은 곳이어서 여름철에는 중국에서 가장 더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곳은 역사의 고장이다. 예로부터 실크로드 상의 천산북로와 남로의 갈림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기원전부터 이 비단길을 오가던 상인들이 물과 휴식을 얻기 위해 이곳 투르판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또 구도의 길에 나선 수많은 입축승(入竺僧)들도 이곳을 거쳐갔다. 이처럼 예로부터 중요한 거점으로 인식되어 온 곳이기에 흐르는 세월 속에서 다양한 민족들의 치열한 쟁탈전이 불가피했던 곳이 바로 이 투르판이기도 하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주변 도처에 흩어져 있는 유적들이 그걸 잘 말해 주고 있으며, 더불어 당시의 영화를 짐작케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교하고성(交河古城)'과 '고창고성(高昌古城)'을 들 수가 있다. 번영의 빛이 소멸한 흙빛 도시 '교하고성' 시내를 벗어나 서쪽으로 13km쯤 떨어져 있는 '교하고성'은 이름 그대로 두 물줄기 사이로 30m나 우뚝 솟은 절벽 위에 터전을 잡은 천연의 요새와 같은 고대 도시를 말한다. 이곳은 실크로드를 오가는데 있어서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으로, 기원전 2세기 전한시대(前漢時代)에 이란계의 '차사전국(車師前國)'이 자리잡기 시작하여 14세기 말 그 번영의 빛이 소멸되기까지 흉노(匈奴), 한(漢), 당(唐) 등의 지배를 거쳐 온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은 온통 흙빛만으로 고요하기만 하다. 성문에 들어서니 벽돌길이 남북으로 일직선으로 뚫려있는 가운데 수많은 폐허들이 그 양옆으로 줄을 지어 서 있다. 그 길이 끝나는 북부에는 주로 사원이나 광장, 또는 저택 등으로 제법 규모가 있어 보이는 것들이 자리하고 있고, 남부에는 서민들의 주거지 흔적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당시 땅속 깊이 파놓은 우물들이 지금도 몇 개 남아 있는데 어찌나 깊은지 그 바닥이 안 보인다. 그 깊이를 점쳐보기 위해 돌멩이를 떨쳐 보면서 하루 종일을 이 폐허 속에 묻혀 지내보지만 지난날은 돌아오지 않는다. 현장법사가 지나간 고대 도시 '고창고성' 또 다른 고대 도시인 '고창고성'은 시내에서 좀 더 멀리 떨어져 있다. 당나라 때 전성기를 누렸던 이곳은 기기 괴괴한 모습의 '화염산'을 배경으로 길이가 5km나 되는 웅대한 성벽을 지니고 있는데, 499년 한나라 사람 '국문태(麴文泰)'가 이곳에 '고창국(高昌國)'을 세웠을 때 그 도성으로 쌓은 것이다. 교하고성이 흙 자체를 조각한 조각건축인 반면 이 고창고성은 흙벽돌을 쌓아 조성했기 때문에 파손이 보다 심해 궁전이나 사원 같은 큰 건물의 잔해만 남아있을 뿐 거의 공터로 남아있다. 이곳 고창고성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남긴 당나라의 고승 '현장(玄裝)'과도 인연이 있던 곳이다. 천축국으로 향하던 '현장'은 당시 '막하연적(莫賀延蹟)'이라 불리던 '고비사막'을 건너는 과정에서 온갖 고충을 다 겪다가 이곳 '고창국'에 도달하게 됐는데, 이때 열렬한 불교 신자였던 고창왕 '국문태'의 간청에 못 이겨 이곳에서 한 달 동안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설법하게 되었다. 또 융숭한 대접을 받고 떠나면서도 '현장'은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려 3년간 공양을 받아 줄 것을 국왕이 간절히 요청하자 그것 역시 받아들였다. 천축국을 두루 둘러보는 동안 십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고창왕과의 약속을 중히 여긴 그는 귀로에도 보다 빠르고 안락한 해로(海路)를 취하지 않고 고난으로 가득 찬 육로를 다시 거슬러 올라오게 되었다. 하지만 도중에서 고창국은 이미 당(唐)에게 멸망되고 국왕 국문태도 죽고 말았다는 소문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은 항상 모든 것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그래서 삼라만상 모든 것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드문드문 나타나는 오아시스 속에서 지금도 위구르족들은 옛 관습대로 살아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황량한 모래벌판과 고창국의 폐허를 굽어보고 있는 화염산만이 옛 모습 그대로인지도 모른다.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베제크릭 천불동' 불꽃이 날기를 천장(天丈)의 높이’라고 표현되면서 소설 '서유기'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화염산. 정말 마귀라도 금방 나타날 것만 같은 괴괴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그 산록을 끼고 돌면 또 하나의 전설이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을 찾게 된다. 그것은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베제크릭 천불동'이 오늘날 초라한 모습으로 지난 역사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뜻을 지닌 이 '베제크릭'은 수나라 시대인 6세기 말부터 14세기까지의 사이에 조성된 불교사원인데, 지금에 와서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57개의 모든 굴이 텅 비어있는 상태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번의 크나 큰 수난을 겪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14세기에 이슬람교를 신봉하게 된 이 땅의 위구르족들에 의해, 또 한 번의 결정적인 것은 20세기 초 독일, 일본, 러시아, 영국 등의 탐험대에 의한 벽화 반출 경쟁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오늘날 이 베제크릭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39굴의 '각국사절도'만이 비교적 깨끗이 남아있을 뿐, 매 굴마다 긁혀나간 벽화의 흔적들만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위구르족의 노력으로 탄생한 사막의 비밀 가는 곳마다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나 유적들이 많아 이곳 투르판 일대를 '역사의 보고'라고 한다. 이처럼 이곳에 많은 유적들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게 된 것은 다양한 역사의 흐름에도 있겠지만, 일년에 평균 강우량 16㎜밖에 안되는 건조한 날씨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지금도 이따금씩 땅속에서 발견되고 있는 '미이라'들이 잘 말해 준다. 그렇다면 이처럼 메마른 땅에서 어떻게 그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으며, 오늘날 '이곳 투르판 사람들은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일게 마련이다. 거기에는 위구르족 선인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던 것임을 이곳에 와 보고서야 비로소 알게된다. 그것은 투르판의 비밀이자 사막의 생명수라고 할 수 있는 '카레스'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막에서 뭐니뭐니 해도 가장 소중한 것은 물이다. 그래서 물이 있는 곳에 오아시스가 생겨나고, 물이 마름으로써 멸망한 왕국도 있고, 물을 잘 지배해 강성한 제국을 만든 나라도 있었다. 이곳 투르판 역시 천산산맥의 눈 녹은 물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사막의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천산의 물이 이들에게 생명을 주진 않았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천산이기에 지상으로 흘러오는 물은 아무리 많은 양이라고 해도 그 대부분이 증발해 버리기 때문에 온통 사막인 이곳을 적시기란 그야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곳 위구르족 선인들은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며 400-500년간에 걸쳐 지하 수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용되고 있는 '카레스'다. 천산 기슭에서부터 시작해 수많은 우물들을 지하로 연결해 오아시스까지 끌어들인 이 '카레스'의 물줄기. 그 총 길이가 장장 3000km나 된다고 하는데 이 엄청난 길이를 모두 손으로 파서 만들어졌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사막 속의 한쪽에서 새로운 카레스가 만들어지고 보수되는 가운데, 투르판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천산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카레스에서 물긷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고 한다.이 카레스 덕분에 이곳 투르판은 온갖 과일이 풍성하다. 그래서 일명 '과일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그 중에서도 특히 '포도'는 이곳 투르판의 특산품으로 여름철에는 이 일대가 온통 포도 넝쿨로 뒤덮인다. 수확기가 되면 집집마다 마련된 건조장에서 포도를 말리는 것이 일이다. 어느 한 곳을 찾아가니 온 가족이 동원되어 사다리를 오르내리면서 포도송이들을 막대 기둥에 걸고 있었다. 위구르족의 평화를 한눈에 엿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건조장에 걸어 놓은 이 포도들은 20일 정도면 건포도가 된다고 하면서 한 바구니의 포도를 내놓는다. 먹고 남은 것은 가져가라는 것이다. 씨도 없이 달콤하기만 한 청포도의 맛에 취하고 후한 인심에 또 취한다. 이래저래 위구르족들의 세계에서 실크로드에 대한 환상은 한없이 이어져 간다. *신비로운 실크로드의 세계! 새교육 7월호에서 만나보세요.
조현호 | 울산 옥현초 교사 귀신들이 만든 돌다리 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현존하는 전국의 돌다리를 찾아가고자 합니다. 삼국유사 편에는 '귀교(鬼橋)'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다리의 감독관은 '비형(鼻荊)'이라는 자인데 아버지 진지왕은 저승세계의 귀신이요, 어머니 도화녀((桃花女)는 이승세계의 생모이므로 비형은 반신랑(半神郞)의 독특한 신분입니다. 비형은 밤이면 귀신들과 어울려 수작을 부리곤 했는데 이를 안 진평왕이 비형으로 하여금 신원사 북쪽 개천에 돌다리를 놓도록 명령을 하지요.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하룻밤 사이에 귀신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다리를 완성하고 맙니다. 기록상 우리나라 최초의 돌다리는 바로 귀신들이 만들었던 것입니다. 불가의 다리 불가(佛家)에서는 세상의 중심에 수미산이 우뚝 솟아 있다고 합니다. 그 수미산에 부처님이 계십니다. 인간들이 수미산에 가려면 8산9해(八山九海)를 넘어야 겨우 수미산 어귀에 이르게 되고 그 수미산을 사천왕을 비롯한 여러 권속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습니다. 절집들이 깊은 산중에 입지한 경우가 많은 것은 척불(斥佛)이나 고유의 산신신앙과도 관련이 있지만 그보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의 우주관이 앞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산속에 있는 절들은 대개 계곡을 끼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필연적으로 다리를 건너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과정은 물을 건넘으로써 차안(此岸)의 세계에서 피안(彼岸)의 세계로 접어들고 해탈, 극락의 세계로 진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가에서는 '월천공덕(越川功德)'이라 하여 다리를 놓는 행위를 수행의 과정으로도 봅니다. 다리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도와 복전(福田)을 확보함으로써 깨달음에 더 빨리 이를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수행자인 스님들이 월천공덕으로 쌓은 다리 중 대표적인 다리가 벌교에 있는 ‘홍교(虹橋)’입니다. 벌교(筏橋)라는 지명은 옛날에 뗏목다리가 있어서 불린 이름입니다. 조선 숙종 44년(1705)경에 선암사의 초안선사가 이 다리를 놓았다고 하며 영조 13년(1737)에 개축하면서 3칸의 무지개다리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다리의 내력이 담긴 석비가 많이 남아있어 그 가치를 높여주고 있습니다. 과학과 미학의 조화 - 무지개다리 무지개다리를 ‘홍예교(虹霓橋)’라 일컫습니다. 주로 궁궐이나 사찰 다리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견고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석재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무지개 모양으로 양쪽에서 쌓아가다 최종적으로 이맛돌[key stone]을 끼우면 완성됩니다. 홍예교의 견고함은 바로 이 이맛돌에서 비롯하는데 이맛돌이 빠지지 않는 한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위에서 가하는 힘을 좌우로 분산시키기 때문에 붕괴 위험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과학의 힘에다 선경(仙境)에나 등장할 듯한 미학이 조화를 이룬 쾌거라 하겠습니다. 무지개다리라 하면 보물 제400호 선암사 ‘승선교(昇仙橋)’를 많이 떠올립니다. 승선교의 아름다움은 뒤에 배경으로 따라오는 강선루(降仙樓)가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신선이 타고 오르는 무지개다리와 신선이 내려와 머문다는 집의 조화가 있기에 그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토함산이 있기에 함월산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강원도 고성 거진에 자리한 건봉사에도 ‘능파교(凌波橋)’가 있습니다.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데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 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고 합니다. 그 규모는 폭 3미터, 길이 14.3미터,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미터이며, 다리의 중앙부분에 큰 아치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축조하여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보존상태도 양호하고 우리나라 돌다리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남 창녕 땅 ‘영산 만년교(萬年橋)’는 이전의 나무다리가 가진 불편함을 없애고 천 년 동안 변하지 않는 돌로 다리를 만들어 오랫동안 보존하자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반원형 홍예는 영산 석빙고가 자리한 상류에서 흘러오는 개천과 어울리면 완벽한 원을 만들어 가히 환상적입니다. 조선시대 1780년에 석공 백진기가 가설하고, 1892년 4월에 영산현감 신관조가 석수 김내경을 시켜 다시 지었습니다. 전남 여수의 흥국사 홍교, 강진의 병영성 홍교와 진도 남박다리 또한 무지개다리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돌을 나무처럼 잘라 뚝딱뚝딱 전라남도 함평군과 나주시를 가르는 고막천 위에 놓인 고막천 석교는 현지인들이 ‘똑다리’ 또는 ‘떡다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고려 원종 14년(1723)에 무안 승달산에 있는 법천사의 도승 고막대사가 이 다리를 눈 깜짝할 새에 도술로 ‘똑딱똑딱’ 하여 ‘떡하니’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다리가 있는 고막리는 행정구역으로 함평군 학교면에 속합니다. 고막마을이야 고막대사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인 것은 추론할 테고 학교란 지명이 재미있지요? 학교(鶴橋)는 ‘학다리’를 말합니다. 삽교(揷橋)를 ‘삽다리’라고 이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 다리는 무지개다리와는 달리 돌을 나무 다루듯 잘라서 교각 및 상판으로 꾸민 목조건축물의 양식을 보이는 돌다리입니다. 지난 2001년도 보수공사시 바닥 기초 나무 말뚝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최소한 고려 말, 조선 초로 밝혀져 축조연대가 상당히 오래된 돌다리임이 증명되어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나주평야가 인접하여 한 때 각종 물산을 실은 수많은 배들이 드나들던 번화한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화려함을 잃었지만 조수간만의 차와 홍수 등 모든 악재를 이겨내고 수백 년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1980년에 고막마을 사람들이 세운 유적비에 이 다리에 대한 향수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 서술컨데 이 석교는 옛날의 국도가 나주함평의 군계(郡界)를 흐르는 고막천을 통과하는 데에 가설된 것인데 철도와 신도로가 석교의 바로 전방에 개통된 1910년대만 해도 영산강을 오르내리는 선박들이 바로 교하(橋下)에 정박되어 있었음으로 미루어 그가 교통산업상 중요한 일역을 담당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고도화되는 문명으로 급속히 변모되는 세태는 석교로 하여금 그 무거운 짐을 후배 교량들께 물려주게 하였으니, 이제는 면전에서 들리는 갖가지 차량의 경적과 굉음을 푸념삼아 귀에 익히며 볏단을 나르느라 조심스레 아끼며 밟고 지나가는 농부의 발자국에도 긍지와 애착을 느끼고 그것으로써 자위 자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승지(勝地)는 불멸일세. 이 석교가 고려조 이래 수백 년간에 쌓아올린 공적과 아울러 고막스님의 이름은 고막마을과 고막강으로 흐르는 강물의 영원함과 같이 언제까지나 이 나라 이 고장을 지켜보리라…. 한편, 충청도 옥천 땅에 있는 ‘청석교(靑石橋)’도 목조건축 양식을 볼 수 있습니다. 바닥에 긴 장대석을 놓고, 그 양 끝에 네모진 돌기둥을 세워 교각(橋脚)을 만들고 그 위에 넓고 긴 상판석을 얹어 두었습니다. 고려 시대 강감찬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모기 때문에 백성들이 괴로워 하고 있음을 보고 모기에게 호령을 하여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원래 군북면 증약리에 있었는데, 보존상의 이유로 지난 2001년 4월 옥천 향토전시관 앞 인공못에 박물(博物)이 되어 서 있습니다. 근대화에 제 할일을 잃어도 미내다리[渼奈橋]는 금강지류인 강경천에 자리해 있습니다. 옛 비문에 의하면 강경의 석설산과 송만운이 처음 발의하고 주동이 되어 모금한지 일 년도 되지 않아서 관의 힘을 빌리지 않고 다리를 완성하였다고 하네요. 특히 이 작업에는 승려들이 협조해 주었다고 합니다. 원래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바위가 보인다 하여 ‘조암교’ 혹은 ‘미교’라고 일러오다가 조선 영조 7년(1731)에 지금의 다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 다리를 찾으면 다리가 냇가를 가로질러 있는 것이 아니라 강경천의 물줄기와 평행하게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다리가 물길과 평행하게 놓여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논산문화원 관계자의 답변을 듣고야 수긍이 되었습니다. 1931~1932년 일제강점기에 높은 제방을 쌓아 하천정비를 하는 과정에서 당시 여럿이던 물길을 정비하면서 다리 아래로 흐르던 물길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인근 원목다리[院項橋]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목다리는 물길을 가로질러 제 위치에 있지만 하천정비로 인해 하천의 폭이 넓어지면서 현재 다리로는 물이 들지 않고 옆으로 물이 흘러갈 뿐입니다. 다리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것이죠. 식량의 보고인 금강유역을 넘다들며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을 미내다리와 원목다리는 자신보다 훨씬 키 큰 제방 아래에 웅크린 채 옛 영화를 추억할 뿐입니다. 투박한 막돌이 모여 미려한 농다리가 ‘생거진천(生居鎭川)’은 충북 진천 땅이 살기가 좋은 고장임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진천 땅 세금천에 ‘농다리[籠橋]’라고 불리는 돌다리가 있습니다. 지역 향토지에 따르면 고려시대 임연장군이 그의 전성기에 고향마을에 쌓았다고 하는데 기록으로 보았을 때 현존 최고의 석교라 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런데 이 다리의 축조 연대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태권도 공원을 유치하기 위해서 과열경쟁을 벌이다 보니 진천이 김유신의 탄생지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이 농다리가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 장군이 고구려로부터 낭비성을 되찾을 때 가설한 다리라고 주장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던 것입니다. 하류에는 굵직한 돌을 바닥에 깔았는데 상류로부터 몰려오는 물살의 저항을 1차적으로 줄이는 역할을 해줍니다. 그 길은 또한 소와 같은 가축들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로도 활용됩니다. 항공사진을 통해 본 전체적인 생김새는 수심이 깊은 곳은 하류 쪽으로 돌출해 있고 수심이 얕은 곳은 상류 쪽으로 주춤한 곡선형입니다. 마치 교각과 판석이 어울려 배다리[舟橋]의 모습을 보는 듯하고 혹은 지네가 몸을 비틀고 있는 듯합니다. 특히, 붉은 빛이 나는 사력암질의 돌들은 다른 다리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멋을 풍기는데 결코 단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은 돌의 재질로 보아 장구한 세월을 견뎌온 것이 신기할 뿐입니다. 제대로 정련되지 않은 투박한 막돌이 모여도 이렇게 미려한 돌다리가 만들어지는구나, 농다리에 가면 새삼 길들여지지 않은 것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수한 형태의 돌다리 화성의 아름다움 중에서도 특히, 화홍문 및 방화수류정과 용연이 함께 어울린 풍광은 ‘용지대월(龍池待月)’이라 하여 화성의 백미라 일컫지요. 이중 화홍문은 본래 수문다리의 역할에다 건축물의 용도를 더한 대표적인 누교건축물(樓橋建築物)입니다. 화홍문의 홍예는 모두 7칸인 데 일곱 색깔 무지개를 형상화한 듯합니다. 수문을 통해 쏟아지는 물보라에서 피어나는 무지갯빛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팔경의 하나로 치고 있습니다. 3보사찰의 한 곳인 순천 송광사에서는 누교건축을 두 군데서 볼 수 있습니다. 절로 들어가는 초입에 계곡을 가로질러 ‘청량각(淸凉閣)’이 있습니다. 이 다리를 지날 때면 아래로 조계산의 맑은 물과 정기가 흘러 청량감이 몰려옵니다. 또 한 곳은 대웅보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건너야 하는 ‘삼청교’라는 무지개다리와 그 위에 세운 ‘우화각’입니다. 우화각은 18세기 초의 건물인데, 입구 쪽은 팔작지붕이고 나가는 쪽은 맞배지붕을 하는 특이한 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불국사에 있는 연화교(蓮華橋)와 칠보교(七寶橋),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는 국보로 지정된 계단형 다리입니다. 2단의 석단(石壇)과 함께 축조되었으며 연화교와 칠보교를 지나면 안양문(安養門)을 통하여 극락정토에 들어갑니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지나면 자하문(紫霞門)을 통하여 불국토에 들어갑니다. 계단 형태의 돌다리를 건넘으로써 극락과 불국토라는 피안(彼岸)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깨끗한 청계천을 기원하며 청계천 복원을 둘러싸고 말이 많습니다. '맑은 물'이라는 청계(淸溪)를 복원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인데 맑지 못해 한몫 챙기려는 자들이 있어 말썽입니다. 깨끗한 정치는 깨끗한 교육이 있을 때 필요하지 않을까요. 다음 호는 옛 다리를 찾아가는 마지막 여행으로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서울지역의 옛 다리를 만나고자 합니다.
박경민 | 역사칼럼니스트 cafe.daum.net/parque 폴리스의 형성과 발전 에게 문명은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크레타 섬이 중심이 된 BC 3000년에서 BC 1400년까지의 크레타 문명 또는 미노스 문명이고, 후기는 BC 1400년부터 BC 1200년까지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와 티린스 혹은 소아시아 트로이 중심의 미케네 문명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을 크게 이오니아인·아카이아인·도리아인으로 나눌 수 있는데, 후기 에게 문명은 미케네 문명으로 그 맥을 가까스로 이었으나 이미 BC 12세기 초에 이동한 이오니아인·아카이아 인과 달리 가장 늦게 남하한 도리아인들이 펠로폰네소스를 정복하면서 지중해로 진출하더니 먼저 남하한 그리스인들의 문명을 차례차례 파괴하면서 에게 해의 섬들을 차지하였다. 즉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발칸반도 일대에 흩어진 그리스인들은 BC 8세기부터 지리적 조건, 특히 교통의 요지를 골라 집단거주(시노이키스모스)를 시작하였으며 이렇게 해서 생겨난 도시를 '폴리스'라 하였다. 폴리스는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서 아크로폴리스(언덕)와 아고라(광장)가 설치되었으며 주위에는 성벽과 농지가 펼쳐져 있었다. 이렇게 그리스인들은 폴리스라고 하는 비교적 많은 소규모 도시국가를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형성하면서 고도의 창의성을 발휘하여 서양 최초의 문화를 창조하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대 동방(오리엔트)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해서 그들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문화를 가미한 것이었다. 그러나 창의성이 강한 그리스인들은 인간과 사회의 원리를 철학적으로 사고하여 예술과 철학·역사·정치 등 각 분야에 활용함으로써 역동적인 문명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는 그리스인들의 정치·경제·사회 생활의 기본적인 요소이며 배타적 단위였다. 폴리스에는 어김없이 한 복판의 산언덕에 아크로폴리스를 만들어 유사시에는 일종의 피난처(대피소) 구실을 하였으며 성안에는 그리스인들이, 성 밖에는 외지인들이 거주하였는데 그리스 본토에만 100여 개가 넘었고 식민지의 그것까지 합치면 1000개는 족히 넘었을 것이다. 폴리스는 상호간 정치적 지배관계가 전혀 없는 자주 독립적 사회로 전체적인 정치적 통일성이 없었으나 같은 언어와 종교(올림포스 신앙), 그리고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념적 유대감으로 올림픽 경기 등을 통해서 그들의 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그리스인들의 모험심 처음에는 귀족정치가 행하여졌지만 나중에 일반시민(자작농민)의 사회적·경제적 대두에 의한 발언권이 세어지면서 민주정치로 바뀌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크레타가 에게 해를 중심으로 해상권을 장악한 이래, 아테네가 전면에 등장한 BC 8∼7세기 무렵부터 그리스인들은 식민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리스인들이 식민지 개발에 열을 올린 이유는 소수 귀족들의 토지독점으로 영세농민이 증가하였다는 점인데, 이 말은 귀족들이 마음을 고쳐 토지의 독점을 포기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보는 편이 빠르다는 판단에서이다. 더욱이 폴리스 자체의 성장과 발전은 인구의 집중과 증가를 가져왔으며 따라서 적절한 인구의 이동이 불가피했으며 도시의 번창과 시장확대는 각 폴리스에서 생산된 상품을 내다 팔 대상 지역으로서 식민지가 필요했고, 정치적 불만세력이 식민지를 통해서 탈출구를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노렸다는 점을 들 수 있겠지만 그리스인 특유의 모험심, 다시 말해서 배를 타고 나가면 바다 저편에 뭔가 있다는 호기심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르고스 원정대 이야기'가 비록 허구적인 전설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에게 있어서 최초의 해외원정이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는 데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인들이 해외로 진출하여 많은 식민지를 건설한 것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황금의 양가죽'을 바다로 진출하여 획득한 일종의 전리품이라 전제한다면 당시 의외의 성과가 황금의 양가죽이라고 바꾸어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식민지는 지중해와 흑해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는데, BC 600년대에는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 그리스 식민지가 넓게 퍼짐으로써 그리스의 경쟁상대로는 오직 페니키아 인이 세운 식민시(植民市) 카르타고 밖에 없었다. 그리스의 정치적 변화 소위 민주정치의 원조는 그리스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민주정치가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란 가능하다면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흔들고 싶어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으면 독재정치를 펼 수 없다. 소위 민주정치의 원조라고 하는 그리스에도 귀족·평민·노예의 구별이 있었으며 기원전 8세기경부터 왕정이 행하여졌다. 그리스 역사에서는 이 시기(BC 1000∼800년)를 '왕정시대'라 하는데 소위 '호메로스 시대'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당시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그리스에서는 오리엔트, 또는 중국의 황하지역과 같은 치수사업은 필요 없었기 때문에 왕정시대라 하더라도 전제적 군주제는 아니었다. 치수사업을 위한 대규모 노동력과 이를 추진하기 위한 강력한 군주의 통치력이 필요 없었다는 말이다. 농업과 목축이 주된 산업이었으며 BC 900년경에는 동방과의 교역을 통해 페니키아의 문자(알파벳)가 전해졌다. 기원전 7세기까지는 귀족들이 군사와 국방의 중심을 떠맡는 집정관(아르콘)으로서 정권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과두정시대(寡頭政時代 : BC 800∼550년)라고 한다. 그 이유는 전쟁에 있어서 기병의 역할이 종전보다 강화되었다는 점과 귀족 가운데 일부는 전쟁에서의 전리품과 식민으로 재물을 끌어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며 식민시의 건설과 교역, 산업분야의 발전이 이루어짐으로써 귀족의 발언권이 강화된 것이다. 다음은 최고의 정치권력을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은 독재자가 국정을 좌우하는 참주정치시대(僭主政治時代 : BC 660∼500년)가 이어졌는데, 그 배경으로 부유한 중산층의 대두와 그로 인한 계급투쟁, 기병을 대신한 중무장 보병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참주에는 물론 폭군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18세기의 계몽군주와 같았으며 대부분 귀족출신이었고 인심을 얻어 자유시민(평민)과 결탁하여 귀족세력을 억압했기에 참주=독재자=폭군으로 일방적으로 매도당했다는 점을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다. 최초의 참주는 BC 6세기 후반 아테네의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 BC ?∼527)였다. 그는 아테네와 미묘한 관계에 있었던 메가라와의 전쟁에서 명성을 얻어 민중의 지지 속에 BC 560년에 참주가 되었다. 민중을 배경으로 소수 귀족을 억누르니 정권을 빼앗긴 귀족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합법적이며 독재였던 것이다. BC 7세기 오리엔트의 첫 통일을 이루었던 아시리아가 붕괴하고 네 나라로 나뉘어졌는데, 그 가운데에서 리디아에서 화폐가 발명되자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그리스의 폴리스에서도 화폐를 주조하여 부를 이룬 평민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때 많은 도시국가들이 민주정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를 민주정시대(民主政時代 : BC 500년 이후)라 한다. 재산을 모은 평민들이 자신의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여 중무장 보병부대를 편성하자 그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화되었고 사회 기득권 층도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활발한 해상활동을 하던 아테네가 가장 전형적이었지만 이러한 그리스의 정치적 발전과정은 주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아티카 지방과 트로이젠을 비롯한 폴리스 집단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와 스파르타 계열의 폴리스는 이러한 정치적 변화과정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군사 독재주의로 일관하였다. 민주정치 속의 불평등 BC 508년, 민주정치의 봄이 찾아 왔다. 아테네의 민회(民會)가 입법·사법·행정상 최고기관이 됨으로써 민주정치의 서막이 올라 페리클레스(Pericles : BC 461∼429년)시대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민회는 대의제(代議制)가 아니라, 성년 남자 자유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직접 민주정치였다. 스파르타에 비하면 개방적이며 민주적이었지만 아테네의 민주정치도 노예의 피땀 위에 이루어졌고 여성의 정치참여가 배제되어 있었다. 고대 모계사회에서 가부장적 부계사회로 넘어온 데다가 정치적 중심이 왕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도시국가(폴리스)체제가 되자,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주신(主神) 제우스를 폴리스의 수호신이며 각 가정에서는 가장(家長)을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제도의 수호신으로 설정하여 이를 파괴하려는 자는 어느 누구도 형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남성 우월적 사회에서 당시의 자유 남자시민은 노동과 집안 일에 구애받음 없이 정치에 참여하고 문화활동을 즐길 수 있었으며 오직 사회에 책임을 지는 것은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아테네조차 남·녀의 성차별은 심각하여 아버지들이 아이의 양육여부를 결정하였다. 만약 '이 아이는 키우지 않겠다'고 하면 아이를 폐기처분하였다. 다행히(?) 선택된 자녀들은 전적으로 어머니가 맡았는데 남자아이는 7세까지, 여자아이는 결혼할 때까지였다. 일곱 살이 된 사내아이는 어머니의 손에서 떠나 교사에게 맡겨져 교육을 받았는데, 남자아이의 교육 중점은 '건강한 신체, 건전한 정신'이었지만 여자아이는 결혼할 때까지 '요조숙녀(窈窕淑女) 되기'에 모아졌다. 이러한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다른 폴리스에도 확산되어 페르시아 전쟁 때에는 자기 돈으로 무기를 살 수 없었던 무산계급 시민들은 몸으로 때우는 전투에 참가하여 자발적인 힘을 유감 없이 발휘하였다. 그들은 전투함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역할을 하였고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돈 없다고 우리를 무시하면 다시는 힘든 중노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발언권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민주사회는 의무가 있는 곳에 권리도 따른다는 점인데, 전제적인 독재국가에서는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음으로써 자발적인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없다. 우선 바로 눈앞에 있는 채찍만을 두려워할 뿐이다. 아무튼 남자로서 군대가고 전쟁에 참전해야 비로소 진정한 민주시민이라는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었다. 거꾸로 가는 스파르타 스파르타는 맨 마지막으로 남하한 도리아 인들로 구성된 도시국가였으며 그들이 폴리스를 건설하기 전인 BC 1200년경에 미케네 문명(후기 에게 문명)을 멸망시키기도 하였다. 즉 도리아 일파의 정복에 의해서 탄생한 폴리스가 스파르타였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스파르타는 다른 그리스의 일반적 정치적 발전과정과는 전혀 별개의 소수 독재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물론 스파르타의 시민들도 불만을 가졌겠지만 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고 충성의 대상인 권력에 주눅이 들어 으레 그러려니 했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라코니아 또는 라케다이모니아 지방의 주요도시로서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북동쪽과 서쪽은 산악지대가 개방을 가로막아 지역적 폐쇄성이 결국 보수 과두제적 왕정에 머물러 있게 한 요인으로 작용함으로써 전제적 군사 독재로 일관하게 되었으며 참정권을 가진 시민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스파르타의 사회적 특성은 자유로운 창의성과 개성의 발휘를 억압함으로써 시민의 각성과 정치참여를 위한 대중적 투쟁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산계층이 나오지 않았으며 이러한 군국주의적 성향은 곧 문화침체로 이어졌다.
감사원은 30일 “교육당국이 저출산 실태를 감안하지 않고 초등교를 지나치게 많이 건설하고 초등교원을 과다 배출해 막대한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고 지적해 논란이 일고 있다. 감사원은 교육부 및 16개 시·도교육청을 대상으로 실시한 ‘학교시설·교원양성 등 교육재정 운영실태’에 관한 감사결과 “저출산 현상에 따라 2015년에는 학생수가 현재의 3분의 2 수준으로 떨어져 현재의 초등교 시설만 유지해도 학급당학생수가 선진국 수준인 22명으로 준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도시계획이 완료된 도시권 과밀학급 지역은 학교부지 확보 난으로 학교신설이 어려워 학급수 증가도 한계에 이른다”며 “결국 학급수 증가둔화로 교사 수요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저출산과 가구당 인구 감소현상을 무시한 채 초등교를 신설해 잉여교실이 2001년 2655개에서 지난해 6042개로 늘었고 특히 경기도가 3802개에 달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감사원은 당장 내년부터 11개 교대 등의 입학정원을 현행 6200여명에서 4천명으로 감축할 것을 권고했다. 아울러 감사원은 “우리 실정에 맞는 적정 학급당 학생수를 설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감사원은 “콩나물 교실이라 불리던 과밀학급 상황이 해소된 시점에서 학업성취도와의 관련성, 교육재정 여건 등을 감안해 적정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 논리로 감사원은 최근 2년간 학급규모에 따른 초등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를 비교했다. 감사원은 학급당학생수 35명 이상, 30~34명, 29명 이하 세 그룹을 비교한 결과, 29명 이하 그룹이 대도시․중소도시․읍면지역 모두에서 교과점수가 가장 낮았다고 분석하며 “이런 요인을 고려하지 않은 확대 일변도의 학교신설 사업은 곤란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감사원의 이런 지적은 해괴한 논리다. 경기 S고의 한 교사는 “각 지역 안에서도 교육환경이나 학력이 떨어져 진학을 꺼리는 곳은 학급당학생수가 적기 마련”이라며 “감사원의 주장은 원인과 결과를 바꿔 해석한 엉터리 논리”라고 말했다. 경기도에 잉여교실이 많다고 지적한 부분에 대해서도 경기 K초 교감은 “전국에서 학생은 몰려들고 이에 따라 학급당학생수를 줄이려는 7․20사업으로 학급은 늘렸지만 정작 그 학급을 맡을 교사는 배정해 주지 않았다”며 “그렇다고 그 교실을 특별교실로 꾸밀 예산도 배정해주지 않아 놓고 잉여교실 운운하는 것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교총은 “감사원은 통계청 저출산 추이 자료에만 의존함으로써 정부의 출산장려정책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초등교사의 수업시수를 줄이기 위해 현재 50%에 불과한 전담교사 확충과 상담교사, 사서교사, 소규모 학교의 상치교사 해결 등등 추가적인 교원 충원 규모를 제대로 따져봤는지 묻고 싶다”면서 “저출산을 고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변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최소한 2015년까지 교사와 학생에게 열악한 교육환경을 감내하게 해야 하느냐”고 지적했다.
한국댄스스포츠교원연수원(원장 김남현 서울 청원고 교사)은 여름방학을 맞아 제41차 댄스스포츠 직무연수를 연다. 초급과 중급 등으로 나눠 진행되며 16일까지 신청가능하다. 문의=02)2242-3873, www.teacherdance.com
김동수 충남 서령고 교사는 지난달 예산문화회관에서 실시된 제10회 전국청하백일장에서 ‘독도’로 산문부문 장원을 수상했다.
교육당국이 저출산 실태를 감안하지 않고 초등학교를 지나치게 많이 건설하고, 초등교원을 과다배출해 초등학교 및 초등교원의 공급과잉현상이 발생하면서 막대한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감사원은 30일 교육인적자원부 및 전국 시·도교육청을 대상으로 실시한 `학교시설·교원양성 등 교육재정 운영실태'에 관한 감사결과를 발표하고 교육부에 개선책 마련을 권고했다. 감사결과에 따르면 저출산 현상에 따라 학생수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10년 후인 2015년에는 현재의 3분의 2 수준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데도 불구, 교육당국은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채 지난 60년대 도입한 초등교원 입학정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교육부는 현재 매년 6200여명 규모의 초등교원을 양성하고 있는데 초등학생 수가 지난해 412만명에서 2010년에는 317만명으로 줄어들 예정이어서 초등교원을 큰폭으로 줄이지 않는 한 공급과잉과 함께 심각한 임용난이 발생할 것으로 분석됐다. 감사원은 이에 따라 당장 내년부터 11개 국립교대 등의 입학정원을 현행 6200여명에서 4천명으로 35% 정도 감축토록 하고 특히 제주교대의 경우 입학정원이 현재의 3분이 1 수준인 64명이 적절한 만큼 타대학과의 통합방안도 강구할 것을 권고했다. 교육부는 또 저출산과 가구당 인구 감소현상을 무시한 채 산출근거가 불분명한 수치를 적용해 학생수를 산출, 결과적으로 초등학교 잉여교실이 2001년 2655개에서 지난해 6042개로 3년만에 128%(3387개)나 증가한 것으로 확인됐다. 2002∼2003년 전국 택지개발지구에서 개교한 초등학교중 빈 교실이 있는 학교는 총 417개였다. 구체적인 사례로는 경기도 용인교육청의 경우 지난 99년 죽전지구 초등학교 신설계획 수립시 가구당 초등학생수가 0.318명인데도 0.416명으로 산출하는 바람에 지난 4월 현재 개교한 8개 초등학교 전체 교실의 44%인 122개가 잉여교실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153억원이 투입된 용인죽전지구내 한 초등학교의 경우 고작 8명으로 개교한 것으로 파악됐다. 감사원은 2008년까지 신설예정인 택지개발지구내 260개 초등학교 가운데 21개에 대해서는 신설을 재검토하고 나머지 239개에 대해서는 교실규모 등을 조정토록 권고했다. 중등교원 배치기준도 불합리해 교사들 간의 불평등이 발생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실제 3학급짜리 소규모 중학교가 95년 168개에서 지난해 479개로 크게 늘어나면서 학교에 따라 중등교원들의 주당 수업시간이 9시간에서 30시간까지 큰 차이가 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중학교 실업과목의 주당 수업시간이 지난 54년 15시간에서 지난해 8시간으로 대폭 축소됐는데도 실업과 교사 배치규정은 과거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시급히 개선돼야 할 것으로 지적됐다. 남일호(南一浩) 사회복지감사국장은 "내년에 국립교대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졸업할 때면 전체 6천200여명 가운데 2천200여명이 임용을 받을 수 없게 된다"면서 "2007년부터 저출산 현상이 가시화될 예정이기 때문에 초등학교와 초등교원을 현실에 맞게 축소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새 학교, 새 학년,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 서로에 대한 기대감으로 하루하루 생활하고 있을 때 학급이란 공동체 주변을 맴돌며 웃음을 잃은 채 친구들의 관심 밖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아이가 있었다. 4월이 되자 아이들의 호소가 줄을 이었다. 발을 걸었다느니, 때렸다느니, 물건을 감추었다느니... 평균 이틀에 한 번씩 상담을 하였건만 5월이 다 지나갈 즈음에도 그 어떤 행동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생각다 못하여 학급어린이들과 함께 6월 한 달은 준혁이가 달라지기를 위하여 함께 힘을 모아 보자고 하였다. 다음은 “FOR 준혁”이란 제목으로 위즈클래스 '우리 학급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렸던 글이다. 선생님이 처음 여러분들을 만났을 때 꿈에 부풀었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하얀 도화지에 어떤 그림을 그려 나갈까 생각하면 마구 가슴이 뛰었지요. 3월이 지나고 4월이 지나고 5월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과 함께 지내 온 날들이 너무나 행복하였어요. 체육대회, 학예회 등 큰 행사를 너무도 의젓하게 척척 치러내는 여러분들이 대견스럽기도 하였고 여러분들이 일기장이나 쓰기 책, 또 글짓기를 하면서 순진하고 정직한 글들이 선생님을 감동시키는 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 이예요. 그런데 마음 한 구석 늘 편치 않는 일이 있었답니다. 바로 준혁이 때문이었어요. 준혁이는 이런 모든 일들에 주인공이 되지 못하였어요. 언제나 혼자 관객인양 바라보고만 있었죠. 체육시간에만 관심을 조금 보일 뿐 책과 공책 연필을 아예 가지고 오지 않았어요. 주간학습계획에 준비물이 명시되어 있지만 가지고 올 때가 없었어요. 간신히 리코더를 마련하고 막 리코더 연습이 시작되어 친구들이 재미있게 아름다운 가락을 만들어 갈 때도 준혁이는 악보를 보지 않고 운지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혼자 아무렇게나 불어서 이상한 음을 내곤 하였어요. 준혁이는 '집중'이란 단어와 아주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미술시간이나 과학시간에 전담선생님께서 수업하고 나가시면서 "선생님, 준혁이 어떻게 해요? 수업할 생각을 안하고 멍하니 앉아 있어요." 하고 걱정스럽게 말씀 하시곤 하셨어요. 전담시간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나 봐요. 선생님 머릿속에는 늘 준혁이 생각밖에 없었어요. 어떻게 하면 멀리서 선생님을 보면, “선생님!“ 하고 달려오게 할까? 어떻게 하면 아침에 선생님을 만나면, ”선생님,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면 ”안녕?“ 하고 웃으면서 인사를 하게 할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 학급 안으로 들어와서 함께 재미있게 생활하도록 할까? 하고 말이예요. 언젠가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했던 말을 기억할 거예요. 준혁이가 머리가 참 좋은 아이라고... 여러분들도 그 말에 다 동의를 하였어요. 준혁이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아이였어요. 그런데 따로 불러서 늘 주의를 주면 입으로는 “네.“ 하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늘 먼 산만 바라보고 전혀 달라지는 기색이 안보였어요. 오늘 드디어 선생님이 선포를 했답니다. "FOR 준혁!“ (준혁이를 위하여!) 내일 여러분들이 우리 교실을 들어오면 “FOR 준혁!” 이란 카드 6개를 발견할 거예요. 그것은 그냥 붙여놓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과 선생님이 준혁이를 위하여 6월 한 달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줄 공책 하나씩을 준비하라고 했어요. 거기에 일기장처럼 매일 한 줄씩 준혁이를 위하여 한 일을 적어보는 것 이예요. 준혁이도 여러분들의 관심과 사랑을 읽는 한 앞으로 많이 달라지리라고 생각해요. 분명히 달라질 수 있어요. 눈을 한 번 만 준혁이에게 돌려보세요. 그리고 준혁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다가가서 얘기를 나누어 보세요. 준혁이가 교실 밖의 세계에서 교실 안의 세계로 돌아오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요. 모두모두 할 수 있죠? 우리 함께 외쳐요. 준혁아, 사랑해! “FOR 준혁!”을 선포하고 반 전체가 힘을 모은 한 달. 우리 반 아이들은 준혁이의 필통을 열어보고 연필이 없으면 연필을 깎아서 넣어주고 지우개가 없으면 지우개를 넣어주는 등 준혁이의 필통에 관심을 가졌다. 공책을 꺼내지 않고 앉아 있으면 자기들이 여분으로 가지고 다니던 공책을 주고 틈틈이 가방을 열어 책도 정리해 주며 준비물을 안 가져 왔으면 함께 나누어 가지기도 하였다. 수업시간에 과제가 끝난 아이들은 준혁이에게 가서 부족한 부분을 도와주기도 하고 하루 전 준혁이 집에 전화를 걸어 준비물을 확인시켜 주기도 하였다. 전에는 준혁이가 조금만 툭 쳐도 와서 이르거나 울거나 하던 아이들도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웃어 주었고 매일 매일 써서 준혁이와 함께 읽어보는 “FOR 준혁!” 공책에 어떤 아이는 자기 전에 준혁이가 달라지기를 위하여 기도를 한다고 써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준혁이가 웃기 시작했다. 그것도 소리 내어 활짝! 천사의 모습이 따로 없었다. 그렇다! 준혁이는 대화와 관심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방과 후엔 친구들과 축구를 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준혁이가 조금이라도 잘하는 모습이 보이면 친구들은 박수를 쳐주었다. 한없이 무겁게만 보이던 준혁이 몸이 그렇게 가볍고 재바른지 몰랐다. 준혁이는 체육시간에 매우 흥미를 느낀다. “FOR 준혁!” 이전에도 체육에는 조금 관심을 보이기는 했었다. 그러나 지금과는 차원이 다르다. 친구들과 몸을 부대끼고 공동체 가운데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마음껏 알리는 그런 체육시간으로 바뀐 것이다. 음악 시간에 악기다루는 것을 특히 좋아하는데 특히 실로폰 열심히 친다. 수학시간에는 머리를 써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 도형 움직이기 단원에서 다른 사람이 잘 알아내지 못하는 문제를 맞추기도 하였다. 연필을 들어 글씨를 쓰고 문제를 푸는 등 교사와 눈을 맞추며 잠재해 있던 ‘집중’의 능력이 그렇게 조금씩 발휘되고 있었다. 분명히 준혁이가 달라졌다. 우리 반 아이들의 사랑과 관심이 준혁이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드디어 열게 된 것이다. 6월엔 우리 반 어린이들이 준혁이에게 사랑을 듬뿍 주었다면 7월엔 준혁이가 우리 반 모두에게 사랑을 주리라 기대해 본다. 나도 매일 아침 준혁이의 웃는 모습을 보며 활기찬 하루하루를 시작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