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덮개를 열었다. 당선이란다. 일이 벌어졌구나 싶었다. 물어볼까 말까 망설였다. 당선을 취소할 수도 있냐고. 미숙아를 세상에 내어놓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쁘지 않으세요?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 역시 낌새가 이상하다 싶은지 그렇게 물었다. 내 머리 속의 작품과 내 손이 쓴 소설은 너무 달랐다. 이번 작품은 더 그랬다. 경솔한 투고를 반성한다. 미숙아를 인큐베이터에 다시 넣어서 제대로 키우겠다. 그렇게 해서 독자들이 마음놓고 만날 수 있도록 하겠다. 다시 기회를 주신다면…. 피가 뜨거웠을 때 나는 빛 사냥꾼으로 살았었다. 방에는 사진첩들이 쌓여갔다. 그러다 어둠에 발목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시(詩)를 기웃거렸다. 그러다 동화라는 것을 쓰게 되었다. 세상이 무지개로 이루어져 있다고 웃으면서 말할 자신이 없었다. 소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이 흘러갔고 나는 함양, 부산, 진주, 밀양, 울산, 포항, 서울로 전전하게 되었다. 꿈 때문이었다. 성취한 꿈은 꿈이 아니다. 나는 이루지 못한 꿈이 너무 많다. 요즘에 나는 인간 동물들 관찰하는 재미로 산다. 그 속에 내 소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젠체하는 인간들을 동물 울타리 안으로 불러들일
나는 열 셋 사내아이다. 동물 그림 그리기에 빠져 있다. 때로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것만 생각한다. 조금 전에 내가 동물 그림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정확한 말이 아니다. 에소그램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말로 하자면 동물 생태화(動物生態 )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동물 습성을 기록한 그림이니까. 하지만 나는 동물 생태화란 말을 쓰지 않는다. 영어나 어려운 말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그들이 쓰도록 남겨 두었다. 그래서 내가 쓰는 말은 동물 그림이다. 나는 어린아이여서 쉬운 말이 좋다. 동물 그림 그리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책상 위가 지저분한 지우개 가루로 뒤덮이곤 했었다. 그런데도 완성된 그림은 엉성했다. 들여다보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곤히 잠들어 있는 식구들을 깨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막은 손가락 사이로 입 바람이 새어 나갔다. 그러다 웃음이 잦아들면 눈가에 눈물 몇 방울이 맺히곤 했었다. 한다고 해보았지만 그림으로 동물의 습성을 다 그려낼 수가 없었다. 기세 형이 동물 그림 작업할 때 사진기를 이용하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나도 사진기를 쓰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안타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