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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교원문학상 당선작> 소설

내가 그린 동물 그림


나는 열 셋 사내아이다. 동물 그림 그리기에 빠져 있다. 때로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것만 생각한다. 조금 전에 내가 동물 그림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정확한 말이 아니다. 에소그램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말로 하자면 동물 생태화(動物生態 )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동물 습성을 기록한 그림이니까. 하지만 나는 동물 생태화란 말을 쓰지 않는다. 영어나 어려운 말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그들이 쓰도록 남겨 두었다. 그래서 내가 쓰는 말은 동물 그림이다. 나는 어린아이여서 쉬운 말이 좋다.

동물 그림 그리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책상 위가 지저분한 지우개 가루로 뒤덮이곤 했었다. 그런데도 완성된 그림은 엉성했다. 들여다보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곤히 잠들어 있는 식구들을 깨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막은 손가락
사이로 입 바람이 새어 나갔다. 그러다 웃음이 잦아들면 눈가에 눈물 몇 방울이 맺히곤 했었다.
한다고 해보았지만 그림으로 동물의 습성을 다 그려낼 수가 없었다. 기세 형이 동물 그림 작업할 때 사진기를 이용하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나도 사진기를 쓰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내가 만드는 동물 그림은 드러내 놓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 집 안의 소리들이 모두 잠이 들면 그때서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은 신경질을 냈다. 엄마가 텔레비전 원격 조정기를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이 바쁜 아버지의 귀가는 들쭉날쭉했다. 엄마가 밤마다 텔레비전하고 놀도록 놔두시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었다. 밤이 깊어지면 텔레비전도 지치게 된다. 텔레비전 소리가 죽고 나면 나는 발자국 소리가 안방으로 사라질 때를 기다려야 했다. 발자국 소리는 심통이 나 있을 때가 많았다. 안방으로 들어간 발자국 소리가 더 이상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그때서야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공책을 펼쳤다.

공책 종이 긁히는 소리가 생쥐 쏠아대는 소리처럼 들렸다. 내 귀가 긴장해 있는 까닭이다. 그림을 그린 후에 글을 써야 했다. 그러는 중에도 내 귀는 안방에 가 있었다. 안방은 거실 건너편에 있어서 웬만한 소리는 그곳까지 날아갈 수가 없었다. 더구나 글씨 쓰는 소리는 더 그랬다. 그런데도 나는 마음을 놓지 못했다.

이렇게 나는 동물 그림을 그릴 때마다 긴장했다. 그런데도 내가 왜 그 일을 그만두지 못했을까. 시험에 처한 내 혀를 지켜내고 싶다는 그 생각뿐이었을까. 나는 비밀스러운 무엇인가를 캐어내고 있다고 느꼈었다. 같은 일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다보면 원래 목적한 것 외에 다른 것을 얻기도
하는 법이다.

이런 날이 석 달 열흘이었다. 내가 동물 그림을 그리는 첫째 목적은 내 몸의 살 한 점 때문이었다. 혀 말이다. 그 살점을 지키기 위해 나는 있는 힘을 다 쏟아 부었다. 그리고 일을 은밀하게 진행했었다. 운이 따랐는지 석 달 열흘 동안 나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었다. 같은 방을 쓰는 사촌 형에게 비밀로 하기는 어려웠다. 기세 형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기세 형의 혀가 조금이라도 가벼웠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아마 칼 맛을 보고 말았을 것이다. 소독 냄새나는 칼, 생각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

내 작업을 엄마 아빠에게 비밀로 해두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의 동물 그림 속에 두 사람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두 분은 주인공 동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 부모를 동물로 보고 관찰했던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짐승으로 본다면 그냥 웃어넘길 부모가 있을까.
없을 것이다.

내가 짐승이라고, 입히고 먹여서 공부시켰더니 이게 보답이냐, 네가 날 짐승 취급한다면 나도 널 짐승 취급 해주마, 이제부텀 네가 벌어서 공부하고 먹고살거라. 이렇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아무 탈없이 동물 그림을 그려왔으니 재수가 좋은 사람이다.

그렇지 않아도 엄마가 내 서랍을 뒤지기도 했었다. 내가 하는 일에 아주 깜깜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동물 그림 공책을 책가방 속에 넣어서 학교에 갔었다. 엄마 코를 따돌려야 했으니까. 그럴 때 나는 사냥개 코를 따돌려야 살아남을 수 있는 한 마리의 여우였다. 내 공책은 그 동안에 재가 될 고비도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내 동물 그림이다. 그 공책을 공개하려 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여기에 있는 동물 그림은 공책 중의 일부이다. 그리고 어제 만든 것이니 가장 최근의 그림이다. 전량을 공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눈밝은 분들은 자료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현명하게 판단할 것 같아 일부만 내어놓는다.

동물 그림을 공개한다는 것은 우리 부모님 특히 엄마를 많은 사람들에게 고발하는 짓이다. 우리 엄마는 자식 사랑이 지극하다. 지극하다못해 지나치다. 이런 엄마를 세상 사람들의 입에 들이밀어야 하는 나 역시 가슴이 아프다. 우리 엄마가 짐승인지 아닌지는 이제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다.

내 두 다리는 책상 위에 있었다. 다리가 책상 위로 올라가니까 엉덩이는 의자에 올려지고 윗몸은 등받이에 파묻히게 된다. 나는 이상하게도 다리가 책상에 올라가면 피로가 쉽게 풀린다. 하지만 어른들 중에 이런 나를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사람이 있었다. 엄마였다. 하이구, 잘 씻지도 않는 그 놈의 족발을 또 올려놨냐! 그런 정신 자세로 무슨 공부를 하니. 하지만 지금은 안심이다. 내 휴식을 훼방 놓을 사람은 집안에 없다. 다행이다.

노래에 맞춰 까딱까딱 발 박자를 맞췄다.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는 역시 노래가 최고다. 그래서 내 친구들은 댄스곡을 켜 놓고 머리통에 김이 나도록 춤을 춘다. 멍울이 맺힌 기분을 푸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2년 전에 이미 그런 시기를 보냈다. 지금 내 말상대는 대학 2학년 기세 형 정도다. 나는 친구들보다 최소한 십 년쯤은 앞서 가고 있는 셈이다. 사람을 보는 눈이 그렇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니까 친구들은 친구들대로 나를 멀리하고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나를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일찍 철 드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지오디(god)의 '투나잇(Tonight)'은 랩 부분으로 넘어가 있다. 영어 랩이다. 수십 번도 더 들었던 부분이다. 같은 곡인데도 영어로 들으면 노래 맛이 다르다. 우리말처럼 딱딱하지도 않았고 촌스럽지도 않다. 머리까지 끄덕거린다. 따라 부른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다. 혀가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입에 익은 노랫말들인데도 혀가 부드럽게 꼬부라지지 않는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때문일까. 잉글리시 온리 존(English only jone)에서 나에게 우리말을 내뱉도록 만든 아이가 있었다. 그 일 때문에 나는 감점을 받았다. 감점이 많으면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불리해진다. 학교에서 그렇게 정해 놓았다. 그 찜찜한 기분이 혀를 뻣뻣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래서 박자까지 놓친다.

3시 5분이다. 아파트 정문 앞에서 4시 26분에 학원 승합차를 타야 한다. 1 시간 21분 동안은 내 시간이다. 녹음기 볼륨을 높였다. 노래 소리가 시원하다.

"너 뭘 하는 거니. 몇 번이나 불렀는지 알어?"
머리를 돌려 소리나는 쪽을 보았다.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아줌마는 우리 엄마였다. 길다란 동물을 물커덩 밟아버린 느낌이었다. 엄마 눈은 책상 위의 내 다리에 머뭇거린다. 그 눈이 나에게로 건너온다. 독기 품은 뱀 눈이다.

"넌 엄마도 눈에 안 뵈냐? 다리 못 내려!"
"헤헤헤. 나는 이렇게 하면 영어가 잘 들려요."
엄마의 입술이 씰룩거린다. 기가 차다는 표정이다. 녹음기에서는 영어 랩이 끝나고 이런 노랫말이 이어졌다. '넌 왜 나한테 짐승처럼 구는 거니, 우액우액… .' 뒷머리를 긁으며 정지단추를 눌렀다. 한 번 일이 꼬이기 시작하면 계속 꼬인다는 걸 뭐라고 하지, 그런 날이다.

"이젠 잔꾀도 부리냐? 사내답지 않게 쪼잔하기는 …."
영어 학원을 가기 전에 가져보려던 내 시간이 비실비실 도망가고 있었다.
"넌 엄마 때문에 공부하는 거니, 응?"

엄마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빈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다. 엄마는 내 영어 공부만은 사생결단으로 간섭하려든다. 하나에서 열까지. 그러다 내가 영어 공부를 좀 게을리 한다 싶으면 저렇게 땅이 꺼지게 한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오죽하면 내가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었을까.

엄만 나에게 영어 공부시키려고 태어났어?

나는 그렇게 극성맞은 엄마가 싫었다. 이제는 엄마의 한숨 뒤에 어떤 말이 이어질 지 훤히 꿰고 있다. 영어듣기 못하는 사람이 걸리는 병이 있다. 무엇인지 아느냐. 귀머거리다. 아주 무서운 병이다. 그리고 영어 병신이 하나 더 있다. 영어 벙어리로 살아야 할 사람들이다. 요즘은 이런 세상이다. 영어를 못하면 인간 취급을 못 받는다. 너 이 따위로 공부해서 누구처럼 그렇게 살고 싶냐.
이런 엄마의 애원과 협박을 들을 때 나는 정말 곤혹스러웠다. 이럴 때에 엄마의 잔소리를 멈추게 하는 확실한 방법이 있었다. 엄마에게 내 영어 실력이 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암, 암, 나 생각 있어요. 암, 열 세 살, 적은 나이 아니에요."

어깨를 으쓱한 연후에 두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 서양인들의 몸짓이었다. 메이저리거가 된 박찬호가 인터뷰할 때였다. 그가 갑자기 미국인으로 보였다. 그 까닭을 생각해보았다. 할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그는 '암'이라는 군소리를 쓰고 있었다. 나는 바로 이거구나 싶었다. 엄마에게 그
방법을 종종 써먹었다. 그런데 이때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말 발음하듯이 '암, 암'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혀를 잔뜩 말아서 입안에서 두어 바퀴 굴린 뒤에 내뱉는 '암'이어야 한다. 그러면 영어권에서 살다온 동양인으로 보이게 된다. 그렇게 하면 엄마의 얼굴이 좀 펴지곤 했었다. 그러니까 엄마의 잔소리에서 벗어나려면 나는 혀짜래기가 되어야 했다. 멀쩡한 정상인이 혀짜래기가 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혀를 꼬부리고 돌돌 말아서 '암, 암' 했었다. 엄마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내가 영어공부에 목을 매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나의 영어 공부에 얼마나 집착이 심한지 한 가지만 더 흉을 보겠다. 지난해 봄이었다. 엄마가 나를 지하철역으로 데리고 갔었다. 나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였다. 그곳에서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지르라는 것이었다. I can do it. 나는 할 수 있다고. 나는 엄마가 원하는 대로 쉽게 미치지 못했다. 머리를 숙인 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엄마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외쳤다. 여러분, 여기 용감한 어린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영어 연설을 들려드리겠답니다. 자, 박수를 주세요.

그 순간부터 나는 사람들의 시선에 붙들린 한 마리 원숭이가 되고 말았다. 내 얼굴은 원숭이 엉덩이만큼이나 시뻘갰다. 죽을 맛이었다. 엄마는 나를 노려보았다. 썩 나서지 못해! 배고픈 암사자 아가리가 떠올랐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잡아먹을 것 같은 눈이었다. 나는 엄마가 나를 그렇게
몰아세운 까닭을 한참 뒤에 알게 되었다. 우연히 엄마의 수첩을 보게 되었다. 그 속에 신문 광고 쪼가리들이 끼워져 있었다. 형광 펜으로 그어진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수치심만 털면 영어의 입이 열린다'. 그랬다. 엄마는 나에게 그 광고처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번대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영어 잘 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랬던 것처럼 엄마는 특히 신문 광고에 민감했다. 광고는 또 어찌그리 많은지, 자고 일어나면 영어관련 전면 광고였다. 무슨무슨 영어전문학습지, 영어동화학습, 영어전문학원, 연극으로 배우는 영어, 운동경기와 함께 배우는 영어회화, 벼라 별 것들이 많았다. 그에 따라 엄마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도 달라졌다. 지하철역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새로운 광고가 나오면 새로운 영어 터득 법을 나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내 의사와 상관없이 그 방법대로 공부하라고 다그쳤다. 그 때문에 나는 새 광고가 나올 때마다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내 생각에는 내 영어 공부보다 엄마부터 이성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영어 때문에 수난을 당하는 나도 나지만 엄마가 불쌍했다.

"너, 아빠가 돈을 어떻게 벌어오는지 알기나 하니?"
엄마의 말에 나는 단번에 수컷 늑대를 떠올렸다. 나는 사람 행동에서 동물의 행동을 즉각 떠올린다. 동물 그림에 빠져있는 기간이 길었던 탓이다. 사냥한 먹이를 물고 집으로 돌아오는 수컷 늑대. 먹이 경쟁이 심해서 그런지 요즘에는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집에 들른다. 점점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하면서.

"너 나하고 약속한 거 잊은 건 아니겠지?"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대회 성적이 좋지 않으면 내 혀를 자른다는데 ….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났다.
"혀가 토막 날 지 모르는 일인데 어떻게 잊어요."
내 대답은 삐딱했다. 엄마가 나를 흘겨보았다.

아파트 정문 앞에서 노랑 버스를 기다리다 나는 장지 하나를 펴서 하늘로 날렸다. 퍼큐(Fuckyou)였다. 그건 서양 사람들의 욕이었다. 내가 한길 가에서 펴큐를 하다니 ….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내 모습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영어를 배우려는 자세가 좋다고 흐뭇해 하실까.

가기는 가야 할 것 같다. 학교와 집에서 기분을 망쳤다고 영어 수업을 빼 먹을 수는 없었다. 9월 29일은 영어 말하기 대회가 열리는 날이다. 이 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죽었다 깨어나도 내 실력으로 일 등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한다. 멍하게 입만 벌리고 있다가 칼 맛을 볼 수는 없지 않은가. 혀를 수술해보라고 권유한 사람은 매직이었다. 그는 내가 다니는 영어 전문 학원 원장이었다. 그곳에서는 청소 아줌마부터 원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영어 이름으로 불렀다.

"조지 어머님, 조지가 구강 구조 때문에 영어 발음에 장애를 받고 있다는 것 모르셨지요. 우리나라 사람 중에 우랄 알타이계 인종의 혀의 특성을 고스란히 지닌 이가 있어요. 우리 학원 전문 강사들이 진단한 보고서에 따르면 조지가 그래요. 그걸 해결하지 않고는 유학을 간다해도 완벽한 발음이 어렵다는 군요."

학원에서 나는 기치가 아니라 조지였다. 엄마는 조지 엄마가 되었다. 내가 다니는 학원은 새로운 교수법을 개발했다고 떠버렸다. 수강료는 다른 학원의 두 배였다. 엄마는 내리 이 년 동안 나를 그 학원에 다니게 했다. 그런데 내 영어 회화 실력은 거기서 거기였다. 엄마는 꾐에 빠졌는지 모른다고 의심을 품었다. 그러던 차에 쏟아져 나오는 영어 광고들이 엄마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광고 내용들은 이랬다.

솜털 보송보송한 아이가 일 년 만에 미국인처럼 말하게 되었다. 우리 학습지로 공부를 한 뒤에 해외 여행가서 외국인에게 말을 걸었더니 외국인이 깜짝 놀라더라. 지금은 영어에 자신을 얻어 유학 준비중이다. 이런 식이었다. 엄마 역시 광고들이 허풍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피 같은 돈이 공중으로 사라졌다는 것 때문에 속을 끓였다. 엄마는 학원 광고지를 움켜쥐고 학원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대형할인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아들 공부를 감독하는 주부에게 호락호락 당할 그들이 아니었다. 혀가 너무 길어서 영어 발음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사실은 조지가 다닌 기간만 공부해도 미국인처럼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조지는 r과 l을 구별해서 발음할 구강구조를 가지고 있지 못해요. 제가 잘 아는 전문의가 있긴 한데 수술비가 만만치 않아서요."

매직은 자기가 그렇게 말하면 엄마는 닭 쫓던 개가되어 체념할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매직은 우리 형편이 그리 넉넉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매직의 말이 엄마의 귀에는 이렇게 들렸던 모양이다. 영어 때문에 안정된 직장을 마련한다는 것은 이제 물 건너갔네요. 이렇게 되니 물러설 엄마가 아니었다. 며칠 간 드러누워 있던 엄마가 벌떡 일어났다. 뜻밖의 방문객을 맞은 원장은 이렇게 말하더란다.

의사가 미국에 체류중이래요. 당분간 기다리셔야 하겠어요.
"엄마, 원장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냉정하고 치밀한 머리로 사태를 파악해버린 내가 엄마에게 정색을 하고 말했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의사가 귀국하는 대로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할 뿐이었다.
"전, 영어 못 해도 상관없어요. 도마뱀처럼 긴 혀로 그냥 살래요. "
"이 철딱서니 없는 것아. 영어 못하면 사람 구실 못한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하든. 너 혹시 수술이 두려워서 그러니? 걱정 마. 매직 원장이 그러는데 혓바닥 아래 부분을 절개해서 혀를 살짝 구부러지게 할뿐이래. 배도 가르고 머리까지 짜개는 사람도 많은데 사내 녀석이 떨긴 뭘 떠니."

엄마의 의지는 확고부동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기회를 달라고 했다. 학교에서는 해마다 영어 말하기 대회를 열었다. 내가 그 대회에 참여해서 결과를 본 뒤에 결정을 하면 어떻겠냐고 졸랐다. 엄마가 말했다.

"시시한 대회니까 그럼 일 등을 해라. 할 수 있겠냐?"
나는 피그르 웃고 말았다. 엄마의 말은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회에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상이라고는 구경도 못했었다. 우리 학교에는 외국에 살다 귀국한 아이들이 꽤 있었다. 내가 일 등을 하려면 그 애들을 모두 물리쳐야 했다.

"상만 받으면 되는 걸루 해줘요. 네에 엄마. "
그래서 삼 등 안에 들면 수술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그 영어 말하기 대회가 이 주 앞으로 다가와 있다. 초조하고 불안하다. 그래서 나는 한길에 서서 세상을 향해 퍼큐를 날렸던 것이다.

이쯤에서 내가 동물 그림을 그린 이유를 좀 더 분명히 해야 하겠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에소그램(ethogram)은 동물을 관찰할 때 동물의 행동 양태를 상세한 그림으로 조사한 기록이다. 동물의 생김새는 물론이고 먹이 습성이나 짝짓기, 영역 다툼과 사냥 기술 그리고 무리와 개인간의 친밀도 같은 것까지 나타낸 그림이다. 그런데 그림만으로는 완전할 수가 없었다. 미진한 내용은 글로 설명을 덧붙이게 된다. 그래서 에소그램이라고 하면 그것에 덧붙이는 설명까지 포함시키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 동물들의 습성을 기록할 때 쓰는 도구를 왜 인간에게 적용했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것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를…. 나 역시 엄마의 젖가슴에서 체온을 물려받은 인간이다. 고민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끙끙 앓는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나와 같은 방을 쓰던 기세 형이었다.
사촌 기세 형은 집이 시골이었다. 내 방에 빌붙는 형식으로 우리 집에 들었다. 올 봄의 일이었다. 나는 내킬 리가 없었다. 그러던 내가 순식간에 달라지고 말았다.

형이 다롱이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 때문이었다. 관심을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다롱이에게 눈을 대어놓고 있었다. 돈 버는 일에만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았던 어른 남자가 애완용 개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하기는 내가 형의 입주를 막고 싶어도 이미 결정되어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기세 형의 좋은 점을 찾아내려고 내 쪽에서 전전긍긍했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구실일지 몰랐다. 이렇게 해서 형과 나는 한 이불 속에서 지내게 되었다. 서로의 사타구니에 손을 집어넣기도 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형이 다롱이에게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전공과목 과제를 해결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한 학기 동안 동물을 관찰하면서 동물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형의 작업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로 저거구나 싶었다.
어쩌면 저것으로 내 혀를 구할 수도 있겠다. 나는 동물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난 당할 내 혀의 모습을 그림과 글로 기록해서 사람들에게 하소연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엄마의 비인간적인 행동에 대한 내 나름의 방어법이었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그렇듯이 나는 그렇게 좀 엉뚱했다. 나의 동물 그림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발상에서 싹이 자랐다. 그 당시 내 생각은 이러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의 몸에 칼을 들이대는 비인간적인 어미의 행실을 세상에 고발해야 한다. 엄마는 짐승이나 다름없다. 아니 짐승보다 더 모질었으면 모질었지 덜 하지 않다.

"엄마, 나 수술 잘못돼서 아이스크림 못 핥으면 어떡해?"
"엄마, 나 반벙어리 되는 거 아냐?"
혀에 칼을 대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애걸복걸했건만 엄마는 내 애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인정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었다. 짐승이었다. 엄마의 짐승과 같은 행위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야 했다. 내 혀가 수술을 면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보였다. 사람들에게 알리려면 그럴듯한 자료가 필요했다. 나는 자료를 확보하려고 이를 악물고 동물 그림을 그렸다.

내 동물 그림은 엄마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폭로하는데 필요한 증거 수집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동물 그림은 하나 둘 늘어났다. 그런데 신기했다. 그것들을 가만 들여다보면 새로운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인간들은 자기 스스로 위대한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짐승들과 비교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짐승이다. 내가 사랑했던 우리 엄마를 보아라. 얼마나 잔인한 짐승인가.

엄마가 집을 비우는 날이면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동물 그림을 그렸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내 공책에는 제법 그럴듯한 그림들이 채곡채곡 쌓여갔다. 동물로서 엄마의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세상 물정도 좀 알게 되었다. 혀짜래기가 존경받는 세상이었다. 나는 클래식보다 가요를 좋아한다. 그래서 가수들이 좋다. 특히 나와 같은 세대인 십대 가수들은 신 같은 존재로 보였다. 그런데 그들 중에 혀짜래기가 더러 있었다. 교포 2세들이었다.

그들은 우리말이 서툴러도 너무 서툴렀다. 그런데 그들이 방송을 타면 인기가 더 치솟았다. 이상한 일이지 않는가. 그 이유를 곰곰이 따져보았다. 우리말이 서툴다는 것을 뒤집어 말하면 영어는 잘한다는 말이 된다.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영어 열등감에 젖어 있는 아이들이 우리말이 서툰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이었다.

쟤들은 영어 잘하니까 미래가 보장되어 있을 거야.
이렇게 뒤틀려진 세상도 내 동물 그림에 담고 싶었다.
"형, 이거 내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거지?"
형에게 동물 그림 공책을 들킨 날 나는 그렇게 물었었다.

"아니, 영국 동물학자 중에 너보다 한발 먼저 시작한 사람이 있어. 그렇다고 해도 기치 너는 대단한 놈이야. 인간이 숨겨두고 싶은 것들이 네 그림에서 언젠가는 옷을 벗을 것 같애. 넌 기질을 타고났어, 혁명가 기질. 네 작은 혁명이 성공하길 빌어."

영국 사람 중에 앞서 간 사람이 있다고 했다. 나는 은근히 실망을 했었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나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힘이 되었다. 나는 용기를 얻어서 동물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영어 학원 숙제 때문에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12시, 졸리는 눈으로 영어 일기를 쓰고 있었다. 재미없고 어려우니까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왔다.
"기치야, 아빠 왔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버지의 커다란 목소리였다. 집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귀가 번쩍했다. 요즘 아버지는 이삼 일에 한 번쯤 집에 들르신다. 도둑 고양이였다. 밤에 들렀다가 날이 밝기 전에 집을 나갔다. 하는 일이 무척 바쁘다고 하시면서.

언젠가 물을 마시려 주방으로 들어서다 나는 뒷걸음질을 쳐야했다. 식탁에 시커먼 등으로 앉아있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런데 오랜만에 가솔들을 호령하는 수사자의 포효를 들을 것 같다. 반갑다. 비록 술에 기댄 용기라 해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남자 대 남자로서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다. 나는 부리나케 거실로 달려나갔다. 아버지의 몸에서 단내가 확 풍겼다. 내가 인사를 하는 사이에 안방에서도 문이 열렸다.

"저녁은 드셨겠지요?"
굴 바깥이 궁금해서 머리를 내미는 암컷 늑대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 마디 내뱉고 굴속으로 되돌아 들어가 버렸다. 도둑고양이 정도는 얼마든지 코방귀로 잠재울 수 있다는 태도였다. 처음 보는 광경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출퇴근이 일정하지 않게 된 뒤부터 우리 집은 그렇게 변하고 말았다. 당당하게 소파에 앉아서 여보, 나 배고파,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를 볼 수가 없었다.나는 닫혀지는 안방 문을 바라보다 목소리를 낮춰 아버지에게 말했다.

"인생 상담 좀 하고 싶은데요."
아버지의 눈이 잠시 일렁거리더니 껄껄 웃었다.
"인생? 그 조오치. 네 방으로 가자."

아버지의 혀는 꼬부라져 있었다. 요즘에는 술을 입에 댔다하면 정신을 놓아버릴 정도로 과음하셨다. 그 때문에 엄마는 아버지를 더 미워했다. 그런데도 왜 술을 드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가 내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큼지막한 손이었다. 따뜻했다. 아버지가 벽에 등을 대고 먼저 앉으셨다. 왠지 모르게 엉거주춤한 자세였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바로 앉아, 임마. 오밤중에 니 애비 제사 지낼 참이냐?"
시간은 자정이 넘어 있었다. 바로 앉으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무언인가 서늘한 것이 가슴 한복판을 쓰윽 지나갔다.
"아버지는 술 마시고 영어하면 잘 하시겠네요."
약주 많이 드셨네요, 이런 뜻의 농담이었다. 내 딴에는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
"영어? 그래. 잘해야지. 그것으로 사람의 능력을 재는 시대니까."
영어 얘기가 나오자 아버지의 말은 또렷했고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잔뜩 꼬부라졌던 혀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수술하고 우리말까지 버벅거리게 되면 어떡하지요?"

영어는 영어대로 망치고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혀짜래기가 되면 어쩌나 싶은 게 내 걱정이었다. 그것은 내 인생을 망치게 할 일이었다. 아버지는 엄마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넓으니까 나에게 도움을 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한 말이었다.

"얘기 들었다. 그런다고 영어 발음이 잘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어쩌자는 건지, 원."
"그렇지요?"
이번에는 내가 아버지 앞으로 다가가 아버지 한 손을 덥석 잡았다. 원군을 만난 셈이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내 혀 수술에 더 적극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엄마가 지어낸 말이지 않는가.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
아버지는 나머지 손으로 내 등을 토닥거렸다.
"도와주신다는 말이지요? 그렇죠?"
"못난 애비 탓이다. 너희 엄마가 네 혀를 어쩌겠다고 한 것도…. 너희 엄마,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모진 사람 아니다. 수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간여하지 않아도."
"고맙습니다. 아버지는 역시 아버지시네요. 감사 드려요."
나는 방바닥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방문을 나서면서 물기 젖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런 게 아니라도 먹고살려면 허리띠를 졸라매게 될 텐데…."
"무슨 말씀이세요?"
"날 밝으면 엄마한테 물어보거라."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버릇이 되어서 그런지 영어 테이프를 켜 두지 않으니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자면서도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이 광고에 실린 적이 있었다. 엄마는 그것이야말로 효율적인 학습법이라고 하면서 매일 밤 내 머리맡에 영어 테이프를 켜놓았다. 인간의 의식에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는데 그 무의식에 영어를 심어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꿈자리는 언제나 뒤숭숭했다. 밤사이에 미국까지 날아갈 때도 있었다.

"영어 회화 잘 하면 디즈니랜드 데려갈 게."
엄마는 그 말을 수도 없이 했었다. 회화만 된다면 미국 여행을 하자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 꿈이 이뤄졌다. 말로만 듣던 아메리카였다. 지하철역에 홈리스라 불리기도 하는 거지들이 모여 있었다. 거지인데도 그들은 영어를 잘했다. 나는 그것이 억울했다. 미국 사람들은 거지들도 영어를 잘 하는데 왜 우리는 대학까지 마쳐도 입도 뻥긋 못하지 않는가. 영어 공부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되는 미국 거지가 되고 싶었다. 꿈속에서 나는 머리가 노랗고 곱슬곱슬했다. 나는 조지였다.

머리가 띵했다. 내가 조지로 깨어난 것인지 기치로 깨어난 것인지 헷갈렸다. 오늘도 여전하다. 거실은 혀가 꼬부라진 말들이 점령하고 있다. 언제나 그렇다. 영어가 둥둥 떠 있는 아침 공기를 마시고 영어 소리가 득실거리는 방에서 잠자야 했다. 그것이 열 세 살 내 삶이었다. 나는 영어 소리 정글을 헤치고 씩씩한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조지가 아니라 기치라는 생각에서. 간밤에 아버지에게 들은 말을 서둘러 확인하고 싶었다.

"아버지 출근하셨어요?"
궁금한 걸 물어보기 위해 알면서 해보는 말이었다.
"새벽에 일어나니 계시지 않더라."
"엄마, 혀 수술 안 해도 되지요? 아버지가 엄마한테 물어보라던데요."
"한잔 걸치고 와서 어린것한테 할 소리 안 할 다 했나 보네. 너희 아버지 영어 귀머거리에다 벙어리여서 회사에서 밀려났다는 말은 안 하디?"
"네에?"
엄마가 씁쓸한 웃음을 웃었다. 혀 꼬부라진 말들이 우리 거실을 점령한 아침이었다.

처음 동물 그림을 시작할 무렵에는 나는 교육부 대신이나 황제를 떠올렸었다. 영어 때문에 생기는 문제니까 그들에게 내 동물 그림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임명받은 뒤 한 해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는 대신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리고 황제는 영어를 공용어로 정했으면 하고 생각을 비쳤던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 내 귀중한 동물 그림을 보낼 수 없었다. 그래봐야 내 그림을 쓰레기로 취급할 테니까.

그렇다면 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대학생들에게 보내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기세 형은 반미 시위에도 참여한다. 하지만 기세 형도 영어 얘기로 접어들면 꼬리를 내리고 만다. 토익인지 토플인지 점수를 따야 한다고. 점수를 따지 못하면 대학 졸업도 못하게 해놨다고. 동물 그림을 내어놓을 곳이 없어졌다. 그렇지만 나는 동물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었다. 동물 그림을 통해서 나는 새로운 것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엉뚱한 생각에서 시작된 그 일이 엉뚱한 결과를 낳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인가 하면 인간을 동물로 생각하고 관찰해 보니까 한동안 가려져 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존엄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서로 많이 먹으려고 싸우고, 먹이를 먹었으니 똥 싸고, 위협을 느끼면 꽥꽥 소리 지르고, 새끼를 낳아 튼튼하게 길러내는 짐승의 모습, 그것이었다. 어린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려 했다. 그래서 우리는 동물의 울타리 바깥으로 뛰쳐나와 있었다. 내 동물 그림은 인간을 그 울타리 안으로 다시 밀어 넣는 작업이었다. 내가 처음 동물 그림을 그린 목적은 이루기 어려웠지만 나는 인간의 비밀스러운 뒷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동물 그림 작업을 그만두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변화 중의 변화는 내가 엄마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내 영어 공부에 목숨을 거는 듯한 행동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내 혀에 칼을 대려는 엄마는 분명히 비인간적인 모습이었다. 비인간이니까 동물이었다는 말이다. 아버지의 실직을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는 엄마의 몸부림은 어미로서 새끼를 사랑하는 동물적인 모성 그것이었다.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내 혀에 소독한 칼날이 들어오고 말 것 같다. 나는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다. 그 눈물이 내 살 속으로 파고 들어와 살이 되기를 바라면서 나는 어금니를 깨물려 한다. 동물 그림들이 당당한 수컷으로 수술대 위에 누울 수 있도록 나에게 용기를 준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두려움이 앞선다. 나는 아직 열 세 살 짜리 어린 수컷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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