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제국의 아랍인들, ‘0’의 사용은커녕 그 개념조차 알지 못했다.” 그랬다면 오늘날 우리의 문명수준은 매우 낮을 것이다. 인류는 달에 사람을 보내는 것을 넘어 화성에 탐사선을 착륙시키는가 하면 동영상 이동전화기를 비롯한 최첨단의 이기를 사용하는 등 20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과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내일 혹은 모레엔 또 어떤 신기한 기계가 발명되어 우리를 놀라게 할까? 생활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하다못해 인간성의 상실을 염려하게 하는 과학기술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수준 높은 과학기술의 토대 이끈 ‘0’ 인류가 발견·발명한 각종의 원리나 기호들 중에서 인류로 하여금 한계를 알 수 없는 과학과 기술에 도전할 수 있게 한 것 중의 하나는 숫자 ‘0’일 것이다. 매우 단순하게 접근해도 0의 개념이 없으면 ‘-’, 즉 음수(陰數)를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미분이나 적분 같은 고등수학은 생각할 수 없다. 인공위성, 컴퓨터, 휴대전화기, 나노 등은 모두 고등수학의 소산물이다. 화약, 나침반, 종이가 동양에서 발명되었지만 고등수학을 가능하게 한 0 또한 동양인의 고안물이었다. 사실 누가 최초로 0을 고안해 사용했는지에 대해서 사가들은 견해
조국의 주권을 되찾은 해방의 기쁨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해인 1947년 11월 23일에 조선교육연합회가 태동하여 정부수립 다음해인 1949년 2월 7일에 대한교육연합회로 변신하여 수많은 역경을 딛고 발전을 거듭해 오다가 1989년 5월에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라는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하여 이제 회갑을 맞게 되었으니 감회가 새롭다. 16개 시·도의 지역조직과 5개의 직능단체, 산하단체 25개를 두고 교원의 지위향상과 교직의 전문성 확립을 기함으로써 교육의 진흥과 문화 창달에 기여하고 있는 한국교총은 명실 공히 건실하고 튼튼한 교원단체로 발전해 왔으며 올해는 사상처음 보통교육을 담당하는 교사가 회장으로 당선되어 학교현장에 근무하는 많은 교원들이 현장과 한발 가까워진 교총으로 변화되길 기대하고 있다. 과거를 되돌아보면 하나의 교원단체로 안주하면서 관변단체였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었고 현장교원과 거리감이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그러나 1999년 전교조의 합법화와 한꺼번에 3년이나 정년단축이 되면서 학교현장은 반목과 갈등으로 얼룩졌고 안정이 흔들리면서 복수의 교원단체가 생겨나 경쟁의 대열로 들어선 후 수년이 흘러오면서 선의의 경쟁을 하면
1980년 광주의 봄을 시작으로 80년대를 관통했던 암울한 시대에 상처 입은 사람들의 삶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황석영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오래된 정원은 이러한 질문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영화이다. 바람난 가족, 그때 그 사람들 등을 통해 시대와 사회의 부조리 속에 내던져진 사람들을 형상화하는 데 장기를 보여준 임상수 감독은 시대의 그늘과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를 모색하는 원작의 구성을 바탕으로 특유의 냉소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그 시절 청춘들의 슬픈 자화상에 연민의 시선을 던진다. 우리가 망각해버린 ‘오래된 정원’ 영화는 오랜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나온 현재의 오현우(지진희)의 회상에서 시작된다. 80년대 군부독재에 반대하다가 젊음을 온통 감옥에서 보낸 현우. 17년이 지난 눈 내리는 어느 겨울, 교도소를 나선다. 변해 버린 가족과 서울풍경, 모든 것이 그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단 한 사람, 감옥에 있던 17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지갑 속 사진의 얼굴만이 익숙하게 다가온다. 잊을 수 없는 그 얼굴, 바로 한윤희(염정아)다. 며칠 후, 현우의 어머니는 그에게 한윤희의 편지를 건넨다. “소식 들었니? 한 선생, 죽었어.”
시안에서 우루무치까지 중국 실크로드를 다녀왔습니다. 시안[西安] 일대-천수-난주-가욕관-주천-둔황-투루판-우루무치를 거치는 일정이었습니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볼 때 이 일정은 실크로드 전체의 반에도 미치지 않는 짧은 거리입니다. 하지만 서쪽으로 달려 갈수록 눈에 띄게 달라지는 자연환경이나 사람들의 생김새는 ‘역시 실크로드다!’하고 감탄하게 합니다. ‘사막에서도 흰 눈이 덮인 산맥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수차례 듣고 사진으로 확인도 했지만 정작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요, 나와 상관없는 남의 집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렇게 뻣뻣했던 나그네에게, 감탄에 익숙지 않은 내게 실크로드는 말로 못할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새벽을 종착지로 해서 밤새 서쪽으로만 달리던 기차는 종착지에 다다를 무렵 드디어 저 멀리서 흰 눈을 뒤집어 쓴 채 나를 향해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코 앞에는 누렇고 메마른 사막인데도 말입니다. ‘어리석은 중생아,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넓단다’하는 가르침을 던져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에어컨이 설치된 버스를 타고 편안한 숙소에서 머물며 실크로드를 다닐 수 있다지만 그 옛날 척박한 이 땅에
컴퓨터를 켜면 하루에도 수많은 스팸메일이나 지인들로부터 편지가 도착해 있다. 그리고 중요한 업무나 전달사항도 전자메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연말연시가 되면 정성들여 쓰던 카드도 이젠 전자메일 편지지를 이용해 내용에 알맞은 갖가지 예쁜 도안들로 채워진다. 옛날처럼 기다림도 설렘도 줄어든 전자메일은 글의 내용 외에는 어느 한 곳이라도 상대방의 향기를 맡기 힘들다. 그것은 아마도 직접 쓴 글씨를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글씨는 사람마다의 개성이나 마음씨를 알 수 있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삐뚤삐뚤하지만 그 아이의 마음이나 태도를 읽을 수 있고 어른은 어른대로 글씨만 봐도 그 사람의 품성과 인격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주인의 인간성과 교양 반영해 서양화가 유입되기 전 먹이 주재료였던 우리 선조들은 글씨 혹은 그림 속에 자신의 감정과 능력을 담아냈으며, 그림과 글씨를 나타낼 때는 완벽하게 재료를 준비하고 표현을 할 때도 최선을 다했다. 흔히 문방사우라 일컫는 벼루, 먹, 종이, 붓 외에도 글과 그림의 재료로 종이를 누르는 서진과 종이 아래 놓는 깔개가 있고, 먹을 갈 때 사용할 물 담는 연적 등이 있다. 그 중 연적은 글씨와 그림으로 완성된 작품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