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나타난 처용
9월이나 10월이면 지역별로 각종 축제가 많이 열립니다. 봄에 씨를 뿌린 농작물을 가을에 수확하듯 각 지역 축제도 이 시기에 특히 많이 개최되는데요, 필자가 살고 있는 울산에도 처용문화제가 개최됩니다. 처용문화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설화를 바탕으로 처용이 나타난 처용암이 울산 앞바다 개운포에 있다는 데 바탕합니다. 처용설화 중 처용가에 나타난 관용과 화합의 정신을 배우자는 것이 처용문화제의 취지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올해는 여느 해와 달리 축제 이름에서 ‘처용’을 빼야 한다는 논란이 공개적으로 일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처용가의 내용이 외설적이기 때문에 처용문화제에서 주장하는 관용이니 화합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서 시작됩니다.
과연 처용가가 외설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지역의 대표 축제에서 그의 이름을 빼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논란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지금껏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각도에서 논의되어 왔습니다. 다만 축제 이름을 계기로 다시 한 번 그 논란에 불을 붙인 격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처용, 잊혀졌던 처용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논란의 중심에 있는 처용, 삼국유사 기록에 따른 그의 궤적을 쫓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출생지는 개운포처용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기 전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대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이어져 있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답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지요. 이 때 그는 울산 앞바다를 찾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상황을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헌강왕대는 신라 말기로 중앙 귀족들의 퇴폐와 향락이 극심했던 때입니다. 따라서 이 내용은 당시의 어려웠던 형편을 반어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추정은 처용설화에 이어 기록되어 있는 헌강왕의 또다른 행적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즉,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오직 왕에게만 그 모습이 보였다거나, 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는 기록들이 곧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계하던 춤이었다고 보죠.
왕이 신하들과 함께 돌아가려는데 갑자가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왕이 어찌된 연유인지 신하들에게 물어본즉, 일관(日官)이 이르기를 이것은 동해 왕의 조화이므로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한다는 해석을 내놓습니다. 이에 왕은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짓도록 하였는데 그 명령이 떨어지자 말자 구름과 안개가 걷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헌강왕이 다녀갔던 그 울산 바닷가, 처용이 나타난 그 바닷가를 개운포(開雲浦)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또 용을 위해 지은 절은 이 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있다고 하여 망해사(望海寺)라고 하였습니다.

헌강왕이 왜 개운포로 내려갔을까요? 단순히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내려간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쩌면 지방순시를 통해서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잡아 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또 절을 창건함으로써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제대로 경영해보자는 의도도 있었을 것 같고요. 신라 말기에는 이렇게 종교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라 마지막 경순왕이 기울어진 나라의 운명을 문수보살에게 묻기 위하여 태화사라는 절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그러한 예입니다. 이 때 문수보살은 왕을 눈앞에 두고서 홀연히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을 문수보살의 뜻으로 알고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넘긴다는 그런 류의 전설이지요.
망해사에서는 과연 바다가 보일까?개운포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수군이 머물렀던 영성(營城)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이야기대로라면 망해사는 개운포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망해사에서는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발돋움을 해봐도 공단에 가려져 바다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 절은 전라북도 김제에 있는 망해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제 망해사는 말 그대로 바로 앞이 서해 바다이니까요.
망해사는 울주군 청량면 문수산 자락에 위치한 절입니다. 지금 망해사에서 처용과 관련한 흔적을 찾아보라면 근래 지어진 대웅전 외벽에 그려진 벽화 정도일 뿐입니다. 벽화에는 신라 헌강왕이 개운포에 내려왔을 때 갑자기 운무가 자욱한 모습, 동해 용이 나타나는 모습, 망해사 절을 짓는 모습,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부도를 만드는 모습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절터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조부도가 둘 남아 있습니다. 상륜부는 떨어져 나간 팔각 원당형의 부도탑으로 다소 형식화되었지만 보기 드문 쌍둥이 부도로서 당당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 혹시 처용과 관련한 답사지로 이곳을 찾았다면 처용암이 있는 개운포 바다가 보이지 않음에 실망하지 마시고 통일신라 말기에 만들었을 이 부도탑을 통해서 그를 떠올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동해용은 왕이 절을 지어준다는 그 말에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그의 덕을 찬양하여 춤추고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이 왕을 따라 신라의 서울인 경주로 가서 정사를 도왔는데 그가 바로 처용(處容)이었습니다. 처용암은 처용이 등장한 바위를 말하죠.

앞서 언급한 처용문화제의 시작은 처용암 앞에서 펼쳐지는 처용에 대한 제의(祭儀)에서 시작합니다. 시장을 비롯한 지역의 대표 인사들이 제의에 참여하며, 이 때 처용탈을 쓴 채 처용무가 한 판 벌어집니다. 그리고는 배를 타고 처용암을 한 바퀴 둘러봄으로써 축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처용암에서 등장한 처용은 왕을 따라 서울로 올라간 후 미녀를 아내로 맞고 급간(級干)이라는 벼슬도 받게 됩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이제 울산에서 경주로 바뀝니다.
처용은 왜 그 노래를 불렀을까?처용의 아내가 너무 예뻐서일까요? 역신(疫神)이 그녀를 흠모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서는 처용이 없는 틈을 타 그녀와 동침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처용을 둘러싼 논란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모습을 보고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일반적으로 한바탕 난리를 부리고 ‘법적으로’ 대응하겠노라고 겁을 주었을 텐데, 그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 나왔습니다. 그가 부른 처용가는 해석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東京明期月良 동경 밝은 달밤에
夜入伊遊行如可 밤늦도록 노닐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다리가 넷이로구나
二肹隱吾下於叱古 둘은 내 아내의 것이고
二肹隱誰支下焉古 둘은 누구의 것인고
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대 내 아내이지만
奪叱良乙何如爲理古 빼앗겼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이 노래를 들은 역신은 그 모습을 나타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으며 하는 말이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범하였는데도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지금 이후부터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아들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역신은 질병을 옮기는 신으로 대표되기도 하고, 왕과 대립되는 기득권 세력을 말한다고도 합니다. 또 윤리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환락과 타락을 나타낸다고도 보기도 합니다.
처용가의 내용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면 분명 외설입니다. 처용이 외출한 사이 처용의 아내가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는 것은 분명 지탄의 대상이지 관용정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와 의견을 달리하는 입장에서는 역신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해석해서는 곤란하고 처용의 아내를 덮친 역병으로 해석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용이 아내와 동침한 역신을 춤과 노래 등으로 물리치려 했다는 점 등에서 그의 관용정신과 화합정신을 본받을 만하다고 합니다.
삼국유사는 말 그대로 유사(遺事)입니다. 짧은 필자의 생각으로는 문자로 적힌 그 글을 그대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은유의 의미를 더 중시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은유와 과장의 표현이 수없이 많이 등장합니다. 또 처용설화에서 유래한 처용무는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악학궤범에 실리고 이후 궁중의 행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한 춤입니다. 처용이 가지는 ‘벽사진경’, 즉 악귀를 쫓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한다는 정신이 반영되었기 때문인데, 만약 처용설화의 핵심이 외설이었다면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 그것도 신성한 왕실에서 행하는 행사 때 처용무가 가능했을까 싶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나름대로의 판단이 궁금하네요.
괘릉에서 처용을 그리다처용에 대해 나와 있는 이야기는 위에서 언급한 내용이 전부입니다. 처용이 누구냐에 대한 다양한 논란은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그가 서역에서 온 사람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 의견은 처용의 얼굴이 그려진 악학궤범에 나타난 생김새가 우리네 얼굴과는 많이 다른 서역의 인물에 가깝다는 데서 기인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목받는 곳이 바로 원성왕릉으로 추정되는 경주 괘릉입니다.

괘릉에는 화표석(華表石), 무인석(武人石), 문인석(文人石) 각 1쌍과 돌사자 4마리가 배치되어 있어 흥덕왕릉과 함께 다른 신라의 왕릉과는 차별화된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무인상은 서역인을 닮아서 어떻게 신라시대 왕릉에 서역인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신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서역과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중세 아랍 사람들에게 신라는 대서양의 아틀란티스 섬과 함께 동방의 이상향이었다고 합니다. 뜨거운 열기와 척박한 자연 환경에 처한 그들에게 신라 땅은 산수 좋고 기름진 곳이었고 심지어 개 사슬도 금붙이로 만들어 다닌다는 소문이 날 만큼 황금의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 아랍인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남해의 바닷길로 무역을 거래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처용은 바다를 통해 울산으로 들어온 서역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다분히 가능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부는 자기 아내를 빼앗기고도 춤을 출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그가 벼슬은 있으나 세력이 약한 귀화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고려속요 ‘쌍화점’은 서역에서 건너온 이슬람 사람들이 이 땅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경주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도 괘릉의 무인석과 같은 형태의 토용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서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귀화하여 하사받은 성씨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위에서 가끔씩 높다란 콧대에 우락부락한 서역인의 골격을 가진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듯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실크로드 답사 중입니다. 서안을 출발해서 우루무치로 가는 여정에서 중국 내 박물관에서 만나는 토용으로, 양고기를 구워 파는 위구르인의 모습에서 괘릉의 무인석을 떠올리고 있답니다. 일행 중 누군가가 저더러 이쪽 사람을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혹시 제게도 처용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이 좋은 가을에 가까운 축제에 참여해 보심이 어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