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에 서서히 빠져들다 80년대 중반, 국문학과 대학원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한문에 능통해야 했다. 학부 내내 외국 문학 이론을 배경 삼고 철저한 작품 분석을 통해 언어예술의 심연과 진경을 포착하려 애쓰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선배들을 통해서 입수한 대학원 입학시험의 한문 문제는 별도로 준비하지 않으면 통과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A4 용지 한 장짜리 원문을 한글로 옮겨 내라는 주문이 있는가 하면, 귀거래사(歸去來辭) 같은 작품을 원문 그대로 외워 쓰라는 요구도 있었다. 바로 전해에는 적벽부(赤壁賦)를 외워 쓰라는 문제가 나오기도 했다. 다행히 고등학교 때 한자 공부를 그럭저럭 한 데다가 어렸을 때부터 온통 한자투성이였던 갖가지 책들을 읽어서 그런지 한문 공부가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대학원에 가겠다고 일찍부터 결심했기에 미리 틈틈이 공부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대학원 입학시험을 몇 개월 앞두고는 논어와 맹자를 열심히 읽고 또 읽었다. 고문진보(古文眞寶)도 공부했고 시험에 나올 만한 명문들도 외웠다. 다행히 대학원 시험에 통과했다. 대학원에서 현대시를 전공하면서부터 그나마 띄엄띄엄 읽을 수 있었던 한문 해독 능력은 급속도로 사라졌다. 열심히 외웠던 명문
1 한국 논쟁사(論爭史)에 두고두고 뒷이야기를 남긴 것 중에 1963년도의 ‘사형제도 찬반’에 관한 논쟁이 있다. 당시 유력한 저널이었던 동아춘추(東亞春秋)를 통해서 찬성 반대 주장이 몇 번씩 오가면서, 지식인은 물론이고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킨 논쟁이었다. 5·16 군사혁명 직후 상당히 경직된 분위기에 대한 지성계의 암묵적 반발 정서가 일조를 한 탓일까. 논쟁은 상당한 활기를 띠었다. 이 논쟁 주제는 이후 논술시험의 과제로도 더러 출제되어 오늘의 우리에게는 상당히 진부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논쟁 주제 자체가 상당히 진보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사형제도 찬성 주장을 편 사람이 천주교의 사제인 윤형중(尹亨重) 신부이고, 반대 주장을 편 사람이 현직 법관인 권순영(權純永) 판사였다는 점이다. 사회 일반의 통념으로 보면, 종교인인 신부는 사형제도의 존속을 반대할 것 같고, 법을 집행하는 법관은 사형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할 것 같은데, 이 논쟁에서는 우리들의 통념에 반하여 논쟁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두 분 논쟁 당사자들은 소신과 철학이 투철했다는 것을 엿보게도 한다. 논쟁은 윤 신부가 ‘처형대의 진실’이란 제목으로 흉악
바보란 밥만 축내면서 제 구실 못하는 사람 요즘 필자의 눈길을 끈 MBC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한 장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우정에서 사랑으로 발전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두루미(이지아 분)와 천재 트럼펫 주자 강건우(장근석 분) 커플, 가을 밤 정취에 취해 키스의 분위기가 무르익는데…. 입술과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애견 (베)토벤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괴짜 지휘자 강건우(동명이인, 김명민 분)에게 딱 걸리고 만다. “흥, 귀머거리에 백치라, 바보 커플이네. 계속해 봐….” 지휘자 강건우가 청신경 종양 때문에 청각을 잃게 될 두루미를 귀머거리로, 스스로 엄청난 음악적 천재임을 모른 채 좌충우돌하는 순수한 청년 강건우를 백치라고 비아냥거리는 대목이다. 이 대사를 수식으로 표현하면 ‘귀머거리+백치=바보’가 된다. 바보의 뜻을 찾아보면, 지능이 부족하여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 또는 어리석고 멍청하거나 못난 사람을 욕하거나 비난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보라고 부르는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바보를 규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고 볼 수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여하튼 통상적인 기준에 비추어 바보가 틀림
가슴과 머리에서 손으로 당연한 이야기에 대해 사람들은 두 가지로 반응한다. 하나는 무 반응이요, 다른 하나는 놀라움이다. 반응이 없는 사람은 그저 지나가고 놀라는 사람은 깨달음을 얻는다. ‘글은 손으로 쓴다’는 말도 그렇게 엇갈리는 반응을 가져오리라. 자율신경계의 활동은 대개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심장의 박동, 폐의 호흡, 장기들의 연동운동, 눈 깜박임 등은 그 운동을 의식한다는 것이 오히려 몸에 이상이 있다는 증좌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일 또한 그러하다. 손으로 펜을 잡고 글을 쓰면서, 혹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서 손의 동작이나 움직임을 일일이 마음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손이 움직인다. 그런 움직임이 반복되고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글을 쓴 종이를 들고 읽고 검토하고 교정을 한다. 한데 정작 그러한 일을 손으로 한다는 생각은 깊이 하지 않는 편이다. 손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을까. 글의 소재는 가슴으로 온다. 가슴으로 온다는 말은 감동으로, 충격으로 온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느 아침에 문득 보니 단풍이 깨어질 듯한 빛깔로 물들었다. 드디어 가을인 것이다. 공연히, 나도 모르게 ‘아!’하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면 그게 감동이고 충격이다.
교권은 학생의 인권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존중되고 보호받아야 한다. 특히, 학생을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유네스코의 ‘교원의 지위에 관한 권고’ 68조에서도 ‘교원은 전문직상의 책임 문제에 대해 불공정한 간섭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며 교사의 전문성에 대한 결정권을 인정하고 있다. 옛선현들은 ‘스승은 은인 중의 은인’이라며 ‘제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사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첫 번째는 스승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강조하는 의미로서 ‘그림자조차 밟지 말아야 한다’이고 두 번째는 ‘그림자’를 스승의 올바르지 못한 허상(虛像)으로 여겨 스승의 나쁜 점을 배우지 말라는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스승이 나쁜 그림자를 드러내게 되면 제자는 그것을 밟으며 따라가기 때문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도(師道)로서 사람이 사람을 참되게 가르친다는 것은 그 어느 일보다도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08년 오늘의 한국 사회는 스승에 대해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보호받아야 할 교권(敎權)이 침해되면서 ‘스승의 그림자’가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몇 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