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과 머리에서 손으로
당연한 이야기에 대해 사람들은 두 가지로 반응한다. 하나는 무 반응이요, 다른 하나는 놀라움이다. 반응이 없는 사람은 그저 지나가고 놀라는 사람은 깨달음을 얻는다. ‘글은 손으로 쓴다’는 말도 그렇게 엇갈리는 반응을 가져오리라.
자율신경계의 활동은 대개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심장의 박동, 폐의 호흡, 장기들의 연동운동, 눈 깜박임 등은 그 운동을 의식한다는 것이 오히려 몸에 이상이 있다는 증좌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일 또한 그러하다. 손으로 펜을 잡고 글을 쓰면서, 혹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서 손의 동작이나 움직임을 일일이 마음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손이 움직인다. 그런 움직임이 반복되고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글을 쓴 종이를 들고 읽고 검토하고 교정을 한다. 한데 정작 그러한 일을 손으로 한다는 생각은 깊이 하지 않는 편이다.
손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을까. 글의 소재는 가슴으로 온다. 가슴으로 온다는 말은 감동으로, 충격으로 온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느 아침에 문득 보니 단풍이 깨어질 듯한 빛깔로 물들었다. 드디어 가을인 것이다. 공연히, 나도 모르게 ‘아!’하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면 그게 감동이고 충격이다. 결혼 날짜를 잡아 놓은 소방관이 진화 작업 중에 목숨을 잃었다. 젊디젊은 얼굴을 검은 리본으로 두른 채 사람들의 절을 받는다. 결혼을 앞두고 남편감을 잃은 여성의 들먹이는 등 뒤로 삶의 슬픈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가슴에 짠한 소금물 같은 느낌이 차오른다. 이렇게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창작의 소재가 된다.
가슴으로 온 소재는 손으로 정리된다. 가슴을 치밀어 오르는 소재라도 그것을 손으로 정리해야 글이 된다. 얼개를 짜든지, 개요를 작성하든지, 아니면 그런 사전 절차가 귀찮아 일단 원고지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 손으로 글을 써 가는 중에 틀이 잡히고 생각이 정리된다. 한 번 생각한 것을 고치고 다듬을 수 있다는 데에 글쓰기의 매력이 있다. 시간의 수레바퀴에 매어 돌아가는 인생은 지나가면 되돌릴 수가 없다. 그런데 글은 써 가는 중에 얼마든지 되돌리고 다른 플롯을 짤 수 있다. 치달리는 생각을 곱씹어 되돌려 놓고 이야기 가닥을 다시 만들 수 있는 것은 손으로 작업하는 중에 시간을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이 잘 안 풀리는 경우 우리는 방 안을 바장이며 배회를 하기도 하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면서 공상에 잠기기도 한다. 습관에 따라서는 ‘붓방아를 찧고’ 앉아 있기도 한다. 연필이나 펜대의 뒤끝으로 책상을 툭툭 치면서 생각을 거듭하는 경우, 그런 표현을 쓴다. 그런데 생각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다른 생각이 떠올라 앞의 생각을 지우면서 얼크러진다. 결국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의 실타래에 내가 얽히고 만다.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이 가뭇없이 지워지고 떠오르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적어 놓는 것인데!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은 것을 뉘우치게 된다. 그런데 심장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다른 머리로 흘러가면서 넘치고 너울지던 생각은 손으로 정착되지 않는 한 그저 안개처럼 사라지기 십상이다. 그러니 감동이니 충격이니 놀라움이니 하는 것들은 물론이고,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각을 손으로 적어 놓아라. 글은 손으로 쓰기 때문이다.
‘고기를 잡았으면 그물은 잊어버려라’ 하는 말이 있다. 한자로 득어망전(得魚忘筌)이라고 한다. 꼭 그럴까? 고기를 잡은 경험을 지혜로 살리자면 그물을 잊을 게 아니라 다시 살펴야 한다. 내 손으로 글을 쓴다는 이 당연한 사실을 다시 음미하는 가운데 글은 손으로 쓴다는 말의 진의를 깨닫게 된다. 글을 쓴 다음에는 손을 정갈하게 씻고 다시 시작할 일이다.
손을 주제로 한 바리아시옹
글을 쓰는 당신의 손은 창조의 손이다. 글을 쓰든, 다른 일을 하든 우리는 손의 존재를 잊고 지낸다. 일단 안심이다. 손을 늘 의식해야 한다면 손에 이상이 있는 것이다. 내 존재의 근원을 늘 의식해야 한다면 불편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존재 근거가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는 경우, 불안과 회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주의 존재를 잊고 지낸다. 창조의 손을 잊고 지내더라도 이따금은 그 존재를 의식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손을 들어 보라. 손등에는 핏줄이 퍼렇게 살아 지나간다. 어렸을 때는 보송보송한 피부 밑에 보일 듯 말 듯한 핏줄이 서늘한 그림자처럼 지나갔는데, 어느새 핏줄이 굵어지고 일을 하면서 불끈거려 그런지 핏줄이 불거져 있다. 거기다가 나이를 좀 더 먹으면 피부는 번질번질하게 되고 핏줄이 고목나무 뿌리처럼 손등을 질러 지나간다. 그야말로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손가락 마디에는 언제 생긴 것인지 주름이 제법 굵게 앉았다. 손가락을 구부리고 펴는 데는 뼈의 움직임을 수용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 공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손마디에 주름이 생기는 것은 의당 그래야 한다. 그런데 그 주름이 너무 굵어 손 전체를 볼품없게 만든다. 손등이 그런데 손가락 마디가 홀로 깨끗하란 법이 있던가. 안타까운 일이다.
손가락 끝에 손톱이 연분홍으로 장식되어 있다. 손톱은 장식이 아니라 사실은 무기이고 유용성이 높은 도구이다. 손톱 없는 손가락을 생각해 보라. 쓸모를 떠나서 얼마나 밋밋하고 단조로울 것이며 무감각해 보이겠는가. 대개는 손가락에 손톱이 이어져 자라는 데에 뽀얀 초생달 무늬가 잡힌다. 이 무늬를 어른들은 ‘쌀알’이라고 했다. 손톱 밑에 쌀알이 크게 들면 식근(食根)을 한다고 어른들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먹고사는 데 걱정을 안 해도 되는 복을 타고났다는 것이었다. 손톱이 건강의 표징이니 먹을 것 걱정 않는 근본은 되는 셈이다.
손을 젖혀 손바닥을 들여다보라. 손이 접히면서 자국이 생기고 그 자국이 손금이 되었다. 관상가들은 손금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이야기한다. 목숨을 좌우한다는 생명선, 지혜의 크고 작음을 가리킨다는 두뇌선, 그리고 감정선, 성공선, 운명선 등 복잡한 선들이 크고 작은 길처럼 손바닥에 흩어져 있다. 손금은 변한다고 한다. 관상가들이 말하는 운명은 결정적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삶을 이끌어 가는 대강(大綱)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을 어떻게 운영하는가, 어떤 경험을 축적해 왔는가 하는 데 따라 손금이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자세히 들여다보면 손바닥 밑에는 푸르스름한 실핏줄이 지나간다. 거기 내 유년의 맑은 강물이 아직도 그윽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손가락 안쪽 끝에는 손가락마다 지문이 새겨져 있다. 태극무늬 비슷한 것이 있는가 하면 작은 실뿌리가 얽힌 것 같은 것도 있다. 동심원의 물무늬가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놈은 소용돌이가 되어 휘돌다가 한쪽으로 매끄럽게 빠지기도 한다. 주민등록을 만들기 위해 동사무소에 갔는데 일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지문이 닳아 버려 ‘지문 없는 사람’이 되어 돌아온 그는 강소주를 마시며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한 열흘 쉬고 오라”는 동사무소 직원의 이야기를 듣고, 내 팔자가 그렇게 한가하지를 못하다며 쓴 침을 삼키고 돌아섰다고 한다.
창조의 손은 그 모양부터가 녹록지 않다. 손 이야기를 하자고 해도 하루는 족히 할 수 있으리라. 당신의 손은 창조의 원천이며 창작의 원동력이다.
손, 하는 일이 많아 고생이라
어떤 일을 두고 애썼다는 이야기를 할 때 “수고했다”고 한다. 한자어 ‘수고(手苦)’를 떠올리기 쉬운데, 순 우리말이다. 아무튼 수고란 말을 들을 때 손의 고달픔을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듯하다.
손은 내 삶의 역사를 담고 있다. 내 삶의 고비에서 이루어졌던 각종의 기억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손에 남은 상처는 지난날의 어떤 일을 떠올리게 한다. 내 엄지손가락 안쪽 아래편에는 까만 흑연(黑鉛) 자국이 남아 있다. 고등학교 때 교복 호주머니에 연필을 거꾸로 꽂은 것을 잊고 어깨에 묻은 먼지를 떨다가 찔린 상처다. 왼손에는 여기저기 칼로 베고, 낫날이 지나간 자국이 남아 있다. 행동이 부잡스러운 데 원인이 있기도 하고 어른들 일하는 것을 보고는 덤벼들어 호기를 부리다가 생긴 상처들이다. 여러분 손의 작은 상처들, 봉숭아물을 들인 손톱, 손가락에 낀 반지 그런 추억이 구석구석 서려 있다. 오늘날까지 해 온 일들이 오늘 내 손 모양을 만들었다. 글을 쓰는 것은 내 삶의 역사를 쓰는 일이다. 지금 글을 쓴다면 그것은 내 미래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 역사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그 일을 손으로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손은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사물이 소통하는 감각기관이다. 세상에는 만져 보아서 아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 여름 시냇물에 손을 담갔을 때, 매끄럽게 흘러가는 그 감촉은 피부에 스며 핏줄로 연결되는 느낌이다. 가을 물은 싸늘한 감각으로 손을 에며 스며들어 정신을 쇄락(灑落)하게 한다. 봄에 얼음이 풀린 밭에 나가 흙을 파고 씨앗을 뿌릴 때 그 흙의 부드러운 감촉은 농부의 생의 감각과 연결된다. 손끝을 가시에 찔렸을 때의 그 아찔한 통증은 가시라는 것의 보편 상징을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가시밭길, 형극(荊棘)의 길을 이해하는 보편 감각은 그렇게 형성된다. 냇가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손에 잡힌 미꾸라지나 뱀장어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찌릿함과 느끼함은 생명에 대한 양가적인 감각으로 연결된다. 송창식의 노래 ‘한 번쯤’에 나오는 “말 한 번 붙여 봤으면, 손 한 번 잡아 봤으면” 하는 구절에 이르면 손은 사랑의 소통을 매개하는 통로가 된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는 경우는 자신과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계기이다.
기도의 몸짓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아마 손을 모으는 게 아닌가 싶다. 상대방의 안녕과 무사를 기원하는 인사 또한 손을 모으는 방법이 활용된다. 손은 성스러움을 지향하는 기도의 수단이다.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는 곧 글을 쓰는 자세이다. 모든 글쓰기를, 창작을 기도하는 자세로 해내기는 대단히 어렵다. 너무 부담을 주게 된다. 그러나 기본적인 자세는 그러해야 한다.
불가에서는 합장(合掌)으로 인사를 한다. 손을 모으면 두 손 사이에 성스러운 공간이 형성된다. 단학(丹學)이나 기공(氣攻)을 수행하는 이들이 손을 모아 단전 아래 편안하게 놓고 숨을 고르면 그 손안에 기가 가득 고인다는 이야기를 한다. 글 쓰는 자세는 기도를 하는 자세, 기 수련을 하는 자세, 공손한 인사를 올리는 그런 자세이다. 꼭 그래야 한다는 식의 억압적 강제를 하고 싶지는 않다. 몰두해서 글을 쓰는 시간, 나는 글쓰기 이외의 아무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법열(法悅)의 시간은 글을 마무리하면서, 현실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문득 깨닫게 된다. 그러할 때 잠시 손을 모으고 쓴 글에 대해 감사의 묵상을 해 보라.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거기 글을 쓴 기쁨이 가득 고이는 실감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라.
손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손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첫째는 손 그 자체만으로도 참으로 많은 글감을 제공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다음으로는 글은 손으로, 온몸으로 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글을 쓰기 위한 창작의 재료는 우리들 오관을 통해 몸으로 들어가 모이고 안에서 성숙되어 손으로 흘러나와 글이 된다.
흔히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사고하고, 몸으로 행동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행동은 근육운동적(Motor-sensorial) 표현을 연상하기 쉽다. 그런데 정서의 변화, 사상의 전환, 신념의 개조 등은 행동인가 아닌가. 글쓰기에서 논의되는 행동에는 심리-정신 영역의 모든 변화를 포함한다. 정신노동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육체의 노동 가운데는 정서노동, 지성노동 등이 모두 포함된다. 창작은 그런 의미의 노동에 해당한다. 그러한 노동의 환유적 표현이 글은 손으로 쓴다는 것이다.
손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의 신체 감각이 전체적으로 통합되어 실현된다는 뜻이다. 달리 생각하면 감각과 사고와 논리가 손끝을 타고 나와 종이 위에 일정한 형태의 글로 구체화된다. 머리로 생각한 것을 메모지에 옮기는 것부터가 손으로 글을 쓰는 일이다. 머릿속에서 생각한 것은 장기기억으로 오래 보존되지 않는다. 손을 통해 글로 기록을 해야 내용이 오래 보존된다.
글은 논리적 관계로 구성된다. 시도, 소설도, 수필도 한 편의 글마다 논리적 구성을 갖추기 마련이다. 논리적 구성, 즉 글의 얼개를 짜기 위해서는 적어 놓고, 단락의 위치를 바꾸고, 그렇게 바꾼 위치가 적절하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기록된 자료를 다시 보아야 한다. 그저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구조를 매만지고 그 매만진 것을 재배열하는 중에 논리적 구조는 완결성을 갖추게 된다.
창작의 과정은 사고를 구체화하는 과정이다. 가을볕이 좋아 들로 나갔다. 벼가 누렇게 익은 볏논에 메뚜기들이 후두둑 튀어 날아올라 달아난다. 이러한 메뚜기를 묘사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메뚜기의 모양새, 날아갈 때 날개의 빛깔, 날아가는 모습 등을 묘사하는 낱말을 찾고 선택하는 일이 우선 과제가 된다. 문장을 완성한 후에는 그 문장을 다시 손보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문장과 어울리는 문단인지를 판단해야 하고, 예를 든 것이라든지 메뚜기와 연관된 기억을 떠올린 것이 글 전체와 적절히 어울리는지 등의 판단을 해야 한다. 이때 손으로 써 놓은 문장들이 검토의 대상이 된다. 요컨대 가을 들판의 메뚜기는 글을 쓰는 그대의 손에 모이고 날아가고, 되돌아오기를 거듭한다. 글은 그렇게 손을 통해 구체화된다.

로댕의 작품 <칼레의 시민>은 짙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영국군이 점령한 프랑스의 ‘칼레 시’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기로 하고 나선 시민들 여섯 사람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한 것이다. 침중한 고뇌와, 들끓어 오르는 애국심으로 호소하는 무언의 항변, 나라의 운명에 대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현기증, 모든 체념 끝에 도달하는 평온함으로 시의 열쇠를 들고 있는 인물의 엄숙한 표정 등 어느 하나 지나치는 인물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조형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가운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속으로 오열하는 인물은 손에 가려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손이 다른 인물의 얼굴 그 이상의 표현 효과를 가져온 것을 보고는 로댕의 천재성에 놀랐다. 손으로 인물의 개성이 드러나는 조각을 위해 수많은 손을 예비적으로 조각한 사실 그 성실성에 다시금 놀랐다. 로댕의 손이 만든 손들, 거기 엉겨 붙은 함성이며, 그 손으로 전해져 오는 떨림, 몸부림 등은 실로 놀라운 예술적 감동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조작가의 손이 창조의 손이듯이 작가의 손 또한 창조의 손이다. 조각이나 글쓰기나 창조는 형상화이다. 형상화는 구체화의 예술적 방법이다. 손으로 쓰고, 다듬고, 버리고, 되불러오고 하는 과정은 전신적(全身的) 감각의 예술 활동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은 부지런한 손에서 나온다. 상상력마저도 손이 부지런한 사람의 정신에서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