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의 봄은 섬진강변을 따라 시작된다. 푸릇푸릇 새싹이 돋고 광양의 청매실 농원에 매화꽃이 만발하면 이에 질세라 구례 상위마을도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린다. 꽃빛깔만큼이나 고운 봄이 찾아오는 것이다.
꽃소식은 남도에서부터 올라온다. 남도의 젖줄인 섬진강을 따라 전해진다. 섬진강 가에 사는 시인은 섬진강을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강이라고 했다. 전북 진안군 팔공산에서 시작해 전남 광양 앞바다에 안착 할 때까지 530리 길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흐르는 섬진강은 어머니의 가슴처럼 편안하고 정겹다.
섬진강(蟾津江)의 섬 자는 ‘두꺼비 섬(蟾)’자를 쓴다. 고려 때 어느 여름 장마철에 두꺼비가 줄을 지어 몰려들었는데 그 길이가 10리에 달했다는 전설에서 기인한다. 고려 우왕 11년(1385) 왜구가 섬진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수십만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불길함을 느낀 왜구가 광양만 쪽으로 피해갔다는 또 다른 전설도 있다.
삼국시대 전, 섬진강변은 백제와 가야의 싸움터였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가 섬진강 물목을 경계로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곳이다. 단군 조선 때도 지금처럼 모래가 많았는지 모래내 또는 모래가람이라 불렀고 그 이후에도 모래가 자꾸 쌓여 다사강(多沙江)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하동 부근에는 모래가 많다. 섬진강이라는 이름은 고려 말에 얻었다.
매화꽃비가 내리는 다압면 매화마을섬진강 줄기를 따라 오르면 바람 속에 매화꽃 향기가 난다. 만물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꽃을 피워 봄을 가장 먼저 알려줌으로서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표상이 되던 매화는 소나무, 대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로 불렸다. 고결한 이미지로 시나 그림의 단골소재로 사랑받는 꽃이기도 하다.
전남 광양시 다압면. 이곳에 이르면 섬진마을이라는 이름 외에 ‘매화마을이라는 불리는 아름다운 동네가 있다. 반짝이는 섬진강 수면 위로 매화꽃이 떠다닌다. 강 건너에서 동네를 건너다보면 수십만 그루의 매화나무가 산언덕에 심어져 있다. 동으로는 섬진강을 경계로 경남 하동군, 서로는 진상면과 옥룡면, 남으로는 진월면, 북으로는 구례군 간전면에 닿아 있다. 뒤쪽에는 전남에서 제일 높은 백운산이 병풍처럼 버티고 앞쪽에는 섬진강이 감아 도니 그림같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곳 광양은 예로부터 ‘앞문을 열면 숭어가 뛰고, 뒷문을 열면 노루가 뛴다’는 말이 전해올 정도로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아름답고 살기 좋은 매화마을은 봄이 되면 온통 새하얀 매화꽃으로 뒤덮인다. 마을 주변 밭과 산능선 99여만㎡에 운집한 100만 그루의 매화나무 꽃 무리는 그림 같은 섬진강의 운치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보통 3월 중순 경에서부터 매화꽃이 피기 시작한다. 송이송이 매화꽃이 만개하면 한겨울의 함박눈이 가지마다 달린 듯, 수백 가마 팝콘을 하늘에서 쏟아 붓듯 황홀하기 그지없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바람결에 흩날리는 매화꽃잎이 몽환적이다.
이 광경을 보았는지 김용택 섬진강 시인은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라는 시를 지었다.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김용택
매화꽃 이파리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푸른 강물에 날리는
섬진강을 보셨는지요
푸른 강물 하얀 모래밭
날선 푸른 댓잎이 사운대는
섬진강가에 서럽게 서 보셨는지요 매화꽃을 감상하기 좋은 곳은 역시 청매실농원이다. 밤나무골 김영감, 고 김오천 선생이 1930년대 일본에서 광부생활로 모은 돈으로 매화나무 5천 그루를 사온 것이 그 시초다. 그의 며느리 홍쌍리 여사가 해충을 쫓아내기 위해 꽹과리를 쳐대며 10만 그루의 매화를 키웠다. 매화나무의 키는 5∼10m이다. 봄이 되면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데 연한 붉은 색을 띈 흰 빛의 매화나무 꽃은 은은한 향기가 난다. 마치 넓은 달걀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모양의 꽃잎이 여러 장 피는데 수술이 많고 그 끝에 노란 꽃가루가 아름답다. 이 꽃이 지며 교대라도 하듯 잎이 선보이는데 달걀 모양인 잎은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톱니가 있고 양면에 털이 나 있으며 잎자루에 선(腺)이 있다. 꽃이 지고 나면 빽빽한 털이 난 씨방이 공모양의 열매가 된다. 녹색의 열매가 바로 매실(梅實)이다.
매실은 단지 매화나무 열매가 아니다. 집집마다 가정상비약으로 매실농축액을 보관하는데 배에 탈이 났을 때 따뜻한 물에 타서 먹으면 즉시 효과가 있다. 이는 과학적으로 이미 증명된 사실로 매실에는 위장, 소장, 대장의 작용을 활발하게 하고 혈중 콜레스테롤 증가를 억제하는 효능이 있다. 항균작용을 발휘하는 구연산 성분이 레몬보다 5~7배나 많아 적은 농도로도 높은 항균 효과를 보인다.
매실은 5∼6월에 덜 익었을 때 따서 약 40℃의 불에 쬐어 과육이 노란빛을 띤 갈색(60% 건조)이 되었을 때 햇빛에 말리면 검게 변한다. 이를 오매(烏梅)라 하는데 한방에서는 수렴(收斂), 지사(止瀉), 진해, 구충의 효능이 있어 설사, 이질, 해수, 인후종통(咽喉腫痛), 요혈(尿血), 혈변(血便), 회충복통, 구충증 등의 치료에 처방한다. 매화나무의 뿌리는 매근(梅根), 가지는 매지(梅枝), 잎은 매엽(梅葉), 씨는 매인(梅仁)이라 부르는데 역시 약용으로 사용하니 매화나무는 온 몸이 약재인 셈이다. 덜 익은 열매는 소주에 담가 매실주를 만든다.
청매실 농원을 돌아보면 소담한 매화꽃만큼이나 보기 좋은 풍광이 있다. 2500여 개의 옹기가 놓인 농원 앞마당의 장독대다. 가지런히 정렬된 장독대는 마치 사열을 받는 군인처럼 질서정연하다. 장독대 너머로 옥색의 섬진강이 그림 같은 풍경을 펼쳐낸다. 이 옹기 안에는 매실로 담은 고추장, 된장, 장아찌, 절임 등이 가득하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뿌듯하다. 그저 이곳에서 흩날리는 매화꽃을, 굽이치는 섬진강을, 늘어선 장독대를 보며 보고 마냥 그렇게 있고 싶어진다.
노란 수채화 속 동화세상 산수유 마을매화마을에서 섬진강을 따라 북상하면 전남 구례군과 만난다. 민족의 영산 지리산을 끼고 있는 고장이다. 고속도로와 다를 바 없는 닦인 19번 국도를 따라 가다 보면 오른쪽에 산동면이 있다. 중국 산둥성 처녀가 지리산으로 시집오면서 산수유나무를 가져와 심었기 때문에 이 같은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생김새가 중국의 촉나라 대추와 비슷한데다 신맛이 두드러져 산수유는 촉산초(蜀散草)라고도 불린다.
구례 산동면의 산수유 꽃은 다압면의 매화보다 일주일가량 늦다. 하지만 막상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금방 천지를 진동시킨다. 매화마을과 산수유마을은 차량으로 30분 거리다.
원래 산수유마을은 지리산 북쪽 자락에 걸친 산동면 위안리 상위마을을 지칭했다. 2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자그마한 산골마을로 해마다 봄이면 산수유나무가 온 동네를 샛노랗게 뒤덮었다. 그러던 산수유 꽃구름대가 아래쪽으로 내려오더니 지금은 하위 월계 구산 대음 등 산동면 전체를 노랗게 물들인다.

산수유는 다년생 나무로 3월초에 꽃망울을 맺기 시작한다. 지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을 먹고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면 수줍은 시골 처자처럼 몰래몰래 번져 마을은 이내 노란 산수유 꽃으로 뒤덮인다. 이 시기에 맞춰 산수유축제도 열린다. 산수유두부먹기, 산수유 떡치기, 산수유꽃길걷기 등 산수유와 관련된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지리산온천단지에서 축제가 열리니 한창 때라면 여기서도 충분히 노란 산수유의 정취를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림엽서 같은 진풍경을 원한다면 지리산 중턱의 산중 마을을 답사하는 것이 좋다. 마치 노란 색으로 그린 수채화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 동화 속 분위기다.
봄을 상징하는 노란 꽃에는 무엇이 있을까. 개나리와 산수유, 생강나무가 이른 봄에 노란색 꽃을 핀다. 게다가 세 가지 모두 잎보다 먼저 노란 꽃이 피는 나무다. 개나리는 분별이 쉽지만 산수유와 생강나무는 엇비슷해 꽃잎만 보면 그게 그 꽃 같다. 산수유나무는 나무껍질이 거칠고 생강나무는 껍질이 매끈하다. 산수유는 큰키나무이고 생강나무는 떨기나무(뿌리에서 가는 줄기가 올라와 잔가지가 더부룩하게 자라는 나무)라는 점도 차이점이다. 추천할 일은 아니지만 가지를 꺾었을 때 생강냄새가 나면 생강나무다.
노랗던 산수유 꽃은 11월이면 붉은 보석 같은 열매를 맺는다. 층층나무 과에 속하는 산수유의 열매는 긴 타원형이다. 처음에는 녹색이었다가 8~10월에 붉게 익는데 약간의 단맛과 함께 떫고 강한 신맛이 난다. 10월 중순 상강(霜降 된서리가 내릴 때)에 수확하는데, 비타민 A와 다량의 당(糖)이 함유되어 있다. <동의보감>, <향약집성방>에는 두통, 이명(耳鳴), 해수병, 해열, 월경과다 등에 약재로 쓰이며 식은땀, 야뇨증 등의 민간요법에도 사용된다고 쓰여 있다. 빨간 껍질과 씨앗을 분리한 뒤 껍질로 차, 술, 한약재를 만든다. 예전에는 마을 처녀들이 열매를 입에 넣은 뒤 깨물어 껍질과 씨를 분리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이 작업을 한 이 마을 처녀들은 앞니가 닳아있어 산동처녀를 쉽게 구분했다고 한다. 다행이 지금은 기계가 작업을 대신하고 있다.
지리산온천단지에서부터 상위마을까지 산수유를 따라가는 길은 10리나 된다. 돌담길과 어우러지는 산수유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금쪽같은 나무다. 산수유 한그루 한그루가 이곳에서는 관상용이 아닌 한해 농사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산수유는 열매가 실해 다른 지역의 산수유보다 상품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자연적 환경과 토질, 기후가 적합해 육질이 두껍고 시고 떫은맛이 두드러지며 색이 곱기 때문이다. 실제 산동면의 산수유 생산량은 연간 200톤가량으로 국내 생산량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그 넓이가 무려 30만평이다.
열매의 효능도 뛰어나다. 신장계통 및 당뇨병, 고혈압, 관절염, 부인병 등 각종 성인병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최근에는 남성 건강과 정력에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인기 열매로 자리 잡고 있다. 봄이면 봄소식을 가을이면 약재를 선사하는 산수유는 산동면의 보물이다. |chorani7@chol.com
알·아·두·면·좋·아·요 ------------------------
가는 길 대전-진주고속도로를 타고 진주분기점에서 남해고속도로 순천방면으로 가다가 옥곡IC에서 빠진다. 2번국도와 만나 하동 섬진강다리 앞에서 861번 도로를 타고 섬진강을 따라 올라가면 매화마을과 만난다. 매화마을에서 861번 도로를 타고 강을 따라 올라간다. 강 건너로 길이 하나 더 있는 데 19번 국도이다. 매화마을에서 화개장터로 유명한 남도대교를 건너 19번국도와 합류, 계속 북상하면 지리산온천단지가 있는 산동마을이 나온다. 온천관광지에서 4㎞가량 떨어진 언덕에 산수유마을인 상위마을이 있다. 구례군청 문화관광과(061-780-2227).
주변관광지 매화마을에서 구례로 향하는 길에는 ‘토지’의 배경인 최참판댁과 악양들판이 있다. 남도대교 근처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고 경상도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장을 보던 화개장터가 있다. 지금이야 예전의 정취를 느낄 수 없지만 영호남이 화합하는 표상의 지명이기도 하다. 섬진강을 따라 더 오르면 운조루가 반기고 화엄사도 손짓한다.
잠잘 곳 매화마을은 광양시내에서 떨어져 있는 대신 섬진강 건너 경남 하동과 가깝기 때문에 하동군 화개면 일대 숙박시설을 이용하거나 매화마을 인근의 가정집 민박을 해야 한다. 산수유마을은 축제가 열리는 지리산 온천단지 주변에 호텔과 모텔 등 숙소가 많다. 지리산온천관광호텔(061-783-2900), 지리산송원리조트(780-8000)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