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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무엇인가, 시인이란 무엇인가 - 미당 서정주의 시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자화상)의 첫 행이 준 충격은 정말 대단했다. 어느 누구의 자화상이 이랬단 말인가?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로 강렬하게 이미지들을 중첩하고 다시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로 역사성을 얹는다.


이러한 시구들은 입시 대비와 무관하게 내 푸른 시절을 온통 뒤흔들며 다가왔다. 어느새 나 자신은 또 다른 ‘종’, 또 ‘죄인(罪人)’과 ‘천치(天痴)’, 또 다른 ‘수캐’였다. 그의 자화상은 바로 나의 자화상이었다. 나는 내 청춘이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로 자신을 성찰하며 시작하자마자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로 영원히 끝나기를 바랐다. 다가올 삶이 마냥 불안하였으므로 삶이 그대로 끝나도 나는 좋았다.

돌이켜 보면 그는, 아니 나는?

고등학교 때 미당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배웠던 시간. 작가가 <시인부락> 동인이며 시 또한 입시에 자주 출제되니 그의 시는 반드시 외우라는 지시가 모두에게 떨어졌다. 별 어려움 없이 금세 외울 수 있었다. 시작은 ‘별로’ 탐탁하지 않았지만 과정은 ‘왠지’ 쉬웠고 성과도 ‘제법’ 근사했던 셈이다.

그랬다. 무엇인지 잘 모르겠으나 그의 어휘는 내 가슴 깊이 파고들었고, 또한 무엇인지 잘 모르겠으나 그의 심상은 내 머리 가득 폭발했고, 역시 무엇인지 잘 모르겠으나 그의 운율은 내 호흡 온통 흔들리게 만들었다. ‘무엇인지’는 과연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그 질문이 얼마나 큰지 당시에는 미처 가늠할 수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국문학 작품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나는 비로소 그 ‘무엇인지’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서구의 형식주의와 신화주의 비평의 세례 속에서 미당의 시들은 마침내 휘황한 정체를 드러냈던 것이다. <화사집>과 <귀촉도>, <신라초>와 <동천>, 그리고 <질마재 신화>로 이어지는 미당의 시들은 거대한 언어의 세계였다.

국문학 교수들은 서구 문학 이론으로 중무장하고 미당이 노래하는 이 땅의 정서와 언어를 능숙하게 드러내 주었다. 그의 시가 갖고 있는 마력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그의 언어들이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 그래서 나의 가슴에 어떻게 다가왔는지. 나의 호흡을 어떻게 멎고 트이게 하였는지 가르침은 명료하면서도 웅숭깊었다. 나는 문학의 비밀을 마침내 제대로 엿보기 시작한 청년, 문학의 풍요로움에 비로소 눈뜨기 시작한 영혼이었다. 나는 교수들을 학문의 스승으로, 미당을 창작의 스승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화사(花蛇)>의 “아름다운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그리고 <문둥이>의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귀촉도(歸蜀道)>의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추천사(鞦韆詞)>와 <춘향 유문(遺文)>, 다시 <동천(冬天)>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내가 돌이 되면> 등의 여러 시행마다 나도 모르게 밑줄을 긋고 또 긋고 있었다.

그의 상상력은 멀리 수천 년의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나를 끌어들였다. 기존의 언어에 자유자재로 리듬을 불어넣고 의미를 찾아내는 솜씨는 <신부>와 <해일>과 같은 산문시에서도 예외없이 놀랍게 빛났다. 특히 미당의 운율은 지금까지도 내 글과 내 호흡의 운율을 저 바닥 깊은 곳에서 좌우할 뿐만 아니라 다른 시들을 읽을 때 기본 운율로 작동하고 있을 듯싶다.

서정주. 그는 언어의 진정한 연금술사였다. 단지 몇 개의 낱말들이 그의 머리와 가슴, 목을 거치면 언제나 새로운 언어의 세계가 천상의 우주보다 더 웅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미당 덕분에 시란 그저 영감이 스쳐서 이루어질 뿐이라는 가벼운 낭만적 가치관은 송두리째 흔들렸고 다시 흔들리고 또 다시 흔들렸다. 그는 내게 신화의 언어이자 언어의 신화였다.

“미당은 운명하기 전까지 거의 60여 년 동안 십수 권의 시집을 펴내며 시작 활동을 계속해 온 열정의 시인이었다. 초기에는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아 서구적 원죄 의식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여 준다.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자화상)” 청춘의 피끓는 고뇌에 괴로워하는 시기다. 첫 번째 시집인 <화사집((1941)에서 보여주는 본능적이고 관능적이며, 악마적이며, 상징적인 시들이 이 무렵의 대표적인 시들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불안한 젊은 천재의 모습이 어린다.
<귀촉도>(1946) 이후 불교와 신라를 만나면서 놀라울 만큼 변모한다. 즉 동양적 세계관으로 관심을 돌려 안정된 정신세계를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시인의 고향인 ‘질마재’는 유교와 불교, 무교가 뒤섞인 정신적 자궁으로서 톡톡히 구실한다. 토착적인 언어로 전통적 서정의 세계를 자유롭게 노래한 시기다. 말년에는 해외여행을 하면서 계속 시를 쓰는 놀라운 열정을 과시하기도 한다.“ (허병두, “'국어의 절정'-'반민족' 곤혹스럽게 하는 미당의 시”, 한겨레신문, 2004년 11월 15일)


하지만 미당, 서정주, 그는…

서정주, 그는 친일 시인이었다. 그가 쓴 친일의 시는 공식적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친일시는 엄혹한 군사 독재 시절, 밤마다 몰래 숨죽이며 펼쳐들던 월북 작가들의 작품집만큼이나 조악한 또 다른 자료집들에 박혀 있었다. 미당이 친일시를 썼다니! 우리 전통을 노래한 시인이 외세의 앞잡이가 되어 황국신민의 길을 노래하다니! 대단한 충격이었다. 더구나 그의 친일시들은 어쩔 수 없이 썼다고 보기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수준을 과시했다. 국가와 민족, 민중을 떠나서 생각한다면 그의 친일시들은 미학적으로도 빼어났다.

그가 현실과 전혀 상관없이, 또는 민족의 아픔을 외면한 채로 수천 년 동안의 우리 정서를 시로 그려냈다면 차라리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일제의 감옥에서 죽임 당한 육사지만 그의 시 주인공은 오히려 미당 자신일 수도 있으니까. 비록 지금 ‘눈’ 내리는 현실’ 따위는 아랑곳 않지만 오로지 ‘천고의 뒤’를 기다리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주인공은 반드시 역사의식만 가져야 할 까닭은 없으니까.

그가 만일 적극적으로 친일시를 쓰지 않았다면 나는 육사와 미당을 서로 다른 자세로 같은 좌표 위에 자리 잡은 예술가들로 대하였을 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세월이 어둡다고 언어마저 어두워야 할 이유는 없다. 아무리 모질고 힘든 시기라도 젖먹이에게 젖을 물리고 동화를 읽어줘야 하듯이 시인은 모국어를 품으며 자신의 영혼을 키우고 다시 모국어로 자신의 영혼을 드러내야 한다.

조금씩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서 국가가 감추었던 월북 작가들의 글이 점점 더 많이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매우 불경한 언어였고 그들을 읽는 것은 더욱 불온한 일이었다. 그들이 읽는 작가와 작품들은 그래서 더 부정해야 했고, 그들이 아닌 작가와 작품들은 우습게도 다시 더욱 훌륭하게 미화되곤 하였다. 월북 작가는 불온하고 위험한 원흉이었으며 친일 작가는 어쩔 수 없이 협조하고 만 인간이었다! 친일은 월북보다 낫다! 월북은 현실로 남은 과거요, 친일은 과거로 남은 현실이었다.

나는 민족 문학을 공부했고 다시 친일 문학에 관심을 두었다. 그들은 모두 내게 좋은 스승들이었다. 하나는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정(正)’, 또 다른 하나는 반드시 인정하면 안 되는 ‘반(反)’. 나는 ‘합(合)’의 경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사유할 수 없는 풋내기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그러던 중에 다시 미당이 군사독재의 우두머리에게 바친 ‘신 용비어천가’가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가슴 깊은 곳이 다시 서늘하게 시려왔다. 이제 실수라고 보기도 어려운 상황, 많은 비난이 미당에게 쏟아졌고 미당 또한 감수하였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그는 예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모국어를 다루는 귀재 중의 귀재. 누가 그렇게 우리말을 자유스럽게 향토의 서정과 전통의 내음을 담아 오늘에 내놓을 수 있을까. 그의 언어에는 과거가 담기고 전통이 빛나며 신화가 숨쉰다. 그의 시편에는 범접하기 어려운 천재성이 빛난다. 천재와 언어가 만나는 행복한 풍경이 미당의 시편들마다 펼쳐진다. 그만큼 그의 작품에서는 작가가 살고 시가 살고 다시 시가 살고 미당이 산다.

하지만, 그는 사상적인 측면에서 보면 언제나 ‘해바라기’에 불과한 소인 중의 소인. 누가 그렇게 격렬하게 찬반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그리고 지금은 이상하리 만큼 사그라든 채 온갖 비난을 받았을까. 그의 사유가 영원과 만나면 한껏 꽃을 피우지만, 그의 사상이 시속과 만나면 늘 심각하게 부작용을 일으켰다. 그에게는 평생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배역자라는 손가락질이 뒤따랐다. 그만큼 그의 시는 시인의 삶과 연관되며 비루하고 남루해지며 빛을 잃었다.

“신들린 샤먼(shaman)처럼 한국어의 진경과 절창을 끊임없이 새롭게 펼쳐낸 시인. 친일 문학 작품을 쓴 부끄러운 원로 문학인.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등 마지못해 썼다고 보기에는 적지 않은 친일 작품들, ‘오장 마쓰이 송가’(1944)와 같이 억지로 썼다고 보기에는 완성도가 빼어난 작품들. 독립운동처럼 민주화 운동이 뜨거웠을 때, 총칼로 집권한 군부 독재자에게 아부한 노년의 부적절한 행태. 뛰어난 언어적 재능과 뜨거운 예술적 열정. 그럼에도 힘센 권력에 빌붙던 처신. 복잡하게 그려지는 시와 시인 앞에 그저 곤혹스러울 뿐이다. (중략)
그를 읽으면서 여전히 두 개의 문장이 맴돌지 않을까 싶다. 그는 시인이다! 그는 시인이 아니다!-아,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 시인이란 과연 누구인가?”(허병두, “'국어의 절정'-'반민족' 곤혹스럽게 하는 미당의 시”, 한겨레신문, 2004년 11월 15일)

아직까지 미당은 내게 풀지 못한 숙제다. 미당과 그의 시들을 푸른 영혼의 제자들이 어떻게 감상하게 해야 할까. 물론 모든 이들이 각자 자신의 관점에서 시를 즐겨야 하지만, 도무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작가와 작품, 다시 말해 작품 속의 작가와 작가 속의 작품을 구별하고 다시 연관지으며 가르쳐야 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인 것이다.

그렇다고 미당을 빼고 우리 문학사를 온전하게 가르칠 수 있을까? 또한 미당을 가르치면서 우리 문학사를 자랑스럽게 전해줄 수 있을까? 올바른 문인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그의 언어는 어떠해야 하는지 또렷하게 말해 줄 수 있을까? 국가가 중고등학생을 ‘인적 자원’으로 대하고 경쟁력 강화를 강조하면서 ‘무한경쟁’의 노동 시장으로 모는 현실에서 문인은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어떠한 문학적 형상화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 미당의 문제는 사실 미당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는 문학과 작가, 언어와 삶, 예술과 현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언제나 깊게 사유하게 만드는 존재다.

문학 작품의 해석과 평가, 그리고 교육

문학 작품은 그 자체로 해석하고 평가해야 한다. 굳이 형식주의의 문학 이론을 들지 않더라도 작품을 작품 그 자체로 대해야 하는 것이 최우선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작품을 작품 그 자체로만 해석하고 평가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작품을 창조한 작가와 이를 수용하는 독자, 이를 품은 넓은 의미의 현실을 모두 아우르며 평가해야 하기 위한 기초를 확실히 다져두자는 뜻에서다.

따라서 미당의 시에서는 모국어를 한껏 활용한 언어의 연금술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모국어를 사용한 시가 자칫 현실과 유리되고 역사의식을 잃게 될 때 얼마나 초라해지는지 학생들 각자 교훈을 얻게 해야 한다. 재주가 뛰어나다고 해서 존경 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문학이 현실의 권력에 빌붙을 때 그 스스로의 힘, 아름다움의 힘을 잃게 된다는 진실. 훌륭한 문인은 현실과 치열하게 맞서며 자신의 작품을 잉태하고 출산하며 양육한다는 진리. 이 모든 것들을 학생 스스로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형성하면서 판단하게 도와야 한다. 가장 훌륭한 시와 시인이 가장 훌륭하지 않을 수 있다는 교훈은 문학과 삶을 의미심장하게 곱씹게 할 것이다.

<함께 생각하면 좋은 점들>
1. 통일이 되면 미당의 작품은 어떤 평가를 받을까? 통일 문학사에서 미당의 시적 위상은?
2. 미당의 시집들에서 꾸준히 반복되는 공통점과 다양하게 변형되는 차이점들은 과연 무엇일까?
3. 미당이 쓴 시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시가 있다면 스스로 질문해 보자. 왜 그럴까?

<덧붙이는 말들>
1991년에 민음사에서 <미당 서정주 전집>이 두 권으로 나왔다. 이후의 미당 관련 책들도 이 책의 바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2002년에는 문학사상사에서 한국대표시인 101인선집 안에 미당 시선집 <미당 서정주>를 펴냈다. 이 책의 뒤편에는 서정주 시인이 직접 고르고 낭송한 <육성 시낭송 CD>가 덧붙여 있으니 꼭 챙겨놓으실 것. 부담 없이 미당의 시세계만 오롯하게 살펴보려면 미래사에서 2001년 말에 출판한 시선집 <푸르른 날>을 읽으면 좋다. 미당이 1915년부터 2000년까지 쓴 시들 가운데 스스로 고른 100여 편 정도를 모았다. 시인이 자신의 시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짐작해 보는 의미와 재미 또한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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