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이 단풍보다 아름다운 계절의 여왕 가정의 달에는 가족을 생각하게 하는 날도 많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입양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까지 달력을 보면 비워진 날이 며칠 안 보인다. 한 집에 같이 사는 손자가 없어 조금 한가한 어린이날 고향에 어머니를 뵈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며칠 전부터 계획하여 한 번 다녀왔다.
고향 가는 날, 마음은 늘 바쁜데 차는 왜 자꾸 느리게만 가는지 모르겠다. 고향집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거리를 내 놓는다. 작은방에 형광등 갈고 마루에 문이 안 열리는데 고치고, 다 하면 좀 이르긴 해도 여럿이 있을 때 참깨를 심자고 하신다.
10여분이나 지났을까. 다했냐고 벌써 다그친다. 날씨는 더운데 시원할 때 빨리 안하면 더워서 못 심는다며 벌써 참깨 씨와 연장을 내놓고 기다리고 있다. 옛날에 일을 많이 해 이제 다리도 아프고 움직이는 것도 불편하여 집 가까이의 밭만 조금 붙이고 있는데 뒷대문과 붙은 밭에는 고추를 심고 집 뒤에는 깨를 심으려고 벌써 비닐을 덮어 놨다. 다해야 300여평이나 될까하는 조그마한 밭 두 뙤기다.
참깨를 심기 시작했다. 나는 막대기로 한 뼘 정도 거리를 두고 2줄 지그재그로 구멍을 뚫고 농사의 전문가 어머니는 박카스 병에 참깨를 넣어 톡톡 치면 못으로 뚫어 둔 구멍으로 참깨가 네다섯 알씩 톡톡 떨어진다. 그 다음 아내가 그 위에 흙을 덮으면 끝난다. 한 시간 정도면 끝나겠지 하고 시작 했는데 세 시간 정도 걸렸고 허리도 아프고 다리가 아팠지만 어머니도 하는데 말도 못하고 참고 일을 다 마치니 벌써 한 시가 넘었다.
어버이날이 모래니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더니 기어코 안 간다고 한다. 밥도 많이 해놨는데 집에서 먹는다고 한다. 점심이라도 한 그릇 사 드리려고 갔는데 식은 밥을 먹고 집으로 오려고 하니 냉장고에서 봉지 싸 둔 것을 자꾸 꺼낸다. 이건 냉이 삶은 것, 이건 씀바귀 이건 구기자순, 이건 가죽 등등 많기도 많다.
그중 마지막으로 편지봉투에 담긴 것을 꺼낸다.
"이건 호박씨 깐 거다. 가지고 가서 애비 줘라."
어릴 때부터 호박씨를 좋아했는데, 대구에 도착해서 호박씨를 먹으니 눈물이 난다. 눈도 안 좋은데 돋보기를 끼고 며칠을 깠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드문드문 덜 깐 껍질이 붙어있는 호박씨. 봄에 호박을 심고 남은 호박씨를 육십이 넘은 아들이 호박씨 좋아 한다고 팔순을 넘은 어머니가 깐 호박씨. 옛날에 어머니가 까준 호박씨를 한 입에 틀어넣어 씹으면 하얀 물이 입가에 질벅하게 배어나오며 구수했던 옛날에 어머니가 까 주던 그 호박씨가 아니다. 구수하던 그 맛이 아니다 모래를 씹는 것 같이 까끌까끌하다. 어머니가 깐 호박씨, 아까워 넘어가질 안는다. 오늘 다시 전화를 해 본다 호박씨 아주 맛있었다며, 이제는 아들 걱정 마시라고…. 전화에 어머니는 오늘 또 아들 걱정이다. "비 오는데 차 조심해 몰고, 술 좀 적게 먹고" "예, 예 알았습니다"하고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