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시간이 되면 노래를 부르기 싫어하는 남학생들의 입이 한 대빨은 튀어나오고, 체육시간이 되면 움직이기 싫어하는 여학생들의 입이 참새부리처럼 뾰족 튀어나온다. 차분한 분위기에서 노래를 부르게 해야 하는 음악선생님은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남학생에게 잔소리를 해야 하고, 활동적으로 움직이게 해야 하는 체육선생님은 엉덩이가 무거운 여학생에게 잔소리를 해야 하는 반대의 상황이 연출된다. 그런 상황이 같이 가르침을 업으로 삼는 담임교사인 나는 지극히 이해되고도 남는 데 아이들은 그것을 차별로 받아들인다.
편애니 뭐니 해가면서 볼멘소리를 해대는 아이들을 보면 웃음부터 나온다. 어쩜 그렇게 시대가 바뀌어도 원초적인 질투심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지...
“엄마는 막내동생만 좋아해.” “선생님은 공부 잘하는 아이만 예뻐해.” “동아리 선배는 여시 같은 후배만 잘해줘!” “상사는 앞에서 알랑대는 부하직원 말만 잘들어줘.”
상황판단 못하는 어린아이나 그럴 나이가 된 어른이나 대상만 달라졌을뿐 원초급의 시샘은 여전하다. 생각의 키가 넓어진 어른조차도 그런 딜레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질투의 본능은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숙제가 아닌가 한다. 나 또한 겉으로 표현하진 않지만 지금도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가르침을 업으로 삼는 교사가 되고부터 바뀐 것은 있다. 아이들에게만큼은 누구만 예쁜 게 아니라 누구든 다 이쁘다는 것이다. 말썽꾸러기라서 눈에 먼저 띄는 녀석부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조용한 녀석까지 모두모두 하나씩은 다 예쁜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활달한 녀석은 한번씩 사고를 쳐서 속을 뒤집어놓을 때도 있지만 뒤끝이 없어서 좋고, 없어도 없어진 줄도 모르는 조용한 녀석은 눈길은 좀 덜가지만 스스로 알아서 하니까 믿거니 해서 좋고, 공부는 잘하지만 성깔 있는 놈은 고 성질 땜에 뭔가는 할 것 같아서 좋고, 공부는 못하지만 덜렁덜렁한 놈은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좋고...
이래서 이쁘고 저래서 다 예쁜데 개구쟁이과의 녀석들은 꾸지람만 받다보니까 선생님이 자기만 미워하는 줄 알고, 조용한 녀석들은 눈길이 자주 안가니 자기에게 관심 없다고 서운하다고 한다. 꾸지람은 그만큼 기대가 크기에, 눈길의 소원함은 믿는 구석이 있기에 그러함을 아직 모르는 까닭이다. 언제쯤이면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진리를 알 수 있을까?
얘들아, 아침 8시 30분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매일 6시간을 함께 부대끼며 생활하는 내가, 부모님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내가, 너희들 24명의 마음을 모르겠냐? 선생님께 인정받고 싶어서, 친구들 앞에서 폼 한번 재보고 싶어서 돌출행동 하는 네 놈들의 속마음을 내가 모를 것 같니? 편애한다는 말에 맞장구를 칠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 너희들을 공부에 집중하게 해서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픈 음악 선생님과 체육선생님의 열정을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기 때문이지.
내가 알려줄까 진실을... 꾸지람은 애정의 반증이라는 것이고 아직도 너희들에 대한 사랑이 열렬히 남아있다는 증거야. 꾸지람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관심이라는걸 아는 때가 되면 너희들의 온 몸에 전율이 일껄. 여자라서 여학생이 예쁘다고? 남자라서 남학생을 좋아한다고? 그건 너희들의 소극적인 성취욕구나 과한 행동을 감추려는 핑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모자라거나 넘치는 행동에 대한 질책이었다는 것을 정확히 알기 바래. 고런 행동이 고쳐지면 요런 말이 다시 나올테니까.
“음악 선생님은 여자라서 여자를 예뻐하구요, 남자들은 더 예뻐해요.” “체육 선생님은 남자라서 남자를 좋아하구요, 여자들은 더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