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수요자 중심 교육과정이 도입되면서 교사는 안내자로서, 아동과 학부모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 창의성 교육의 서비스 맨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더 중요한 인성지도나 생활지도, 진로에 대한 전문 상담자로서의 위치는 무너져 버렸다.
그렇게 된 이유중의 하나는 아동과 학부모가 직간접으로 접하는 교사가 너무 많다는 데 있다. 피아노 선생님, 그리기 선생님, 한자 선생님, 방문영어 선생님, 태권도 선생님, 컴퓨터 선생님, 특기적성교육 선생님에 담임선생님까지…. 아이들의 눈이 핑핑 돌지 않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 신기하다. 지친 아이들의 입에서 피곤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공교육이 바로 서기에는 무리다. 온갖 선생님의 말씀을 다 따라하기에는 아이들의 힘이 부친다. 그러다 보니 가장 가깝고 뒤탈 없는 담임 교사의 말은 일단 접어 두는 버릇까지 생긴다. 프랑스에서는 만 세 살이면 유치학교에 입학한다. 무료 공교육에 포함된 유치학교에서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3년 동안 읽기, 쓰기를 절대로 배우지 않는다.
그들의 교육 프로그램은 말하기, 듣기, 어울려 놀기, 그리기, 만들기를 통해 자기 계발의 기초를 다진다. 사설 유치원에서 읽기, 쓰기뿐만 아니라 영어 조기교육까지 하는 한국 현실과는 교사와 첫 대면 시점부터 사뭇 다른 양상이다. 프랑스의 유치학교가 튼튼한 공교육 환경과 조건 아래 더불어 사는 인간 형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면 한국은 유치원에서부터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에 길들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과 비교, 경쟁하도록 끊임없이 요구받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기능, 효율 면과 함께 연대와 공동체 의식의 함양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천민 자본주의 사회라고 지적 받는 한국에선 더더욱 교육을 시장 논리에 맡겨서는 안 된다. 교육에서 경쟁과 효율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교육 자체가 사라질 위험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 경쟁력이라는 것도 사회구성원들이 충분히 자기 계발을 할 수 있을 때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추려내기식 교육에선 아무리 경쟁 을 강요해도 결코 얻어지지 않는다. 이제 어린 싹들의 주변에서 선생님의 수를 파격적으로 줄여 주자. 이렇게 될 때, 아이들은 반짝이는 눈으로 홀가분하게 담임 선생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