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시절 제자들이 동문체육대회를 한다기에 초청받아 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뜻하지 않게 명수(가명)를 만났다. 이제 제법 든든한 가장이 된 40대의 명수.
명수를 처음 본 것은 30여 년 전 초임지 시골학교에서였다. 언제나 말이 없고, 혼자 침묵으로 하루를 보내던 녀석이었다. 언제나 구부정한 어깨와 축 늘어진 두 팔,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동공과 어디를 보는 지 알 수 없는 시선, 갈라진 손등에 영양실조에 걸려 항상 약했던 제자였다. 명수는 정신지체가 있어 보였다.
요즘 같으면 특수교육을 받으면 좋아졌겠지만 어디 그 시절이 그런 때였나. 50여 명이나 되는 아이들과 씨름하다보면 명수는 방치됐고 수업 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그는 언제나 이방인이고 자유인이었다. 가정방문을 찾은 그의 집에서는 “명수의 담임선생님이 오셨다”는 말에 허둥대던 그의 어머니와 그 작은 집, 보잘 것 없는 세간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후 명수를 만날 때마다 보듬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의 마음에 노크를 하는 것으로 명수에게 다가갔다. 이런 나의 행동에도 언제나 눈 한 번 주지 않던 명수였지만, 어느 날 책상 위에 놓여진 사탕 한 뭉치가 명수가 준 것임을 반 친구들이 알려줬을 때 그간 속 끓여왔던 그 무엇이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명수가 내게 다가온 것이다. 여전히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지만 서로의 일상을 묻고 답할 정도의 대화는 하는 사이가 됐다.
바로 그 명수가 이제 한 여자의 남편으로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 내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시골에서 농사도 지으며 그렇게, 그렇게 살고 있다는 명수에게 한마디 건냈다.
“애는 있어?” “선생님 애기가 있으면 좋겠는데 잘 안 생겨유.”
마음이 아팠다. 어릴 때 못 먹고 자란 것이 원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그 때 잘해주지 못한 것이 나무 안타까웠다. 행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내내 맑은 명수의 눈망울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