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농산물을 학교급식에 사용토록 규정한 광역자치단체의 조례는 무효라는 최근 대법원 판결로 '학교급식 조례안'에 제동이 걸렸다.
이번 판결에 대해 사회 일각에서는 우리 농산물에 대한 범국민적 선호 정서보다는 법리적 판단을 중시한 결과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미 조례를 제정한 서울 제주 경기 전북 충북 경남 등 광역단체는 물론 기초단체나 시민단체 차원에서 추진되는 학교급식조례 제정 운동 역시 방향 전환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 왜 무효판결 났나 학교 급식때 우리 농산물을 사용하도록 법으로 규정하자는 움직임은 2001년부터 본격화됐다.
식중독 및 식습관 왜곡 등 급식사고가 빈번한 현실에서 친환경적인 우리 농산물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자는 취지에서 였다.
광역.기초의회 역시 조례가 제정되면 일선 학교를 통해 농산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례 제정에 적극적이었다.
이런 와중에 대법원 3부는 지난 9일 전북도교육청이 전북도의회를 상대로 낸 학교급식조례 무효확인 청구소송에서 "우리 농산물을 사용하는 학교 급식업체를 지원한다는 전북도의회의 조례는 수입산의 '내국민 대우 원칙'을 명시한 관세 및 무역에관한 일반협정(GATT)에 어긋나므로 효력이 없다"며 원고승소 판결했다.
국제조약은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므로 취지에 어긋난다면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 판결 따른 영향 이번 판결에 따라 전국 16개 광역의회 중 부산과 강원을 제외하고 이미 조례가 제정된 14개 의회를 비롯한 82곳과 입법예고된 63곳의 기초자치단체에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기초자치단체는 광역자치단체와 달리 GATT의 적용을 받지 않지만 광역자치단체의 예산지원을 받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판결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의 경우 철원에서 이미 조례가 제정돼 시행중에 있고, 도를 비롯해 춘천 원주 등에서는 기초의회와 시민단체 차원에서 제정을 추진 중이지만 판결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경기도 등은 향후 추이를 보면서 적절하게 대응한다는 방침이며, 전국 처음 조례가 제정돼 올해만 179억원의 관련 예산이 지원되고 있는 전남지역은 앞으로 예산지원이 곤란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전북도는 곧 의회를 소집, 학교급식지원 조례에서 '우리 농산물'이라는 표현을 삭제하는 등 조례정비에 나서기로 했으며, 우리 농산물 조항을 조례에 명시한 서울 경기 충북 경남 제주도 등 광역자치단체도 같은 작업을 벌일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각 지자체는 이번 판결로 인해 조례가 폐지되더라도 우리농산물의 학교급식이 당장 중단되거나 값싼 중국산 농산물이 몰려드는 사태는 벌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례에 '우리 농산물'이라는 표현이 삭제돼도 '친환경' 혹은 '품질좋은 우수 농산물' 등의 표현으로 충분히 본래 의미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협정 자체가 기초단체가 아닌 광역단체까지로 한정돼 있고 교육청이나 학교 모두 가능한 한 국내산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북도교육청은 이날 대법원 판결대로 '우수농산물 용어'를 사용하되 실제로는 우리 농산물을 사용토록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점차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싼 우리 농산물 대신 값이 싼 수입농산물로 대체되고 비중도 높아져갈 것이라는 이른바 '시장논리'가 고개를 들 가능성이 높다.
◇ 각계 반응 대법원 판결에 대해 정부는 반색했고 교육 및 시민단체는 거세게 비난하는 등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전국민중연대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은 12일 "대법원의 결정이 아이들의 건강권을 박탈하고 세계무역기구(WTO)체제에 지나치게 얽매인 반농업적 판결로 강대국의 눈치때문에 국민 밥상은 돌보지 않는 한심한 처사"라며 대법원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판결 직후 성명을 통해 "식량 자급률 25.3%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현실에서 식량 주권을 지켜내고 농업,농촌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 잘못됐다는 판결을 납득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도 "대법원이 우리 농산물 학교급식 법제화를 무효로 판결한 것은 전국의 300만 농민과 한국 농업에 대한 말살책에 다름없다"며 대응방안 모색을 천명했다.
반면 우리 농산물로만 급식을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해 온 교육청이나 학교 관계자들은 우리농산물 급식 조례가 GATT 협정 위반이란 사실을 수차례 알렸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교육부도 '우리 농산물'이라는 표현을 '우수 농산물' 정도로 바꾸면 값싼 농산물이 학교 식탁에 오르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 향후 과제 시민과 학부모들은 최근 중국산 농수산물에서 발암 의심 물질이 잇따라 발견됨에 따라 수입 농산물의 안전성을 의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교육당국 차원에서 불안감을 해소시킬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또 학교에서 부식재료를 구입할 때 장부에 원산지 등을 명확하게 기록해 저질 외국산 식재료가 식탁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는등 제도적인 뒷받침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다.
전농 강원도연맹 장동화 회장은 "이번 판결로 조례제정이나 시행을 앞둔 일선 시.군이 위축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며 "안전한 급식의 제공이 우리의 교육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정부가 깨달아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