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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기고] 서·논술형 평가 속도보다 여건이 먼저

인공지능이 순식간에 정답을 내놓는 시대에, 정답을 고르는 능력만으로는 미래사회에 필요한 역량을 기르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실제 교실에서도 학생들은 질문을 깊이 탐구하기보다 정답을 빠르게 찾는 데 익숙하다. 사고 과정과 논리적 표현 능력을 평가하는 방향은 분명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아직 준비 안 된 교실

그러나 서·논술형 평가를 운영해 보면 정책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 적지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 가장 큰 문제는 피드백이다. 서·논술형 평가의 핵심은 학생의 사고 과정을 살피고 부족한 부분을 짚어주며 성장을 돕는 데 있다. 하지만 고교 교사 1명이 여러 학급에서 100명이 넘는 학생을 가르치고 평가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 학생의 답안에 10분만 써도 100명 기준 16시간이 넘는다. 지필평가와 수행평가가 반복되면 부담은 더욱 커진다. 결국 피드백은 사라지고 점수만 남는 평가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채점과 민원도 현실적인 벽이다. 같은 문항을 채점하는 교사들 사이에서도 기준을 두고 의견이 갈리고, 학생들의 답안은 예상보다 다양하다. 수학 서술형만 해도 풀이 방향은 맞지만 계산에서 실수한 답안, 정답은 맞지만 논리가 비약된 답안에 몇 점을 줄지를 두고 동료 교사들과 한참을 논의하곤 한다. 평가 관련 민원이 이어지지만 정당한 평가권을 행사한 교사를 보호할 장치는 부족하다. 1~2점 차이가 대입 결과를 좌우할 수 있는 수능이라면 부담은 더욱 커질 것이다.

 

수업 기반도 충분하지 않다.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피드백을 받아 고쳐 쓰는 경험 없이 시험부터 바뀐다면 그 공백은 사교육이 메울 가능성이 크다. 가정 형편에 따라 교육격차가 커질 수 있다. AI 채점도 신중해야 한다. 동일한 채점 기준과 학생 답안을 서로 다른 AI에 입력해 봤지만 서로 다른 점수가 나왔다. 하나의 사례만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으나, 채점의 일관성과 신뢰성을 충분히 검증하지 않은 채 고부담 평가에 도입하는 것은 위험하다.

 

정책에는 지켜야 할 순서가 있다. 먼저 교사가 답안을 충분히 읽고 피드백할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학령인구 감소를 교원 감축의 근거로만 삼지 말고 학급당 학생 수를 줄이고 적정 교원을 확보하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행정업무를 덜어 수업과 평가에 집중할 시간도 보장해야 한다. 교과별 채점 지침과 공동 채점 체계, 이의신청 절차를 정비하고 교사의 평가권을 보호할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정책 도입 현장 목소리 반영부터

도입도 단계적이어야 한다. 초·중학교부터 생각을 말하고 쓰는 수업 문화를 정착시키고, 고교 내신에서 경험과 신뢰성을 쌓은 뒤 국가 단위 모의평가로 채점의 공정성을 검증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책 설계에 현장 교사의 목소리가 반영돼야 한다. 답안이 얼마나 다양한지, 공정한 채점에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지, 어떤 상황에서 민원이 생기는지는 교실의 교사가 가장 잘 안다. 현장을 배제한 정책은 학교에 또 다른 부담만 떠넘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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