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못 바꿉니다. 제 모교인 보인고를 학생들이 아침에 눈을 비비면 가장 먼저 달려오고 싶은 곳, 학부모가 내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고객 만족 1등 학교’로 만드는 것이 제 마지막 소명입니다.” 자율형 사립고의 성공 신화를 다시 쓰고 있는 서울 보인고 김석한 이사장의 말이다.
1908년 개교한 보인고의 변신은 2004년 김 이사장의 취임과 함께 시작됐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현실에 안주하면 미래가 없다’라는 판단 아래 2007년 상고에서 일반고로 전환한 데 이어 2011년 자사고 전환이라는 대담한 결단을 내렸다. 이후 사재 등을 털어 무려 320억 원을 학교 환경 개선에 쏟아부었다. 낡은 교실을 전면 개보수하고, 현대식 체육관을 신축했으며, 학생들을 위한 최첨단 학습시설을 갖췄다.
보인고가 20여 년 만에 명문 사학으로 자리 잡은 배경에는 ‘성적 이전에 사람을 본다’라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 학교가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가치는 인성이다. 실제로 학교장 추천이나 각종 포상 과정에서도 성적보다 3년간의 학교생활 태도와 공동체 안에서의 품행을 우선 살핀다. 이 같은 원칙은 보인고 교훈인 ‘날로 새롭게, 바르게 살자, 베풀며 살자’에 그대로 담겨있다. 김석한 이사장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보다 제대로 된 인성을 갖춘 학생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근본”이라며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바르게 살 줄 모르면 학교의 이름으로 추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성을 중시한 교육은 학업 성과로 이어졌다. 대학 진학 실적은 가히 독보적이다. 2021학년도 9명이었던 서울대 합격자 수는 매년 급증해 2025학년도에는 38명을 배출했다. 이는 국내 유명 외고 등 쟁쟁한 특목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전국 TOP 5 안에 드는 수준이다. 연세대와 고려대 합격자는 92명, 의학계열 합격자는 무려 75명에 달한다. 학교 측이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진학률의 질’이다. 이 학교 김범두 교장은 “우리는 최상위권 엘리트만 뽑아 실적을 내는 학교가 아니다. 중상위권은 물론 하위권 학생들까지 성적을 끌어올려 서울 유명 대학에 보낸다”며 “재학생 기준 진학률은 서울 지역 자사고 중에서도 압도적 1위”라고 강조했다.
‘수능 판박이’ 훈련과 80%가 참여하는 ‘심야 공부방’
여기에는 보인고의 ‘실전’ 위주 학습시스템이 원동력이 됐다. 매주 토요일마다 수능과 똑같은 문항 수와 시간 엄수는 물론 실제 수능 시험장 종소리까지 재현한 ‘자체 모의고사’를 실시한다. 양궁 국가대표팀이 올림픽을 앞두고 실제 대회장과 똑같은 환경에서 훈련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첫해 20명으로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현재 130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만큼 호응이 높다.
야간 자율학습의 경우 전교생의 80%가 밤 9시 30분, 길게는 11시까지 학교 공부방을 지킨다. 단순히 자습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내 최첨단 실험 기자재를 활용해 ‘용수철 탄성 계산’ 같은 주제로 개인 연구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것이 곧 학생부 종합전형의 강력한 재료가 된다. 또 보인고가 자체 개발한 ‘보인 AI 앱’은 학생의 모든 데이터를 누적 관리해 클릭 한 번으로 대치동 고액 컨설팅보다 정확한 리포트를 뽑아낸다.
입시의 모든 것이 정규 교육활동을 통해 해결되니 학부모들은 학원 셔틀을 할 필요도, 사교육비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는 게 학교 측의 설명이다.
축구 명가(名家)답게 보인고가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운동하는 학교’라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게 1년 내내 전교생이 참여하는 ‘반 대항 축구 리그전’이다. “우리 학교 축구 리그는 단순히 공을 차는 수준이 아닙니다. 잘하는 A팀과 조금 서툰 B팀으로 나눠 전교생이 한 명도 소외되지 않고 그라운드를 누빕니다.” 김 교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축구 리그는 전적으로 학생들이 운영한다. 학생 스스로 운영위원회와 홍보위원회를 조직하고 경기 심판까지 맡는다. 심지어 억울한 판정을 막기 위해 직접 VAR(비디오 판독) 영상을 돌리고, 경기 하이라이트를 유튜브에 중계할 정도로 짜임새 있다. 이뿐 아니다. 축구를 못 하는 학생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농구와 피구 리그를 별도로 운영해 모든 학생이 땀 흘리며 성취감을 느끼게 배려한다.
점심 식사 후 전교생이 20분간 낮잠을 자는 ‘오침 시간’을 운영하는 것도 보인고의 오랜 전통이다. “잠을 참아가며 멍한 머리로 앉아 있는 건 효율이 없습니다. 푹 자고 맑은 정신으로 강의를 들어야 총명해집니다.” 김 이사장의 이러한 결단은 보인고 교실에서 ‘잠자는 학생’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9단계 전형으로 뽑은 우수 교사진 … 교사를 위한 ‘캡슐 호텔’까지
교사들의 헌신적인 연구도 빼놓을 수 없다. 오양욱 교감은 인터뷰 도중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3학년 부장교사가 단톡방에 내년도 대입 입시 요강을 분석한 결과를 올려놓았다”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선생님들 스스로가 학생들을 위해 자료를 찾고 아이디어를 낸다”고 말했다.
교사들이 이처럼 남다른 데에는 이유가 있다. 보인고는 ‘교사가 곧 학교의 경쟁력’이라는 신념 아래 어느 학교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채용 과정을 거친다. 서류전형부터 시강(수업 시연), 면접까지 무려 9단계를 통과해야 교사가 된다. 김 이사장은 “한 번은 15명 선발에 1,250명이 지원했는데,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이력서를 검토했다”며 “내 아버지가 부탁해도 실력이 없으면 안 들어준다는 배수진을 쳤다”고 술회했다. 그는 “교사 선발에서도 실력은 기본 조건이고, 학생과 동료를 대하는 태도와 인성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고 덧붙였다.
어려운 관문을 뚫고 보인의 가족이 된 교사들에게는 전폭적인 지원이 뒤따른다. 학교는 교사들을 위해 AI 교육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AI 워크스페이스’를 구축 중이며, 학생 지도에 쌓인 피로를 풀 수 있는 ‘캡슐 호텔’ 식 휴식 공간도 마련할 계획이다. 이들 외에도 남들이 부러워할 수준의 지원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학교 측은 ‘영업 비밀’이라며 더 이상의 공개를 꺼렸다.
보인고에는 영업 비밀이 또 하나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교육시스템이 바로 그것이다. 보인고는 코로나 팬데믹 이전부터 AI 기반 학습관리와 실시간 쌍방향 원격수업 시스템 구축에 나섰다. 이 덕분에 2020년 코로나로 전면 등교가 중단됐을 당시에도 외부 플랫폼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시스템으로 전 과목 실시간 수업을 진행했다. 고화질 기자재와 대용량 전용망을 선제적으로 구축해 ‘온라인에서도 오프라인과 같은 수업’을 구현했고, 이 과정에서 축적된 노하우는 서울시교육청과 다른 학교 관계자들이 직접 찾아와 벤치마킹할 정도로 주목받았다. 실제 교육부나 교육청의 AI 시스템보다 월등하다는 평가다.
김 이사장은 인터뷰 끝 무렵 보인고를 영국의 이튼 스쿨처럼 세계적 명문으로 키우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그는 “학교 부지 1만 평을 지하화·지상화하여 상업시설 수익을 내고, 그 돈을 온전히 인재 양성에 쏟아부어 대한민국을 이끌 리더들을 키워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기업가로서의 도전 정신과 모교에 대한 애정 가득한 보인고가 ‘우일신(又日新)’의변화를 어디까지 이어갈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