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에 자리한 백석고등학교는 1992년 개교했다. 일산 신도시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고등학교다. 2000년대 초반 ‘비평준화’ 체제 속에서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고로 꼽혔다. 한 반에 절반 이상이 소위 SKY 대학에 합격할 정도로 대학 입시 성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한 일간지가 주관한 전국연합 학력경시대회에서 전국 1위를 차지한 것은 지금도 회자되는 기록이다.
당시 백석고에서 평교사로 근무했던 김영인 교장은 그 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교무실 앞에는 선생님에게 질문하기 위해 줄을 선 학생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희미한 복도 불빛에 의지해 책을 펴고 있었다”며 “특히 국어·영어·수학·과학 같은 주요 과목 질문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며 “지금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회상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백석고는 여전히 지역의 대표적인 명문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난달 백석고는 전국에서 단 25개교만 선정된 자율형공립고 2.0(이하 자공고)에 이름을 올렸다. 자공고는 학교가 지자체·대학·기업 등과 협약을 맺고, 지역 자원을 활용해 자율적인 교육모델을 운영하는 제도다. 자공고 지정은 백석고가 단순히 ‘과거의 영광을 이어간다’는 차원을 넘어, 앞으로의 교육혁신을 이끌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실제 백석고는 자공고가 되면서 AI 교육에 특화된 학교로 탈바꿈한다. 교과수업은 물론, 동아리와 방과후활동까지 AI를 활용한 교육이 이뤄진다. 한국항공대, 경기 북부 AI 캠퍼스 등과 손잡고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다. AI 활용교육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고 교육과정을 운영함으로써 사실상 국내 유일의 ‘AI 특목고’나 다름없는 역할을 하게 된다.
김 교장은 “AI는 이미 학생들의 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10년, 20년 뒤 사회는 지금과 전혀 다를 것”이라며 “공교육 안에서 AI 중심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것은 시대적 과제”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AI는 특정 전공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학생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도구로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백석고는 자공고에 선정되면서 인근 초·중·고교와 연계·협력을 통해 경기 서북부 지역의 AI 교육 거점기지 역할을 하게 된다. 지역 내 학교들과 교육과정을 공유하고, 학생들이 서로 다른 학교의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개방할 계획이다. 나아가 학술제와 세미나를 공동 개최해 학생들이 함께 준비하며 자연스럽게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김 교장은 “미래 사회의 핵심 역량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능력”이라며 “학생들이 프로젝트와 협업을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을 경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학교는 학습터이자 삶터 … 지금이 행복해야 미래도 행복
지난 2020년 9월 백석고 교장으로 부임한 김 교장은 평교사 시절 고3 담임과 학년부장을 전담하다시피 한 진학전문가로 명성을 날렸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수능 출제와 검토를 2005년부터 2009까지 5년 동안 했고, 경기도교육청 주관 전국연합학력평가 출제위원·컨설팅위원·출제팀장을 역임했다.
EBS 교재 등 각종 학습서를 집필했으며,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주관 전국 사회과 교사 평가 전문성 연수를 도맡다시피 했다. 아울러 교원임용고시 출제 및 채점, 교육전문직원 선발 평가위원, 교육장 평가위원, 경기도교육청 서·논술형 평가 출제위원, 경기도교육청 교사논술동아리 회장 등 수업과 평가 분야에서 독보적인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백석고 교장으로 부임한 직후 학교구성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만들고 싶은 학교상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뒤 협조를 구했다. 그가 제시한 새로운 학교상의 핵심은 네 가지였다.
첫째, ‘집보다 좋은 학교’다. 학교가 단순한 학습의 공간이 아니라 집처럼 편안하고 안전하며 친밀한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 둘째, 교사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존재가 아니라 ‘학부모와 같은 교사’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생들의 심리와 정서까지 돌봐주는 역할을 포함해 교사는 학생 한 명 한 명을 내 자녀처럼 대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학부모는 단순히 자녀만 챙기는 존재가 아니라 ‘스승과 같은 학부모’로서 자녀가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보다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길 바랐다. 마지막으로 교육과정은 학생들이 직접 시도하고 만들어 가는 방식으로 운영되길 원했다. 즉 학교는 학생들의 요구와 참여 속에서 진정한 학습이 이루어지는 장이 되어야 한다는 비전이었다.
김 교장은 이러한 철학을 교사뿐 아니라 행정실과 급식실 직원들에게도 동일하게 강조했다. “행정실 직원도 행정으로 아이들을 돕는 교사이며, 급식실 직원도 학생을 위해 헌신하는 교육자”라며, 학교구성원 모두가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공유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교사들에게는 학교가 단순히 학습공간으로만 국한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각별히 주문했다. “학교는 아이들의 학습터이면서 동시에 삶터이다. 아이들이 지금 행복을 경험해야 미래에도 행복을 만들 수 있다”고 역설했다. 학생들에게는 학습과 삶이 공존하는 공간, 교사와 직원들에게는 삶과 배움이 함께 이루어지는 터전으로 학교가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악성 민원, 백석 하이패스로 해결 … 학부모 목소리 존중해야
그래서일까. 김 교장의 학교운영은 남다르다. 특히 교육현장의 최대 현안인 민원 대응 정책은 일품이다. 백석고는 지난 2020년부터 ‘백석 하이패스’라는 민원 대응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백석 하이패스’는 교장·교감·교무부장·행정실장 네 사람으로 구성된 민원 대응 전담팀을 일컫는다. 교사가 교육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김 교장이 주도해 만들었다. 그는 “학생들이 안전하게 교육받으려면 교사가 안전해야 한다”며 “교사들이 긴장과 불안 없이 출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학교장의 책임”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백석 하이패스는 민원의 경중에 따라 처리 방식도 달리한다. 단순한 안내는 교무부장이나 행정실장이 맡고, 좀 더 복잡한 사안은 교감이 담당하며, 원한다면 교장에게 직접 말할 수 있도록 열어 두었다. 실제로 김 교장은 매년 수차례 학부모와 학생들의 민원을 직접 듣고 해결해 왔다. 악성 민원에 대해서는 학교 차원의 적극적이고 공정한 대응으로 문제를 풀어 나간다.
악성 민원이 발생하면 해당 교사는 민원 대응의 최전선에서 제외한다. 대신 학교에 구성된 관련 위원회에서 조사와 응대를 맡는다. 예를 들어 체험학습 관련 민원은 ‘현장체험학습 활성화 위원회’가 맡아 처리하고, 모든 과정은 사실 중심으로 기록해 교장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당사자가 불필요한 감정 소모에서 벗어나고, 편견과 억측 없이 객관적인 절차가 유지된다.
더 나아가 학교는 모든 민원 처리 과정을 문서화하고, 필요하면 학부모회 대표나 학생회 임원까지 참여시키며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교사의 교육 활동권을 철저히 보장하되 동시에 학부모의 목소리도 존중하는 균형을 통해 교육공동체가 신뢰하는 학교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학교가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 되기 위해서는 교직원 간의 문화가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김 교장은 교사들에게 “곁의 동료가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은지 늘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함께 근무하는 동료의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방치하는 학교문화가 아닌 서로 손을 잡아주고 곁을 내어주는 동료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백석고는 학생들도 남다르다. 이 학교는 2021년부터 ‘학생리더제’를 통해 학생 주도 프로젝트를 교육과정의 핵심으로 삼아 운영하고 있다. 보통은 각 교과별로 담당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수업하지만, 백석고에서는 학생이 선생님이 돼 교과주제를 정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생 주도형 프로젝트를 운영한다.
수업을 하고자 하는 학생은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를 정해 교육과정부에 제안하고, 학습목표와 차시별 계획, 기대되는 학습효과까지 발표한다. 이후 담당교사의 심사를 거쳐 보완점을 반영하면 정규교과시간에 해당 내용으로 수업할 수 있다. 강좌를 개설한 학생은 홍보물을 직접 제작해 복도에 부착하고, 다른 학생들은 이를 보고 수업을 선택한다. 학년 구분이 없는 무학년제로 운영되는 것이 특징. 실제 1학년 학생이 교사가 돼 2·3학년 학생이 수업을 듣는 경우도 흔하다.
글쓰기· 낭독교육 활발 … 교사들 열정에 학부모들 감사의 눈물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함께 책 읽고, 함께 글쓰기’ 프로그램이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전쟁과 평화> 또는 <일리아드 오디세이> 같은 장편 고전을 읽고 토론하며, 이후 글을 쓰는 과정을 정례화했다. 단순히 학생만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교사와 교장까지 함께 참여한다. 이렇게 집필된 글은 매년 두 권씩 책으로 묶여 ‘하얀섬돌’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고 있다. 시·소설·에세이 등 장르의 제약 없이 학생들이 자유롭게 창작한다.
글만 쓰는 게 아니라 낭독도 강조한다. 김 교장은 “생각은 말로 나오는 것이다. 듣는 아이로 만들지 말고, 말하는 아이들로 만들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글쓰기와 낭독회·토론회를 통해 말하기와 사고를 강조하고,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 학문적 성장을 돕는다.
백석고는 불이 꺼지지 않는 학교다. 지난 2021년부터 3학년의 경우 희망 학생을 대상으로 방과후 21시까지 도서관 자기주도학습을 운영하고 있다. 방학 중에도 원하는 학생들은 오전 9시부터 17시까지 자기주도학습을 하도록 도서관을 개방한다. 올해는 특히 오전 7시부터 8시 30분까지 얼리버드학습반도 운영하고 있다.
1~2학년 학생 100여 명이 매일 도서관에서 자기주도학습을 하는 등 향학열을 불태운다. 학교 측의 열정에 학부모들은 깊은 신뢰를 보낸다. 일부 학부모들은 눈물을 흘리며 교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한다. 백석고가 전통의 명문으로 불리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