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05 (목)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라이프

[선생님을 위한 마음 챙김 철학] 대륙에 남겨진 ‘백범의 길’을 따라 걷다

 

철저한 고증, 생생한 현장성이 돋보이는 책
올해는 광복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백범의 길: 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상·하권, 아르테)는 한국과 중국의 학자와 전문가 11명이 참여하여 2년 넘게 진행한 현장 학술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에서 시작된 백범의 독립운동 여정은 항저우·자싱·전장·난징·한커우·창사·광저우·우저우·구이핑·류저우·이산·우산·구이양·치장·충칭을 거쳐 시안으로, 26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책은 당시로부터 ‘무엇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고, 변했으며, 또 사라졌는지’를 확인하고, ‘잘못 알려진 것은 바로잡고,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묻혔던 것은 들춰내고, 새로운 것은 보탠’ 결과물이다. 수많은 자료와 회고록을 참고한 것은 물론, 여러 전문가·관계자·현지인 인터뷰를 통해 확인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다. 고증이 철저하기 때문에 이 책을 길잡이 삼아 답사여행을 떠나기에도 좋다.

 

상하이 곳곳에 깃든 독립운동의 발자취
현재 상하이우정박물관 건물은 1920년대 상하이우정총국 건물이었다. 이 건물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 있다.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로 위축되었다. 1926년 12월 백범이 임시정부 수반인 국무령이 되었고, 이후 임시정부를 활성화하기 위해 의열투쟁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금이 필요했다. 


백범이 채택한 것은 해외동포들에게 편지로 후원을 요청하는 이른바 ‘편지정책’이었다. 그 결과 미주·하와이·멕시코·쿠바의 동포들이 보내 주는 후원금이 답지했다. 백범이 얼마나 감격했는지 <백범일지>에는 후원자 30여 명의 실명이 일일이 기록되어 있다. 자금은 대부분 우편환으로 송금한 것이다. 미주·하와이·멕시코·쿠바의 동포들이 보내 주는 후원금이 상하이에 답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근대적 우편 체제 덕분이었다. 


해외동포들의 후원금이 도착한 곳이 바로 상하이우정총국이었다. 당시 우정총국은 공공조계에 있었기 때문에 후원금을 수령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범이 직접 수령할 수는 없었고, 대리인을 파견하여 찾아야 했다. 상하이우정총국을 통해 들어온 자금으로 백범은 이봉창·윤봉길의 의거를 기획하여 성사시켰고, 이를 통해 임시정부는 활로를 찾았다. 

 

이봉창 의사의 뜻이 서린 건물 
상하이 와이탄 남쪽 끝에는 1934년 건립되어 현재 중국은행 빌딩으로 사용되는 건물이 있다. 그 건물 바로 옆 북측에 이보다 10년 먼저 지어진 건물이 있다. 현재는 중국공상은행 상하이지점이 들어서 있다. 1945년 이전에는 요코하마쇼킨은행 상하이지점이었다. 1931년 12월 28일, 백범은 이 은행을 통해 도쿄의 이봉창에게 거사 자금을 보냈다. 그로부터 열흘 뒤 1월 8일 이봉창은 히로히토 천황을 겨냥하여 수류탄을 던졌다. 당시 ‘백정선’이라는 이름으로 백범이 이봉창에게 돈을 보낸 영수증이 남아 있다. 

 

백정선의 요청에 따라 본 은행 도쿄 매니저에게 전보를 쳐서 기타노 쇼조(이봉창)께 100엔을 지급케 한다. 전신 비용으로 4.20달러를 받았다.(상권 p.154) 

 

오늘날 상하이를 방문하는 많은 우리나라 사람이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를 방문하곤 하지만, 이처럼 상하이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독립운동 관련 건물이 많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상하이 와이탄을 방문할 때 단순한 관광지 이상의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먼 이국에서 스러져간 청년들을 기억하며
백범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과 노동국총판을 겸임하며 독립운동에 열중하던 무렵인 1924년 6월 16일, 광저우 황푸강변에 중국 최초의 현대식 군사학교가 설립됐다.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지만 황푸에 자리 잡고 있어 황푸군관학교로 불렸다. 이곳에는 많은 한국 청년이 입교했다. 독립투쟁을 위한 군사력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학교가 해체된 1931년까지 200명 넘는 한국 청년들이 재학했다.


군관학교 생도들은 졸업하기 전에도 많은 전투에 투입되었는데, 장제스가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벌인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안장한 묘역에 한인 생도 김근제(金瑾濟)와 안태(安台)가 잠들어 있다. 김근제의 비석 앞면에는 ‘한국인 제2학생 김근제지묘’라는 붉은 글씨가 쓰여 있다. 안태의 비석 한 가운데에는 ‘안태동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비석 제일 오른쪽에 ‘한국 괴산’이라고 적혀 있다. 비석 뒷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상 기록은 1984년 묘지를 정비하면서 비석을 지탱하기 위해 뒷면을 시멘트로 발라버린 탓에 남아 있지 않다.


이들의 이름은 황푸군관학교 학생과 교직원 명부의 사망자 명단에 ‘김근제, 연령 23, 본적 한국’, ‘안태, 연령 28, 본적 한국 충청도’로 나온다. 이들의 존재는 2010년 여름 광저우 총영사관에 근무하던 강정애 박사 부부가 황푸군관학교 뒷산을 답사하고 내려오던 길에 처음 발견하여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후 수소문 3년 만에 김근제의 후손은 찾을 수 있었지만, 안태의 후손은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광저우 황푸 강변 학생묘지’를 쓴 심지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중국에 있던 많은 애국지사가 중국혁명의 완수가 곧 한국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생각에서 중국에서의 혁명 투쟁에 기꺼이 참여했다. 그리고 중국의 항일전 승리가 곧 한국의 승리라는 생각을 가진 전형적인 인물이 김근제와 안태라고 할 수 있다.”(하권 pp.94~95)

 

‘백범의 길’은 어떤 길이었나?
책에는 백범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발자취뿐만 아니라, 그 발자취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그러한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백범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투쟁이 자리한 더 넓고 자세한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백범이 걸었던 길은 혼자 걸었던 길이 아니었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은 <고향>에서 이렇게 썼다.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원래 땅에는 길이 없었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혼자서 빨리 가는 길이 아니라, 많은 사람과 함께 걸어갈 때 새로운 길, 희망의 길을 열어 멀리 갈 수 있다는 지혜다. 백범은 그 지혜를 실천했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