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환 | 부산 다대고 교감 여학생들은 옆자리 ‘짝’을 좀더 친근하게 표현하여 ‘짝지’라고 부르고 있다.(부산 지역에서 특히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들은 ‘짝지’란 말을 입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부르고 행동으로 부른다. 그들에게 있어 짝지는 그들의 정서이고 문화이다. 또 좋은 토양이며 거울이다. 그들이 짝지를 따르고 위로하고 보호하는 모습은 보기가 좋다. 때로는 찡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선생님 짝지가 너무 아픕니다.” 짝지가 아플 때, 마음이 아파, 눈시울 붉히며 친구의 입이 된다. ‘짝’이 이름 그대로 옆자리에 앉는 학생이라면, ‘짝지’는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된 단짝 짝꿍을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친구야’하거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짝지야’하고 부르는 것이 훨씬 더 정겨우며 티 없이 맑아 보이기도 한다. 여학생들은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는 일면이 있는가 하면 또 누구를 보살펴 주려는 모성애적 자질이 있다. 이 양면적 품성이 짝지에게 유감 없이 발휘된다. 짝지는 항상 그림자가 되어 어려운 자리를 풀어 준다. 등·하교시에 손을 꼭 쥔다. 선생님 책상 위에 꽃을 꽂을 때도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주고, 들킬세라 망을 봐 준다. 그리고 꽃을 두고
2004-11-01 09:00김옥주 | 경북 구미여중 교사 참으로 오랜만에 하는 서울 나들이다. 몇 녀석들에게 문자를 날렸다. “나 보고 싶은 사람 서울역에 모여” 고속열차(KTX) 환승을 위해 구미에서 차지한 자리를 내놓고 대전역에 내렸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 춘옥이에요.” 춘옥아! 그 날은 끔찍하게 더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플랫폼의 열기보다도 더 뜨거운 너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20여 년을 못 본 그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지. “선생님! 너무도 뵙고 싶었어요.” 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들으며 너의 마음깊이를 헤아렸다. 내가 대전역에 잠깐 머문다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대전역으로 달려 나왔을 기세였거든. 너의 안타까운 발자국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지더구나. “그래, 내려오는 길에 내 너를 보러 가마. ” 춘옥아, 내가 조금의 주저도 없이 그 자리에서 신탄진행을 약속할 만큼 그리도 네 목소리가 절절했었다.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있는 너였다. 그맘때 어머니의 하루해가 얼마나 짧은 줄 익히 아는 나다. 며칠 후 신탄진역에서 나는 눈물 글썽이는 너를 직접 만났지. 우리들 얘기 속에는 옛날과 지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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