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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맞벌이 부부 자녀들을 위해 종일반을 운영하는 공립유치원이 3년 사이 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1일 충북도교육청에 따르면 도내 공립유치원 235개 가운데 140개가 종일반을 운영해 59.6%를 차지했다. 이는 3년전인 2002년 62개에 비해 배가 넘는 78개가 늘어난 것이며 4년전인 2001년 40개에 비해서는 3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이 가운데 청주 산성유치원과 덕성유치원 등 8개 유치원은 오후 8시까지 종일반을 운영하고 있다. 사립유치원도 90개 가운데 70% 63개 유치원이 종일반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도교육청 관계자는 "맞벌이 부부들의 요구에 따라 종일반 운영이 늘고 있는 추세"라며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을 통해 종일반이 알차게 운영될 수 있도로 지도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방학이라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내어 관사 주변을 산책하기로 하고 우리집 꼬맹이와 함께 동행을 했다. 강화도는 유적지가 많기로 이미 알려진 역사의 고장이다. 그러기에 옛 전적지의 잔해 하나하나가 그 흔적을 말해 주곤 한다. 내가 기거하는 관사에서도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도로 옆에 낯선 사당이 있어 우연히 들려 보았다. 그 곳은 장무사 황현장군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었다. 황현 장군의 묘를 향해 풀에 가득 달려있는 이슬을 털면서 묘소 앞에 당도하여 장군의 큰 업에 고개숙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묵념을 하였다. 한 민족이 유구한 역사를 면면히 지켜 오면서 수많은 멍에를 안고 있지만, 그 속에서 민족을 위해,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몸을 헌신짝같이 바친 성인들의 자취와 얼이 담긴 유적지를 찾는 것은 그 분들의 인품이 후손들에게는 인성 교육의 장이 되기 때문이요, 역사의식을 아로새겨 조국애를 길러 가기 때문이다. 황현 제당을 관리하는 후손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황현 장군은 북방 오랑캐를 퇴치시키는 일과 왜구 토벌에 큰 공이 있는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의 17대 후손 황사영은 백서사건으로 고초를 당하였지만, 그는 황현 장군의 위대한 공적 덕에 임금께서 고초를 사면해 준적도 있다고 후손은 덧붙여 말하곤 했다. 역사의 인물을 보존하고 지켜가는 우리의 인식이 아직도 부족한지 인물의 보존에 필요한 땅이 국가에서 내려졌어도 그 땅을 잘 지켜가는 곳은 드물고, 종중의 관리로 이어지면서 서서히 사라지고 어떤 인물은 무덤이 차지하는 좁은 땅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인물들의 유적지는 현대식 가옥으로 개조된 곳도 있어 아쉬울 때도 있다. 여태껏 두루두루 다녀 역사 인물들의 자취를 찾아볼 때마다 두드러진 인물만이 그 존재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일제시대 이전에 작고하신 분들의 평가는 그가 차지하고 있는 무덤의 넓이로 추산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의 우리들의 역사는 무명의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에 의해 이룬 것이지, 결코 위대한 인물 한 사람의 힘에 의해 지켜온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후학들에게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황현 묘소 앞에 서서 아래를 보며 많은 방문객이 찾지 않은 탓인지 묘소에 이르는 곳이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지 않고 제당에 이르는 길도 잡초로 얼룩져 있는 것 같아 아쉬움만 더해갔다. 강화도 불은면쪽에 있는 역사 인물 이규보의 묘소도 찾는 이가 많지 않지만 그 옆에 제각이 있고 관리해 주는 흔적이 있어 묘소 주변에 우거진 풀들이 묘를 침범하지 않도록 잘 다듬어 놓았다. 하지만 역사의 성터와 전적지를 나타내는 곳들은 아직도 방치되어 있는 곳이 있다. 예산이 부족하다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 관리가 소홀해지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이 불현듯 느껴지기도 했다. 바캉스를 위해 도로가 미어져 짜증내면서도 휴양지 곳곳을 찾아가는 것도 여름에 맛볼 수 있는 진풍경이라 누구나 그런 환희에 젖고 싶은 생각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둔 부모와 중학생을 둔 부모님은 역사 인물 기행전을 패키지로 만들어 전국을 순례형식으로 다녀보는 것도 일거양득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인터넷에 들어가면 다 있는 것을 굳이 찾아가느냐고 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다. 역사에 알려지지 않는 인물들의 터전을. 최근에 인성교육의 부재가 온 나라를 시끄럽게 굴게 하는 우리 사회의 도덕 불감증이 이성의 불감증으로 생각하는 인물들은 많지 않는지. 바른 자녀교육에 바른 부모가 있고, 위대한 인물 뒤에 훌륭한 스승이 있음은 고금을 통해 전해오고 있는 격언이 아닌가? 황현장군의 묘소를 찾아보고 인천 영종도 해변가에 있는 영화 촬영 세트장을 찾아 보았다. “슬픈 연가”를 촬영한 곳이라는 팻말이 배에서 내려 자동차를 타고 갈 때 누구나 알 수 있게 안내판에 크게 써 놓았다. 그런데 정작 황현장군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는 강화도에 들어와도 안내판 어디에도 없다. 나 역시 관사에서 1키로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그 분의 묘소가 있는 곳을 모르고 지낸 것도 들어가는 입구 500미터 앞에도 안내판이 없다는 이유 아닌 이유를 덧붙이고 싶다. 세트장은 뭇 사람에게 알려 장사를 해야 생계를 유지해 나간다는 미명하에 우선시되는 것은 인정한다고 하자. 하지만 황현장군의 입구에 팻말 하나 없는 아쉬움에, 영종도 바닷가 모래 위에 만들어 놓은 조각공원의 조각품들이 관리 소홀로 망가지고 부서져 있는 것을 보면서, 이형기의 시 “폭포”를 연상해 보았다. 폭포의 물기둥이 떨어지는 곳의 푸른 물은 인간의 일상사에서 당하는 멍에와 같은 것이라고. 그 멍에가 있기에 인간은 고뇌하며 삶에 대한 애환를 맛보기도 한다고.
방학을 맞아 선생님들의 연수 열기가 삼복더위보다 뜨겁다. 한국교총에서도 올여름 300명의 교원들이 현장교육연구방법론 등의 연수를 받는다. 게 중에는 지방에서 올라와 하숙방을 얻어놓고 수고하는 열성파도 있다. 노력과 시간은 물론, 경제적 부담도 적지 않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모두들 학점, 또는 승진점수를 따기 위해 자발적으로 연수에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교육청에서 연수 경비를 지원받은 교원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가하면 최근 3년동안 연수를 한번도 받지 않았다는 교원들이 20%가 넘는다는 연전의 조사결과도 있었다. 현행 체계로는 승진에 관심이 없고, 연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교직생활 3년이 지나면 받게되는 1급정교사 자격연수만 받고 나면 나머지 30여년 동안을 연수한번 받지 않아도 교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실제로 그런 교원은 한사람도 없겠지만, 한마디로 승진에 목마른 사람은 스스로 돈들여 가며 우물을 파고, 싫으면 관두라는 식이다. 지식기반 사회, 평생학습 시대를 맞이하여 온 국민들이 생애교육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기업체에서는 직원연수에 명운을 걸고 투자를 아끼지 않는 이 때, 정작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교원들의 연수 체계가 이렇게 허술해서야 될 일인가? 교원 연수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만큼 정부는 교직 생애에 걸쳐 단계별로 자기가 필요로 하는 내용을 시간적, 경제적 부담없이 받을 수 있는 체제를 서둘러 갖추어야 한다. 4년 이상을 공들여 양성한 교직인재들이 2, 30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열정으로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인력관리를 해야 할 책임이 국가에 있다. 연수체제 개편에 관해서 교육부는 올해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교직 전생애에 걸친 전문성 개발에 중점을 두고 연수프로그램 개선, - 교직수행 필수분야에 대한 주기적 연수이수제 도입 추진, -연수기회 확대 및 연수비 지원 등을 계획하였다. 기실, 이같은 계획은 표현만 달리하면서 수년동안 거듭되고 있다. 문제는 실천이다. 하반기를 넘어선 이 시점에서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교육부의 답변을 기다린다.
앞으로 가짜 단속카메라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모형 무인카메라 9월까지 철거된다고 한다. 내용인즉 경찰청은 “전국의 모형 무인단속 카메라 2466대 중 경찰이 설치한 1109대를 모두 철거할 방침”이고 나머지 1357대의 모형 카메라도 조속히 철거하도록 지방자치단체와 한국도로공사에 협조를 요청할 계획이라는 것이다. 이는 모형 카메라가 교통사고 예방에는 기여하지만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 결과적으로 국민을 속이는 셈이어서 인권침해 요소가 있다는 시민단체 등의 지적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허허, 내가 너무 구세대인지, 세상이 빨리 변하는 건지? 내가 세상을 못 쫒아가는건지?” “인권이라는 단어 희한하게 갖다 붙이네….” “시민단체의 말 잘도 먹혀 들어가네.” 가치관이 급변하고 있다. 어찌보면 혼돈의 세상이다. 모형 카메라가 교통사고를 예방하여 국민들의 수많은 소중한 생명을 구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대로 두어도 괜찮을 법도 한데 철거를 한다니 아쉽기만 하다. 그것이 인권을 침해한 것인지? 인권이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 그렇다면 경찰청에 묻고 싶다. 과속을 방지하기 위하여 아파트와 사람 통행이 많은 곳, 사고 다발지역에 마치 도로의 과속방지턱처럼 보이게 한 노란색 페인트칠은 어떻게 할 것인지? 그러면 이것도 결국엔 사람을 속인 결과가 되므로 모두 없애야 되는지? 우리 교육자들은 학생들에게 가치판단을 가르치고 있다. 예컨대, 환자가 있어 의사의 정밀진단에 의해 불치의 암에 걸려 시한부 생명이라는 결과가 나왔을 때 이 사실을 환자 본인에게 알려 주어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있다. 환자의 나머지 행복한 삶을 위하여 본인에게 알리지 않고 쉬쉬하는 것이 좋은지? 거짓말은 나쁘니까, 환자의 알 권리도 있으니까, 인권을 중시하여 사실대로 알리는 것이 좋은지…. 참여정부에서 하는 일, 이번 일 뿐만 아니라 심사숙고가 부족한 듯 싶다. 대통령부터 연정(聯政)이니 대통령의 권력 이양이니, 정권을 내놓는다는 둥 헌법을 자의로 해석하고 대통령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막가는 듯한 말’을 줄줄이 하고 있다. 국민들의 살림살이를 걱정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국민이 공감하지 못하는 독선과 오만, 때로는 협박으로 들리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대통령으로서 냉철한 균형 감각을 잃고 외곬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들어 이대로 가다간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 같기만 하다. 잘하리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나라를 말아먹으라고 국정을 맡긴 국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국민을 편안하게 해 주는 대통령,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지켜주는 경찰. 이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작은 일이지만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입장에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을까? 어느 한쪽의 말만을 일방적으로 듣고 가볍게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서서 한번쯤 심사숙고해야 하지 않을까? 참여정부는 집권 반이 지나도록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아마추어 정부’라는 말을 여전히 듣고 싶을까? 참여정부는 그렇게 자존심도 없나? 리포터는 가짜 단속 카메라에서 교육을 생각하고 우국(憂國)까지 이르렀다. 교육자가 교육을 생각하고 교육에만 전념하는 세상이 그립다.
글 | 박하선/사진작가·여행칼럼니스트 불교문화의 자긍심 '아잔타와 엘로라' 불교가 인도 대륙에서 발생한 이래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곳곳에서 그 꽃을 활짝 피워 왔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그 열기가 대단하다. 하지만 정작 그 본고장에서는 오래 전에 이슬람이나 힌두교 등에 밀려서 발생지 일원에서나 겨우 피폐해진 흔적들을 부둥켜안고 명맥만을 유지해 오고 있는 형편이다. 그만큼 인도 대륙에서는 불교가 현지 사람들에게 잊혀진지 오래되었고 찬란했던 많은 문화유산들도 함께 버려지고 잊혀져 왔던 것이다. 그 버려진 불교의 문화유산 중에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석굴 군이 인도 대륙의 남과 북을 갈라놓고 있는 '데칸고원'에서 발견되어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아잔타'와 '엘로라' 석굴이다. 당시 이 두 석굴의 발견은 곧 인도 대륙 내의 불교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 주고도 남을 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인도에서 불교가 발생했다는 면모를 과시하는데 한몫을 한 셈이라고나 할까. 밀림 속에 잠들어 있던 석굴 사원 '아잔타' 아잔타 석굴이 발견된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1819년 영국 관리들이 이 데칸고원 일대에서 사냥 중에 호랑이를 쫓다가 밀림에 묻혀 있던 암벽 사이의 동굴을 발견하게 된 것인데, 그 안에는 휘황한 채색벽화, 각종 조상(彫像)들이 있었고, 그 일대가 온통 그와 같은 석굴의 집합소라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당시 거의 대부분이 매몰되거나 야생의 넝쿨 때문에 접근이 불가능하였지만 몇 군데는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영국 정부에 의해 한 차례, 인도 독립 후 두 차례에 걸친 발굴·복원이 있어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불교 유적지의 하나로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말발굽처럼 휘어진 '와고르(Waghore)' 천변(川邊)의 암벽 지대를 따라 펼쳐져 있는 이곳은 대략 500m에 걸쳐서 30개의 석굴 사원이 뚫려 있는데, 모두 자연 암벽을 뚫고 들어가면서 기둥을 만들고 불상이나 불탑을 만드는 수법으로 완성한 석굴이다. 근래에 들어서 입구에서부터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 놓고 있는데, 1번부터 26번까지가 완성된 석굴이고 27번부터 30번까지는 미완성이다. 석굴 하나 하나가 입구에서만 바라볼 때는 별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는 순간 그 엄청난 규모, 현란한 조각, 벽화들이 소문을 사실로 증명하고 있다. 당시 별다른 기계도 없었을 텐데 무슨 재주로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단 말인가! 이곳의 역사는 기원전 2세기경에 남북을 오가던 불교 승려들이 우기에 비를 피해 수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석굴 승원(비하라)과 탑원(차이타야)을 판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곳을 수행지로 선택한 것은 남북을 연결하는 교역로가 가까이에 있어서 식료품과 물자 구입이 그만큼 손쉬웠고, 교역로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어서 수행과 명상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거주해 오던 승려들이 기원전 1세기경에 돌연 자취를 감추게 되어 일시적으로 이 석굴들은 버려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초창기에 조성된 석굴이 제8, 9, 10번과 제12, 13번 굴로 이른바 소승불교 시대를 말해 주고 있는데, 이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은 제9번과 10번 굴이다. 이 시대에는 무불상 시대의 특징대로 부처님의 모습을 직접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본당 중앙에 거대한 돔을 연화대 위에 안치하였다. 그것은 그냥 종을 엎어놓은 듯한 형태로서, 높다란 천정과 장중한 안정미를 주고 있다. 또 좌우에는 회랑의 형식으로 기둥을 깎아 놓고 사람이 걸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 벽면에는 부처님의 발자취를 그림으로 표현해 놓았다. 수도승들의 노력이 이뤄낸 문화 유산 그 후 4세기에 들어오면서 다시 승려들이 이곳 아잔타에서 수행을 시작하며 석굴을 파기 시작했다. 이 시대는 이른바 대승불교 시대로 부처님이 불상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니까 석굴의 입구에 들어서면 여러 개의 기둥으로 떠 받혀 있는 큰 홀이 있고 그 뒤로 작은 감실(龕室)이 있어 그곳에 부처님을 모셔놓고 있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그 중에서 19번 굴의 불상이 특이하고 26번 굴의 거대한 열반상이 인상적이다. 이 아잔타의 석굴들은 대개 자연의 빛을 이용하기 때문에 상당히 어둡다. 특히 오전에는 거의 볕이 들지 않고 오후에야 한 가닥 석양빛이 문틈을 타고 내려앉는다. 또 이곳 아잔타에 남아있는 유명한 벽화들도 거의가 후기에 그려진 것들이다. 특히 1번 굴의 연꽃을 들고 있는 보살상은 아잔타의 벽화를 대표하고 있으며, 2번과 4번 굴에 남아 있는 석가모니의 일대기는 상당 부분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세밀함은 물론이요, 색감과 질감에 있어서도 완벽 그대로다. 원래 기둥들과 천장 그리고 벽면들마다 모두 벽화가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천장이나 기둥들에 있었던 것들은 거의가 없어지고 벽면에만 주로 남아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이것들도 훼손의 정도가 심해 아쉬움을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던 이 아잔타 석굴이 8세기에 접어들면서 불교가 쇠퇴함에 따라 모두들 어디론가 떠나버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밀림에 묻혀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낮과 밤에 돌을 깎으면서 불은(佛恩)을 생각하였을 수도승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에게 있어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욱 중요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사연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은 이 엄청난 문화유산을 남겼고, 지금은 모두 떠나고 이 자리에 없다. 이 몸이 무슨 인연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됐는지는 몰라도 그분들의 사연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덧없는 시공을 뛰어넘어 느껴 보는데는 부담이 없다. 엘로라의 대표적인 사원 '카일라사나트' 아우랑가바드에서 서쪽으로 30㎞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엘로라' 석굴은 아잔타와는 달리 시야가 확 트인 바위 구릉 지대에 조성되어 있는 34개의 석굴사원이다. 이 엘로라 석굴 또한 아잔타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6세기 이후 점차 불교가 쇠퇴해감을 틈타 힌두교와 자이나교 사원이 옆에 들어서게 되어서 약 200년쯤 후대에까지 이른다. 그래서 불교 석굴, 힌두교 석굴, 자이나 석굴이 정연하게 나열되어 있다. 아잔타의 석굴이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사로잡는다면, 이 엘로라 석굴은 그 엄청난 규모 면에 있어서 우선 사람을 사로잡는다. 그 대표적인 석굴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카일라사나트' 사원이다. 엘로라에 와서 이 카일라사나트 사원을 먼저 봐 버리면 다른 곳이 재미없어진다고 할 정도로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곳이 바로 이 힌두교 사원이다. 작은 산처럼 눈앞에 우뚝 솟아 있는 이 사원은 힌두의 신 '시바'를 상징하고 있는데 본당의 높이가 33m, 넓이가 47m에 이른다. 그리고 그 정문, 법당, 석탑 등이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고, 그 건물들의 외벽은 모두 현란한 부조와 힌두신상 등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이 엄청난 규모와 섬세함이 당시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거대한 암벽을 위에서부터 차츰 아래로 파 내려오면서 이루어 낸 이 사원은 75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완성하기까지 100년 이상이 걸렸다고 하니 수 세대에 걸친 대공사였을 것이다. 보는 이들마다 탄성을 연발하는 이 카일라사나트 사원! 인간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현장이다. 너무도 상대적이지만, 동시에 위대한… 이 엘로라 석굴을 아잔타 석굴과 비교해 본다면, 아기자기한 여성적인 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잔타이고 엘로라는 우람한 남성미를 지니고 있다. 또 아잔타가 벽화를 들고 나온다면 엘로라는 조각을 말해 줄 것이다. 이처럼 상대적인 멋을 지닌 이 두 곳을 보고 나면 실로 종교의 힘이 위대하고,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고대 불교 유적의 신비로움을 새교육 8월호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글 | 김연수/생태사진가 미조(迷鳥)에서 서산시의 상징으로 변신 흐르는 강물 위에서 다리가 붉고 긴 롱다리 수컷들이 혈투를 벌이더니 이내 짝을 지어 쌍쌍이 사랑을 나누고 있다. 희귀조 장다리물떼새가 올해도 충남 서산시 천수만의 부남호 상류에 찾아와 귀여운 2세를 낳기 위한 짝짓기에 여념이 없다. 이들은 짝짓기가 끝나면 부리를 맞대고 서로를 다시 확인한다. 몸길이 36cm에 비해 키는 67cm정도로 습지에서 잘 적응 되도록 긴 다리로 진화됐다. 날개와 등, 머리 위가 검푸른 빛깔이고 배, 목, 뺨은 흰색이다. 간척지·습지·바닷가·논·호수·삼각주 등지에 찾아와 얕은 물에서 먹이를 찾아 조용히 걸어다니다가 멈출 때는 몸을 위아래로 흔든다. 헤엄을 잘 치고 날 때는 긴 다리를 꽁지 밖으로 길게 뻗는다. 4∼8월에 3∼5개의 알을 낳는다. 물에 들어가 개구리와 올챙이·도마뱀·물고기·곤충·조개 따위를 잡아먹는다. 국내도감에는 제주 성산포나 낙동강하구에 봄·가을에 이따금씩 나타나는 길 잃은 새로 표시되어 있으나, 11년 전 이해순씨(서산농장연구원)가 천수만 상류에서 번식하는 10여 쌍을 처음 발견했다. 그 후에 매년 조금씩 늘어 한 때 100여 쌍 이상의 장다리물떼새들이 이 곳에서 둥지를 틀고 번식했었다. 천수만은 일반 농경지와 달리 모내기를 하지 않고 볍씨를 비행기로 직파했었고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벼가 어느 정도 자라기 전에는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었다. 따라서 자연습지와 비슷한 천수만 논은 이들에게는 천혜의 번식 장소였던 셈이다. 이에 서산시에서는 가창오리와 함께 장다리물떼새를 시의 상징새로 선정하였다. 환경 개발로 점점 개체수 감소 그러나 천수만의 장다리물떼새는 2002년을 기준으로 점차 줄고 있다. 2005년 6월 겨우 10여 쌍 정도가 둥지를 틀고 있다. 현대건설에서 영농하던 간척지가 일반인들에게 분양되면서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량이 증가하고, 비행기 직파가 아닌 모내기로 벼를 심고 있어 천연습지의 모양이 사라졌다. 장다리물떼새 유조(留鳥)의 먹이인 깔다구들의 대규모 무리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이 곳에 정착을 하여 매년 개체수가 불어나는가 싶더니 불과 몇 년 사이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천수만을 아끼던 사람들은 새들의 낙원 천수만이 이제는 더 이상 낙원이 아니라고 걱정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천수만 자연환경은 이렇게 급격하게 악화되었는데 개발론자들은 천수만을 산업, 위락단지로 전환시키려는 계획을 꾸준하게 추진 중이다. 급기야 지난 5월 개발이익을 맛보려는 일부 주민들까지 가세해 천수만 철새도래지를 불살라버리는 시위도 벌어졌다. 전국에 불어닥친 부동산가격 폭등의 광풍 속에서 생태보전지역으로 개발이 제한된다면 그로 인해 재산가치가 떨어진다는 땅 소유자들의 하소연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이 땅은 본디 갯벌로 그 누구의 땅도 아닌 지역주민과 갯벌생태계 속 생물들이 공유하는 삶의 터전이었다. 땅 가치하락의 손해배상책임은 자연이 아니라 정부에 있다. 아니 오히려 오염 안된 곳이 후세에는 땅의 재산가치가 몇 십 배 높을지도 모른다. 우리 땅에서 쉴 수 있도록 해야… 가냘픈 몸매로 먼 남쪽에서 긴 여행 끝에 비교적 오염되지 않은 천수만을 찾아 둥지를 쳤던 장다리물떼새들은 더 이상 이곳을 찾지 않을 것이다. 좀더 멀리 북상하여 인접한 북한이나 러시아 연해주로, 아니면 더 멀리 아무르습지로 보다 길고 험난한 여행을 할 지도 모른다. 이 땅에 둥지를 트고 번식했던 새들이 한 때 지나가다가 길 잃은 미조(迷鳥)로 기록된 조류도감이 역시 맞는 것일까? 장다리물떼새들의 천수만 번식은 역시 한여름 밤의 꿈에 지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 몇 장의 사진이 기록의 가치를 더할지도 모르겠다. *매혹적인 모습의 장다리물떼새! 8월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김연수 | 생태사진가 미조(迷鳥)에서 서산시의 상징으로 변신 흐르는 강물 위에서 다리가 붉고 긴 롱다리 수컷들이 혈투를 벌이더니 이내 짝을 지어 쌍쌍이 사랑을 나누고 있다. 희귀조 장다리물떼새가 올해도 충남 서산시 천수만의 부남호 상류에 찾아와 귀여운 2세를 낳기 위한 짝짓기에 여념이 없다. 이들은 짝짓기가 끝나면 부리를 맞대고 서로를 다시 확인한다. 몸길이 36cm에 비해 키는 67cm정도로 습지에서 잘 적응 되도록 긴 다리로 진화됐다. 날개와 등, 머리 위가 검푸른 빛깔이고 배, 목, 뺨은 흰색이다. 간척지·습지·바닷가·논·호수·삼각주 등지에 찾아와 얕은 물에서 먹이를 찾아 조용히 걸어다니다가 멈출 때는 몸을 위아래로 흔든다. 헤엄을 잘 치고 날 때는 긴 다리를 꽁지 밖으로 길게 뻗는다. 4∼8월에 3∼5개의 알을 낳는다. 물에 들어가 개구리와 올챙이·도마뱀·물고기·곤충·조개 따위를 잡아먹는다. 국내도감에는 제주 성산포나 낙동강하구에 봄·가을에 이따금씩 나타나는 길 잃은 새로 표시되어 있으나, 11년 전 이해순씨(서산농장연구원)가 천수만 상류에서 번식하는 10여 쌍을 처음 발견했다. 그 후에 매년 조금씩 늘어 한 때 100여 쌍 이상의 장다리물떼새들이 이 곳에서 둥지를 틀고 번식했었다. 천수만은 일반 농경지와 달리 모내기를 하지 않고 볍씨를 비행기로 직파했었고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벼가 어느 정도 자라기 전에는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었다. 따라서 자연습지와 비슷한 천수만 논은 이들에게는 천혜의 번식 장소였던 셈이다. 이에 서산시에서는 가창오리와 함께 장다리물떼새를 시의 상징새로 선정하였다. 환경 개발로 점점 개체수 감소 그러나 천수만의 장다리물떼새는 2002년을 기준으로 점차 줄고 있다. 2005년 6월 겨우 10여 쌍 정도가 둥지를 틀고 있다. 현대건설에서 영농하던 간척지가 일반인들에게 분양되면서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량이 증가하고, 비행기 직파가 아닌 모내기로 벼를 심고 있어 천연습지의 모양이 사라졌다. 장다리물떼새 유조(留鳥)의 먹이인 깔다구들의 대규모 무리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이 곳에 정착을 하여 매년 개체수가 불어나는가 싶더니 불과 몇 년 사이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천수만을 아끼던 사람들은 새들의 낙원 천수만이 이제는 더 이상 낙원이 아니라고 걱정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천수만 자연환경은 이렇게 급격하게 악화되었는데 개발론자들은 천수만을 산업, 위락단지로 전환시키려는 계획을 꾸준하게 추진 중이다. 급기야 지난 5월 개발이익을 맛보려는 일부 주민들까지 가세해 천수만 철새도래지를 불살라버리는 시위도 벌어졌다. 전국에 불어닥친 부동산가격 폭등의 광풍 속에서 생태보전지역으로 개발이 제한된다면 그로 인해 재산가치가 떨어진다는 땅 소유자들의 하소연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이 땅은 본디 갯벌로 그 누구의 땅도 아닌 지역주민과 갯벌생태계 속 생물들이 공유하는 삶의 터전이었다. 땅 가치하락의 손해배상책임은 자연이 아니라 정부에 있다. 아니 오히려 오염 안된 곳이 후세에는 땅의 재산가치가 몇 십 배 높을지도 모른다. 우리 땅에서 쉴 수 있도록 해야… 가냘픈 몸매로 먼 남쪽에서 긴 여행 끝에 비교적 오염되지 않은 천수만을 찾아 둥지를 쳤던 장다리물떼새들은 더 이상 이곳을 찾지 않을 것이다. 좀더 멀리 북상하여 인접한 북한이나 러시아 연해주로, 아니면 더 멀리 아무르습지로 보다 길고 험난한 여행을 할 지도 모른다. 이 땅에 둥지를 트고 번식했던 새들이 한 때 지나가다가 길 잃은 미조(迷鳥)로 기록된 조류도감이 역시 맞는 것일까? 장다리물떼새들의 천수만 번식은 역시 한여름 밤의 꿈에 지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 몇 장의 사진이 기록의 가치를 더할지도 모르겠다.
25년이 넘게 야생식물을 연구해 온 이명호 교사(의정부서중)가 최근 학생들을 위한 식물도감 《어린이 식물백과》(베텔스만 북클럽)를 출간했다. 초·중·고 교과서에 나오는 모든 식물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생화 600여종을 엄선해서 실었다. 그간 모아온 3300여종의 자료 가운데 학생들이 알아야 할 것들을 선별하고 쉽고 재미있는 설명을 붙이는데 2년여의 시간이 소요됐다. 바쁜 교직생활 중에서도 오로지 야생식물에 대한 애정으로 이뤄낸 방대한 자료와 설명에 학계에서도 귀중한 성과로 보고 있다. 사범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면서부터 식물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해 우리나라의 모든 식물을 카메라에 담고자 결심했다는 이 교사는 좀 더 나은 사진을 위해 사진 기술을 배우고, 타고 다니는 차까지도 바꿔가며 매주 전국의 산야를 빠짐없이 돌아다니는 집념을 보이고 있다. 이 교사는 개인적으로 자료를 수집하는 것 외에도 우리나라의 야생식물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매주 금요일에는 의정부에 있는 정보도서관에서 일반인뿐만 아니라 숲 해설가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며 홈페이지 ‘이명호의 야생화(www.skyspace.pe.kr)’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시(市)의 지원으로 4권의 《의정부 야생식물도감》과 5권의 《경기 북부 야생식물의 세계》를 발간했다. 특히 올 여름방학 때는 시의 지원을 받아 의정부 청소년 생태 체험교실을 4~5차례 열 계획이며, 도교육청의 지원으로 의정부시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과학교실을 계획 중이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2004년에는 의정부시로부터 학술부문 문화상을 받기도 했다. “이게 제가 대학교에서 배웠던 식물도감인데 아직도 이 책으로 공부를 하고 있어요. 참 잘 만들어진 책인데 나온 지가 20년이 넘은 것이라 이를 뛰어넘는 식물도감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대학 때부터 보아온 《대한식물도감》을 능가하는 식물도감을 만들고 싶다는 이 교사의 최종목표는 우리나라의 식물을 모두 카메라에 담아 식물도감을 편찬하는 것. 이를 위해 이미 사진을 찍은 식물일지라도 더 좋은 자료를 모으기 위해 다시 촬영을 하고, 중국과 백두산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올해에도 다시 백두산을 오를 예정이다. 이 교사는 자신의 책이 학생들에게 유용한 학습 자료로 활용될 뿐 아니라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에도 소중한 생명이 깃들여 있음을 일깨워주는 역할도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엄성용 dyddl96@kfta.or.kr
조현호 | 울산 옥현초 교사 청계천, 서울의 역사 이번 호에서는 서울의 다리를 찾아 옛 궁궐도 찾아보고 한창 마무리 공사 중인 청계천도 찾아 나서고자 합니다. 옛날 서울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도성이 둘러쳐 있고 명당자리에는 궁궐이 먼저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도성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청계천은 서울 사람들에게는 이런저런 애환이 담긴 생활의 터전이었습니다. 지금 청계천 주변에 남아있는 지명으로 청계천의 옛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종로는 도성의 중앙에 자리한 보신각종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일대는 사람들이 홍수를 이루어 운종가(雲從街)라고 불리었습니다. 마장동은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말을 팔고 사던 목마장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다동은 다방골로 불렸는데 주로 광교를 중심으로 생활하던 민중들의 주거지였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중인들은 장통교 및 수표교 일대에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관수동은 관수교에서 유래하는데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장교동은 장통교에서, 수표동은 수표교에서, 무교동은 모전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청계천 일대에는 이렇듯 다리와 관련한 지명이 많습니다. 서울에 도읍을 정한 이래 서울 사람들의 생명수로, 배설구로, 위정자들의 정치적 무 대로 활약했던 청계천이 어느 때부터인가 빈곤과 비위생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복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오는 10월 1일이면 약 6킬로미터에 이르는 청계천이 다시 태어납니다. 청계천의 역사는 곧 서울의 역사였고, 서울의 현재이고, 서울의 미래입니다. 청계천의 다리들 청계천의 원래 이름은 ‘개천(開川)’입니다. 이 말에는 자연 그대로의 하천을 파서 새롭게 물길을 정비했다는 개척정신이 숨어있습니다. 현재 서울시장이 저돌적으로 추진하는 복원사업 또한 또 다른 개척의 역사가 아닐까 합니다. 지금 쓰고 있는 청계천이란 말은 1910년대 이후 붙여진 왜색 짙은 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복원을 진행하면서도 지금까지 약 90년 동안 공식적인 하천명칭이었고, 어의가 나쁘지 않고, 혼란을 야기한다는 이유로 청계천이란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량포가 일제에 의해 중랑천이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는 책에는 백악·인왕·목멱산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도성 가운데를 가로 지나서 세 수구(水口)로 나가 중량포(中梁浦)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개천에 있던 다리로 송기교, 장통교, 태평교, 혜정교, 대광통교, 통운교, 연지동교, 동교, 광제교, 하량교, 영풍교, 송첨교, 영도교, 제반교, 청파신교, 경고교, 홍제교 등이 보입니다. 그중에서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 관수교, 오간수교, 영도교 등은 옛 이름을 되찾고 새로운 다리로 탄생합니다. 이에 반해 삼일교, 배오개다리, 새벽다리, 나래교, 버들다리, 맑은내다리 등은 새로 만들어낸 이름입니다. 청계천 발굴과정에서 드러난 광통교지, 수표교지, 오간수문지를 합한 ‘서울 청계천유적’은 지난 3월 25일자로 사적 제46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당시 토목기술 수준을 알 수 있고 아울러 도시기능의 확대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정월 대보름에 다리를 밟아주면 그해 재앙을 받지 않고 각기병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답교놀이가 성행하였습니다. 청계천에서 광통교(廣通橋), 즉 광교(廣橋)는 정월대보름에 답교놀이가 성행했던 곳입니다. 대보름이면 동네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나와 청계천의 다리를 밟고 연날리기를 하였는데, 젊은 남녀가 깊은 밤까지 나돌아 다님으로써 풍기문란을 이유로 금지하기에 이른 적도 있답니다. 이 다리에 쓰인 돌들은 태조의 계비 강 씨의 능을 옮기면서 당초 묘에 썼던 것들이라 합니다. 광통교는 ‘광통방에 있던 크고 넓은 다리’라는 의미인데 성종임금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루는 성종 임금이 달 밝은 밤에 평복 차림으로 광교를 찾았습니다. 마침 다리 밑에는 경상도 흥해 땅에서 올라온 사내가 보퉁이를 짊어진 채 다리 밑에서 하루 묵으려던 참이었지요. 신분을 속인 임금이 자초지종을 들어본즉, 그 사내는 임금이 어질다 하여 죽기 전 꼭 알현하고자 어렵게 서울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사내의 고장에서 생산되는 해삼과 전복도 정성들여 준비했지요. 내가 요순임금이라도 된단 말인가, 성종은 자신을 이첨지라고 소개하고는 이틀을 기다리면 임금을 알현하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임금님을 만나려면 벼슬자리가 있어야 하는 법, 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성종은 그에게 충의초사라는 벼슬을 하사합니다. 얼떨결에 벼슬도 받게 된 이 사내가 임금님께 인사를 드리려 궁에 들어가니 자신이 알고 있던 이첨지가 바로 그토록 뵙고자 하던 임금님이 아니었겠습니까. 임금을 만나기 위해서 며칠을 걸어 찾아왔던 순박한 시골 사내는 광교의 인연으로 금의환향하였답니다. 청계천 일대에는 큰 시장이 여럿 있습니다. 방산종합시장, 광장시장, 평화시장, 신평화시장, 세운상가, 동대문 시장 등. 그중 평화시장은 1970년 11월 23일, 피복공장 재단사로 일하면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항변했던 전태일의 이야기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는 나래교에서 오간수교에 이르는 거리를 전태일거리로, 버들교를 전태일교로 바꿔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고향 잃고 이산가족으로 수표교(水標橋)는 세종 때 놓인 다리입니다. 치수를 위해 수중지석표(水中之石標), 즉 수표를 설치하였는데 그래서 수표교입니다. 지금 수표는 세종대왕기념관 마당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수표교는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로 철거되어 현재 장충공원에 옮겨 놓았습니다. 영조 때는 수표교 북쪽 냇가에 준천사(濬川司)라는 관청을 두어 토사를 걷어 둑을 쌓게 하고 양쪽 언덕에 버들을 심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습니다. 이 때 쌓아놓은 모래가 긴 뱀처럼 쌓여 있어서 현재 장사동(長沙洞)이 유래하였으며, 쌓아놓은 모래가 산을 이루었는데 그곳에 꽃을 심으니 향기로운 산이 되었다는 데서 방산동(芳山洞)이 유래하였습니다. 지금도 가운데 교각 한 곳에는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 새겨두어 준천사업을 하는 기준점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장희빈의 집이 수표교 인근이었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수표교 건너에 왕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이 있었답니다. 하루는 숙종이 영희전을 가러 수표교를 건널 때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었습니다. 그 바람 때문에 떨어진 발을 창가에 걸어놓던 장희빈과 눈이 마주쳤다는 것 아닙니까. 두 사람의 만남이 수표교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서울시에 문의해 보니 수표교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원위치로 복원할 계획이랍니다. 다리를 관찰해 보면 멍엣돌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한 것이 방형의 다른 석교와 차별화 되고 특히, 교각을 이루는 위아래 두 돌기둥이 물살을 향해 마름모 모양으로 틀어져 있어 물살의 저항을 막으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아름드리 성장한 나무를 싹둑 잘라 만든 것처럼 자연스런 조형미가 돋보입니다. 민간의 다리이지만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난간이 있어서 한껏 품위 있어 보이네요. 이 수표교는 청계천 복개시 유일하게 살아남아 이건된 다리로 홍수를 대비한 수표를 두고 준설을 위한 지표까지, 게다가 빼어난 외모까지 더했으니 청계천의 대표교량이라 해도 무난할 것입니다. 비록 제 살던 고향을 잃고 타지에 옮겨지고, 수표마저도 딴 곳에 시집보내 이산가족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금천(禁川)너머 임금님이 이제 우리 궁궐 속 다리를 찾아갑니다. 경복궁 근정전 가기 전에 영제교를 건너야 합니다. 다른 궁궐의 다리와 달리 다리 양 옆으로 돌짐승이 두 마리씩 떡 버티고 물길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독특합니다. 해태일까, 사자일까, 다른 짐승일까. 사람들은 그냥 서수(瑞獸)라 일컫습니다. 혀를 날름거리고 입맛을 다시는 놈도 있습니다. 사악한 것은 아예 침범을 마라며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제법 진지합니다. 엄지기둥 네 곳에는 주작으로 보이는 동물이 조각되어 있지요. 경복궁 경회루는 그 규모면에서나 역할 면에서나 경복궁의 자랑입니다. 이름도 끝내 줍니다. ‘경회(慶會)’라, 덕있는 임금과 충정심 많은 신하들이 함께 국정을 논하고자 하니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무절제한 절대 권력에 의해 기쁨의 정도가 왜곡되어 ‘흥청망청’이란 말이 유래되기까지 한 곳입니다. 이 경회루는 바깥쪽에 사각 돌기둥이 서고 안쪽에 둥근 기둥이 서 있습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말해 주고 있지요. 작은 우주인 이 인공섬에 닿으려면 동쪽에 있는 돌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금천 건너 임금님 나라에 들어왔어도 다시 다리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 곳, 경회루의 몸값이 여기 있습니다. 경복궁 뒤편에 자리한 향원정도 방형 연못에 둥근 섬을 두어 그 위에 만든 정자입니다.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취향교라는 나무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취향교(醉香橋), 향기에 취해 다리를 건너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환상적인 궁궐생활일까 마는 실은 아픈 역사가 배인 곳이랍니다. 원래 취향교는 향원정과 건청궁을 잇는, 그래서 북쪽으로 난 다리였습니다. 하지만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죽음을 맞고 다리는 전쟁 와중에 사라져 버립니다. 건청궁이라는 원래 주인을 잃고 관광객을 새 주인으로 맞아 새롭게 남쪽으로 지은 것입니다. 아름답기만 한 취향교와 향원정에는 이렇듯 우리를 몸서리치게 하는 슬픈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창덕궁에는 금천교(禁川橋 혹은 錦川橋)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궁궐내 다리를 통틀어 금천교라 이르는데 하늘같은 임금님이 계시는 성역임을 말해 줍니다. 창덕궁 금천교는 남북 양쪽에 귀면을 새겨두고 남쪽에는 귀면상 아래에 해태를 닮은 석상을 두고 북쪽에는 현무로 추정되는 석상을 두었습니다. 멍엣돌마다 공하(蚣蝦)로 보이는 용을 돌출시켜 놓았습니다. 공하는 범공(帆蚣)이라고도 하는데 용의 아홉 아들 중 물을 좋아하여 다리 기둥에 세우는 녀석을 말합니다. 흔히, 이무기돌[龍頭石]이라고 하지요. 한편, 창경궁에 있는 금천교인 옥천교(玉川橋)는 그 형태와 구조는 창덕궁의 것과 흡사하지만 창덕궁의 거북상과 해태상과 달리 금천을 바라보며 수호하는 동물상은 없고 받침돌만 남아 있습니다. 경복궁 근처 서울지방경찰청 옆에는 종침교(琮琛橋) 표지석이 있습니다. ‘종침교-조선 성종때 우의정을 지낸 허종과 허침 형제가 갑자사화의 화를 면한 일화가 얽혀있는 경복궁 입구 다리터’라고 안내되어 있습니다. 성종 때 유명한 재상 허종(許琮)과 그의 아우 허침(許琛)이 연산군의 생모 윤 씨를 폐출할 어전회의에 참석하러 가다 종침교에 이르러 다리 밑으로 일부러 굴러 떨어져 회의에 불참하게 됩니다. 성종이후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이날 회의에 참여한 대신들을 가려 참화를 맞게 하는데 이른바 갑자사화입니다. 고의적으로 회의에 불참한 두 형제는 무사하였지요. 그들의 이름을 따서 종침교라 한 것입니다. 물은 흘러 살곶이로 살곶이다리는 한양대학교 인근에 있습니다. 세종 2년(1420)에 가교 공사를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성되었습니다. 현재 일부만 옛 모습이 남아있네요. 살곶이다리를 전관교(箭串橋)라고 합니다. 전관교란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위치하여 ‘물살이 세다’는 물살의 ‘살’과 뾰족하게 튀어나온 곳을 이르는 ‘곶’이 합쳐진 곳에 위치한 다리를 말합니다. 이 다리를 제반교(濟盤橋)라고도 함은 어느 스님이 이 다리를 놓고 난 후 그 탄탄함이 반석과 같다하여 유래합니다. 남아있는 멍엣돌을 보면 홈이 파져 있어 귀틀석이 빠지지 않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이렇게 물살이 센 곳의 뾰족한 땅이라는 의미의 살곶이[箭串坪]는 선조 때 무사들이 매를 사냥하며 심신을 단련하던 곳으로 태조 때는 응방(鷹坊)이라 하여 매 사냥을 위한 기관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응봉산이나 매봉산의 지명이 이곳이 옛날 매사냥 터였음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한성부」에서는 ‘국도의 동쪽 들로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 물과 풀이 매우 넉넉하고 주위는 둑으로 둘렀는데, 나라 말을 기르며 넓이가 34리이다. 처음에는 나무우리를 만들고 해마다 개수하니 백성은 이속들의 농간질에 피폐하고, 말도 도둑맞아 도망갔는데, 명종조에 와서 상진이란 자가 정부에 건의하여 돌을 쌓아 제방을 만들고 냇물이 흐르는 곳에는 철색으로 열고 닫게 하니, 그 후로 폐단이 제거되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이 다리는 난간이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난간은 격식을 갖춘 다리에만 세웠는데 살곶이다리는 민간의 다리였기에 난간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수표다리가 난간을 둘렀던 것과 대비되는군요. 현대식 다리를 달리는 지하철 소리에, 자동차 소음 소리에 지칠 만한데 오늘도 서울사람들에게 넉넉한 인심을 베풀고 있습니다. 어떻게 평가받을까 며칠 후면 아이들이 성취도평가를 치른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평가하는 것은 교사의 몫입니다만, 교사평가제가 도입되면 아이들이 교사를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사평가제, 누가 누구를 평가하겠단 말입니까. 청계천 복원사업을 두고 다양한 평가가 쏟아질 것입니다. 정답이 없는 평가가 되겠지만 점차 순기능이 더 많이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물이 흐르고 물고기가 돌아오고 다리 이름을 되찾게 된 것은 매우 흡족합니다. 이왕이면 이름까지도 ‘개천’이나, ‘맑은 내’ 라고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말입니다.